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본인은 알코올 중독, 부인은 우울증… 풍수학자 최창조의 체험적 진단

  • 최창조 풍수학자 countrymania@hanmail.net

    입력2007-10-04 18: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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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정변화가 극심하다, 끊임없이 흑백논리의 양단을 오간다, 늘 자신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에 빠뜨린다, 자신의 행동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누구나 갖고 있는 면면이다. 그러나 이런 면모가 유독 심해 주변사람을 괴롭힐 정도라면 경계성 성격장애를 의심해야 한다. 최근 출간된 전문치료사 폴 T 메이슨의 ‘잡았다, 네가 술래야’는 경계성 성격장애자들의 얘기를 다뤘는데, 풍수학자 최창조씨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체험과 생각이 녹아든 글을 보내왔다.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세상은 말세이고 삶은 고달프며, 인간관계는 고독하다. 현재만 그런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이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고독과 단절, 상실감이 함께하는 게 인생이다. 이런 감정의 원인은 뭘까. 사람들은 대부분 목표를 달성해도 만족할 줄 모른다. 필자는 그 불만족이 마음속에 이런 감정들을 불러들인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생’이다.

    인간은 성격장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 상황이 가장 나쁘다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지난날들이 좋았지….” 그렇게들 생각하며 살아간다. 특히 요즘처럼 살벌한 사회에서는 더 그렇다. ‘살벌, 고독, 심각, 경박(輕薄)’이 키워드가 된 시대다.

    그 가운데 ‘악마의 놀이터’이자 모든 근심의 근원은 ‘고독’이다. 외롭지 않으면 성격장애가 일어날 까닭이 없다. 사회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조차 외로움을 가슴에 묻고 수시로 품격 없는 언변을 쏟아낸다.

    ‘절름발이는 절름발이를 조롱하지 않는다’는 고대 로마 속담이 있다. 풍수 전공자가 무슨 세상사를 논하느냐는 비난에 대한 방패막이로 미리 이 속담을 끄집어냈다. 근래 경계성 성격장애를 다룬 책 ‘잡았다, 네가 술래야’(모멘토 刊)를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는데, 나 자신도 거기 속해 있기에 할 말이 있다는 뜻이다(이 글에서 고딕체로 표기한 부분은 ‘잡았다, 네가 술래야’에서 인용한 것임).

    당신도 경계성 성격장애?



    내 처는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고, 나는 알코올 중독으로 자가 진단(전문의는 내가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고 진단했다)해 신경과 전문의의 조언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이런 얘기에 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나를 아끼는 많은 사람이 우리 부부가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을 공표하는 데 대해 염려했다. 그건 쉬쉬해야 할 일이 아니냐며. 공연한 걱정은 아니다. 직장인이 이런 고백을 공개적으로 했다면 아마 곧 실직자가 되리라. 그러니 누가 대놓고 이런 어리석은 고백을 하겠는가. 자식들 시집장가 보내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라며 말리는 친구도 있다. 이에 우리 부부는 “앞으로 어떤 역경에 처할지 모르는데, 이런 정도의 일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라고 억지를 쓰곤 한다.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알코올 중독자, 우울증 환자, 경계성 성격장애인으로 보이는 친구가 많다. 그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치료를 받을 정도는 아니라고 고집한다. 종합 건강검진은 받아도 심리검사는 하지 않는다.

    대통령후보 검증에서도 정신적, 정서적인 문제는 대상이 아니다. 후보가 조울증 경향은 아닌지, 폭력 성향이나 중독 혹은 과도한 언행, 이성 문제 따위의 이력은 없는지를 검증하지 않는 것에 의문이 든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가 얼마나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잘 알면서도 인권 운운하며 덮어둔다. 피해서는 안 될 검증 항목을 건너뛰면서 과거에 관례로 통했던 부정에 대해서는 악을 쓰며 대든다.

    이는 반드시 고쳐야 할 일이다. 유대의 격언처럼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까닭이다. 치유받지 못한 상처를 가진 영혼이 언제 그 그림자를 드리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신경정신과는 정신분열증처럼 심각해 보이는 증상에만 보험 혜택을 준다. 신경정신과 의약품은 대개 비싸다. 그러니 큰마음 먹고 병원에 가더라도 심리적, 경제적 부담 때문에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정신 질환은 육체의 질병과 달리 그 증상이 분명하지 않다. 그러다 보면 부정기적으로 병원을 드나들게 되고 병세는 더 나빠지게 마련이다.

