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잔디밭에 널브러진 매혈자들… 청년 사회주의자, 피가 솟다

  • 김정강 이데올로기 비평가

    입력2007-06-05 18: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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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산대중 위한 체제 지향’논문 썼다 구속된 류근일

    노재봉, 송복, 이수정 등과 진보서클 활동

    ‘흡혈의 식인사회’ 목도하고 ‘개벽봉기’ 다짐

    신입생 의식화용 오리엔테이션 처음 만들어

    5·16 이후 지하운동권 장악한 도예종의 파워



    6·3 주도한 서울대 ‘불꽃회’, 김일성 정치적 정통성 인정

    남파간첩, 남부군 접하며 ‘反김일성 마르크스주의’로

    최초의 위장취업 노동운동가로, 1960년부터 1980년까지 민주화 운동권의 전설적 이론가로 알려진 김정강(金正剛·67)씨가 자신의 일대기를 ‘신동아’에 보내왔다. 김씨는 4·19, 6·3, 민통전학련, 신진회,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무명당(과학적사회주의당) 등 현대 좌파 운동사(史)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거나 관계했는데, 그는 ‘반(反)김일성 마르크스주의’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1980년까지 독재체제 전복을 끊임없이 꾀했던 인물이다. 김씨가 보내온 글에는 4·19와 6·3의 실질적 배경, 인혁당과 통혁당의 실체, 6·29선언의 막전막후 등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를 청산하고 자유민주주의자로, 제도권 정치가로 전향하기까지의 과정과 인간적 고뇌가 절절하게 담겨 있다.

    이번 호에 실린 글은 4·19에서 6·3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그 후 1966년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 현장에 들어가는 대목까지를 담았다. 2차 인혁당과 통혁당 사건 이후 6·29까지의 상황을 담은 글은 이들 사건이 여전히 첨예한 논란에 싸여 있는 만큼, 관련 소송과 정부의 과거사 조사가 완결된 후 소개하기로 한다.


    골수 사회주의자가 되다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1957년 12월 말, 진주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나는 유난히 심한 그해 겨울의 추위를 뚫고 부산발 야간열차에 무임승차해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눈이 나빠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신체검사 현장 지휘를 하던 장교는 어떻게든 신체검사를 통과해보려고 통사정을 하는 나에게 “학생이 합격하려면 ‘특별 예외 입학’밖에 방법이 없다. 육사 교장 각하가 특별히 허가하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고민 끝에 육사 교장을 만나 탄원키로 결심을 굳히고, 육사를 찾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든 초병 몰래 육사 구내로 들어가 직접 교장실을 찾아야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무리의 가족이 누군가를 면회하려고 육사 정문 초소 앞에서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가족의 무리에 끼어들어 정문을 통과했다. 구내에도 여러 개의 검문초소가 있었다. 나는 초병의 눈길을 피해 첫 번째 검문 초소를 우회, 교장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앙 쪽으로 나아갔는데, 두 번째 초소에서 그만 발각돼 초소 안으로 연행됐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陸士

    초소장은 군용 야전 침대봉을 들고 서서 엄한 표정으로 무단침입의 이유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교장각하는 절대로 만날 수 없으니까 돌아가라! 뒤로 돌아! 고향 앞으로 가!”라고 군대식으로 명령했다.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와서 죽었으면 죽었지, 그냥은 못 갑니다” 하고 떼를 쓰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마음을 바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상황을 보고하고 난 뒤, 초소장은 뜻밖에도 “교장실에서 데려오라고 한다”고 했다. 철테 안경을 쓴, 정한(精悍)한 인상의 대령이 들어왔다. 내가 육사 불법침입의 목적과 경위를 말하자, 그는 “육군 장교가 되면 최하급의 소위도 5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데 그 50명의 생사는 그 소위에게 달렸다. 그런데 지휘관이 눈이 나빠 관측을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나”라고 했다. 내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력은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심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최대의 노력으로 눈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해내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대령은 육군 규정을 내세워 말을 끊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져도 소용없다. 육사 입학은 무조건 육군 규정을 만족시켜야 한다.”

    나도 나름대로 대응했다.

    “육사에 육군 규정이 있으면 제게는 죽음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단식하겠습니다.”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1960년 4월19일, 경무대로 향하는 군중과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경관.

    그러자 대령은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며 “자네가 그런 각오라면 육군 규정의 예외를 적용해야 하는데, 교장 각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한림(李翰林) 교장 각하는 지금 미국에 가셨다. 교장 각하가 오시면 말씀드리겠다. 그러니 회답이 갈 때까지 기다려라”고 했다.

    진주로 귀가한 후 오로지 육사에서 편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해 일반 대학의 입학시험은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8년 5월이 지나도 회답은 없었다. 나는 육사 진학의 희망을 접고 다음해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응시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실존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1959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나는, 자취방을 얻고 입학식을 마치자, 곧바로 수련할 공수도(空手道) 도장을 정했다. 비록 육사에는 못 가고, 민간의 평복을 입고 살지만, 삶의 자세와 정신의 본원은 무사로 지낼 생각이었다. 문리대 입학 당시 공수도는 초단이었고, 검도는 죽도(竹刀)를 몇 번 잡아본 정도였다. 유도도 초단이었다. 그때가 빌미가 돼 간헐적으로 수련한 결과, 현재 나는 태권도 4단, 검도 2단이다.

    정치학의 핵은 정치철학인데, 그 기초인 철학과 중요한 관련이 있었다. 원래 정치학은 철학에서 분과된 학문이다. 그런데 당시 문리대 철학과를 중심으로 한국 철학계를 풍미하던 철학 조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였다. 따라서 회자되던 사상가는 장 폴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등이었다.

    나도 사르트르, 퐁티, 야스퍼스, 하이데거, 카뮈, 말로 등에 빠져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르트르, 퐁티, 말로의 저술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정치에 관한 대담’에서 “나의 근본 전제는 공산당이 제시하는 근본 전제와 같다. 공산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파시즘에 반대하며, 오늘날에는 프랑스 극우파에 반대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퐁티는 ‘의미와 무의미’에서 “자세히 고찰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내일이 되면 다른 것으로 교체될 가설(假說)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라는 의미에서, 인간성도 없고 역사에서 합리성도 없게 될 모든 조건의 단순한 표명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철학의 하나가 아니라 역사철학 그 자체이며, 이를 포기하는 것은 역사 이성을 말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말로의 소설로는 ‘인간조건’ ‘정복자’가 감명 깊었다. 모두 실존적 휴머니즘의 시각에서 중국 혁명을 그린 것이었다.

    당시 정치학과의 주임교수는 민병태(閔丙台) 교수였는데, 그는 페이비언 사회주의 이론가 해럴드 라스키를 중점적으로 강의했다. 민 교수는 라스키의 주저 ‘정치학 요강(A Grammer of Politics)’을 꼭 원서로 읽어볼 것을 우리에게 권했다.

