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호

모태신앙 황일도 기자가 지켜본 ‘한국 기독교 대표주자’ 온누리교회

엄숙주의 깨뜨린 ‘꿈의 교회’, 그러나 ‘세상’과의 넘을 수 없는 불화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7-10-09 16: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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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태신앙 황일도 기자가 지켜본 ‘한국 기독교 대표주자’ 온누리교회
    일단 고백부터 하자. 크리스천이던 학창시절, 기자에게 서울 서빙고동의 온누리교회는 말 그대로 ‘꿈의 교회’였다. 1992년 겨울, 학력고사를 보기 위해 서울로 향하던 기차 안에선 워크맨으로 당시 온누리교회의 대표 브랜드였던 ‘경배와 찬양’ 실황 녹음 테이프를 들었다. 온누리교회 담임 하용조 목사가 운영하는 두란노서원은 그때 이미 ‘생명의삶’이나 ‘빛과소금’ 같은 크리스천 잡지를 통해 기독교계 전반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창립된 지 불과 7년 남짓, 등록교인 5000명 안팎을 헤아리던 시점이었다.

    15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사이 온누리교회는 엄청난 속도로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형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던 교회는 2007년 1월 현재 등록교인 5만3000명을 넘어섰다. 일요일에만 일곱 번 예배가 열리는 서빙고동 본당뿐 아니라 서울 양재, 부천, 수원, 대전, 남양주, 평택, 인천에 지(支)교회를 두고 있고 18개에 달하는 해외 교회도 열었다.

    교인 숫자로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같은 ‘초대형 교회’를 따라가기 어렵지만, 매년 30~50%에 육박하는 폭발적인 증가세만큼은 단연 독보적이다. 이 기간이 전체 기독교인 숫자가 감소세로 돌아서면서 ‘한국 기독교 위기론’이 나온 시점이란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교인 숫자와 성장세만을 따지는 것은 교회를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이 아닐 수 있다. 일부 대형 교회의 세습 문제, 투명하지 못한 재정 문제, 신도들 간의 갈등과 법정싸움 등 안으로 곪아들어가는 치명적인 한계들이 한국 교회의 병폐로 비판받은 지 오래다. 그러나 온누리교회는 앞에서 열거한 문제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취재를 위해 인터뷰한 대부분의 교계 관계자들이 ‘한국 보수교회의 대표주자’라는 평가에 긍정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사회 전체에 ‘반(反)기독교 정서’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시점에 온누리교회를 들여다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상식과 법률의 관점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부 교회를 기준으로 한국 기독교를 말한다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한국 축구의 수준을 가늠하려면 조기축구 모임이 아니라 대표팀을 봐야 하는 법이다. 대표주자가 가진 비전과 가능성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비전과 가능성을 보고, 거꾸로 대표주자가 가진 고민과 한계를 통해 한국 기독교의 고민과 한계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참으로 오랜만에 한 교회를 쉴 새 없이 드나들며 그 구석구석을 살피게 됐다. 교회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존재다. 지상을 딛고 서서 천상의 논리를 지향한다. 이 기사는, 어린 시절 천상의 관점에서 동경하던 교회를 나이가 들어 지상의 관점에서 다시 돌아본 기록이다.

    30, 40대가 많은 교회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는 분도 있고 싫어하는 분도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국가 최고통수권자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결코 가서는 안 되는 길이 있습니다. 소위 ‘반노’와 ‘친노’로 갈리는 길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어느 당이 옳다’ ‘누가 옳다’고 판단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모든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그 당이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옳습니다. 말씀만 옳습니다.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사태 무렵 하용조 목사가 교회신문에 기고한 칼럼 일부)


    온누리교회가 자리잡은 용산구 서빙고동은 동부이촌동과 묶여 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부촌이다. 강변북로에 바로 잇닿아 있어 대중교통보다는 자가용으로 가는 게 훨씬 수월한, 강북에 있지만 오히려 강남에서 더욱 접근하기 쉬운 지리적 위치는 이 교회의 독특한 면모를 상징한다.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사회적 위치에 있는 젊은 교인이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30, 40대가 60%를 넘는 교인 구성은 다른 대형 교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모태신앙 황일도 기자가 지켜본 ‘한국 기독교 대표주자’ 온누리교회

    온누리교회 서빙고성전 일요일 예배 광경.

