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한국정치, 중국 공산당에게 배워라

내각은 합숙교육, 정파는 분권… ‘예측 가능한 미래’ 만드는 엘리트 정치

  • 황의봉 동아일보 2020위원회 부국장 전 베이징 특파원 heb8610@donga.com

    입력2007-12-07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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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이 갈수록 혼돈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 한국의 대통령선거와 연이어 터지는 정부 최고위 인사들의 부패 스캔들. 10월 마무리된 중국의 17차 전국대표대회, 그리고 이를 통해 완성된 후계구도는 한국의 권력 엘리트 탄생구조와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 신데렐라’ 대신 수십년간 철저히 자기관리를 해온 젊은 인재들 가운데 각 정파의 막후조율을 통해 수년 전부터 ‘예견 가능한 차기 정부’를 준비해 나가는 중국의 능력은 가히 ‘저력’이다. 피비린내 나는 정치보복과 깜짝쇼 대신 분권과 시스템의 묘를 만들어내는 중국 정치가 한국 정치에 던지는 교훈.
    한국정치, 중국 공산당에게 배워라

    10월21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제17차 중국 공산당 전국대표대회 폐막회의.

    2007년 하반기 한국과 중국은 5년 만의 커다란 정치행사를 치르고 있다. 한국은 17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이고, 중국은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해 최고지도부를 개편했다. 그러나 똑같이 17번째 집권세력을 확정하는 양국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대조적이다.

    5년 전 후진타오(胡錦濤) 체제를 출범시킨 중국은 축제 분위기 속에서 후진타오 2기 지도부를 구성하고 의욕적인 국정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지나간 5년의 성적표도 화려하다. 10%를 오르내리는 성장률에 힘입어 각종 경제지표는 과열을 걱정할 정도로 역동적이다. 거품 붕괴를 우려하는 안팎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주가는 연일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중국 지도부는 당대회를 통해 2020년에는 2000년의 4배에 달하는 1인당 GDP 4000여 달러 달성 목표를 내걸고 성장일변도 정책에서 탈피, 환경을 중시하고 인민에게 고르게 혜택이 돌아가는 균형성장 정책을 펼치겠다고 천명했다.

    반면 노무현 정권을 탄생시킨 한국은 새 정권 등장을 앞두고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여 있다. 선거가 1개월여 앞으로 임박했지만 국가적 비전 제시는 실종된 채 정치권의 이합집산과 ‘네거티브’ 전략이 만개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 5년의 성적에 대해선 극소수 집권세력을 제외한 대다수가 이구동성으로 냉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경제성장의 동력은 크게 떨어졌으며, 통일 외교 국방 교육 등 전방위적으로 국론이 분열돼 좀처럼 효율적인 처방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양국의 정치 기상도 역시 상이하다.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 겸 당총서기가 각 정파와의 사전조율과 협상을 통해 최고지도부를 물갈이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는 데 반해, 노무현 정권의 권력 엘리트들은 분열된 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야당 역시 대립과 반목으로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한국과 중국은 국가의 규모와 체제, 자연환경과 사회문화적 특성이 크게 달라 평면적으로 비교하기는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상이함을 감안한다고 해도 집권세력 교체기의 대조적인 풍경은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이 이 같은 결과를 초래한 것일까. 민주국가 대한민국이 공산국가 중국에 뒤져야 할 체제상의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아니면 권력 엘리트층의 차이 때문일까. 중국 공산당대회에서 드러난 중국 정치의 실상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현주소와 문제점을 따져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17차 중국공산당대표대회를 통해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권력승계의 제도화가 상당부분 정착됐다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로 민주집중제 원리에 의해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7336만여 명에 달하는 공산당원이 질서정연하게 조직화돼 있다. 웬만한 나라의 인구보다도 당원이 많은 중국 공산당은 2200여 명(17기 2270명)으로 구성되는 전국대표대회를 5년에 한 번씩 개최한다. 우리로 치면 전당대회인 셈이다. 당의 헌법인 당장(黨章)의 개정과 당중앙위원회의 주요 정책보고를 듣고 의결권을 행사하는 전국대표대회는 일상적인 당무를 중앙위원회(17기 371명)에 위임하고 대표들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안착하는 권력승계 메커니즘