    나는 사르트르, 퐁티, 라스키를 읽다가 그들이 인용한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구해 그 원문을 읽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의식전이가 일어나면서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됐다. 마르크스주의로 의식이 경도되기 시작하자 원전 탐독에 매달렸다.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경제학 대강’ ‘경제 학설사’,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자본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 ‘제국주의론’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보전진 이보후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부하린의 ‘공산주의 입문’,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소련과학아카데미의 ‘철학 교정’ ‘세계철학사’ ‘세계사 교정’, 소련공산당의 ‘볼셰비키 당사’,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신민주주의론’, 류사오치(劉少奇)의 ‘공산주의자의 수양을 논함’ ‘당내 투쟁을 논함’ ‘白區에서의 군중공작을 논함’등을 읽은 기억이 새롭다.

    마르크스주의에 침잠하면서 공수도, 검도를 비롯한 무도는 ‘아시아적 신비주의’의 일종으로 비쳤기에 수련을 유보키로 했다.

    현장주의 신노선과 위장취업

    많은 비전향 정치공작원 및 인민군 무장 안내원과 일상생활을 함께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눈 대화를 통해 김일성 정권의 이 같은 실태를 가감 없이 알고 나니 “김일성 정권 아래서는 인민이 도저히 살 수 없겠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이들이 비전향 골수 멤버였기에 그들과의 일상대화에는 오히려 진실성이 있었다. 그 결론으로서 나는 이때 김일성 정권을 부정하게 됐다. 김일성 정권을 부정한 토대 위에서 생긴 변혁운동의 이념은 반(反)김일성 순수 마르크스주의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1966년 8월 만기출소한 뒤, 형무소에서 구상한 신노선을 운동권에 제기했다. 당시 한국 사회 구조와 정세에 대해 나는 이렇게 분석했다.

    “박정희 군부 파쇼 아래서, 한국 사회의 기본 구조는 ‘신식민지 반봉건’ 사회로부터 ‘종속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전이돼 간다. 따라서 앞으로 불가피하게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군(大群)이 발생할 것이다. 현재의 반(半)봉건체제 아래에서 잠재 실업의 큰 무리를 구성하고 있는 광범위한 고용농민, 빈농, 자작농민의 하층, 인텔리의 불운한 하층부가, 새로 창출될 이 근대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군 속으로 흡인될 것이다. 이 거대한 혼합 군중은 휘발유를 머금은 혼합 화약과 같은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위험물로 전화(轉化)된다. 이 저항적 프롤레타리아트가 인텔리 및 농민과 계급동맹을 성공적으로 결성하기만 하면, 한국 사회에는 강력한 민주변혁의 해방을 위한 추진 동력이 창출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분석과 정세분석에 대해서는 운동권 대부분이 찬성했다. 그 뒤 강단 운동권에서는 ‘신식민지 국가 독점자본주의’론이 나온 적이 있으나, 이것은 국가독점자본주의라는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가 (신)식민지에 창출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론적 오류였다. 반면 후진, 중진, 선진 등에 의한 자본주의 변이(變移) 개념은 비구조적·양적·표피적 기계론에 불과한 것으로,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분석 이론이 아니며, 대단히 통속적인 속론으로, 구조적 이론의 탐구와는 범주를 달리하는 동문서답에 불과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견지에 선다면, ‘종속 국가독점자본주의’로의 발전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변혁을 추구하는 혁명적 인텔리는 세비로(背廣·신사복)를 벗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프롤레타리아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계급 전환을 해야 한다. 4·19와 6·3의 포연을 뚫고 ‘과학의 세례’를 받은 바로 우리에게 세비로를 벗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 프롤레타리아트를 각성시켜 민족·민주 혁명을 수행하라는 역사적 임무가 떨어져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허심탄회한 지지자도 있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반론 중에서 가장 논리적이었던, 그래서 많은 지지자를 낸 노선은 이런 주장이었다.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김정강

    1940년 경남 진주 출생

    진주고 졸업, 1959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입학

    1962년 ‘민통학련’ 사건으로 복역(국가보안법 위반)

    1964년 6·3한일회담반대운동 배후조종과 불꽃회 사건으로 제적

    1964년 1차 인혁당 및 불꽃회 사건으로 복역

    1966~80년 노동현장 위장취업, 국가기술자자격증 10종 취득

    1980년 속칭 ‘무명당’ 사건으로 복역(국가보안법 위반)

    1987년 민정당 상임연구 위원, 민정당 탈당

    1988년 통일민주당(김영삼) 총재 특별보좌역

    1988년 13대 국회의원 출마 (통일민주당)

    1991년 신민당(김대중 총재) 당무위원

    1995년~현재 한국논단 편집위원


    “현재의 신식민지 반봉건사회로부터 박정희 파쇼가 견인해내려는 종속 국가독점자본주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군을 창출할 것이라는 주장과, 그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주화·의식화·조직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그 민주화·의식화·조직화 작업에 있어서 각성된 진보적 인텔리가 주동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도 옳다. 그러나 인텔리가 세비로를 벗고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인텔리의 무기는 펜과 지식이다. 펜과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장악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 현장이 아니라, 중간단체들로 들어가야 한다. 예컨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나 한국노총 정책실 같은 곳이 좋은 침투 대상이다. 그런 곳을 장악하고 있으면, 세미나·강연 등의 교육 기회를 통해 많은 노동자를 교양할 수 있으므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의식화하는 데 있어서 노동 현장 진입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반대론인 이런 ‘중간단체론’과의 이론 정리 후, 결국 나는 현장 진입을 주(主)로 하고 중간단체 침투를 부(副)로 하는 쪽으로 운동방향과 논리를 정리하고 1966년 하반기에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이때로부터 1980년 검거될 때까지 14년간 나는 노동자·기술자로서 노동 현장의 직접적인 운동 속에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는 김일성주의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에 이르게 됐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쓸 수 있을 것이다.

    좌파의 뿌리, 신진회와 정문회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4·19혁명 1주기 행사에 참가해 희생된 자녀들의 사진을 어루만지는 어머니들.

    1학년 2학기에 이르러, 2학년 이수정(李秀正·전 문화부 장관)에게서 “정치학과 1학년 중에 똘똘한 친구 몇 명 데리고 신진회(新進會)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동기생인 박한수(朴漢洙)와 배춘실(裵春實)을 “똘똘한 정도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윗길에 있는 수재들”이라고 소개하고, 함께 신진회(1950년대 중반에 태동된 서울대 문리대의 진보적 학생서클)에 들어갔다.

    내가 문리대에 입학하기 이태 전인 1957년, 신진회 멤버인 류근일(柳根一·전 ‘조선일보’ 주필)이 문리대 기관지 ‘우리의 구상’에 ‘모색-무산대중을 위한 체제에로의 지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구속 기소됐는데, 이 필화(筆禍) 사건으로 신진회도 표면적으로 일시 해체됐다. 그러나 곧 반(半)합법적인 형태로 재건됐고 내가 문리대에 입학한 1959년에는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학과에서 신진회와 쌍벽을 이루던 또 하나의 진보적 학생 동아리는 ‘정문회(政文會)’였다. 진보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념은 신진회와 같았지만, ‘정치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발해보자는 취지에서 정치학과의 ‘진보적 문학 애호가’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었다. 나는 정문회 회장이자 4학년 선배이던 김질락(金瓆洛·1968년 김종태 이문규 등과 함께 통일혁명당 결성 혐의로 구속된 후 사형)의 권고를 받고 이번에도 박한수, 배춘실과 함께 정문회에도 들어갔다.

