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호

禮 연구 400년 가업 잇는 김득중 한국전례연구원장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7-04-11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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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禮 연구 400년 가업 잇는 김득중 한국전례연구원장
    “대관절 예절이 뭡니까?” 이 질문은 예절 회의론자의 것이다. 기민하게 미래를 예측해도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할지 말지 불안하기만 한 세상에서 새삼 전래하는 의식과 절차를 따지는 게 도무지 불합리하거나 케케묵은 노릇이 아니냐는 힐난이 일정 분량 담겨 있다. 평생을 예(禮)의 재건에 바쳤다는 김득중(金得中·76) 원장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처음 뱉은 말도 바로 이것이다.

    “농경시대의 유교식 예(禮)가 산업화 사회를 지나 정보화 시대로 접어든 지금에도 그대로 유효할 수 있을까요?”

    외람되게도 김득중 원장과 마주앉아 나는 이 질문을 반복했다.

    “예가 뭐냐고요? 아이들에게 예를 설명할 때는 그냥 ‘버릇’이라고 말해요. 무례하다고 할 때 ‘무례’는 버릇없다는 뜻이잖아요. 중학생쯤 되면 ‘법’이라고 설명해요. ‘그런 법이 어딨어?’ 할 때의 법이 민법이나 형법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 법은 예법을 말하는 거거든요. 어른들이 예가 뭐냐고 물어오면 ‘사회적으로 약속해놓은 생활양식이다’고 대답해요. 여럿이 모여 사는 더불살이(‘더불어 함께 산다’는 공생의 의미로 그가 만들어낸 말이다)에서 꼭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해요?”

    매우 합리적이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그는 질문을 금방 내게 돌려놓았다. 단정한 몸가짐과 맑은 음성, 조용하면서도 확신에 찬 태도, 은발에 온화한 표정, 구의재(九宜齋)라 이름 붙인 구의동 그의 사랑방에 앉은 김득중 선생은 천생 선비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선비란 학행일치하고 외유내강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칭호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벼슬이 다락같은 조상을 여럿 가졌다고 선비일 수 없으며 한문 해독력이 빼어나다고 반드시 선비일 리 없다. 하물며 도포 자락에 흰 수염을 휘날린다 하여 어찌 다 선비일 수 있으랴.



    내가 지닌 선비에 대한 이미지는 어릴 적 고향 안동의 바깥사랑에서 뵙던, 흰 대님을 정갈하게 치고 앉은 학 같으신 어른분들한테서도 유래됐겠지만 가까이는 서울대 정옥자 교수를 만난 이후 더욱 강화된 것 같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 선비’라는 책을 들고 찾아간 내게 정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난 조선 선비 ‘마니아’예요. 21세기에 다른 나라 사람에게 우리가 내놓고 자랑할 만한 정신유산이 바로 ‘선비’라는 캐릭터라고 주장하곤 해요. ‘조선 선비’그룹은 일상생활을 종교 이상의 엄숙한 경지로 이끌어 올린, 세계 문화사에 유례없는 ‘그룹’이거든요.”

    그 선비 그룹의 일상생활 실천 요강이 바로 예라는 것일 텐데, 빠르게 변하는 현대인의 일상에 그걸 적용하는 것이 도대체 가당키나 할까 나는 회의했다. 그러나 김득중 원장은 몇 마디 질문과 설명과 실례로 의심 많은 내 마음의 왜곡과 경직을 간단하게 풀어버렸다.

    예(禮)는 실천이다

    게다가 나는 호기심이 과도해 뻔한 이야기만 늘어놓는 인터뷰이에겐 별 매력을 못 느낀다. 그게 지식이든 체험이든 이야기보따리 안에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이 그득해야 상대방 앞으로 바짝 다가앉는다. 이렇듯 성정(性情) 경박한 인터뷰어에게 김득중 선생은 촌철살인하는 새롭고 풍성한 이야기보따리를 유쾌하고도 진지하게 펼쳐놓았다.

    “더불살이에 필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의사소통이에요. 의사소통에 필요한 것은 말과 짓(행동)이지요? 말이 소리와 의미의 사회적인 약속이라는 것은 이미 아시는 일이고, 행동방식에도 사회적으로 약속된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바로 예예요. 예가 까다롭고 어렵다고요? 자연스럽게 버릇이 되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는 건데 행동양식에 대한 기준을 잃어버려서 버릇으로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한 거예요.

