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9월호

이공현 재판관이 들려주는 헌재 판결 뒷얘기

“노 대통령 탄핵 심판 때 재판관들 고성 지르고 주먹다짐 직전까지…”

  • 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입력2007-09-10 12: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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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현  재판관이 들려주는 헌재 판결 뒷얘기

    ●1949년 전남 구례 출생 <br>●광주제일고, 서울대 법대 졸업 <br>●1971년 제13회 사법시험 합격 <br>●서울민·형사지방법원 판사, 대구고법 판사, 부산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판사 겸 법원행정처 법무담당관, 사법연수원 교수,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연구실장, 대법원장 비서실장, 법원행정처 차장, 사법개혁위원회 부위원장 <br>●現 헌법재판소 재판관

    “헌법재판소로 갑시다.”

    “헌재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많은 사람이 헌법재판소와 법원을 헷갈렸지만 요즘은 ‘헌재’라고만 해도 통한다. 택시기사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로 15번지에 있는 헌법재판소가 어떤 재판을 하는 곳인지 잘 안다. 다 노무현 대통령 덕분”이라고 말했다.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는 ‘참여정부’ 출범으로 세상에 알려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심판을 받았고, 신행정수도 건설이 헌법재판소의 위헌(違憲)결정으로 중단됐으며, 최근에는 노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대한 중앙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결정이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냈다. 일각에서는 대통령이 개인의 자격으로 선거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소원을 낸 것에 대해 ‘헌법을 유린하는 또 하나의 진기록’이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헌재 소속 재판관 9명 중 최고참인 이공현(李恭炫·58) 재판관을 만나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주요 판결 뒷얘기를 들어봤다. 이 재판관은 법원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다. 만 23세에 최연소 판사로 법복을 입은 이래 지난 31년 동안 민사·형사·행정 분야에서 다양한 재판을 경험했다. 헌재에 온 지는 2년4개월째.



    헌법재판관 한 사람의 힘은 막강하다. 우선 국회의 입법권 남용을 견제하는 권한이다. 국회가 제정한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릴 수 있다. 또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 위헌을 선언함으로써 기본권을 보호한다.

    “헌재 위상 높아진 건 민주주의 덕분”

    ▼ 헌법재판소는 ‘재판관’이라 하고 법원은 ‘판사’라고 부르는데 어떤 차이가 있나요.

    “헌법재판소의 심판은 일반 재판과 차원이 다르고 성격이 다릅니다. 법원의 판사는 법률에 의해 특정인의 잘잘못을 가리는 민·형사 재판을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헌법재판소에서는 법률 그 자체가 헌법에 위반됐는지를 다루죠. 그것을 분명히 구분하기 위해 ‘재판관’이라는 용어를 쓰는 겁니다. 예전에는 법원으로 전화해 헌법재판소를 찾았는데, 요즘은 ‘헌재’라고 해도 다 알아듣지요. 하긴 노무현 대통령 덕분에 온 국민이 헌법소원을 이용하는 국가가 됐으니…(웃음).”

    ▼ 헌재를 홍보하는 데 노 대통령이 일조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어떤 것이든 우연히 이뤄지는 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정착된 거죠. 제가 1973년에 판사가 됐는데 지난 30~40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는 선진국의 300~400년과 맞먹습니다. 경제성장은 물론, 사회가 변화하고 국민 인식이 변했어요. 특히 민주주의 정착이 잘 된 거죠. 헌법소원 심판은 국가의 어떤 작용으로 국민의 기본권이 침해된 경우 그것이 헌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무효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릴 권리를 구제하는 심판인 셈이죠. 유치장 화장실에 칸막이가 설치된 것이나 미결수가 재판받을 때 수의(囚衣)를 입지 않는 것, 미결수가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수갑과 포승에서 해방된 것이 모두 헌법소원 심판 덕분입니다.”

    작년 한 해 헌재에 접수된 헌법소원은 총 1562건. 그중 1209건이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이다. 전체 헌법소원 청구사건의 68%에 해당된다.