    정문회에는 노재봉(盧在鳳·전 국무총리), 송복(宋復·연세대 명예교수), 그 외 다른 선배들도 있었다.

    흡혈의 식인사회

    1960년 4·19혁명 전 어느 날, 나는 문리대 맞은편에 있던 의과대학 구내 함춘원(含春園) 언덕에 홀로 앉아 나름대로 사색적인 한가로움을 맛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건너편 건물 아래를 바라보니 적지 않은 무리가 건물 앞 잔디밭에 늘어져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까이 다가섰는데, 이상한 점은 공통의 일에 종사하는 한통속처럼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멍한 시선으로 멀뚱멀뚱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부의 틈입자(闖入者)가 자신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후 며칠간 그들 사이에서 실체를 알아본 결과, 그들은 서울대 부속 대학병원에 피를 팔려고 온 매혈자(賣血者)들이었다. 피를 빼주고 나면 기운이 없고 현기증이 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정을 찾아 집으로 가려면 눕거나 쭈그려 앉아 어지럼증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피를 판 후 움직일 힘을 얻기 위해 ‘운기조식(運氣調息)’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병원의 규칙상 2~3개월에 한 번만 매혈을 해야 함에도 그들은 1개월에 한 번, 심하면 1주일에 2~3회씩 살인적으로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4·19와 민통학련, 인혁당의 태동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매혈자들에게 기생해 그들의 돈을 뜯어먹는 ‘매혈 브로커’ 집단이 있었다. 대학병원 규정상 매혈을 하려면 엄격한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했는데 매혈 브로커들은 매혈액에 따라 일정한 비율의 ‘와리(割)’를 취하고 ‘매혈의 문’을 통과시켜주고 있었다. ‘매혈업계’의 이런 속사정을 들은 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신식민지 반봉건 매판자본주의는 흡혈하는 식인사회’라고 울부짖으며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빈곤과 착취를 삼제(芟除)하기 위해서는 개벽봉기(開闢蜂起)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소리 죽여 아우성쳤다.

    1960년 4·19혁명의 전야인 3·15부정선거 당시, 나는 아현동 고개 비탈에 있던 사회학과 조봉계(전 한림정보산업대 학장)의 판잣집 단칸방에서, 조봉계를 포함한 몇몇 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 집에 인접한 집이 동네 반장네 집이었는데, 반장의 평소 생업은 가짜 꿀 제조였다. 3·15 선거일이 되자 아침부터 자유당 후보를 찍으러 가는 동네 반원들로 득시글거렸다.

    반장은 반원들을 3명 내지 6명씩 묶어 조를 편성했고, 그중의 일부 인솔자는 자유당 완장까지 차고 반원들을 투표장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격분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선거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교체는 불가능하며, 대중의 폭력적 봉기에 의한 타도만이, 이승만을 하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단정하게 됐다.

    신진회 멤버들 사이에서 ‘반(反)이승만 봉기’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1960년 신학기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서울대 중앙도서관을 출입하던 그해 2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신진회는 먼저 문리대 정치학과 안에서 부정선거 반대 데모를 일으켜야 할 당위성에 대해 토론했고, 이는 곧 선전(宣傳)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이 공감대를 전 문리대, 전 서울대로 확산시켜갔다. 나아가 서울 시내 각 대학에 데모를 일으킬 수 있는 공감인자(共感因子)를 포섭했고, 각 대학가 봉기일을 같은 날로 조정해 나갔다. 그 결과 3월 말경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경희대, 건국대, 외국어대, 중앙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 간에 봉기일을 일치할 것과 봉기의 전략전술을 함께 의논할 것에 합의했다.

    그 후 각 대학 사이의 회합이 거듭됨에 따라 4월 초순에는 구체적인 봉기 일자를 4월21로 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터졌다. 고려대가 4월21일이 아닌 4월18일로 앞당겨 데모를 결행한 것이다.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1960년대 지하 학생운동권을 장악했던 도예종씨.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당했다.(좌) 1964년 내무부 치안국장이던 박영수씨.(우)

    고대 데모에 호응해 즉시 전체 대학이 데모를 결행하기로 전술을 통일했다. 이에 따라 즉시 4월19일로 앞당겨 데모를 결행하기로 결정했는데, 총 주동자로는 당시 신진회 회장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과회장을 겸하고 있던 윤식(尹埴·전 국회의원, 대학교수)이 중의(衆意)에 의해 이미 추대돼 있었다. 동시에 신진회의 이수정, 서정복(서울대 철학과 58학번, 경북고 출신, 4월혁명회), 유세희(전 한양대 교수) 등이 선언문을 작성했다. 박한수, 배춘실, 기타 여러 학우와 더불어 나는 데모 군중 집결을 위한 일선의 선동과 연락을 맡았다.

    4월19일 아침 문리대 교정에서 데모 군중을 집결시키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최초로 “부정선거 무효! 자유민주 결사 수호!”를 외친 자는 박한수였다. 교정에 집결한 학생은 200여 명. 우리는 오전 9시10분경 미리 제작한 4·19선언문을 배포하고 데모를 시작했다. 당시 선언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大學史)가 적색 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김주열의 참시(慘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專橫)의 발가벗은 나상(裸像)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를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학창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중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이 선언문 중 ‘캄캄한 밤중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는 임화(林和·1908~53, 시인, 문학평론가, 카프 소속)의 시에서 나온 것이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자유민주 사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진하던 최전열은, 함성과 함께 무장 진압 경찰대와 충돌했다. 맨 앞줄에 있던 나는 충돌시 경관과 격렬하게 완력을 교환했다. 그러나 문리대 데모 대열 전체는 무장한 진압경찰의 ‘전문적인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도주했다.

    도주했던 데모대는 얼마 후 다시 대오를 정비해 더욱 늘어난 인원으로 돌팔매를 우박처럼 퍼부으면서 돌진했다. 이번에는 경찰의 대오가 무너지고 데모대는 종로5가 쪽으로 전진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신진회의 대학 내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특히 신진회 내부에서는 진보파의 세(勢)가 크게 신장했다. 나아가 신진회 진보파는 학내 진보파라는 협소한 범주를 넘어 학생운동 진보파로 발전했고, 그 세력이 문리대나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의 대학가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民族統一全國學生聯盟)’, 즉 민통전학련으로 결집됐다.

    1960년 11월18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결성대회’가 열렸다. 신진회 회장 겸 문리대 정치학과 과회장으로 4·19혁명의 상징이던 윤식이 서울대 민통전학련 회장으로 추대됐다. 나는 한편으로 서울대 민통전학련 결성에 조력하면서 타 대학의 민통전학련 조직 결성을 도왔다. 특히 김승균(‘사상계’ 3대 편집장, 1970년 김지하에게 시 ‘오적’을 청탁했다가 수감, 전 일월서각 대표,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의 성균관대 민족통일연구회 선언문과, 연현배(전 ‘내일신문’ 편집국장)의 외국어대 민족통일연맹 선언문 작성을 도왔던 것이 기억난다.