    중앙위원회는 1년에 한 차례 회의를 열어 중요한 사안들을 논의하며 일상적인 당 업무는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하는 총서기와 정치국 상무위원회(9인), 정치국(25인), 서기처(6인), 군사위원회(11인)에서 처리한다. 이 중에서도 핵심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의 9명 상무위원이다. 이들이 중국 정치의 핵심지도부인 셈이다. 9명의 상무위원은 당의 중대사를 결정할 뿐 아니라 서열 1위인 총서기는 국가원수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을 맡고, 2위는 국회의장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3위는 국무원총리를, 나머지 상무위원들도 정치협상회의 주석, 부총리 등 요직을 맡고 있다.

    한국정치, 중국 공산당에게 배워라

    10월1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왼쪽)이 개막 연설을 마친 뒤 자리로 돌아와 장쩌민 전 국가주석과 활짝 웃으며 악수하고 있다.

    과거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시기에 후계자로 지목된 류샤오치(劉少奇), 린뱌오(林彪), 화궈펑(華國鋒)뿐 아니라 덩샤오핑(鄧小平) 통치기간 중 후계자로 지목된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쯔양(趙紫陽)까지 모두 권력승계에 실패했다. 1949년 건국 이후 무난히 권력을 승계한 경우는 최근의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 두 사람뿐이다. 권력승계에 대한 제도적 절차나 정치적 합의과정이 미비한 것이 권력승계를 어렵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2002년에 이어 2007년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처럼 절대권력을 쥔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없는 상태에서 최고지도부 개편에 성공했다. 지도부 구성을 둘러싼 내부의 대립과 세력간 투쟁과정은 베일에 싸여 있으나, 결국 최종적인 합의를 도출한 것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집단지도체제가 정착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언론이나 관측통들은 후진타오 총서기가 자파의 리커창(李克强) 전 랴오닝성 서기를 정치국 상무위원회 서열 6위인 국가부주석 자리에 진입시키려 했으나 결국은 시진핑(習近平) 전 상하이시 서기에 밀려 서열 7위인 부총리 자리로 낙착된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서열 1위의 후진타오가 자기 사람을 후계자로 만들기에 유리한 지위에 앉히는 데 실패한 셈이다. 과거 중국 정치사에 비추어 보면 상상하기도 힘든 이 같은 결과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정치세력간 경쟁과 타협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집단지도체제의 정치문화가 성숙했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권력승계의 제도화 진전에는 연령제한제의 정착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16기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후진타오에 이어 실세로 꼽히던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이다. 올해 68세인 쩡 부주석은 70세가 되면 당의 주요 영도직위를 맡지 못한다는 규정에 따라 은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같은 이유로 정치국 상무위원 서열 7위인 우관정(吳官正·69)과 9위 뤄간(羅幹·72)도 이번에 용퇴하고 후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새로 선임된 17기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최연장자는 저우융캉(周永康) 전 공안부장으로 65세이며 그 다음이 허궈창(賀國强) 전 당조직부장이다. 이들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차기 최고지도자로 꼽히지 않는 것은 다른 요인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나이제한에 걸리기 때문이다. 나이로 보아 1회용 상무위원인 셈이다. 반면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시진핑과 리커창은 각각 54세와 52세로 5년 후 예상대로 국가주석과 총리에 오를 경우 5년씩 두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마오쩌둥 사망 후 간부 종신 임기의 폐해를 경험한 중국 공산당은 1978년 이를 방지하는 규정을 발표했으며, 1988년 이후에는 정년이 되면 자동퇴직하는 제도로 운영돼왔다. 68세의 경우, 정년은 아니지만 임기 5년을 채울 수 없게 돼 스스로 용퇴하는 전통이 굳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승계를 둘러싼 게임의 룰이 정착됨에 따라 차기 정권의 예측 가능성이 높아진 점도 주목된다. 후진타오가 15차 당대표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하고 국가부주석으로 발탁된 후 2002년 16차 당대회에서 총서기와 국가주석이라는 대권을 잡은 것에 비추어, 5년 후에는 큰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내년 봄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국가부주석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되는 시진핑 혹은 제1부총리에 기용될 리커창이 대권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크다. 또 5년 후에는 현재의 상무위원 9명 중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나머지 7명이 모두 은퇴할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다.

