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호

로마인 이야기 역자 김석희의 번역인생 20년

“성실한 추녀보다 불성실한 미녀를!”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7-06-07 11: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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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문과 나왔으니 영어는 기본, 일어는 독학”
    • ‘유신학번’ 제주 촌놈의 ‘오기와 치기 사이’
    • “번역은 아내가 더 많이… 최종 OK는 내가”
    • 한 달에 한 권 번역… 2년치 일감 쌓여 있어
    • 8시간 자고, 8시간 일하고, 8시간 논다
    • 버리지 않은 창작의 꿈, ‘귀향일기’로 이룰까
    로마인 이야기 역자 김석희의 번역인생 20년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가 한국에서 250만부나 팔린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로마인 이야기’ 같은 어려운 책이 잘 팔린다는 것은 한국의 독자 수준을 말해주는 것 아닐까요. 제 자랑은 아니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니까요. 그만큼 지적 수준이 높은 독자가 많다는 얘기라고 봅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놓친 게 있다. ‘로마인 이야기’는 ‘번역’이라는 과정을 거쳐 한국 독자에게 왔다. 시오노 나나미는 어렵게 썼을지 모르나, ‘로마인 이야기’가 국내에서 높은 인기를 모은 이유로 많은 이가 ‘독자에게 이야기하듯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문장’을 꼽는다.

    소설가의 꿈과 번역의 숙명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한 김석희(金碩禧·55)씨는 편집자들 사이에 문장력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김씨는 서울대 불문과 졸업 후 프랑스어를 잊어버리지 말자는 생각에 18세기 프랑스 연애심리 소설 ‘아돌프’를 처음 번역한 이래 지금껏 영어, 불어, 일어를 넘나들며 200여 권의 번역서를 냈다.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됐으나 그 무렵 본격적인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신춘문예로 인정받은 글쓰기 실력을 번역에 녹여 일가를 이룬 셈이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 ‘화산도’ ‘털 없는 원숭이’ ‘르네상스의 여인들’ ‘힐러리 자서전-살아있는 역사’ 등이 대표작. 1997년 ‘로마인 이야기’로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해 번역가로는 드물게 ‘역자후기’를 모아 ‘북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 60’을 펴냈다.



    그가 사는 인천으로 향했다. ‘번역공장’이자 살림집인 아파트에 들어서자 문득 누렇게 바랜 원서 이미지가 떠올랐다. 오래된 가구, 짙은 갈색 패브릭, 우리말보다 외국어가 더 많이 눈에 띄는 거실의 책들 때문일 것이다. 가는 뿔테 안경을 쓰고 기자를 맞는 그는 마치 헌책방 주인 같다.

    막 소파에 앉는데 그의 아내가 들어왔다. 망고주스를 사오는 길이다. 그는 망고주스를 따라주면서 “리영희 선생이 망고주스를 좋아하신다”며 웃었다.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리영희 선생이 망고를 좋아하시니 재미있지 않냐”는 얘기다. 리영희 선생과는 ‘로마인 이야기’를 펴낸 한길사를 통해 알고 지낸다고 했다.

    김씨는 본래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대학 2학년 때와 3학년 때 연달아 ‘대학신문사’ 주최 대학문학상에 소설과 시가 당선됐다. 제주도에서 ‘수재’ 소리 듣고 서울대에 들어갔으나 ‘천재’들에 치여 절망하고 있던 그에게 ‘글쓰는 재주’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자연스럽게 소설가를 꿈꿨고, 등단하기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방편’으로 불문과 졸업 후 국문과에 학사 편입했다. 이후 대학원에도 진학했으나 공부가 목적이 아니었기에 1년 남짓 다니다 그만둔다.

    1980년을 전후로 문학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문예지를 통해 등단했다. 하지만 그는 ‘폼 나게’ 데뷔하고 싶어 신춘문예만 고집했다. 최종심까지 올랐다 떨어지기를 6번…. 그는 그 시절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한다.

    ▼ 1988년 신춘문예에 당선됐는데, 그 뒤로 번역을 더 열심히 하셨더군요.

