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기록관리’ 국민훈장 받은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

“우리는 기록의 민족, 옛 지혜 살려 기록문화 선진국 돼야”

  • 이 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입력2007-12-07 10: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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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니다”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 수많은 범죄자가 이 세 마디로 역사의 심판을 피해갔다. 우리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어 답답한 상황을 참 많이도 보아왔다. 문서, 카세트테이프, 비디오테이프 등 이들의 행적을 증명할 무언가가 아쉽기만 했다. 그래서 “기록은 세상을 정화한다”는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의 말이 더욱 가슴에 와 닿는다. 고서 수집에서 시작해 우리 기록문화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유 이사장의 기록 사랑 이야기.
    ‘기록관리’ 국민훈장 받은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
    기록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소소한 일상부터 인생에 획을 긋는 대사까지 성실하게 적어 내려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기록하지 않는 사람보다 정돈된 인생을 살아갈 가능성이 크다. 세월에 묻혀 잊혀갈 과거의 실패와 실수를 기록에 비춰 곱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기록의 힘’이다.

    개인에서 사회로 범위를 확장시켜도 기록의 힘은 유효하다. 실미도 사건, 민청학련 사건, KAL기 폭파 사건…. 오랜 시간이 지나 비로소 공개된 당대 기록물을 통해 다시 씌어진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의미에서 성실한 기록은 우리 사회를 투명하게 하고, 반성하게 한다. 개인도 조직도 사회도 기록이라는 거울에 비친 실패를 교훈 삼아 앞으로 나아간다.

    기록관리에 기여한 공로로 11월1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유영구(榮九·61) 명지학원 이사장은 재단이사장 외에도 세 가지 직책을 더 맡고 있다. 한국국가기록연구원과 한국문화유산신탁의 이사장이자 명지대·LG연암문고를 만든 주인공으로 문고를 총괄한다. 눈치 챘겠지만 그가 맡은 일들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처럼 긴밀하다. 모두 ‘역사’ ‘기록’ ‘문화유산’이라는 단어와 관계가 깊다.

    “우리나라는 김영삼 정부 때까지 기록과 관련된 법조차 마련돼 있지 않았습니다. 국가기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기록의 가치에 눈 돌릴 틈 없이 바쁘게 달려왔기 때문이지요.”

    유 이사장은 우리의 허술한 기록관리 실태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말문을 열었다. 1999년, 기록 전반에 대한 기록관리법이 제정됐다. 그전까지는 사무관리 규정에 기록과 관련된 내용이 일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중요한 기록을 임의로 폐기한다 해도 규제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는 우수한 기록문화를 자랑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조의 일상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촘촘한 구성으로 유명하다. 중국에도 왕조실록은 물론 사가(私家)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조차 없다. 한민족만이 가진 기록문화인 것이다. 기록을 기피하는 풍조가 생겨난 건 다사다난한 근·현대를 겪으면서부터다.

    중요 자료 소각한 조선총독부

    “일제 식민지 때 조선총독부는 부정을 은폐하기 위해 중요한 자료를 마구잡이로 소각했습니다. 이런 관행이 광복 뒤에도 이어졌지요. 그러다 6·25전쟁, 4·19혁명, 5·16군사정변을 겪으면서 ‘기록을 남겨서 득 본 사람 없다’는 잘못된 피해의식이 팽배해졌습니다.”

    짧은 시간에 어지럽혀진 우리의 기록문화를 바로 세우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건 불과 10년 전부터다. 변화와 성장만 좇다 그제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걸까. 기록문화 전반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한 이들이 1998년 6월에 사단법인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을 설립했다.

    연구원이 문을 연 지 10년. 국가기록연구원은 우리나라 기록관리 및 연구의 등뼈로 성장했다. 국가기록연구원이 하는 일은 크게 3가지. 기록에 대한 학문적 연구 기반을 다지고, 국가기록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며, 기록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수확은 기록관리법이 제정돼 국가 규모로 기록을 관리하는 큰 틀이 마련된 것.

    “기록관리법이 제정된 뒤 정부 부처의 기록 실적도 크게 향상됐습니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 대통령의 공사(公私) 기록은 모두 50만건으로 역대 대통령 전체 공사 기록(30만건)보다 훨씬 많습니다. 기록에 대한 교육도 벌이고 있고요.”

    기록 관리 바람은 정부기관뿐 아니라 공·사기업으로도 확대됐다. 과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기록 문서들이 기업이라는 큰 숲을 들여다보는 데 꼭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기록관리’ 국민훈장 받은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

    명지대 ·LG 연암 문고는 한국 관련 해외 고서 약 1만 권을 소장하고 있다.

