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일본군 위안부의 국제정치학

우파 핵심 아베, 장기 집권 노려 ‘국제 왕따’ 감수

  • 양기호 성공회대 교수·정치학 khyang@mail.skhu.ac.kr

    입력2007-05-03 15: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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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부의 국제정치학

    미국 고문서국이 1998년 비밀 해제한 1944년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가 ‘창녀’로 징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해보였다.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을 명시한 미국 세계사 교과서(아래).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민간단체 운동 수준에서 벗어나 세계 각국 정부와 유력 정치인들이 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내면서 공식견해를 표명해 일본 정부를 곤란하게 하고 있다. 다급해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방문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뜻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을 정도다.

    이전에 아베 총리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안 통과를 막을 속셈으로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고 발언했다. 우파 정치인들로 구성된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모임’(이하 ‘의원모임’) 회원 40여 명은 강제연행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의 수정을 요구했다. 문부성 차관을 지낸 시모무라 하쿠분 관방 부장관도 개인적으로 고노 담화 폐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소 다로 외상은 결의안이 일본 정부의 견해를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으며, 근거도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앞으로 일본 정부가 채택 거부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요 언론인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타임’등은 일본 정계의 움직임과 아베 총리의 발언을 냉담한 어조로 소개하면서 하나같이 비판했다.

    美 “아베, 민주국가 지도자의 수치”

    이들은 사설과 기고문에서 “아베 총리의 발언은 점차 개선돼가는 한국, 중국과의 관계를 냉각시킬 것이며, 갈등을 해소하는 데 비싼 외교 비용을 치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는 3월24일 “아베 총리의 위안부 발언이 과거의 자세에서 후퇴하고 있으며, 이는 주요 민주국가 지도자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하원 결의안 제출과 언론의 비판에 자극받은 미 국무부는 일본 정부에 솔직하고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라고 촉구하면서 이전의 방관적인 자세에서 선회했다. 미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책임 소재를 물은 것은 처음이었다. 일본을 방문 중이던 존 네그로폰테 미 국무부 부장관은 위안부 문제를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비판했으며, 토머스 시퍼 주일 미국대사도 일본군이 강제 동원한 위안부가 존재했고 이들이 성매매를 강요당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3월19일 일본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치가들의 발언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우려를 표명했다. 매케이 캐나다 외교장관도 아소 외상과 6자회담에 관한 전화 통화 중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물었다. 필리핀과 호주에서도 현직 각료가 아베 총리의 발언을 비난했다. 중국 외교부는 3월8일 공식 발표문을 통해 위안부 강제연행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심각한 범죄로, 일본 정부가 용기를 발휘해 역사와 미래에 책임을 지고 이 문제를 적절하고 올바르게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역사인식에 대해 국제사회가 일본 비판에 나서서 공동보조를 맞추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 내에서도 비난의 물결이 거세게 일고 있다. ‘아사히신문’ 사설은 아베 총리의 발언이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고 힐난했다. 야당인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도 일본 외교의 고립을 자초했다며 철회를 주장했다.

    강제동원의 진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3·1절 담화문에서 역사 문제를 외교적인 범위 내에서 원론적인 수준만 거론했는데 이는 아베 정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아베의 왜곡 발언에 청와대는 적지 않게 실망했으며, 한국 내 대일(對日) 불신의 적신호가 되살아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분위기에 당황한 아베 총리는 3월26일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해 총리로서 사죄한다고 일단 표명했다. 그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을 묻는 질문에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고만 답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베 총리의 측근인 시모무라 관방 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의 관여가 없었다”며 재차 강제성을 부인했다. 그는 종군간호부나 종군기자는 있었지만 위안부는 없었으며, 가난한 부모가 딸을 판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안부 문제의 최대 쟁점은 강제성 여부다. 피해자의 뜻에 반해서 당국과 일본군이 조직적인 강제연행을 했는지, 민간업자가 피해자 부모에게 돈을 주거나 당사자에게 공장취업이라고 속이고 연행한 것인지, 위안소 설치와 시설 내 생활이 강제적이었는지 등이 그 내용이다.

