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판문점

  • 김일홍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7-12-07 10: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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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
    그옛날 문산과 개성을 잇던 의주로의 한적한 주막거리 널문리가 이제는 겨레의 한과 바람이 함께 서린 곳이 되어버렸다. 휴전선 약 250km의 유일한 창구로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려는 장이기도 하고 아직도 휴전협정 위반 사항을 풀기 위해 설전을 벌이는,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대좌(對座)의 자리이기도 하다. 서울과 평양을 달리던 철마(鐵馬)는 지금 쉬고 있다. 남쪽에서 올라가다 단절된 역이 문산역이고, 북쪽의 경의선을 타고 내려오다 단절된 역이 바로 청교역이다. 그 사이가 겨우 27.3km, 걸어도 반나절이면 이를 거리를 사반세기가 넘도록 국토와 민족과 역사를 이토록 가슴 아프게 단절해놓을 수 있을까.

    임진강 철교를 지나 한적한 널문리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널문리 다리가 나오는데, 사천(沙川) 위에 놓인 볼품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인상적이다. 취적교(吹笛橋)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다리를 다시 하나 건너면 오른쪽으로 다섯 봉우리가 솟은 오관산이 보인다. 왼쪽으로는 철쭉꽃으로 유명한 진봉산이 있고 그 사이를 지나면 인삼 향이 물씬 풍기는 고도 동개성(東開城)으로 불리는 청교역에 이른다.

    예부터 개성상인들이 장삿길 떠날 때 이곳에서 가족과 기약 없는 이별에 울고, 돌아올 때 이곳에서 아낙과 다시 만나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이산과 상봉의 현장이다. 그래서 이곳을 옛 사람들은 눈물들(淚原)이라고 불렀다. 아득한 고려 때부터 약초가 자라고 소쩍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평화의 마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살아온 우리 겨레의 삶터, 이제 널문리 콩밭은 전세계에 노출된 분단의 전시장이 되어버렸다.

    1970년 3월. 아직 겨울의 냉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초봄, 늦추위 속에서도 봄은 찾아든다. 잿빛 하늘엔 한기가 서려 때 아닌 눈이 내릴 것만 같다. 나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빈 사무실로 돌아와 햇볕이 스며드는 창가를 등받이로 두 발을 책상위에 걸치고 오수를 즐기려는데 양지(경비) 전화가 요란스레 울린다.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전화통지문’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볼펜을 잡고 메모지에 전화통지문을 쓸 자세를 취했다.

    수신 : 중앙정보부 부장

    참조 : S 국장

    제목 : 판문점 군사정전회담

    1970년 3월13일 오전 10시48분 경기도 연천지역 비무장지대 안에 침투해 들어온 북한군 무장공비 세 명과 한국군 수색대의 교전 끝에 공비 두 명을 사살하고 기관단총 두 정, 배낭 석 점을 노획, 한 명은 북상 도주한 사건이었다. 나는 전화통지문 내용을 타자 치고 나서 결재 고무인을 찍고 결재판에 넣어 팀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판문점에서 열리는 군사정전회담은 유엔군과 북한이 맺은 정전협정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 이들의 놀이에서 빠졌다. 정전협상 당시 한국은 ‘통일할 때까지 끝장을 보자’며 협정 체결을 반대했다. 그러나 전쟁의 불리함을 잘 알고 있던 북한은 교묘하게 ‘평화’를 앞세워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의 끈질긴 전략전술에 말려들었고, 2년 17일간의 협상 끝에 판문점이 탄생했다. 결국 유엔군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에는 이기고 협상에는 졌다”는 말을 남겨야 했다.

    당시 나는 판문점에 출입하는 중앙정보부 보안담당 요원이었다. 판문점에 출입하는 각 신문사와 방송사 기자, 외신기자들의 신변안전과 보안업무, 북한 기자들로부터 첩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띠고 판문점에 출입하고 있었다.

    판문점은 지구상에 하나밖에 없는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다. 적과 적이 만나는 장소는 전쟁터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판문점에는 스릴도 있고, 폭력도 있다. 남과 북 기자들이 서로 거짓 미소를 짓는가 하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공작도 심심찮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어느 날 내가 회담장 창틀에 매달려 험악한 분위기의 회담장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는 북한 기자가 취재수첩에 뭔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슬그머니 수첩을 훔쳐보았더니, 깨알같은 글씨로 ‘우’자와 ‘적’자로 구분해서 양측의 발언을 적고 있었다. 나는 북한 기자의 팔꿈치를 툭 쳤다.

    “‘우’는 뭐고, ‘적’은 뭐야?”

    “동무는 판문점에 들락거리면서 그것도 몰라?”

    북한 기자가 실눈을 뜨며 내게 면박을 준다.

    “그래 모른다.”

    나는 빈정거렸다.

    “‘우’는 주체의 조국이고, ‘적’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남반부지.”

    “기자 동무,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적인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적이지.”

    한국측 기자들은 양측 발언을 ‘남’과 ‘북’으로 적는다. ‘남’과 ‘북’이 사실이라면 ‘우’와 ‘적’은 현실이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남북 기자들의 취재수첩에서부터 이렇듯 판이하게 기록되는데, 남북회담에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판문점 회담시에는 항시 군용 ‘쌕 버스’가 나온다. 판문점 취재단인 각 신문사, 방송사, 외신 기자들이 출발지인 중앙청 내 문공부 뜰 앞 느티나무 밑으로 삼삼오오 모여 판문점행 쌕 버스를 기다리며 잡담을 하곤 한다. 판문점에는 민간인이나 민간 차량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팀장과 나는 두 대의 버스에 각각 나눠 타고 출입기자들에게 판문점 내에서의 보안사항 및 북한 기자들과 접촉할 때 주의할 점과 취득한 첩보는 보고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출입기자 명단에 기재된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고 숫자가 맞으면 쌕 버스는 회담장으로 출발한다. 관광객에게는 신기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는 판문점이지만, 이 코스를 자주 다니는 기자들은 별 관심없이 비스듬히 누워 모자란 잠을 청한다.

    덜컹거리는 차의 움직임 소리가 요란하게 반복되면 임진강 철교에 들어선 것이다. 판문점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강 한복판에 앙상하게 남은 교각이 서 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폭파된 철교의 잔해로 쓰라린 과거를 지닌 교각이다. 산비둘기들이 교각 틈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그 밑으로 흙탕물이 꽤나 거세게 흐른다.

    이곳이야말로 휴전 직전 막바지 전투에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하에 피를 흘린 곳이다. 지금도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깔려있다. 주인 모를 고분과 남북으로 달리던 철마가 산허리에 쓰러져 있고, 탄흔에 녹슨 어느 병사의 철모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벌건 철모 사이로 피어난 보라색 바이올렛은 병사의 못다 피운 젊은 꿈을 아쉬워하듯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웃음꽃을 피운다.

    두 번째 철문을 통과하면 남방한계선인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차창 프레임 속에 대성동의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차가 판문점 쪽으로 돌아서면 멀리 북쪽 기정동의 인공기가 철탑에 걸려 펄럭이는 것이 보인다. 판문점에 들어가기 직전 미군 에드번스 캠프에 들러 커피를 한잔하며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간략한 회담 브리핑을 듣고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다.

    버스가 시간에 맞춰 군사정전회담장 앞뜰에 도착하면, 북한 기자들은 벌써 뜰에 나와 늑대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낯익은 기자를 보면 서로 반갑다고 악수를 하거나 심지어 포옹하는 이들도 있다. 판문점 뜰에는 오늘 회담의 주요 내용인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증거로 유엔사에서 마련한 전시물이 놓여 있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무장공비의 사살 모습 사진이며 공비들이 소지했던 기관단총, 카메라, 망원렌즈, 배낭, 농구화, 담배, 찐쌀, 미숫가루, 약품 등등.

    회의장 테이블 위에는 철책이 아니라 마이크 선을 분단선 삼아 늘어놓았다. 마이크 선을 가운데 두고 양쪽 대표들은 무표정하게 대좌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공의 선을 넘지 않는다. 분노와 흥분이 밀려오면 목청을 높여 욕을 하거나 일어서서 삿대질을 한다. 이런 행동은 거의 북한 몫이다. 그러나 회담장 안에서 아무리 격앙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도 남북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눈다. 서로 지껄이다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도 있다. 허점을 이용해 상대방의 약을 올리는 행동은 대개 한국측 기자들의 몫이다.

    “여보, 당신 가슴에 달고 있는 게 뭐요?”

    “보믄 모르간.”

    “당신들이야 알겠지만 우리야 알 수 있나?”

    “그 뭐, 알믄서 와 그래.”

    “글쎄, 그게 단군 할아버지면 몰라도 왜 그렇게 살이 쪘어!”

    “똑똑히 보라무나, 보면서도 몰라?”

    “그래 똑똑히 보자, 네 할아버지냐?”

    “이거 와이래! 도발적 언동 삼가라우.”

    “말하기 거북해? 이름도 못 대는 주제에 그건 뭘 하러 달고 다녀?”

    “이거이 눈깔에 뵈는 게 없는 기가?”

    앉아 있던 북한 기자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고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남한 기자는 모른 체하며 한술 더 떠 다그친다. 여기서 물러서면 북한 기자의 주먹 공세에 밀리는 것이 되므로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그게 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던데, 너희들 계급 표시냐?”

    “그거야 뭐 취미대로 다는 거지, 이상할 것 없수다.”

    “붕어 낚시라면 보통강 쪽이 물이 흐르지 않아서 좋을 텐데.”

    “김 기자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고향이 평양이라고 했잖아.”

    “참 그렇티, 보통강은 물이 더러워 고기를 잡아도 먹지를 못하지.”

    “낚는 재미지, 낚시꾼집 강아지도 붕어는 먹지 않는다던데.”

    “아니야, 붕어는 지져 먹으면 조티. 다음 회담 때 좀 큰 걸루 갖다주면 안 되겠나?”

    “아니, 북한은 강철공업이 남한보다 훨씬 발달했다더니 낚싯바늘이 없어?”

    “낚싯바늘 만드는 공장이야 어디 있나.”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낚싯바늘을 구해서 고길 잡았어?”

    “강철 철사줄을 불에 달쿼서 줄칼로 쓸어 만들었디, 밤새 만든 낚싯바늘을 가물치, 메기에 떼키면 하늘이 노래지지. 그건 낚시꾼이 아니면 아무리 말해도 모를 거야.”

    이런 일은 남북 기자들 간에 가끔 있는 일이었다. 물론 흔한 건 아니었지만.

    한 장의 사진, 그리고 편지

    1971년 11월19일, 예비회담 9차회의 때부터 회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끔 창틀 너머 중립국 감독관 회의실을 들여다보면 한적 김연주 수석대표와 북적 김태희 단장 간에 성명서만 읽고 있을 뿐 토의내용은 거의 없었다. 회담장 창틀 바로 옆엔 정희경 한적 대표와 서성철 북적 대표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은행나무도 마주 봐야 열매가 열린다지 않는가. 오랫동안 마주 앉아 쳐다보고 있노라니 정이 들었는지, 이들은 실실 웃으며 농담도 하고 사랑의 편지를 쓰는지 메모지에 글을 써서 서로 교환하곤 했다. 어느 날은 한적 정희경 대표가 북적 서성철 대표의 초상화를 그렸다. 연필로 스케치를 하는데 안경 밑에 뾰쪽한 코며 곱슬머리를 제법 잘 그려서 서성철에게 넘긴다. 서성철이 그림을 보고 희죽거리며 웃는 모습이, 적과 적으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초등학교 1학년 어린아이들의 장난기같이 순진하게 보였다.

