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2월호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서울맨’ 제타룡

습관성 ‘미래 읽기’로 서울을 용(龍) 만들다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7-02-12 14: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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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던 때 그는 서울시청에 앉아 ‘IMF 위기’를 예견했다. 고졸 9급 공무원으로 출발했지만 줄기찬 호기심과 독서는 그를 미래학도 반열에 올려놨다. 천연가스 버스 도입이나, ‘이명박
    • 서울시’의 최대 히트작인 버스중앙차선제도 그의 아이디어가 시발이 됐다. 퇴임 후 4개의 대학을 다닌 그는 수학(數學)도 다시 배울 것이라고 말한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서울맨’ 제타룡
    세계에 핵무기가 몇 개나 있는 줄 아십니까? 이야기 도중 제타룡 선생이 내게 물었다. 나도 그게 늘 궁금했다. 도대체 핵을 보유한 국가는 어느 어느 나라이며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그 나라들이 핵을 가질 때도 미국이 북한에 하듯 예민했던지 등등.

    “총 3만개가 있답니다. 구 소련이 1만6000, 미국 1만2000, 중국 400, 이스라엘 200, 영국 185, 프랑스 385, 파키스탄 40, 인도가 또 40개, 북한은 플라토늄 형태로 6개, 지난 봄에 미국 신문에서 봤으니까 이 자료가 아마 정확할 겁니다.”

    숫자를 잘도 기억한다고 감탄하자 그는 얼른 인간의 뇌는 100세까지 발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학자의 이름을 말한다.

    “단 세 가지 조건이 있대요. 난해한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퍼즐이나 수학 문제를 풀면 나이 들어도 인간 두뇌는 퇴보하지 않는답니다.”

    그의 이야기는 종횡무진, 천의무봉했다. 정치·사회·경제·문화를 넘나들며 정확한 통계가 언급되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일목요연하게 세상풍경이 조감되고 통시적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에서 읽혔다. 박람(博覽)하고 강기(强記)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계기가 있었는데 기억하십니까? 연이은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귀만 곧추세운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한 일이랍니다. 고르비(고르바초프 전 공산당 서기장)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었어요. 그는 사고난 지 3일이 지난 뒤에야 폭발 소식을 들었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아비규환을 이뤘겠습니까. 원자탄을 1만6000개나 가진 나라 아닙니까. 앞으로 이런 식의 무기경쟁에 휘말리다가는 인류 종말이 금방 오겠다 싶더래요. 물론 공산주의 경제가 실패한 것도 이유겠지만 냉전을 마감하고 개방해야겠다는 결심을 그때 했더랍니다. 폴 케네디의 ‘강대국의 흥망’에 보면 ‘비경제적 요소에 투입하는 국가예산이 지나치면 그 국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내용이 나오거든요. 구 소련은 무기개발, 우주개척에 너무 많은 예산을 쓰고 있었으니 뜨끔했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소문은 진작에 듣고 있었다. 공부를 하는데, 도무지 끝간 데 없이 책을 읽는 공무원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공무원으로 정년 퇴직한 후에 대학을 세 개나 더 다녔으며 그 공부의 덕으로 미래를 훤하게 읽어낼 줄 알아 다시 공직에 불려나오게 됐다 했다.

    만학도의 혜안

    제타룡(諸他龍). 193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올해 일흔. 남 타(他)자, 용 룡(龍)자. 한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독특한 이름을 가진 그는 오랫동안 공부에 매달린 사람이 갖는 온화하고 겸허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달변은 아닌데 이야기의 밀도가 높아 상대방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었고 선비 같은 외양인데 알고보니 골프 코치 자격이 있었고 테니스와 스키와 스케이트에도 두루 능한 스포츠맨이었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껴서 하는 공부라고 생각한다. 제타룡 선생이 바로 그런 공부를 했다. 호기심이 끊임없이 솟아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어려서부터 해왔던 습관의 일종이었다.

    “궁금증이 솟아나면 답을 알 때까지 책을 찾아봤어요. 하다 보니 그게 습관이 되데요. 플라톤이 그랬던가요. 반복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을 만든다고요. 좋은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무언가를 탐구하는 것이 버릇이 돼버렸어요. 공무원이 되고 정책 입안자의 역할이 주어지면서 내 관심은 자연스럽게 미래사회로 옮겨갔어요. 정치·경제·사회의 미래 트렌드 읽기가 나의 주종목입니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서울맨’ 제타룡

    도시철도공사 사장 시절, 제타룡씨는 직접 지하철 기관실, 심지어 선로 안까지 직원들과 함께 돌아보며 개선점을 연구했다.