    민통전학련을 조직하면서 한편으론 안병규(11·12·13대 국회의원)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미경제원조협정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고 반미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투쟁 속에서 각 대학의 통일운동 세력을 속속 규합해 1961년 5월6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를 열었다.

    ‘민자통’ 이종률이 쓴 4·19 제2선언문

    민통전학련 창립 며칠 전인 4·19혁명 1주기(1961년 4월19일)에 서울대에서 학생 명의로 발표한 ‘4·19 제2선언문’은, 지금까지 학생운동 지도부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1961년 2월 창립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이론적 기조를 쥐고 있던 이종률(李鍾律·1905~89, 전 부산대 교수) 선생이 직접 쓴 것이었다.

    이 선언문이 채택된 경위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4·19혁명 1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던 학생운동 지도부가, 아직 4·19 제2선언문의 초안을 만들기 전이었는데, 이종률 선생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연락이 와 찾아갔더니, 그는 “4·19를 쟁취한 한국 학생운동은 앞으로의 변혁운동에서 중심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학생운동에 있어서 과학적 이론의 지표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며 가르침을 줬다. 그러면서 “4·19 제1선언문은 미문(美文)이지만, 과학적인 지표라는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제2선언문은 부족하나마 내가 초안을 써 보내겠으니, 김형이 고견(高見)으로 수정해서 학생 지도부에 채택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에 이종률이 쓴 초안을 사학과의 김상립(金相立)이 받아 와서 “초안을 읽어보고 수정해 꼭 채택시키라”는 이종률의 지시가 있었다고 전했다.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6·3한일회담반대운동 당시 거리를 가득 메운 시위 행렬.

    이종률은 4·19혁명 당시 55세였는데, 경북 영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 신간회 도쿄지회에 가담해 지회의 주동분자로 활동했고, 귀국한 후에는 형평사(衡平社) 운동(1923년부터 시작된 천민계급의 지위향상을 위한 사회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광복 후 백남운·이극로 등과 함께 조선학술원, 민주주의 독립전선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4·19혁명 직전에는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였고, 4·19혁명 뒤에는 자신의 ‘민족혁명론’에 입각해 혁신계 및 학생운동을 지도했으며, 도예종(都禮鍾·1924~75,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집행)과 더불어 민자통의 양대 실권자였다.

    전야(前夜)의 전운(戰雲)

    1961년 서울대학교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처음으로 도입돼 반(半)제도화됐는데, 이는 모두 진보파에 의해 기획된 운동권 전술의 하나였다. 그 발상의 시초는 서정복이 제기했다. 박종렬(58학번, 전주고 출신)과 내가 서정복의 발기에 동감한 뒤 윤식·이수정 등의 공감을 얻어 추진했던 것이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발상은 진보파의 세력 확장 선전 전술 차원에서 제기된 것으로, 신입생에게 진보적 이념을 대량적으로 또 제도적으로 선전·선동·전파해보자는 계획이었다. 학우들의 권유에 의해 나는 1961년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와 서울대학교 전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연사로 이중 출연하게 됐다. 정치학과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는 4학년 이영일(李榮一·11·12·15대 국회의원, 한중협회장)과 함께 나갔다. 이영일은 광주일고 출신의 수재로, 당시 정치학과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연사로 공인돼 있었다. 나는 ‘전환기 인텔리의 역사적 임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는데, “현재 한국은 크게 보아 역사적 전환기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 세대가 살아가야 할 사회적 환경 또한 전환기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문리대 정치학과는 인텔리 대중 속에서도 엘리트인데, 전환기 한국 인텔리의 역사적 임무는 변혁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수(旗手)가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1961년 서울대 전체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서울대 대강당에서 열렸다.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그 필력(筆力)이 뛰어나 학우들이 좋아했던 임방현(林芳鉉·전 국회의원, 박정희대통령특별보좌관) 선생에 이어 내가 강연했다. 사회는 역사학과의 김상립(金相立)이 맡았다.

    나는 ‘서울대의 연혁(沿革), 경성제국대학으로부터 서울대까지. 지금 우리 서울대학생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다소 긴 제목으로 강연했는데, “일본제국주의가 조선 인민의 가장 우수한 자제를 모아 일본제국의 종순(從順)한 관료로 양육하려고 했던 것이 경성제대의 설립 목적이었으나, 이 대학에 들어온 조선의 우수한 아들딸들은, 근대 학문의 이성(理性)의 조사(照射)를 받고 각성된 결과, 설립 제국주의자의 반역사적인 기도를 총명하게 거역하고, 용감하게 조선 독립과 조선혁명의 기수로 나섰다. 해방 후 국대안(國大案)에 따라 재편성된 서울대도 권력의 의도와 학생 대중의 사상 간에 모순되는 추이(推移)는 같으며, 그 모순을 동인(動因)으로 하는 변증법적 운동은 한반도 역사의 본질적인 전진을 담보하면서 현재도 진행 중이다. 현재의 민주주의 민족 학생운동은 그 현상형태이다”라고 주장했다.

    2대 악법 반대 데모의 이면

    장면(張勉) 정권 아래 진보세력의 반(反)정권 투쟁에 있어 군중투쟁의 절정을 이룬 것은 ‘2대 악법 반대투쟁’이었다. 이 투쟁은 당시 장면 정권이 국회에 제출해 가결시키려 했던 ‘반공임시특별법’과 ‘데모규제법’을 폐기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2대 악법 반대투쟁의 절정은 1961년 3월22일 밤 8시부터 시청 앞에서 시작된 야간 횃불데모 때였다.

    횃불데모는 한밤중까지 계속됐다. 마침내 통제를 이탈한 일부는 중앙청에서 안국동을 지나 장면 총리의 사저로 향해 혜화동에 이르렀다. 데모대와 경찰대가 서로 대치하다 데모대의 맹공으로 방어선이 뚫리자 경찰은 최루탄 30여 발을 쏘아 겨우 데모를 진압했다. 이는 국내 시위 진압사에서 최루탄의 위력을 실감시킨 첫 사건이었다.

    당시 경찰은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 데모 계획을 배후에서 실무적으로 은밀히 주도했던 인물은 유병묵(劉秉默) 선생이었다. 유병묵은 일제 강점기부터 여운형(呂運亨)의 측근으로 해방공간에서는 조선인민당·근로인민당 창당에 관여했고, 2대 악법 반대 데모 당시에는 최근우(崔謹愚)의 사회당 조직부장으로, 사실상 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계획에 따라 3월22일 오후 2시, 혁신계 총 연합 세력은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살릴소냐!” “데모가 이적이냐, 악법이 이적이냐!”라는 구호 아래 ‘2대 악법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혁신계에 속한 조직 대중이 아니라 대부분 비조직 군중이었다. 우리는 빌려온 낡은 지프차에 마이크를 달고 아침 일찍부터 서울 시내 일원을 반복해 순회하면서 “오늘 오후 우리 모두 시청 앞 광장에 집결해 4·19혁명의 민주성과를 폐기하려는 장면 정권의 파쇼적 폭거를 시민의 힘으로 막자”고 선동했고, 그 결과 많은 군중이 집결할 수 있었다.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1964년 6월3일 시위 학생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경찰.