    또 다른 한편, 회담장 안 양측 대표 옆자리에 앉은 두 파트너 간에 연신 메모지가 오가는 것이 보였다. 한적 정홍진 대표와 북적 김덕현 대표, 이들은 메모 게임을 하고 있다. 사실 회담의 핵심인물은 바로 이들이다. 김연주나 김태희는 상좌에 앉아 있을 뿐 얼굴마담에 불과하다. 두 대표는 작달막한 키에 예리한 눈매며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말이 없다. 메모지가 오면 즉시 답을 써서 비행기를 만들어 날리는 일을 수없이 반복했다. 어떤 때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서로 웃는 모습도 보였다.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이들이 무슨 장난을 하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판문점 회담이 있는 날이면 나는 최수만을 찾았고 최수만은 나를 찾았다. 우리는 그동안 가정사를 이야기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서로 비슷한 처지 같기도 했다. 나는 준비해 간 낚싯바늘 한 봉지를 꺼내 최수만에게 건네주었다.

    “거 어려운거 구해주는구나야! 고맙다!”

    최수만은 정말 감사한 듯 고마워하며 자기도 선물을 내게 준다고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금강산 담배 한 갑이었다. 낚싯바늘에 대한 보답일까. 의미 있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이내 가버린다. 손의 촉감으로는 담배는 담배지만 갑 속에 무엇인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혼자만의 비밀인 양 누가 볼세라 담뱃갑을 꽉 움켜쥐고 멀리 가버린 최수만의 뒷모습을 보며 자유의집 화장실로 들어섰다.

    담뱃갑 속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퇴색한 한 장의 사진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꿈에도 그리던 어머니의 젊은 날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릴 때의 기억으로도 어머니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최수만이 어떻게 사진을 구했을까. 의심이 피어올랐다.

    어머니가 쓴 편지의 내용은 ‘미국 놈의 비행기 폭격에 죽은 줄만 알았는데 살아 있다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는 서두로 시작했다. 네 사진을 보니 어릴 때의 모습과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수령님의 은덕으로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만났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덧붙여 ‘이번 수령님께서 북남 이산가족 찾기에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너를 만나게 되었다’고 끝을 맺었다.

    편지 글귀 사이에서 어머니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대동강변에서 옷을 물에 흘려보내고 나와 누나는 벌거숭이가 되어 집으로 왔다. 어머니는 발가벗고 들어오는 누나를 부지깽이로 호되게 때렸다. “다 큰 년이 발가벗고 다닌다”는 꾸지람과 함께. 누나는 울었고, 나는 곁눈질을 하며 실실 웃고만 있었다.

    이문동 사무실에서 나에 대한 최수만의 공작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팀장은 내 어머니가 보냈다는 편지와 퇴색한 사진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일단 보고서를 작성해 북한의 공작 내용을 상부에 올렸다. 그리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관계부서와 협의했다. 결론은 두고 보자는 것이었다. 남북회담이라는 큰 물결이 흐르는데 이 같은 일은 하잘것없는 것이다. 회담에 지장을 줄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었다. 민족을 위해서나 후대를 위해서나.

    1971년 11월20일, 양측의 실세인 정홍진과 김덕현이 예비회담과는 별도로 만나 실무자 간에 비밀접촉이 이뤄졌다. 9차 예비회담 당시 남측의 정홍진 중앙정보부 협의조정국장이 노동당 중앙위 정치위 직속 책임지도원인 김덕현에게 쪽지를 던져 보낸 제안을 북측이 받아들여 성사된 것이다. 이들은 상부의 명에 따라 비밀접촉을 했다. 정보부 내에서도 몇 명을 빼고는 몰랐던 사실이다. 그러니 남북 적십자 실무자들은 몰랐을 수밖에 없었다.

    지지부진한 공개회담 대신 실무자가 속마음을 내놓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판을 벌이자고 남측은 제안했다. 이들은 남북 간의 정치적인 대화보다 인간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다. 김덕현은 자기 누이가 바이올린 연주자라며 클래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재기가 넘치는 정홍진 국장은 종교와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했다. 이데올로기만 아니었다면 이들은 멋진 벗이 되었을 것이다.

    7·4 남북공동성명

    먼저 정홍진 국장이 1972년 3월28일부터 31일까지 평양을 다녀왔다. 죽을 각오를 한 출장길이었다. 그 다음에는 김덕현 노동당 책임지도원이 4월19일부터 21일까지 서울을 다녀갔다. 역시 죽을 각오를 하고 왔을 것이다.

    이 무렵 어느 날, 나는 동료들과 대포 한잔을 하러 광화문 근처로 나간 일이 있었다. 유명한 막걸리 가게였는데, 술집 안에 초가집을 지어놓고 그 속에서 막걸리 동이를 갖다놓아 쪽박으로 술을 퍼마시는 집이었다. 마치 농촌 풍경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분위기였다.

    동료 몇 명과 술집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데, 손님이 꽉 차 소음이 요란했다. 앉을 자리가 없어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기웃댔다. 그런데 한 초가집에서 낯익은 사람을 발견했다. ‘누구였더라? 어디선가 많이 본 사람인데….’ 기억을 더듬었다. ‘아차!’ 나는 그곳에서 북한의 실세 김덕현을 본 것이다.

    어떻게 서울 한복판에 앉아 있는 것일까, 간첩으로 남파되어 내려왔나, 김덕현이 혼자 서울에 들어올 수 있을까. 나는 5~6명의 동행자를 훑어보았다. 그런데 정홍진 국장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면 그렇지, 정홍진 국장이 나에게 눈짓으로 사인을 보낸다. 빨리 나가라는 뜻이다. 나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동료들을 몰고 밖으로 나왔다.

    이들이 서울과 평양을 사전답사한 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박성철 부수상은 서울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서울과 평양에서 국가원수를 만나는 장면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1971년 11월20일부터 이듬해 7월1일까지 8개월간 판문점에서 24차례의 비밀접촉을 가진 끝에,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이라는 조국통일 3대 원칙을 골간으로 하는 남북통일의 헌장 7·4 공동성명이 탄생했다. 이후락 부장은 이문동 정보부 강당에서, 김영주 부장은 평양에서 각기 같은 내용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이 발표된 다음날 문공부가 주관한 각 부처 공보관 회의에서 북괴를 북한으로 호칭하기로 결정했고, 이어서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가 가설됐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금딱지 오메가 시계

    다시 적십자회담 얘기로 돌아가보자. 16차 예비회담이 열린 1972년 1월28일에는 남쪽 기자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다. 80명이나 되는 북한 보도일꾼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금딱지 오메가 시계를 차고 판문점에 나타난 것이다. 시골 중학생이 처음 손목에 시계를 차고 연신 손을 들어 보이듯, 북한 보도일꾼들도 차고 나온 시계를 좀 봐달라는 눈치여서 남쪽의 기자들이 말을 걸었다.

    “당신들 무슨 일 있소? 갑자기 번쩍거리는 시계는 뭐요?”

    “이거, 하사품이요.”

    “하사품이라니? 누가 줬는데?”

    “하사품이면 하사품인 줄 알면 됐지, 꼬치꼬치 묻기는!”

    “당신네 사회는 오메가 시계 배급 주는 임금님이 계신가?”

    “동무는 내가 작년부터 차고 있는 걸 못 봤구만.”

    “배급받았다는 말은 듣기 거북한가 보지, 금방 하사품이라더니!”

    “왜? 배 아프오?”

    “당신들의 손목에 오메가 시계가 걸렸으니 본회담 준비가 잘될 것 같군 그래.”

    갓 쓰고 자전거 타던 개화 초기의 꼴불견을 판문점에서 보는 것 같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최수만도 금딱지 오메가 시계를 차고 내게 다가왔다.

    “김 기자, 이런 시계 남한에도 있나?”

    “얼마든지 있지. 하나 갖다줘?”

    “김 기자, 답장 안 쓸 거야?”

    “무슨 답장?”

    “어머니와 누나가 김 기자 답장을 얼마나 기다리는 줄 알아?”

    어머니의 편지로 인해 내 가슴에는 최수만에 대한 불쾌한 감정이 응어리지고 있었다. 이들은 내게 낚시질을 하고 있다. 낚싯밥을 던져놓고 입질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어머니가 아니라도 좋다, 누나가 아니라도 좋다, 이들이 거짓으로 꾸민 조작이라도 좋다, 어머니와 누나가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좋다. 나는 메모지에 어머니한테 보내는 편지를 즉석에서 썼다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의 숨결이 내 귀 밑에서 들려오는 듯합니다. 잔주름으로 꽉찬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정했던 어머니의 모습 같지가 않으니 웬일입니까? 자식은 통곡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보고 싶습니다.’

    판문점
    편지를 접고 또 접어 최수만에게 주었다. 나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응어리가 터져 분화구로 치솟아오름을 느꼈다. 마음이 후련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김 기자, 고향에 가서 어머니하고 잘 살아보지 않겠어? 간단해. 나하고 슬쩍 판문각으로 넘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우리는 문을 열어놓고 있어. 그러면 동무는 최초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영웅이 되는 거야.”

    이들은 나를 북으로 끌고 가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 최수만이 나를 낚싯줄에 꿰어 당기고 있었다.

    최수만이 서울 B고보에 다녔다는 이야기를 근거로 인적사항을 수사국에 의뢰한 것이 회신되어 왔다. 학적부에 기록된 최수만의 주소는 서울 왕십리로 돼 있었다. 주소를 연결해서 친척을 수배했다. 어렵게 최수만의 삼촌 최봉오를 찾아냈다. 어느 주물공장의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촌들도 있었다. 최수만의 삼촌을 통해 광복 전후 최수만의 집안을 알아보니 그의 가족은 6·25전쟁 전에 월북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왕십리에서 알아주는 한의사였다고 했다. 아버지 최봉기는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공산주의 청년운동을 하며 할아버지 속을 꽤나 썩였고 할아버지는 그 때문에 일찍 세상을 떴다며, 삼촌은 자신의 형을 원망했다. 광복 후에는 남로당원으로 서울시 당위원장이던 이승엽과 함께 활동했다고 한다. 광복 수년 후 최수만의 가족은 월북했고 전쟁 이후로는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삼촌도 형 때문에 연좌제의 그물에 걸려 지금까지 고생하고 있었다. 삼촌은 어렴풋이 최수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체격은 작았지만 다부지고 머리가 영리했다”는 것이었다.

    요해 해설요원

    예비회담이 시작될 무렵부터 한국 적십자사측은 꽤나 애를 먹었다. 회담이 두서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한적은 “가장 절박한 사업부터 가장 현실적인 사업을 순차에 따라 해결해 나가자”고 북측에 호소했다. 그러나 북측은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과 친척의 주소 및 생사 확인, 통보는 적십자사가 굳이 개입할 필요 없이 당사자들이 상대측 지역에 가서 자유롭게 다니면서 찾자”고 주장했다. 가족과 친척을 만나는데 무슨 복잡한 수속이나 절차가 필요하냐는 억지였다.