    그는 제때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고졸 9급 공무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어쩌면 그게 콤플렉스가 되어 일생 책읽기에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통신과정으로 대학졸업장을 따고 그 후에도 네댓 개의 대학을 더 다니고 ‘타임’ 등 시사잡지를 30여 년 정기 구독하는 중에 절로 세상 보는 눈이 떠졌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가 대충은 짐작된다. 아니, 환하게 보인다.

    “세계 정세를 분석하는 책을 700~800권 읽어봐요. 병신 아니면 미래를 읽는 눈이 저절로 생기게 될 겁니다. 다만 다들 책을 읽지 않아서 문제인 거지….”

    ‘IMF 사태’는 1997년 11월에 터졌고 4월 무렵 그는 이미 수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주변에 경고를 했지만 믿지를 않았다. 사태 발발 후에야 사람들은 어떻게 예견했더냐고 그의 안목을 비로소 인정했고 제타룡이라는 조용한 사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 인간형인 것 같다. 부드러운데 실천력이 탁월하다. 한 집단의 리더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그는 도시철도공사 사장일 때 몇 가지 탁월한 방식으로 보여줬다. 서울 지하철 총연장은 152km, 그 선로를 매주 금요일마다 걸어서 다녔다. 어둡고 좁은 구역을 직원들과 함께 직접 걸은 후 통닭파티를 하면서 그 구역의 문제점들을 파악하는 방식을 취했다.

    “위험하진 않아요. 사람이 걸어다닐 만한 공간이 나 있으니까. 지시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발벗고 나서니 선로점검이 저절로 되데요. 그렇게 걸어다닌 이후 사고율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어요.”

    그리고 파격적이게도 월급의 반을 회사에 반납했다. 경영 적자인 공기업에서 사장이 월급 전액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한달 200만원씩 35개월분을 회사 금고로 다시 집어넣었다.

    한 달에 한 번 평직원의 생일잔치에도 찾아다녔다. 케이크 하나, 꽃다발 하나 사들고 집으로 찾아갔다. “첨엔 부담스러워하다가도 나중엔 다들 좋아했어요. 같이 저녁 먹고 얘기하다 돌아오는 거지요.”

    그는 직원들이 공부하는 것도 적극 도왔다. 대학원에 가겠다면 낮에 가도 좋다고 등을 밀며 격려했다. “미래엔 사람이 자본이 됩니다. 회사가 억지로 공부를 시켜도 시원찮을 판에 하겠다는데 왜 지원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대학원에 진학한 직원이 60명쯤 됐을 겁니다. 한 조직에 박사가 60명씩 있어봐요. 조직 파워가 절로 강해집니다. 공부하느라 못한 업무는 다른 시간으로 돌려주면 고맙다고 되레 더 열심히들 일해요.”

    조직의 리더란 직원들의 능력을 발견하고 이용하여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란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런 관점을 물론 그는 책에서 얻었다. 어린 시절 ‘대망’을 읽으면서 도쿠가와 이예야스가 행하던 영웅적인 일들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씨에 1만명 군사가 먹을 식량은 5000명분밖에 없어요. 도쿠가와는 졸병들부터 쌀을 씹어먹게 했어요. 그래야 배탈이 나지 않는다면서…. 자기는 결국 쌀 한톨도 씹지 못하고 굶지요. 그런 희생적인 리더들의 이야기가 감동으로 남아 있어요. 어릴 때 읽는 소설은 사람됨의 철학을 만들어줘요. 아랫사람들에게 말로 암만 따르라고 설득해봤자 소용없어요. 직접 몸으로 시범을 보여줘서 감성적으로 공감할 때 비로소 설득력이 생기는 거지요.”

    모범과 감성의 리더십

    그는 책을 읽을 때 건성으로 읽지 않는다. 반드시 요약노트를 만들면서 읽는 정독형이다. 핵심내용을 정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도 끊임없이 나눠준다. 그가 만들어놓은, 리더십에 관한 요약 노트를 봤다. 리더십과 영향력이란 항목에서 나는 제타룡 사장이 왜 직원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녔는지를 이해했다. 그건 ‘대망’에서 배운, 그리고 숱한 리더십 책이 공통으로 지적한 ‘직원 가까이 하기’ 철학의 일단이었다.

