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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

육영수 여자관계 뒷조사, 이순자·김옥숙 ‘베갯머리 송사’ 달인, 이희호 막강 인사(人事) 파워

  • 김순희 자유기고가 wwwtopic@hanmail.net

‘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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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상전’, 영부인 열전

1953년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1945년 10월16일 이승만 박사는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홀로 귀국했다. 33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이 박사는 돈암장에 기거했다. 윤치영(초대 내무부 장관)씨의 부인 이은혜씨는 ‘대한여자국민당’의 당수인 임영신씨와 돈암장을 자주 드나들며 이 박사를 도왔다. 당시 이 박사는 71세, 임씨는 47세였는데, 두 사람이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이 소문은 이 박사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미국 캘리포니아대에 유학 중이던 임씨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확대 재생산됐다.

남편에게서 한국에 들어오라는 전갈이 있기를 손꼽아 기다리던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먼저 날아든 소식은 이 박사와 임씨의 관계에 대한 낯 뜨거운 소문이었다. 소식을 접한 그는 대로(大怒))했고 한국행을 서둘렀다. 귀국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남편과 임씨를 떼놓은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임씨의 돈암장 출입을 금지했고 한국에서 임씨를 처음 만났을 때 찬바람이 일 정도로 냉랭하게 대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미움을 산 임씨는 이 박사와 본의 아니게 멀어졌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의 마음에 꼭 드는 여성이 있었다. 이기붕씨의 아내 박마리아씨였다. 박씨는 미국 유학을 통해 유창한 영어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한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박사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이기붕씨는 정식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됐고, 박씨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개인비서가 됐다. 박씨를 총애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박씨는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영부인에게 세상 소식을 전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대통령의 정치 구상이나 생각은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해 박씨에게 전달됐고, 반대로 박씨의 ‘뜻’은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즉각 전달됐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서 “박마리아를 통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세간에 퍼졌다. 박씨가 영부인을 통해 대통령에게 전달하면 이루지 못 할 일이 없다는 뜻이었다. 두 개의 경무대가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하나는 실제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 다른 하나는 이기붕 비서실장과 박씨가 사는 서대문 관저였다. 그리고 두 관저는 프란체스카 여사와 박씨, 두 여자가 ‘쥐고 흔든다’고 소문이 났다. 이를 두고 당시 세간에 ‘자유당은 두 가지 암으로 죽어가는데, 하나는 프란체스카 여사이고 다른 하나는 박마리아’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가장 다루기 힘들어한 사람은 프란체스카 여사였다. 남편을 위한답시고 잔소리와 간섭이 심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부부싸움이 싫어 되도록이면 아내의 부탁을 들어주는 편이었는데, 이것이 갖가지 부작용을 유발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근검절약하고 헌신적이고 남편밖에 모르는 여자였지만 남편의 건강과 일상을 과보호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인의 장막을 쳤다. 이는 이 대통령의 심사를 거슬렀을 뿐 아니라 눈과 귀를 가로막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대통령 부부의 주변에는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해 직언이나 조언을 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각하, 아무 일 없이 다 잘돼갑니다” 하는 아부성 발언이 난무했다.

“그분은 대통령이기 이전에 나의 남편이다.”

경무대에서 이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초대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남편의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것은 장기 독재와 말년의 정치부패에 이어 망명생활을 초래한 원인이 됐다. 그는 “나는 정치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공언했지만, 결과적으로 누구 못지않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영부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요일마다 경무대 빠져나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자리가 바로 영부인이다. 하고 싶다고 해서, 죽어라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도 있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윤보선(尹潽善·1897~1990)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孔德貴·1911~97) 여사가 그런 예다.

물론 윤 대통령이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집권한 데다 내각제였기에 장면(張勉) 총리가 모든 정무를 맡고 대통령은 실권 없는 상징적인 존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없는 대통령의 부인, 어수선한 정국. 공 여사는 영부인이라는 자리를 썩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경무대에 들어가 사는 것조차 싫어 서울 종로구 안국동 8번지 윤보선가(家)에 머물러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위에서 경호 때문에 경무대에 입주해야 한다고 조언해 어쩔 수 없이 이삿짐을 꾸렸다.

제2공화국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4월27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같은 해 8월13일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시작됐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공 여사는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지만 취임식장에는 그가 앉을 자리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당시 영부인에 대한 사회적인 대접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할 수 있는 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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