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2월호

영화 ‘색(色),계(戒)’를 읽다

적과의 동침, 그 야릇하고 잔혹한 몸의 대화 “뱀처럼 파고드는 그 남자… 내 심장이 굴복하고 말 거예요”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7-12-10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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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삭제판’이 강조되며, 개봉 전부터 파격적인 정사 신에 대한 ‘기대’를 모은 영화 ‘색, 계’가 중국에 이어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스파이가 된 여인과 그녀의 표적이 된 남자라는, 다소 상투적인 관계를 이안 감독은 어떻게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 반열에 올려놓았을까.
    영화 ‘색(色),계(戒)’를 읽다
    때론 몸이 언어가 되기도 한다. 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의 심연을 표출하고, 뱉고 나면 금세 진부한 표현이 되어 부패하기 시작하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선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에 있어 몸으로 주고받는 감각은 그 어떤 말보다 더 절실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나 ‘몽상가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인’과 로우예 감독의 ‘여름궁전’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들 속에서 몸은 훌륭한 언어이며 섹스는 근원적 대화라고 할 수 있다.

    200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과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의 ‘색, 계’ 역시 마찬가지다. ‘색, 계’는 이야기의 흐름을 몸의 언어와 눈빛으로 번역해낸 수작이다. 이 작품에서 몸은 필요불가결한 ‘장면’의 도구로 활용된다. 외국어를 이해하듯 섹스를 충동이 아닌 메타포로 볼 때 비로소 이 영화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감각의 제국’은 몸의 언어로 파편화한 이성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했던 시도의 극한에 가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일본의 어느 기생이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정부(情夫)를 교살한 뒤 그의 성기를 잘라버리는 충격적인 실화 ‘아베 사다’ 사건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실화에서 여자는 잘린 남근을 몸속 깊숙이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왜곡된 열정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을 이 작품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을 통해 제국주의 광기의 반대편에 놓인 다른 제국으로 묘사된다. 사랑하는 남자의 신체를 흡입하고자 하는 여자의 광기는 전쟁에 나가기 위해 길게 도열한 군사들과 훌륭한 데칼코마니가 된다. 열정의 통로는 다르지만 그들 모두가 미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전체주의의 광기와 대비된 그들의 열정은 실연(實演) 논란을 불러올 만큼 파격적인 정사 신(scene)으로 제시된다. 그들은 인간이 몸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그것은 상대방을 완전히 파악해 흡수하고자 하는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기도 하다.

    연기하는 삶의 희열



    ‘색, 계’의 정사 장면은 여러 면에서 ‘감각의 제국’을 떠올리게 한다. 체위나 시선의 교환, 촬영 방법 등에서 말이다. ‘색, 계’는 욕망과 경계라는 서로 다른 준거가 맞부딪치고 길항하는 대결의 장을 제시한다. 영국에 있는 아버지가 호출하기만을 기다리는 왕차즈(탕웨이 분).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자 다른 여자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아무 곳에도 의지할 바 없고, 옭아매는 것도 없는 상황에 놓이자 그녀는 자유보다 먼저 허망함을 느낀다. 갑작스레 무중력 상태에 놓인 왕차즈, 그런 그녀에게 새로운 삶의 계기가 마련된다. 그것은 바로 연극. 홍콩에 피난 온 학생들이 준비한 항일 연극의 여주인공 역을 부탁받는다. 왕차즈는 드디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느끼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 다른 삶이 왕차즈에게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희열’을 선사했다는 사실이다. 그 희열은 사실 ‘연기하는 삶’이 불러오는 희열, 그러니까 배우가 무대 위에서 경험하는 황홀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 배경이 일제 강점기인 1942년이지만, 그녀에게 특별한 정치적 의식은 없다. 그녀는 정치가 아닌 새로운 삶의 통로로서 연기를 선택한다. 문제는 연극이 좁은 무대를 벗어나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연극의 희열을 ‘진짜 항일운동’으로 확장하자고 결의한다. 이제 그들의 삶은 연극으로 전도된다.

    왕차즈는 부유한 사업가의 아내 막부인을 연기하며 친일파의 오른팔 격인 이에게 접근한다. 그런데 항일 연극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업가 역할을 하기 위한 돈과 스파이 역을 위한 요염함. 순진한 대학생 연극단은 이미 시작된 연극에 휩쓸려 자기 자신을 저당잡힌다. 왕차즈는 요부를 연기하기 위해 순결을 폐기처분한다. 하지만 순결은 아주 작은 대가에 불과하다. 그녀가 이불에 피를 흘린 날 단원들은 결국 친일파의 하수인을 죽인다. 이는 감행이라기보다 사고에 가깝다. 그렇게 사고처럼 그들은 역사의 한가운데로 빨려들어간다. 분홍신을 신은 소녀처럼, 그들은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이 위험천만한 연기에 몰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왕차즈는 조직의 명령에 따라 제거 대상으로 지목된 친일파의 정부(情婦)가 된다. 언젠가 그를 죽여야만 한다는 시한부 관계는 그녀에게 묘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친일파의 정부 역할. 왕차즈는 목숨을 건 이 연기의 긴장에 자신을 빼앗기고 만다. 연기와 삶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친일파인 적에 대한 사랑과 증오 사이에서 방황한다. 급기야 그를 연인이라 불러야 할지 제거해야 할 적으로 치부해야 할지 혼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위험한 것은 ‘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원하면서도 원치 않는

    영화 ‘색(色),계(戒)’를 읽다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는 섹스를 나누는 여자. 왕차즈는 자신의 배후인 항일 단체에 찾아와 호소한다.