    일부 관측통들은 이번에 중앙위원에 선임된 40대 중반의 엘리트 가운데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상무위원회에 진입할 것으로 점쳐지는 인물을 거명하기도 했다. 차기는 물론 차차기 지도부도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는 얘기다.

    권력투쟁보다는 분권정치에 가까워

    장쩌민과 후진타오 시대에 들어와 집단지도체제가 확립돼간다는 것은 중국 정치의 커다란 분수령으로 평가된다. 이는 1인 권력자의 종신 지배라는 후진적 정치행태에서 탈피했음을 의미하고, 나아가서 중국식 민주화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집단지도체제를 통해 안정적으로 정권의 승계와 유지가 지속될 경우 정치안정에 크게 기여할 뿐 아니라 정치안정을 토대로 경제발전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번 17차 당대회를 통해 최고의 권력 엘리트라 할 정치국 상무위원 9인에 대한 계파분석을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시진핑, 리커창, 허궈창, 저우융캉 등 새로 상무위원이 된 4인 가운데 리커창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에 대해서는 관측통들의 계파분석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정치, 중국 공산당에게 배워라

    중국 공산당의 정치국 상무위원들. 윗줄 왼쪽부터 후진타오(胡錦濤), 우방궈(吳邦國), 원자바오(溫家寶), 가운뎃줄 왼쪽부터 자칭린(賈慶林), 리창춘(李長春), 시진핑(習近平), 아랫줄 왼쪽부터 리커창(李克强), 허궈창(賀國强), 저우융캉(周永康)이 10월2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기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리커창은 후진타오 총서기의 인맥이라 할 수 있는 공청단(共産主義靑年團) 출신으로 이른바 퇀파이(團派)로 분류하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시진핑, 허궈창, 저우융캉은 관찰자에 따라 일명 태자당(太子黨)으로 혹은 상하이방이나 친(親)쩡칭훙계로 꼽힌다. 과거 권력층의 자제들을 일컫는 태자당이 실제로 하나의 파벌로 이해관계를 함께하는지도 의문이고, 또 이들을 친쩡칭훙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이보다는 오히려 시진핑이 차기 총서기 자리를 선점한 것은 계파 색채가 엷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따라서 새로운 중국 지도부의 등장을 계파간 치열한 권력투쟁의 결과물로만 보는 관점은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분권형 시스템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은 인구가 많고 국토가 광활할 뿐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나라다. 55개 소수민족을 포함해 모두 56개 민족으로 구성돼 있고, 전통적으로 중앙에 대한 지방의 원심력이 강하다. 이 같은 특성에 비추어 본다면 최고지도자 1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통치체제보다는 집단지도체제하에서 권력을 분산,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이 더 어울려 보인다.