    최근 여야는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재정신청 대상을 모든 고소·고발사건으로 확대하는 형사소송법개정안에 합의했다. 앞으로 헌법재판소는 불기소처분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형사 수사기록을 검토하는 수고를 덜게 돼 오직 위헌법률 심판과 헌법소원 심판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이공현  재판관이 들려주는 헌재 판결 뒷얘기

    노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하루 앞둔 2004년 5월13일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정문 앞에서 탄핵에 반대하는 1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는 기본권을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자연적으로 갖는 천부(天賦)의 권리입니다. 헌법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라고 밝히고 있어요. (기본권은) 타인에 의해 자신의 기본권이 존중되는 것이지, 타인의 기본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자신의 기본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임명기관과 여론으로부터 독립해야”

    ▼ 6월21일 노무현 대통령이 법무법인 시민을 통해 자신의 발언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중앙선관위 결정에 대해 헌재에 헌법소원 심판 청구서를 제출했지요. 지정 재판부에서 적법한 청구로 판단돼 전원재판부에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수의 헌법학자는 “대통령이라는 신분 자체가 국가 권력이고 헌법기관이어서 헌법소원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참 곤혹스러운 결정을 앞둔 것 같습니다.

    “밖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곤혹스럽지는 않아요. 종종 정치 문제냐 법률 문제냐 논란이 일지요. 국회의 입법이나 행정부의 권력 작용에 대한 재판이니까요. 그러나 정치성을 띠는 사안이라도 헌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것은 엄연한 사법 절차입니다. 국민이 행정부의 정책 결정이나 입법부의 법률 제정에 의해 기본권을 침해받았다고 주장하면 일단 심사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헌재의 속성이거든요. 다만 한계는 있습니다. 정책적인 판단이나 고도의 정치적 결단은 헌재의 결정이 대신하진 못합니다.”

    ▼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그 문제는 논할 것도 없어요. 9명의 재판관이 모여 평의(評議·재판관 전체회의)할 때 보면 임명기관으로부터 독립돼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7월17일 헌재 소장이 국회의장 공관에서 열린 제헌절 기념 만찬 초대에 불참하겠다고 통보한 걸 보면 헌재 재판관의 자세를 알 수 있지 않습니까. 2004년 윤영철 소장도 ‘행정수도 위헌소송이 계류 중’이라는 이유로 불참했어요. 일부에서 ‘대통령에 대한 무례’라고 비판할지 모르겠지만, 참석하기가 참 곤란하잖습니까.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될 순 없어요. (사람은) 믿을 존재가 못 된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헌재의) 재판관이 되려면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재판관이 된 다음 지난날의 생각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헌재의 재판관이 될 자격이 없어요. 관점이 달라진다는 거죠. 평의에 들어가 보면 재판관 한 분 한 분이 개인의 헌법적 소신과 가치관에 따라 임명기관과 추천기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재판을 합니다. 국민의 여론으로부터도 독립할 수밖에 없거든요. 이 부분이 곤혹스럽고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아요.”

    ▼ 국민의 여론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헌재의 다수의견과 국민의 다수의견은 긴장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론으로부터 독립해야 헌법재판이지요. 국민의 뜻과 합치해야 한다면 여론조사를 하지 왜 헌법재판을 하겠습니까. 헌법은 우리 사회가 이런 규범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국민적 의사의 합의점입니다. 하지만 여론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거든요.

    비록 여론이나 다수의견과 다를지라도 헌법에 따라 국가가 조직되고 작용하고 통제돼야 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의 기초입니다. 최근 헌재가 다루는 사건들 중에 정치적으로 민감하고 사회적으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는 사건이 많아서인지, 헌재의 결정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가치관과 다르면 헌재를 비판하고 헌법재판제도의 신뢰성까지 들먹이는데, 비판은 좋지만 비난은 신중히 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아홉 명의 늙은이가 나라를…’

    ▼ 2004년 헌재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으로 ‘국민으로부터 선출되지 않은 기관이 대의기관인 국회의 입법을 무력화할 수 있는지’를 두고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제기됐고 여당에선 헌법재판소 폐지론까지 제기됐잖습니까.

    “입헌주의와 민주주의가 대립된 개념인지 아닌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저의 견해는 위헌심사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겁니다. 모임이나 작은 동창회에도 규정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계에도 룰이 있습니다. 룰 없이 사회가 유지될 수 없어요. ‘구속’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룰이 있기에 자유가 있습니다. 룰에 위반되지 않는 한 자유를 누리고 룰에 따라 의사결정에 참여한단 말입니다. 국가에 룰이 없다면 사회 통합이나 유지가 가능하겠습니까. 헌법에 따라 국가가 조직되고 통치가 이뤄져야 해요. (헌법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게 아니라 요체입니다.”

    요컨대 헌법은 법치주의의 정점에 있는 최상위법으로 헌법이 흔들리면 법치가 위태로워지고 법치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도 위협을 받는다는 얘기다. 미국에선 대법원이 헌법재판소 기능까지 갖고 있다. 이 재판관은 우리나라의 헌재와 미국 대법원을 비교, 설명했다.