    피해자 숫자에도 차이가 크다. 위안부 문제의 1인자로 평가받는 요시미 요시아 기주오(中央)대 교수는 피해자를 최소 5만명에서 많게는 20만명으로 추정한다. 반면 우익 역사학자인 하타 이쿠히코 전 니혼(日本)대 교수는 위안부가 약 2만명이었으며 그중 일본인이 40%, 조선인이 20%, 중국인이 10%였고 나머지 30%는 현지에서 모집했다고 주장한다.

    한국 정부가 ‘종군위안부’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라고 표현하는 것은 위안소 생활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동안 미국에서 공개된 공문서, 피해자의 생생한 진술과 사진, 일본군 개입을 입증한 문서들을 강제성의 증거로 보고 있다. 일본에서도 1977년 일본 헌병 출신인 요시다 세이지가 일본군이 조선에서 젊은 여성을 강제 연행해 위안부로 삼았다고 증언했고, 1983년에 쓴 책에서 자신이 제주도에서 일본군의 협력을 받아 일주일 만에 205명의 여성을 연행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줄곧 위안부 모집이 민간업체가 한 일이라고 발뺌해왔으나, 1992년 1월 방위청 자료실에서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에 개입한 사실을 입증하는 문서가 확인되자 이듬해 8월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일본 정부의 개입을 시인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다. 이것이 ‘고노 담화’다. 발표 당사자인 고노 현 중의원 의장은 2006년 11월 아시아여성기금 인터뷰에서 위안부 모집에 정부가 직접 관여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징집을 명령한 구(舊)일본군 자료는 은폐 처분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또 정부 관헌이 위안부 모집에 관여했다는 점은 피해자 진술로 뒷받침되며, 당시 조사한 16명 이상의 위안부 진술은 사실로 인정된다고 말한 바 있다. 고노 의장은 1993년의 고노 담화가 신념을 갖고 한 것이며, 이제 와서 취소할 뜻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의원모임’의 억지 주장

    우파 정치인들의 ‘의원모임’은 위안소 설치에 관한 일본군 개입은 인정하되, 끌려온 정황에 대해서는 16명의 피해자 진술 외에 밝혀진 것이 없다며 강제성을 부인한다. 또한 고노 담화는 당시 한일 양국의 민간단체가 격렬하게 항의를 벌여서 정치적 판단으로 강제성을 인정해버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당시 미야자와 총리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한국측에서 강제연행을 담화 문건에 삽입하면 나중에 문제 삼지 않겠다는 요구를 해왔고, 악화된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본이 이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안소 설치 외에 위안부 모집과 운영은 민간업자의 책임 아래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당시엔 공창(公娼) 제도가 있었으며 민간업자가 여성들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 점은 있으나, 군대나 정부가 강제 연행한 사실은 없었다고 본다. 단 1건 자바섬에서 일본군이 현지 여성을 강제 연행한 ‘수라만 사건’이 있었지만, 범죄를 저지른 군인은 즉시 처벌받았으며 이것은 오히려 강제연행이 이례적인 일임을 시사한다고 강변한다.

    심지어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수년전 사설에서 “전시근로에 동원된 여자정신대를 위안부 사냥을 위한 제도처럼 캠페인하고 있는 일부 매스컴의 역사 날조는 자학(自虐)사관의 극치”라고 비난했다. 독일도 전쟁 당시 점령지에서 장병 위안용으로 국가가 ‘여성사냥’을 했다며,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이 워낙 거대악(惡)이어서 위안부 문제는 불문에 부쳐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발견된 각종 자료와 증언은 일본군 위안부가 명백한 강제연행이었음을 입증한다. 1945년 중국 쿤밍에서 일본인과 한국인 포로를 조사한 미 육군 조사보고서는 싱가포르에 있는 일본 공장의 여직공을 뽑는다는 신문광고에 속아 수백명의 소녀가 끌려왔다고 밝혔으며, 최근 공개된 미 국립문서보관소 기밀보고서에서도 강제연행이 확인된 바 있다. 국제법에 비춰봐도 1925년 일본은 취업협정, 조약, 부녀자 매매금지 조약에 서명하고 1932년 ILO(국제노동기구) 29호 강제노동조약에 가입했다. 위안부는 말할 것도 없고 공창제 자체가 이미 조약 위반인 것이다. 외견상 당사자와 자유의사 계약형태를 취했더라도 채무로 인한 구속과 감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중국 산둥성에서 기관총 사수로 복무한 가네코 야스기는 3월10일 ‘TV도쿄’ 인터뷰에서 동료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을 납치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위안부가 매우 비참한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강제성이 없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 일본 정부가 하루 빨리 사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쓰치야 고켄 전 일본변호사협회장도 4월10일 “민간업자가 아닌 군대가 위안부를 직접 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며 아베 총리의 발언을 정면 부인했다. 그는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강제라는 용어가 없다고 해서 강제성을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비판했다.

