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TV를 끄세요, 수명이 우아하게 연장됩니다”

너무나 쉬운 자기계발 첫걸음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이 설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now@donga.com

    입력2007-12-07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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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민 96% 일주일에 22시간 TV 시청, 61% 불만족
    • 32세 남성, 하루 2시간 TV 안 보면 수명 80세→88세
    • “TV 안 보니 몸무게 줄고, 뱃살 빠졌다”
    • “TV 보는 대가는 시청료가 아니다”
    • 부자 아빠는 TV를 보지 않는다
    • “꼭 봐야 할 것은 본방송에 보지 말고 녹화해서 봐라”
    “TV를 끄세요, 수명이 우아하게 연장됩니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2004년 현재 우리나라 15세 이상 인구의 1주일 간 TV 시청 시간은 22시간이 넘는다. 평일 하루 평균 2.9시간, 토요일은 3.6시간, 일요일엔 4.2시간을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15세 이상 전체 인구 중 TV를 안 본다고 응답한 비율은 3.6%에 불과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구의 경우 1주일에 하루는 두 시간만 자고 종일 TV를 보는 셈이다.

    그러나 TV를 썩 만족스럽게 보는 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TV 방송내용에 대한 만족도를 묻는 조사에서 절반이 넘는 61.2%가 불만족스럽다고 응답했다. 재미가 없거나 원하는 프로그램이 없다, 중복된 프로그램이 많다, 광고가 너무 많다, 신속·공정치 못하다, 선정적이다, 현실성이 없다 등이 불만족스러운 이유였다.

    KBS의 시청료 인상 움직임과 연일 인터넷을 달구는 케이블TV의 선정성 논란, 지상파 TV 중간광고 허용 논란…. 이런 시끌벅적한 이야기에도 TV 보는 게 더없이 만족스럽고 가정에 아무런 갈등이 없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아 고민인 직장인이라면 한번 주목해볼 만한 이야기가 있다. 최근 국내에 번역 소개된 ‘1日30分’이란 책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러분의 회사에는 쓸모없는 상사가 있지 않나? 아침, 정시에 출근해 생산적인 일은 거의 하지 않고 회사에 1엔의 이익이라도 올리기는커녕 4만엔의 손실을 가져와 회사의 짐이 되는 중년 무리 말이다. 그들이 비즈니스에서 쓸모없는 인간이 된 이유는 명백하다. 퇴근 후 동료와 술집으로 향하고, 전철에서 스포츠신문을 읽으며, 집에 오면 TV 야구중계를 보며 맥주를 마신다. 비즈니스 서적을 읽거나 세미나에 참가하지도 않으면서 적극적인 사고는 제로에 가깝다. 회사에 입사한 지 20, 30년이 지나 시대가 변하고 직장에서 요구하는 능력 역시 크게 달라졌는데도 새로운 지식을 거의 습득하지 않은 상태에 있다. 결국 지금까지 자기 자신에게 어떠한 투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자는 ‘종신고용 신화’가 사라지고, 초저금리시대인 요즘 같은 때 수익률이 가장 높은 투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투자라며 계속해서 아픈 곳을 찌른다.



    “당신에게 일정한 수입을 가져다줄 직장이 없으면 지금 커가는 자녀의 대학 진학을 책임질 수 없다. 당신과 반려자의 수입 합계가 일정 수준 이상이 되지 않으면 자녀에게 충분한 교육 혜택을 줄 수 없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앞으로도 전철에서 스포츠신문을 읽겠습니까? 당신은 앞으로도 TV 오락프로를 보시겠습니까?”

