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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벽 쌓기 ‘사생활의 역사’

  • 진중권 칼럼니스트,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 mkyoko@chol.com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에 벽 쌓기 ‘사생활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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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장에 마련된 숙소에 살던 노동자에게 사생활이란 있을 수 없었다. 공장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기업주의 사적인 영역이었다. 한국에서 공권력의 투입은 주로 자본가를 위해 노동자에 대항하여 이뤄지지만, 기업주가 공장을 자신의 ‘집’으로 생각했을 때만 해도 상황이 달랐던 모양이다. 그 시절에는 외려 노동자들이 사생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공장으로 공권력을 투입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부르주아들이 한때 귀족계급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되는 것을 거부했듯이, 19세기 말에 이르러 노동자들 역시 기업주에게 인격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노사관계가 국가적 사안이 되면서 공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시작된다. 공장은 이제 법의 지배를 받는 공적 영역이 되고, 여기서 할 일을 마친 노동자는 이제 가정으로 돌아가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노동자도 드디어 부르주아처럼 사생활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잘 만났네. 내 자동차를 저기에 두었으니 자네가 오늘 닦아주었으면 고맙겠네.” “죄송합니다만 사장님, 단체협약에는 그런 규정이 없는데요.”

같은 서구라 하더라도 사적인 것에 대한 관념은 나라마다 다르다. 클린턴과 르윈스키의 관계는 미국에서는 공적 검증의 대상이 되나, 유럽에서는 사적으로 보호해야 할 영역으로 간주된다. 언젠가 어느 방송에서 독일의 콜 총리에게 미국의 정치에서 대통령의 사생활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역겹다”고 잘라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서구라고 해서 모두 ‘사생활’을 불가침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니다. 한때 유럽에서 꿈의 나라로 여겨지던 스웨덴이 요즘은 ‘부드러운 전체주의’로 비판받는다. 공동체 전통을 사회민주주의 원리로 발전시킨 이 나라에서 모든 돈 거래는 완벽하게 공개되고, 모든 공문서는 투명하게 공개된다. 독신모나 이혼모는 사회복지 급여를 받기 위해 자신이 낳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국가에 밝혀야 하고, 체벌을 당한 아이는 심지어 제 부모를 고발할 권리까지 갖는다.



‘프라이버시’의 정치학

한국어판 ‘사생활의 역사’ 5권은 현대 이탈리아, 독일, 미국의 사생활에 관한 세 개의 장을 포함한다. 원래 프랑스어판에는 없고 해당국가의 판에 첨부된 것을 번역해 수록한 것이라 한다. 거기에 한국의 사생활에 관한 장을 첨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의 독서는 언젠가 한국판 ‘사생활의 역사’를 쓰는 것으로 완료돼야 한다.

“이 ‘벽’의 양편에서는 수많은 싸움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조르주 뒤비의 이 말에는 ‘사생활’이 갖는 정치적 함의가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기업문화에서는 주식회사마저 버젓이 한 가문의 사유물로 간주된다. 그리고 오로지 일본과 한국에만 존재하는 ‘회사인’이라는 표현은 일본과 한국의 노동자에게 아직 사생활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벽’의 양편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다른 곳에도 있다. 얼마 전 우리의 법원에서 부부 사이의 강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거기에 반발하는 남성들은 부부의 침실을 국가권력이 넘볼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두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과거에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공권력의 투입을 요구했듯이, 여성들은 침실에서 자행되는 남성의 자의적 폭력에서 자유롭기를 원한다.

전자주민증, 방범 CCTV, 인터넷 실명제 등은 디지털 영상의 시대에 들어와 새로이 제기되는 문제들이다. 공과 사를 나누는 ‘벽’을 두고 양쪽에서 끊임없는 삼투압 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의 결과 공적인 영역에 속하던 것이 사적인 영역으로 넘어오기도 하고, 거꾸로 사적인 영역에 속하던 것이 공적인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싸움’은 결국 요소들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속에 어떻게 배분하느냐의 문제다. 바로 여기에 ‘프라이버시’의 정치학이 있다.

신동아 2007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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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칼럼니스트, 중앙대 독문과 겸임교수 mkyoko@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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