    그 가장 큰 이유로 1985년 창립 이래 교회를 이끌고 있는 하용조(河用祚·61) 목사의 설교 스타일을 꼽는 데는 교회 안팎에 이견이 없다. 개인의 경험과 가부장적 권위를 바탕으로 말 그대로 ‘설교’를 하는 일부 대형 교회 목회자들과 달리, 하 목사의 설교는 모성애적 보살핌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젊은 교인들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자제하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이는 사회적 관점에서 온누리교회를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차별성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래 대다수 대형 교회가 정부 비판 집회를 조직하고 참여했지만, 온누리교회는 이를 의식적으로 피해왔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밖의 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는 ‘긍휼사역’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7년간 40여만명의 노인에게 무료급식을 한 ‘예수향기회’는 온누리복지재단으로 이어졌고, 현재는 용산노인종합복지관과 치매노인을 위한 전문요양센터 등으로 연결됐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당시 구조대원들을 위한 식사 제공, 탈북자와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쉼터 운영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이 같은 행보는 1970~80년대 격동의 시기에 목회를 시작한 하용조 목사의 경험과 관계가 깊다. 기독교계 전체가 반독재투쟁 등 사회참여를 두고 양분돼 있던 시기에 하 목사는 보수단체로 분류되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 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참여’에 ‘가난한 이웃에 대한 봉사’와 ‘구원 받은 자의 모범’도 있을 수 있다는 내용을 실은 그의 메시지는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중산층 크리스천들에게 일종의 돌파구였다. 하 목사가 사랑의교회 옥한음 원로목사와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 등 보수교단의 개혁파에 속하는 지도자급 목회자들과 신학교 시절부터 뜻을 같이해온 ‘4인방’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살아 있는 예배’

    ‘해골’이라고 하는 곳에 이르자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죄수도 하나는 그 오른쪽에, 하나는 그 왼쪽에 못 박았습니다…그때 군인들은 제비를 뽑아 예수의 옷을 나눠 가졌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지켜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심지어 예수를 조롱하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했다지. 자기가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면 자기도 구원하라지.”… 정오쯤 돼 어둠이 온 땅을 뒤덮으니, 오후 3시까지 계속됐습니다. 해가 빛을 잃었고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9월9일 온누리교회 설교 본문이던 ‘우리말성경’ 누가복음 23장 부분 인용)


    9월9일 오전, 온누리교회 서빙고성전을 찾았다. 교인이 가장 많이 참석한다는 3부 예배는 11시30분부터 시작되지만, 11시10분이 넘어서자 2400석 규모의 본당에 빈자리를 찾기 어렵다. 본당에 앉지 못한 이들은 별관과 지하 등 다섯 개 홀에 나뉘어 스크린을 통해 예배에 참여한다. 같은 시간 3000석 규모의 양재 사랑성전 등에서도 3부 예배가 시작된다. 각 성전을 모두 합하면 일요일 하루에만 40건의 예배가 열린다. 어린이와 청소년 예배, 주중 예배와 외국어 예배는 별도다. 건물 규모만 놓고 보면 큰 편이 못되는 온누리교회에 수만명의 교인이 모일 수 있는 이유다.

    11시15분, 전면에 자리잡은 반주팀이 연주를 시작한다. 단상의 한쪽에 서 있는 드럼 풀세트에서는 대중음악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감미로운 리듬의 연주곡이 흘러나온다.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딕풍의 실내장식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연극무대에 가까울 정도로 별다른 꾸밈이 없는 단상에는 평범한 아크릴 설교대가 놓여 있을 뿐이다. 단상 뒤편에 선 찬양팀 역시 색깔을 맞춰 입기는 했어도 모두 평상복 차림이다. 찬송가 대신 복음성가로 시작된 준비 찬양은 별다른 멘트 없이 예배 시작으로 이어진다.