    예는 실천인데 그걸 이론으로 하고 있자니 어려울 수밖에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해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데 예는 알수록 힘은커녕 짐만 된다고 하니 큰일나지 않았어요? 짐이 될 걸 누가 배우려고 들겠어요. 예는 지식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실천할 때 살기가 편리해지고 쉬워져서 힘이 되는 것이 바로 예예요. 인간이 더불살이를 하는 한 어느 시대에나 변하지 않는 근본이 예이니 세상이 변한다고 예를 팽개칠 순 없지요. 아니 변할수록 시대에 맞는 예법은 더욱 절실해지는 거지요.”

    솔직히 말하면 일흔일곱 연세의 전례연구원장은, 공자왈 맹자왈은 아니라도 옛 문헌을 줄줄이 인용하거나 전통 예법을 모르는 ‘요즈음 젊은것’들의 행동을 개탄하는 데 상당 시간을 할애할 거라는 편견이 내게 없지 않았다. 어른 앞에서 하는 내 언행이 예에 맞는지 자신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얼마간 쭈뼛거리는 내게 그는 통쾌하게 말했다.

    “예는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사랑방에 모여 앉아 심심해서 가위 바위 보로 정한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합리적인 근거가 없고서는 예라고 할 수가 없어요. 여러 사람이 모여 살기에 더 쉽고 편한 길을 찾다보니 수천년이 지나는 동안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게 예입니다. 나는 흔히 저기 있는 산길을 보라고 말해요. 아무도 만든 사람이 없지만 각자가 산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가장 가깝고 편한 길을 찾아 자꾸 걷다보니 저절로 생긴 게 산길 아니겠어요? 예는 바로 그런 산길 같은 것이라고요.”

    우리는 설이면 부모님께 세배한다. 어른에게 절을 하는 것만 세배인 줄 알았더니 김득중 선생댁은 아랫대에게 세배받기 앞서 부부간에 맞절을 한다고 한다. 서로의 생일에도 공경하는 마음을 담아 맞절을 한다고 한다. 아무리 세월이 달라졌어도 설에 절하는 풍습이 사라질 수는 없고 사라지게 둬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먼저 부모께 세배하고, 둘이 마주앉아 절을 하고, 돌아앉아 제 아이들한테 세배받고! 생각만 해도 훈훈한 광경인데 어른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집에서는 안타깝게도 이게 어색하다. 평소 안하던 일을 새삼 하려면 부자연스럽지만 늘 해오던 집이라면 부부가 편하게 맞절을 할 수 있다. 그걸 보고 자란 아이들은 거기 산길이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올라가듯 훗날 배우자와 맞절을 하면서 살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하는 절이지만 이걸 하는 집과 안하는 집은 가족문화가 판이할 것이 확실하다. 이게 바로 예절이라는 것을 나는 김 원장과 얘기하는 중 절로 깨닫는다.

    절에는 물론 법이 있다. 앉는 순서도 있다. 1977년에 전례연구원을 만들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성균관에서 전통혼례 시범을 보여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전통혼례 시연에는 남자 7명 여자 9명이 필요했다. 그는 모인 남자들에게 우선 절을 시켜봤다.

    “깜짝 놀랐어요. 일곱 명이 일곱 가지 절을 하는 겁니다. 우리나라 절 자세의 통일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어요.”

    흔히 가가례(家家禮)라고 말한다. 집집마다 예절이 다를 수 있다는 건데 김득중 원장은 이 말을 인정하지 않는다. “문헌을 찾아보면 400년 전에는 절이 다 같았어요. 예법을 모르니까 가가례라는 말로 자신의 잘못을 호도하려는 겁니다.”

    통일된 예법은 있다

    우선 남자 절은 손을 벌리고 엎드리는 게 아니다. 양손을 일자로 벌리는 건 고두배(叩頭拜)라 하여 임금 앞에 절할 때나 하는 자세다. 이마를 바닥에 찧어 절하는 게 고두배인데 손을 벌리는 건 이마를 댈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 절의 기본 손동작은 공수(拱手)다. 공수란 양손을 공손히 모아 잡는 동작이다. 이건 남녀가 마찬가지다(손의 위치만 달라질 뿐이다). 손을 모아 잡고 양 무릎을 꿇어 모은 손등에 이마를 대면 큰절이고 이보다 덜 숙이면 평절이다.

    여자도 방법은 마찬가지다. 큰절일 땐 공수한 손을 쳐들었다가 앞으로 내리고, 평절일 땐 손을 양 무릎 옆으로 짚고 앉는 것만이 다르다. 여자가 큰절을 할 때 가부좌하는 것은 전통예법이 아니며 한 무릎을 세우고 앉는 것은 기녀나 하던 절이라 한다(나는 어린 시절 ‘작은 절’이라 하여 한 무릎을 세우고 앉는 절을 배웠다. 김 원장에게 그 얘길 했더니 어린애에게 애교 섞인 절을 허용했을 뿐, 성인여자의 정식 절이 될 수는 없다고 했다).