    리더십 정의의 핵심은 ‘영향력’이다. 영향력에는 몇 가지 계발 단계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직원들을 격려하고 감정적인 교류가 가능할 만한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직원들은 리더로부터 체득한 내용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한다. 그러면서 리더가 재생산되어 영향력은 증폭되어 나간다(중략). 영향력 있는 리더의 특성은 윤리 도덕적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돕는 것이다. 남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미리 알고 도와주는 것이다. 리더에게 필요한 힘은 영향력뿐 아니라 좋은 성품, 포용력, 지성, 지도력, 추진력, 돌파력, 분별력이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서울맨’ 제타룡

    제타룡씨가 도시철도공사 사장 시절 서울시 마라톤대회에 참가했을 때. 퇴임 후에는 골프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하는 등 늘 몸을 ‘젊게’ 가꾸고 있다.

    과연 앎은 힘이었다. 안다 한들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겠지만 지와 행의 합일을 꾀할 수 있는 힘이 제타룡에겐 있었다. 결국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대규모 파업이 일어났을 때 도시철도공사 노조는 30%의 인원만 동조했다. 70%가 현업에 종사했으므로 지하철 파업사태를 막을 수 있었고 정시운행이 가능했다. 반대로 다른 사업체들은 70%가 파업에 동조하고 30% 정도만 현업에 남은 꼴이었는데, 지하철 파업이 흐지부지되자 민주노총의 파업투쟁 자체가 오래 끌지 못했다.

    “너새니엘 호손을 읽다 알게 된 말인데 ‘체인 오브 더 휴먼’이란 게 있어요. 사람들은 서로 체인으로 엮여 있어서 도덕적으로 그 고리가 헐거워지면 사회 속에서 외롭게 고립된다는 뜻이지요. 나는 반대로 생각해요. 내가 먼저 사람들 사이 그 체인을 강화하는 에너지를 보낼 수 있다고요. 감성 리더십이란 것도 결국 그 체인으로 사랑을 보내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한번 보내놓으면 사라지지 않고 다시 강화되어 되돌아오거든요”

    경남 사천이 고향이지만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름에 ‘남 타’자를 붙여 작명한 것 같다. 선친이 일본에서 자그만 사업을 벌이고 계셨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일본경찰과 충돌이 일어났다. 일경과의 충돌이 다 독립운동일 수는 없겠지만 조선인에 대한 모욕이나 부당함을 참지 못해 생긴 일인 걸로 짐작한다.

    그가 여섯 살 때 부모는 일경의 눈을 피해 몰래 사천으로 돌아온다. 어머니는 당시의 충격 때문인지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란다. 개구진 아이였다. 호기심이 많으니 장난도 심했다. 겨울에는 얼음이 왜 어는지 신기해 얼음판 위에서만 놀았다. 덕분에 아침에 입은 옷이 저녁이면 흠뻑 젖었다.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셨다. 큰 아이들이 공부하러 집으로 몰려오곤 했다. 초등학교 내내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했지만 6학년이 되자 버럭 철이 든다. 당시는 희한하게 중학 입시에 국가고시를 보던 시절이었다. 1년 동안 6년 것을 한꺼번에 공부했다. 그러면서 공부에 재미를 들였다. 시험 보면 답을 맞힐 수 있는 게 즐거웠고 책 읽다가 코피가 터지는 기쁨도 알게 됐다.

    “중학 입시를 보러 갔는데 감독 선생님이 ‘답은 천천히 써도 된다. 시간은 충분하다’고 하셔요. 침착하라는 뜻이었을 텐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정말 일부러 천천히 답을 썼어요. 3분의 2밖에 안 썼는데 종이 치는 겁니다. 아이코 떨어졌다 싶었어요.”

    그런데 발표를 보니 500점 만점에 360점이었다. 1등이었고 경기중학에도 갈 수 있는 성적이었다. 쓴 답이 모조리 정답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렇게 순박한 구석이 있다. 지금도 여전히 그에게선 그런 순박함이 느껴진다.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그대로 믿고 정면 돌파하는 힘은 그 순수와 소박에서 나온 것 같다.