    건강이 안 좋은 하용조 목사는 최근 수개월간 일본에서 요양 중이다. 이미 간암으로 수술을 여섯 번 받았고 현재는 신장이 안좋아 일주일에 세 차례 혈액투석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는 1985년 교회 창립 이후 건강 문제로 몇 차례의 안식년을 가졌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서빙고성전의 일요일 오전 예배는 라준석 목사가, 양재성전 예배는 한홍 목사가 설교를 맡고 있다.

    설교자는 다르지만 대상이 되는 성경본문과 주제는 모든 성전이 동일하다. 온누리교회가 매주 성경 본문을 순서대로 따라가는 강해설교를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설교는 누가복음 23장 33~49절. 그런데 설교에 사용되는 성경 본문이 독특하다. 다른 교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역성경’ 번역본 대신 2005년 두란노서원에서 펴낸 ‘우리말성경’ 번역본을 사용한다. 본당 안의 2400명 교인이, 성경이라면 으레 연상되는 의고체 대신 현대어를 한목소리로 낭독한다.

    모태신앙 황일도 기자가 지켜본 ‘한국 기독교 대표주자’ 온누리교회

    7월3일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일본 사이타마에서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있다.

    설교가 끝나자 다시 인상적인 드럼과 베이스기타 사운드가 본당 안을 울린다. 현악 반주에 맞춘 트럼펫 연주가 고요히 메아리치자 단상과 좌석을 막론하고 적잖은 이가 눈을 감고 손을 들어 화답한다. 온누리교회 신도들이 자랑하는 이른바 ‘살아 있는 예배’다. 감성과 느낌에 방점을 둔 이 같은 예배 진행에는 흡음·반사장치가 반영된 내부설계와 콘서트홀이 부럽지 않은 음향설비, 프로페셔널을 능가하는 연주 수준이 큰 몫을 한다. 온누리교회에서 열리는 모든 예배는 담당PD가 사전에 큐시트를 제작해 기획회의를 통해 공유하는 등 공연에 가까운 사전준비가 이뤄진다.

    흔히 ‘강대상’이라고 부르는 교회 단상에 드럼이나 전자기타 같은 대중음악용 악기가 올라오거나 일요일 예배 시간에 사용되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온누리교회는 1980년대 후반 이들 악기를 가장 먼저 폭넓게 활용한 교회다. 예배시간에 찬송가가 아닌 복음성가를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피아노나 파이프오르간 같은 클래식 악기만을 사용해온 기독교계에 이는 상당한 충격을 던졌고, 그 적절성을 두고 목회자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교회 안에서 울리는 드럼

    한국 기독교 특유의 문화적 엄숙주의를 배격한 이 같은 시도는 온누리교회 성장요인의 하나로 꼽히는 문화적 포용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음악 장르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카페와 서점, 꽃집을 만들어 ‘거룩한 공간’이라는 개념보다는 ‘생활공동체’의 의미에 방점을 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교회에 비해 젊은층 신도가 많고 대학청년부 활동이 왕성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적극적인 포용은 하용조 목사가 온누리교회 창립 이전에 6년간 담임했던 연예인교회 목회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 이때의 경험으로 연예계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쌓은 그는 연예인을 집회무대에 참석시켜 초심자들을 전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온누리교회가 설립한 위성방송 CGNTV나 월간지 ‘빛과소금’에 다수의 크리스천 유명인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7월24일 일본 사이타마현에서 열린 문화선교행사 ‘러브소나타’에는 22명의 크리스천 연예인과 프로골퍼 최경주씨 등이 참석했다. 이 역시 ‘한류(韓流) 스타로 일본 선교의 문을 연다’는 콘셉트가 바탕에 깔린 것이었다. 휴가를 내 일본 현지 행사에 참석한 온누리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현직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도 적지 않았다. 특히 이 자리에는 1970년대 기독교계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전날 하용조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참석해 ‘러브소나타’에 대한 언론의 관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SWOT 분석, 광고기법, 마케팅 방법론