    북측의 한결 같은 주장은 쌍방이 상대측 지역의 리(里) 또는 동(洞) 단위로 1명씩 소위 ‘적십자 요해 해설요원(了解 解說要員)’을 파견해,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상태를 요해하며 해설과 불신임을 제거하자는 내용이었다. 상호 신뢰할 만한 요원을 파견하자는 주장이었다. 내무부에 행정적으로 기록된 리와 동의 숫자만 3만5997곳이었다. 다시 말해 북한의 요해 해설요원 3만6000명을 한국에 내려 보내겠다는 말이다. 적십자 정신에 어긋남은 물론이거니와 이렇듯 엄청난 숫자의 간첩을 남파하겠다는 북한의 속셈이 보이는 듯했다.

    북한 기자들은 남측 기자들에게 그들이 주장하는 요해 해설요원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최수만도 나에게 마구잡이로 요해 해설요원을 한국에 내려 보내야 한다고 열을 냈다. 북한 기자들은 당에서 요해 해설요원에 대한 교육을 받고 나온 것 같았다.

    “김 기자, 왜 남조선이 적십자사 요해 해설요원 파견을 반대하는가?”

    “그런데 말이야 최 동무, 요해 해설요원이란 뭐 하는 자들이야?”

    “이산가족과 친척을 찾아주는 동무를 말하는 거지.”

    “그거야 남북 적십자사가 주선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리고 흩어진 가족의 자유의사에 따라 재결합하면 되는 것이지, 요해 해설요원은 또 뭐야?”

    “김 동무는 요해 해설요원에 대해 이해를 잘 못하는구만.”

    “왜 못해, 요해 해설요원은 결국 간첩을 내려 보내겠다는 거 아니야?”

    “김 기자는 항상 반동적인 언동을 하느만, 혼 좀 나야겠는데?”

    “허튼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서 3만6000명이나 되는 간첩을 한국으로 내려 보내 공산혁명을 하겠다는 거야?”

    최수만은 논쟁을 그만하자고 자르더니, 슬그머니 누나가 보낸 편지라며 봉투를 하나 건넨다.

    “김 동무 잘 생각하라우, 김 동무에게는 지금이 영웅이 될 기회야!”

    꼭꼭 눌러 꽤나 정성스럽게 쓴 누나의 편지였다. 왜 너는 그렇게 무심하고 성의가 없느냐며 나를 나무랐다. 얼마나 고생이 심하면 편지를 쓸 기회도 없이 날림으로 갈겨 써 보냈느냐고 힐난했다. 그리고 당장 평양에 와서 어머니와 같이 살자고 했다.

    나는 싸늘한 피가 솟구침을 느꼈다. 정말 누나가 보낸 편지일까.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래, 살아 있어만 주라, 누나.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최 동무, 하나 묻자. 정말 내 어머니가 맞아?”

    “무슨 말이야? 동무는 말을 못 믿는 병이 걸렸군.”

    “병이야 동무가 걸렸지. 이건 내가 생각하는 어머니, 누나가 아니야. 너희들이 조작한 인물이야.”

    “김 기자는 암만 해두 혼 좀 나야겠군, 부르주아 물이 들어두 무섭게 들었어.”

    나는 흥분했고, 최수만은 인상을 쓰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서로 위협의 눈빛이 작렬했다.

    “그런데 말이야, 최 동무 고향이 서울이더군, 광복 후 월북했고.”

    “월북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곳으로 간 것이지.”

    “내가 알기로는 월북한 사람들은 다 숙청당했다고 하던데?”

    “그거야 당성이 부족해서 그렇티.”

    “최 동무 삼촌 최봉오라고 있지? 내가 사진을 가지고 왔지. 자 이거.”

    최수만의 얼굴은 최봉오라는 말에 깜짝 놀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변했다. 최수만은 아무 말 없이 사진을 받았다. 그리고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본회담 의제 합의

    1972년 6월16일 20차 예비회담에서 본회담의 의제가 합의됐다. 평양과 서울에서 본회담을 하기로 못을 박은 것이다. 1차 본회담을 평양에서 8월30일 오전 10시에, 2차 본회담을 서울에서 9월13일 오전 10시에 열기로 최종합의를 보았다. 남북 기자들은 감격과 흥분 속에 서로 포옹했다. 남한 기자들과 북한 보도일꾼들은 서로 상대방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겠다고 약속(?)했다.

    “최 동무 서울에 오면 우리 집에 와서 하루 지내지.”

    “김 기자도 평양에 오면 우리 집에 오라구.”

    우리는 웃었다. 나와 최수만은 기쁨을 포옹으로 표현했다.

    “김 기자, 부탁하나 하자우.”

    “뭔데? 낚싯바늘 또 뜯겼어?”

    “그게 아니구, 우리 아버지 생사확인을 좀 해다우.”

    “최 동무 아버지는 북에 있지 않아?”

    “지금 남반부에서 감옥살이하구 있디.”

    “무슨 말이야?”

    최수만이 아버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조국광복전쟁’ 당시 최수만의 아버지는 인민군 부사단장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전라도까지 내려갔다가 낙동강 전투에 참전하려는 순간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인민군의 전선이 반으로 끊겼다. 최수만의 아버지는 퇴로가 차단되자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지리산에서 벌인 투쟁활동이 무전교신으로 당에 보고돼 알려진 사실이라고 최수만은 믿고 있었다.

    그 후 지리산 공비는 군경 합동 작전으로 궤멸됐다. 많은 공비가 죽거나 포로로 잡혀 재판을 받았고, 자유인과 비자유인으로 구별됐다. 그러나 죽어도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겠다는 미전향 장기수는 어쩔 수 없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사반세기가 흐른 시점에도 아직 자신들의 신념을 버리지 않은 장기수들이 있었다. 최수만은 아버지가 미전향 장기수로 남한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리산 피아골에 묻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1972년 8월17일, 남북 적십자회담 본회담의 대표단 명단이 발표됐다. 남측에서는 이범석 수석대표와 김연주 교체 수석대표를 필두로 김달술·박선규·정주년(대변인)·정희경·서영훈 대표가, 북측에서는 김태희 단장과 주창준 부단장을 필두로 권상호·한시혁·조명일(대변인)·이청일·김수철 대표가 명단에 올랐다. 한국측의 정홍진과 북한측의 김덕현은 적십자 본회담 대표단에서는 빠져 있었다.

    테러

    1972년 8월11일 25차 예비회담을 끝으로 본회담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장장 스물다섯 차례, 10개월 20일의 긴 시간을 보냈다. 평양과 서울에서 본회담 개최를 위한 문서교환이 끝나자 한 발짝 한 발짝 이산가족 상봉의 희망이 무르익어 가는 듯했다.

    서울과 평양의 본회담 성사를 위해 양측이 자축파티를 벌였다. 그동안 마음 졸이던 시간을 다 잊고 마음껏 먹고 마시며 회포를 풀어보자는 의미였다. 중립국 회의장 안에는 그동안 수고한 대표들과 수행원들이 함께하는 파티상이 차려졌다. 김연주 대표와 김태희 단장이 손을 마주 잡고 술잔을 높이 들었다. 남측 대표가 건배하면 북측 단장도 질세라 건배하는 경쟁이 이어졌다. 북한측에서 가져온 독사술이 짓궂게도 정희경 대표 테이블 앞에 놓이자, 정 대표가 눈살을 찌푸리며 치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회담 뒷전에서 고생한 남북 행사요원들은 긴장이 풀렸는지 서로 술을 권하며 잘도 마셨다.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이들이지만 술 한잔 들어가니 너나들이로 어깨를 겯는가 하면 껴안고 춤도 춘다. 그 옛날 흘러간 노래자락도 흘러나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술친구가 되었다.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양측은 멋진 연극을 했다.

    판문점 뜰에서도 양측 기자들을 위한 파티가 벌어졌다. 8월의 따가운 태양 아래 먹는 데 익숙한 북한 기자들이 얼음 속에 잠긴 남측의 맥주를 연신 꺼내 마셨다. 북측은 맥주를 얼음에 넣는 경우가 없는 모양이어서, 미지근한 용성 맥주는 인기가 없었다. 북한의 한 기자가 테이블 위에 놓인 건포도를 보고 이상하다는 듯 뭐냐고 물었다. 건포도지 뭐냐고 남한 기자가 말해도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다시 포도 말린 거라고 말해줘도 머리를 갸우뚱거린다.

    나는 술이 약간 올랐다. 그동안 가깝게 지내던 보도일꾼들과 술을 주거니받거니 하는데, 누군가 나를 응시하는 느낌이 들었다. 앞 테이블에 최수만이 나를 주시하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나는 최수만을 불렀다. 그가 나에게 다가오면서 다정스럽게 손을 잡는다.

    “최 동무! 정말 어머니는 살아 있는 거야?”

    “살아 있디, 지금 열성당원으로 협동농장에서 일하고 있디.”

    “뭐! 열성당원?”

    어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고향의 교회당에 종탑을 세울 때는 헌금 모금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판 싸움을 벌였다. 곳간에 꽉 들어찬 볏섬이 휑하니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볏섬을 몽땅 팔아 종탑 헌금을 한 것이다. 구두쇠였던 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교회에 대한 고집은 아버지도 꺾지 못했다. 종탑이 세워지고 종소리가 울려 퍼질 때 어머니는 종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런데 열성당원이라니….

    “누나는?”

    “황해도 봉산으로 시집을 가서 아들땋 낳고 잘 살고 있디.”

    그래, 누나는 긴 세월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으니 그 사회의 빨간 물이 들었을 터였다.

    “내가 부탁한 거 어떻게 됐어?”

    “최 동무 아버지가 옥에 들어가 있다는 걸 뭘로 증명하나?”

    “그거야 아는 수가 다 있지.”

    “찾아봐도 동무 아버지 이름은 없어.”

    “가만히 보니까 김 기자가 나를 기만하고 있어.”

    “기만이라니? 사실이라니까.”

    최수만의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술 기운이었을까. 최수만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누군가 나의 팔을 슬쩍 끼고 파티 테이블에서 격리시켰다. 주위엔 술을 마시느라, 잡담을 하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어깨동무하듯 보도일꾼 사이에 끼어 질질 끌려갔다. 반항하는 자세로 힘을 썼지만 모자랐다. 어느새 인적이 없는 회담장 막사 뒤편까지 끌려갔다. 도발적인 보도일꾼들이 약속이나 한 듯 나를 에워쌌다. 나는 이미 안전지대를 벗어나 있었다. 술이 확 깨면서 심각한 위협이 온몸으로 감지됐다. 낯익은 보도일꾼들이 내 등 뒤에서 손을 비틀며 꼼짝 못하게 팔짱을 꼈다. 누군가 배를 강타했다. “욱”하는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군가 내 손을 꺾었다. 그때 나는 린치를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무! 왜 까불어! 죽어볼래? 하라는 대로 할 것이지!”

    “네 에미와 누이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

    “너, 정보부에서 우리 애국동지를 얼마나 죽였어?”

    “평양으로 가갔어! 와 대답이 없어? 이 반동 간나이 새끼야!”

    무게 있는 물체가 내 발을 짓이겼다. 발목이 끊어지는 아픔이 왔다. 멀리 파티장에서 양측 대표들이 술잔을 높이 들며 건배하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1000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하루 속히 회담을 성사시켜야 한다고 떠드는 소리가 내 귓전에 울리고 있었다.