    禮 연구 400년 가업 잇는 김득중 한국전례연구원장

    김득중 선생이 그의 사랑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의 의미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손의 위치는 남좌여우(男左女右)가 원칙이다. 남자는 왼손이, 여자는 오른손이 위쪽에 가게 포개어 잡으라는 것이다. 남좌여우는 우연히 정해진 게 아니라 음양오행에서 나온 자세다. 왜 남자는 왼쪽이고 여자는 오른쪽인지 그걸 납득할 만하게 설명해달라고 다가앉는 내게 김득중 원장은 재미있는 얘기를 했다.

    “6·25전쟁을 피하느라고 내가 군대에 늦게 갔거든요. 갔더니 별도 달도 없이 캄캄한 밤 깊은 산에 병사들을 헤쳐놓고 지도만 하나 달랑 들고 부대까지 찾아오라는 훈련을 시켰어요. 이때 방향을 아는 방법이 뭐가 있겠어요?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만져보는 거예요. 만져서 나뭇잎이 무성한 쪽이 남쪽이라는 거예요. 태양이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라 나무는 남쪽을 향해 자라는 겁니다.

    사람도 생명이니 마찬가지예요. 남향을 하고 서면 왼쪽이 동, 오른쪽이 서가 되지 않겠어요? 동은 해가 뜨는 방향이니 당연히 양(陽)이고 서는 음(陰)이 되겠지요? ‘남동여서’라고도 하지만 그러면 헷갈리니까 남좌여우라고 하는 겁니다. 강의할 때 젊은 사람들에게 음양이라고 하면 고리타분하다고 다 도망가요.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해야 알아듣지. 하하.”

    남좌여우는 공수할 때 손모양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혼인날 신랑신부가 주례 앞에 설 때도, 첫날밤 잠자리에 들 때도, 평소 거리를 걸을 때도 부부간 침실에서도 방향을 유념하면 우주의 음양과 더욱 깊이 감응하는 자세가 된다. 그러니 이왕 남녀가 같이 행동하고 살 바에야 음양의 방향을 제대로 알고 있어 해로울 게 전혀 없겠다.

    제수를 진설하는 방식도 평소에 늘 궁금하던 일이었다. 조율이시(棗栗梨枾)니 홍동백서(紅東白西)에 무슨 까닭이 있을까.

    “조율이시라는 말은 암만 찾아봐도 전통 예서엔 안 나와요. 그냥 과실은 남쪽에 차리라는 말만 나오지…. 신위(神位)가 북쪽에 있으니까 앞쪽이 남인 거지요. 과실은 지방과 계절에 따라 올리는 내용이 달라진다고만 나와 있어요. 조율이시는 나중에 한글 예절책을 지은 사람이 자기 생각대로 편리하게 만들어낸 말 같아요. 왜냐하면 한문에는 대구가 있어야 하는데 조율이시에는 마땅한 대구도 없거든.

    다만 전통혼례에는 ‘대추는 씨가 하나니 임금이고, 밤은 세 톨이니 삼정승이고, 감은 씨가 여섯이니 육판서고, 배는 씨가 그보다 더 많으니 다른 벼슬아치다’ 하는 말이 나오긴 해요. 내 생각엔 동조서율, 홍동백서가 아귀가 맞는 거 같아요. 동쪽은 태양이 떠오르는 곳이니 붉은 대추를 놓고 밤은 서쪽나무니(栗자의 구성을 보라) 천상 서쪽으로 가는 거지. 동조서율이 과일의 위치를 말한다면 홍동백서는 차리는 순서를 말한 것 같지 않아요? 원래 한문을 쓸 때는 우측부터 썼으니까 동쪽부터 차리라는 거지….”

    김득중 선생은 1931년생. 광산김씨 40대손, 조선 예학의 종장으로 불리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13대 손으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에서 태어났다. 우리 나이로 마흔일곱이 되던 1977년, 그는 아내를 불러 이렇게 선언한다.

    “부인, 지금까지 내 삶은 처자식에 얽매인 것이었소. 이제부터는 내 인생을 살아야겠으니 양해해주시오.”