    오후 8시, 어둠이 밀려오는 시청 앞 광장에서 야간 데모를 시작할 때 나는 데모대의 최전열에서 전진했다. 손에 든 횃불은 방어용 수단으로는 더없이 좋았다. 나는 장창처럼 긴 각목 끝에 석유에 적신 솜뭉치를 철사로 단단히 묶은 다음 거기에 불을 붙여 횃불로 만들었다. 그러고선 횃불의 불타는 끝을 전방으로 향하게 하는 공격 자세로 데모에 나섰다. 좌우와 뒤를 훑어보니 혁신계 정당의 장년 선배들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서로 격려 한마디 할 겨를이 없었다. 대열을 짓자마자 데모대를 짓밟으려는 경찰 진압대가 횃불 창 끝이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서 몽둥이를 휘두르며 육박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전열의 우리는 육박해오는 진압대의 얼굴을 불타고 있는 횃불로 바로 찔렀다. 사실 이는 대단히 위험한 동작이었다. 우리의 장창형 횃불이 경찰 무장보다 길었고 우리의 동작이 무자비했으므로 최초의 밀집 충돌에서 경찰의 대오는 그대로 밀려나 붕괴됐다.

    기마대도 출현했으나 우리가 횃불로 지지는 바람에 말이 놀라 도망치면서 아무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데모대는 무소부지(無所不至)의 형세로 서울 시내 거리 어디에라도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진출할 수 있었다. 나도 다 타버린 ‘횃불창’을 버리고 어둠의 장막이 내려진 서울 거리를 구두닦이, 양아치와 어깨동무해 “밥 달라 우는 백성, 악법으로 누를쏘냐”라고 목이 쉬도록 외치며 하염없이 걸었다.

    4·19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보파가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정계와 사회계에서도 혁신계 정당이나 사회단체가 무시할 수 없는 역량으로 뿌리를 뻗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사회대중당·한국사회당·통일사회당·혁신당 등 많은 혁신계 정당이 결성됐다.

    사대당은 옛 진보당 간부와 민주혁신당 일부가 주동이 됐는데, 1960년 6월17일 창당준비위원회를 열고 서상일·윤길중 등을 간부로 선출해 11월24일 창당했다. 7·29총선에서 사대당은 민의원 4명, 참의원 1명을 당선시켰고, 한국사회당은 민·참의원 각 1명씩을 당선시켰다. 혁신계의 의석수는 보잘것없었으나, 일단 국회 내에 발판은 마련한 것으로 자평했다.

    또 ‘민족일보’ ‘신시대’ 등의 언론, 민민청·통민청 등 청년단체, 교원노조·민주노동총동맹·민족자주통일심의위원회·피학살자유족회 등 다수의 진보적 사회단체가 결성돼 나름대로 투쟁해 나갔다. 혁신계 정당·사회단체가 모두 그러했지만, 특히 민민청이나 통민청의 경우는 학생운동 진보파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었다. 이들 혁신계 정당과 사회단체들은 은밀한 활동을 하거나, 유명무실한 ‘반(半)합법 혁신정당 운동’을 하다가, 4·19를 계기로 비로소 합법적인 혁신계 정당·단체를 결성해 지상으로 나왔다.

    민자통(民自統)과 민비연

    그러나 그들은 이념·전략·전술이 모두 정확히 정립되지 못했고 소조로 분열돼 있었기에 혁신계의 여러 당·단체로 난립하면서 분파적인 활동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분열된 다수의 진보파 정당·사회단체를 연결해 통일전선을 구축하고, 혁신계 정당과 대중적 민주주의 조직세력을 연결시키며 그 전체 세력 내부에 은밀히 전위조직을 창출하려고 했던 역량이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族自主統一中央協議會)다.

    이 민자통의 이론적 조직적 중심을 쥐고 있던 인물은 이종률과 도예종이었다. 도예종은 부산에서 이종률에 의해 결성된 민민청이 전국으로 조직을 확대해 갈 때 대구에서 경북 민민청을 주도해 나섬으로써 두각을 나타내어 민민청과 민자통 내에서 이종률과 양립하는 경쟁자가 됐다가 5·16군사정변 이후의 지하투쟁 시기에는 진보운동권 내부에서 이종률을 압도하고 지하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5·16 이후의 지하투쟁 시기에 도예종이 이종률을 압도하고 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 이유는 군부 파쇼의 엄혹한 탄압 아래에서 이종률이 학자 타입의 이론가였음에 비해 도예종은 투사 타입의 실천가였다는 점, 지하투쟁이라는 조직된 소수에 의한 강경투쟁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종률이 선전가였음에 비해 도예종은 조직가였다는 점 등에 있었다.

    나는 민통전학련의 결의에 의한 파견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대표로 민자통 결성대회에 학생 대의원으로 참가했다. 민통전학련에서 민자통에 대의원으로 파견된 사람은 이수병(李銖秉·1974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집행), 박영섭(朴英燮), 나 3인이었다. 민자통 결성대회는 천도교당에 전국 대의원들이 참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런데 우리가 민통전학련의 결의에 의해 민자통 결성대회에 학생 대의원으로 파견됐다고 내세웠으나 사실은 민통전학련에 의한 대의원 파견 절차는 없었고 실권자인 도예종이 스스로 지명한 것이었다. 절차를 밟지 않았던 것은 능률과 기밀 유지를 위해서였다.

    5·16 이후 도피생활을 하다 군에 입대한 나는 1963년 7월 제대하고 복학한 후 박종렬, 서정복 등과도 만나게 됐다. 학생운동을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의한 끝에 우리는 ‘신진회’의 재건을 그만두고 새로운 대중적인 학생 연구단체의 탄생을 돕자고 결론 내렸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단체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즉 민비연이다.

    6·3항쟁의 ‘불꽃’

    운동권 전설적 이론가 김정강의 ‘4·19에서 6·3까지’

    남로당 총책이던 박헌영과 온건 사회주의자였던 여운형.

    1965년 6월로 예정된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이하 6·3사태) 개시일은 1964년 3월24일로 결정됐다. 정세 분석 결과 3월24일이 봉기에 가장 적절한 타이밍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조직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움직인 덕분에 그날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서 5000명 이상이 일제히 봉기할 수 있었다. 서울 시내 대학생 5000명의 동시 봉기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학생들이 외친 구호는 “민족 반역적인 한일회담을 중지하고, 동경 체재 매국 정상배는 일로 귀국하라!”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라!” 등이었다.