    ▼ 각 기관에 대한 자문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기관마다 다릅니다. 의뢰기관의 성격에 따라 기록할 사건의 범위, 기록한 내용의 보관 연한, 기록 방법이 모두 달라집니다. 예컨대 문화관광부와 국방부는 기록물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겠죠. 안보상 비밀리에 진행할 사안이 많은 국방부엔 비공개 기록물이 많을 테고, 홍보 활동이 많은 문광부엔 외부에 알려야 할 기록물이 많겠죠. 기록을 공개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출해서 기관에 불이익이 있을 만한 부분은 숨기고, 과시해야 할 부분은 공개하는 것이죠. 국방부의 화기(火器) 구입 기록은 전력 노출을 막기 위해 몇 년 동안 비공개하는 것처럼요.”

    ▼ 기록 전문인력인 기록연구사의 현황은 어떻습니까.

    “기록관리사 자격증이 있고, 전문교육기관이 있습니다. 기록보관소는 ‘아카이브(archive)’, 기록관리사는 ‘아카비스트(archivist)’로, 외국에서는 잘 알려진 용어이지요. 기록관리학은 대학원 과정으로 운영하는데, 역사학과 문헌정보학 석사 이상 인력이 1년간 기록관리 과정을 듣게 됩니다. 기록연구사가 많이 늘어났지만, 선진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합니다. 앞으로 기록의 전자문서화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고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날로 높아지고 있어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명지대에 기록과학대학원을 설립해 전문인력을 배출하는 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또 명지대 기록과학전문대학원과 사단법인 한국국가기록원이 공동으로 설립한 1년 과정의 기록관리교육원도 있지요. 이곳은 행자부 인정 기관으로 수료자에게는 기록관리사 자격증이 주어집니다.”

    기록관리 앞장선 조계종

    ▼ 정부기관도 기록연구사를 두고 있나요.

    “중앙부처에는 기록연구사가 1명씩 배치돼 있습니다. 각 부처에 의무적으로 기록을 관리하는 기록관을 만들도록 규정돼 있지요. 처리과에서 생산한 기록물은 기록관으로 넘어가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기록물은 영구보존 기록으로 남게 되죠. 예전에는 총무과, 서무과 등 다른 업무 담당자들이 기록 관리 또는 업무 기록을 함께 맡았는데, 큰 발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서울시 등 지방부처는 아직 기록관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곧 생길 거라고 봅니다.”

    ▼ 공·사기업 등 다른 기관은 어떤가요.

    “전문인력이나 기록관리관을 따로 두고 기록물을 관리하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기업, 언론기관, 대학, 종교단체 등의 기록관리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버릴 건 버리고, 보존할 건 보존해서 필요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게 지식정보사회의 경쟁력입니다. 최근 기록관리의 중요성을 느낀 기업들이 종종 자문을 청하곤 합니다. 특히 종교단체 중에서는 불교 조계종이 앞서서 기록관리 여건을 바꿨죠. 종교단체에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많은데, 지하 창고에 처박혀 있던 것들을 사료 가치에 따라 분류·정리하고, 향후 관리·보존하는 방법을 알려줬지요. 조계사는 기록연구사를 두고 있습니다.”

    ▼ 기록 선진국을 꼽는다면.

    “기록의 역사는 유럽이 아주 오래됐습니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부터 근대적 기록관리를 해왔지요. 미국은 1940년 이후에야 기록관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지만, 매우 모범적으로 하고 있지요. 미국 국립문서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NASA)에는 자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자료도 많습니다. 6·25 때 평양에 주둔하면서 모은 기록들도 있지요. ‘기록이 곧 정보’라는 생각에 열심히 수집하는 겁니다. 아시아에서는 소련의 기록학을 받아들인 중국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일본은 기록 생산은 성실히 하는 편이지만 국가적인 시스템이 원활하지 않다는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기록에 대한 유 이사장의 관심은 고서 수집 취미에서 비롯됐다. 그는 해외출장을 갈 때마다 지인들에게 선물할 책을 사기 위해 현지 서점을 드나들었다. 애완견 키우는 사람에게는 애완 관련 책을, 다도(茶道)에 관심 있는 이에게는 다도 관련 책을 선물했다. 으레 선물하는 양주, 넥타이 따위보다 관심사와 관련된 외국 책을 선물하는 게 정성을 표현하기에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고서점에서 ‘코리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책을 발견했다.

    “이국땅의 고서점 구석에서 아무렇게나 뒹구는 한국 관련 책을 보니 반가운 한편 안쓰럽더군요. 내가 아니면 이걸 누가 사갈까 싶고…. 그래서 한국 관련 책을 한 권 두 권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명지대·LG연암문고 탄생

    책을 모으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옛 조상부터 가까이는 최남선, 김완섭, 이인재 같은 장서가들을 떠올렸다. 우리 고서를 모으는 다른 장서가와 달리 그는 ‘한국을 다룬 서양 책’으로 테마를 정했다.