    아내는 “언제는 영감 인생이 아니었단 말이오?” 하고 깜짝 놀라지만, 그에게는 사람이 세상에 났으면 뒤에 오는 이들을 위해 하나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가야 한다는 믿음이 확고했다. 이 선언은 지금 듣기에 돈키호테식으로 들리지만 그는 진지했다. 그 신념은 어릴 적 할머니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한국의 예’ 다시 찾다

    “내가 여섯 살쯤 됐을 거예요. 그때 할머니들은 손자를 자랑스럽게 앞세우고 나들이를 다녔거든요. 앞에 쭐렁쭐렁 걸어가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지팡이로 내 옆구리를 쿡 찔러요. ‘왜?’ 하고 돌아볼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말없이 지팡이로 저기 강변에 엎어진 짚신을 가리켜요. 그걸 바로 놓고 오라는 거예요. 요즘 애들 같으면 싫다고 하겠지만 그때는 할머니 말씀을 거역 못하지요. 내려가서 짚신을 젖혔더니 모래가 잔뜩 들었어요. 손으로 모래밭을 파서 즉석 웅덩이를 만들고는 거기다 짚신을 설레설레 흔들었어요. 그랬더니 모래가 말끔히 털어지데.

    그제서야 바로 젖혀놓았더니 할머니께서 만족한 표정으로 지팡이를 내밀어주세요. 붙잡고 올라오라고. 다시 걸어가면서 할머니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득중아, 내가 왜 짚신을 젖히라고 했는지 아느냐? 니가 지나간 다음에도 짚신이 그대로 있으면 뒤따라오는 사람들은 니가 그랬다고 할 겨. 니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할 겨. 앞으로도 지나가는 길에 잘못된 게 눈에 띄면 오늘처럼 바로잡아놓고 가야 하는 겨. 내 말 꼭 명심해 득중아.”

    이 ‘짚신의 교훈’을 그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강의할 때면 빠뜨리지 않고 들려준다. 어느 집에 갔을 때 가훈으로 써 붙여놓은 것을 본 적도 있다.

    그는 2남 3녀를 뒀다. 마흔일곱에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짚신을 일으킬 생의(生意)를 낼 때 막내가 중학생이었다.

    “내 자식들은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주는 게 원칙이에요. 다섯 놈이 다 대학은 제가 벌어서 등록금 내고 다녔지요. 막내를 고등학교까지는 교육시킬 수 있겠다 싶어 생업을 중단했어요. 뭔 일을 할지는 그때부터 찾아보는 거지요. 남이 이미 하고 있는 일은 내가 또 할 필요가 없겠고, 쓸데없어서 안 하는 일은 해봤자 소용없겠고, 꼭 필요한 일이긴 한데 아무도 손대지 않고 있는 일, 그게 뭔지를 찾기 시작했어요.”

    10여 년 전 눈여겨본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폴 한스 잘만이라는 독일인이 한국을 다녀가면서 쓴 ‘나는 한국에 와서 한국을 보지 못했다’는 인상기였다. 동방예의지국이라는 한국에서 예의의 실종밖에 본 게 없다는 내용이었다. 동방예의지국과 예절의 실종, 인간윤리와 사회도덕의 망실! 더구나 자신은 400년 전 ‘가례집람(家禮輯覽)’을 펴낸 조선 예학의 우두머리였던 김장생의 직손이다.

    “그렇다면 한국에 왜 예절이 없어졌을까 고민했어요. 예란 시대에 따라 방법이 달라져야 하는데, 1844년 이재(李縡)의 ‘사례편람(四禮便覽)’ 이후 150년간 예절책이라고는 씌어진 적이 없거든요. 단절된 거지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예절을 연구하고 회복하는 운동을 하자! 일본은 기껏 2~3대를 이어가는 직업도 가업이라고 야단을 떠는데 우리 집안은 예를 연구하는 것이 400년 가업이다. 사라진 예절을 부활시킬 적임자는 바로 나다!”

    마침내 그는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할 일을 찾았다. 일이 있으면 진력하는 것은 광산김씨 집안의 내림이었다. 어릴 적 백부는 제삿날 큰집에 모여 장난치는 종형제들을 모아놓고 꾸중하곤 했다. “다른 집안이 다 예가 허물어져도 우리 집안만은 그럴 수가 없는 겨! 우리집은 예절의 종갓집이여!”

    ‘예절 전문가’ 시대 열다

    그게 뭔 소린가 했다. 열다섯 살에 광복을 맞았다. 장터에 가서 멍석 위에 놓고 파는 책을 기웃거렸다.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 장지연의 ‘조선유학 연원’같은 책에서 사계 김장생이 조선 예학의 종장(宗長)이란 얘기를 읽었다.

    “흔히 조선 18현(賢)이라고 하지만 그중에서 더욱 뚜렷한 어른은 다섯 분으로 압축돼요. 정암 조광조. 그는 왕도정치를 주창한, 요즘 말로 하자면 정치학자였어요. 퇴계 이황. 이분은 성리학자, 즉 철학자셨고, 율곡 이이는 학문을 정치에 적용하려 애쓴 행정학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암 송시열은 교육학자셨고 사계 김장생은 실천을 중시하는 예학자셨어요.”