    정신병적 성격장애자들은 자아와 대상의 관계를 분리하지 못한다. 제 정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경증성 성격장애는 자아와 대상을 완전히 구분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다는 말이다. 가장 흔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경계성 성격장애인데, 이런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변덕이 심하고 주위 사람들을 조종하려는 태도를 보인다. 망상과 분열의 특징을 갖는다.

    관계란 언제나 ‘그런데 당신은 최근 나를 위해 뭘 했지’라는 질문일 뿐이다. 극단적인 감정 변화와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한 문화에 속한 사람들의 일반적 기대 범위를 현저하게 벗어나는 편향되고 지속적인 내적 경험과 행동 양상 때문에 현실 적응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경계성 성격장애자들의 특징이다. 물론 이런 성향은 누구나 조금씩 갖고 있다. 그 도가 지나칠 때가 문제인데,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자신은 결코 그런 장애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통제 불가능한 마음병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직설적인 화법은 노무현 대통령의 특성이 됐다.

    남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병이 바로 신경증이다. 예컨대 우울증이라고 하면 주위에서는 “고생을 덜 해봐서 그렇다” “너무 곱게만 살아와서 그렇지. 정신 좀 차려라” “왜 그렇게 의지가 약하냐? 마음을 강하게 먹어라”고들 한다. 병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다. 그런데 환자 본인과 가족은 영원한 지옥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일 만큼 심각하다.

    고생? 미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의 우울증 발병 비율은 평균과 다르지 않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또 이렇게 얘기한다. 그들은 가난하니까 우울한 게 당연하다고. 게다가 비싼 치료비를 감당할 능력도 없으니 지옥 중의 지옥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그러나 아무리 가난으로 우울해도 이를 닦다 칫솔을 떨어뜨렸을 때 그것을 줍지 못할 만큼 막막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울증 환자는 흔히 그런 행동을 한다.

    의지? 미국의 저널리스트 캐롤라인 냅은 ‘술, 전쟁 같은 사랑의 기록’에서 이렇게 썼다. 알코올 중독자들을 향한 일반적인 충고 “너의 의지로 해봐”에 대해 “너는 설사가 나올 때 의지로 통제가 되냐”고. 신경증도 마찬가지다. 신경증은 질병이다. 의지로만 해결될 일이 아니다. 성격장애인에게는 불행히도 자신의 의지로 극복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성격이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은 잔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다른 사람을 향한 언어폭력을 행사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상황에서 한 기업인에 대해 악담을 했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그 기업인은 자살했다. 노 대통령은 또 “그놈의 헌법”이라며 권위(‘권위주의’가 아님)와 국기(國基)를 뒤흔들었다. 언어폭력의 대표적 사례다.

    우리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배척돼야 할 악덕이었다. 내가 사장이니까, 내가 교장이니까, 내가 대통령이니까 나의 인품이나 능력과 관계없이 나를 존경하고 따라야 한다는 권위적 태도는 사회악(惡)이었다. 문제는 덕망과 실력을 갖춘 권위자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도태됐다는 데 있다. 요즘 어느 분야에서든 권위자를 찾기 힘들다. 권위는 조직을 지탱해주는 순기능을 갖는 법인데, 이게 없으니 조직이 지리멸렬하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권위자가 아니다. 그들은 권위자의 방향 제시에 힘입어 일을 하며 삶을 영위해왔다. 그게 무너진 것이다. 경계성 성격장애자가 늘어난 한 이유다.

    우리 모두에게는 그럴 수 있다면 끝없이 탐닉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모든 주의나 주장, 사상은 종국에 가면 그 자체에 탐닉하게 된다. 근본주의나 편협은 이에 따른 산물이다. 그 바탕은 권력(힘)이다. 권력이 부에 비례하기 때문에 현대의 탐욕은 권력과 부를 향하는 것이다.

    니체는 그 권력을 빼앗으려면 ‘탐욕’ ‘시기’ ‘증오’ 3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근래까지 이런 인간의 본성은 감추는 게 위선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예(禮)와 일반 규범에 의해 통제돼왔다. 이게 무너졌다.