    아베 총리가 관헌에 의한 폭력납치가 없으면 강제연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선군 사령관을 지낸 우쓰노미야 대장의 일기가 최근 발견됐는데, 여기엔 조선인 30명을 학살한 제암리 사건을 은폐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위안부 관련 자료를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폐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암시한다.

    일본 우익들이 기록 문서를 중시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실증사학 자세를 취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네오 나치’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네오 나치는 유대인 말살을 지시한 히틀러의 서명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다는 논거로 유대인 학살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미국 내 자료, 그리고 일본에서 아직 조사되지 않은 수많은 일제시대 문서를 조사하면 강제연행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이 속속 드러날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사죄 미루고 역사 논쟁 일관

    올해는 난징 대학살 70주년이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난징 대학살의 사망자가 과연 30만명인지에 대한 의문 제기가 끊이지 않는다. 사망자 숫자를 수천명에서 많게는 4만명, 또는 20만명으로 줄이고 있다. 당시 난징 거주 총인구가 20만~25만명이었다고 설명하면서 “서구 학자들도 30만명은 과장된 수치라고 했다”며 논문을 인용한다.

    일본 정부와 우파 정치인들은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갔는지, 난징에서 30만명 이상이 죽었는지에 대해 정확한 근거를 대라면서 사실 근거 확인에 더 비중을 둔다. 과거 반성과 사죄라는 원칙을 지키고 보상을 실시하면서 그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강제연행이나 대량학살 자체를 부인하는 일본의 왜곡과 편견은 그야말로 상식 이하다.

    일본 내 역사 논쟁은 1990년대 ‘잃어버린 10년’ 기간 특히 심각했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 논쟁이 격화하는 것은 우파인 아베 정권의 등장과 무관하지 않다. 1993년 호소카와 총리의 침략전쟁 인정, 일본군 위안부 파문과 고노 담화 등으로 인해 전후(戰後) 반성 분위기가 고조되자 우익은 이에 대항해 역사검토위원회를 설치했다. 1995년 일본 국회에서 ‘종전 50주년 부전(不戰)결의’가 나오자 우익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양심적이고 진보적인 정치인들의 전후 반성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와 정비례해 우익의 자극적인 역사왜곡이 터져 나오고 결국 역사 논쟁으로 점화되는 것이다.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일본의 한류(韓流) 붐이나 한국의 친중(親中) 성향은 일본 내에서 반대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최근 일본에서 혐중(嫌中)론, 혐한(嫌韓)론을 다룬 만화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혐한론 만화가 무려 68만부나 판매될 정도로 한국, 중국에 대한 역사전쟁이 유행하고 있다. 지난 4월8일 지방선거에서 극우파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가 110만표 이상의 표차를 내면서 도쿄도지사에 당선된 것도 일본 사회의 우경화 바람과 맥을 같이한다.