    이공현  재판관이 들려주는 헌재 판결 뒷얘기

    “소수의견에 귀 기울이며 사회를 통합하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할 때 보람을 느낀다”는 이공현 재판관.

    “우리나라 헌재의 20년 역사가 미국 대법원의 200년 역사와 어쩜 그리 닮았나 싶어요. 루스벨트가 불황의 늪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수립했는데 대법원이 ‘위헌’이라고 선언하지 않았습니까. ‘아홉 명의 늙은이가 나라를 망치는구나’ 하고 탄식한 루스벨트는 대법관 수를 늘리고 사법권을 무력화하려 했지요.

    이처럼 미국에선 대법원이 입법부, 행정부와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헌법재판이 발전했어요. 위헌심사 없는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탄핵심판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헌법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지요. 우리나라에선 의회가 소추하고 헌재가 결정해요. 헌재에서 헌법을 해석하고 탄핵을 심판하잖아요. 정치적 절차와 법률적 절차가 연결된 거죠. 정치적 판단과 사법적 판단이 결합해 탄핵이 이뤄지도록 돼 있는 겁니다. 볼수록 절묘해요. 지난달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제7차 세계헌법학술대회에 참석했는데, 우크라이나 헌법재판관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대해서 탄핵심판이 진행 중인데,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을 조사해 공부를 마쳤다’고 하더군요.”

    헌법재판소는 법령의 합헌(合憲) 여부를 판정하기 위해 설치된 특별재판소로, 제2공화국 헌법에 의해 창설됐다가 제3공화국 헌법에서 폐지된 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을 통해 부활됐다.

    우리나라 헌법은 1948년 제정된 이래 총 9차례 개정됐다. 1987년까지는 헌법의 평균수명이 4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88년 9번째로 개정된 헌법은 19년째 장수하고 있다. 이 헌법하에서 3명의 대통령이 임기를 마쳤고 노무현 대통령도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다.

    동대문운동장 옆 중국집으로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국민에게 헌재의 기능이 각인된 것은 대통령 탄핵과 신행정수도 위헌 심판을 통해서였다. 2004년 5월 헌재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했고, 이듬해 10월엔 참여정부가 추진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조치법을 위헌결정으로 무산시켰다.

    이밖에도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 특별법 합헌 결정, 이라크 파병 위헌 소송 각하, 동성동본 금혼규정에 대한 위헌 결정, 영화상영 전 공연윤리위 사전심의(영화법) 위헌 결정, 백화점·대형 할인매장의 셔틀버스 운행 전면 금지, 부부의 자산 소득을 합산해 과세하도록 한 소득세법 조항 위헌, 호주제 헌법불합치 결정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굵직한 결정이 많았다.

    ▼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 때 재판관들의 심적 고초가 컸을 것 같습니다. 이 재판관께서는 그 후 헌재에 부임했지만 탄핵 심판 당시 얘기를 들으셨겠지요?

    “우선 보안이 문제였던 모양입니다. 온 국민이 헌재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던 때라…. 헌재 건물 3, 4층에 재판관실이 있는데 아예 2층부터 복도를 차단하고 엘리베이터로만 올라오게 했어요. 재판관실과 평의실, 식당에 도청방지 장치가 다 설치됐고요. 평의가 끝나면 국민, 기자들 눈을 피하기 위해 평소 전혀 안 가던 동대문운동장 옆 중국집에 갔다고 하더군요.

    평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절차를 두고도 논쟁이 치열했대요. 제일 큰 문제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출석 요구였는데, ‘(대통령이) 출석하면 어떡할 건가, 출석하지 않으면 어떡할 건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들었어요. 두 번째 기일까지 출석하지 않으면 출석 없이 진행할 수 있기 때문에 재판소법에 따라 청와대로 출석요구서를 보냈어요.”

    ▼ 탄핵 땐 평의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고 들었어요.

    “(평의 때) 재판관들은 서로 호(號)를부릅니다. 이를테면 ‘명산(明山)은 이렇게 얘기하는데 나는 그게 아니다’ 식입니다. (탄핵 심판 평의 땐) 서로 얼굴을 붉히고 고성이 오가고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갈 정도로 열띤 토론이 있었다고 들었어요. 마지막 진통은 ‘결정문에 소수의견을 밝히느냐 안 밝히느냐’였어요. 위헌법률심판 결정문에서는 재판관마다 의견을 다 기록하거든요. 그런데 탄핵심판 결정문에서는 그럴 수 없었어요. 탄핵소추로 국가원수의 권한 행사가 정지된 정치적 혼돈 상태에서 그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를 두고 재판관 개개인의 의견과 몇 사람이나 찬성했는지를 결정문에 표시한다면 이후 대통령의 권한이 정상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지 걱정한 게 아닐까요? 결국 안 밝혔잖아요. 단 ‘밝히자는 견해가 있었다’는 문구를 넣었지요.”