    짐작하겠지만 ‘1日30分’은 일종의 자기계발서다. 이 책의 저자 후루이치 유키오는 요미우리신문사 카메라 기자로 일하다 서른 살에 유학을 결심해 미국 뉴욕대에서 MBA를 취득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른이 넘어서 습득한 영어 실력으로 일본 내 몇 안 되는 영어 발음 교정 권위자가 돼 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TV 안 보면 건강보조식품 불필요”

    자기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30분 단위로 공부해볼 것을 권하는 저자는, 하루 일정에 공부 시간을 추가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한때 ‘아침형 인간’이 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지만 후루이치 유키오는 잠을 줄이는 것보다 훨씬 쉽게 시간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한다. 바로 ‘TV 안 보기’ 혹은 ‘TV 시청 시간 줄이기’다.

    “수면 시간을 줄일 필요 없이 지금까지 TV 시청에 할애했던 시간을 자기 투자의 시간으로 돌리면 된다. TV를 멀리하면, 항상 시간에 쫓긴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무료함이 밀려오며 할 일이 없어질 것이다. 다른 직장인이 오락프로를 보며 깔깔대고 있을 때 여러분은 자신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다.”

    “TV를 끄세요, 수명이 우아하게 연장됩니다”

    전문가들은 “TV를 통한 정보 습득이 편한 대신에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혹자는 ‘하루 두어 시간쯤 TV 보는 걸 갖고 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 반응에 대비해 후루이치 유키오는 집요하게 계산서를 들이민다. 이 계산서에 따르면, 평일 2시간, 주말 5시간 동안 TV를 보는 32세의 사람이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잠자는 시간 빼고 꼬박 8년을 TV 앞에 매어 있는 셈이다(1년(52주)×5일(평일)×2시간+1년(52주)×2일(주말)×5시간=1040시간, 하루 7시간을 잔다고 했을 때 실질적인 활동시간은 17시간이니 1040시간÷17(1일)≒61일, 32세가 80세까지 48년을 더 산다고 가정하면 61일×48년÷365일≒8년).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TV를 끄면 80세에 죽어도 88세까지 산 것이나 다름없다.

    후루이치 유키오는 “TV 보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 건강보조식품을 사는 데 돈을 소비할 필요가 없으며 실질적인 인생의 활동 시간 역시 연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누구에게나 같다. 그러나 그 시간으로 일군 소득의 차이는 천차만별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진 이상 직장이나 학교, 학원, 각종 모임으로 일정이 빽빽한 사람이 시간에 쫓길 듯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TV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제때 마무리하지 못하고 “시간이 없다”며 투덜댈 때가 더 많다. 이에 관해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몸으로, 눈으로 숱하게 확인한 바다.

    직장인 이주승(가명·33)씨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이씨는 오락 프로그램만 골라 본다. 한동안 미국 드라마에 심취했으나 한번 보기 시작하면 밤을 새우며 ‘끝장’을 보는 통에 얼마 전 시작한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3’은 아예 ‘맛’도 보지 않았다. ‘24’ ‘프리즌 브레이크 시즌 1, 2’ 등을 보는 동안 TV에 끌려가는 ‘관계 역전’을 경험한 뒤로는 미국 드라마 시청을 경계하는 중이다.

    이씨는 스스로 TV에 대한 자제력이 있다고 자부하지만, 이씨의 아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얼마 전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평일 하루를 쉬게 된 이씨에게 부인 김미경(가명·30)씨가 출근하면서 몇 가지 ‘사소한’ 부탁을 했다. 아침에 식사대용으로 먹을 과일을 사다놓을 것, 밀린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릴 것, 주거래 은행에 관리비 자동이체를 신청할 것…. 김씨가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이씨는 침대에 누워 TV를 보고 있었다. 김씨가 부탁한 세 가지 중 처리된 건 한 가지도 없었다. 이씨는 한술 더 떠 “이발을 했어야 했는데…” 하며 머리를 긁적인다. 이씨는 종일 TV 보다, 자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선별해서 보는 게 더 어려워”

    숙명여대 박사과정에 있는 황인정씨도 TV가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가로챘는지 실감했다. 세 아이를 둔 주부인 황씨는 4년 전부터 TV 없이 지내다가 2년 전부터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몇몇 프로그램만 선별해 본다. 황씨는 “TV를 즐겨 볼 때는 늘 가족과 함께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한다.