    개구쟁이 수재

    진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6시에 사천비행장에서 버스가 출발해요. 진주 사는 직원들을 출근시키는 통근버스였는데 빈 차로 출발하거든요. 그 버스를 얻어 타야 편하게 진주까지 갈 수가 있어요. 아침마다 그걸 타자니 할머니는 4시에 일어나서 아침밥을 짓고 도시락을 싸셔야 했지요. 요즘처럼 시계만 있어도 좋았을 텐데…. 어떤 때는 새벽 1시에 일어나 아침밥을 짓기도 하셨어요.”

    훗날 서울시 교통정책을 책임질 인재가 그렇게 새벽마다 남의 버스를 얻어 타면서 길러지고 있었다니 흥미롭다. 고생스럽게 학교를 다녔어도 성적은 좋았다. 하긴 책읽기에 매료된 호기심 투성이 학생이었으니…. 사물의 원리를 궁구(窮究)하는 게 좋았다. 실용학문을 하고 싶어 서울대 공대를 지망했다. 그런데 입학시험 치러 가서야 자신이 적녹 색약이라는 걸 알게 된다. 색약이면 공과대학엔 응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좌절이었다. 좌절을 이길 수 없어 친구 따라 지원해서 입대해버린다. 그리고 제대 후 역시 친구 따라 공무원 시험을 보러 간다.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서울맨’ 제타룡
    “공무원 시험을 보자고 약속했으니 신의를 지키긴 해야겠는데 시험날 나는 폐렴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었어요. 친구들이 나를 억지로 부산행 기차에 태우는 겁니다. 기차에서도 바로 앉을 수가 없어 누워서 갔다고요.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팔자 같아요.”

    시험 보러 들어갔더니 앞이 캄캄해 문제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 시험은 7~8명이 함께 응시했으나 제타룡 혼자만 합격이었다. 억세게 시험 운이 좋았던 것인지 실력이 특출했던 것인지. 아무튼 그렇게 공무원이 됐다.

    1년 후인 1965년엔 서울시로 발령이 났고 그는 비교적 평탄하게 40년 가깝게 대한민국 공무원의 본분을 다하면서 살았다. “하급직일 때야 조직에 적응하기에도 바쁘지요. 과장쯤 되면 자기 주관이 생기기 시작하고 국장쯤 되면 그걸 실현할 수 있게 돼요. 국장이면 우리 사회에서 리더라고 말해도 될 겁니다. 내가 교통과장 때 여름철 시민들이 시원하게 차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냉방버스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는데 업자들이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러더니 국장이 되니까 듣더군요. 그런 식이죠. 하하….”

    제타룡은 공무원 시절 주로 교통행정을 담당했다. 운수 1, 2과와 교통과를 두루 거쳐 교통국장직도 맡았다. 교통국은 버스업자 택시업자들과 관련돼 있어 행정처리에 따른 각종 이권이 민감하게 얽힌 곳이었다. 여간 투명하게 처신하지 않고서는 그런 업자들의 이권에 말려들 소지가 있었다.

    “서울시에선 ‘클리어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교통국 산하에 배치되는 편이에요. 나는 욕심이 없어서라기보다 공무원 초창기에 워낙 뼈저린 결심을 할 계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부정과 담쌓고 살 수 있었을 겁니다.”

    젊은 날 감사과 계장으로 있을 때였다.

    “3일 건너 한 번씩 치안본부 특수대로 시청 직원들이 잡혀가요. 부정이 있다는 혐의로 조사받으러 가는 거지요. 사안이 간단할 때는 감사과로 신병을 인수해가라는 통지가 오는데, 가보면 밤새 취조당하느라 몰골이 말이 아니에요. 옷도 흐트러지고 표정은 얼이 빠지고. 그걸 보면서 평생 저런 일로 엮여서는 안 되겠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내 사전에 부정이란 없다. 절대 부패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그때 딱 했어요.”

    ‘청렴 속 융통성’ 지향

    그렇지만 청탁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되레 융통성 없는 일이 되진 않았을까. 그 때문에 적을 만드는 빌미가 될 수도 있을 텐데.