    “관습헌법은 인정할 수 없다”

    ▼ 탄핵심판을 했던 재판관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한 분들이었다고 들었어요.

    “대단했지요. 예를 들어 김영일·권성 두 재판관은 전직 대통령을 재판한 맹장이죠. 김영일 재판관은 12·12쿠데타 사건의 1심 재판장이었고, 권성 재판관은 그 사건의 항소심 재판장이었어요. 당시 헌재의 심사는 2단계로 이뤄졌어요. 먼저 ‘대통령의 행위가 헌법과 법률에 위배됐는가’를 살핀 다음 ‘그 위반 행위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될 정도로 중대한 것인가’ 따졌지요. 결론은 ‘헌법과 법률에 위반된 행위가 있었다. 하지만 국민의 의사로 선출된 대통령을 그 직에서 물러나게 할 만큼 중대한 위반은 아니다’였죠. 헌법재판소법 제53조 제1항에 ‘탄핵심판청구가 이유 있을 때에는 헌법재판소는 피청구인을 당해 공직에서 파면하는 결정을 선고한다’라고 규정돼 있는데, ‘탄핵심판청구가 이유가 있을 때’란 모든 법위반의 경우가 아니라 공직자의 파면을 정당화할 정도로 중대한 법위반의 경우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한 거죠.”

    이공현  재판관이 들려주는 헌재 판결 뒷얘기

    2007년 7월, 평의실에 모여 앉은 헌법재판소 재판관들. 왼쪽로부터 목영준 민형기 김희옥 이공현 이강국(소장) 조대현 김종대 이동흡 송두환.

    ▼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전 ‘불행히도’ 행정복합도시특별법 심판 때 (헌재에) 왔어요. 그런데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 판결 논리가 행정복합도시 심판 때도 똑같이 전개됐어요. 탄핵 심판과 신행정수도법을 처리했던 재판부에 제가 신참으로 끼어 평의에 참석하면서 신행정수도특별법 평의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됐죠. (신행정수도특별법 심판에서) 아쉬운 건 공개변론을 해서 여론을 환기한 상태에서 결론이 나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언론은 물론 정부조차 관습헌법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헌법에 ‘서울이 수도’라는 규정은 없지만, 그 개념이 우리나라 역사, 문화, 사회 모든 분야에서 관습적으로 헌법 규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헌법교과서마다 관습헌법을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떤 규범이 거기에 해당하는지 여론이나 정부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거죠. 전효숙 재판관은 ‘관습헌법을 인정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죠.”

    ▼ 전효숙 재판관은 관습헌법을 어떻게 해석했나요.

    “수도의 소재지가 어디냐는 건 헌법의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어요. ‘관습헌법은 관습으로 규율되고 있음을 뜻할 뿐 성문헌법과 똑같은 효력이 인정되는 건 아니다’라는 논리였습니다.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의 변경이 헌법개정으로 이뤄져야 한다면, 관습헌법이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입법권을 변경하는 것이라는 얘기죠. 그것은 곧 ‘관습헌법이 국회의 입법권보다 우월적인 힘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된다’는 견해를 밝히셨어요.”

    누구의 표든 똑같은 한 표

    ▼ 최근 기자실 통폐합을 골자로 한 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 위헌 여부가 헌재의 평의에 올라 있는데요. 2년 전 신문법 사건 때 치열했던 평의과정이 새삼 떠오르시겠어요.

    “(신문법이) 접수되자마자 50여 명의 연구관 중에서 전담팀을 구성해 신문법의 변천과정, 현 실정, 공정거래법 관련 부분 등 광범위하게 조사해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평의과정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결정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다른 한쪽은 ‘민주사회에서는 여론의 다양성이 중요한 만큼 신문사 자율에 맡겨 시장에 의해 여론이 형성돼야 한다’는 견해였고, 한쪽은 ‘언론의 독과점 현상이 생길 수 있으므로 신문의 공공성, 여론의 다양화를 위해 어느 정도 국가의 간섭과 규제가 필요하다’는 견해였어요. 첨예하게 대립됐죠.