    “TV를 보면, 한공간에 있어도 대화가 잘 안 되죠. 아이들이 한창 TV에 빠져 있을 땐 남편이 퇴근해 들어와도 본체만체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아빠 오기를 기다리고, 함께 붓글씨도 배워요.”

    자영업을 하는 김종진(44)씨는 2005년 3월부터 TV를 보지 않는다. 그 전까지는 ‘TV광(狂)’이었다고 한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늘 TV가 켜져 있는 환경에서 자랐고, 결혼해 가정을 꾸린 다음에도 역시 TV를 보는 게 일상이었다. 저녁 내내 보고 주말에는 10시간 이상 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익숙한 생활이었기에 잘못된 습관이라거나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TV를 ‘끊은’ 결정적 계기는 ‘내 아이를 지키려면 TV를 꺼라’라는 책이다. ‘한국일보’ 고재학 기자가 쓴 이 책은 갖가지 연구와 실천 사례를 바탕으로 TV가 가정생활, 특히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 TV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선물받은 김씨는 책에 등장하는 ‘문제 가정’ 사례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확인하자마자 TV 코드를 싹둑 잘라버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좋은 프로그램만 골라 보면 되지 굳이 TV를 없앨 필요까지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기준도 애매한 데다 아예 안 보는 것보다 선별해서 보는 게 더 어려운 일이죠.”

    “TV를 끄세요, 수명이 우아하게 연장됩니다”

    미국 TV시리즈 원작자로 유명한 스티븐 킹은 TV가 상상력을 키우고, 글을 쓰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TV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 김씨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전에는 1년에 책 한 권 읽기가 어려웠는데, 요새는 한 달에 예닐곱 권을 읽는다. 일곱 살,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인 아이들의 독서량도 꽤 늘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칠 필요도 없어졌어요. TV를 켜놓고 아이들에게 왜 공부 안 하냐고 하면 아이들이 말을 들을 리 없지만, 부모가 TV를 보는 대신에 책을 읽으면 따로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이 부모를 따라옵니다.”

    주말 풍경도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종일 TV 앞에 앉아 있었겠지만 요새는 조기축구, 등산, 농구동호회와 마라톤동호회 활동을 한다. 안 하던 운동을 시작한 뒤로 80kg이던 몸무게가 74kg으로 줄고, 허리둘레도 36인치에서 32인치로 줄었다. TV시청 한 가지를 포기했을 뿐인데 그에 대한 보상을 몇 배로 받은 셈이다.

    TV는 ‘보는 마약’

    ‘내 아이를 지키려면 TV를 꺼라’를 쓴 고재학 기자도 한때 소파에 누워 TV로 영화 보는 걸 가장 ‘한갓진 행복’으로 여겼다. TV는 “만사가 귀찮을 때 그냥 손으로 리모컨만 누르면 별천지를 펼쳐놓는 만화경의 세계”이니 말이다. 그러나 TV를 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TV를 보는 사람의 자세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천편일률적이 된다. 고씨 역시 “집에 가자마자 씻는 둥 마는 둥 안방에 틀어박혀 이리저리 TV 채널을 돌리다 곯아떨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학부모들 사이에 큰 화제를 불러왔던 ‘평생 성적 초등 4학년에 결정된다’의 저자 김강일씨는 이런 이유 때문에 TV를 ‘보는 마약’이라고 표현한다. “한번 보기 시작하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게 만드는 마력이 있는 데다 안 보면 불안해지는 중독성까지 있다”는 것. 고재학씨도 TV 안 보기를 시작한 뒤로 “TV가 단순히 바보상자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망가뜨리는 ‘보는 마약’ 이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연세대 심리학과 황상민 교수는 사람들이 TV 앞을 떠나지 못하는 것을 두고 “습관성 행동과 중독을 구분하기가 애매하다”며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줄 정도라면 중독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TV의 중독성에 대해 얘기할 땐 좀더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럼, 중독이 아니면 괜찮은가. 차라리 ‘중독’으로 판명나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치료에 몰두할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TV 시청 습관은 가랑비에 옷 젖듯 삶의 질을 갉아먹으니 문제다.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이 있는 게 아닌데도 무심코 TV를 켜는 행위, 딱히 만족스럽지 않은데도 채널을 돌려가며 계속해서 시청하는 행위, 달리 해야 할 일이 있는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TV를 보는 행위 등 유독 TV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향은 인생을 경영하고, 지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1인 기업가이자 여러 권의 자기계발서를 펴낸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은 TV를 안 본 지 3, 4년쯤 됐다. ‘낭비 없는 생활’로 유명한 그도 3, 4년 전까진 습관적으로 TV를 봤다고 한다.

