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대선주자 정치입문 비화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 일러스트레이션·최남진

    입력2007-05-07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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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주자 정치입문  비화
    자칭 ‘소시민’ ‘대학교수’ ‘대기업 회장’ ‘방송기자’인 네 사람이 ‘이직’을 했다. 새로운 직업은 ‘정치인’이다. 박근혜(朴槿惠·55) 전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孫鶴圭·60) 전 경기도지사, 이명박(李明博·66) 전 서울시장, 정동영(鄭東泳·54)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그 주인공이다. 현재 거명되는 대선주자 중 가장 지명도가 높은 네 사람이 정치인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 과정은 어땠을까. 이들은 전 직장을 떠날 때부터 새로 발 담글 직장에서 ‘CEO’가 되기 위한 꿈을 꾸고 있었을까.

    대한민국호(號)를 5년 동안 이끌어갈 선장이 되겠노라고 공표한 네 사람의 캠프는 벌써부터 총소리 없는 전쟁터 같다. 기싸움은 말할 것도 없고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며 필자에게 대놓고 상대 캠프의 분위기를 묻는 이도 있었다. 누가 기사의 맨 앞에 등장하는지, 이런 ‘사소한’ 문제에도 관심을 나타냈다.

    “지지율 순서대로 (기사를) 쓰실 겁니까?”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어 상대적으로 느긋한 이명박 전 시장 진영을 제외한 세 곳 캠프의 핵심 참모들이 진반농반의 뼈 있는 질문을 던졌다.

    “아뇨. 세종대왕이 정한 ‘가나다’ 순서대로 쓸 겁니다. 그게 공평할 것 같네요.”



    박근혜, 손학규, 이명박, 정동영. 글을 싣는 순서는 그렇게 정해졌다.

    1997년 12월2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15대 대통령선거를 코앞에 둔 터라 1분 1초가 아까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녀인 근혜씨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박씨가 15대 대선에서 어느 후보를 지지할지를 가늠케 하는 자리이자 그가 공개적으로 정치 참여의 뜻을 밝힌 순간이기도 하다.

    당시 각 대통령후보 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씨를 영입대상 1순위로 손꼽았다.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대구·경북 지역 표심(票心)을 흔들 적임자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 박태준 총재를 앞세워 박 전 대통령 가족에게 상당한 공을 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박씨가 이회창 후보를 만나면서 다른 후보들은 ‘닭 쫓던 뭐’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회창의 천군만마 박근혜

    단 한 표가 아쉬웠던 이 후보는 강원도 강릉에서 유세를 마치고 박씨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른 후보에 비해 대구·경북 지지율이 높은 편이던 이 후보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북 구미가, 육 여사는 충북 옥천이 고향이니 박씨가 선거 전면에 나서준다면 경북과 충북에서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공세를 완벽히 차단할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1974년 8월15일 육영수 여사의 죽음은 ‘인간 박근혜’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 중이던 그는 급히 귀국해 22세의 나이로 이후 5년여 동안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했다.

    1979년 10월26일 청와대 2층에서 아버지와 함께 한 아침식사.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다음날 새벽 1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관저에 올라와 곤히 잠든 그를 급히 깨웠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10·26 이후 한 달이 채 안 지난 1979년 11월21일. 그는 청와대를 떠나 서울 중구 신당동 사저로 옮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그의 일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언론 인터뷰도 사절했고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손을 뻗쳤지만 ‘칩거’를 고집했다. 청와대에 있을 때부터 그토록 동경하던 평범하고 소박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다. 육영재단 이사장(1982~1992년)과 정수장학회 이사장(1994~2005년)을 맡았지만 그의 활동은 소극적이었다. 1997년 12월 이회창 후보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자신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공직의 책임에서 벗어나 독서와 사색,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는 청와대를 떠나 보통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 테니스에 푹 빠져 살았다. 그는 매일 오전 11시경이면 서울 양재동 테니스코트에 나타났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4~5시간씩 테니스코트에서 살다시피 했다. 강신옥 전 의원과 정몽준 의원,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 장관이 그와 함께 테니스를 즐겼다. 박씨와 정 의원은 초등학교 때부터 절친한 친구 사이. 강 전 의원은 정 의원과 막역한 사이였다.