    “우리는 다종교 사회라서 선과 악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예스와 노가 분명하지 않아야 도량이 너른 것이 되고 재산도 내 것 네 것 뚜렷하게 나눠지지 않는 경우가 있잖아요. 공무원직을 수행하다보면 딱한 처지를 직면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원칙을 고집하다가 저쪽 회사가 죽겠다’ 싶으면 융통성을 발휘해야 해요. 누가 봐도 그게 옳다 싶을 때는, 징계를 받는 한이 있더라도 도와줘야겠다는 판단이 설 때는, 담당자의 권한으로 그렇게 해야지요. 단 그 때문에 차 한잔도 얻어먹어서는 안 돼요. 담백하게 위기를 넘겨줘야 해요. 그럴 때 공무원이 멋있는 거지요. 기분도 좋고….”

    그는 공무원을 부조리에 발이 묶이게 유혹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청탁하면 안 돼요. 아까운 사람이 부조리에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공무원에게 돈을 주며 청탁하는 건 남의 장래를 망치는 짓입니다.”

    개발연대엔 잊지 못할 기억도 많다. 1970년대 중반 성북구청 새마을과장으로 있을 때 그의 가장 큰 과제는 골목길 넓히기 사업이었다. 골목이 좁아 소방차나 앰뷸런스가 들어갈 수 없는 이면도로의 폭을 4m 정도로 넓히는 것이 그가 맡은 업무였다. 예산이 따로 책정된 것도 아니었다. 주민의 자발적인 기부에 의지해 길을 넓혀야 했으니 쉬울 리 없었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열정과 뚝심뿐!

    카메라를 메고 하루 두세 번씩 길을 넓혀야 할 지역으로 찾아갔다. 주민들에게 도로가 넓어지면 얻어질 혜택을 역설했다. “한 달 만에 농구화 두 켤레가 떨어지더군요. 세어보니 장위동 어떤 골목에는 72번이나 나갔더라고요. 주민들이 감동했는지 나중에는 자기 땅을 기꺼이 떼어주대요. 그때만 해도 서울에 아직 그런 여유가 남아 있을 때였어요.”

    1년 걸려 서른 몇 개 지역의 골목길을 차가 통행할 수 있도록 넓히는 데 성공했다. 서울시의 사무관 이상 직원 900명을 모아놓고 자신의 성공사례를 발표하기도 했다.

    “뒷골목 도로도 도시계획을 세워서 체계적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걸 그때서야 다들 공감하더라고요. 그 일 이후 구청에 도시정비과라는 부서가 새로 생겼지요. 그때 같이 일하던 새마을 지도자 한 분은 식도가 협착돼 음식을 목구멍이 아닌 위로 연결된 주머니로 넣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성공사례가 방송에 나오면서 대학병원에서 그분을 무료로 수술해주는 일도 있었어요.”

    그는 서울시 교통정책의 근간을 만든 책임자였다. 버스중앙차로제, 교통카드, 환승요금제, 천연가스 버스 운행의 아이디어가 다 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정책 아이디어의 원천은 끊임없는 공부였고 미래 트렌드 읽기였다.

    “오랫동안 책을 읽다보면 어떤 정보가 유용한지 아닌지 금방 구분이 가능해져요.”

    그는 요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AFN뉴스를 청취하는 영어학원에 다닌다. ‘타임’지와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행하는 ‘CEO 인포메이션’을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미래사회의 트렌드를 분석한다. 그걸 주변 사람들에게 프린트해 나눠주는 일도 부지런히 계속한다. 버스중앙차로제를 전격 실시하게 된 것도, 서민의 발인 버스운행을 효율적으로 하자는 것도, 밑바닥엔 미래사회에 대한 예측이 깔려 있다.

    “1980년대 미국은 개발도상국에 직접 투자하면서 원자재 중 석유를 사는 몫으로 투자금액의 27%가량을 썼어요. 그런데 1990년대 냉전이 종식된 이후엔 석유 사는 금액을 6% 정도로 줄였다고요. 원자재 구입 대신 서비스산업에 투자한단 말이에요. 석유 가격에 신경을 덜 쓰게 된 건데 그러니 미국이 유가를 조정할 힘을 잃어가요. 각자가 고유가 시대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배럴당 80달러면 고유가거든요. 그럴 때 갑자기 자가용 사용을 줄이려 한다고 되겠습니다. 미리부터 버스운행을 편안하고 원활하게 만들어놔야 할 것 아닙니까.”

