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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말부록 |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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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유·불·선에 능통했고 ‘단군세기’를 지은 고려말의 이암. 커발한 개천각에 있는 초상화다.

‘계연수(桂延壽)의 자는 인경(仁卿)이고 호는 운초(雲樵)다. 평안도 선천에 살았다. 이기의 문인으로 백가(百家)의 책을 섭렵했다. 무술년에 단군세기와 태백유사 등을 간행하고 기미년(1919년)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우고 경신년(1920년)에 만주에서 죽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두 군데가 틀렸다. 첫째는 무술년에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간행했다는 부분인데,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을 묶어 환단고기를 낸 1911년은 신해년이다. 둘째, 계연수가 태백유사 등을 간행했다고 했으나 계연수는 태백유사가 아닌 태백일사를 환단고기 안에 집어넣었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서문에서 ‘신해 5월 광개절(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이 태어난 5월5일) 날 태백을 따르는 선천 사람 인경 계연수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쓰다’라고 밝혀놓았으니, 환단고기는 신해년(1911) 나온 것이 틀림없다. 해동인물지에서 계연수가 몸을 의탁한 것으로 돼 있는 이상룡은 훗날 상해 임정의 국무령을 지내는 독립운동가인데, 그 또한 고성 이씨였다. 환단고기는 고성 이씨들과 아주 깊은 인연이 있다.

이유립의 부인 신매녀씨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고성 이씨와 환단고기 사이의 관계

계연수가 살았다는 선천은 신의주 남쪽 서해안에 있는 평북의 군으로 삭주와는 80여km 떨어져 있다. 이기와 계연수는 이유립의 부친인 이관즙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계연수가 사망했을 때(1920) 이유립은 만 13세의 소년이었다. 이유립이 계연수에게 사사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이유립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생전의 이유립은 계연수의 제자임을 자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유립은 35세라는 늦은 나이에 21세인 삭주 출신의 신매녀(申梅女·86)씨와 결혼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강화도 마니산에 ‘단단학회(檀檀學會)’란 이름을 붙인 허름한 건물에서 살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유립씨에 대해 자세한 구술을 하지 못했다. 신매녀 할머니는 “그는 평생 책밖에 모르고 산 양반이었다. 월남할 때 나는 쌀을 졌는데, 그이는 책을 지고 나왔다”는 말로 설명을 마쳤다.

이유립은 네 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지만 신매녀 할머니는 겨우 한글을 깨우친 정도였다고 한다. 또 열네 살의 나이 차 때문에 남편을 어려워해 삭주에 살던 시절 남편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신매녀 할머니는 환단고기를 편찬해 이유립에게 전했다는 계연수가 누구인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남편과의 고단했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해냈다.

이유립·신매녀 부부는 남과 북에서 모두 1남5녀를 낳았다. 이북에 있을 때는 이유립 선생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먹고살았고, 이남에 내려온 다음에는 신 할머니가 온갖 궂은일을 한 덕에 입에 풀칠을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유립씨가 41세, 신매녀씨가 27세이던 1948년쯤 월남하는데, 신씨는 그 이유를 “(토지개혁에 의해) 토지를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부는 황해도 해안을 통해 38선을 넘었는데, 이유립이 3월에 혼자서 38선을 넘고 신매녀씨는 아이들과 함께 5월에 38선을 넘었다고 한다.

그런데 3월에 38선을 넘은 남편이 다시 이북으로 넘어갔다가 붙잡혀 북한에서 1년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 사이 신씨는 아이들과 38선을 넘어가 남한의 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수용소에서 정해준 청주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그때만 해도 남북 사이엔 편지 왕래가 가능했으므로 그는 삭주에 있는 친정에 ‘청주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유립, 환단고기 가져오려 다시 북으로?

그 사이 석방된 이유립은 처가를 통해 가족이 청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38선을 넘어와 계룡산 부근에 거처를 마련했다. 신씨도 친정을 통해 남편이 계룡산 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 나섰는데, 신매녀씨가 남편을 찾아 나선 날 이유립도 가족을 찾아 청주로 출발했다. 계룡산과 청주를 오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 차를 바꿔 타야 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조치원역에서 만났다고 말했다.

월남할 당시 이유립은 자기 주관이 뚜렷해지는 불혹(不惑)을 넘긴 나이였다. 그렇다면 그는 환단고기를 가져오기 위해 두 차례나 38선을 넘은 것이 아닐까. 1949년 그가 오형기씨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환단고기를 여러 부 필사시킨 것을 보면 이러한 추정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형기씨에게 필사를 시키기 전 이유립씨가 갖고 있던 환단고기는 계연수가 편찬한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필사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신매녀 할머니는 월남을 전후한 시기 이유립씨가 계연수가 편찬한 환단고기를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그는 “남편은 책을 무척 소중하게 여겨, 공부하던 방은 쓸지도 못하게 했다”며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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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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