    위선은 지도자의 미덕

    위선이라고? 그건 나쁜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죽기 직전 측근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친구들이여. 내 연기가 어땠소?” 인생을 연기에 비유한 것이다. 훌륭한 황제는 그렇게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았다. 위선적 연기란 지도자의 미덕일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취임 초 젊은 검사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였다. 검찰의 지휘계통을 무너뜨리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이런 말도 했다. “이렇게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민주주의보다 정부 조직 보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무슨 막가자는 말씀인가. 거기에다 “확 긁어버린다”도 있고 “진보언론까지 나를 조진다”도 있다. 개그맨도 방송에서 쓰지 못할 말들이다. 가슴 시리도록 통쾌한 표현이긴 하지만 정도를 많이 벗어났다.

    이쯤 되면 비난이 아니라 언어폭력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서 자신은 피해자 행세를 한다. 좀 유치하다. 이후 이런 식의 언어폭력은 그의 특성이 되다시피 했다. 어찌 아랫사람들이 본받지 않을 수 있으랴.

    이런 난삽한 언어는 특히 온라인 세상을 석권했다. 그렇게 이 나라 전체의 수준을 떨어뜨렸다. 언어폭력이나 교묘한 조종, 방어기제 같은 경계인의 행동은 사람 사이의 신뢰와 친밀감을 부숴버리곤 한다.

    세상은 참으로 속되고 인생은 쓸데없이 허망하다. 충동적인 행동을 통해 공허함을 채우고 정체성을 만들려고 애쓴다. 그 목적은 하나다. 내적인 고뇌의 극복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아직도 ‘휴지통 진단명’이다. 치료사가 환자의 병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하며 붙여준 이름표라는 말이다.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허위다. 허위는 투사(投射)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다. 투사는 스스로 싫어하는 자신의 특징, 행동, 느낌들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종종 비난하는 식으로) 돌림으로써 부정하는 일이다. 대단한 자기 합리화이자 책임 전가인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어. 다 네 탓이야” 하고 나면 마음이 편하다. 세상이 온통 그런 식이다.

    여기에 권위를 부정하는 본성이 덧붙으면 상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요, 잘난 자의 불행은 더 큰 행운이며, 가장 뛰어난 자의 불행이야말로 최고의 치료약이다. ‘폭력과 사랑’이라는 주제의 시사 콩트를 만들어봤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경계성 성격장애인은 감정 변화의 폭이 크고 행동을 예측하기 힘든 특징을 갖는다.

    혼돈씨는 이름 그대로 혼돈 그 자체다. 그에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회의주의자는 아니다. 어떤 경우든 주관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주관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돈이다. 혼돈씨의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재미는 있지만 종잡을 수 없는 그의 태도에 그야말로 혼돈을 일으킨다.

    최근 그는 참으로 혼돈스러운 이론을 개발했다. 폭력은 사랑에 기반을 둔다는 기발하기까지 한 주장이다. 지금 세상에는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언어폭력을 포함하여). 가정, 학교, 거리, 국회 모든 곳의 어떤 시간에도 폭력이 있다.

    최근의 폭력은 어떤 대기업 회장의 폭력 개입 사건이다. 밖에서 맞고 피를 흘리며 들어온 아들을 보고 격분한 그는 즉각 응징에 나섰다. 언론은 물 만난 물고기 같다. 사회면에 실리면 될 기사가 1면에 오르고 상황별 사건 개요가 신문 전면에 특집처럼 나온다. TV는 뉴스 첫머리에 항목을 나눠 방송한다.

    매체는 하나같이 그를 열렬히 비난한다. 인터넷도 다를 바 없다. 좀더 저속한 표현법을 쓴다는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다. 간혹 룸살롱에서 바가지를 쓴 경험이 있는 사람의 의견인 듯한, ‘그런 놈들 좀 맞아야’라는 과격한 의견도 있다.

    정치권도 빠질 수 없는 모양이다. 사회정의 차원에서 철저한 수사와 가차 없는 처벌을 요구한다. 언론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외래어를 들먹이며 이를 간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전을 찾아 보니 노블레스는 프랑스의 귀족 혹은 고귀한 신분이란다.