    온누리교회 성장의 또 한 가지 비결로 거론되는 것은 경영기법의 성공적인 응용이다. 예를 들어 목회기획팀에서는 주기적으로 환경적 트렌드와 내부 역량의 조화를 꾀하기 위한 SWOT 분석을 실시한다. 강점(Strengths), 약점(Weaknesses), 기회(Opportunities), 위협(Threats)을 매트릭스 분석해 대응전략을 도출하는 기업경영 기법 가운데 하나다. 교통과 주차 혼잡으로 인근 주민의 불만이 많아지자 교회를 소그룹화하고 지역별 예배를 신설하는 식이다.

    정교한 조직구성 체계도 마찬가지다. 모든 교인을 10명 내외의 소그룹인 ‘순’으로 세분해 이를 다락방, 공동체의 상급단계 조직으로 연결한다. 매주 600개에 달한다는 각종 모임과 행사에서 온누리교회는 평신도들을 프로그램의 주체로 내세우고 소그룹을 네트워크화해 운영체계의 골간으로 삼고 있다. 앞서 누가복음 23장에서 본 것처럼 예수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을 가로막던 ‘휘장’이 찢어졌으므로,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목회자나 다름없는 신앙의 주체가 됐다는 개신교의 ‘만인제사장주의’가 그 근거다.

    이러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운영 방식은 미국의 대표적인 대형 교회 윌로우크릭의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온누리교회 프로그램 대부분이 평신도의 자원봉사를 바탕으로 진행된다거나, 어린이·청소년을 위한 정밀한 교육체계의 운용 역시 윌로우크릭의 프로그램을 차용한 것이다. 기존의 초등부·중고등부에 ‘꿈이자라는땅’과 ‘파워웨이브’라는 감각적인 명칭을 붙여 대폭 강화한 것이, 1996년 하용조 목사 등이 윌로우크릭을 방문한 이후의 일이었다.

    경영적 기법이 교회 안에서 차용된 경우는 또 있다. 온누리교회의 ‘맞춤전도’는 마케팅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에 해당한다. 2001년 40대 남성을 대상으로 한 ‘비상구’로 시작된 맞춤전도는, 대상에 상관없이 같은 전도 메시지를 전하던 이전의 집회와는 달리 특정 그룹을 선정해 그에 맞는 프로그램과 메시지, 출연자를 결정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30대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챔피언’, 20~30대를 위한 ‘Just For U’ 등 주로 연령을 기준으로 마련됐던 맞춤전도 집회는 2004년부터 의사, 교사, IT전문인, 금융 종사자 등 직업군을 기준으로 하는 집회로 발전했다.

    모태신앙 황일도 기자가 지켜본 ‘한국 기독교 대표주자’ 온누리교회

    온누리교회 양재성전. 원래는 이형자씨가 이사장으로 있던 횃불선교센터 본부 건물이었다.

    초기부터 교회 내의 광고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준비팀은, 대상자를 세밀하게 분석해 설득력을 높일 수 있는 브랜드와 캐릭터를 선택하는 등 마치 광고 제작과정처럼 진행했다. 광고 그래픽을 차용해 감각적인 비주얼이 담긴 홍보물을 제작했다. 직업군으로 나눈 최근의 맞춤전도 집회에는 해당 직업을 가진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행사를 기획하고 이를 이후의 프로그램과 연계하기도 한다. 대상의 특성 분석, 알맞은 도구설정, 홍보기획에 이르기까지 기업 마케팅에 버금가는 노하우가 총동원되는 셈이다.