    “불문학의 울울창창한 숲을 지나면서 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글에 대한 존경심 같은 게 있었어요. 그래서 소설가로 데뷔한 뒤에도 일필휘지(一筆揮之) 못했지요. 이런 글쟁이는 소설 써서 밥 먹고 살기 힘들어요. 번역은 그전부터 용돈벌이로 간간이 했는데 이제는 비즈니스이자 직업이 돼버렸죠. 사람들은 제가 문학을 접었다고 하지만, 뭘 보든 소설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노트에 끼적이니 꿈을 버린 건 아니죠.”

    김씨의 첫 번역서는 1979년 펴낸 ‘아돌프’지만, 그는 자신의 번역 경력의 기점을 1987년으로 잡는다.

    로마인 이야기 역자 김석희의 번역인생 20년
    “‘아돌프’는, 학생운동하다 제적당한 친구가 출판사를 만들고는 하도 종용을 해서 번역한 거예요. 그 뒤로도 몇 권 더 번역을 했지만 본격적으로 매달린 건 1987년 ‘화산도’를 번역하면서부터죠. 소설가 이호철 선생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씨가 ‘4·3사건’을 주제로 쓴 대하소설이에요. 원고지 1만매가 넘는 분량이죠. 번역 실력이 설익었고, 컴퓨터 작업도 안할 때라 힘겹게 원고지 칸칸을 메우면서 번역에 대한 숙명 같은 걸 느꼈어요.”

    그러면서도 틈틈이, 주로 ‘포장마차’에서 소설을 썼다. 총 3편을 써서 ‘한국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에 냈는데, 결국 ‘한국일보’에 당선된다. 번역과 창작을 병행한 1987년, 그리고 1988년의 결실은 그로 하여금 소설이 아닌 번역을 직업으로 선택하게 만든다.

    “‘화산도’를 번역하면서 처음으로, 번역도 글쓰기의 일종이니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러는 차에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화산도’도 출간되고 나니 번역과 소설 양쪽에서 원고 청탁이 들어왔어요. 소설가가 번역하면 좀 낫지 않겠나 싶었는지. 1987년에 그렇게 계기를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살고 있을까 싶어요. 그전의 10년은 제게 ‘잃어버린 10년’이지요.”

    이후 한동안은 번역과 소설 쓰기를 ‘왔다갔다’했다. 창작집 ‘이상의 날개’, 장편소설 ‘섬에는 옹달샘’ 등을 발표했다. 그런데 점점 소설 쓰기가 싫어졌다. “소설쓰기가 힘들기도 했고, 1990년대 이후 후일담 소설, 신변잡기 소설이 만연하는 분위기가 실망스러웠다”고 털어놓는다.

    섬사람의 배타성

    ▼ 수준 높은 외국 문학을 계속 접하다보니 아무래도 글쓰기가 더 힘들어진 것 아닐까요.

    “좋은 책 번역하고 나면 두 가지 기분이 들어요. 난 왜 이만한 글을 못 쓸까 하는 자괴심과 이만한 책을 내가 번역해서 내놓는다 하는 자긍심. 번역을 하면서 대리만족하는 것도 있죠. 그만한 수준의 글을 번역하면서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채운다고 해야 할까.”

    ▼ 불어, 일어, 영어를 넘나들며 번역했는데,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

    “영어 50%, 일어 30%, 불어 20%쯤 되는 것 같아요. 불문과 나왔으니 영어는 기본이고, 일어는 국문과에 학사 편입해 다니면서 독학했어요. 대학원 다닐 때 현대시를 공부하려고 했는데, 현대시엔 일제 강점기도 포함되니까 일어를 알아야 했죠. 또 1970년대 후반, 대학에선 일어에 대한 관심이 높았어요. 투쟁 일변도의 학생운동이 이념적으로도 조직화하기 시작한 때라 학생들끼리 사회과학 서적을 번역해 팸플릿처럼 돌려 읽었는데, 원저를 번역하기가 힘드니까 일본어로 번역된 걸 중역(重譯)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마오쩌둥이며 마르크스에 관한 책들이 대부분 그렇죠. 물론 저는 개인적인 필요에서 일본어를 공부했지만.”

    ▼ 학생운동은 안 했나요.

    “전혀요. 전 술 마시고 글만 썼어요. 학생운동과 일정부분 거리를 둔 게….”

    그가 일어서 방으로 들어가더니 책을 한 권 가지고 나왔다.