    혼돈씨는 이 대목에서 잠깐 혼란스럽다. 우리나라에 프랑스식 귀족이란 게 있던가. ‘고귀한 신분’이란 게 뭘까. 어느 쪽도 해당 사항이 없는 것 같다. 흔히 말하는 정치 지도자나 재벌, 고위 관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그들이라면 별로 고귀할 게 없다는 생각이 혼돈씨의 혼란스러운 판단이다.

    자, 이제 인터넷에 오른, 소수지만 다른 의견들도 살펴보자. 맞아도 싸다는 견해는 피해자에게 너무 가혹하다. 그러니 빼자. 다만 “만약 내 자식 놈이 그렇게 맞고 들어온다면, 그리고 내게 힘이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견은 찜찜하지만 일리가 있어 보인다. 실제로 혼돈씨는 1980년 광주에서 그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소설가인 친구에게 “내 자식이 거기서 변을 당했다면 나는 평생을 바쳐서라도 그 수괴를 내 손으로 죽이고 말겠다”고 흥분한 적이 있다. 그 친구는 후에 ‘목수의 칼’이란 장편소설에서 그 모티브를 써먹었다.

    이건 자식에 대한 사랑이 폭력으로 표출된 예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아니 무릇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본능에 속한다. 폭력과 사랑이란 말도 안 되는 쌍이 어떻게 짝을 이룰 수 있을까. 본능만 남았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모든 것은 혼돈

    그런 까다로운 일말고도 폭력은 얼마든지 사랑을 빙자할 수 있다. ‘사랑의 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인가. 아니다. 폭력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혼돈씨의 주장은 이런 식으로 두서가 없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학생은 뒷전에서 “쟨 뭐가 잘못됐을 거야”라는 누명까지 쓰게 된다. 사실 왕따 당한 아이에게 관심도 없는 학생들까지 왕따시키기에 가담한다.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라는 사랑의 표현이 왕따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뿐인가. 길거리에 나가면 흔히 만나는 장면이 있다. 접촉사고를 낸 자동차를 길 가운데 세워놓고 시비를 가리는 장면이다. 목소리 큰 자가 이기는 게 상례다. 몸집이 크다면 더욱 유리하다. 소심하고 왜소한 사람은 잘잘못을 떠나 자신의 주장은 펴지도 못하고 당한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사회질서에 대한 사랑이 폭력의 형태를 띠고 나타난 예에 속한다.

    더욱 큰 문제는 그 폭력이 어느 정도이냐보다 누가 그랬느냐가 더 관심거리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법의 평등이란 원칙에서 본다면 있지도 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따지기 이전에 폭력의 동기와 정도, 방법에 주된 관심을 쏟아야 옳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잘나가는 사람에게 더 큰 책임을 묻는다. 혼돈씨는 최근 일어난 재벌 회장 사건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 얼마 후 대선 주자들의 이전투구가 시작되고, 과거의 잘못들이 폭로되기 시작하면 관객의 시선은 그리로 쏠릴 것이다. 당연히 이 사건은 유야무야 될 테고.

    지난 설날 새벽 혼돈씨는 아들을 조수석에 앉히고 텅 빈 도심을 운전하고 있었다. 큰댁에 가기 위해서였다. 전날 밤 일이 있어 다른 식구는 먼저 보냈지만 자신과 아들은 밤샘 일이 있어 그렇게 된 것이다.

    한강다리를 지나 삼각지에 이르러 신호 대기 중인데 느닷없이 어떤 승용차가 뒤를 받는다. 깜짝 놀라 내려보니 젊은 여성 운전자가 아마도 운전 미숙으로 그런 사고를 낸 모양이었다. 혼돈씨의 차는 낡은 소형차였다. 됐으니 그냥 가라고 했다.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죽기 전 지인들에게 “내 연기가 어땠소?”라는 명언을 남겼다.(좌) 김승연 회장의 폭력사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부성애, 폭력 등의 생각할 거리를 남겼다.(우)

    아들이 빈정거린다. “잘생긴 여자니까 봐준 거지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언짢은 판인데 다음 신호에서 또 비슷한 꼴을 당했다. 이번 운전자는 얼굴이 불쾌하게 생긴 거한이었다. 당연히 봐줬다. 아들의 이론이 무너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아마 명절이라 전날 과음하거나 밤샘을 한 사람들이 많아서 엉뚱한 사고가 연발한 모양이었다.