    세계를 보고 ‘서울 교통의 미래’ 읽다

    “회사야 이윤이 목적이니까 승객이 많은 노선은 서로 배차하려 하고 승객이 적으면 배차를 줄이려고 하죠. 이번에 개선된 버스제도에선 중앙차로뿐 아니라 그런 부분까지 고쳤어요. 버스 수입을 조합으로 가져가 노선에 관계없이 공평하게 배분하게 만든 겁니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필수적으로 국제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들으니 미래사회에는 기존 사고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절실해보였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 교수인 제레미 리프킨은 20년 뒤엔 현재 노동력의 5%만 필요하리라고 예측했다. 그 판단이 맞다면 화이트칼라 실업자는 급속히 증가할 것이고 중산층은 몰락할지도 모른다. 그런 미래의 대안은 세계화도 경쟁력 강화도 노동조합의 보호도 아닌 노동의 나눔이 오직 중요한 사안이 될 거란다. 흥미진진하니 그가 정리한 견해들을 더 들어보자.

    미국은 개인주의적 꿈을 바탕에 깔고 경제발전을 해왔고 유럽은 지역사회적 꿈을 중시해 사회의 질 높은 행복을 먼저 추구했다. 따라서 개인의 경제발전만 추구한 미국은 살인사건이 유럽의 네 배나 되고, 휴가일수는 유럽이 4~6주인데 비해 미국은 연평균 10일밖에 되지 않는다. 삶의 질이 병행되지 않고 경제 성장만 추구하는 식의 발전은 이제 곧 한계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다.

    앞으로는 주 40시간이 아니라 주 20시간 근무제가 도입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부는 적은 노동시간을 더 많은 인력에게 배분하는 기업에 법인세를 면제해주는 혜택을 줘야 할것이다. 인공지능이 모든 일자리의 30% 이상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레미 리프킨

    2030년엔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한다. (현재는 5분의 1) 연금은 70대 중반이 돼야 지급되고 노동시장을 찾아 새로운 이민문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60세 이상 연령대의 노동시장 조성이 불가피하다. 제조업 부분의 일자리가 농업인구처럼 감소할 것이다. 전자상거래의 도래로 기존 기업들의 유통구조가 완전히 변화한다. 노동시장도 달라져 임시직 파견회사가 늘어날 것이다. 이미 미국엔 7000개의 임시직 파견회사와 1800개의 전문직 파견회사가 생겨났다. 대학교육의 이원화(젊은 층과 기성세대)가 이뤄질 것이고 직장인의 재교육이 불가피해진다. -피터 드러커

    20세기가 고속도로를 세단으로 가는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도로가 없는 곳에서 전혀 새로운 무언가로 출발해야 할 만큼 변화가 급속하다. 20세기가 미래를 과거의 연속으로 파악했다면 이젠 달라졌다. 예측할 수도 없고 연속적이지도 않은 것이 미래란 이름으로 다가온다. 풀타임 직장이 거의 사라지고 포트폴리오 생활이 일반화할 것이며 투자자가 자본이 아니라 지식 가진 자가 자본이 되는 세상이 온다. 국가 중심 사회가 사라지고 네트워크 중심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경쟁에서도 벤치마킹, 리스트럭쳐, 리엔지니어링이 아니라 전혀 다른 근본적 재창안이 요구된다. -로완 깁슨


    이런 새로운 미래사회에 대비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이 뭘까. 그건 한마디로 지도자 양성이라고 그는 거듭 강조한다.

    “100명 정도의 최고 인재를 국가가 엄선해서 미래 지도자 양성 시스템을 반드시 만들어야 합니다. 변화된 미래에 적응할 수 있는 전문가를 키워야 해요. 인도와 중국은 이미 시작했어요. 세계 유수의 대학 100개가 중국에 분교를 만들었고 인도는 미국 MIT를 본뜬 IIT를 만들어 해마다 BT(생명공학) 분야의 세계적인 학자 2500명을 길러냅니다. 맨해튼 증권가의 전산자료는 그날 저녁이면 즉각 인도의 경제 연구소로 넘겨집니다.