    “여기에 내가 글을 썼는데, 학창시절 가졌던 생각이 담겨 있어요. 제주도에서 올라올 땐 공부하고 싶었는데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 않은 데 대한 불만, 그리고 섬사람 특유의 배타성도 작용했겠죠. 운동에 거리를 뒀어요.”

    그가 내민 책은 서울대 문리대 72학번 모임 ‘마당’ 회원들이 입학 30주년을 맞아 2002년에 펴낸 에세이집, ‘새벽을 엿본 마로니에 나무’다. 목차에 황지우, 김정환, 정동영, 이해찬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인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은 ‘오기와 치기 사이’다. 흔히 ‘긴급조치 세대’ ‘유신학번’이라 불리는 72학번이지만, “제주도 촌놈이어서 서울 중심의 놀이판에는 별로 이해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써놓았다. 겉도는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글 쓰는 것뿐이었고, 73년과 74년 연이어 대학문학상을 받자 우쭐해지기도 했으나 “그것은 재능의 소산이 아니라 오기의 치졸한 방사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조했다.

    ‘87년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 결혼은 언제 했습니까.

    “일찍 했어요. 75년에 서울대가 관악산으로 옮긴 다음, 거기서 언어학과 1년 후배를 만나 연애하고, 아들 낳고 잘 살아왔죠. 우리 아들놈이 76년생이에요.”

    ▼ 신춘문예 당선되기 전까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했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컸겠네요.

    “근근이 먹고살았어요. 1년 넘게 제주도집에 내려가 살기도 하고, 촉탁직도 좀 하고, 오래 있은 데는 한 1년쯤… 삼성출판사에서 ‘제3세대 한국문학’ 24권짜리 전집을 진행했는데 ‘대박’이 났어요. 사장이 기획실장까지 시켜줬는데, 얼마 못가 사장하고 다퉈서 나와버리고….”

    ▼ 부인이 잘 참아주셨나봐요.

    “젊을 땐 많이 다퉜죠. 이혼하잔 얘기도 나왔으니까. 경제적으로 어렵고, 무엇보다 전망이 없으면 부부싸움이 생길 수밖에 없어요. 제대로 된 길을 밟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데 대해 내 스스로 분노를 만들어내니까, 곁에서 누가 조금만 잘못 얘기해도 ‘욱’했죠. 인생이 아주 막막해서 술도 많이 먹고, 심하게 아파도 하고, 명절에 집에도 안 내려가고요. 친척들이 취직 안 하냐고 묻는 게 꼭 ‘서울대 나와 하릴없이 지내고 있냐’며 욕하는 것 같아서. 미래가 없다는 것만큼 사람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게 없죠. 그렇다고 소설가의 꿈을 버리면 그건 너무나 치명적인 상실이고. 문득문득 ‘87년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죠.”

    수줍게 웃으며 망고주스를 내놓던 그의 아내는 인터뷰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주방 쪽 방에선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그는 “아내와 ‘공동작업’을 한다”고 말했다.

    ▼ 공동작업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책의 성격에 따라 다르죠. 왔다갔다.”

    ▼ 같은 책을 나눠서 번역하는 건가요? 아니면….

    “급할 땐 그렇게도 하고요.”

    ▼ 부인 이름으로 나온 책도 있습니까.

    “아뇨.”

    ▼ 부인이 억울하겠습니다.

    “본인이 원한 거예요. 우리로선 전략이죠(웃음). 소설가 김석희 이름으로 나가는 게 나으니까. 또 결국은 다 내 손을 거쳐서 나가요.”

    ▼ 서로 해놓은 일에 대해 의견 다툼도 있겠네요.

    “그럼요. 초기엔 더 많았죠. 내가 맞네, 네가 맞네 하면서. 읽는 방식이라는 게 자기가 갖고 있는 어휘의 세계, 감수성의 세계에 따라 아주 다르거든요.”

    ▼ 솔직히 누가 더 많이 번역합니까.

    “집사람이 더 많이 하죠. 난 밖에 나가서 술도 먹고 하니까. 그러나 어쨌든 ‘최종 OK’는 내가 해요. 아내가 1차 번역을 하더라도 글 쓰는 사람이 최종적으로 감수를 해야죠. 부부가 같은 공간에서 이만큼 오래 부대끼며 산 집이 또 있을까 싶어요. 우리는 안방에서 나와 난 내 방, 아내는 아내 방에 가면 그게 출근이죠. 이런 콤비네이션, 파트너십이 아니면 얼굴 맞대고 30년 살기 힘들었을 거예요. 만날 집에서 밥해 먹는 게 귀찮아 하루 한 끼만 먹은 지도 15년 됐어요.”