    테니스장 찾아온 특사들

    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양재동 테니스코트를 찾는 정치인의 발길이 잦아졌다. 각 대통령후보 진영에서 보낸 특사들이었다. “도와달라”는 사람이 많았지만 박씨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게 그 이유였다.

    박씨는 정치 참여에 앞서 강 전 의원과 잘 아는 정몽준 의원에게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는 정치인뿐만 아니라 함께 운동을 한 지인들에게도 “내가 정치를 해도 되겠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씨와 20여 년간 함께 운동한 장모씨는 “나는 정치를 하라고 권하는 쪽”이었다며 “(테니스를 같이 쳤던) 주변 사람들 대부분은 정치를 하라고 등을 떠미는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그와 함께 허물없이 테니스를 친 지인에 따르면 “정치와 담 쌓고 살던 그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 것은 정치권이 제시한 ‘달콤한 조건’ 때문이 아니라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그에게 “당시 정치권이 제시한 ‘조건’이 무엇이었냐”고 되묻자 대답을 회피했다.

    18년 동안 소시민의 삶을 고집하던 박씨는 이회창 후보를 만난 지 8일 후 한나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선거 일주일 전인 1997년 12월10일 박씨는 구미지구당에 입당계를 제출했다. 같은 날 오후 경북 구미시 박 전대통령 생가를 방문한 이 후보로부터 선거대책위원회 고문직을 제의받고 이를 수락했다. 그러면서 “이 후보의 당선과 나라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박 전 대표가 ‘정식’ 정치인으로 데뷔한 이후의 첫 족적이다.

    그가 전격적으로 이회창 후보와 손을 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나라당 입당 당시 기자들과 만나 ‘DJT(김대중, 김종필, 박태준) 연대’가 박 전 대통령의 업적을 승계하겠다고 주장한 데 대해 “1980년대 들어와 아버님의 업적이 왜곡됐을 때 침묵하며 시대에 편승해 아버님을 매도했던 사람들의 말은 자신들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정치 참여를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선주자 정치입문  비화

    1992년 5월, 국민당 창당에 대한 이견으로 갈라선 정주영 국민당 대표와 이명박 민자당 의원이 롯데호텔에서 열린 ‘고대인의 날’ 기념식장에서 만나 인사하고 있다.

    “세 명의 후보 중 이회창 후보가 가장 깨끗한 정치를 펼칠 것으로 믿음이 간다. 오늘 같은 난국을 바라보고 있으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 목이 메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의 공보특보를 지낸 이흥주씨는 “박근혜씨 정도면 당시 비서실장을 통해 이회창 후보가 직접 챙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국회의원에 당선된 1998년부터 지금까지 보좌관을 맡고 있는 정호성씨는 “박 전 대표가 직접 이회창 후보 쪽에 지원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후보가 손을 내밀기 전에 박 전 대표가 ‘스스로 돕겠다’고 나섰냐”는 질문에는 “명확하게는 모른다”고 답했다. 박 전 대표측 공보팀을 통해 “박 전 대표의 답변을 직접 듣고 싶다”고 수차례에 걸쳐 요청했지만 “정 보좌관의 대답으로 대신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박 전 대표의 정치입문 과정을 당사자 외에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이 전 총재측에 당시 정황에 대해 묻자 이종구 공보특보는 “이 전 총재는 당시 상황을 잘 모를 것”이라며 “설령 안다 해도 그런 내용을 언론에 밝히는 걸 원치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둘 사이에 누가 다리를 놓았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두 사람이 손을 잡았는지에 대해 당사자들은 이렇듯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냥 학교에 남아 계시죠”

    1993년 3월초 서울 마포구 신수동 서강대학교 앞 음식점. 이 학교 정치외교학과 손학규 교수가 7, 8명의 제자와 둘러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평소 제자들과 허물없이 대폿집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손 교수가 입을 열었다.