    우선 신문법이 위헌이라는 청구인(독자, 신문사 대표이사, 신문기자, 신문사)의 주장에 대한 심사를 본안에 올릴지를 두고 대립했어요. 적법요건을 갖추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는 아예 심사 전에 각하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다툼이었죠. 신문법의 많은 조항이 사실상 언론을 위축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본안 심사에 넣어야 한다는 소수의견이 있었던 반면 상당수 조항이 적법요건을 통과하지 못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어요. 실제로 적법요건이 갖춰지지 않아 각하된 게 꽤 나왔죠.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는 시장지배적 사업자 관련 조항이었어요. 언론자유와 언론보도의 공정성 간에 균형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 부분이었죠. 결국 위헌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또 언론의 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각하된 내용도 많았어요. 그걸 정리하는 데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시장지배적 사업자에 대해 공정거래법보다 엄격하게 규정하는 것이 우리나라 언론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현실에 비추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 것으로 볼 정도로 심한 규제인가’가 쟁점이었어요. 언론중재법의 경우 ‘정정보도청구가 있는 경우 간단한 절차(가처분)로 재판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느냐 안 하느냐. 재판청구권을 침해하느냐 안 하느냐’를 두고 치열하게 논쟁했습니다.”

    이 재판관은 시장지배적 사업자 추정과 신문발전기금지원대상 배제 등 신문법의 일부 규정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선고한 데 대해 이런 설명을 했다.

    “헌재의 결론은 언론시장을 독점한다는 시장지배적 사업자에 대한 규정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겁니다. 결국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거죠. 국가가 여론의 다양성 확보라는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신문사의 점유율을 규제하는 신문법 규정은 신문의 공정성, 여론의 다원화를 추구한다는 목적을 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언론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침해할 위험이 크다고 본 거죠.”

    이 재판관은 “우리나라 헌법은 선진국과 비교해 자랑할 만하다”고 했다.

    “2공화국 때는 내각책임제, 3공화국에서는 대통령제, 그리고 유신헌법, 5공화국 때는 대통령 간접선거제도 등 우리나라는 초대 헌법이 제정된 1948년 이후 현행 헌법이 탄생한 1988년에 이르기까지 40년 동안 어떤 국가체제에도 맞는 헌법 규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약 어느 나라에 헌법이 필요하다면 수출할 수도 있을 겁니다(웃음).

    이제는 외국이 우리나라 헌법재판제도를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아테네 세계헌법학술대회에 갔더니 유럽의 어느 판사가 ‘아시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누리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요. ‘여야간 정권교체도 못하는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냐’는 겁니다. 외국은 우리나라를 두고 ‘인권 과잉 보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러워죽겠는데 왜 한국인은 불만이 많냐’고 해요. 우리보다 외국인이 우리나라 헌법을 더 높게 평가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헌재 재판관 9명은 탄핵 심판 외에도 법원의 제청에 따른 법률의 위헌 여부 심판, 정당의 해산 심판, 국가기관 상호간·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간·지방자치단체 상호간의 권한쟁의에 관한 심판, 법률이 정하는 헌법소원에 관한 심판을 한다.

    1988년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1만3945건의 사건을 접수해 1만3058건을 처리했다. 그중 726건의 사건에 대해 위헌 또는 인용 결정을 선고했다. 불기소 사건을 제외하고 본안까지 올라오는 심판사건은 1년에 250여 건에 달한다.

    ▼ 위헌결정시 5명이 찬성하는 것과 6명이 찬성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겠군요.

    “6명이 ‘위헌’이라고 해야 위헌입니다. 아마도 (위헌 정족수를) 과반수로 정했다면 너무나 많은 법률이 위헌 판정을 받았을 겁니다. 결정을 할 때 신임 재판관부터 의사표시를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선지 모르죠. 5대 3이나 4대 3일 경우 마지막 한두 사람이 쥔 캐스팅 보트의 의미가 커지잖아요. 이런 경우 선배 재판관이 위헌 의사를 밝힌 후배 재판관에게 ‘만일 이게 위헌이라면 국민 모두가 납득 못할 것’이라고 설득하기도 합니다.”

    ▼ 평의할 때 주심재판관의 소임이 크겠죠?

    “그렇지도 않아요. 평의가 진행되는 테이블이 둥그렇습니다. 아홉 명의 등가성(等價性)을 나타낸다고 할까요. 누구의 표든 똑같은 한 표죠. 먼저 주심이 연구관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돌립니다. 재판관들은 그것을 읽은 후 필요한 경우 추가 자료 요청을 하고, 자신의 의견서를 마련해 평의에 들어갑니다.”

    간통죄, 세 차례 합헌 결정

    이 재판관에 따르면 평의에서 결론을 내릴 때는 주심이 먼저 견해를 밝힌 다음 가장 늦게 부임한 재판관부터, 즉 부임이 늦은 순서대로 의견을 내놓는다.