    이번 중국공산당 대회를 유심히 살펴보면 이미 은퇴한 지도자들이 대회에 참석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비롯해 리펑(李鵬), 주룽지(朱鎔基), 리루이환(李瑞環), 웨이젠싱(尉健行), 리란칭(李嵐淸) 등 15기 상무위원 전원이 ‘주석단’의 신분으로 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심지어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한 86세의 화궈펑 전 총리도 참석했다. 은퇴한 과거의 정적이나 권력투쟁으로 실각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서로 권력을 균점하여 협조체제를 구축해온 사람들의 모습으로 비친다. 서방 언론이 중국 지도부를 권력투쟁적 시각 위주로 바라보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최고지도부의 선출과정이나 주요 정책결정을 분권형 시스템이라는 틀로 조명하는 것도 필요할 듯하다.

    국가원수가 9명?

    분권형 시스템에서는 이른바 타협과 상생의 정치가 기본이다. 당대회에서 후진타오 인맥인 리커창 대신 계파색이 상대적으로 엷은 시진핑이 상무위원으로 선출된 것에서 타협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태자당 출신이 중용된 배경에는 후진타오 계열의 공청단 출신이 중앙위원회 등 권력기구에 대거 진입한 데 따른 의도적인 균형 노력으로 분석하는 시각도 있다.

    후진타오 총서기의 과학적 발전관이 당장에 삽입돼 당의 지도이념으로 격상된 과정 역시 타협의 산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후진타오가 강조한 제1의 국정 슬로건은 ‘조화(和諧)사회’였다. 날로 심화하는 지역간 계층간 빈부격차를 해소해야 한다는 일종의 분배개념인 조화사회론은 그러나 당장에 삽입하지 못했다. 사회주의 국가의 빈부격차를 인정하는 논리를 헌법과도 같은 당장에 넣는 데 대한 반론이 거셌기 때문이다. 특히 빠른 경제성장을 구가하고 있는 동부 연안 지역에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당장에 들어간 것은 ‘과학적 발전관’이었다. 과학적 발전관은 성장 일변도에서 탈피해 환경을 고려하는 등 지속가능한 성장을 추구하자는 일종의 성장방법론이다. 집권 초기부터 부르짖은 조화사회라는 목표는 당장에 넣지 못하고, 수단으로 볼 수 있는 과학적 발전관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후 주석의 공평주의 이상과 경제성장을 우선시하는 현실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로 분석되기도 한다.

    타협과 상생의 정치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다름아닌 상무위원 9인의 일상생활이다. 이들은 5년간 국가 중대사를 함께 논의하고 주요 행사에 함께 참석한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요인들의 집단거주지인 중난하이(中南海)에 모여서 살고 휴가도 같이 가면서 휴가지에서 중요 결정을 내린다. 형식상 후진타오 총서기가 서열 1위이나 기본적으로 동등한 위상을 지닌다. 국가기밀 정보도 똑같이 제공받고 주요사안에 대한 투표권도 똑같다. 상무위원이 홀수인 이유는 투표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상무위원 9인의 동등한 위상은 마치 국가원수가 9명이나 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 이들의 국가원수급 지위는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분위기다. 후진타오 총서기 겸 국가주석 대신 다른 상무위원이 외국 국가원수와 만나 정상회담에 준하는 대화를 나누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집단지도체제하에서 타협과 상생의 정치는 당내 민주화의 신장과 직결된다. 5년 후 집권세력이 되기 위한 치열한 실적 경쟁과 인사 경쟁이 예상된다. 경제 문제, 대만 문제, 외교정책 등을 놓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당내 민주화를 촉진시킬 인적 토대도 다원화됐다. 이공계 출신 일변도이던 주요 권력기구에 다양한 분야에서 공부하고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대거 진입한 것이다.

    민주화 확대, 그러나…

    17차 당대회에서 언론의 주목을 끈 뉴스메이커들은 다름아닌 자산가기업인 출신 대표들이었다. 장루이민(張瑞敏) 하이얼(海爾) 회장, 선원룽(沈文榮) 사강(沙鋼)그룹 회장, 왕젠린(王健林) 완다(萬達)그룹 회장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 자산가들은 지난 2000년 장쩌민 총서기가 ‘3개 대표론’으로 기업인이 공산당에 가입하는 길을 튼 이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런민(人民)일보’에 따르면 17차 당대회 참가대표의 30%가 중앙과 지방의 국유기업과 민간기업 임직원들이라는데, 이는 5년 전 10%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과 크게 비교되는 숫자다.