    미 국무부를 움직인 힘

    위안부 문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은 어떤 맥락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미국 내 관심은 최근 들어 높아진 것이다. 자살한 중국계 미국인 작가 아이리스 창의 ‘레이프 오브 난징(Rape of Nanjing)’은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을 토대로 미국의 대형 인터넷 회사 AOL(아메리카 온라인)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난징’을 제작했고, 이는 중국에서도 곧 상영될 예정이다. 또한 조지프 론이라는 의사가 ‘난징의 악몽’이라는 영화를 제작해 2005년 6월부터 미국 각지에서 상영하면서 일본군의 전쟁범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미 하원에서 3년 넘게 잇달아 위안부 결의안을 제출한 에번스 의원에 이어, 일본계 마이크 혼다 의원이 재차 결의안을 제출한 것은 미국 정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처음으로 열린 위안부 청문회에서 위안부 출신의 네덜란드계 호주인 오헤른 할머니가 증언하면서 심각한 국제인권 문제로 인식됐다. 특히 지난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과 상원을 장악하면서 결의안의 하원 통과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국무부도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일본 정부와 아베 총리가 결의안 통과를 저지하고자 강제동원을 부인한 돌출 발언이 미국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미 국무부도 일본 정부의 책임 있고 성실한 역사인식을 주문하게 됐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아베 총리가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인한 뒤 미국 내 지일파(知日派)가 위화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인 후나바시 요이치에 따르면 이제는 미국의 주요 인사들이 먼저 일본 정치인에게 위안부 문제를 꺼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아베 총리가 반론을 제기하자 ‘뉴욕타임스’가 성노예 범죄 사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도했듯이 과거의 진실을 은폐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일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의회에서는 일본 정치인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으며, 일본인 납치 문제에 동정적인 공화당 의원들조차 이런 분위기에선 하원에 제출된 위안부 결의안에 반대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부시 정권의 고위관료들도 고노 담화 수정을 요구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는 일본 우파 정치인들로 인해 일본인 납치에 대한 동정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야스쿠니 문제로 ‘점수’를 깎인 데 이어 위안부 문제로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한 일본 잡지는 우익인 나카가와 쇼이치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 일본의 핵무기 보유를 주장하자 백악관이 출입금지 대상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문을 전했다. 일부 미국 학자들은 일본이 이렇게 나오면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전략적으로 중국을 상대로 대화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국제적 고립 위기

    이처럼 일본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흐려진 상황은 최근 수년간 이어져왔다. 그래도 부시·고이즈미 시대에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일 양국이 전우(戰友)나 다름없었고 리처드 아미티지나 마이클 그린 같은 지일파가 정권 중추에서 외교정책을 담당하고 있어 대일관계의 전략적 중요도가 유지됐다.

    하지만 아베·부시 시대에는 이런 측면이 둘 다 약화되면서 전략적이라기보다 그때그때 이슈에 따라 양국의 상호이익과 관심이 교차하는 상황으로 전환하고 있다. 민주당이 상·하원을 장악하면서 소수민족이나 NGO의 주장이 민주당 의원을 통해 정책에 반영되기 쉬운 구조로 바뀐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칼럼니스트 후나바시 요이치는 일본 내 정치에서도 전후세대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일본인 납치나 위안부 문제와 같은 자극적이고 개인적인 단일 이슈가 외교정책에 침투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이 국제사회로부터 부정적인 측면에서 주목받는 경우가 생겨났다. 부시 정권의 고관들은 위안부 문제는 야스쿠니 참배와 본질적으로 다른 인권 문제로 아무도 일본을 옹호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될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북핵 문제를 주로 다루는 6자회담에서도 일본측은 납치 문제 선결을 주장해 다른 참가국들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것은 대일(對日)인식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돌려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 중국과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거나 양국과 화해하지 못할 경우 미국은 미일동맹을 중심으로 한 대일 전략에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다. 일본이 과거 역사에 대한 참회와 반성을 바탕으로 동북아지역의 협력 체제를 만들어가는 과감한 선택을 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마는 구조가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역사인식을 되돌려 화해의 선택지를 고를까. 그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본다. 고노 담화 폐지를 추진하는 우익세력의 주축은 나카야마 나리아키가 대표를 맡고 있는 ‘의원모임’으로 전체 약 40명이며, 5선 이하의 ‘젊은 의원모임’은 80여 명에 달하는데, 양자를 결합한 우파의 핵심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아베 총리이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1997년 2월 ‘젊은 의원모임’ 발족을 주도했다. ‘젊은 의원모임’은 우익단체 새역모(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가 발족한 지 한 달 만에 만들어졌다. 당시 대표는 나카가와 쇼이치 현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이고, 사무국장이 아베 의원이었다. 이들은 새역모의 활동을 지원해왔다. 문부성 교과서과장, 교과서 집필자, 교과서회사 사장 등을 불러서 침략전쟁이나 위안부 문제 기술에 대해 격렬하게 추궁한 적도 있다.