    은근한 조상 자랑이지만 생업을 그만두고 사재를 털어 ‘한국전례연구원’이라는 단체를 외롭게 설립하는 배경이 바로 이 지점에 있을 것이니 납득할 만하다.

    창립일은 3월1일로 잡았다. “나는 3월1일을 좋아해요. 무너진 정신문화인 예절을 일으키는 운동을 이왕이면 무너진 국권을 되찾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던 날 시작하고 싶었던 겁니다.”

    일단 ‘실천예절’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한다. 옛 예절 책을 뒤져 공부하고 전국의 유림들을 찾아다니면서 이 시대에 맞는 예와 규범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분주하고 치열했지만 다들 외면했다. 정신 나간 사람, 시대착오라는 손가락질도 다반사로 받는다. 월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집을 팔아 전세로 가야 했다. 그러나 회의도 후회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을, 다들 외면하는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만 투철했고 몇 해 뒤 전셋집은 다시 월셋집이 되고 만다.

    1983년 3월1일, 전례연구원 창립 6주년이 되는 날부터 그는 ‘예의생활실천운동’이라는 대형 깃발을 만들어 이를 들고 매일같이 서울시청 앞으로 나갔다. 시청역 1번 출구, 덕수궁 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잡지와 유인물을 나눠줬다. 자신이 쓴 ‘알기 쉬운 관혼상제’라는 소책자도 돌렸다. 그 무렵 나 또한 덕수궁 앞에서 그런 깃발을 구경했던 듯도 하다. 비웃는 사람도 있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동방예의지국의 영광을 다시 누립시다”를 외치며 서 있었다.

    한복을 입고 거리에 선 오십대 초반의 김득중 선생, 그에게 끝내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시대의 희극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한국경제신문’에 이어 ‘동아일보’가 그의 활동을 취재했다. 사회 도덕과 예의가 바닥에 떨어지는 세태를 근심하는 이가 점점 많아졌고 그에게 한 말씀 청하는 단체도 차츰 많아졌다. 서서히, 아니 급자기 그는 바빠진다. 강의, 원고, 방송에 몸을 열로 쪼개도 모자랄 지경이 된다. 1994년부터는 밀려드는 예절강의를 도저히 혼자 감당할 수 없게 된다.

    동지를 구하는 방법으로 연구원 안에서 제자들을 길러내기로 한다. “이걸 배워 과연 쓸모가 있을까요?”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그는 “예절의 전문화, 예절의 직업화, 예절의 자격증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고한다. 예절 지도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고 120시간을 이수하면 수료증을 줬다. 그리고 각 단체와 학교의 강연 요청에 제자들을 출강시킨다. 지금 전례연구원을 졸업한 예절지도자는 52기 총 1100여 명에 이른다. 수강생이 늘 많았던 건 아니다. 단 4명이 올 때도 그는 120시간을 열렬하게 강의했다.

    사위는 서쪽방 손님이라 ‘서방’

    “그들이 전부 나를 잇는 예절전도사가 됐어요. 예절을 회복해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고 다니지요. 지난해에 예의문화창달을 위한 법률이 제정됐어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예절문화인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 법에 명시된 겁니다. 초등학교에도 ‘생활의 길잡이’라는 예절 교재가 쓰이고 있고 내가 쓴 ‘실천예절개론’을 교양과목으로 선택한 대학이 50군데가 넘어요. 이만하면 ‘예절의 전문화’라는 예상이 맞았지요? 노동부는 지난해 예절강사를 직업으로 분류했으니 ‘예절의 직업화’라는 말도 적중했고…, ‘예절 지도사 자격증’은 이제 국가공인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는 예절교육에 국가 예산까지 지원한다니 ‘예절 자격증 시대’가 온다는 말도 현실화한 게 맞지요?”

    월간 ‘실천예절’은 120호까지 발간하고 역부족으로 폐간했다. 대신 그는 예절 특강을 1만여 차례 다녔으며 방송 출연 6000회, 신문잡지 기고 2000회를 소화했다. 크고 작은 예절책도 20권이나 펴냈다. 이런 일을 30년간 계속해왔으니 제자들이 그를 ‘현대예절의 아버지’라고 추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예절 교본을 만드는 일은 말처럼 만만한 게 아니었다. 절하는 방법과 제사와 차례 지내는 법을 문헌 중심으로 발굴해 현대에 편리하게 정리한 책을 냈더니 일단 경상도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광산김씨에 연산이 고향이면 기호학파이고 서인인데 어찌 영남학파 남인들이 그걸 따를 수 있겠느냐는 항변이었다.