    온누리교회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독창적인 예배구성, 교육체계, 조직관리, 전도기법 등은 1990년대 중반 이래 다른 교회들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다. 온누리교회도 매년 축제를 열어 다른 교회 교역자들을 초청함으로써 자신들의 노하우를 공유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온누리교회는 스스로를 ‘배우고 가는 교회’로 규정한다. 교역자든 교인이든 온누리교회에 머물지 말고 다른 교회로 옮겨 ‘온누리 마인드’를 전파하라는 것이다. 창립 초기부터 하용조 목사가 강조해온 “7년 된 교인은 떠나라” “배웠으면 돌아가라”는 메시지가 이를 상징한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러한 분위기는 상당부분 변했다는 것이 교계 안팎의 일반적인 평가다. 교회가 성장하는 동안 크게 늘어난 신규 등록교인 가운데 상당수는 새로 기독교를 믿은 사람이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 옮겨온 신자이지만, “7년 된 교인은 떠나라”는 초기의 메시지 역시 최근에는 그리 강조되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교인들은 전한다. ‘온누리교회가 변해간다’는 비판이 나오는 근거 가운데 하나다.

    특히 온누리교회가 ‘비전교회’라는 이름으로 지방에 지교회를 세우기 시작하면서 지역 교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온누리교회는 자신들의 비전과 노하우를 공유하는 거점으로서 지교회를 세웠다고 설명하지만, ‘신도를 빼앗긴’ 지역 교계로서는 반감이 없을 수 없는 노릇이다. 온누리교회 역시 기존의 대형 교회와 다를 바 없다는 비판이 교계 내에서 사뭇 치열하게 제기되고 있다. 온누리교회가 내건 ‘바로 그 교회’라는 구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자 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신동아그룹과의 인연

    온누리교회가 문화적 포용과 경영기법 활용이라는 독창적인 행보를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하용조 목사가 최순영 신동아그룹 전 회장의 동서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는 없다. 최 전 회장의 부인인 이형자씨는 하 목사의 부인인 이형기 사모의 큰언니다. 단순한 인척관계를 넘어 온누리교회의 창립과 운영에 있어 최 전 회장 부부의 역할은 엄청났다. 이러한 인연은 ‘사회적·물질적 성공에 부정적이지 않은’ 온누리교회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성공한 크리스천이 ‘거듭난 자’로서의 모범을 보이고 교회 사역에 열의를 다해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직장이나 사회에서 다른 이들을 전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온누리교회 서빙고성전을 찾으면 주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글자가 다름 아닌 ‘신동아’다. 40~60평대 대형 아파트 위주로 구성된 서빙고동 신동아 아파트와 바로 붙어 있고, 길 건너에 있는 쇼핑센터의 이름 역시 신동아다. 1983년 신동아건설이 이들 아파트를 건설할 당시, 최 전 회장 부부는 건강 때문에 요양차 영국에 머물고 있던 하 목사에게 아파트 단지 일부 부지를 교회 부지로 기증하겠다며 의사를 타진한다. 이후 귀국한 하 목사가 처음 교회를 창립한 것 역시 이형자씨가 운영하던 한남동 횃불회관 일부를 빌려서였다.