    누군가 내 배를 발길로 힘차게 걷어찼다. “욱” 하며 허리를 굽히자 위에서 등을 내려쳤다. 그리고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수없는 발길질이 내 얼굴 앞에서 피스톤처럼 오갔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조직적인 린치가 계속됐다. 나는 가물거리는 의식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비행기 편대에서 내리꽂는 폭음이 아련히 들려왔다. 무연탄가루가 하늘에서 눈이 내리듯 마구 쏟아져 내렸다. 멀리서 뛰어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구원병인 남측 기자들이 몰려온 것이다. 정신이 아물아물했다.

    이 사건은 보안을 요하는 일이었다. 판문점에서 남한 기자가 북한 보도일꾼으로부터 린치를 당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다면 예정된 평양-서울 본회담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북한측이 회담을 깨기 위해 벌인 일인지도 몰랐다. 그날 이후 나는 최수만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왠지 모를 콤플렉스가 가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항상 내 몸을 얽어매고 있던 올가미로부터 자유로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분단의 벽은 뚫렸다. 평양으로 가는 민족의 대행진, 서울 거리에 늘어선 시민들은 태극 깃발을 흔들었다. 이산가족 상봉의 결실을 보고 돌아오라는 성원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1972년 8월29일 오전 10시30분, 한적 대표단은 북적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판문각을 떠났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넘는 순간 여기가 북한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격해졌다. 그동안 너무나 철저하게 굳어버린 사상, 변해버린 사회제도, 한마디 낱말의 의미마저 달리 해석되고 감정의 표백(表白)마저 가늠할 수 없는 그 곳, 비록 이질화되었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고 누나가 살고 있는 고향이었다.

    길가에는 사루비아 꽃이 피어 있었다. 들녘엔 새빨간 바탕에 흰 글씨로 “미제의 각을 뜨자” “사회주의는 쌀이다” “김일성 동지 만세” “전국을 요새화 하자” “전투장” 같은 선전 표어판이 서 있었다. 이것이 바로 북한이로구나. 안내원에게 “사회주의는 쌀이다”라는 구호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사회주의를 했기 때문에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마디로 북한 전역이 병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분단의 벽을 뚫고

    분계선을 조금 지나 개성쯤 왔을 때 검정색 바지에 흰색 셔츠를 입고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두른 소년단 대열을 만났다. 앞쪽을 바라보고 두 팔을 높이 휘두르며 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인 것 같았다. 야영훈련을 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나도 동평양 인민학교 3학년 때 이들과 같이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을 부르며 야영훈련을 한 생각이 났다.

    황주 다리를 지나니 사과의 명산지로 유명한 황주가 나타났다. 누나가 살고 있다는 바로 그 황주였다. 누나는 어느 곳에 살고 있을까. 나는 방향 없이 머리를 기웃거리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곳곳의 과수나무에 사과가 빨갛게 익어 소담스러웠다. 판문점 파티 때 황주사과라고 자랑하던 보도일꾼이 생각났다.

    비가 계속 내렸다. 평양 시내로 들어서니 비닐 제품의 레인코트를 걸쳐 입고 지나는 사람이 눈에 많이 띄었다. 평양 시내 거리는 자동차가 거의 없지만 교통안전원이 서서 비를 맞으며 간혹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신호를 한다. 다분히 보여주기 위한 제스처라는 인상이 짙었다. 평양의 청년거리 버스정류장을 지나갈 때 처음으로 부인 세 사람이 우리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 외엔 남한 적십자사 대표가 오는지 가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동평양 문수리 초대소에 도착해 안내원의 안내를 따라 보도진 숙소인 3호동에 내렸다. 도심은 대동강 북쪽이고, 숙소는 강 남쪽에 위치한 2층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초대소에서 멀리 바라보니 대동강을 끼고 높다랗게 솟은 모란봉 절벽 위에 유서 깊은 부벽루며 능라도, 수양버들이 춤을 추는 정경이 한결 돋보인다. 어릴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같이 거닐던 곳들이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대동강회관에서 1차 본회담이 끝난 후 혁명가극 ‘피바다’를 관람하고 북한측에서 베푸는 옥류관 만찬회에 참석했다. 옥류관에 가는 도중 평양의 밤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다. 평양역에는 백열 장식등이 지붕과 처마를 따라 켜져 있었고 커다란 벽시계가 걸려 있었다. 어릴 적 본 평양역 그대로였다. 평양역을 조금 지나자 오른쪽에 북한 적십자사 건물이 보이고, 그 바로 옆이 평양에서 첫째로 손꼽힌다는 제일여관이었다. 보통문을 지나니 보통강이 흐르는 보통강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지나는데 최수만이 낚시를 즐긴다는 생각이 났다. 본성은 착한 사람 같았는데, 세월 탓이었을까 살기 위해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마음이 착잡했다.

    다음날 우리는 김일성 우상화의 상징인 만경대를 방문했다. 김일성의 생가에는 그의 조상들이 가난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보잘것없는 가재도구들이 진열돼 있었다.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이 시누이를 시집보낼 때 아무것도 줄 것이 없어 자기가 쓰던 것을 주어서 보냈다는 장롱도 있다. 진짜 농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대표 일행은 안내원을 따라 초가 끝방 앞에 빙 둘러섰다. 당에서 선발되어 나왔다는 만경대 안내원 아가씨는 달변에 여유가 있었다.

    “이 방은 수령님의 증조부 김응우 선생님과 아버님 김형직 선생님이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구상하시던 방입니다.”

    한 칸짜리 방에는 낡은 나무책상 두 개가 있을 뿐 텅 비었다.

    “이 두 개의 책상은 선생님들이 각각 쓰시던 것으로 맑스·레닌 서적을 탐독하시던 책상입니다.”

    기자들이 안내자의 말에 귀가 솔깃해 방을 둘러보았다. 한 기자가 질문이 있다고 손을 들었다.

    “김응우와 김형직이 읽었다는 맑스·레닌 서적이 원서였습니까, 번역판이었습니까?”

    순간 기자들이 폭소를 터뜨렸다. 안내 아가씨의 당황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자네, 농담이 심했어! 자아비판감이야.”

    누군가가 한 말에 또 한번 폭소가 터졌다.

    “수령님의 증조부님과 아버님은 원서나 번역판 모두 다 잘 읽습니다.”

    안내 아가씨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획 돌려 다음 장소로 옮겨갔다.

    내일이면 3박4일의 일정을 끝내고 평양을 떠난다. 깊어가는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머니와 누나가 있는 곳까지 왔는데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창가로 나가 평양의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모란봉 기슭에 몇 개의 촉광 밝은 불빛이 반짝인다. 남녘땅 이산가족들이 북녘하늘을 바라보며 풀어내는 피맺힌 절규가 아득히 들려오는 듯했다. 어머니와 누나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최수만의 미소 짓는 얼굴이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여기서 나는 최수만을 만나지 못했다. 판문점에서 알고 지내던 보도일꾼에게 물어보아도 모른다는 것이다.

    개성에서 선죽교를 보았다. 기자들은 선죽교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학창시절에 배웠던 충신 정몽주의 자취는 발견할 수 없었다. 뒤따라오는 안내원 아가씨에게 정몽주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부르주아적 인물이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역사마저 자기 식으로 뜯어고치고 있었다.

    우리가 탄 차가 판문점으로 향하는 콘크리트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코앞이다. 오후 3시30분, 한번 건너면 영영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비극의 다리를 건넜다. 답답하던 체증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자유의 다리’를 건넜다. 자유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1972년 9월12일, 2차 남북 적십자 본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북적 대표단 일행 54명이 판문점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시민들은 차를 타고 스쳐가는 북한 대표단 일행을 보기 위해 거리로 달려 나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도깨비로 생각했던 북한 사람들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호기심에 그 모습을 보려고 발을 곧추세우며 안간힘을 썼다. 평양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광경이었다. 서울을 보는 북한 적십자 대표들, 보도일꾼들은 한결같이 경계하고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서울의 발전상과 시민들의 밝은 표정, 그리고 자유롭게 북한 대표단에 접근하려는 시민들.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서울의 밤

    판문점

    1972년 9월12일, 서울에서 열린 2차 적십자회담 본회담의 환영 리셉션에서 만난 필자(오른쪽)와 북한 기자 최수만. 당시 7·4 공동성명과 적십자회담의 해빙 무드를 타고 남측 언론에서는 ‘남북 기자 서울에서 만나다’라는 제목으로 크게 기사화했지만, 북측 당국이나 최 기자는 이 사진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첫날밤, 7시부터 북적 대표단을 위한 경회루 파티에는 각계인사 80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범석 한적 수석대표와 김태희 북적 단장은 시종 손을 잡고 연회장을 두루 돌며 참석한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기자들과 보도일꾼들은 판문점에서의 만남보다 더 진지하게 남북 적십자회담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다. 특히 남북으로 흩어졌던 동창들이 30여 년 만에 백발의 노안으로 서로 얼굴을 확인하고는 학창 시절로 돌아가 담소하는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연회장 한쪽에서는 한복 차림의 국립국악원 연주단이 ‘장춘불로(長春不老)’ 아악을 연주했고, 반대편에서는 서울시립관현악단이 봉선화 등 우리 노래와 헝가리무곡 등을 연주했다. 북적 대표들은 분위기에 압도된 듯했다. 연두색 옷차림으로 파티에 참석한 북적의 홍일점 이청일은 한적 대표 정희경 대표와 짝이 되어 연회장을 돌아다녔다.

    그 연회장에서 나는 최수만을 만났다. 판문점 린치 사건이 있은 뒤 처음이었다. 나는 북한측 명단을 보고 최수만이 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서울에 오면 약속했던 술 한잔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최수만 동무! 우리 술 한잔 하자.”

    나는 강하게 최수만을 끌어당겼다. 최수만의 자그마한 입에서 비굴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판문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미안함일까, 어정쩡한 답이 돌아온다.

    “일 좀 하구, 술 한잔 하자우.”

    “일은 무슨 일, 간첩일 말이야?”

    경회루 파티에 참석한 800명은 한국의 저명한 인사들이었다. 최수만은 이들을 사진에 담아가려는 것이다. 그는 바쁘게 한국측 인사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내 말에 당황한 듯 최수만의 반달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기가 죽어 있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 한잔 받아. 오랜만이야!”

    나는 양주병을 들어 최수만의 잔에 가득 따랐다.

    “평양에서 최 동무를 찾았지. 어떻게 된 거야?”

    “나, 그땐, 조직되지 않았어.”

    “잔을 받았으면 나도 한잔 줘야지.”

    우리는 마주 섰다. 얼마 만인가. 판문점 집단구타 사건의 주인공이 내 앞에 서있었다. 지난 일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건배를 했다. 얼음에 녹아내리는 양주가 빙글빙글 도는 무지개색 네온에 반짝였다. 나는 최수만과 포옹을 했다. 최수만을 힘껏 껴안았다. 판문점에서의 감정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봉선화의 아름다운 멜로디가 은은히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왔다.

    그 장면이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던 모양이다. 주위에서 술을 마시던 사진기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던지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기자들은 진하게 포옹하고 있는 남북의 두 기자를 카메라 렌즈 속에 연신 담았다. 포옹이 영상으로 맺히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남북 기자 서울에서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최수만과 내가 진하게 포옹하고 있는 사진과 기사가 실렸다.