    3월24일 데모 시작 전, 나는 문리대 교정에서 진행되는 데모의 전 과정을 정확히 조망하고 변화하는 정황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문리대 교정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대 본부 2층 복도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진보파 데모의 핵심은 각각 사전에 논의한 요소요소에 위치해 있었다. 데모가 본격화해 압도적인 물리력을 가진 진압 경관대와 격돌하면 부상, 피체, 피살의 위험까지 각오해야 하는 제1열의 선두 플래카드는 순수한 희생정신에 불타는 홍승재(洪承宰·전 쌍용그룹 전무)가 들고 있었다. 문리대생으로서는 특이할 만큼 독보적인 완력의 소유자인 백승진은 대열을 정돈하고 있었다.

    마침내 대오가 출발하자 문리대 정문에 이르러 매국노 이완용과 일본 총리 이케다(池田)의 화형식을 실행했다. 이후 대오는 돌진해오는 진압 경관대와 충돌했다. 다음날인 3월25일 서울에서는 9개 대학교와 3개 중·고등학교가, 지방에서는 부산 대구 전주 등지에서 7개 대학교가 가세했다. 26일에는 광주 대전 이리 여수 충무 수원 온양 등으로 확산돼 한일회담 반대 데모는 전국화하기에 이르렀다.

    대중운동이 고양됨에 따라 의외의 수확도 있었다. 적진 내부에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정치학과 후배로 데모의 지도부에 있던 김정남(金正男·전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이 은밀한 정보를 가져왔다. 그는 “YTP(Young Thought Party·靑思會, 중앙정보부와 공화당의 지원을 받아 학원 사찰을 하던 학생조직, 후일 학원자유화 운동의 발단이 됨)가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내려 한다. 이것이 폭로되면 박정희 테러통치의 추악한 대(對)학원 공작의 부패한 본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YTP 핵심 인물이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열기에 압도돼 애국적 각성을 일으킨 모양이다. YTP는 중정 부장 김형욱(金炯旭)에게로 바로 연결되며, 그 최정상에는 박정희 자신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는 파쇼의 심장부를 강타하는 대중운동 속 네이팜탄이다. 당사자가 변심하지 않고 YTP의 실체를 곧바로 폭로하게 고무하라”고 격려했다. 며칠 후 중앙정보부 행동대는 당사자 학생을 린치했다. 이는 반일 대중운동의 타오르는 불씨에 휘발유를 끼얹는 격이 됐다.

    6·3사태 배후로 지목되다

    1964년 5월20일 문리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 개시 시간인 오후 2시가 되자, 9개 대학 학생 2500여 명과 시민 1500여 명 등 4000여 명에 달하는 군중이 운집했다. 조사(弔辭)와 선언문이 낭독됐다. 김지하(金芝河)가 쓴 조사는 “시체여! 너는 오래전에 이미 죽었다. 넋 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족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말하지 않아도 좋다. 말 못하는 시체여! 길고 긴 독재의 채찍을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를 스스로 때리고 넘어진 너, 박 의장의 이른바 민족적 민주주의여!”라는, 의표를 찌르는 명문으로 박정희를 해학(諧謔)했다.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 뒤의 데모에서 나는 근조(謹弔) 꽃다발 표지를 들고, 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그 후 채 보름이 지나지 않은 1964년 6월3일 서울 주요 대학생들과 시민 1만여 명이 시내 중심가로 쏟아져 나왔다. 박 정권은 군대를 동원했다. 이날 저녁 8시를 기해 서울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한 박 정권은 이후 7월29일 계엄 해제 때까지 1000여 명을 검거하고 300여 명을 구속했다. 나는 그 무렵 공안 당국에 의해 6·3사태의 배후조종 인물로 지명수배됐다.

    6·3사태 배후조직으로 지목된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는 우리가 당시 구상하던 전국 대학 내 마르크시즘 소조(小組)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이 소조들을 전국적으로 연결하는 지하동맹을 만들어 이를 ‘반제민주주의민족해방전국학생동맹(反帝民主主義民族解放全國學生同盟)’으로 묶을 계획이었다. 이 중 노출된 소조가 서울대 문리대 불꽃회였다.

    불꽃회는 서울대 문리대에 국한된 학생조직으로, 단순히 6·3 한일회담반대운동을 위해 만든 게 아니라, 4·19 이후 이념이 여과되는 과정에서 생성·조직됐다. 당시 불꽃회 사건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수사선상에 떠올랐다 무사히 빠져나간 사람이 문리대 외 지방책 김승균과 광주책 김시현(金是現·전남대 상학과 58학번, 4월혁명회 이사장)이었다.

    이후 법정에서는 조직과 규약, 강령을 가상으로 만들어냈다고 진술했지만, 사실은 모든 것이 내부 논쟁의 산물이었다. 특히 강령은 박헌영이 해방되자마자 낸 조선 상황 진단 논문인 ‘8월테제’와 마오쩌둥이 쓴 ‘신민주주의론’, 마르크스의 ‘커뮤니스트 매니페스토’를 참고해 내가 작성했고, 계파 내 토론을 거친 결과물이었다.

    김일성 정치적 정통성 인정

    1961년부터 은밀히 지하 학생 부문조직을 구상해가는 과정에서 이른바 ‘김일성 문제’가 제기됐다.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일 뿐 가짜 독립운동가라는 점과 그가 권력투쟁 과정에서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다는 ‘풍설’은, 이미 널리 퍼져 ‘공인된 학설’이 돼 있었다. 그 진위를 판가름하기 위해 나는 일제 때 자료를 발굴해갔다. 문리대 도서관, 서울대 도서관, 국립도서관에서 2개월에 걸쳐 일제 당시 신문·잡지를 집중적으로 열람했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은 중공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6사 사장이었음을 확인했다. 가짜가 아니라 진짜 항일운동가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각료였던 유림(柳林·1894~1961) 선생을 문리대에 초청해 애국 강연을 들은 일이 있었다. 초청을 위해 댁에 가보니, 몸이 불편한 선생은 오래 묵은 군용 철제 침대에 낡은 군용 모포를 덮고 누워 계셨다. “문리대에서 왔는데 청년들에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셔야겠다”면서 강연을 청했더니, 기동이 몹시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장래를 결정할 수재들인 서울대학생들이 부르니, 내가 가다가 죽는다 해도 가야겠다”고 하시면서 길을 나서 지팡이에 의지한 채 강연을 해주셨다. 강연이 끝난 뒤 선생께 김일성에 대해 물어보니 “소싯적의 김일성을 잘 안다. 김일성이 중학교 다닐 때 만주에서 더러 만났다. 잘 웃고 낙천적이고 사람이 좋았다. 뒤에 들으니 만주에서 중공군에 들어가 무슨 부대장을 한다더니만, 저렇게 영웅이 될 줄은 나도 몰랐어”라고 했다.