    “TV는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이고 누릴 수 있는 가장 편하고 경제적인 유희지요. 그러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TV를 보고, 밤잠까지 줄이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제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방적으로 정보를 쏟아내는 TV를 보고나면 기분이 좋지 않아요. 무의식중에 많은 정보를 받아들이긴 했는데 쓸 만한 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까 허무하죠. 설사 쓸 만한 정보가 남았다 하더라도 그 방법이 수동적이었기에 만족도가 낮아요.”

    공 소장은 “요새는 헬스클럽에서 러닝머신 위를 달릴 때조차 TV를 보지 않는다”며 “퇴근 후 TV를 보지 않으면 최소 3시간 이상 벌 수 있고, 그 시간에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계획적으로 하면 인생의 그림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생각하기를 포기할 것인가

    가천의과대 뇌과학연구소 김영보 교수(신경외과)에 따르면 사람은 상대적으로 다른 감각의 기능을 포기하면서까지 시각의 기능을 키워온 측면이 있다. 덕분에 오감(五感) 중에서 시각의 정보 습득력이 가장 뛰어나다. 영상으로 정보를 제공하는 TV를 보고 있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건 가만히 있어도 가장 발달된 영역을 통해 정보 습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그러나 “TV를 보면 많은 양의 정보를 편하게 습득하는 대신 생각하는 능력을 잃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영상물에 자신을 내맡기다 보면 영상물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한 정보 습득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

    “글로 씌어진 작품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펴려면 뇌에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에서 과거 한 번이라도 경험했던 기억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니 뇌가 바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글은 이미지뿐 아니라 소리, 냄새, 감촉, 맛까지도 묘사하기에 그런 것들을 하나의 장면으로 합성하려면 뇌의 여러 영역이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편하게,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TV에 익숙해지면 독서와 같은 다소 불편한 방식의 정보 습득은 피하게 된다.”

    “TV를 끄세요, 수명이 우아하게 연장됩니다”

    빌 게이츠의 부모는 그가 어릴 때 TV 보는 것을 제한했다.

    10월28일자 ‘보스턴글로브’에도 비슷한 얘기가 실렸다. ‘신문은 살아남을까(Will newspaper survive?)’란 제목의 칼럼은 신문 산업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인터넷이 아니라 TV라고 주장한다. 인터넷이 신문 산업을 위협하는 요소이기는 하나, 신문 독자가 줄어들기 시작한 건 인터넷이 대중화하기 훨씬 전이니 신문의 적(敵)은 컴퓨터 화면이 아니라 TV 화면이라는 것. 특히 젊은 세대가 텔레비전 환경에서 자란 것이 치명적이라고 지적한다.

    “내용보다는 자극을, 집중적인 사고보다는 빠르게 전환되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텔레비전이 신문을 잠식해왔다. 아무런 자각 없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란 세대는 신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이에 앞서 조지워싱턴대 의과대 신경과 임상교수인 리처드 레스탁은 “지식이 소통되는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써 영상물이 언어를 앞지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레스탁 교수가 쓴 ‘새로운 뇌’(New Brain: How the Modern Age is Rewiring Your Mind, 2004)라는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영상물은 생생하게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으며 아무런 생각이나 분석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지식’이 소통되는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써 언어의 위치를 앞지르고 있다. 언어의 추상성은 영상의 사실성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처럼 결정적으로 상상력을 희생시키는 바람에 우리의 상상력은 이전만큼 풍부하지 않다.