    이날 오전 10시 조선호텔 1층 그랜드볼룸에서 제2차 본회담이 열렸다. 한국측 이범석 수석대표는 연설문에서 “이 세상에서 단 한군데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여도 편지가 배달되지 않는 단절된 곳이 있다면 그곳은 바로 이 나라 남북 사이의 장벽”이라고 이산의 아픔을 토로했다. 이어서는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의 축하연설이 있었다.

    김 총장의 단장을 끊는 듯한 호소가 회담장 분위기를 숙연하게 했지만, 노동당 중앙위원인 윤기복의 연설은 정치웅변 그대로였다. 인민복 차림으로 단상에 오른 그의 높은 톤과 태도는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영광스러운 민족의 수도 평양” “우리 민족의 경애하는 수령이신 김일성 동지” “위대한 주체사상과 자주적인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통일”…. 남북 이산가족 찾기와는 거리가 먼 정치선전 연설은 분노와 실망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서울 2차 본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은 ‘7·4 공동성명 정신과 동포애 그리고 적십자사의 인도주의 정신을 철저히 구현하자’는 것뿐 성과가 없었다. 이산가족이 만날 날은 요원하기만 했다.

    북한 대표들이 서울을 떠나는 날, 시민들의 표정은 차분했다. 이들이 서울로 올 때의 흥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북적 대표들의 뒤를 따라 판문점에 갔다. 판문점에서 최수만을 찾았다. 신문에 보도된 사진을 기념으로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최수만! 수고했어!”

    “….”

    “서울에 온 소감이 어때?”

    “….”

    최수만의 얼굴 표정이 밝지가 않았다.

    “이거 사진이야, 우리들의 기념사진….”

    나는 경회루에서 찍은 사진을 건넸다. 최수만은 사진을 받더니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왜 그래?”

    나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최수만은 판문각을 향해 올라가버렸다. 최수만의 태도로 보아 경회루 리셉션에서 찍은 사진과 기사가 문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북 기자 서울에서 만나다’라는 제목과 사진이 그들의 조직 내에서 혹은 노동당 조직지도부의 검열과정에서 체크된 것 같았다. 남반부에 가서 혁명을 하라고 했지 술 한잔 얻어들고 남반부 기자의 품속에 안겨 아양을 떨라고 했는가, 최수만의 행위에 당에서 가차 없이 철퇴를 가한 것은 아닐까.

    최수만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이제 평양으로 가면 벌을 받겠구나, 상급 보도일꾼으로 승진하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더니 그만 꿈이 산산이 깨어지는구나, 갖가지 생각이 흘러갔다. 나를 이용해 한 건 하려던 최수만도 어떻게 보면 가련했다.

    북한측 대표들은 그들이 타고 온 차로 판문각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고 있다. 나는 환송대에서 두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 최수만! 잘 가라! 언젠가 또 만날 날이 있으리라!”

    최수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은 입으로 웃는 모습이 소녀같이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서 먼지가 뽀얗게 일어 차 모습을 감췄다.

    1973년 8월28일, 평양측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김영주의 이름으로 남북 적십자회담의 중단이 일방적으로 선언됐다. 회담이 시작된 지 2년6일 만의 일이었다.

    당선소감



    이곳 로스앤젤레스 지역은 올해도 가뭄이 계속됐다. 늦은 밤, 나는 집을 향해 프리웨이를 달리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일까 생각하며 전화기를 열었다. 서울 ‘신동아’ 편집실에서 온 전화였다. ‘판문점’이 논픽션에 당선됐다는 전갈이었다.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기분이었다. 순간 나는 자동차의 액셀 페달을 힘있게 밟았다. 차가 붕붕 하늘로 떠가는 느낌이었다. 기쁜 소식을 전해준 담당기자가 어떻게 생겼을까 보고 싶을 정도였다.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 먼저 하느님께 감사하고, ‘판문점’을 골라주신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판문점’은 내가 중앙정보부에 근무하던 시절 판문점에 출입하던 때의 이야기다. 정보부 시절의 일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정보 업무를 다루는 직원의 생명은 보안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하는 정보인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그래서 글쓰기가 꽤나 힘이 들었다.

    40여 년의 긴 시간이 지났는데 아직도 판문점이 눈에 선하다. 아옹다옹하던 판문점의 옛 친구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이 그리워진다. 아마도 나처럼 노년의 삶을 살고 있거나 먼저 타계한 기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판문점 뜰에서는 남과 북의 기자들이 마음놓고 대화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미도 있고 낭만(?)도 있었다. 지금의 판문점 분위기는 어떨지 궁금하다. 최근 들어 남북한이 상당히 접근했다. 바람직한 일이다. 특히 나처럼 아직도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들은 민족의 과제인 통일을 기다리는 수밖에….

    당선의 영광을 당시 판문점 기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더불어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들을 낳은 사랑하는 딸 지송이가 정말 장하다는 말도.


    판문점
    김일홍

    1938년 평북 철산 출생

    고려대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

    중앙정보부 정보대학원 북한학 교수 역임

    저서 : ‘김일성 주체사상 비판’ ‘마르크스의 인간관 연구’



    “허! 수령님을 취미대로 단다…. 그럼 그 흉상도 취미거리로군!”

    “뭐야!”

    “괜찮아, 들은 동무 없으니까. 그래도 말조심은 해야 하지 않아?”

    북한 기자의 당황하는 얼굴 표정에 대화는 끝난다. 김일성 배지라고 부르는 김일성 ‘초상휘장’은 1970년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 주민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다. 김일성 ‘초상휘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은 그들의 심장 속에 김일성이 살아 숨쉰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수근 탈출사건 특종

    판문점 출입기자들 가운데 ‘동양방송’의 김집 사회부장과 ‘조선일보’의 김도형 외신부 차장은 입심이 셌다. 이들은 말로 북한 기자들을 휘어잡는 재치와 배짱이 남달랐다. 특히 남북한 기자들의 기 싸움에서 북한 기자들을 놀려 먹는 데는 김집 기자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김 기자는 평양 출신이었기 때문에 북한 기자들이 호기심을 갖고 대했는데, 작달막한 키에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막말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판문점 군사정전회담 때마다 김 기자는 마이크를 잡고 중계방송을 하듯 현장의 분위기를 녹화했는데, 그럴 때면 북한 기자들은 김 기자 옆에 빙 둘러서서 신기한 듯 쳐다보곤 했다. 김 기자에게는 그야말로 판문점을 장악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북한 기자들의 테러 대상이었고, 한때는 공작 대상이기도 했다.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탈출에 성공해 귀순한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 이수근의 탈출사건을 특종보도한 김집 기자는 재미있는 일화를 갖고 있다.

    그날 아침, 김 기자는 출발지인 문공부 앞뜰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되자 쌕 버스는 판문점을 향해 떠났고, 기자들은 늘상 하던 대로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 부족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불광동 삼거리쯤 지났을까. 영업 택시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쌕 버스를 따라붙었다. 가끔 지각한 기자들이 택시를 타고 달려오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쌕 버스는 길옆에 섰다. 오늘의 주인공은 김 기자였다. 전날 밤 얼마나 술을 퍼마셨는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었다.

    쌕 버스가 판문점 뜰에 도착하자 김 기자는 아예 취재를 포기하고 자유의집 화장실 근처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었다. 이날 따라 제242차 군사정전회담이 질질 끌며 이어져 기자들은 무료하기 이를 데 없었다.

    회담 도중 유엔군 수석대표 치코렐라 소장에게 쪽지가 전달됐다. 북한의 한 기자가 남한 쪽으로 탈출의사를 보냈다는 상황 보고였다. 보고 내용을 읽은 수석대표는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시간을 벌기 위해 회담을 끌었다.

    유엔사측은 회담이 끝나기 전 기자들을 먼저 철수시키기로 했다. 사건의 성격으로 미루어볼 때 기자들이 있으면 탈출계획에 방해가 될 수 있을뿐더러, 기자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쌕 버스가 판문점 뜰에 나타났다. 회담이 미처 끝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유엔사 홍보담당관은 기자들에게 버스를 타라고 독촉했다. 회담이 끝나면 대표들이 먼저 떠난 다음 기자들이 판문점을 떠나는 보통 때와는 반대였다.

    그때까지도 김집 기자는 화장실 근처에서 잠에 취해 있었다. 쌕 버스가 기자들을 태우고 판문점을 출발할 때는 반드시 인원수를 확인하고 떠나야 했는데, 이날은 너무 급하게 서두르다 보니 미처 머릿수를 헤아리지 못하고 철수했다.

    기자들을 태운 쌕 버스가 에드번스 캠프까지 갔을까.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북한 경무원들이 유엔군 수석대표의 세단차를 향해 쏘아대는 총소리였다. 특등사수인 북한의 경무원들이 쏜 총은 모두 빗나갔다. 이수근이 탄 세단차와의 거리는 10m도 안 됐는데 말이다. 왜일까?

    잠에 취해 있던 김집 기자가 총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전쟁이라도 터진 것일까. 정신이 없는 가운데 오랜 기자생활의 감각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때는 이미 이수근이 탄 차가 마지막 차단기를 들이받고 남쪽으로 넘어간 후였다. 김 기자는 화약 냄새가 나는 삭막한 판문점 뜰에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는 KATUSA 병사를 붙잡고 사건의 내막을 꼬치꼬치 물었다. 그렇게 해서 사건의 줄거리를 어렵사리 알게 된 그는 미군 경비전화에서 육군본부 전화로, 다시 일반 전화로 연결해 ‘동양방송’ 데스크와 통화를 시작했다. 그 시간부터 이수근의 판문점 탈출사건은 방송을 통해 특급뉴스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같은 시간, 쌕 버스를 타고 판문점에서 철수한 기자들은 회담이 끝나면 항상 거쳐 가는 에드번스 캠프 클럽에 들러 맥주와 햄버거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때 대부분의 기자들은 소형 라디오를 틀어 북한 방송을 듣는다. 판문점 출입기자들은 거의 소형 라디오를 휴대하고 다녔다. 약삭빠른 기자들이 쌕 버스가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북한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어놓고 판문점 회담에 대한 북측 보도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해 특종을 한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그 무렵에는 버스 안에서도 온통 북한 방송을 듣느라고 법석을 떠는 경우가 많았다. 이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북한 방송은 조용한데 서울의 방송들이 난리를 치고 있으니. ‘동양방송’ 김집 기자의 보도를 인용해 이수근의 판문점 탈출사건 뉴스가 특보로 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 쌕 버스 안에 있는 기자들은 당황했다. 기자들은 버스를 돌려 다시 판문점으로 가자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김집 기자가 술에 취해 판문점 화장실 외진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사실을 판문점 출입기자들은 알 리 없었다. 기자들은 회사로 돌아와 데스크로부터 모진 호통을 받았다.

    “판문점에 가서 뭐했어! 어디 가서 술 쳐먹고 낮잠 자고 있었어?”

    특종을 놓친 기자들은 김 기자를 빗대어 “어느 놈은 술 취해 잠자다가 특종을 했다”고 두고두고 농담했다.