    “그걸 예측하지 못할 리 있나요? 퇴계의 수제자인 의성김씨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조카와 자손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써놓은 ‘동자계’라는 책이 있더라고요. 그림만 없을 뿐이지 설명은 우리 집 사계 할아버지 것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아요. 450년 전에는 서인과 남인이 절하는 방법이 통일돼 있었다는 거지요. ‘그래도 나는 아버지께 배운 대로 절하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요. 그건 좋아요. 억지로 바꾸라는 게 아니에요. 부조(父祖)의 법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도 예의거든요. 다만 부조의 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실천예절책을 찾아보라는 거지요.”

    나는 김득중 선생이 얘기하는 칭호 부분에 특히 관심이 갔다. 어릴 적 쓰던 아름답고 다양하던 호칭과 지칭들이 이젠 거의 사라져버렸다. 관계의 예민하고 정다운 교감이 호칭과 함께 사라져버린 느낌이 들어 못내 허전하던 참이다.

    “부르는 호칭과 가리키는 지칭을 아울러 칭호라고 하지요. 김 선생은 시집간 손아랫시누이를 뭐라고 부르지요?”

    이런 이야기가 나는 참 즐겁다. 어머니는 손아랫고모를 박서방댁이라고 불렀지만 오늘 내 입에서 아무개 서방댁이란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동생 댁을 향한 우리 집안 호칭은 ‘새댁’이었지만 이젠 그 말이 아무래도 어색하다. 시대와 정서에 따라 칭호가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데 새로 부를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해 난감할 때가 많다.

    삼촌 고모 동서 이모부 올케 식으로 호칭과 지칭을 통일하는 것도 큰 허물은 아니라는 것이 김득중 선생의 기준이다. 그러나 아직 시골집 어른들은 내가 이런 호칭을 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보고 또 보고’라는 드라마 기억하지요? 그걸 쓰던 임성한이라는 작가가 내게 자문했는데, 한국 텔레비전 극본 중에서 칭호를 가장 정확하게 쓴 드라마일 겁니다. 손부(孫婦)가 할머니에게 자기 남편을 일컫기를 ‘사랑’이라고 말하는 게 나와요. ‘사랑에서는 오늘 숙직이래요’ 하는 식으로. 국립국어연구원에서 그게 잘못됐다고 지적한다는 거예요. 사랑방에 사는 사람이니까 사랑이 맞는 말이거든요.

    지칭에는 대인칭과 거처칭이 있어요. 김대중은 대인칭이고 동교동은 거처칭이에요. 할아버지는 대인칭이고 큰사랑은 거처칭이고. 대개 거처칭이 상대방을 더욱 존중하는 의미로 쓰입니다. 부부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맞으니까 사랑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지요. 아들에게 며느리를 말할 때도 네 처라고 하지 않고 네 댁이라고 부르는 게 높이는 말이에요.”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한 가지만 더 하자. “친정에 가서 자기 신랑을 김 서방이라고 말할 때 서자(字)가 무슨 서자인지 알아요?” 시동생을 서방님이라고 할 때는 글서(書)자이지만 처가에서 부르는 ‘아무개 서방’은 서녘 서(西)자 서방이라는 것이다.

    “사위는 백년손님이거든요. 그러니 서쪽 방에 거처한다고 서방이지요. 이 말도 거처칭으로 사위를 높이는 의미가 들어있어요.” 사위가 서쪽 방에 거처한다는 것은 주동객서(主東客西)의 원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그가 찾아낸 주장이다. 주동객서는 국가원수의 의전에서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방위다. 해 뜨는 동쪽은 그 집의 근본이니 주인이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이 7세이고 객이 70세라도 주인은 동쪽자리를 내줄 수가 없는 겁니다. 사회조직은 반드시 위계가 있는데 위계를 따질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어요. 남녀와 주객과 문무가 그렇지요. 위계는 없어도 앉을 때 좌석배치는 해야 하는 법이니까 남동여서, 주동객서, 문동무서를 미리 정해놓은 겁니다.”

    양반은 사라지고 중인만 남다

    그의 얘기가 다 재미있지만 기중 흥미로운 통찰은 우리말 어미에 관한 부분이다. 하도 절묘해서 주변에 여러 번 말하고 다녔더니 다들 기막히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어학자들은 우리말 어미를 높임말 반높임말 보통말 반낮춤말 낮춤말의 다섯 가지로 분류한다. 높임말은 대개 ‘~까’나 ‘~다’로 끝나는 말로 알고 있다.