    종이에 기록된 언어는 생각의 통로,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 기회를 열어놓는 반면, 영상은 언어에서 이뤄지는 만큼 철저하게 생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도 초보적인 차원에서 머물 뿐이다. 수많은 영상물은 단지 ‘저것 좀 봐! 너무 끔찍해!’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게 만드는 데 가치를 두는 것 같다.”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국내외 고전 소설을 보면 주변 풍경이나 등장인물 간의 관계를 포함한 상황 전개가 아주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읽다 보면 글자 위로 영화 같은 장면이 연상되곤 하는데, 가천의과대 김영보 교수는 “과거엔 오늘날 같은 이미지 홍수가 없었기에 그런 묘사가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미국 작가 스티븐 킹은 “TV를 봤더라면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상상력을 꼽는 스티븐 킹은, 자신이 영상매체에 넋을 빼앗겼더라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서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스티븐 킹이 써내는 작품마다 족족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중 상당수가 TV시리즈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할리우드 감독들이 그의 작품을 선호하는 건 ‘영상을 활자로 옮긴 듯한 치밀한 묘사’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티븐 킹의 작품을 영상으로도 즐기지만, 스티븐 킹은 정작 TV를 백해무익하다고 말한다.

    “작가가 되려면 상상력이 충만한 삶을 위해 본격적으로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텔레비전에 대한 덧없는 욕구를 벗어던진 사람들은 대개 책 읽는 시간이 즐겁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마련이다. 나는 저 끊임없이 지껄이는 바보상자를 꺼버리기만 하면 작품의 질은 물론 삶의 질까지 향상된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과연 그렇게 큰 희생일까? ‘프레이지어’와 ‘ER’ 재방송을 많이 보면 우리의 삶이 완벽해질까?”(유혹하는 글쓰기)

    최근 KBS의 TV시청료 인상 움직임이 여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지만, 조지워싱턴대 리처드 레스탁 교수는 정작 “텔레비전 시청의 대가는 시청료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

    “TV 화면은 이미 도를 넘어설 정도로 복잡하다. 영상과 소리에 자막까지 흐르는 화면은 이제 방송 내용과 아무 상관없는 메시지 자막까지 다루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뇌는 좀더 산만하고 분열적인 상태로 변하는 중이다.”

    현대사회는 어쩌면 다중 업무 처리능력을 요구하는지 모른다. 인터넷 서핑을 하면서 전화통화를 하고, 주가 변동을 체크하면서 메신저 대화를 나누는 등 현대인은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일을 할 때가 많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집중력이 유지된다는 전제하에서다. 한 가지 일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으면서 밀려들어오는 일도 처리해내는 ‘능력’과, 주의가 산만한 것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평소 TV에 빠져 깔깔대고 웃으면서도 다른 채널에서 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 리모컨 버튼을 만지작거리지 않는가. 레스탁 교수는 이런 행동이 주의력 결핍이나 과잉행동장애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TV를 볼 때 쉬지 않고 리모컨 버튼을 눌러 채널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은 이제 일상적인 일이다. 사춘기 아이들이 이와 같은 환경에서 자라나면, 그 가운데 일부는 산만한 조건에서도 효율적이고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다중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능력도 흔히 주의력 결핍 장애나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유대인 가정엔 TV가 없다