    혼돈씨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나처럼 하면 세상이 얼마나 부드러워질 것인가. 예쁜 여인이건 별 볼일 없는 못생긴 아저씨건 똑같이 대하고,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측은지심(惻隱之心)만 가진다면 폭력도 사랑도 필요 없이 평화로운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훗날 이 얘기를 들은 친구가 촌평하기를 “네가 그러니까 혼돈이란 이름을 갖게 된 거야. 사람이란 모름지기 원리원칙과 법규 준수가 필수인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혼돈씨의 대답은 이렇다.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해서다. 난 그가 어떤 사람이냐를 보지 않는다. 그저 사람이면 충분하니까. 게다가 낡은 차에 흠집 좀 간다고 뭐 달라질 건더기나 있겠냐?” 친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계속 혼돈스럽게 살아라.”

    혼돈은 이 세상의 기반이다. 우주 탄생부터 한 인간의 일생까지 혼돈 아닌 것이 있는가.

    무계급, 평등, 하향평준

    혼돈은 무질서를 낳고 무질서는 폭력을 부른다. 육체적 폭력뿐 아니라 정신적 폭력도 낳는다. 정신적 혹은 정서적 폭력이 바로 집단적 성격장애가 된다. 세월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촉매 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사회 지도자층에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 올라섰다는 게 문제다.

    많은 사람이 현 정권을 좌파라고 칭한다. 좌파의 극단에는 마르크시즘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시기심에 기초하지만 그 기원에 대해서 그럴싸한 설명을 한 적은 없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대한 혁명은 사실상 시기심을 일으킬 만한 모든 요소를 없애버리겠다는 약속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평등을 갈망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본성이라고 단언한다. 쉽게 증명할 수는 없지만 아예 타당성이 없는 말도 아니다.

    위대한 계급투쟁은 상류계급만이 갖고 있는, 시기심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이점들을 유혈혁명을 치르고서라도 없애야 한다는 이유로 일어났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끊임없는 자극을 끌어냄으로써 그 힘이 줄어들지 않는 것에 빗대어 ‘피의 사교(邪敎)’라 한다(조지프 엡스타인).

    어느 분야든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서너 명은 서로를 칭찬하는 법이 없다. 누구 하나가 조금이라도 앞선다 싶으면 가차 없이 시기심이 들끓는다. 성형수술을 풍자한 소설 ‘얼굴의 정의(Facial Justice)’에서 영국 작가 하틀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보여야 하는,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낫게 보여서는 안 되는 사회를 그려냈다.

    이 소설에서 정부는 모든 얼굴은 똑같아져야 한다는 법령을 선포한다. 이 소설의 교훈은 적어도 현세에서만큼은 평등은 달성될 수 없으며 시기심 역시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사회의 결말은 ‘전 국민의 못생기기’가 될 수밖에 없다. 못생긴 사람은 일부러 자신의 외모를 고칠 필요가 없다. 잘생긴 사람은 다르다. 남보다 낫게 생긴 것이 범죄행위가 되므로 돈 들여 성형수술을 받아야 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의 영국 노조는 산업 전체를 쥐락펴락할 정도로 대단했는데, 노조의 공격적인 행동 탓에 영국 경제가 무너질 지경이라는 말에 그들은 이렇게 대꾸했다고 한다. “우라질 돈 있는 새끼들이 우리랑 같이 무너진다면 그래도 상관없수다.”

    게다가 신뢰 부족은 더욱 큰 문제를 야기한다. 겉으로야 어찌 됐건 속으로는 남을 믿지 않는다. 냉소적이며 공격적인 태도는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에 이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느낌에는 지능지수가 없다. 그렇다고 느끼면 그것으로 끝이다.