    자산가·기업인 외에 학생 등 20대 대표들의 비율도 높아졌다. 반면 55세 이상 연령층의 비율은 5년 전에 비해 7.2%포인트 낮아졌다. 또 법률계에서도 처음으로 대표를 배출했다. 과거 당과 군의 전유물로 여겨져온 당대회 대표들의 성분이 다원화된 것이다.

    당대회 대표들의 다원화 현상이 당내 민주화의 인적 토대를 만들고 있다면 이른바 차액(差額)선거의 탈락비율 확대는 경쟁선거라는 제도적 민주화를 구축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17차 당대회의 중앙위원선거에서는 후보자의 8.3%를 떨어뜨리는 차액률을 적용했다. 204명을 뽑기 위해 221명의 후보자를 내세워 17명을 탈락시킨 것이다. 이 같은 탈락률은 5년 전에 비해 3%포인트 증가한 수치다. 물론 이 같은 차액선거는 완전한 자유선거와는 거리가 멀고 8.3%라는 수치도 미미할 뿐 아니라 그나마 후보자 명단작성이 지도부에 의해 주도됐다는 점에서 서구식 관점으로는 제대로 평가받기 힘들어 보인다. 그러나 차액비율이 점진적으로 확대돼가고 있고, 공산주의체제하 경쟁선거 도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내 민주화의 의미 있는 진전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 공산당의 당내 민주화가 진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한계 또한 만만치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최고지도부의 선출과정이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는 점이다. 최고지도부의 선출과정과 지도자들 간의 상호관계, 그리고 당과 군의 관계 등 권력 핵심부의 내막은 극히 일부만이 외부에 알려져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내용을 다뤘고, 누가 어떤 주장을 폈는지 권력층 내부 움직임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 채 공식적인 발표만이 있을 뿐이다. 중국 공산당은 늘 단결을 강조하기 때문에 외부에는 합의사실만 알려지기 일쑤다. 어떤 이견과 갈등이 있었는지 알기가 힘들고 소식통들의 설만 무성하다. 당내 민주화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최고지도부의 폐쇄성을 탈피하고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일이 필요한 과제로 보인다.

    공식 직책에서 은퇴한 원로들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도 당내 민주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장애요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중국 정계 3세대의 실권자이던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후진타오 등 4세대 지도부의 구성과 출범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물론, 이번 17차 당대회에서도 차기 지도부가 될 5세대 발탁에 개입한 흔적이 뚜렷하다. 장 전 주석은 당대회장에 공식서열 1위인 후진타오 바로 다음 순서로 입장해 그의 위상이 단순한 퇴임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원로에 대한 예우는 중국 정치의 오랜 특징이기도 하다. 집권당의 교체가 이뤄지지 않고 최고통치자가 후임자를 양성하다 보니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는 인과관계가 맺어진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 장쩌민과 후진타오에 이르는 후계과정을 설계해놓은 관행이 되풀이된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지만, 중국 공산당의 이 같은 전통은 그보다도 더 뿌리가 깊다.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초창기 혁명원로들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공로자로서 공식 직함의 유무와 관계없이 국가지도자로서 당정군(黨政軍) 업무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이른바 태자당의 득세도 원로 예우와 연관지어 볼 수가 있다. 혁명원로와 고위층의 자제들인 태자당이 지속적으로 요직을 차지하는 배경에는 원로들의 막강한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태자당 출신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나 우수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로 성장한 것이지 반드시 ‘부모 백’의 덕을 본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13억 인구를 통치하는 극소수 지도부에 태자당 세력이 대거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은 비정상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이 같은 당내 민주화의 진전과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중국의 정치가 어떤 양상으로 변화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속단하기가 쉽지 않다. 가부장적 당-국가 체제와 엘리트 중심의 정치문화 등 중국체제의 특성으로 미루어 서구식 민주주의로의 발전 가능성은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어 보인다. 후진타오 총서기 겸 국가주석이 당대표대회 개막식 연설에서 무려 60여 차례나 ‘민주’라는 용어를 구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으나, 이는 서구식 민주화와는 구분해야 할 것 같다. 후진타오 주석은 “인민민주는 사회주의의 생명으로 사회주의 민주정치의 발전은 중국공산당이 시종일관 달성하기 위해 분투해온 목표”라며 “인민이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인민민주주의를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이 말은 민주화 조치를 하겠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의 지배를 더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정치발전의 길을 견지하고 당의 영도를 반드시 견지하겠다”는 후 주석의 말은 현재의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에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중국 공산당은 당내 민주화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식으로 ‘중국식 정치발전’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최고지도부가 타협과 상생의 묘를 발휘해 정치안정을 꾀하는 한편, 경제발전에 따른 인민들의 정치민주화 요구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향후 중국의 진로가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과 중국의 지난 5년간 성적표는 크게 차이가 난다. 비록 공산당 일당 독재체제이기는 하나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중국식 정치문화에서 배울 만한 점은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필자의 답은 ‘상당히 많다’이다.