    “이번 (국회의원) 보궐선거(1993년 4월말 예정) 출마 권유를 받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 제자가 “교수님, 정치라뇨? 그냥 학교에 남아 계시죠”라고 만류했다. 하지만 또 다른 제자는 “정치를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제자들의 의견은 반반으로 갈렸다.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던 손 교수가 “민자당으로부터 출마 제의를 받았다”고 털어놓자 다들 놀란 표정으로 “민자당이요?” 하고 반문했다.

    그의 정치 참여에 찬성한 제자들은 ‘민자당’이라는 말을 듣자 다시 자기들끼리 갑론을박을 벌였다. 손 교수는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의 개혁이 성공해야 한국의 미래가 있다”며 “만일 정치를 하게 된다면 (YS의) 개혁 의지가 꺾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맡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손 교수는 정치 참여에 앞서 제자들뿐 아니라 서울대 65∼69학번 운동권 출신들의 모임인 ‘문우회’ 회원들과 재야인사들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결국 손 교수는 정치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정치 참여에 반대하던 제자들도 손 교수를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겠다며 지지했다. 그가 민자당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소신 있는 정치를 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때 술자리에 참석한 제자 중 정성운(43·현 손학규 전 지사 비서실장)·이윤생(40·현 손학규 캠프 연설문 팀장)씨는 줄곧 손 전 지사의 곁을 지켰다. 다음은 이윤생씨의 말이다.

    “교수님이 사직 의사를 밝히자 학교에서는 ‘혹시 떨어질지도 모르니 휴직계를 내는 것이 어떻겠냐’며 휴직을 권했어요. 보통사람 같으면 그 제의를 받아들였을 텐데 교수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더라고요. 학생들과 동료교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게 그 이유였죠. 과거의 안위는 뒤돌아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사직서를 낸 겁니다. 이왕 나선 것, 학교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올곧게 정치인의 길을 걷겠다는 각오가 읽혔어요.”

    “현철이를 찾아가보라”

    당시 보궐선거 지역은 경기도 광명, 부산 사하, 부산 동래갑 세 곳이었다. 손 교수는 1988년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인하대(1988~1990년)를 거쳐 서강대(1990~1993년)에 몸담았다. 정치 현장에 나서본 적이 없는 그가 윤항열 의원의 급서로 공석이 된 광명에서 공천을 받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민주산악회 광명지부장인 노병구(76·현 민주동지회장)씨가 발끈했다.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을 받아 광명에서 출마했다 낙선한 노씨는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이 공천받을 확률이 높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노씨의 주장.

    대선주자 정치입문  비화

    1997년 11월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이 김대중 총재의 기자회견장에서 귀엣말로 보고하고 있다.

    “최형우 사무총장을 비롯해 당의 모든 간부가 나를 공천하는 데 이견이 없었어요. 황낙주 국회의장이 ‘최 총장에게 들었다’며 ‘꼭 당선돼 국회에서 함께 일하자’고도 했지요. 그런데 공천 발표 날짜가 다가오는데 이상한 소문이 돌았어요. 손 교수 공천설이었죠. 든든한 지원군인 최 총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왠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느낀 직후 최 총장의 구기동 집에 찾아가 ‘요즘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었어요. 최 총장이 즉답을 회피하면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어렵게 입을 엽디다. ‘현철이를 한번 찾아가보라’고.”

    최형우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은 손 교수 공천설이 나돌자 “도대체 손학규가 어떤 놈이냐”고 하면서 주변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을 통해 그의 이력과 경력, 그리고 정치적인 성향 등을 파악했다고 한다. 자신의 오랜 동지인 노씨의 공천을 위해 애를 쓰다 ‘물’ 먹은 최 총장. 그는 이후 손 전 지사의 의정활동과 정치 역량을 높이 평가했고 지금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씨는 오래전 일이지만 마치 엊그제 벌어진 사건처럼 또렷하게 기억이 나는지 그때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 최 총장의 조언대로 현철씨를 찾아갔습니까.