    온누리교회는 불과 창립 2년 만에 현재의 서빙고성전에 입당한다. 건축헌금을 차곡차곡 모아 건물을 짓는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일. 신동아건설은 이 건물을 ‘선 건설, 후 대금지급’ 방식으로 지어줬고, 이후에도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사인 최 전 회장 부부는 교회 운영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 이러한 든든한 재정적 뒷받침이 다른 교회는 따라오기 어려운 다양한 문화적 시도의 한 원천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훌륭한 음향시설과 연주,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던 교회 건물 설계만 따져봐도 그렇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성장의 원천’은 온누리교회가 사회적 비판의 굴레를 쓰게 되는 단초로 작용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99년 2월 최 전 회장은 사기와 재산 국외도피 등의 혐의로 기소됐지만, 이후에도 온누리교회와 이들 부부의 관계는 유지됐다. 대표적인 것이 양재성전의 사례다. 원래 이 건물은 이형자씨가 이사장을 맡아 운영하던 횃불선교재단의 본부 건물로, 최 전 회장이 구속되어 신동아건설에서 물러난 후에 온누리교회가 일부를 빌려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최 전 회장이 건축비를 갚지 못해 신동아건설이 건물을 가압류하기에 이르자, 2002년 3월 온누리교회는 그간 월세를 내고 사용하던 건물을 전세로 전환해 ‘위기’를 막았다. 이 건물의 등기부등본에는 ‘재단법인온누리선교재단’의 근저당권 채권최고액이 230억원으로 기록돼 있다. 온누리교회측은 “건물이 넘어갈 경우 양재성전을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전세 전환이 불가피했다”고 설명하지만, 사정에 정통한 한 검찰 관계자는 “교회 재산 사유화로 볼 소지가 있다”며 힘주어 비판했다.

    최근에도 최 전 회장 부부와 온누리교회의 관계는 지속되고 있다. 10월 중순 개최될 예정인 ‘워가코리아 세계여성리더십선교대회’의 경우 이형자씨가 위원장, 이형기 사모가 부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행사의 상당부분이 온누리교회 양재성전에서 진행된다. 교회 매체인 ‘온누리신문’은 9월9일자에 두 면에 걸쳐 특집기사를 싣고 이형자씨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중산층 교회’의 위험성

    “어느 주일엔가 예배를 드리러 올라가다가, 의사로 생각되는 한 교인이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것을 언뜻 듣게 되었다. 통화 상대방 역시 온누리 교인인 의사였는데, 평일 저녁 모임 스케줄을 조정하느라 한창이었다. 과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끼리만 따로 모인다는 게 썩 좋게 보이지는 않았다. 바깥 세상의 신분은 교회 안에서는 모두 사라지는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9월초 기자와 인터뷰한 한 온누리교회 평신도의 말)


    1970년대 이전에 형성된 한국의 대형 교회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의 기복(祈福)’에 힘입어 성장했다면, 1980년대 이후 만들어진 대형 교회의 상당수는 ‘중산층 이상의 커뮤니티 교회’로 자리매김한 측면이 있다는 게 종교사회학계의 정설이다. 이들 ‘젊은 대형 교회’가 서울 강남을 비롯해 일산과 분당 등 중산층 아파트 단지 밀집지역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온누리교회 역시 예외일 수 없고, 특히 ‘전문인 선교’를 강조하는 최근의 분위기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특정직업군 교인들이 ‘맞춤전도’를 통해 출석하게 되면서 같은 직업을 가진 이전 교인들과 주로 교류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온누리교회가 지난 2월 출범시킨 ‘크리스천CEO포럼’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교계 기업인과 교수, 의사, 법조인, 정·관계 인사, 언론인 등 300여 명의 회원은, 하 목사가 총장을 겸임하고 있고 온누리교회 양재성전을 캠퍼스로 사용하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의 크리스천CEO 과정을 밟은 이가 대부분이다. 양재성전을 책임지고 있는 한홍 목사가 리더십 분야의 유명강사 겸 저술가로서 기독교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앞서도 말했듯 ‘유명인을 통한 선교’ ‘리더를 통한 선교’는 온누리교회 성장의 주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교회가 상상 이상으로 성장하면서 그 부작용도 드러난다. 우선 ‘일요일 예배마다 주차장 곳곳에 가득한 외제 자동차’를 보며 느끼는 ‘일반인’ 신도들의 소외감이 있다. 특히 이러한 분위기는 강남과 분당 거주 교인이 많은 양재성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교회가 대형화할수록 정밀한 조직운영에 대한 전문지식이 요긴해지고, 이에 따라 교회 지도부가 기업 경영자들이나 고위 공직자들의 자문에 더욱 의존하게 되는 것 같다는 비판도 평신도들 사이에서 들을 수 있다.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헬라어가 있다. 기독교에서 흔히 ‘신앙 안에서 이뤄진 성도들 간의 교제’를 뜻하는 이 말은 많은 교회가 강조하는 덕목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자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코이노니아는 ‘인맥’이나 다름없다. 특정 직업군의 지도급 인사들이 모인 경우라면 더욱 그렇다.