    ‘시간과의 싸움’

    ▼ 나머지 두 끼는요.

    “정확히 얘기하면 밥 있는 한 끼, 밥 없는 한 끼죠. 오후 대여섯 시에 밥 있는 한 끼 먹고, 다른 한 끼는 떡이나 라면 같은 것… 사먹을 때도 많고요.”

    처음 그의 집에 전화했을 때, 아내는 남편이 자고 있다면서 전화번호를 남겨 놓으라고 했다.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시각은 오후 1시가 조금 못 됐을 때였다.

    로마인 이야기 역자 김석희의 번역인생 20년
    ▼ 주로 밤에 일하시는 모양이에요.

    “글 쓰는 일이 집중력을 필요로 하니까 밤에 일하는 게 편하고 좋아요. 보통 새벽 4, 5시쯤 자요. 11시쯤 일어나 1~2시간 운동 다녀오면 오후 2시 넘어야 전화통화가 되죠.”

    출판계에서 김씨를 선호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마감일을 잘 지켜주기 때문이다. 그는 번역을 업으로 삼은 뒤로 ‘8·8·8’ 생활수칙을 지켜오고 있다.

    “그렇게 틀 잡아놓지 않으면 재택근무 자체가 불가능해요. 번역은 특히 더 그래요. 등산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아요. 두어 걸음 한꺼번에 뛰어넘을 수 없고, 한 글자 한 글자 다 밟아야 하죠.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에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져요. 나처럼 번역이 직업인 사람은 출판사와의 ‘신용거래’가 중요하기 때문에 마감일을 지키는 건 기본이에요. 그러려면 매일 일정량을 작업해야 해서 8시간 자고, 8시간 작업하고, 8시간 노는 걸로 규칙을 정했죠.”

    그는 체력관리도 중요하다고 했다. 얼마 전 스쿼시를 하다 왼쪽 어깨를 다친 탓에 요새는 운동을 잠시 쉬고 있지만, 그전까지는 매일 헬스클럽을 가거나 자전거를 타는 등 꾸준히 운동을 해왔다.

    “번역이라는 직업을 지탱해주는 생활여건이 중요해요. 소설은 뭔가 떠올랐을 때 밤새 몰아서 쓰고 며칠 쉬면 되지만, 번역은 일정 기간 안에 소화해야 할 양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지금도 번역하려다 뒤로 물러나는 사람 대부분이 자기 관리가 안 돼서 그렇죠. 번역을 ‘시간과의 싸움’이라고 하는 건 그런 작업 방식 때문이기도 하고, 또 얼마나 많은 훈련으로 실력을 축적했냐에 따라 그 결과물이 굉장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에요. 소설은 젊을 때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도 뛰어난 작품을 쓸 수 있지만, 번역은 1년 한 사람과 10년 한 사람의 실력차가 크거든요. 외국어 좀 한다고 번역을 시작했다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게 돼서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 많은데, 안타깝죠.”

    ▼ 중도에 물러서면 개인의 아쉬움으로 그치고 말지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책이 나오니까 문제죠.

    “잘 번역돼 나와야 할 좋은 책들이 잘못 번역돼서 읽히지 않으면 문제죠. 대표적인 게 재미교포 작가 이창래 소설이에요. ‘네이티브 스피커’가 우리말로 번역돼 나왔을 때, 번역이 문제가 됐죠. 해외에서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국에서 열심히 읽어주면 좋은데… 자기 소설이 모국에서 읽히지 않는다면 소설가로서 환멸을 느끼지 않을까요.”

    ▼ 우리나라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얘기는 많이 합니다만.

    “외국어로 썼을 뿐, 사실 우리나라 얘기잖아요. 그런 걸 국내에서 받쳐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죠. 일본의 사정은 우리와 달라요. 영국에서 활동하는 일본 출신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영화 ‘남아있는 나날’의 원작자인데, 책을 내는 족족 일본에서 번역돼 베스트셀러가 돼요. 사실 작품이 재미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은 열심히 읽어서 작가를 기분 좋게 만들죠. 저도 재일교포 작가 작품을 몇 편 번역했는데, 10년 전쯤 번역한 양성일 작가의 ‘피와 뼈’는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별 인기가 없었어요.”