    “아뇨. 어떻게 현철이를 찾아가요.”

    ▼ 공천을 받는 데 도움이 된다면 찾아갔을 법도 한데요.

    “나는 최 총장에게 현철이를 모른다고 했어요. 실제로 잘 몰랐고. 또 ‘안면이 있다고 한들 내가 현철이를 찾아가서 뭐라고 사정을 하겠냐’고 되물었어요. ‘내가 김영삼 대통령을 모시고 정치를 하는데 그분의 어린 아들을 찾아갈 수 있겠냐’며 ‘다시 한번 각하(YS)께 말씀해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런데 공천 분위기가 영 내 쪽으로 쏠리지 않더니 결국 그쪽(손 교수)으로 결정이 났어요. 당시 실세이던 최형우, 김덕룡, 서석재, 황명수 의원 등이 나를 위로하며 ‘우리가 바라던 대로 김영삼 (민주산악회) 상임고문이 대통령이 됐으니 그분과 가까운 우리가 참고 대통령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국영기업체에 자리를 마련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1993년 3월25일, 경기도 광명시 공천자 명단에 ‘손학규’가 올랐다. 노씨는 보궐선거 공천자 발표 직후 한국마사회 업무이사로 발령받았고 이후 한국마사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YS, “현철이는 무슨…”

    지난 3월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 노병구씨의 자서전 ‘만세를 위하여 새벽을 열다’ 출판기념회에 손 전 지사가 참석했다. 그는 이날 축사를 하기에 앞서 “노 선배에게 오래전 진 빚이 있다”면서 1993년 4월 보궐선거 공천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저 아니었으면 노 선배가 그때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겁니다. 오랫동안 관리해온 텃밭을 저에게 내줬을 때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정치인에게 지역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잘 알기에. 그래서 저는 노 선배에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요. 그때 노 선배의 양보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노씨는 손 전 지사의 ‘고백’에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노씨가 주장한 것처럼 ‘손학규’를 민자당으로 끌어들인 사람이 YS의 차남 현철씨였을까. 지난 3월12일 상도동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나 그 속사정을 물었다.

    “현철이가? 무슨…. 내가 개혁을 추진하는 데 걸맞은 인물을 찾아보라고 했어.”

    ▼ 그걸 누구에게 시켰습니까?.

    “내가 직접 찾았다니까.”

    ▼ 손학규 전 지사를 천거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닙니까.

    “글쎄….”

    YS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끝내 누가 추천했는지, 누가 손 전 지사를 발굴해 YS에게 이력서를 전달했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손학규를 만나보니까 참 괜찮은 사람이다 싶었어요. 재야에서 오랫동안 활동한데다 외국에서 공부한 경험도 있고. 문민정부 개혁에 딱 맞는 참신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공천한 겁니다.”

    ‘대통령이 불렀다. 개혁 위해 나섰다.’ 손학규 전 지사가 광명 보궐선거에 나설 당시 선거공보에 실린 문구다. 그는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개혁을 이끌어갈 쓸만한 인재를 찾으라고 지시한 사람은 YS가 맞지만 그를 정치판에 끌어들이는 과정에 ‘디딤돌’ 노릇을 한 사람은 누굴까. 손 전 지사는 바쁜 일정 때문에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는 답을 보내왔다.

    “잠시 울산에 내려가 있어”

    “어이쿠. 지금의 이명박을 생각하면 안 되죠. 14대(1992년) 국회 때 민자당 전국구 25번이면 사무총장이 아니라 사무부총장이 만나 공천 여부를 논할 사람이었지. 그때는 정치권에서 탐낼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당락 여부가 불분명한 25번을 준 거지요. 민자당이 100여 석 이상을 차지해야 당선될 번호였으니까요.”