    판문점의 남북 기자들

    판문점은 이색지대다. 남북 기자들이 직접 몸으로 접촉하며 공작과 첩보를 수집하는 유일한 대치공간이다. 북한은 폐쇄사회이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의 모든 것을 알기는 어렵다. ‘로동신문’이나 평양방송의 내용을 정보부 분석관들이 분석해 공개되는 정도만이 유일한 정보일 뿐, 북한의 정보 루트는 거의 없는 셈이다. 그래서 판문점은 첩보의 근원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로 흘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첩보였다.

    군사정전회담이 열릴 때면 남북 기자들은 서로 파트너를 선택해 대화를 한다. 처음에는 견제와 탐색전을 벌인다. 그러나 자주 만나게 되면 처음의 긴장은 사라지고, 도깨비처럼 느껴지던 북한 기자도 동족으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친밀감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할 말 못할 말을 하다가 보안이 누설되는 경우가 많았다. 까딱 잘못하면 북한 기자들의 공작에 말려 사고가 일어난다. 어수룩해 보이는 북한 기자들이 실제로는 심리 공작에 능한 경우가 많았다. 판문점에 출입하는 북한 기자들은 노동당에서 공작요원이나 심리전 요원 교육을 받은 이들로, 유일사상으로 철저히 무장한 보도일꾼들이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서로 감시하며 통일된 행동을 한다. 뒤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통솔자가 있다.

    앞서 등장했던 김집 기자는 후일 북한 기자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그 때의 일이다. 북한 기자들은 김 기자를 가운데 세워놓고 공갈 협박을 했다. 그런데도 한국 기자들은 소 닭 쳐다보듯 멀건히 서 있기만 하는 것이었다. 북한 기자 행동대원 한 사람이 김집 기자와 악수를 하는 척하다가 손을 꺾었다. 테러를 시작할 찰나였다. 이들의 행동을 탐지한 팀장과 나는 그들 속으로 끼어들었다. 결국 가까스로 험악한 순간을 넘겼지만 아슬아슬한 위기였다. 언론사 간에 경쟁이 심하다 보니 동료의식이 없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남북한의 기자들은 상대방의 실체를 알고자 한다. 상대방의 이름, 소속 신문사, 출신성분 등에 대해 탐문한다. 남한 기자들은 이름과 소속을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나 북한 기자들은 장소마다 이름과 소속이 달라진다. 북한 기자들은 판문점에 출입하는 한국 기자들의 신상과 소속을 거의 파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간혹 그들의 생각에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한국 기자가 나타나면 그들은 인물 정보를 잽싸게, 그러나 은근히 물어온다.

    “동무, 저기 하늘색 잠바를 입구 있는 동무가 어디메 소속이가?”

    “저 친구는 중앙정보부 친구야.”

    자랑이나 하듯 술술 이야기해버리는 한국 기자들이 간혹 있다. 이렇게 되면 몇 안 되는 판문점 출입 정보요원의 신분이 노출되어 입지가 곤란해진다. 정보요원의 생명이 바로 비노출 아니겠는가. 이문동 사무실에서 이러한 문제를 놓고 많은 논의를 했다. 북한 기자들이 남한 기자들에게 접근하는 것을 어떻게 차단할 것인가.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1970년 4월. 며칠 전 내린 비로 초목에 물이 한껏 올랐다. 이문동 정보부 청사 안에는 철쭉꽃과 개나리가 활짝 피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판문점에서는 오늘도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군사정전회담이 열리고 있었다. 나는 정보의 눈을 매섭게 굴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판문점에서 내 자리가 굳어가던 시점이었다.

    남북을 오간 사다트 여사

    항상 그렇듯 그날도 남북 기자들은 판문점 뜰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이들의 기 싸움에서 한발 벗어나 좀 떨어진 벤치에 앉아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 비둘기가 반원을 그리며 자유의집에서 북쪽 판문각으로 비상했다. 내 눈길이 비둘기의 비상을 좇다 북쪽 판문각에서 멈췄다. 봄날같이 화사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늘색 원피스 차림의 북한 여인은 단아해 보였다. 아름다운 여인이 판문점에 나타나기란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녀 옆에는 덩치가 엄청나게 큰 외국 여자가 서 있었다. 정보요원의 육감으로 보고거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들은 천천히 판문각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제각기 떠들던 기자들이 그제야 그녀들을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갔다. 취재원이라는 판단이 떨어지면 곧바로 취재경쟁에 들어가는 것은 기자들의 반사적인 생리인 모양이었다. 나는 뒤늦게 천천히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기자들에 의해 그들의 신상이 어느 정도 파악됐다. 큰 체구의 외국 여인은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의 여동생이었다. 거물이 판문점에 나타난 것이다. 옆에 선 청아한 북한 여인은 김일성대학 역사학과 교수라고 했다. 취재를 끝낸 기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난 후 나는 두 여인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십니까?”

    나는 북한 여인에게 정중하게 인사의 말을 건넸다.

    “혹시 어느 나라에서 오신 분인지?”

    나는 다시 확인하듯 외국 여인에 대해 물었다.

    “이분은 이집트에서 오신 사다트 여사입니다.”

    “형제 공화국 나라의 하늘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나는 수만리 떨어진 이집트에서 왔습니다. 당신들은 같은 동포이면서 왜 이 짧은 거리를 오가지 못합니까?”

    사다트 여사의 말이었다. 북측 관계자들이 항상 늘어놓는 선전의 말을 앵무새 같이 되뇌는 듯한 느낌이다.

    “혹시 한국에서 초청하면 오실 수 있습니까?”

    나는 사다트 여사에게 한국 초청 의사를 던졌다. 북한 여인은 사다트 여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나에게 말했다.

    “초청만 하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합니다.”

    초청을 거부하리라 생각하고 던진 말인데 초청만 해주면 환영한다는 뜻밖의 반응이 나오자,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다트 여사에게 S신문사 문화부장 직함으로 된 명함을 건넸고, 사다트 여사는 이집트 영화예술잡지 편집장이라고 적힌 명함을 내게 주었다. 사다트 여사의 남편이 이집트 신문사의 사장이라고도 했다.

    당시 이집트와 우리나라는 관계가 소원한 편이었다. 한국은 1962년 5월 카이로에 총영사관을 개설했으나,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가 북한으로부터 군사 지원을 받은 이래 1970년 중반까지 이집트는 반한(反韓)정책 기조를 유지했다.

    사다트 여사는 김일성 주체사상 학술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북한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청산리 협동농장이며 금강산을 관광하고 판문점에 들른 것이다. 이번 기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다트 대통령의 여동생을 초청해 남북한을 직접 눈으로 보고 판단할 기회를 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문동 사무실에 돌아온 나는 판문점 동향보고서를 쓰고 사다트 여사를 한국으로 초청하자는 내용의 공작계획서를 작성해 팀장에게 제출했다. 사다트 여사를 한국에 초청해 비약적인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이집트의 반한정책 기조를 친한(親韓)정책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 공작의 목적이었다.

    또 다른 목적도 있었다. 사다트 여사의 남편이 이집트 신문사의 사장이라니 잘만 하면 이집트 신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부흥과 새마을사업 같은 치적을 대대적으로 알릴 수도 있을 터였다. 이집트 신문은 온통 김일성에 대한 홍보 기사로 도배되던 무렵이니 욕심이 날 만도 했다.

    상부에서 공작 계획서를 결재했다. 이제부터 나는 북한을 통해 판문점에 나타난 사다트 여사를 친한인사로 바꾸어놓아야 했다.

    1970년 8월 한창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 우여곡절 끝에 사다트 여사와 수행원 두 명이 우리나라에 오게 됐다. 한국예술협회에서 이집트 예술영화 잡지사 대표를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나는 몇 명의 예술인을 대동하고 김포공항으로 사다트 여사를 마중하러 나갔다. 마침 공항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사다트 여사의 방한을 알고 취재하느라고 법석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사다트 여사 일행을 환영한다는 표시로는 잘된 일이었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기고 나는 여사를 차에 태워 김포가도를 달리며 워커힐로 향했다. 사다트 여사는 환대에 대한 만족감에 연상 “원더풀”을 외치며 물결치듯 출렁이며 익어가는 김포평야의 벼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마도 북한의 논이나 들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일정은 산업시찰을 중심으로 되도록 정치적인 색깔을 뺐다. 저녁에 남는 시간을 이용해 연예인과 함께하는 파티를 주선했다. 최희준씨 댁에서 가수분들이 마련한 조촐한 파티는 사다트 여사를 감격하게 했다. 물론 최희준씨에게는 사전에 협조를 받은 사업이었다.

    호스트인 최희준씨를 비롯해 조영남, 김추자 등 한국의 베스트 가수들이 즉흥적으로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살려 나가는 모습이 대단했다. 돈이나 잡아먹는 형식적인 환영파티보다 효과가 월등했다. 조영남씨는 피아노를 치며 재치 있는 만담과 노래를 이어갔다. 김추자씨도 히트했던 노래를 불러 박수를 받았다. 가수들은 사다트 여사에게도 노래를 시켰다. 사다트 여사와 수행원 두 명이 이집트 민요를 불렀다. 조영남씨는 이집트의 민요를 단 한 번 듣고는 즉석에서 피아노를 치며 반주를 했다. 그러자 가수들도 다 같이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마도 사다트 여사에게 이날의 파티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경험이었을 것이다.

    서울 문래동의 가발 공장과 태평양화장품 공장에 갔을 때는 여사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는 게 느껴졌다. 가발 공장에서 회사 홍보팀이 소개하는 가발을 보고 여사는 꽤 관심을 갖는 듯했다. 이미 여사는 한국의 가발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회사에서 가발을 선사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여사의 얼굴에 스친 기쁨의 표정이란…. 진열대에서 고르기 시작한 가발이 듬뿍듬뿍 여사의 가슴에 쌓였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더 골라도 되느냐는 표정으로. 나는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태평양화장품 공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화장품에 대한 욕심이란 여성에게는 본능에 가까운 것인 모양이다. 여사는 여러 박스의 화장품 세트를 선물로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마지막 날에는 신영균씨 댁에서 영화인 주최의 파티를 주선했다. 현악4중주단의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많은 영화인이 어울렸다. 파티는 우아하고 고상했지만 최희준씨 댁에서만큼 웃음이 쏟아지지는 않았다.

    바쁜 일정을 끝내고 사다트 여사를 보내는 날이 왔다. 물론 그녀의 손에는 선물이 한보따리 들려 있었다. 공항에서 사다트 여사는 이집트에 한번 오라고 당부하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진실된 정성이 통했나 보다. 흔히 공작이라는 말에 음습함을 느끼기 십상이지만, 진정한 공작의 성공은 인간적으로 얼마나 진실했는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다트 여사를 통해 새삼 느낀 대목이었다.

    남북 이산가족찾기 회담 제의

    1971년 8월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북한적십자사에 ‘남북 이산가족찾기’를 공식 제의했다. 회담 제의의 목적은 1945년 타율적인 남북 분단과 6·25전쟁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1000만 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 확인, 상호방문, 서신교환을 주선하고 당사자들의 희망에 따라 재결합시켜주자는 의도였다. 북한적십자사도 이틀 뒤인 8월14일 회담을 수락했다. 이로써 1970년대 남북대화의 문은 당국자간 회담이 아니라 민간단체인 적십자사 사이의 접촉으로 처음 열렸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겨레의 바람이던가. 이제 한(恨)과 슬픔이 가시고 부모 형제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모두들 들떠 있었다. 사반세기 힘의 대결만이 팽팽하던 군사분계선 위의 판문점에서 군복 차림의 군사정전회담이 아닌 남북적십자사 민간인 네 명의 파견원이 1차 접촉을 갖고 대화의 물꼬를 텄다. 1971년 8월20일의 일이다.