    ▼ 월간 혹은 연간 계획을 세우고 일합니까.

    “지금까지 200권 정도 냈으니 한 달에 한 권은 낸 셈이죠. 그래서 가끔은 여기가 ‘번역공장’이구나 생각하는데, 정상적으로 작업하면 굳이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그렇게 돼요. 두꺼운 책은 한 달 조금 더 걸리고, 얇은 책은 좀 덜 걸리고, 평균적으로 한 달에 한 권이죠.”

    ▼ 일감은 꾸준히 들어오는 편이죠?

    “지금 한 2년치 쌓여 있어요. 몇 년 전까지는 그때그때 부탁받아서 하는 일이 많았는데, 요새는 청탁 받는 것 반, 내가 하고 싶은 것 반 그래요. ‘쥘베른 컬렉션’이나 푸른숲 출판사와 함께 준비하고 있는 문제작가 혹은 문제작 시리즈처럼 내가 기획해서 장기적으로 하는 일이 있고, 그때그때 출판사에서 의뢰하는 것들이 있죠. 부탁받아 하는 일 비중이 점점 줄어가는 추세예요.”

    ▼ 1997년에 내신 역자후기 모음집 ‘북 마니아를 위한 에필로그’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러시아어 혹은 독일어로 씌어진 책을 번역한 경우 ‘영역본을 텍스트로 삼고, 일역판을 참고했다’ 하는 식의 문장이 빠지지 않은 점입니다. 우리나라에 번역돼 나온 책의 상당수가 원저가 아닌 일역판을 중역한 것으로 아는데, 굳이 밝힐 필요가 있습니까.

    “밝히는 게 독자에 대한 예의죠. 그리고 일역판을 중역하는 경우가 많은 데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요. 일례로 한 출판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출간을 계획했는데, 원저를 번역하려고 보니 제대로 해낼 역자가 없는 거예요. 번역은 기본적으로 글쓰기라서 러시아어를 좀 안다고 해도 글쓰기 실력이 없으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거든요. 도스토예프스키 전집도 결과적으로 번역의 질이 둘쭉날쭉이라 문제가 됐죠. 스페인 문학을 번역해낼 수 있는 사람도 몇 명뿐이고, 고전은 더 말할 것도 없죠. 과거 중역한 책들 중 원저를 번역해 다시 내놓아야 할 것이 많지만 작업이 전혀 진행되지 않고 있어요.”

    오역하더라도 읽혀야

    그는 중역된 책을 새로 번역해야 하는 필요성을 제기하면서도 중역 자체가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번역은 시대의 반영이기도 해요. 가령 1960년대 번역과 2000년대 번역은 엄연히 달라야 해요. 예를 들어, 카뮈의 ‘이방인’의 첫 문장이 ‘Aujourd’hui Maman est morte’인데, 1950년대에 번역된 책은 ‘오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로 돼 있어요. 그런데 1980년대 고려대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책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로 시작하죠. 주인공의 심리를 고려하면 ‘오늘 엄마가 죽었다’가 맞아요. 하지만 1950년대에 그렇게 번역했으면 아마 후레자식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번역은 그렇게 시대를 반영할 수밖에 없어요. 문학뿐 아니라 사회과학 서적도 마찬가지죠.”

    ▼ 세계화를 천명하고, 외국어 공부 열풍이 불고 있지만, 아직도 번역해내지 못하는 책이 많은 걸 보면, 우리 문화 수준이 한참 뒤처져있는 것 같습니다.

    “흔히 일본의 근대화가 번역을 통해 이뤄졌다고 얘기하죠. 사실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이런 얘기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나라가 일정부분 일본의 근대화에 무임승차한 면이 있어요. 일제강점기 후엔 우리 스스로 원저를 번역해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계속 삐걱대고 있으니 문제죠. 우리의 역량이 뛰어나서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는 있겠지만, 근간은 취약할 수밖에 없어요. 모양 흉내는 내지만, 알맹이는 못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번역이 홀대받고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문학상 받는 게 요원하다고 생각하는데, 번역 때문이에요. 우리 문학, 훌륭하죠. 우리나라만큼 근현대사가 질곡 있는 나라도 드물어요. 한국 문학이 독자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요소가 한(恨)인데, 그 한이 배어 있는 문학을 청소년 문학 수준으로밖에 번역을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노벨문학상을 받겠어요.”