    ‘정치 신데렐라’는 없다

    무엇보다 국가경영을 책임지는 정치 지도자의 자질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중국은 ‘준비된 지도자’가 나라를 이끈다. 중국 지도자들의 자질이나 업무능력은 국제적으로도 정평이 나있다. 중국의 고위지도자들은 국가적 현안에 대한 기본 입장과 구체적 정책내용이 체화되어 있다는 평을 듣는다. 우리처럼 지도자들이 엉뚱한 발언을 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경우는 상상하기 힘들다. 웬만한 고위공직자는 자신이 맡은 분야에 대해 몇 시간이고 쉬지 않고 설명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관련 수치들을 정확히 외우고 있는 것은 기본이다. 국제감각도 뛰어나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미국 방문길에 팝송 ‘러브 미 텐더’를 연주해서 외국인들이 깜짝 놀랐다는 식의 기사는 이제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중국의 국가지도자 중 어느 날 갑자기 혜성처럼 나타나는 ‘정치 신데렐라’는 없다. 일찌감치 발탁돼 지도자로 양성되기 때문이다. 공산당의 치밀한 인사관리 시스템에 의해 수십년간 지도자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학업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공산당에 의한 본격적인 평가가 이뤄진다. 당 조직부가 매년 정치사상, 업무능력, 발전가능성, 주위의 평판 등을 종합해 평가한다. 이런 식으로 평가결과가 쌓이면 40세가 될 무렵 장차 국가지도자로 클 사람(精英幹部)인지, 지방관료를 지내고 끝날 사람인지를 구분해 인사관리를 한다.

    현재 중국의 최고지도부인 후진타오 국가주석, 우방궈(吳邦國) 전인대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는 41세에 부부장급(차관급)으로 발탁됐다. 이번에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리커창 전 랴오닝성 서기는 38세의 나이로 부장급(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가 됐고 43세에 최연소로 허난(河南)성 성장을 맡아 일찍부터 미래의 총서기감으로 꼽힌 바 있다. 중국에서는 나이 마흔이 되면 자신이 어느 위치까지 출세할 수 있는지 대강 가늠할 수 있다.