    대장정의 첫 역사가 이루어지는 이날 아침, 남산 적십자사 앞에는 이산가족을 비롯해 많은 관계기관 관련자가 모여들었다. 한적 파견원 대표들은 신임장을 갖고 길가에 늘어선 시민들의 갈채를 받으며 판문점으로 출발했다. 군사정전회담 때보다 두 배로 늘어난 기자들이 적십자사가 마련한 관광버스에 탑승해 파견원 대표차량을 뒤따랐다.

    내가 탄 버스도 판문점을 향해 통일로를 달렸다. 군사정전회담 때마다 수없이 달리던 통일로이지만 그 느낌이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고향으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고향에 있을 어머니와 누나가 머릿속으로 빨려들어오고 있었다.

    1951년 정월, 유별나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짧은 겨울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평양 상공엔 비행기 편대의 엔진소리가 귀를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갑자기 씨잉 하는 쇳소리 폭음이 들리더니, 눈앞에서 무연탄가루가 휘날려 온 동네를 휩쌌다. 불길이 아귀다툼을 하며 여기저기에서 솟구쳤다. 어둠 속에서 피난의 무리가 꾸역꾸역 대동강 쪽으로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열두 살, 누나는 열네 살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우리 네 식구는 불길이 솟구치는 무연탄 더미에서 뛰쳐나와 인파 속으로 휩쓸렸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정신없이 한참을 내달리다, 나는 아버지의 울부짖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뒤따라오던 어머니와 누나가 보이질 않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를 부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사방에서 가족을 찾는 소리가 곡소리처럼 울렸다. 앞을 가늠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피난 인파는 남으로 남으로 행렬을 이루며 내려가고 있었다.

    판문점을 향해 달리던 버스가 어느새 임진강 철교에 들어선 모양이다. 버스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반복되면서 고향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겨 있던 나의 귀를 자극했다. 차창을 보니 임진강 물이 반짝인다. 붉은 물결이 도도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대동강가 갈대숲에서 고추잠자리를 잡아주던 누나의 조심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누나의 뒷머리만 쳐다보고 뒤따라가다 그만 강 언덕으로 굴러 떨어져 강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일, 누나를 나무라던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떠올랐다.

    내 고향은 장화홍련전으로 유명한 평안북도 철산이다. 광복 전 우리 집은 자수성가한 아버지 덕분에 2000석 정도의 지주로 부유하게 살았다. 광복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우리 집은 1946년 토지개혁으로 하루아침에 토지를 몰수당했다. 전 재산과 집을 군 인민위원회에서 접수당하고 나자 우리 식구는 거리에 나앉은 꼴이 되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우리 가족에게 평안북도 중강진이라는 벽촌으로 가서 살라고 이전명령을 내렸다. 그야말로 생면부지인 그곳에 가서 어떻게 살 것인지 하늘이 내려앉는 듯했다.

    세상이 바뀌니 인심도 변했다. 인민위원회에서 지정된 시간 내에 집을 비우지 않으면 살림살이도 몰수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동네 아낙들은 뭐 하나 가져갈 게 없을지 기웃거리고, 아버지의 말이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던 소작인들도 어디 혼 좀 나보라는 듯 양손을 소맷자락 속에 집어넣은 채 아버지를 외면하고 서 있었다.

    지금도 생생한 장면은 이모부라는 사람이 낫을 허리춤에 차고 우리 집으로 와서 아버지를 위협한 일이었다. 이모부는 우리 집의 마름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몸이 성치 않은 이모와 함께 살아주는 것이 고마워 이모부를 끔찍하게 챙겼다. 이모부도 아버지는 물론 우리 집 식구 모두를 예의를 다해 대했다. 그런 이모부가 세월이 바뀌었다고 제일 먼저 아버지한테 낫을 들이댄 것이었다. 일본 놈의 앞잡이라고, 농민의 피를 빨아먹은 반동분자라고 아버지를 몰아세웠다.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이모부가 어느 틈엔가 공산주의 이론과 용어를 들먹이며 소작인들을 독려하고 호령했다. 안하무인이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집을 비우라는 통보대로 어렵게 마련한 트럭에 필요한 짐을 대충 실었다. 가구와 당장 필요하지 않은 세간은 동네 아낙들에게 맡겨놓았다. 다시 돌아올 테니 좀 보관해달라는 부탁도 함께 남겼다. 우리는 중강진으로 간다고 속이고 도망치다시피 고향을 떠났다. 동평양 선교리에는 고모가 살고 있었다. 선교리에 하나밖에 없는 3층집 여관이 고모네 집이었다. 우리는 고모 집에 숨었다. 그렇게 곧 돌아간다던 것이 어느새 사반세기였다.

    네 명의 남북 적십자사 파견원은 각기 ‘자유의 다리’와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 들어섰다. 민간인으로는 광복 후 처음으로 이뤄진 공식적인 만남이다. 남북 적십자사 파견원들이 지니고 간 신임장 문건 수교가 13분 만에 이뤄졌다. 그러나 그 13분간 파견원들의 첫 대화는 그리 잘 통하지 않았다.

    남 : 우리 적십자사에선 언챙이 수술운동을 벌이고 있지요.

    북 : 우리는 앉은뱅이 일어서기 수술을 해주고 있지요.

    앉은뱅이 일어서기 수술을 해준다는 말에 주위 기자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다.

    남 : 북쪽엔 봉사원이 몇 명이나 됩니까?

    북 : 그쪽엔 몇 명이나 됩니까?

    판문점
    남 : 또 질문엔 답을 안 하시네요. 내가 아량을 베풀지요. 우리는 8000명가량 됩니다.

    북 : 전문직원이 그렇게 많습니까?

    남 : 선생님은 적십자사에 있다면서 봉사원이 뭔지도 모르시나요?

    북 : 우리 쪽에서는 용어와 개념이 다릅니다.

    남 : 적십자사 용어는 세계 공통인데요.

    북한측은 남북대화를 한반도 적화(赤化)를 위한 정치적 선전장으로 이용했다. 민족의 괴로움을 덜어보자는 한국측의 인도주의적 입장에 딴전만 피우는 것이었다. 양측이 모두 민족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북한은 혁명을 위한 수단으로 민족을 주장했다. 민족 그 자체의 목적으로 만남을 주장하는 한국측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도일꾼 최수만

    남북 적십자회담엔 군사정전회담 때보다 많은 기자가 취재를 나왔다. 북한의 보도일꾼도 두 배나 늘었다. 시골장터가 되어버린 판문점 뜰에는 처음 보는 북한 기자가 많았다. 나는 이들 중 한 명 정도는 사귀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속 물색했다. 얄궂게 생긴 북한 기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나보다 좀 들어 보였는데, 작달막한 키에 양쪽 어깨에 사진기를 두 개나 둘러메고 카메라 가방을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그래도 잽싸게 사진을 찍는 모습은 필름도 없이 빈 카메라로 엉거주춤 사진을 찍는 척하는 다른 북한 기자들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접근했다. 양쪽으로 푹 파진 이마가 귀하게 자란 얼굴이었고 작은 입으로 웃는 모습은 소녀같이 나약해 보였다. 우악스러운 북한 기자들과 달리 좀 가냘픈 인상이었다.

    “필름도 없는 카메라로 사진은 뭐하러 그렇게 찍어?”

    “필름이 없다니?”

    그는 당황한 듯 나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나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판문점에 처음 나온 모양인데 우리 인사나 하고 지냅시다.”

    “그럽시다 그려.”

    생긴 것보다는 시원시원한 말투다. 악수가 오간다.

    “나는 S신문사 김중지 기자요.”

    “난, 최수만이라 함네다.”

    “무슨 신문사요?”

    “그건 알아서 뭐하게?”

    “그래도 알고 지내는 게 좋지 않소.”

    “로동신문 기자우다.”

    오래전부터 사귄 친구처럼 정이 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최수만이란 기자를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첩보 수집에 필요하기도 했지만, 지루한 회담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기보다는 북한 기자와 아웅다웅하면서 보내는 게 훨씬 재미있었다.

    나와 최수만은 인사가 끝나자 동시에 담배를 꺼내 내밀었다. 청자와 금강산이었다. 우리는 굳이 자기 담배를 피우라고 고집을 피웠다. 그러면 담배를 갑째로 바꾸자고 내가 제의했더니, 최수만은 싫다며 “각기 피우기요” 하면서 넌지시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계속 졸라서 담배를 갑째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최수만은 아쉬운 듯 청자 한 대를 피워 물며 “순하구만” 하면서 씩 웃는다.

    판문점에서 남과 북의 기자들은 담배 교환을 많이 했다. 그런데 북한 기자들은 교환한 담배를 자기가 피우지 못하고 상급 지도원 동지에게 갖다줘야 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북한 기자와 교환한 금강산 담배를 사무실 동료와 부담 없이 나누어 피운 것과는 사뭇 달랐다. 부르주아 담배를 피울 수 없다는 뜻인지, 그들은 남측 기자들이 주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한국의 담배를 피우다가는 자아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판문각 쪽 그늘진 토담에 걸터앉아 무료함을 달랬다. 회담장에서는 이산과 상봉에 관해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문득 어머니와 누나가 생각났다.

    “최 동무는 6·25 때 뭘 했소?”

    “내래 조국광복전쟁에 참여를 했디.”

    “괴뢰군으로?”

    “거 말조심 하라우.”

    “그래서, 어떻게 했어?”

    “미국 놈들과 싸웠디, 동무는 어려서 잘 모르겠구만.”

    내가 왜 모르겠는가. 그 전쟁으로 나는 어머니와 누나를 잃었다.

    1951년 1월의 그 겨울밤, 아버지와 나는 잃어버린 어머니와 누나를 찾으러 다시 집터로 갔다. 그러나 선교리 3층 여관은 화염에 싸여 불꽃이 일고 있었다. 방황하다 지친 아버지와 나는 휩쓸려가는 인파에 떠밀려 남으로 내려왔다.

    인천에 생활터전을 잡은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 생각에 실의에 빠져 있었다. 새어머니를 맞이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죄를 지었다고 늘 한탄하면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을 떴다.

    “최 동무는 어떻게 살아남았소?”

    언뜻 당시의 쓰라린 악몽이 스쳐가는 듯한 표정이 최수만의 얼굴에 그려졌다.

    “내래 보도일꾼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디. 낙동강은 정말 피바다였어.”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데! 김일성이 아니야! 민족의 역적노릇을 한 거지!”

    “동무! 김일성이 뭐야! 말조심 못하갔어!”

    나는 좀 격해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분노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래 최 동무는 무슨 보도를 했나?”

    “승전 보도를 했디. 미국 놈들이 혼쭐나는 사진을 찍었디.”

    1950년 7월, 내가 동평양 인민학교 3학년 때 전쟁에 흥분한 당 선전선동부의 승전 소식은 요란했다. 인민군 총부리에 두 손을 높이 든 미군 병사의 사진을 게시판에서 본 기억이 났다.

    “그런데 김 기자는 고향이 평안도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알아?”

    “말소리가 평양 문화어구만!”

    “동평양 선교리라고 알아? 선교리 3층 여관이 내 고모집이지.”