    얼마 전 내가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글을 썼을 때, 토론에는 자신 있다던 소위 386세대 일부의 거센 항의 전화를 받은 경험이 있다. 1990년대 말에는 신문에 화장(火葬)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자 주로 노년층, 특히 성균관 어르신들의 항의 전화가 있었다. 이분들은 토론과 거리가 먼 계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양자를 비교해보면 누가 더 토론을 잘하는지가 명백해진다. 어르신들은 정중하게 자신의 반대 의사를 개진하고 나의 답변을 참을성 있게 들어줬다. 비록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기분 상하는 일은 없었다. 더구나 어르신들은 예의도 지켰다. 최소한 남의 집에 전화를 거는 시간대는 철저히 지켰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도 이전 반대 때문에 전화를 건, 토론문화에 익숙하다는 사람들은 욕설로 일관하면서 나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더욱 난감한 일은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시간에 관계없이 전화를 걸더라는 점이다. 이게 어디 토론인가? 경계성 성격장애의 증상에 부합하는 태도들이었다. 부득이 나는 휴대전화 번호를 바꿨다. ‘필요하다면 나 좋을 대로’, 이것이 그들의 생활신조인 것처럼 여겨졌다.

    이런 사이비 토론문화는 급속히 그 아래 세대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이런 단절을 자초했음에도 비판에 대해 엉뚱한 반응을 보인다. ‘지금 나는 외롭고 우울하다.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격장애를 남의 탓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발상이다. 하지만 본인은 모른다. 그래서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의지로 해결될 단계는 지났다. 치료가 필요하다.

    청와대 터 유감

    이 문제와 연관 지은 경계성 성격장애의 또 다른 특징이 ‘그들의 궁극적인 두려움은 혼자가 되는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 점은 청와대 터와도 관련이 있다. 청와대 터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 글을 쓴 적이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만 소개하겠다.

    청와대 본관 앞뜰에 서서 보면 뒤로 북악산이 웅장하게 펼쳐진다.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느낌이다. 앞을 바라보면 서울 장안이 눈 아래 펼쳐진다. 남산이 다소 장벽같이 보이지만 큰 문제인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청와대가 기대고 있는 북악산은 광화문 4거리에만 나와 보아도 바로 옆 인왕산에도 눌리는, 예쁘긴 하지만 조그만 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 장기간 거주하면서 노출되면 한마디로 ‘왜소한 독불장군’이 된다. 나만 옳으니 나를 따르라는 식인데, 객관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를 심각하게 만든다. 더구나 밤에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일 것이다. 혼자라는 고독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두려움으로 연결돼 더욱 독선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된다. 안타깝지만 나의 전공인 풍수적 시각에서 보자면 위와 같은 해석을 내리게 된다.

    왜소한 독불장군식의 대인관계는 위로부터 내려와 일반화의 과정을 거치며 집단적 성격장애 시대를 열었다. 청와대 터가 문제라는 환경 결정론적 견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터의 성격이 사람을 제대로 만나면 진가를 발휘하게 도와준다는 측면을 강조하고자 할 뿐이다.

    어려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병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에게 성격장애가 있음을 인정하기는 고사하고, 완벽하지 않은 구석이 있음을 시인하는 것만으로도 수치감과 자기 회의에 늪에 빠질 수 있다. 분명한 증거가 있는데도 자기에게 잘못된 점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신을 잃기보다는 아주 중요한 다른 것을 잃으려 든다. 경계인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면 치료의 가능성은 높다. ‘순전히 내 책임이었다. 이제 나를 바꾸지 않으면 죽어버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는 자각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나. 불행히도 해결 방법은 대단히 어렵다. 그렇더라도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절망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개선을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그러니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적을 기대하지 말라. 작은 개선에 크게 기뻐하고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의 좋은 점들에 감사하라. 자신이 처한 이러저러한 상황을 개인적 성장과 깨우침을 위한 기회로 보는 것은 큰 도움을 준다.

    겁쟁이는 안장을 두드린다

    전형적인 장애는 그들이 혼란스럽고 공격적이며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 들고, 이 세상에 대해 화가 나 있다는 측면이다. 물론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 정도만 돼도 개선될 가능성이 있다.

    성격장애인에게 강요는 금물이다. 경계인에게 다르게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뇨병 환자에게 인슐린을 좀 더 만들어내라고 부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방어기제로서 통제나 물러나기, 비난, 합리화, 주지(主知)화, 욕설, 완벽주의, 흑백논리, 위협, 엉뚱한 문제로 싸우기, 타인에 대한 과도한 걱정 따위를 한다.