    ‘젊은 의원모임’은 고노 담화가 확증 없이 강제성을 인정했다고 비난하면서 고노 요헤이 의원을 불러 직접 비난하기도 했다. 이들은 통산 10회에 걸친 연구회에서 일본 역사 교육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며, 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왜곡됐는지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베 총리는 일본 외교의 ‘사죄 체질’을 개선하고 국민운동을 통해 정력적으로 개선해가야 한다고 홈페이지에서 주장한 바 있는데, ‘국민운동’이란 위안부를 기술한 기존 교과서에 대한 새역모의 공격을 의미했다.

    “역사교육과 헌법개정은 표리일체”

    그 후 이들은 우파연대를 확산했다. 새역모 교과서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고 채택 저지 시민운동이 활발해진 2001년 6월, 젊은 의원모임은 민주당 의원들과 연계해 나카가와 쇼이치를 회장으로 초당파 의원연맹인 ‘역사교과서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자민당 외에 민주당, 자유당, 보수신당 의원들이 참가했으며, 이들은 문부과학성 간부를 불러 난징 대학살을 부정하는 학설을 교과서에 싣도록 하고, 일본의 침략 사실을 검정에서 삭제하지 못하도록 한 주변국 조항을 철폐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아베 총리는 2004년 6월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의원모임’이 주관한 합동 심포지엄에 자신의 명의로 문서를 보냈다. 그는 이 문서에서 “역사교육은 국가 장래의 근본이 걸린 중요한 문제이며, 교과서의 검정과 채택은 엄정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 역사교육은 헌법개정이나 교육기본법 개정과 표리일체인 중요과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2005년 NHK에 위안부 특집방송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자민당 내 역사 왜곡의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며 주도해온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베 총리의 주변인물도 더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대표적인 우익 인물 나카가와 쇼이치는 아베 정권에서 당내 3역인 정조회장이 되면서 유력한 ‘포스트 아베’로 주목받고 있다. 야스쿠니 참배를 주장하는 나카가와는 납치의원연맹 회장으로 대북 강경 자세를 견지하고, 동지나해 가스전 개발 문제에서도 강경 자세를 굽히지 않고 있다. 그는 1998년 7월 농수산대신에 취임한 직후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강제연행이 있었는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역사교과서 왜곡 당시 문부과학성 대신이던 나카야마는 현재 ‘의원모임’을 주도하고 있으며, 그의 아내 나카야마 교코 또한 대북 강경파로 아베 내각에서 납치 문제 전담보좌관을 맡고 있다.

    ‘관저(官邸) 중심’ 정치의 폐해

    아소 다로 외상은 창씨개명이 조선인이 원해서 한 일이라고 강변했는데, 그의 부친이 경영했던 아소 탄광은 많은 조선인이 끌려가 혹사당하다 숨져간 곳이기도 하다. 그는 2006년 2월 국회질의 답변에서 “태평양전쟁에 대한 정확한 평가는 후세 역사가가 할 일이며, 전범은 일본 국내법에서 범죄인이 아니고 극동군사재판에서만 범죄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같은 해 3월 참의원 예산위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대만의 교육수준을 높였다고 말했다.

    이렇듯 아베 측근들은 사실상 ‘역사왜곡팀’으로 채워져 있다. 시모무라 하쿠분 관방 부장관은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을 삭제하자고 주장한 대표적인 우파 인사로 교육기본법 개정을 위한 핵심참모 노릇을 해왔다.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세코 히로시게 홍보담당 보좌관, 야마타니 에리코 교육재생담당, 이노우에 요시유키 정무보좌관, 다카이치 사나에 이노베이션 담당장관 등은 적어도 위안부와 북한 문제에 관한 한 아베와 DNA가 거의 일치한다.