    특히 유아나 어린이의 경우 빠른 화면 전환이 특징인 TV에 익숙해지면, 심한 경우 학습장애를 겪을 수 있다고 충고한다. 곧바로 다음 장면을 기다리는 습관이 생겨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 가정에서는 TV를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대주의를 연구해온 현용수 쉐마교육연구원장에 따르면 유대인 가정의 거실은 TV가 없는 대신 도서관처럼 꾸며져 있고, 유대인 어린이는 어려서부터 까다롭고 복잡한 ‘탈무드’를 읽고 토론한다. 어려서부터 TV 영상에 익숙해지면 더 강렬한 화상을 계속 요구하고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싫증을 느끼기 때문에 전달 효과가 적고 덜 재미있고 오래 생각해야 하는 독서를 싫어하게 된다는 판단에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어려운 내용을 분석하고 해석하다 보면 일반 학교교육의 내용은 너무나 쉬워 몇 시간 공부하지 않고도 쉽게 따라갈 수 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이런 교육을 받으면 성장한 후 영상물을 볼 때 그 내용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반면에 쉽고 편하게 보는 영상물에 물든 사람들은 책에 적응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TV는 부자의 습관과도 거리가 멀다. 세계 최고 갑부로 손꼽히는 빌 게이츠의 부모는 빌 게이츠가 주중에 TV 보는 것을 금지했다. 빌 게이츠는 성장해서도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았는데, 미국의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시간을 텔레비전 보는 데 할애하는 게 아깝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신의 역할모델로 부모를 꼽는다. 만약 그의 부모가 습관적으로 TV를 켜놓고 아들을 TV에 맡겨두었더라도 지금의 빌 게이츠가 존재했을까.

    최근 ‘부자들의 자녀교육’이란 책을 쓴 ‘조선일보’ 방현철 기자는 “빌 게이츠의 똑똑함은 어릴 적부터 부모와 함께 복잡한 사안에 대해 토론하고 생각하는 훈련이 돼 있지 않았다면 쉽게 계발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그가 매년 몇 번이고 ‘생각 주간’을 갖기 위해 사무실을 비우고 ‘후두 커낼’이라는 산장에 들어가 외부인과의 접촉을 끊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들인, 지식을 습득하고 사고를 훈련하는 습관이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어진 결과다.”

    빌 게이츠도 “자라면서 부모님은 항상 내가 많이 읽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하도록 격려했다. 우리는 책에 관한 것부터 정치까지 모든 주제에 대해서 토론했다”고 했다.

    TV 안 보면 ‘왕따’ 된다?

    TV를 봐야 세상 돌아가는 걸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TV를 ‘끊는’ 게 세상과 격리되는 엄청난 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TV를 대체할 만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대학원생 오유정(25)씨는 10여 년 전부터 TV를 안 보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 심지어 요새 어떤 드라마가 인기인지도 꿰고 있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충분한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김종진씨는 신문과 인터넷, 라디오를 주요 정보 습득 수단으로 이용한다. 특히 라디오를 즐겨 듣는데, 들으면서 이미지를 연상해야 하기 때문에 TV를 볼 때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두뇌를 움직이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같은 뉴스도 라디오로 들으면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에 아이들을 노출시킬 위험도 적다.

    놓치고 싶지 않은 프로그램이 있어도 TV를 보지 말아야 할까? ‘성공하는 사람들의 다이어리 활용법’을 비롯해 ‘시간 경영’ 관련 책을 여러 권 쓴 일본 저널리스트 니시무라 아키라는 본 방송으로 보지 말고 녹화해두었다가 나중에 볼 것을 권한다. 그러면 광고 보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무심코 리모컨 버튼을 눌러 TV의 유혹에 걸려드는 불상사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병호 소장의 방법도 비슷하다. 보고 싶은 교양 프로그램을 발견하더라도 TV로 보는 대신 필요한 시간에 인터넷으로 보거나 관련 책을 읽는다. 원하는 콘텐츠를 TV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편견을 깨야 하는 것이다.

    후루이치 유키오는 TV 안 보기 실천이 어렵다면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고 권한다.

    □ TV를 2시간 정도 매일같이 보면, 원하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나?

    □ TV를 보고 있으면 5년 후, 10년 후에 유능한 사회인이 되어 있을까?

    □ 지금까지 오랜 시간 TV를 본 결과, 습득한 게 뭐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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