    “신임 재판관들은 불만이죠. 이런 관행을 바꾸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지금도 유지되고 있어요. 주심재판관은 자신의 견해가 법정 의견(다수의견)일 경우 초안을 마련하죠. 반대의견을 가진 재판관들 중 한 사람을 정해 초안을 작성토록 합니다.

    결정문 초안이 돌면 모든 재판관이 문구 하나하나를 검토합니다. 헌법적 쟁점이 있을 경우 ‘이런 표현이 들어가면 견해를 바꾸겠다’거나 ‘내 견해를 포함시켜야 가담하겠다’고 말하는 재판관도 있어요. 결정문 작성이 가장 어려운 과정입니다. 다수의견을 집필하는 재판관은 어떻게 공통분모를 추려내 결정문을 써야 다른 재판관들이 동의하고 지지할지 고민합니다. 치열하게 다투는 사건일 경우 일부 재판관들은 ‘이런 논리를 넣어달라’ ‘이 표현은 빠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기도 합니다.”

    ▼ 소수의견을 낸 재판관은 결론에 승복하면서도 아쉽겠어요.

    “여기 와서 배운 건 합의체의 장점입니다. 견해가 다른 9명이 치열하게 논리를 전개해 내린 결론은 개인적 소신과 다르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것이 바람직하고 적절한 헌법적 해석이었다고 수긍하게 됩니다.”

    ▼ 헌재의 심판사건을 좀더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는데요.

    “법적 시한은 180일인데, 평의에만 1년 넘게 걸리는 사건도 있습니다. 신행정수도건설법의 경우 국가의 주요 정책이라 빨리 결정한다고 해서 4개월간 집중심의를 했어요. 중요한 사건은 반드시 공개변론을 합니다. 헌법소원 심판은 서면심리가 원칙이지만, 주요 사건이 본안 심판에 회부될 경우 재판관들의 토의를 거쳐 공개변론이나 집중심리가 이뤄져요. 공개변론은 헌법적 문제를 국민에게 알리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매월 둘째 목요일이 공개변론 기일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국민에게 ‘이러이러한 헌법적 문제가 제기됐다’고 여론을 환기하고 싶은데 언론이 늘 뒷북을 친다는 점입니다. 최근 위헌 결정이 난 공직선거법을 예로 들면 5월에 공개변론이 있었고 6월 말에 선고가 있었는데 선고된 다음에야 신문에서 문제점이 뭐고 찬반론이 어떻고 하면서 다루더군요.”

    6월28일 헌법재판소는 최모씨 등 15명이 낸 공직선거법 위헌확인 소송에서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권, 지방선거 참여권, 국민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요건으로 주민등록이 돼 있을 것을 규정한 공직선거법은 재외국민의 참정권을 침해해 위헌”이라고 밝혔다. 주민등록을 할 수 없는 재외국민 또는 국외거주자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한 것은 기본권침해라는 것이다.

    간통죄는 단골 심판 대상이다. 헌재는 1990년과 1993년, 2001년 세 차례에 걸쳐 간통죄 처벌 규정인 형법 241조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간통죄의 기소율은 해마다 낮아지고 있다. 한 해 평균 4102명이 입건되지만 그중 600여 건만 기소된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다시 간통죄의 합헌 여부가 심판대에 올라왔다.

    ▼ 법원 판사와 헌재 재판관의 고민은 어떻게 다릅니까.

    “법원에 있을 때도 근무시간 이후에 사건에 대해 고민했지만 헌재처럼 심각하지 않았어요. (헌재에 와선) 잠자는 시간 외에는 머리에서 안 떠납니다.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하니까요. 나는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어떤 결론이 올바른 헌법 해석인지….”

    “대법관보다 헌법재판관이 더 중요”

    ▼ 판사들은 헌법재판관보다 대법관이 되길 선호하지 않나요.

    “그런 편입니다. 법원에서 1심도 해보고 2심도 해보면 대법원에 가서 최종심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미국에 가보니 재판 중에서 헌법재판이 가장 큰 관심을 끌고 있어 뜻밖이다 싶었는데, 제가 재판관이 돼보니 헌법재판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보람도 느껴요. 오기 전엔 대법원에 가길 바랐는데, 하나님이 제게 알맞은 자리에 보내줬다 싶어요. 민사재판이 채권과 채무관계를 다투는 것이라면, 형사재판은 죄의 유무를 따져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거나 처벌하는 것입니다. 반면 위헌법률심사의 경우 그 법조항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개인이지만 심판 결과는 그 법조항의 적용을 받는 대상자, 나아가 국민 전체에 미칩니다. 우리나라 국민의 문화적 배경이나 역사, 현실, 대외관계, 때로는 국가의 예산까지 생각해야 해요.”