    문자의 향기가 없는 번역

    김씨는 인터뷰 도중 “번역은 기본적으로 글쓰기”라는 얘기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글쓰기 소양이 없는 사람이 얄팍한 외국어 실력으로 번역을 하면 문자의 향기가 풍기지 않는 번역이 되고 만다”는 얘기다.

    ▼ 개인적으로 손에 꼽는 좋은 번역가가 있다면.

    “영어는 정영목씨, 일어는 김난주씨. 젊은 시절 문학공부를 한 사람은 문학적 소양이 번역에도 나타난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어요. 편집자가 번역한 글을 ‘교정’ 보지 않고, ‘교열’을 하려고 합니다. 번역자의 글을 편집자 취향에 맞게 뜯어고쳐요. 그러면 책은 좀 보기 좋게 나올지 모르지만, 번역한 사람이 없어지는 거죠. 완성된 책만 갖고는 번역자의 실력을 가늠하기 어려워서, 실력 없는 번역자들이 시장에서 자연도태 되는 일도 없어요.”

    ▼ 기획자가 알아서 고치겠지 하고 원고를 대충 써서 보내는 필자들도 있죠.

    “저는 ‘그냥 읽기만 해라, 정 고쳐야 할 것 같으면 표시만 해둬라, 내가 보고 고치겠다’고 해요. 자기가 생산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을 지는 게 중요한데, 절반은 그렇고 절반은 또 그렇지 않아요. 일본만 해도 편집자가 원고를 함부로 고치지 않는 풍토인데, 우리나라는 그게 관행처럼 돼버렸어요. 저도 초장엔 편집자와 많이 다퉜어요. 편집자로선 원고에 손대지 않고 봉급 받기가 미안한가봐요(웃음).”

    ▼ 좋은 번역은 어떤 겁니까.

    “독자가 읽게끔 번역하는 거죠. 전 이렇게도 얘기해요. ‘정직한 번역을 해서 안 읽히는 것보다는 오역(誤譯)을 하더라도 읽히는 번역이 낫다.’ ‘성실한 추녀냐 불성실한 미녀냐’ 하면, 전 번역에선 불성실한 미녀를 택하는 편이에요. 물론 학문적 번역은 다르지만, 문학은 우리말 중심으로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말답게 번역하기 위한 방법으로, 저는 번역한 문장을 중얼중얼 읽어요. 내재율이라고 하는, 문장 속 리듬을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읽는 사람이 리듬을 타니까 편하죠.”

    그는 지금도 웬만한 백과사전보다 큰 영한사전을 곁에 두고 일한다. 그러나 번역할 때 유의해야 할 점으로 ‘텍스트와 사전에 갇히지 말 것’을 꼽는다.

    만족스러운 전향

    “쉬운 예로 ‘Good morning’을 ‘좋은 아침’이라고 안 하고, ‘안녕하세요’라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텍스트가 두 단어라고 해서 우리말도 꼭 두 단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해요. 단어 대 단어로 번역하려고 하지 말고 텍스트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하죠. 또 사전은 한 단어가 쓰일 수 있는 여러 의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추려놓은 거잖아요. 거기에 갇혀서 뜻을 새기려고 하면 안 되죠. 저는 문장이 주는 이미지를 갖고 아예 우리말로 문장을 다시 쓰는 경우도 있어요.”

    그는 20년 전에 번역한 책과 근래에 번역한 책을 비교해보면, 글쓰기 실력과 함께 어휘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20여 년 동안 접한 문장과 단어가 고스란히 축적됐을 테니 그럴 수밖에. 번역이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걸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 이미 갖고 있는 소양과 축적된 지식만으로 소화할 수 없는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원 텍스트를 우리말로 옮겨가는 과정엔 객관성이 필요한데, 그 객관성은 정보량과 맞물려 있어요. 그래서 ‘로마인 이야기’를 번역하면서 여러 권의 책을 참고했던 것처럼, 꾸준히 다른 책을 읽으면서 정보를 축적해야 번역의 오류가 없어지죠. 그런 면에선 인터넷처럼 고마운 게 없죠. 10년 전만 해도 번역하면서 참고할 거라곤 기껏해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었으니까요. 가령 에드워드 사이드의 자서전은 1930~1950년대 중동을 배경으로 하는데, 우리나라엔 그와 관련한 자료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인터넷 검색창에 단어 몇 개 치면 자료가 나오잖아요.