    이 같은 관찰대상자는 거의 예외 없이 공산당원 신분을 지니고 있다. 중국에서 성공하려면 일단 공산당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원은 7336만여 명으로 인구의 5.6%다. 20명 가운데 1명의 인재가 어려운 심사과정을 거쳐 당원이 된다는 얘기다. 공산당원이 되기 전에는 공산주의청년단이라는 예비 엘리트 집단에 가입하는 경우가 흔하다. 고등학생이 되면 공청단에 가입할 수 있는데, 역시 엄격한 심사를 거치고 단비를 납부하는 등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국가지도자감으로 지목된 인재는 중앙과 지방, 각 정부부처 등에 순환근무를 하면서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지니도록 의도적으로 키워진다. 후진타오의 경우 오지이면서 독립운동으로 골치 아픈 지역인 시짱(西藏·티베트)의 서기로 부임해 고된 경험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새 내각 구성원, 중앙당교 입교

    공청단원-공산당원-국가지도자 발탁과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게 당안(?案)이라는 일종의 인사 파일이다. 관찰대상자의 학창시절 성적에서부터 졸업 후 거쳐온 모든 분야의 활동상이 이 당안에 기록돼 일생을 따라다니게 된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인사검증 시스템의 미비로 인사 실패 사례가 빈발하는 우리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일단 지도자 반열에 들어섰다고 해도 학습과 교육을 게을리할 수 없다. 고위공직자에 대한 강도 높은 교육이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각을 새로 구성하게 되면 한 달 이상 집체교육을 실시한다. 장관으로 연임한 사람이나 차관급에서 승진한 사람 혹은 관련부서에서 이동한 사람을 막론하고 새 내각의 구성원은 중앙당교(中央黨校)에 입교해 국가 기본시책과 자신의 업무분야 등에 대해 강도 높은 합숙교육을 받아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발탁돼 청와대에 들어가 임명장을 받고, 그날로 업무를 봐야 하는 한국의 장관들과는 시작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심한 경우 한국의 장관들은 오전에 임명장 받고 오후에 국회에 나가 답변을 해야 하는 경우마저 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같은 민감한 국가적 현안에 대해 국방부 장관과 통일부 장관이 제각각 다른 말을 하는 경우는 중국에선 상상하기 힘들다.

    자기 분야에 전문가적 식견을 갖고 있는 중국의 고위공직자들은 큰 비리 등을 저지르지 않는 한 쉽게 교체되지 않는다. 대개가 자신의 분야에서 정년을 채우고 물러난다. 갑작스레 맡은 분야의 업무파악에 정신이 없다가 어느 정도 일할 만 하면 경질되는 한국의 단명 장관들과는 다르다.

    중국의 고위공직자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일정한 역할이 주어진다. 평생을 갈고 닦아온 경륜을 은퇴 이후에도 계속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돼 있다. 최근 중국의 외교사령탑이던 탕자쉬안(唐家璇·69)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은퇴를 하고 그 뒤를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부 상무부부장이 이어받는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탕자쉬안은 일본통으로 황장엽 망명사건 당시 남북한 외교팀과 신병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협상한 중국측 대표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현직에서 물러난 탕자쉬안이 더 이상 외교무대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탕자쉬안 같은 외교분야의 원로는 퇴임 후 민간 외교단체에 소속돼 중국을 위한 외교활동에 투입된다.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중국인민외교학회, 중국국제우호연락회 등 민간단체를 표방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정부(외교부)와 역할분담을 하는 관변단체를 통해 현직에 못지않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 반관반민 성격의 기관은 전현직 외교관, 관료, 장성, 학자들로 구성돼 외빈접대와 국제교류업무 등을 맡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등 한국의 전직 국가원수급 인사들이 퇴임 후 중국을 방문했을 때도 이들 기관이 초청하는 형식이었다. 공들여 키운 인재들을 요직에 등용해 장기간 안정적으로 일하게 하고, 퇴임 후에는 수십년 익힌 지식과 경륜, 인맥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총력외교 체제를 갖춘 셈이다.