    이 재판관은 “재판 중에서 법률의 헌법 위반 여부를 가리는 것이 마지막 재판”이라면서 “법조계 풍토가 바뀌어 법조인들이 대법관보다 헌법재판관이 되기를 소망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 26세 때 문세광 사건 주심판사를 맡으셨지요.

    “1974년 8월15일이었죠. 재일교포 문세광이 8·15 기념행사장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는데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죠. 서울형사지법 8부 소속이던 제가 이 사건을 맡았어요. 당시 문세광은 우리말을 전혀 못했어요. 본인이 혈혈단신으로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한국에 와서 테러를 한 겁니다.”

    ▼ 얼마전 모 잡지에서 ‘문세광의 범행이 조작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는데요.

    “그렇지 않아요. 당시 법정에는 일본 기자를 비롯한 외신기자가 많았습니다. 진행상황을 소상히 다 아는데 무슨…. 당시 일본 기자들이 ‘법정 자백이 회유와 협박에 의해 이뤄진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어요. 제 경험으로는 살인자가 최후진술에서 거짓말을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문세광의 마지막 진술이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 있어요. ‘고인과 유가족한테 미안하다. 하지만 내가 한 일은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 20대에 너무 큰 사건을 맡으신 건 아닌지요.

    “초임판사 시절 큰 사건들을 겪으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제가 서른세 살부터 종교에 깊이 빠지게 된 이유지요. 그 시절엔 형사지방법원 판사가 되면 3개월간 ‘즉결’을 맡아야 했어요. 그땐 운전면허를 따고 주소이전을 안 해도 즉결에 회부되는 시절이었어요. 제일 힘든 게 술 취해 무전취식했거나 싸운 경우인데, 즉결에 와선 정신이 들어 전날 아무런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고 부인하는 겁니다. 참 난감해요. 내가 판사가 아니라 관상쟁이인가 싶을 정도니까요. 하루 200~300명을 재판하면서 내가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는가 싶더라고요.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절실히 깨달았죠. 요즘도 저는 평의 들어가기 전에 꼭 기도해요. ‘사람의 판단으로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 형사재판의 경우 ‘사실 인정’이 가장 어렵지 않습니까.

    “유·무죄의 갈림길에서 고통스럽죠. 판사가 돼 서울형사지방법원 형사합의부로 첫 발령을 받았을 때 일입니다. 아직 법복이 안 나와 선배 것을 빌려 입고 법정에 들어갔어요. 강도 살인사건 선고였는데, 재판장이 사건을 설명한 다음 ‘피고인들은 극력부인하고 있으나, 피고인들이 이 사건 범행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하늘과 피고인들만이 안다. 그렇지만 우리는 증거에 의해 판단한다’며 사형선고를 내리시는 거예요.

    형사사건에서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면 판사는 정말 겁납니다. 재판제도라는 게 참 아이러니해요. 진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재판받는 당사자입니다. 그런데 제3자들끼리 증인과 증거를 놓고 공방을 벌이죠. 당시 형사지법 수석부장이던 고(故) 유태흥 대법원장은 초임판사들에게 ‘절대 법정에서 성내지 말라. 성내면 지는 거다’라고 말씀했어요. 참 의미 있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판사 인사하던 시대

    ▼ 사형선고는 몇 번이나 했습니까.

    “10여 명에게 선고했어요. 대부분 간첩이었죠. 사형을 선고한 날은 판사들이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위로해요. 유죄라는 확신이 들어도 과연 사형이 옳았는지 착잡한 기분이 들어요.”

    ▼ 유신헌법 시절 긴급조치 위반자에게 유죄판결을 한 판사 중 한 명으로 과거사위의 긴급조치 보고서 명단에 올랐더군요.

    “그 시절 판사들, 다 고민하면서 판결했어요.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법률가의 양심과 법률에 따라 실정법 테두리에서 재판했죠. ‘권력의 앞잡이’라고 하겠지만, 형량을 줄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몰라요. 그런 데 대한 반성으로 헌법재판소가 생긴 거죠.”

    ▼ 판사로서 독재를 피부로 느끼셨겠네요.