    노태우 정권 때 ‘실세’였던 한 정치인의 말이다. 지금 각종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 전 시장의 정치입문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현대 신화’의 주역인 정주영 회장, 그리고 그와 거의 ‘동급’의 평가를 받았던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 두 사람은 27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현대호(號)’를 키웠다. 이들이 공개적으로 갈라선 것은 1992년 1월3일. 1991년 12월8일 국민당을 창당한 정 회장은 이날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고, 이씨는 같은 날 현대건설에 사표를 냈다. 정 회장은 정당을 만들어 집권 민자당을 맹렬히 비난했고, 이씨는 그 반대편인 민자당에 들어감으로써 각자의 길을 걸었다.

    이씨는 13대 총선 때 민정당으로부터 출마 권유를 받았다. 정 회장은 이 사실을 알고 ‘이명박은 언젠가 정계로 진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한다. 이씨가 정계 진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민정당 관계자는 정 회장을 설득했다. 그러자 정 회장은 이씨에게 “민정당이 심하게 몰아붙이고 있으니 잠시 울산에 내려가 있어”라며 그를 울산으로 피신시켰다.

    정치권의 손짓을 외면하던 이씨가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정 회장이 국세청의 현대그룹 세무조사 등으로 ‘기업의 한계’를 절감하고 정치 참여 계획을 짜기 시작한 1991년 하반기였다. 정 회장의 계획을, 그것도 대권에 야심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이씨는 정 회장의 정치 참여를 극구 반대했다.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냉기류가 흘렀다.

    1991년 11월경 정 회장이 이씨에게 자신의 창당 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부탁하자 그는 “기업가는 기업가로 남아야지 정치에 직접 뛰어드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당을 만들 경우 도와줄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즈음 이씨가 정씨와 등을 돌릴 조짐을 보이자 민자당에서는 그에게 “지역구에 나가라”고 권유했다.

    이씨는 겉으로는 한사코 고사했다. 정치를 하게 되면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수 있거니와 정 회장이 다른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는 데 대한 부담이 작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정 회장이 정치에 뜻을 두고 있음을 눈치챈 이후 암암리에 정계진출을 위한 정지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현역인 민자당 이태섭 의원이 수서 사건으로 구속돼 무주공산이 된 서울 강남을에 사무실을 낸 것. 부인과 함께 조용히 조직을 확장해가던 그는 외부로 드러나는 활동을 일절 중지하고 고려대 출신의 현대 사원과 자신을 따르는 젊은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선거대책반을 꾸려 출마에 대비했다.

    이씨는 옥중에서 재기를 꿈꾸는 이태섭 의원 등 8명의 출마 희망자와 함께 1차 관문인 민자당 공천과 2차 관문인 총선 승리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6·3세대 동기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국회의원보다는 서울시장 같은 단체장이 적합하지 않겠냐”는 권유가 계속되자 서울시장 출마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1992년 1월 지방자치단체장선거가 연기되면서 그는 공중에 뜬 상태가 됐고 강남을 공천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자 고민하던 이씨는 1991년 말, 형인 이상득 의원(민자당)을 찾았다. 어릴 때부터 스스로 알아서 살아왔기에 형제들에게 도움 청할 일이 별로 없었다는 그가 형을 찾아가 나눈 얘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지난 4월4일 국회 부의장인 이상득 의원(한나라당)을 만나 그 사연을 물어봤다.