    김일성이 가짜는 아니었으나 김일성파는 폭발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것은 박헌영을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아 처단한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김일성이 조선노동당을 장악하고 있는 조건 아래서,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종합한 결론은 김일성의 정통성을 정치적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검거, 탈주, 그리고 죽음의 고문

    6·3한일회담반대운동이 계엄으로 진압되고 7월에 들어서자 나에 대해(6·3 배후와 불꽃회 결성 관련) 현상 수배령이 내려졌다. 현상금은 10만원이었다. 이에 앞서 6·3시위 지도부인 서울대 정치학과 61학번 김중태(환경단체 녹색물결 대표, 역사문제 집필가), 현승일(16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전 국민대 총장), 김도현(전 문화체육부 차관, 현 강서구청장)에게 각각 1만원씩의 현상 수배령이 내려졌는데, 운동권 학생에게 현상 수배령이 내린 첫 사례였다. 그들은 나에게 현상 수배령을 내리기 전에 모두 검거됐다.

    나는 체포됐고 이윽고 취조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맑은 정신으로 자술서를 작성했으나, 대동소이한 신문과 자술서의 작성이 반복되고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취조관은 몹시 화를 내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네 몸 상하지 않고 끝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여드레 동안이나 기회를 줬는데 핵심은 하나도 안 불어. 이 새꺄! 푹 자! 자고 나서 공사(工事)를 해보자!” 하고는 나가버렸다.

    한동안 잠을 재운 뒤 ‘공사’가 시작됐는데 먼저 취조관 3명이 둘러싸고 몽둥이로 다짜고짜 때리기 시작했다. 머리, 팔, 어깨, 허리, 다리를 닥치는 대로 때렸다. 고문자들의 이마에도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온몸이 쑤셔오면서 이러다가 어쩌면 조직을 자백할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조직을 지키려면 탈주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점심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요원은 점심식사를 하러 나가고 안가(安家)에는 소수의 인원만 남아 당번을 서고 있었다. 나는 담당 경비관에게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했다. 경비관은 나를 화장실로 데려간 뒤 양손의 수갑을 벗기고 감시를 위해서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채 지켜보고 있었다.

    혁대는 압수되고 없었으므로 수갑을 벗기자마자 나는 바지 단추를 채운 그대로 일단 변기 위에 엉거주춤 앉는 체하다가 부드럽게 일어서면서 경비관을 아금손으로 밀어 제압했다. 창문에는 피의자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굵은 각목을 대못으로 박아놓았다. 나는 완력으로 그 각목 창살 하나를 뽑았다. 그러자 탈출할 공간이 생겼다.

    각목 창살을 뽑는 데 약간의 시간이 경과했다. 그동안에 경비관은 회복했다. 그는 “김정강이가 도망간다!”고 고함을 질렀다. 창살 틈새로 몸을 내밀어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창문은 1층이 아니라 꽤 높은 2층이었다.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내렸다. 착지하는 순간, 두드려 맞아 이미 다친 오른쪽 발목에 기분 나쁜 통증이 왔다. 발목을 삔 것이었다. 그럼에도 도주를 계속했으나 결국 잡혀 취조실로 다시 끌려왔다.

    그들은 구타로 해진 걸레처럼 된 나를 물고문하기 위해 튼튼한 장목(丈木)에 통닭구이 상태로 매달았다. 고문자는 적신 수건으로 내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는 수건 위로 주전자의 물을 부었다. 수건이 코와 입에 착 달라붙었다. 숨을 참지 못해 들숨을 쉬니 공기 대신 물만 코와 입으로 들어왔다. 올챙이처럼 배가 불러오다가 복압이 세지자 격렬히 토하기 시작했다. 물고문의 강도는 갈수록 세졌다.

    “각하에게 보고되고 있어”

    밤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경비관 1명이 긴장된 걸음걸이로 취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취조관에게 “치안국장님 오십니다”라고 했다.

    이내 박영수(朴英秀·2003년 76세로 사망, 1980~82년 서울시장) 치안국장이 들어왔다. 당시의 표준으로는 키가 큰 편이고, 다소 마른 박영수는 예절 바른 조용한 신사였다. 복장도 검소하면서 품위가 있었다. 그는 일절 말이 없었다. 취조실 분위기를 흐릴까 염려해 구둣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신경 써서 조용히 사뿐사뿐 걸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어떤 동물적인 대상을 관찰하듯이, 조용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내 얼굴, 내 체격을, 실험을 하는 과학자처럼 감정이 없는 눈초리로 응시했다. 그러고는 취조관과 내가 앉아서 마주보고 있는 책상 주변을 한 바퀴 휘 돌고는 나가버렸다. 그가 취조실에 머문 시간은 10분쯤 됐을까. 그가 사라지자 취조관은 “치안국장 박영수야. 박영수가 취조실에 들어온 일은 한 번도 없어. 이 사건은 매일 각하(박정희)에게도 보고되고 있어”라고 했다.

    이번엔 전기고문이 시작됐다. 그들은 나를 바닥에 고정된 철제 의자에 앉힌 뒤 포승으로 묶었다. 양손 손가락엔 전선이 연결된 구리 가락지를 끼웠다. 그리고는 손가락에 물을 부었다. 마침내 고문자가 발전기 손잡이를 돌리자 그때마다 나는 조건반사적으로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펄쩍 뛰었다.

    정말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육체적 고통이 극한에 이르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휘자는 “얘 몸 좀 풀어주고, 좀 재워라”고 지시했다.

    이미 노출된 강령과 규약

    잠에서 깨어나자 장식 없는 취조실에 촉광 높은 백열등이 따가운 광선을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취조관과 마주앉았다. 취조관은 “너 왜 그래, 사실대로 털어놔. 여기 들어왔던 친구들은 사실대로 다 털어놓고 나면 마음이 후련하고 아주 홀가분해진대”라고 했다.

    그때 취조팀 실무 최고 책임자가 들어왔다. 책임자는 취조관을 향해 “회의에서 결정이 났어. 이제 얘는 신문조서 받고 마무리하기로 했어. 이 자식을 더 짜다가(물에 젖은 천을 짜서 수분을 빼어내듯이 고문으로 강제 자백을 시킨다는 취조실의 은어)는 결국 죽이겠다는 겐토오(見當·전망)가 서는데, 죽이면 문제가 심각해지고 또 학생을 죽여서도 안 된다는 게 고위층의 생각이야”라고 했다. 그는 책상 위에다 노란 봉투를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나를 향해 “야, 이 사람아, 자네 조직 지킨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자네 공산주의자지? 세계 최강 미군이 받치고 있는 한 공산화는 안 돼. 6·25사변 때도 봐. 밀고 내려왔지만 결국 다 죽고 망해서 쫓겨갔잖아”라고 했다. 그러고선 주의사항을 말했다.