    “한글학자 한갑수씨와 전주 가는 길에 동행한 적이 있어요. ~까, ~다로 끝나면 높임말이 맞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해요. 그러면서 말 중간에 시, 세, 셔를 넣으면 높임말이지 어미에 굳이 ~까나 ~다를 넣을 필요는 없는 게 아니냐고 하더군요. 조부모께서 그런 말을 쓰는 거 들었냐고 물었더니 못 들었다고 하데요. 내가 굳이 ‘계축일기’니 ‘구운몽’이니 ‘인현왕후전’ 같은 걸 다 찾아봤어요.

    예전에는 극존칭할 때도 말이 모두 ‘~요’로 끝났어요. ~까, ~다는 개화기 이후 중인들이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요. 일본의 ‘소데스까(그렇습니까)’ ‘소다(그렇다)’의 ‘까’와 ‘다’를 멋있게 봐서 우리말 끝에 따와서 쓰기 시작한 거라고요. 양반이야 일본이 오랑캐인데 개화를 찬성할 리 없었고 그 말을 따서 쓸 리도 없지요. 상민은 개화고 뭐고 먹고사는 일에 급급했고. 개화에 앞장 선 계층은 대개 의관이나 역관 같은 중인이었어요. 광복 이후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이나 작가도 대개 중인층에서 나왔다고요. 그러니 개화된 일본말을 자신도 의식 못하는 새 흉내내게 된 겁니다.”

    심지어 그는 현대생활 문화는 상류문화와 중인문화의 충돌이 아니었나 의심한다. 그 과정에 고급 양반문화는 사라져버리고 그보다 하급문화가 사회의 전범으로 자리잡은 것을 탄식한다.

    “하향평준화하는 것이 문제라고요. 내가 이런 말 한다고 전국의 교육자들이나 작가들이 펄쩍 뛰고 나오면 어쩌지요? 서울대 정옥자 교수도 선비문화를 논하는 책에서 비슷한 말을 하던데, 그리로 다 보내는 거지요 뭐.”

    조선 선비를 신비화할 생각은 없지만 한국 양반문화 안에는 분명 청빈한 정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기개, 종교적이라 할 만한 일상의 엄숙주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싶다. 아침마다 머리를 가지런히 빚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책을 읽던 사람들, 그들은 가난해도 마음 깊이 유머와 여유가 있었고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자기 제어력이 탁월했다. 아니 적어도 그런 태도가 선비들의 이상이었다. 오늘 우리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정신문화의 하향평준화라는 말 앞에서 별의별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삼촌이나 고모, 숙모 등 가까운 친족을 부르는 호칭이던 아저씨, 아주머니란 말이 일반화된 데 대해서도 그의 견해는 독특하다. 그리고 대단한 설득력을 가진다.

    “아주머니는 시장에서 좌판을 벌인 사람들이 호객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말이었어요. 점포가 있는 상인들은 호객할 필요도 없었겠고 좌판 상인들이 ‘아저씨~’ 하면 지나가던 사람이 어느 조카가 날 부르나 싶어 돌아보게 되잖아요. 그걸 노리고 생겨난 말이에요.”

    ‘Woori-ism’으로 승화된 仁과 禮

    그는 일찍이 한국인 정신을 제창했다. 열예닐곱 살 무렵 논어를 공부하다 인(仁)이라는 글자 속에 사람(人)이 둘(二)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의 소유격은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것에도 착안해 한국인 정신을 ‘우리’라고 정리하고 ‘한국인 정신은 우리(仁)이고 우리는 사람이며 우리(仁)는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남을 사랑하려면 이기심을 버려야 하는데, 이기심을 버리려면 예를 실천해야 한다’라고 인과 예의 관계를 한국인의 근본 정신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내가 ‘우리’ 정신을 말한 지 10년이 썩 지난 후에 미국에서 ‘me-ism’과 ‘woori-ism’을 비교 연구하는 단체가 생겼어요. 그 단체에서는 지금 ‘Me-Woori’라는 제호의 월간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니까요. 우리가 가진 가치를 남이 먼저 주목하고 있다는 겁니다.”

    주례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는 반드시 전제를 단다. 혼인날 이전에 부부와 가족 예절에 관해 개별 특강을 듣지 않으면 허락하지 않겠다고! 신랑신부가 찾아오면 장장 다섯 시간동안 부부예절을 강의한다.