    ‘온누리 인맥’을 향한 시선

    최근 수년간 온누리교회가 직간접적으로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등 중동지역에서 대형 행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안전 문제를 우려한 외교통상부와 마찰을 빚은 일을 살펴보자. 이 무렵 현직 주요국 대사와 총영사, 안보분야 상임위 국회의원 등이 장로로 재직하고 있는 온누리교회의 ‘외교부 인맥’에 대해 일부 당국자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기자가 사석에서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이러한 취지의 비판을 들은 것만 해도 한두 번이 아니다.

    종교적 구원이 아니라 인맥 형성을 목적으로 교회를 찾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최근 자주 거론되는 중산층 대형 교회의 가장 ‘약한 고리’다. 온누리교회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1999년 ‘옷로비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 사건에 등장한 이들 사이의 매개고리가 기독교였음은 당시에도 잘 알려졌던 사실. IMF 외환위기 직후 온 나라가 허덕이던 시점에 한 벌에 수백만원 하는 옷을 사러 옷가게를 드나드는 ‘여성 교인’들에 대한 비판이 온 사회를 덮었다. 최종 사법처리된 사람은 없지만, 대표적인 기독교계 여성지도자이던 이형자씨는 ‘남편의 구속을 막기 위해 뇌물을 사용하려 했다’는 따가운 질시를 받았고, 그 과정에서 언니와 상의한 이형기 사모는 검찰 조사를 받고 국회 청문회 증언대에 서는 수모를 겪었다.

    특히 하용조 목사를 비롯한 유명 목회자들이 최 전 장로에 대한 선처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만들어 청와대 비서실장 등 크리스천 고위 공직자들에게 전달한 일은 두고두고 비판을 피할 여지가 없었다. 사정당국과 정계에서는 ‘재벌과 종교가 결탁해 공권력에 맞서려 한다’는 분노 어린 비난이 쏟아졌다. 외형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이 시기 온누리교회 교인들이 겪은 심리적 타격도 컸고 일부 청년 교인들은 교회를 떠나기도 했다.

    최 전 장로가 2005년 대법원에서 대부분의 혐의가 인정돼 유죄 판결을 받은 점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렇다. ‘신앙’의 눈으로 보자면 ‘세상’의 눈으로 보는 허물은 큰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혹은 이미 회개했다면 사랑으로 포용해야 한다는 논리의 위험성이다. 병역기피 의혹으로 사실상 입국이 금지된 가수 유승준씨가 7월 ‘러브소나타’ 행사 무대에 오른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不和, 선교

    최근 사회와 교회의 불화(不和)를 대표하는 또 한 가지 부분이 선교, 특히 위험지역 선교에 관한 것이다. 온누리교회는 사실상 한국 교회를 통틀어 해외 선교에 가장 열성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4년에 이미 ‘2000/1만’, 즉 2000명의 선교사를 파견하고 1만명의 평신도 사역자를 세운다는 장기 계획을 세웠고, 2005년까지 56개국에 603명의 선교사를 내보냈다. 해외에 세운 비전교회, 위성방송 CGNTV, 온누리세계선교센터 등 이를 위해 투입하는 온누리교회의 에너지는 엄청나다. 대표적인 중동 선교단체인 인터콥과 IACD(아시아협력기구)는 모두 온누리교회가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2004년 김선일씨 피살사건은 온누리교회의 이러한 행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수면으로 떠오른 계기였다. 김씨는 온누리교회에서 보낸 선교사가 이끌던 이라크한인연합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특히 김씨의 피랍 직후 이를 인지하고 있던 온누리교회가 자체적으로 이에 대응하느라 정부의 공식 활동이 늦어졌다는 비판이 있었고, 교계에서도 무리한 중동지역 선교에 대한 비난이 나왔다. 최근 아프가니스탄 인질사태와 관련해서도 온누리교회는 피랍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창을 홈페이지에 만들었다가 네티즌들의 비난 댓글이 쏟아지자 운영을 중단해야 했다.