    조카 결혼식장에서 YS와 첫 대면

    “누구보다 독립심이 강한 동생이 나와 상의하기까지는 아주 오래 고민했을 겁니다. 그때 동생이 ‘정주영 회장이 정치를 할 것 같다’고 털어놓더라고요. 그 얘길 듣고 동생에게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 참 난감했죠. 나는 민자당에, 동생은 정주영이 만든 신당에 합류하면 모양새가 참 우습겠다 싶었던 거죠. 그런데 동생이 ‘나는 정 회장이 정치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하더군요. 기업인이 당을 만들고 정치인으로 나서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면서. 그러면서 ‘정 회장과는 정치를 할 생각이 없다’고 딱 잘라 말을 합디다. 그래서 ‘그러면 넌 정 회장이 정치를 해도 신경 쓰지 말고 현대에 남아 있으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게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라며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비쳤어요”

    ▼ 왜 현대에 남아 있지 못하겠다고 했습니까.

    “그건 길게 설명하지 않았어요. 나도 더 캐묻지 않았고. 본인이 어련히 알아서 결정하겠나 싶었지요.”

    ▼ 그때 이 전 시장이 정치에 전혀 뜻이 없었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민자당과 여러 경로를 통해 뭔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면 민자당으로 하겠다’고 하기에 ‘형제가 각각 다른 당에 속해 있는 것보다는 같은 당에 있는 게 더 낫겠다’고 웃었지요. 만일 형은 민자당에, 동생은 정주영당에 있다면 서로 얼마나 껄끄러웠겠어요. 사람들 보기에도 그렇고.”

    이씨는 서울시장 출마와 지역구 공천이 불투명해지자 정치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당선 안 될 확률이 더 높은 민자당 전국구 25번 제의를 받아들였다.

    ▼ 동생이 전국구 공천을 받는 과정에 힘을 좀 썼습니까.

    “그런 것 전혀 없어요, 예나 지금이나. 저희 형제는 자기 일은 자기 책임 아래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살아왔거든요. 동생이 서울시장 할 때 저는 시청 인근에서는 사람도 안 만났어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별하고 살았죠. 그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지. 그동안 저와 동생 사이에 잡음이 없었던 것도 그렇게 선을 긋고 살아왔기 때문인 것 같아요.”

    ▼ 민자당 전국구 공천은 누가 한 겁니까.

    “YS로 알고 있어요.”

    당시 YS는 민자당 대표였다.

    “대부분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공천”

    ▼ 어떻게 인연이 닿았습니까.

    “제 딸 결혼식이 1992년 1월에 있었는데, 동생도 오고 민자당 대표인 YS도 참석했어요. 그날 현대를 그만두고 정계 진출을 모색하던 동생과 YS가 처음으로 만났어요. 결혼식장에서 YS가 동생을 보더니 ‘한번 만나자’고 했다는 거예요. 그 다음날 동생이 ‘YS측에서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두 사람이 상도동에서 만난 것으로 압니다.”

    필자는 이 부의장을 만나기 전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상도동 자택에서 만나 이 전 시장의 전국구 공천 경위에 대해 물어봤다.

    “다 결정(전국구 공천 확정)되고 나서 이명박이 내게 인사를 왔지, 아마. 그때 각 분야의 전문가를 영입해 전국구로 끌어들였는데 경제인 몫으로 들어왔던 걸로 기억해요. 현대에 있을 때부터 유명한 사람이었잖아요. 평소 꽤 괜찮은, 능력 있는 기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 직접 공천에 관여하셨습니까.

    “그땐 내가 (민자당 대표였지만) 그렇게 할 때가 아니었지.”

    상도동측의 한 인사는 “이명박의 전국구 공천에 대해선 노태우 쪽 사람이 잘 알지 않겠냐”며 “박철언 전 (체육청소년부)장관을 만나 물어보라”고 귀띔했다. YS를 만난 다음날 박 전 장관과 서울 역삼동 그의 사무실에서 마주앉았다.

    “허허. 상도동에서 그 공을 제게 넘겼단 말입니까? 1992년 초라면 내가 이미 YS와의 기싸움에서 밀려난 상태인데 무슨 힘이 있다고…. 13대 총선 전국구 공천에 관여한 것은 맞지만 14대 때는 안 했어요. 할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이명박을 누가 추천하고 밀어줬지는 잘 몰라요.”