    부부는 서로 경어(敬語)를 써야 한다. 세배할 때는 맞절을 해라. 호칭은 ‘여보’ ‘당신’ 하다가 마흔이 넘거든 ‘부인’ ‘영감’(아무래도 어색하다!) 같은 보다 품격 있는 말로 바꾸어라. ‘엄마’ ‘아빠’라는 호칭은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하는 날 떼게 해라 등등…. 그러고 나면 그 부부는 다른 사람들과 류(類)가 달라진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게 해야 해요. 어떻게 된 게 서른이 넘어도 엄마 아빠야. 그래 가지고는 성인이 될 수 없어요. 초등학생들도 엄마 아빠라고 말할 때는 어리광을 부리다가 말을 바꾸면 금방 의젓해지고 제 행동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고요.”

    “한번은 PD들이 모인 자리에 예절 강의를 갔어요.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쯤은 하도 일반화된 일이니 용납해도 되는 게 아니냐고 물어요. ‘그게 일반적인 일이면 다들 집에 가서 아내더러 ‘엄마’라고 부르라’고 했지요. 그 후로 방송에 나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으면 진행자가 일부러 ‘남편 말이지요?’ 하고 고쳐주데요. 몇 해 지나니 싹 없어지던데요. 말이란 그런 거거든요.”

    혼인이란 말을 일반화한 것도 그다. “결혼이란 두 성(姓)끼리 사돈을 맺는다는 뜻이지 남녀가 결합한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혼인서약을 왜 자꾸 결혼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장가들 혼(婚)에 시집갈 인(姻)인 혼인은 엄밀히 말해 신랑신부가 합방하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니 예전에 혼인은 해 지는 시간에 맞춰서 했지요. 황혼이란 말도 거기서 나온 겁니다.”

    이런 주장을 1989년부터 계속했더니 1994년에는 가정법률 용어가 ‘혼인’으로 통일됐다. 이럴 때 김득중 원장은 진정 뿌듯하기 짝이 없다. ‘동방예의지국’이란 말의 근거를 문헌에서 처음 찾아내고 동이(東夷)라는 말 뜻을 새롭게 조명한 것도 그의 업적 중 하나다. 동이를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동쪽 오랑캐인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夷)라는 말 안에 오랑캐라는 개념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큰 활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의 ‘동이(東夷)’는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과 달리 개 돼지 벌레를 뜻하는 부수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한국전례연구원은 30주년을 맞는다. 20년은 박수치는 사람 없이 그 혼자였고 10년 전부터는 동조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팔았던 집을 그새 다시 샀고 자그만 사랑방까지 만들었다. 고등학교까지만 학비를 대준 2남3녀는 모두 성인이 됐다.

    ‘이상적 인간형’ 다시 찾기를

    “얼마 전 고려대 교수 하는 큰자식이 그럽디다. 저희 형제들끼리 모여 하는 이야기인데, 대학 6년 동안 아버지께 받은 용돈은 4만8000원밖에 없다고. 내가 뒤에서 듣고 있다 참견을 좀 했습니다. ‘너 무슨 착오가 있나보다. 내가 왜 대학생한테 용돈을 주겠냐. 아마 심부름을 시키면서 차비를 준 건데 그게 남아서 네가 용돈이라고 착각하나보다’라고요. 하하.”

    자기 절제와 검약이 아름다움임을 우린 어느새 잊어버렸다. 소비와 자유만이 최상의 삶인 줄 안다. 많이 벌어 많이 쓰는 ‘부자 되세요’가 사회구성원 전체의 소망일 순 없지 않을까.

    예의와 도리란 케케묵은 격식이 아니라 인간됨의 근본이다. 성인이 된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지 않는 김득중 선생의 교육은 우리에게 중요한 깨우침을 준다. 인간다운 인간이란 뭔가.

    예절을 배운다는 건 절 하는 방식만을 배우자는 게 아닐 거다. 겉으로 부드럽고 안으로 강한 인간을 키우는 법, 남에게 후하고 자신에게 엄정해지는 길, 놀랍게도 그 비법이 우리 예법 안에 고스란히 온축돼 있다. 우리 사회에서 예(禮)의 인기가 없어진 건 그게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상적인 인간형에 대한 공감대가 무너졌기 때문인 것 같다.

    禮 연구 400년 가업 잇는 김득중 한국전례연구원장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김서령의 가’


    김득중 원장이 지난 30년간 꾸준히 부르짖어온 포인트도 바로 여기 있다. 이상적 인간형을 되찾자. 그건 분명 재물도 아니고 명예도 아닐 거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에 도달한 지금 다들 그걸 한번 짚어봐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냥 이대로 달려도 좋은가? 그게 김득중 원장의 삶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팁이다.

    덧붙임 : 김득중 원장을 만나기 전 나는 고백했듯이 예절 회의론자였다. 그와 다섯 시간 이야기하고 난 후 예절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됐으니 나도 김 원장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온 젊은이들처럼 ‘류(類)가 달라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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