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제43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판문점

  • 김일홍 / 일러스트·박진영

판문점

2/18
“‘우’는 주체의 조국이고, ‘적’은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인 남반부지.”

“기자 동무, 그래서 지금 우리는 적인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적이지.”

한국측 기자들은 양측 발언을 ‘남’과 ‘북’으로 적는다. ‘남’과 ‘북’이 사실이라면 ‘우’와 ‘적’은 현실이다. 똑같은 대상을 두고도 남북 기자들의 취재수첩에서부터 이렇듯 판이하게 기록되는데, 남북회담에서 과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판문점 회담시에는 항시 군용 ‘쌕 버스’가 나온다. 판문점 취재단인 각 신문사, 방송사, 외신 기자들이 출발지인 중앙청 내 문공부 뜰 앞 느티나무 밑으로 삼삼오오 모여 판문점행 쌕 버스를 기다리며 잡담을 하곤 한다. 판문점에는 민간인이나 민간 차량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팀장과 나는 두 대의 버스에 각각 나눠 타고 출입기자들에게 판문점 내에서의 보안사항 및 북한 기자들과 접촉할 때 주의할 점과 취득한 첩보는 보고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출입기자 명단에 기재된 이름과 소속을 확인하고 숫자가 맞으면 쌕 버스는 회담장으로 출발한다. 관광객에게는 신기함과 두려움이 숨어 있는 판문점이지만, 이 코스를 자주 다니는 기자들은 별 관심없이 비스듬히 누워 모자란 잠을 청한다.



덜컹거리는 차의 움직임 소리가 요란하게 반복되면 임진강 철교에 들어선 것이다. 판문점에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다. 임진강 한복판에 앙상하게 남은 교각이 서 있다. 6·25전쟁 때 폭격으로 폭파된 철교의 잔해로 쓰라린 과거를 지닌 교각이다. 산비둘기들이 교각 틈새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그 밑으로 흙탕물이 꽤나 거세게 흐른다.

이곳이야말로 휴전 직전 막바지 전투에서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가 이데올로기라는 미명하에 피를 흘린 곳이다. 지금도 전쟁의 흔적이 여기저기 깔려있다. 주인 모를 고분과 남북으로 달리던 철마가 산허리에 쓰러져 있고, 탄흔에 녹슨 어느 병사의 철모가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벌건 철모 사이로 피어난 보라색 바이올렛은 병사의 못다 피운 젊은 꿈을 아쉬워하듯 살며시 얼굴을 내밀고 웃음꽃을 피운다.

두 번째 철문을 통과하면 남방한계선인 비무장지대가 나온다. 차창 프레임 속에 대성동의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차가 판문점 쪽으로 돌아서면 멀리 북쪽 기정동의 인공기가 철탑에 걸려 펄럭이는 것이 보인다. 판문점에 들어가기 직전 미군 에드번스 캠프에 들러 커피를 한잔하며 유엔군사령부 홍보담당관의 간략한 회담 브리핑을 듣고 판문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관례다.

버스가 시간에 맞춰 군사정전회담장 앞뜰에 도착하면, 북한 기자들은 벌써 뜰에 나와 늑대처럼 어슬렁거리고 있다. 낯익은 기자를 보면 서로 반갑다고 악수를 하거나 심지어 포옹하는 이들도 있다. 판문점 뜰에는 오늘 회담의 주요 내용인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증거로 유엔사에서 마련한 전시물이 놓여 있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무장공비의 사살 모습 사진이며 공비들이 소지했던 기관단총, 카메라, 망원렌즈, 배낭, 농구화, 담배, 찐쌀, 미숫가루, 약품 등등.

회의장 테이블 위에는 철책이 아니라 마이크 선을 분단선 삼아 늘어놓았다. 마이크 선을 가운데 두고 양쪽 대표들은 무표정하게 대좌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가공의 선을 넘지 않는다. 분노와 흥분이 밀려오면 목청을 높여 욕을 하거나 일어서서 삿대질을 한다. 이런 행동은 거의 북한 몫이다. 그러나 회담장 안에서 아무리 격앙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도 남북 기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양지바른 곳에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눈다. 서로 지껄이다 보면 상대방의 약점을 건드려 신경을 곤두세우는 경우도 있다. 허점을 이용해 상대방의 약을 올리는 행동은 대개 한국측 기자들의 몫이다.

“여보, 당신 가슴에 달고 있는 게 뭐요?”

“보믄 모르간.”

“당신들이야 알겠지만 우리야 알 수 있나?”

“그 뭐, 알믄서 와 그래.”

“글쎄, 그게 단군 할아버지면 몰라도 왜 그렇게 살이 쪘어!”

“똑똑히 보라무나, 보면서도 몰라?”

“그래 똑똑히 보자, 네 할아버지냐?”

“이거 와이래! 도발적 언동 삼가라우.”

“말하기 거북해? 이름도 못 대는 주제에 그건 뭘 하러 달고 다녀?”

“이거이 눈깔에 뵈는 게 없는 기가?”

앉아 있던 북한 기자가 벌떡 일어나 주먹을 쥐고 공격적인 자세로 돌변한다. 남한 기자는 모른 체하며 한술 더 떠 다그친다. 여기서 물러서면 북한 기자의 주먹 공세에 밀리는 것이 되므로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일 게다.

“그런데 그게 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던데, 너희들 계급 표시냐?”

“그거야 뭐 취미대로 다는 거지, 이상할 것 없수다.”

2/18
김일홍 / 일러스트·박진영
목록 닫기

판문점

댓글 창 닫기

2019/06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