    교육에 투자해야 해요. 개인 역사 창조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사람 자체가 자본이에요. 권력은 이제 국가가 아니라 개인으로 이동합니다. 개인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연구해야 해요. 과학 영재를 선발해 특수교육을 시키고 다양한 교육제도를 만들고 젊은이뿐 아니라 기존 세대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필수입니다. 국가사업은 단계적으로 민간 주도로 바꿔가야지요. 지하철도 적자를 메우기 위해선 외국처럼 자체수익 사업을 벌일 연구를 해 나가야 합니다. 서울시가 요즘 행정에 자꾸만 창의력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것도 따지고보면 미래사회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니 공무원은 흔히 말하는 철밥통이긴커녕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직업 같다. 직위가 일정 정도 높아진 이후엔 비상연락이 언제든 닿을 수 있도록 서울 인근에 머물러야 했다.

    “그래서 배운 게 테니스예요. 사대문 안에 머물며 할 수 있는 운동이니까. 등산도 맘놓고 갈 수 없어요.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산꼭대기에서 달려올 수가 없잖아요. 요즘이야 휴대전화가 생겼으니 괜찮지만 예전에는 어딜 가든 늘 연락처를 집에다 알려놓은 후에야 움직일 수가 있었어요.”

    퇴임 후 다시 ‘배움의 길’로

    1999년 퇴임 후엔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원하는 공부를 맘껏 하자 싶어 일단 집 근처 서일전문대학 사회체육학과에 등록한다. 나이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이들과 같이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이 몹시 통쾌했다. 골프학과를 1등으로 졸업한다. 골프지도자 2급 자격증을 어렵잖게 얻었다.

    졸업 후엔 다시 다른 대학에 편입한다. 이번에는 영문과였다. 영문과에서 영어로 된 소설을 실컷 읽은 후엔 연세대 행정대학원에 입학한다.

    “지금도 호기심이 넘치고 알고 싶은 욕구가 샘솟으니 자꾸 공부할 수밖에요. 시간만 되면 이번엔 젊어서 좋아했던 수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수학 교재 첫 페이지에 ‘수학은 랭귀지다’라는 말이 나와요. 그걸 본 이후 수학을 새로 공부하고 싶다는 설렘이 떠나질 않아요. 사회현상을 수학으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해요. 멘케이라는 학자는 부패를 수학적으로 풀어놓기도 했으니까…. 우리는 9단까지만 외우지만 인도는 24단까지 암산해요. 수학교육은 과학 공부의 기초단계거든요. 우리도 수학을 딱딱한 수식 계산이 아니라 논리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교육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수학공부를 하러 다른 대학에 등록하기 전인 2002년, 그는 이명박 전 시장의 선거 캠프로 불려 나와야 했다. 미래 정책 구상에 그의 안목과 두뇌를 빌려야 할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이름 ‘타룡(他龍)’을 ‘타인을 용 만드는 사람’으로 해석한다. 이명박 전 시장을 시장으로 만드는 데 공헌했고 새로 오세훈 시장이 취임했을 때도 인수위원장직을 맡았으니 그런 해석이 가능할 법도 하다. 그러나 월급을 반납하고 하루 5km씩 걷고 ‘사원 가까이하기 운동’을 겸허하게 실천해도 한 조직의 리더는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한번은 정신 이상자가 지하철에 불을 질렀어요. 대구에서와 똑같은 일이 반복된 거지요. 얼른 승객을 모두 대피케 하고 불을 끈 것까지는 좋았어요. 그런데 좌석의 섬유 안에 불씨가 남아 있었는지 차고지로 들어가는 빈 객차 안에서 다시 불이 난 겁니다.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그럴 때는 발이 땅에 안 디뎌져요. 10년을 감수하는 거지요. 연임할 수도 있었지만 ‘앗 뜨거라’ 싶어서 도망쳤어요.”

    그는 대신 지하철 내부의 의자들을 모두 불연섬유로 바꾸는 일을 2010년까지 완료하기로 결정했다.

    시내로 들어오는 차량에 과세하는 혼잡통행료 징수제도 또한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시정개발연구원의 면밀한 분석도 끝낸 후였다. 시내 교통을 원활하게 만들고 교통사업에 재투자할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기획되었던 그 제도는 당장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 일로 그는 서울시 교통국장에서 어느 구청으로 좌천돼야 했다. 그러나 시장이 바뀌면서 결국 남산 1, 3호 터널을 통과하는 차량은 혼잡통행료를 징수하는 것으로 결정났다. 시내 버스를 천연가스 차량으로 바꾸는 데도 그의 공로가 컸다.