    “세계사는 한국사와 별도로 근현대사에서 보편성을 띱니다. 제가 서양 책을 주로 모은 것은 ‘세계 속의 한국’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언어 장벽과 해외에서 구입해야 한다는 번거로운 절차 탓에 서양 책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지요. 그러나 서양이, 다시 말하면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역사적으로 검증하려면 한국에 대한 서양 고전을 반드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세계 각국 언어에 능통한 인력이 필요했고, 국내외 고서점을 이 잡듯 뒤져야 하는데 일손도 턱없이 모자랐다. 책의 문헌적 가치도 아리송했다. 문헌정보, 언어, 역사 전문가들에게 본격적으로 해외 한국학 서적을 수집하고 싶다고 자문한 결과, 일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1995년 역사, 문헌정보학 등 관련 전공 교수들과 머리를 맞댄 끝에 300쪽에 달하는 계획서를 만들어 LG그룹 구본무 회장을 찾아갔다. “명지학원 예산은 학생들을 위해 써야 하니 LG에서 한국 고서 수집을 지원해달라”는 그의 요청을 구 회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명지대·LG연암문고가 탄생했다. 이제 문고를 빛낼 책을 수집하는 일만 남았다.

    수집 목표량을 500~1000권으로 잡았지만 한국학 관련 해외 서적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범위를 좁힐 필요가 있었다. 우선 일본과 중국 서적은 수집 대상에서 제외했다. 중국과 일본 책까지 모으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 발간 시기는 1950년 이전으로 정했다. 1950년 이후에 발간된 한국 관련 책은 대부분 6·25 관련자료라는 판단에서였다.

    아무리 전문가들이라지만 수집 초기에는 좌충우돌 헛물도 많이 켰다. 그도 그럴 것이 해외 한국 관련 서적 수집은 전례가 없었다. 연암문고를 채워가는 일은 어떻게 보면 역사를 새로 쓰는 일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유럽의 고서점을 많이도 뒤지고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고서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쩔쩔맸지요. 영국, 프랑스의 고서점들은 대개 문을 연 지 100년이 넘은, 말 그대로 고서점입니다. 주인들도 대부분 3, 4대째 가업을 이어온, 해당 분야 박사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들과 인연을 맺고 차곡차곡 신뢰를 쌓은 끝에 이제는 좋은 ‘물건’이 있으면 그쪽에서 먼저 연락을 줄 정도가 됐습니다.”

    해외 고서 수집의 관건은 역시 정보다. 그래서 세계 고서상(商)과의 관계 맺기에 무엇보다 큰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각국 언어에 능통한 직원들이 고서점 정보를 수집하고 발품을 팔았다. 연을 맺은 고서점에서는 정기적으로 보유 서적 리스트가 담긴 카탈로그를 보내온다. 세계사와 한국사에 조예가 깊은 고서위원들이 이 리스트 가운데서 필요한 책을 선별하는 게 마지막 과정. 이렇게 13년 동안 모은 책이 1만여 권에 달한다.

    “역시 ‘세계 언어’인 영어로 씌인 책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런데 책을 수집하면서 러시아의 한국학 연구가 왕성하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1917년 소비에트 혁명부터 1970년대까지 조사했더니, 한국 관련 러시아 책이 무려 2019권이나 발간됐더군요. 책을 다 구하기 힘들어 마이크로필름으로 한국 관련 부분만 찍어왔는데, 그 필름이 62통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불어, 독어본이 많고요. 일본은 한일강제합방을 하기 위해 조선의 광물, 식물 현황을 조사한 책을 많이 냈더군요.”

    이완용의 시 ‘兩地一家天下春’

    오랜 기간 세계 고서점을 돌며 진귀한 자료도 다수 확보했다. 그 가운데 유 이사장이 가장 아끼는 것은 ‘함녕전시첩(咸寧殿試帖)’. 한일강제합방 1년 전 덕수궁 함녕전에서 연 이토 히로부미의 송별연에 참가한 이들이 지은 시가 실려 있다. 1990년대 말 일본 경매에 나온 물건을 30만엔을 주고 구입했다. 유 이사장은 “이완용의 글씨뿐 아니라 고종과 데라우치 총독, 그리고 을사 5적의 서명이 모두 들어 있는 귀중한 자료인데, 보관자와 관계자가 그 가치를 몰라봐서 싸게 샀다”고 했다.