    어느새 나의 마음은 헝클어져 있었다. 시선은 표적 없이 허공을 꿰뚫고 있었다. 얼굴엔 어머니와 누나에 대한 상념으로 꽉 차 있었을 것이다. 최수만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찾으려는 눈빛이었다.

    “지금은 공원터야.”

    최수만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민족의 혈맥 이은 남북 직통전화

    적십자 회담이 열리는 동안 이산가족들은 판문점에 온 신경을 기울이고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나 이번 추석 성묘에 부모형제를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였다. 그러나 다섯 차례 파견원 회담이 이어지는 동안 무덥던 여름은 지나고 선선한 가을이 왔지만 기대했던 소식은 없었다. 1971년 9월16일에 이르러서야 회담은 비로소 한 고비를 어렵게 넘기고 예비회담으로 넘어갔다. 1차 예비회담을 1971년 9월20일 판문점에서 연다는 합의였다.

    이 회담에서 한적은 판문점 남쪽의 자유의집과 약 70m 떨어진 맞은편의 판문각에 각기 상설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두 곳을 잇는 직통전화를 가설하자고 제의했고, 북적은 이를 기적적으로 받아들였다. 광복 후 26년 만에 끊어졌던 민족의 혈맥이 가느다랗게나마 이어진 것이다. 북적의 속셈이야 어찌됐든 사상 최초의 판문점 내 남북 직통전화는 합의를 본 지 이틀 만인 9월22일 오전 남북 작업반의 공동작업으로 가설됐다. 이날 낮 12시 정각, 한적이 임명한 초대 연락사무소장 최동일씨는 역사적인 첫 통화를 위해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첫 대화를 했다.

    “여보세요, 신호가 잘 갑니까? 그쪽에서 한번 신호 보내주세요.”

    그러자 상대방은 통신선의 점검이나 의례적인 인사도 건너뛴 채 대뜸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나는 오늘 북남조선 사이에 첫 직통전화가 개설된 것과 관련, 귀하에게 열열한 축하를 보냅니다….”

    북적 연락사무소장 최봉춘은 이쪽에서 듣고 있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북적 위원장 손성필의 메시지를 낭독하는 것이었다. 북쪽이 먼저 역사적인 메시지를 보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이거 좀 천천히 불러줘야지 이쪽에서 필기를 할 것 아닙니까.”

    수화자가 주의를 환기시키자 북쪽 송화자는 비로소 냉정을 되찾은 듯 멈칫하고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통된 판문점의 남북 직통전화는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가동되기 시작했다.

    서울·평양 왕래회담 합의

    1971년 10월6일 제3차 예비회담에서 한국 적십자사측의 제의로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오가는 이산가족찾기 본회담의 개최를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본회담 개최를 합의하던 날 양측 적십자사가 각기 잔치상을 벌였다. 남측은 판문점 자유의집 앞뜰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산해진미를 차려놓았다. 북측도 지지 않으려는 듯 판문각 앞마당에 갖가지 음식을 차렸다. 군사정전회담시 공비들의 시체사진이며 노획품들이 전시되던 그 자리가 축배가 울려 퍼지는 파티 장소가 된 것이다.

    양측이 정성껏 차려놓은 음식은 판이했다. 남측은 신라호텔 음식부에서 나와 호텔식 파티 테이블을 만들었다. 원형 테이블의 중앙에 고래 모양의 얼음조각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꽃꽂이도 아름답게 장식돼 있었다. 태양열에 녹아내리는 고래 얼음조각은 멋진 예술작품이었다. 북한 보도일꾼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신기한 듯 감탄했다. 남쪽 잔치상의 하이라이트는 제주도 앞바다에서 잡은 바닷가재였다. 북쪽은 개성인삼에 담근 인삼주가 눈길을 끌었지만, 술병 속에 넣은 독사는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기도 했다.

    처음에 북한 보도일꾼들은 남측 테이블에 접근하지 않고 북측 테이블에서 미지근한 용성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황해도 황주 사과라고 자랑하는데, 맛은 좋았지만 어떻게 키웠는지 밤알만했다. 남한 기자들이 북측 테이블에 가서 술 한잔을 하고 보도일꾼들을 끌고 와 남측 테이블로 몰았다. 음식을 어떻게 먹는지 방법을 몰라 눈치껏 한국 기자들이 먹는 흉내를 내더니, 평생 처음 먹어보는 음식에 감탄하며 먹어치워 삽시간에 음식이 동났다.

    회담 중에 차를 나르는 남북한 안내담당 아가씨도 차이가 엄청났다. 남측 아가씨들은 긴 머리를 어깨너머로 휘날리며 민망할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에 긴 검정색 장화를 신고 활보했다. 북한 보도일꾼들이 한국 아가씨들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지나가면 눈동자가 미끈한 다리에서 엉덩이를 따라 올라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남측 기자가 북한 기자에게 뭘 보느냐고 책망하자 못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거 다 보이겠다. 하여간 남조선 여성은 미국 놈들이 다 버려놨어.”

    북한 기자가 겸연쩍게 한마디하고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든다. 미니스커트는 북한에서는 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지만 아름다움이나 멋에 대한 여자들의 욕심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북한이 폐쇄사회에 혁명성을 우선하는 사회라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북한측 안내 아가씨들의 패션이 확 달라졌다. 질질 끌리던 치마가 무릎 위까지 올라가고, 색깔도 검정색에서 하늘색으로 바뀌었다. 흰 운동화는 굽이 높은 흰 비닐구두로 변했고, 머리 모양도 많이 달라진데다, 얼굴에는 엷은 화장기도 감돌았다. 자유의 물결이었다. 애초에 남한측 아가씨들에게 초미니스커트를 입게 한 것도 그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였다. 남북 대화를 통해 모든 것을 과감하게 보여주며 닫힌 문을 부수는 것이다. 그래야 막힌 벽을 뚫을 수 있다.

    양측 기자들이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할 말 못 할 말이 마구 나왔다. 키 큰 사람이 싱겁다고 남측의 꺽다리 박 기자가 북측의 작달막한 뚱보 보도일꾼에게 술을 권하며 농을 걸었다.

    “어이 동무, 뭘 먹고 그렇게 살이 쪘어?”

    “또 그런다, 키는 꺽드럼해가지구. 신 동무라고 이름을 불러야지.”

    신 기자라는 북한 보도일꾼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 멋쩍게 웃으며 술잔을 든다.

    “그래, 신 동무! 여성동무 중매해준다는 거 어떻게 됐어?”

    “조티, 박 동무 정말 총각 맞아?”

    “그럼, 총각도 숫총각이지. 그러니까 중매를 하려면 숫처녀를 하라고.”

    “고럼, 숫체네디. 우리 북반부 녀성 동무들은 다 숫체네디.”

    “야! 할머니 동무두 숫체네가?”

    주위에서 술 마시던 기자들이 흥밋거리가 생겼다며 모여들기 시작한다.

    “결혼은 어디서 하지? 내가 평양에 가야 하나, 여성 동무가 서울에 와야 하나.”

    “거야 동무가 평양엘 와야디.”

    “가족 친척들도 평양에 가야 하는데 갈 수 있겠어?”

    “거럼, 와 못 오간. 수령님께서 배려하실 거야.”

    “그럼 신혼여행은 제주도 한라산이 어때?”

    “아니디, 혁명의 산 백두산이 조티.”

    “이건 무조건 그쪽 주장이구만, 그럼 살림은 남편 댁인 서울에서 차려야지.”

    “평양에서 살아야디.”

    “그건 왜?”

    “그거야 지상낙원인 수령님 품속에서 살아야디 남반부에서 살 수야 있나.”

    “당사자끼리 사랑을 속삭이면 되지 수령님의 품은 또 뭐야.”

    “그렇다면 사상이 맞디 않는 동무하고는 살 수 없디.”

    나는 최수만을 찾았다. 술 한잔 같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수만은 남측 테이블에 차려놓은 요리를 하나하나 촬영하고 있었다. 나는 최수만의 소매를 끌고 테이블 앞에 세웠다.

    “술 한잔 하자우. 요리를 찍어서는 뭘 하려고 그래. 평양 가서 해 먹으려고?”

    “부르주아 요리를 해먹을 수야 있나.”

    “뭐? 그럼 사회주의 요리는 어떤 거야?”

    “그만하기야.”

    “왜, 할 말이 없어? 요리에 혁명이란 양념을 집어넣는 건가?”

    “요새 서울은 어때? 데모가 많은데 독재정권이 오래 가갔어?”

    “왜, 정권이 무너지면 서울 오고 싶나?”

    “거럼, 서울에 가야디.”

    “서울에 친척이라도 있나?”

    “있디.”

    나는 깜작 놀랐다. 그러지 않아도 최수만에게서 부르주아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았다. 최수만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최 동무도 이산가족이구만.”

    “광복되고 6·25 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디.”

    “어쩐지 말소리가 서울 말씨야. 서울 어느 학교에 다녔소?”

    “내래 B고보를 다넸디.”

    “좋은 학교 다녔네! 최 동무 집도 살 만했나 보지?”

    “거럼, 우리 아버님이 위대한 분이시지.”

    “뭘 한 분인데?”

    “남조선에서 혁명운동을 했지.”

    “남조선혁명? 그럼 빨갱이였구만?”

    “거 동무는 삐뚤어졌구만. 말조심하라우.”

    최수만 가족은 광복이 되고 얼마 후 평양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서울 B고보에 다닐 때 갖고 놀던 주름통 사진기를 갖고 평양에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북한 사진작가동맹에 가입했다. 그렇게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사진부에서 일을 하고 6·25전쟁 때는 보도일꾼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했다. 평양을 거쳐 만주까지 도망을 다니면서 혼란 속에 다시 당에 복귀했다. 이런 공과로 최수만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무렵 북한 언론계도 김일성대 신문과를 나온 신진들이 장악하는 추세여서 신문사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성과 출신성분이 특출나야 했다. 그런데 최수만의 경우 당성은 어떻든 출신성분은 북한에서 배척하는 남한 출신임에 틀림없다. 전쟁 때 보도일꾼으로 일한 덕분에 출신성분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김 기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주지.”

    “다른 거 아니구, 거 낚싯바늘 좀 얻자꾸나.”

    “그건 왜?”

    “대동강에서 붕어 낚시를 하는데 그만 메기한테 낚시 바늘을 뗐디 뭐야.”

    광복 다음해 4월 토지개혁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동평양 선교리 고모집에 왔을 때, 나는 철없는 여덟 살이었다. 나는 누나와 대동강변으로 멱을 감으러 곧잘 나갔다. 대동강변 갈대숲에서 누나가 잡아주던 고추잠자리. 지금도 그곳엔 고추잠자리가 있을까. 내가 발가벗고 물장구치던 그 갈대숲은 무엇으로 변했을까.

    나와 누나는 강가에 가면 옷을 갈대숲 위에 얹어놓고 멱을 감았다. 어느 날 갈대숲 위에 얹어놓은 옷이 바람에 휩쓸려 그만 강줄기를 따라 떠내려가고 말았다. 나와 누나는 발가벗고 옷을 따라 강둑을 달렸다. 그러나 옷은 물살을 따라 수심이 깊은 강 가운데로 미끄러져 흘러들어가버리고 말았다. 1866년 제너럴셔먼호를 불살랐다는 역사의 현장으로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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