    14대 민자당 전국구 1번부터 25번까지의 순서는 이렇다. 김영삼(당 대표최고위원), 박태준(당 최고위원), 김재광(국회부의장), 노재봉(전 국무총리), 권익현(구 민정당 대표), 이만섭(구 국민당 총재), 정석모(현 의원), 안무혁(전 안기부장), 이원조(현 의원), 최병렬(노동부 장관), 김종인(청와대경제수석), 김광수(전 의원), 박재홍(현 의원), 강선영(예총회장), 정시채(전 의원), 최운지(현 의원), 강용식(전 총리비서실장), 김영수(전 안기부 1차장), 김영진(전 내무부 차관), 강신옥(현 의원), 서상목(현 의원), 윤태균(도로공사 사장), 박구일(전 해병사령관), 곽영달(전 공사 교장), 이명박(전 현대건설 회장).

    노태우 정권의 실세이던 모 인사는 당시 민자당 전국구 공천과 관련해 “민주계, 즉 YS가 직접 챙긴 사람은 김재광과 강신옥뿐인 것으로 안다”며 “원로인 박태준을 비롯해 문화계 몫인 예총회장 강선영, 호남 배려 케이스인 정시채 등 대다수 전국구 공천은 노태우 대통령이 직접 챙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당 바람막이용이기도 했던 이명박의 경우 공천 막판까지 계파간 이견으로 진통을 겪었다”며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챙겼다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YS 사람이라고 분류하기도 애매하다”고 했다.

    노태우와 김영삼, 두 사람 중 누가 이명박을 더 챙겼는지, 이명박이 전격 발탁되기까지 그가 어느 쪽에 줄을 대기 위해 노력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 전 시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답은 오지 않았다.

    “어디 쓸 만한 앵커 없나?”

    “정확히 날짜까지 기억해요. 1995년 12월20일.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정치특보이던 라종일씨와 테니스를 함께 한 후 저녁을 먹었죠. DJ 마음속에는 15대 총선을 잘 치러 대통령선거 3수에 나서보겠다는 생각이 자라고 있을 때였죠. DJ는 정계 은퇴 선언을 한 뒤 영국에서 돌아와 국민회의를 만든 터라 인적 자원의 고갈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어요.

    정동영 전 의장은 당시 MBC 주말 앵커를 맡고 있었지요. DJ가 라씨에게 ‘저쪽(신한국당)은 앵커 출신인 박성범, 이윤성(이상 KBS)과 SBS 8시 뉴스 앵커 맹형규도 끌어들이지 않았냐. 어디 쓸 만한 앵커가 없냐?’면서 한숨을 내쉬었다고 해요. 내가 그 얘기를 듣자마자 ‘딱 한 사람 있다’면서 전북 정읍 출신인 정동영 앵커의 이름을 댔죠.”

    당시 ‘동아일보’ 기자이던 김기만(53·현 게임물등급위원회 위원장)씨의 증언이다. 김씨가 ‘정동영’을 거명하자 라씨가 “그렇게 유명한 앵커가 우리 당에 오겠냐”면서 “DJ에게 보고할 테니 정씨를 한번 만나보라”고 권했다. 김씨는 정 전 의장의 전주북중, 전주고 1년 후배. 두 사람은 중·고교 시절부터 의형제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어지는 김씨의 말이다.

    “술자리를 끝내기가 무섭게 정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고 다음날 만나서 라씨와 나눈 이야기를 전했죠. 이 기회에 정치에 입문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더니 놀라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정 선배는 정치부 기자가 돼 청와대에 출입하고 싶어했고 9시 뉴스 앵커를 하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그게 여의치 않았어요. 당시 맡고 있던 전국부장은 썩 화려한 자리는 아니었지요. 제가 정계에 진출할 것을 강력히 권하자 적잖이 고민했어요. ‘마흔셋에 정치권에 발을 내딛는 것이 너무 빠르지 않냐’고 묻기에 ‘4년 뒤 MBC 내에서 정 선배가 어떤 위상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해줬죠.”