    요즘은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 들어가 보면, 전세계에서 자유 기고한 정보가 참 많은데, 우리나라는 그 항목 수가 굉장히 적어요. 각 항목의 정보도 자세하지 않고요. 나이가 들어 번역계를 떠나면, 외국어로 된 정보를 우리말로 번역해 올려놓는 작업을 할까 하는 생각도 있어요.”

    위키피디아는 미국의 위키미디어재단의 온라인 무료 백과사전으로 ‘사용자 참여’가 특징이다. 사용자가 자유롭게 글을 올릴 수 있다는 점에서 ‘네이버’의 ‘지식in’과 유사하나 좀더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고, 무엇보다 세계 각국 언어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의외의 대박, 힐러리 자서전

    ▼ 번역을 언제까지 할 것 같습니까.

    “1987년부터 계산하면 올해 꼭 20년이에요. 올해 두 번째 역자후기 모음집을 내고, 10년 뒤에 한 권 더 내면…. 가끔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보면 기업에서 ‘이사’를 달면 붙어 있고, 그렇지 못하면 퇴직했어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골프여행 다니고 하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죠. 그런 면에서 나를 참 부러워해요. 앞으로 한 10년을 더 시간을 관리할 수 있으니(웃음). 저더러 소설에서 번역으로 ‘전향’했다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생활하면서 부대끼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둘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또 소설은 쓸 때마다 스트레스 받지만, 번역은 이제 도사가 돼서 그 정도는 아니니까요.”

    ▼ 없는 걸 창조해내는 것과 있는 걸 더 좋게 다듬는 것의 차이겠죠.

    “의미는 좀 덜하지만, 그만큼 작업은 편한 거죠. 그게 내 인생인데 어떡해요.”

    ▼ 돈은 많이 벌었습니까.

    “그냥, 먹고사는 데 어려움 없을 정도죠. 매절로 고료를 받아오다가 2000년 이후론 1% 인세(印稅)를 받아요. 번역료를 받고 나면 책과의 인연이 끊어져버리는 것 같아서 고료를 좀 덜 받더라도 그러기로 했는데,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연말에 몇 푼 들어오면 반갑고요.”

    ▼ ‘로마인 이야기’는 1995년부터 번역했으니 번역료만 받았겠군요.

    “한길사에서 섭섭지 않게 대우해줬어요. 인세로 뜻밖에 재미를 본 건 힐러리 자서전이에요. 한 5만부 나가면 잘 나가겠지 싶었는데, 몇십만부 나갔잖아요.”

    ▼ 분량이 꽤 됐죠?

    “원고지 3000매였는데, 번역하는 데 1권은 25일, 2권은 20일 걸렸어요. ‘로마인 이야기’ 마지막 권은 200자 원고지 1800장인데 20일 걸렸고요.”

    ▼ 이름 앞에 ‘‘로마인 이야기’ 역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건 어떻습니까.

    “한편으론 좋고 다른 한편으론 불편하죠. 좋은 점은 ‘로마인 이야기’ 번역자 하면 김석희가 설명된다는 것이고, 안 좋은 점은 ‘로마인 이야기’ 외에도 번역한 작품이 많고 앞으로 다른 작품들도 번역해야 하는데, ‘로마인 이야기’가 전부인 것처럼 다른 것들은 차단돼버리는 거죠. 다른 작품들로 굴레에서 벗어나는 게 제 과제죠.”

    그는 내년이나 내후년쯤 귀향한다. 어머니와 누이들이 살고 있는 제주도에 집터도 마련해놓았다. 귀향하면 창작 욕구가 커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번역 글쓰기에 매진하느라 창작 글쓰기를 놓긴 했지만, 꿈을 아주 버린 건 아니에요. 귀향하면 제 생활도 바뀌고, 고향도 다르게 보일 텐데 ‘귀향일기’ 같은 고급 에세이를 써보면 좋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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