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신의 발견’

넉넉한 마음으로 만나는 신(神)

  • 김한승 성공회 신부, 사회선교국장 khs411@yahoo.co.kr

    입력2007-06-04 1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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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발견’

    ‘신의 발견’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양윤옥 옮김/지식여행/340쪽/1만원

    당대(唐代) 최고의 선승(禪僧) 조주선사(趙州禪師)에게 어느 날 두 명의 수행자가 찾아왔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먼저 조주선사께 물었다.

    “불법(佛法)의 큰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조주선사가 되물었다.

    “이곳에 한 번 온 일이 있으신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차나 한잔 들고 가시게.”

    또 다른 수행자가 조주선사께 물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큰 뜻은 무엇입니까?”

    조주선사는 그에게도 똑같이 되물었다.

    “이곳에 한 번 온 일이 있으신가?”

    “예, 한 번 있습니다.”

    “그러면 차나 한잔 들고 가시게.”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원주스님이 이상히 여겨 조주선사께 물었다.

    “스님! 어째서 이곳에 한 번도 온 일이 없다고 말한 사람에게도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라고 하시고, 한 번 온 일이 있다고 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답하시는 것입니까?”

    조주선사께서 원주스님을 정면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원주! 자네도 차나 한잔 들고 가시게.”

    ‘끽다거(喫茶去)’ 화두로 유명한 조주선사 일화다.

    구원에 이르는 다양한 길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신(神)을 찾아 멀고 험한 순례의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신을 만날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동화 ‘파랑새’의 메시지처럼 신도, 진리도 거창한 세계가 아닌 평범한 우리 일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다반사(茶飯事)’라 했던가? 차 마시듯 수시로 접하는 일상 속에서 신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신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끽다거!’란 일상성(日常性)을 외면하고 진리로 나아갈 길은 없다는 깨달음의 선언이자, 우리 자신을 포함한 구도의 길을 걷는 모든 이의 노고와 성취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존중의 언어이기도 하다.

    대표작 ‘청춘의 문’ 시리즈가 일본에서만 2200만 부가 팔리는 등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이츠키 히로유키와 가톨릭 주교 모리 가즈히로의 종교 대담집인 ‘신의 발견’은 ‘끽다거’의 넉넉함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극도로 상이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불교와 기독교가 한 테이블에 마주할 수 있듯 종교가 세속의 영역, 비(非)신앙인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이유는 만물에 편재하는 신과 진리의 보편성 때문이다. 이 보편성이야말로 우리 삶을 겸손케 하고, 아집과 독선의 날을 거두어 구도의 길을 걷는 다른 이의 삶에 귀 기울이게 하는 넉넉함의 근거가 된다. 물론 그 여유로움에 도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이 책은 현실종교가 여전히 독선과 아집 속에 있으며, 우리 역시 일상을 떠나 편협하고 거창한 곳에서 신을 찾아 헤매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꼬집고 있다.

    ‘진리’는 보편적이다. 즉 인간을 행복과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열쇠는 가까이에 있으며 당연히 다양한 구도의 길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이 내리고 있는 가장 큰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 점을 전제하지 않고는 종교간 대화란 불가능하다. 이츠키와 모리의 대화는 당연히 이를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대 종교에 대한 호감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마치 기독교인이 예배당 아닌 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유일신과 아미타일불

    이들의 대화 속에서는 기독교의 유일신(唯一神) 사상이나 정토진종의 아미타일불(阿彌陀一佛) 사상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츠키는 가네코 다이에이라는 불교 학자의 말을 인용해 아미타 신앙은 수많은 부처 중 한 분을 믿는 ‘선택적 일신교’임을, 모리 주교는 야훼 신앙이 이스라엘을 둘러싼 고대 근동 지방의 다신교적 환경 속에서 성장했음을 강조함으로써 절대 유일 신관을 우회적으로 거둬들인다. 실제로 석가나 예수, 마호메트 어느 누구도 자신을 유일신, 혹은 절대 신으로 치부한 적이 없다. 모두 후대의 추종자들이 구미에 맞게 각색하거나 교리화한 것들이다.

    본원적 가르침에 대한 현실종교의 왜곡과 과장은 비단 신관(神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죄, 축복, 구원의 문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가령 성서는 그 어디에도 ‘원죄’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 않다. 천당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거나 물질적 풍요를 축복이라 말하는 것도 근거 없는 가르침이다. 하물며 신의 이름으로 거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하고 전쟁까지 불사하는 현실종교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참으로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죄와 화해의 사도였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대한 모리 주교의 평가는 공감 가는 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일을 행해온 교권과 교회사에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1990년대 중반 성공회(聖公會)는 전통 교회의 ‘천당과 지옥 교리’가 신을 ‘상벌을 주는 가학적 존재’로 묘사해왔다고 비판한 바 있다. 신은 가학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모리는 ‘천국의 문 앞에서 일일이 머리를 숙이며 사죄하는 하느님’을 말한다. ‘심판하는 신’ ‘용서하는 신’으로 묘사한 엔도 슈샤쿠보다 한발 더 나아간 셈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 오신 예수는 ‘함께 하신 하느님(임마누엘)’으로서 ‘희생하고 용서하며’ ‘기다리시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중요한 건 그런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점이다. 누구보다 악할 수 있는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꽃보다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이야말로 하느님을 닮은, 부처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모습을 회복하고 누릴 수 있을 때 그곳이 바로 천국이요, 정토(淨土)의 세계인 것이다.

    ‘인간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성서의 말씀에 모리는 역설적이게도 ‘빵 없이 살 수 없음’을 말한다. 문명은 지금껏 그 숙명의 길을 선택해온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인간이 그 숙명 앞에서 ‘빵 없는 길’을 선택할 것이라는 점 또한 성서의 믿음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삶의 방식을 바꾸고 신을 보라

    이츠키는 석가가 사후의 세계나 영혼의 문제에 대해 지극히 말을 아꼈음을 상기시킨다. 모리 역시 성서가 말하는 종말사상이나 천당과 지옥의 가르침이 지닌 다양한 함의를 여러 각도로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천국(하느님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단선적으로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모리는 ‘회개’의 원어적 의미를 환기시키며 ‘삶의 방식을 바꾸고(메타노이아)’ ‘신을 바라볼 것(슈브)’을 권하고 있는데 독자, 특히 습관적 신앙과 물신주의에 경도된 오늘날의 신앙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말이다.

    고난과 종말을 이기는 힘도, 천국을 차지하는 비결도 끝까지 ‘사랑을 잃지 않는’ 이의 몫임을 강조한 대목도 눈여겨봄 직하다.

    이 책은 성서와 예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신과의 만남, 심판, 사랑과 자비, 구원, 일신교, 기도, 여신자, 일본과 기독교 등의 주제로 다양한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 다양한 주제 속에 녹아들어 있는 행간의 메시지는 넉넉한 관용 속에서 신을 만나라는 것이다. 조바심과 강박관념, 아집과 독선, 심지어 신을 찾겠다는 욕심까지 접고, 차 한잔하는 마음으로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한다면 대화 너머로 어렴풋이나마 신의 넉넉한 미소를 만날는지도 모른다.

    개방적이고 포용력 있는 대담이었음에도 간혹 보이는 종교적 보수성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신앙을 신과의 일대일 관계로 강조한 점이나 종교적 신비나 기적을 옹호하는 대목, 그리고 기독교를 타력(他力)의 종교로 강조한 점 등에는 개인적으로 다소간의 이견이 있다. 아마도 선불교와 폐쇄수도회를 거친 두 사람의 신앙적 이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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