    ‘최고위층 부패’는 없다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하고 청렴하게 일생을 보내는 국가지도자들의 자세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1904년 쓰촨성(四川省)의 시골마을인 패방촌에서 태어난 덩샤오핑은 1919년 패방촌을 떠난 뒤 1997년 2월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고향에 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충칭(重慶)에 근무할 때도 주변에서 헬기까지 내주며 한번 가보라고 권유했으나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지도자는 지역을 초월해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 지킨 것이다. 덩샤오핑은 죽을 때도 화장해 동해상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후진타오 현 국가주석도 자신의 고향을 챙기지 않는 것으로 회자되곤 한다.

    개혁개방 이후 각계각층의 부패행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중국이지만, 적어도 국가 최고지도자층의 부패가 문제가 된 적은 거의 없다. 자녀들이 성장해 태자당의 일원으로 출세하는 경우는 많지만 지도자가 금전적으로 치부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의 최고지도자급에게는 은퇴 후에도 현직 재임시 못지않은 각종 혜택이 제공된다. 예를 들어 정치국 상무위원의 경우 은퇴 후 지방여행을 하게 되면 열차의 한 칸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중국 지도부의 청렴한 공직생활은 이 같은 국가적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싶다.

    타협의 정치문화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과거사 청산이 좋은 예다.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일인독재가 끝난 뒤 중국 지도부가 가장 고심한 문제는 바로 마오에 대한 정리 문제였다. 당시 중국의 최고실권자였던 덩샤오핑이 주도한 마오 평가작업의 결론은 “마오쩌둥에게도 과오는 있다. 하지만 그의 일생을 통해서 볼 때 공로가 훨씬 더 크다. 그의 과오가 3이라면 공로는 7이다. 특히 마오쩌둥 말년의 과오는 주변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는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으므로 덩샤오핑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마오를 격하시키고 대신 자신이 영웅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덩은 마오의 공이 과보다 크다는 논리로 계속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로 남아 있게 했다.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걸린 마오의 대형 초상화도 그대로 뒀다. 전국에 산재한 동상도 새롭게 단장했고 관공서의 사진도 그대로 걸게 했다.

    큰아들 덩푸방(鄧璞方)이 반신불수가 되는 등 누구보다도 덩샤오핑 자신이 문혁의 최대 피해자였지만, 그는 복수 대신 대국적인 화합의 길을 택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하루빨리 과거를 딛고 모두가 단합하여 앞을 보고 전진하자고 호소했다. 장칭(江靑)을 비롯한 4인방과 일부 핵심인물에 대해서만 상징적인 조치가 취해졌을 뿐이다. 이렇게 과거청산을 통해 상처를 최소화하고 국민적 단결을 유도해 개혁개방을 위한 정지작업을 한 것이다.

    전임자의 정책을 하루아침에 폐기해버리고 새 정권의 논리를 국정 각 분야에 걸쳐 관철하려는 노력도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 특유의 집단지도체제와 지도부 구성방식에 따라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되는 것이다. 중국은 ‘단일민족’인 우리나라와 달리 아주 복잡한 요소로 구성돼 있다. 웬만한 나라의 규모에 달하는 31개의 성·시(省市) 간 경쟁심도 강하다. 따라서 중국지도층은 이해당사자 간의 타협과 조화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은 회의로 시작해서 회의로 끝난다’는 농담이 나돌 정도로 중국의 공직사회엔 갖가지 회의가 넘쳐난다. 어떤 사안을 무리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다른 지역이나 기관과 조율해야 할 필요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 비효율 벗으려면

    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기의 한국의 정치상황은 한마디로 혼돈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형식적 민주화는 이뤄졌으나 실제 내용적으로는 비민주적인 요소가 하나 둘이 아니다. 비효율적인 정치가 국가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이 정치라는 국제적인 조사결과가 이를 잘 말해준다.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르고 부국강병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향해 박차를 가하는 중국을 남의 잔치 구경하듯 보아 넘길 일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체제가 다르고 여러 조건이 다르나,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않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닐까. 누구보다도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이러한 노력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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