    “모든 요구조건 들어주겠다”

    김씨에게서 정계 입문 제의를 받은 후 정씨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고민하는 사람이 있었다. 정씨의 부인 민혜경씨였다. 민씨는 동향 선배인 김씨에게 “오빠, 누구 죽이려고 그이에게 정치를 권하냐, 기자생활 잘하고 있는데 정치는 무슨 놈의 정치냐”며 극렬히 반대했다고 한다.

    김씨는 정씨의 강남구 도곡동 집을 나와 라씨에게 전화를 걸어 “시간이 좀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DJ에게 긍정적으로 보고해도 괜찮겠다”고 하면서 “단 DJ가 어떤 조건을 줄 수 있는지 확인해달라”고 당부했다.

    라씨의 보고를 받은 DJ는 뛸 듯이 기뻐했다.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겠다. 지역구를 원하면 지역구, 전국구를 원하면 당선 안정권인 전국구 자리를 줄 것이다.”

    젊은 피 수혈에 혈안이 돼 있던 DJ는 정씨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고라도 영입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정씨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절친했던 이해찬, 고도원씨 등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정씨의 영입이 늦어지자 이번에는 DJ쪽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 정씨를 설득했다. 다음은 정 전 의장이 직접 밝힌 정치 입문 당시의 상황이다.

    ▼ 정치 입문 권유를 받았을 때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추미애, 김한길, 김진명(소설가), 신기남… 15대 때 ‘젊은 피’ 수혈 차원에서 국민회의가 영입한 사람들입니다. 기업이나 문화계 등에서 참신한 인물을 찾을 때였지요. 저에게도 그런 과정에서 제안한 것으로 압니다. 처음엔 정치에 참여할 생각이 없었어요. 다만 5공 시절인 1980년대 이른바 제도권 언론에서 기자를 하면서 언론자유 억압에 대해 분노한 기억을 갖고 있었지요. 정권이 한 번쯤은 수평으로 오고가야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이뤄진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죠. 정계 진출을 권유받은 이후 깊은 고민 끝에 ‘정권 교체에 필요한 ’마중물 ‘한 바가지가 되자’고 다짐했습니다.”

    재래식 펌프에 물이 빠지면 물 한 바가지를 퍼 넣은 다음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물이 올라온다. 그렇게 퍼넣는 물이 마중물이다. 그렇듯 자신도 민심을 끌어올리는 마중물 한 바가지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정 전 의장의 정치입문 과정을 취재하면서 박근혜, 손학규, 이명박과 다른 점이 발견됐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정 전 의장의 경우엔 그를 정계에 진출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권노갑, 박지원, 이해찬, 김영배, 고도원, 라종일, 김기만이 그들이다. 이에 대해 정 전 의장의 한 측근은 “정계 진출 이후 (정 전 의장이) 잘 풀리니까 ‘내가 그를 도와줬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고 했다. 이번에는 정 전 의장에게 직접 물었다.

    ▼ 정계입문을 도와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하하, 그래요? 누군가요?”

    앞서 언급한 이들의 이름을 거명했다. 정 전 의장은 그들이 직·간접으로 자신의 정계진출에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김영배 의원은 정계에 들어온 이후 많은 도움을 주셨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 DJ로부터 직접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았습니까.

    “그때 DJ를 직접 만난 적은 없어요. 박지원씨가 저를 찾아와 그런 제안(국회의원 출마)을 한 적은 있지요.”

    ▼ 부인이 만류했다고 하던데요.

    “결사반대했죠. 정치인의 아내가 된다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다 제가 방송에만 몸담아온 사람이기에 정치라는 낯선 세계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했던 거죠.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했지만 내심 ‘올 것이 왔다’고 판단했는지 나중에는 제 뜻을 따랐어요.”

    정 전 의장은 정계 진출 권유를 받은 지 20여 일 만인 1996년 1월11일 국민회의에 입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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