    “옛날에는 좌중 가운데 가장 지체 높은 사람이 운을 띄우면 거기에 맞춰 시를 짓는 게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의 송별연에서 고종이 인(人), 신(新), 춘(春)의 운을 띄웠는데, 이 운을 받아 이토를 비롯한 일본인 3명과 이완용이 시를 지었죠. 재미있는 건 일본인 무리와 이완용의 시에 조선 침략에 대한 구상이 드러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완용은 ‘양지일가천하춘(兩地一家天下春)’, 즉 ‘두 나라가 한집안이니 온 세상이 봄이다’라고 지었거든요.

    고종이 띄운 이 3개의 운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옛날 중국 초나라 때 다른 나라에 끌려간 왕비가 저항의 의미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소극적으로 저항한 것이지요.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이 춘(春), 신(新), 인(人)을 넣어 그 소극적인 태도를 꼬집는 시를 지었죠. 고종은 바로 이 시와 같은 운을 띄워, 저항하고 싶지만 소극적인 행동밖에 할 수 없는 심중을 나타낸 겁니다. 이렇듯 과거의 기록은 역사의 훌륭한 증거가 됩니다.”

    보람과 재미를 동시에

    유 이사장은 고서 수집이 “보람과 재미를 동시에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일”이라고 말한다. 해외 고서를 추적하는 일은 단서를 쫓아가는 탐정놀이와 같다. 힘들게 모은 조각난 단서들의 아귀가 딱 맞아떨어질 때의 전율, 그 전율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드는 뿌듯함은 경험하지 않은 이는 모른다고.

    그는 러시아 외교관 짐코프스키가 쓴 ‘1820~21년의 몽골 중국기행’을 수집한 이야기를 예로 들려줬다. 짐코프스키는 이 책에서 ‘중국 북경에서 조선사절 정사인 류후리를 만났다’고 썼다. 그러나 짐코프스키가 만난 류후리가 이조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류후리, 즉 이유후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사절단의 기록물인 연행록을 다 뒤졌지만 이유후라는 이름은 없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중국 발음으로 ‘류후’는 ‘옥호’라는 가정하에 옥호라는 이름을 찾았다. 사절 가운데 이조원의 호가 옥호라는 걸 발견했고, 이조원이 사절이던 시기와 짐코프스키가 책을 쓴 시기가 일치한다는 걸 확인했다. 또 짐코프스키는 책에서 ‘러시아제 칼을 줬다’고 기록했는데, 훗날 이조원도 귀향 중 ‘서양인에게 칼을 받았다’는 내용의 글을 썼다. 류후리가 이조원이라는 사실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고서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많다. 마테오 리치에 이어 중국에 온 가톨릭 선교사 아담 샬의 자서전 ‘역사이야기’(1665년 刊)에는 소현세자와 만난 일이 기록돼 있다. 청나라에 볼모로 붙잡혀간 소현세자가 선교사를 만났고, 그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는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심양일기’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가장 오래된 자료는 1598년 임진왜란 때 일본을 방문한 가톨릭 선교사 루이즈 프로이트가 쓴 ‘감바쿠도노의 죽음’. 이 책에서 프로이트는 임진왜란에 대해 기록하면서 일본의 조선 침략전쟁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문화유산 살리기 시민운동

    유 이사장은 지난 3월 설립된 문화유산국민신탁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가치 있는 문화유산을 개인이나 법인으로부터 매입하거나 기부 받아 보전하는 활동을 벌인다. 문화유산을 신탁한 사람은 상속세 면제 등 세제 혜택을 받으며 이용권은 계속 행사할 수 있다.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문화유산을 시민이 지키자는 운동으로,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과 같은 맥락이다.

    “소유자 개인이 문화유산을 유지·관리하기에는 매우 벅찹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재를 지정문화재로 관리할 수도 없는 일이지요. 그래서 문화유산을 가꾸는 책임을 함께 지기 위한 문화유산국민신탁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겁니다.”

    국민신탁은 향후 활동에 가이드라인이 될 규정을 만드는 1단계 작업을 마쳤다. 현재 몇 개의 문화유산을 기증받거나 위탁받기 위해 소유자나 단체와 협의하고 있다. 곧 ‘제1호 국민문화유산’이 탄생할 전망이다.

    유 이사장이 고서 수집과 기록관리 다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야구.

    “야구를 보면 우리네 인생을 보는 듯해요. 야구가 그렇듯 인생에도 기회와 위기가 3번씩 오지요. 기회를 못 살리면 위기가 오고, 위기를 극복하면 다시 기회가 옵니다.”

    그는 앞으로 정부 기록관리 실태를 철저히 감시할 수 있도록 국가기록연구원이 행정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문화유산신탁 운동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가 힘겹게 쌓아올린 국가기록 문화의 앞날엔 기회만 연속으로 6번 찾아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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