    어디선가 흔히 경험하던 현상 아닌가. 이게 바로 집단적 성격장애의 시대라고 규정하는 중요 이유 가운데 하나다. 치료를 결심했다면 약물 치료도 필요하다. 경계성 성격장애 행동이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장애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데 약을 쓰는 것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다. 나나 내 처도 주위로부터 정신과 약 그만 먹으라는 충고를 자주 듣는다. 우리 부부는 정신병이 아니라 신경증을 앓고 있다. 약은 매우 효율적인 치료법이고 최근의 약들은 처방대로만 복용한다면 부작용이 별로 없는 게 대부분이다. 증세가 악화돼 지옥을 경험하는 것보다 설혹 약간의 부작용이 있다 치더라도 약을 복용하는 편이 뒷날에는 더 낫다는 것이 내 경험이다.

    이 정권의 또 하나 특징은 그들의 심성 저변에 깔려 있을지도 모를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폭력은 언뜻 보기에 상반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두렵기 때문에 폭력을 쓴다. 강하다고 자각하는 사람은 폭력에 의지할 필요가 없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한 사람은 관대하다. 그래도 살아가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대외 정책은 누가 보더라도 반미친북(反美親北)적이다. 왜 그럴까. ‘바보들은 언제나 말 궁둥이를 못 때리고 안장에 매질하는 법’이다. 눈여겨보면 미국은 말 안장이고 북한은 말 궁둥이다. 미국의 전쟁 도발 가능성은 거의 제로다. 북한의 도발 가능성은 꽤 높다. 그런데 미국은 견제 대상이고 북은 같은 민족이니 도와야 할 대상이다. 나는 이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본다. 두려운 궁둥이는 건드리지 못하지만 안전한 안장은 두들길 수 있다. 강자는 자신에게 이로울, 즉 말을 달리게 할 궁둥이를 때린다. 오직 겁쟁이만이 안장을 두드리며 모양만 그럴싸하게 꾸민다. 우리가 이런 정권을 선택했다.

    선출직 지도층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선택권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선물을 주는 것과 강탈당하는 것 사이의 차이와 같다. 우리 부부는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다. 어느 날 식탁에서 아들이 “군대 갔다 왔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닌데 가산점까지 빼앗아가는 것은 너무 하지 않나”라고 했다. 아내의 즉각적인 반격이 이어졌다. “얘,여자가 시집가서 시댁 식구들과 가까워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애 낳을 때 고통은 또 어떻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말씨름만 남을 것 같기에 내가 나서서 이렇게 마무리 지었다. “결혼과 출산은 선택의 여지가 있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군대 가는 일은 다르다.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다. 만일 가지 않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그는 사회생활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처지에 빠진다. 그러니 답은 나온 것 아니겠는가.”

    선택은 우리가 했고, 그 결과는 오로지 우리 책임이다. 세상이 더 나아졌을지 아닐지는 누구도 모른다. 나타난 결과만으로 판단할 뿐이다. 건강한 경계를 지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신념과 감정이 다르더라도 존중할 줄 안다. 우리는 이런 정권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이런 정부를 선택했다. 그러니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책임전가는 영원히 회전하는 톱니바퀴에 찍힌 점과 같다. 끝없는 말놀이에 그저 지치고 만다. ‘만약 엄마가 더 나은 엄마였다면 나도 더 나은 자식이 되었을 거야.’ 그래? 과연 그런가? 엄마라고 그런 생각이 없을까? 아니다. 책임전가만 반복될 뿐이다.

    너는 너, 나는 나

    선택의 문제에서 크게 고민할 것은 없다. 어느 고승이 찾아온 사람에게 차를 내밀며, 차를 마시면 막대기로 칠 것이고 마시지 않아도 역시 칠 것이라고 한다. 어쩔 것인가. 그 막대기를 뺏으면 된다. 이런 것이 선택의 기로에 해당한다.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이다. 이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보통 마시느냐 아니냐의 선택만 생각한다. 빼앗는다는 것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쉽게 떠올릴 수 없는 생각이다.

    요즘 사람들은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제 말만 말이라고 떠든다.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까. 좋은 의사소통을 위한 첫 단계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이다. 경청하기 위해서는 집중과 유념이 필요하다. 오로지 말하는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은 잊어야 한다. 당신을 비판하는 상대방의 관점에 동의하게 되든 아니든, 일단 말을 잘 듣는 일은 당신에게 배울 기회를 준다.