    이 같은 ‘관저 중심’ 정치가 되다보니 역사 왜곡 발언이 나오기 쉬운 정책결정 구조도 문제다. 아베 내각은 측근인사를 중심으로 한 총리관저 및 비서관 정치를 강화해왔다. 아베 총리가 만난 주요 인사 통계를 보면 총리보좌관과의 접촉빈도가 18.9%로 고이즈미 정권기의 0.2%에 비해 급격히 높아졌다. 반면 외무관료 접촉도는 17.8%에서 6.5%로 크게 떨어졌다. 아베는 관료에 대한 불신이 커 차관과도 1대 1로 잘 만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우파 정치인들은 아베 총리가 역사 문제에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외무성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참배에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은 외무성 관료들이 입김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며, 2006년 9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될 때도 가토 료조 주미대사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몰아붙였다. 당시 아베 총리가 가토 대사를 크게 질책하자 가토 대사는 “대사관이 미 국회에 대응하기는 어렵다”고 실토했다고 한다.

    위안부 결의안이 미 하원을 통과할 것인지는 일본 외교의 도덕성이 국제사회와 동아시아 외교무대에서 지속적으로 다뤄질 것인지와 맞물려 있다. 미 의회는 나치 전범 공개법을 만들어 합동조사반(IWG) 활동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난해엔 일본 관련 기록 공개법을 만들었고 올해는 연방 차원의 징용배상 특별법과 IWG 예산지원법을 통과시켰다. 미국 내 여론이 나치 관련자의 책임을 묻고 그 다음으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책임을 따지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역사 왜곡과 장기 집권 야심

    그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결의안 통과를 막기 위해 의원을 파견해 미 의원들을 설득하고 유력 로비스트 회사와 계약을 맺는 등 전방위적 방어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캘리포니아의 한 대학에서 한인 사회의 지원을 바탕으로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일본은 영향력 있는 미국인 일본 연구자를 동원해 계획을 무산시켰다. 같은 해 홀로코스트 박물관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회를 개최하려 했을 때에도 장소 이용을 방해했다.

    일본 정부는 주일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60억달러의 비용을 일본이 부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결의안 통과를 막기 위한 대미(對美) 로비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미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통과하기까지는 만만치 않은 저항이 예상된다.

    아베 정권이 국내에서 우익 정서를 이용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위안부 발언은 아베 정권의 지지율과 상관관계가 높다. 실제로 위안부 강경발언과 야스쿠니 참배는 지지율을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힌다. 더구나 현재 아베 총리에 대한 지지율은 취임 때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지금은 30%대로 추락했는데, 일본 정계에서는 지지율이 40% 이하로 낮아지면 정권의 구심력이 떨어져 정국 운영이 힘들어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일본군 위안부의 국제정치학


    1961년 전남 목포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일본 게이오대 박사(정치학)

    동북아시대위원회 전문위원, 한국정치학회 일본위원장, 한국국제정치학회 일본위원장

    現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저서 : ‘신한일관계론’ 등


    우익들은 아베 총리가 자신의 정치 신념에 대의를 내걸고 가치관이나 정치 자세를 본격적으로 밝히라고 압력을 넣고 있다. 아베 총리의 저서 ‘아름다운 나라로(美しい國へ)’가 50만부나 팔린 것은 아베의 정치 자세나 이념에 공감하는 세력이 그만큼 두텁다는 증거다.

    아베 총리는 총리 후보 시절에 “5년 안에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총리 임기 3년을 감안하면 2기 6년 정권을 구상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장기 집권을 위해 자신의 권력기반인 ‘의원모임’의 지지가 불가피하며, 이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 사회와 정계의 우경화 흐름 속에서 앞으로도 위안부와 야스쿠니 참배 같은 역사 문제는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으며, 불씨는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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