    30년 된 집에서 나무 키우는 재미

    “처음엔 전기 버스 도입이 논의됐었어요. 직원 몇을 데리고 당장 모스크바로 실태조사를 하러 갔지요. 도로 위로 거미줄 같은 선이 얽히고설켜 지저분해서 못쓰겠더라고요. 마침 독일에서 천연가스 버스가 개발돼 나왔다는 정보를 입수했어요. 얼른 전기와 가스의 장단점을 비교분석하는 슬라이드를 만들어 위에다 보고했지요. 가스 쪽이 비용도 환경도 시설비에서도 훨씬 유리했죠. 지금 서울 버스의 반은 천연가스를 사용하고 2010년이면 100% 가스 버스로 바뀌게 될 겁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무를 무척 좋아했다. 학교에 심겨진 묘목이 하도 예뻐 밤중에 그 나무를 뽑아 오려고 학교 모표장에 몰래 간 적도 있다.

    “최초의 도둑질이었어요. 공동묘지를 거쳐서 가야 하는 무서운 길이었는데 나무가 하도 탐나 무서운 줄도 몰랐다니깐요.”

    1975년 정릉에다 평당 5만원을 주고 살림집을 샀다. 북향이라 값이 유독 싼 점과 마당이 있어 나무를 심을 수 있다는 점이 탐이나 덜컥 사버렸다.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그는 정릉 집에 눌러산다. 물론 마당에 나무를 여러 종류 심어 가꾼다.

    한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무엇보다 그가 사는 집에 가봐야 한다고 나는 늘 주장해왔다. 제타룡 선생의 정릉 집엔 아직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직접 심은 온갖 나무가 수십년 동안 자라고 있을 뜰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1980년 중반인가 출근하느라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좋은 모과나무 하나를 차에 실어놓고 나무장수가 울고 있어요. 사연을 들으니 주문을 받아 나무를 가져오긴 했는데 집을 못 찾아서 그런대요. 내 월급이 60만원인데 그 나무는 150만원이래요. 망설이다 결국 그 나무를 우리집으로 보내고 말았지요.”

    부인이 크게 어이없어했음은 물론이다. 무엇에든 사랑을 보내면 반드시 응답이 있게 마련이란 것이 그의 철학이다. 나무 또한 마찬가지여서 저를 유난히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종의 보답을 하는 것 같다.

    “장인 소유의 배밭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게 집사람 몫으로 온 겁니다. 노후에 나무들 속에서 최후를 맞을 수 있게 됐어요.”

    부인과의 결혼 얘기도 재미있다. 그는 혼인이 늦었는데 남산에서 명동에서 흑석동에서 우연히 1년에 한 번쯤 마주치는 여학생이 있었다. 알아보니 같은 사천 사람이었다. 4학년 때 교생실습을 전북 이리로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루는 동창 중에 택시 운전하는 친구가 쉬는 날이라고 놀러왔어요. 너 이리 갈 수 있냐? 물었지요. 둘이 이리로 달려가서 무조건 그 여학생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다녔죠.”

    머잖아 둘은 결혼한다. 신혼부부는 결혼 축의금으로 걷힌 돈 60만원으로 30만원은 셋방을 얻고 남은 돈 30만원으로는 그날 택시를 몰고 먼 길을 달려가준 친구에게 개인택시 하나를 사주기로 합의한다.

    “그러고보니 우리 집사람도 꽤나 욕심이 없는 사람이네요. 하하….”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서울맨’ 제타룡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김서령의 가’


    기사를 거의 다 써갈 무렵 새 소식이 당도했다. 제타룡 선생이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의 원장으로 발령받게 됐다는 뉴스였다. 암, 미래사회의 트렌드를 읽을 줄 아는 길눈이 새 시장에게도 필요하고 말고. 로마가 패권국가로 장기 존속했던 이유를 제타룡 선생은 시오노 나나미의 입을 빌려 “유능한 지도자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덕분”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새로운 리더십에 대해 그만큼 공부하고 고민해온 사람도 흔치 않을 게다. 독수리같이 형형하고 부엉이같이 지혜로운 제타룡이 개발해내는 시정이 서울을 세계 최고의 도시로 만들 것을, 우리들 미래가 좀더 밝고 살맛날 것을, 그 기대와 전망이 이뤄질 것을 믿고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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