    정말 그렇다. 도대체 상대방이 내게 왜 저렇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지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고, 대처해야 내 마음의 평정이 얻어진다. 그러니 들으라. 당신을 비난하는 상대방의 말조차. 현실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른 좋은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 충고를 따르는 것이 좋다.

    문장에서 ‘모든’이나 ‘결코’ 같은 말의 사용은 피하는 게 옳다. 이런 말은 이분법적 사고 혹은 흑백논리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구성되지 않았다. 그 사이 회색지대에 무수한 나름대로의 진실이 들어 있다. 어린아이 같은 감정을 성인의 방식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뜻과 통한다.

    우리 대부분은 불가능한 것을 원한다. 우리는 자신의 결정과 선택을 통제하고 싶어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까지도 통제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변화를 원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변화를 좋아하기를 원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의 선택권이 있음을 인정하면 내 마음이 편해지고 세상은 제 길에 좀더 다가설 수 있다.

    내 말대로 되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분노와 논리는 함께하지 않는다. 특히 어린이에 대한 일관성 없는 분노는 그 아이에게 치명적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자기 아이를 가질 때까지는 부모가 치른 희생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부모 노릇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다.

    공공장소에서 많은 부모가 어린이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흔히 본다. 유심히 살펴보면 대체로 부모의 일방적인 훈계로 일관한다. 이렇게 자라면 어른이 되어서도 일방적인 대화밖에 할 줄 모른다.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보살핌과 애정을 아낌없이 준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깊이 관여하면 부모 없이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다고 아이에게 가르치는 셈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아이들이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우도록 하는 동시에 아이가 능력 밖의 상황에 처할 때 위험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지켜야 할 일이다.

    지는 게 이기는 길

    성격장애에 빠진 사람들은 그들의 분노를 ‘왜곡작전’으로 토로하기도 한다. 이른바 흑색선전이니 네거티브 전략이니 하는 게 그런 종류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이 허위 비난을 받거나, 뜬금없는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되거나, 정당한 근거도 없이 소송을 당한 경험이 있다. 황당하지만 일단 소문이 나면 되돌리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겠느냐”며 기정사실화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가장 현명한 대처는 ‘진실을 말하라, 숨김없이 말하라, 빨리 말하라’이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것과 상대방이 당신에 대해 느끼는 것이 같으리라고 생각지 말라. 관대하게 사고의 폭을 넓혀 나간다면 이 집단적 성격장애의 시대를 돌파할 방책이 나온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구체적으로 모든 불쾌한 상황 앞에서 일단 심호흡을 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여유를 가지라. 안 되면 두 발짝, 세 발짝 계속 물러서라.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물러서는 것이다.

    만일 언쟁에서 상대방을 칭찬하면 패배자가 되는 것일까? 아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남 칭찬 잘 하기로 유명하다. 더구나 그는 남의 작품에 대해 트집이나 험담은 물론이고 나쁘게 말하는 것도 삼갔다고 한다. 자기 작품 활동하기도 바쁘기에 남의 다리를 잡고 늘어질 시간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노블레스’의 독불장군 대인관계가 ‘집단 성격장애 사회’ 열었다
    최창조

    1950년 서울 출생

    서울대 지리학과 졸업, 동 대학 석사(지리학)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녹색대 풍류풍수학과 교수

    現 풍수학자, 칼럼니스트

    저서 : ‘한국의 풍수사상’ ‘북한 문화유적 답사기’ ‘도시풍수’ 등


    이런 그의 태도에는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심성이 묻어난다. 하지만 어떤가. 그로 인해 자신과 사람들이 모두 마음의 평정을 찾았으니 잘된 일이라 생각한다. 흔히 드는 예처럼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기 위해 자식 낳은 집에 가서 “이 아기는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라며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 누가 백남준의 ‘칭찬하고 물러서기’를 패배라고 하겠는가.

    맞붙어 싸울 때의 괴로움을 생각한다면 지는 게 이기는 길이다. 여기서 물러서준다는 것은 비굴이 아니다. 인간 본성의 네 가지 실마리(四端) 중 측은지심에서 우러나오는 ‘지는 것으로 해두기’가 진정한 것이다. 인생이 불쌍하고 애처롭지 않은가. 그러니 물러서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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