    “이 봉투에 들어 있는 것이 불꽃회 강령과 규약, 관련 메모야. 자네는 이것이 노출되지 않은 줄 알고 그 고생을 한 것 아닌가. 지금 이게 우리 손에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겠지. 놀랄 것 없어. 자네가 한 짓은 이미 다 알고 있었어. 데모 지도부에 우리가 넣어놓은 학원 프락치로부터 모든 것을 매일 보고받고 있었다는 것, 자네 정도면 다 알고 있었겠지. 솔직히 우리는 자네에게 자료를 안 보여준 상태에서 신문(訊問)을 통해,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데까지는, 자네의 자백을 획득하려 했어. 그래야 자네가 자네 행위를 남김없이 자백했는지, 자네들이 만든 조직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이 정도로 끝내기로 결정했어. 자네도 그 영리한 머리로 분석하고 있겠지만, 지금 취조 과정에서 학생을 죽이면 어떻게 되겠나. 자네도 그 통빡을 재고 버티는 거지? 이제 불꽃회 강령, 규약과 관련 메모를 자네한테 까놓을 테니 거기에 맞춰 자술서와 신문조서를 써. 그렇게 결정됐어. 자네가 만든 것이지만 잊어버린 것도 있을 것이고, 다시 읽어보고 싶기도 할 것이니,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죽 읽어보고 조서를 작성해. 단, 이제 우리 거짓말은 일절 말고 신사적으로 참말만 하자고.”

    反김일성 마르크스주의와 위장취업

    나는 당시 제도가 제공하는 법적 절차를 더 이상 밟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고 기결수가 돼 서울형무소 특별사(舍)로 넘어갔다. 당시 서울형무소 특별사에는 남북 노동당 출신의 좌익수가 여럿 수감돼 있었는데, 나는 그들에게서 한반도 좌익의 생생한 경험과 지혜를 배우려고 마음먹었다.

    먼저 당시 특별사 좌익수 최고 서열로서 남로당 경북 봉화군당 위원장 출신의 남파 정치공작원 권상출(權相出)에게 내가 당시 중요한 화두로 삼고 있던 ‘박헌영 문제’를 물어보았다. 당시 좌익수로 분류됐던 나는 비록 규칙위반이었지만 운동시간에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그와 대화할 수 있었다. 권상출은 일제 전문학교 출신으로 재학 때 이미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된 고위 정치공작원이었다.

    내가 박헌영 문제를 처음 물었을 때 권상출은 단호히 “박헌영은 일제와 미제의 고용 간첩이다. 우리 남로당 출신들은 그를 받들고 다녔던 것을 수치로 알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은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해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중한 태도였다.

    남로당계 간첩과 남부군의 만남

    그 후 형무소 내의 수용 여건 때문에 그와 내가 합방이 돼 한방에서 함께 지내던 어느 비오는 날 밤, 조용한 틈을 타 내가 그에게 “박헌영이 간첩이라면 참으로 이상하다. 간첩이란 호의호식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박헌영은 일제 강점기에는 광주 벽돌 공장에서 인부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했고, 8·15 후에는 미국놈의 지명수배 아래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월북했지 않나. 간첩질하면서 그 대가가 인부 노릇이나 지명수배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월북 후에 부수상까지 했으니 간첩을 시킨 왜놈이나 미국놈이 박헌영을 호의호식시켜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화국이 처음으로 호의호식을 시켜준 셈이다. 박헌영이 바보가 아닌데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간첩질을 했겠나” 하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래 말이다. 박헌영이 큰 과오를 범했어. 수령이 젊어도 포용력이 크고 멀리 보는 눈이 있는데 공화국 부수상 겸 외상에 당 제1비서 시켜줬으면 된 거 아니가. 2인자 아닌가. 꼭 1인자를 해야 했나. 수령이 비록 젊더라도 포용력이 있으니까 받들고 나갔으면 인민과 공화국을 위해 자기의 높은 경륜을 모두 펼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자기가 수령보다 높은 데 있는 체하고, 심지어 쿠데타 음모까지 했으니 결국은 겉똑똑이고 못난이지 뭐”라고 했다. 권상출은 끝까지 말로는 박헌영을 비난했다. 그러나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박헌영을 간첩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어투에는 어쩔 수 없는 경모(敬慕)의 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 후 합방이 풀리고 다시 독방으로 되돌아간 어느 날, 대전 특별사의 비전향 고위 좌익수 한 사람이 ‘사회견학’을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는데 내 옆방에 묵게 됐다. 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지리산 남부군 이현상 동지 밑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던 이희영인데, 동지는 누구십니까. 나는 사형에서, 4·19 때 감 일등되어 지금은 무기입니다.”

    이에 나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 이름은 김정강이라고 하는데 죄명은 ‘6·3사태 배후조종과 불꽃회’입니다. 징역 2년입니다”라고 답했다.

    당시는 전력 사정이 어려웠으므로 어느 기관이거나 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작은 독감방을 경계 짓는 벽에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에 조그만 백열전등이 매달려 두 방을 동시에 조명하게 돼 있었다. 이 구멍 때문에 그리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말로만은 통방(通房)을 할 수 있었다. 그는 2박3일간 내 옆방에 있었는데 우리는 담당 형무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틈만 생기면 통방을 계속했다.

    그가 나갈 때 식구(食口)통으로 내다보니, 키는 큰 편으로 흰 피부에 쳐다보는 눈매가 시원했고, ‘사회견학’을 위해 푸른 죄수복 대신 검게 물들인 군용 야전 점퍼에 군용 바지, 검은 가죽 군화, 기결수의 빡빡이 머리를 가리기 위한 검은 빵모자 차림새였다.

    反마르크스주의 작풍(作風)

    이희영은 자기 소개를 끝내고 나서 “이현상이란 이름을 알고 있는가”라고 물었는데, 내가 “일제 강점기부터 항일 운동을 해온 공산주의자로,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의 전설적인 사령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 대답에 그는 그럴 수 없이 기뻐했다. 나는 “남부군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빨치산이 왜 궤멸될 수밖에 없었는가”라고 물었더니 그는 “보급과 무기체계가 국방군에 비해 너무 열악했고 기지도 없었으며 나중에는 탄약도 부족했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 손가락이 썩어 문드러져도 약 한 병이 없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유동전을 할 수 있었던 밑천인 후퇴로마저 우리에겐 없었다”고 했다.

    이튿날 내가 “박헌영 간첩설에 대해 남한의 연구자 사이에서는 의문이 많다. 한마디로 믿기 어렵다는 의견이 대부분이다”라고 하자, 그는 “이승엽은 간첩이었던 것이 틀림없는데…. 그는 일제의 밑에서 인천식량영단 이사를 하면서 호의호식했다. 당시 그 자리는 일제의 간첩이 되지 않았으면 얻을 수 없는 자리였다”고 했다. 즉 박헌영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이승엽(李承燁)에게로 혐의를 비약시켜버리는 형국이었다. 그 역시 내심 박헌영을 ‘미국놈의 간첩’으로는 보고 있지 않았다.

    박헌영의 숙청 문제는 어떻게 그냥 넘어간다 해도, 월북한 남로당원 전체를 계통적으로 숙청해버린 것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장군’ ‘수령’이라는 호칭 아래서 솟아나는 개인숭배도 혐오스러운 반(反)마르크스주의 작풍(作風)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인데, 어떻게 미신적인 개인숭배가 있을 수 있는가? 성분주의(成分主義)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반(反)변증법적 작태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더욱이 북에선 일반 인민의 국외 여행은 상상할 수도 없고, 국내 여행도 실질적으로는 금지돼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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