    “느낄 정도가 아니라 놀랄 정도 아닙니까. 당시는 사법부가 몹시 위축된 시대였습니다. 판사로 임관된 것이 유신 초기인 1973년인데, 그땐 대통령이 임명장을 줬습니다. 판사 인사도 대통령이 했습니다. 판사는 실정법으로 재판할 수밖에 없었어요. 5공화국이 탄생한 직후엔 일부 대법관들이 보안사에 갔다 와서 그만뒀을 정도예요. 인사권이 심리적으로 재판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건 말도 못했어요. 이 땅에 민주주의가 자리잡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낀 건 김영삼 정부 때였어요. 사실 기본권을 침해하는 권력 작용에 대한 법의 통제가 시작된 것은 헌법재판소가 생긴 이후입니다. 독재정부하에선 대법원이 위헌심사를 했는데, 위헌심사 대상인 법률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마는 1988년까지 10여 건밖에 없었어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요.

    “1989년 동의대 사건입니다.”

    동의대 사건은 노동·학내 문제로 교내 시위를 하던 부산 동의대 학생들이 전투경찰 5명을 납치해 감금했고, 이들을 구출하러 경찰이 도서관에 진입하는 순간 화염병을 던져 경찰관 7명을 숨지게 한 사건이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사건에 가담한 46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결정했다. 이에 경찰관 유족들은 “무기징역 등 중형의 유죄판결이 확정된 가해자들에게 명예와 보상을 줌으로써 우리의 행복추구권과 법치주의를 누릴 권리를 침해했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2005년 10월 5대 4로 이 헌법소원을 각하했다. ‘동의대 사건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순직경찰관과 유족들이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되는 건 아니다’라는 취지였다.

    “동의대 사건은 1989년 제가 부산에 있을 때 일어났어요. 사건의 발단은 입시부정입니다. 학생들이 ‘입시부정을 밝히라’고 시위를 하면서 경찰관들과 충돌했어요. 입시가 임박할 무렵 모 교수가 동료교수에게 ‘일정한 표시가 있는 건 맞는 걸로 처리해달라’고 청탁을 했어요. 청탁받은 교수가 총장에게 ‘입시부정 청탁을 받았다’고 보고했는데, 대학당국이 그걸 묵살하고 합격자 발표까지 해버렸어요. 그러자 청탁받은 교수가 그 사실을 폭로했고, 학교 측에선 그 교수를 해고했어요. 교수는 ‘해고무효확인소송’을 냈는데 제가 부산지법 부장판사로 그 사건을 담당했습니다. 이미 검찰은 부정입학 의혹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한 상태였어요. 재단이사장이 정치권에 힘을 썼다는 소문이 있었죠.

    제가 판사들과 상의해서 ‘답안지를 보자’고 했어요. 당시 학교 당국도 검찰도 답안지를 본 적이 없었어요. (답안지를 보니) 일부 학생들의 답안지에 똑같은 표시가 있더군요. 재판부는 답안지 검증결과를 바탕으로 ‘입시부정이 있었음에도 덮어버린 것이 발단’이라며 해직당한 교수에 대해 승소판결을 내렸어요. 학교 측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가 취소했어요. 1994년에 이르러 입시부정에 연루된 교수들이 처벌받았어요. 청탁을 시인했다고 하더군요. 동의대 사건은 6공화국에서 가장 큰 시국사건이었는데, 어떻게 재판하면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됐어요.”

    “헌법은 살아 움직이는 법”

    ▼ 법관이나 재판관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있다면요.

    “무엇보다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듣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법정에서) 판사가 하소연을 들어주면 피고인의 표정이 달라지거든요. 또 결론에 승복하는 자세가 달라요. 똑똑한 사람끼리 모여 똑똑한 재판을 한다는 인상을 주면 거부감을 갖게 돼요. 우리나라 국민의 법의식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 높은데, 결론에 승복하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많아요. 엘리트적인 법조 풍토 때문입니다. 헌재는 결정문에 당사자 주장을 꼭 기재합니다. 청구인은 결정문에 자신의 주장이 적혀 있는 경우 재판관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을 믿게 돼요. 무척 고마워하죠.”

    이 재판관은 “소수의견에 귀 기울이는 헌법재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재판관은 소수의견에 귀 기울이며 이 사회를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고 생각할 때 보람을 느낍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소수의견이 늘고 있거든요. 헌재의 판단도 달라져요. 예를 들어 의료광고를 원칙적으로 금지한 의료법 46조에 대해 헌재가 ‘표현의 자유와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한다’면서 위헌결정을 내리지 않습니까. 이는 소비자가 의료광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몇 년 전에는 합헌이었는데 왜 위헌이냐 하겠지만 헌법은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법입니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재판이 돼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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