    인질사태 이후 위험지역 선교에 대해 비난 여론이 높아지고 공격적 선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사회는 물론 교계 일각에서까지 제기됐지만, 온누리교회의 자세에는 변화가 없다. ‘세계 60억 인구가 모두 구원을 얻을 때까지’ 선교사역 매진은 양보가 불가능한 부분이라고 교회 관계자들은 잘라 말한다. 기독교계의 중동 선교 계속 방침을 질타하는 언론보도가 연일 이어지는 민감한 시기임에도, 이에 대해 조금도 유보적인 견해를 보이지 않는 교회 관계자들의 태도는 사뭇 놀라웠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중문화의 도구들을 교회 안으로 과감하게 끌어들이는 문화적 포용성은 온누리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던 중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는 종교적 다원성과는 전혀 별개다. 하용조 목사를 포함한 온누리교회의 지도자들이 동성애를 ‘가정을 파괴하는 마귀의 방법’으로 규정하고 이를 합법화한 국가를 ‘저주받은 사회’로 단호히 비난하는 것, 진화론의 과학적 근거를 부정하고 ‘창조과학’을 주장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이른바 근본주의적 성경 해석이다.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을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9월6일 ‘경배와 찬양’ 목요집회에서 연주된 ‘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가사 일부)


    9월6일 저녁 7시, 온누리교회 서빙고성전 본당에는 ‘경배와 찬양’ 목요집회가 열렸다. 학창시절 이 집회를 몹시도 동경했던 기자는 퇴근 시간 이촌동의 막히는 거리를 뚫고 교회를 찾았다. 어쩌면 온누리교회를 살펴보겠노라고 결심하게 된 이유가 이 집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단을 밟고 3층으로 올라서자 예전에 듣던 노래들이 귀에 꽂혔다.

    하용조 목사의 동생 하스데반 선교사는 십수년 전의 열정 그대로 ‘사치와 치장을 버린, 겸손하고 검소한 삶으로의 결심’을 이끌었다. 10대와 20대를 주축으로 하는 젊은이들은 프로를 능가하는 연주와 강력한 드럼사운드에 입을 맞춰 노래를 불렀다. 많은 젊은이가 눈물을 흘리며 두 손을 높이 들었다.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내일 당장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난다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순간 기자의 뇌리에 불안함이 스쳤다. 순교자를 ‘신앙의 영웅’으로 믿는 공동체가, 이를 무책임한 행동으로 규정하는 세상과 타협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온누리교회가 보수교회의 대표주자라는 말은 안과 밖에서 모두 진실에 가깝다. 크고 작은 논란과 비판을 소개했지만, 다른 대형 교회와 비교하면 ‘새발의 피’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2007년의 한국 기독교가 만들어낸 최고의 교회일 수 있지만, 역으로 2007년의 한국 기독교가 안고 있는 한계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교회이기도 하다. 강력한 문화적 포용성과 정교한 교육체계로 ‘믿는 자’들에게는 모범이 될 수 있으나 바야흐로 포스트모던과 다원주의가 대세인 세상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교회는 이중적인 존재다. 지상에 터잡고 있으되 천상의 논리를 따르는 본질적인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이 있다고 믿는 것은 오히려 순진한 일이 아닐까. 두 시간이 넘는 집회를 끝까지 지켜보고 교회문을 나서는 기자의 머릿속에는 이러한 질문이 메아리쳤다. 하루 만에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계절의 바람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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