    “남자는 뱀처럼 내 몸속으로 파고들어와요. 그 뱀은 심장까지 공격하죠. 하지만 언젠가 내 심장이 굴복하고 말 것 같아요. 그는 내가 피를 흘릴 때까지 멈추지 않아요. 고통에 몸부림치며 지쳐 떨어질 때, 그는 이 모든 행위를 멈추죠. 그는 알아요. 제가 하고 있는 것들이 연기가 아닌 진짜라는 것을, 그 고통이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녀의 말은 자신을 어서 이 연극에서 꺼내달라는 호소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연극에 정서적으로 깊이 연루됐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색, 계’가 연기에서 몰입, 몰아와 파국으로 이어지는 왕차즈와 이(량차웨이 분)의 관계를 ‘섹스’와 ‘몸’을 통해 그 어떤 언어보다 강렬한 파토스로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왕차즈와 이의 섹스는 성욕을 자극하는 포르노그래피의 선정성이 아니라 그들 관계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의미’인 셈이다. 이런 점은 서서히 달라지는 그들의 체위와 눈빛, 교성을 통해 섬세히 제시된다. 이를테면, 이와 왕차즈의 첫 섹스신은 ‘선정적 20분’이라는 광고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다.

    이는 왕차즈의 시간이 비는 틈을 타 드디어 그녀를 둘만의 비밀 공간으로 부른다. 이에 왕차즈는 스파이의 본분을 살려 옷을 하나씩 벗으며 자신의 육체를 전시하고 남자를 유혹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 게임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애초부터 이에게 섹스는 게임이 아니라 파괴적 욕망의 해소도구에 불과하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남자. 이에게 섹스는 범람하는 욕망을 배설하는 하수구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손발을 묶어서는 마치 화장실에서 배뇨하듯 성욕을 쏟아버린다. 이 장면에는 에로스도, 충동도 없다. 포르노그래피처럼 가학적 사디스트의 욕망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이 첫 정사 신은 그들의 관계가 경계하는 두 사람의 접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폭력적 정사 신이 아니라 그저 폭력에 불과하다.

    폭력적으로 시작된 그들의 섹스는 점차 경계를 푸는 과정으로 이완된다. 그녀의 눈을 마주보려 하지 않던 이는 정상위를 나누며 서로를 바라보게 되고, 입을 맞추지 않고 던지듯 외면하던 남자는 점차 그녀의 얼굴을 대면한다. 급기야 여성 상위를 허락하고, 그녀는 이의 눈을 베개로 가리며 그의 경계심을 시험하기까지 한다. 이가 여성 상위로 자신의 눈을 가리도록 허락한 것은 자신의 목숨을 그녀에게 맡기는 행위와도 같다. 단둘만 있는 방안에서의 섹스, 그것은 매우 사적이면서도 친밀한 관계다. 둘만의 ‘방’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도 하지만 둘 사이의 완전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이완의 공간이기도 하다. 이 마지막 섹스신은 결국 ‘이’가 경계를 풀고 그녀를 신뢰하게 됐음을 잘 보여준다.

    감정의 이완, 신뢰, 그리고 축출

    이가 왕차즈에 대한 경계를 풀고 연인으로 받아들였듯 왕차즈 역시 자신이 격렬하게 섹스를 나누는 상대가 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만다. 그 순간은 아주 찰나였지만 왕차즈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만다. 찰나의 선택으로 결국 그녀는 되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축출되고 만다. 친일파 이와 왕차즈의 섹스는 적을 탐색하는 행위처럼 잔혹하면서도 격정적이다. 내면을 드러낼 수 없기에 그리고 언어로 그 감정을 중계할 수 없기에 몸의 언어는 더욱 격렬해진다.

    왕차즈와 이가 섹스를 나누기까지는 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학생시절 처음 만나 유혹하려 했던 어설픈 순간에서 시작해 가난과 방황을 겪은 뒤의 만남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영화는 이 4년이라는 시간을 구구절절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초췌해진 왕차즈의 모습을 통해 그 시간을 유추하게끔 할 뿐이다. 그녀는 이 시간들을 겪고 난 후 “그 시절에 난 너무 어설펐어”라고 회고한다. 이 어설픔은 자신이 행했던 ‘막부인’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 많은 것을 망설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망설임은 자신을 던져 막부인이 되는 데 대한 저항감을 뜻한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을 버리고 완전히 막부인이 될 수 있음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영화 ‘색(色),계(戒)’를 읽다
    ‘색, 계’는 자신의 삶을 ‘연출’하려 했던 한 여자를 그리고 있다. ‘색, 계’는 잔혹한 작품이다. 막부인이 되어 이의 정부가 되어야 했기에, 그 연기를 위해 왕차즈는 자신의 순결을 아무 의미 없는 상대에게 폐기한다. 거기에는 추억이나 감정도 없다. 그녀에게는 애착을 가질 만한 대상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만일 첫 섹스가 그녀가 연모했던 남자와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첫사랑의 순결성에 닻을 내리고 이를 적으로 부르는 데 흔들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차즈에게 이는 훌륭한 연기 파트너이기도 하지만 인생 최초로 알게 된 ‘남자’이자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연기가 진짜 삶을 압도해버린 셈이다. 따라서 연기하는 것 외에 그녀를 삶으로 이끄는 충동은 아무것도 없다.

    연극에 포획당한 삶

    영화는 연기하는 삶에 전 생애를 포획당한 왕차즈를 통해 결국 산다는 것, 인생 자체가 목숨을 건 일회적 연극임을 보여준다. 연극의 절정에 결국 자기 자신을 노출한 왕차즈가 죽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안은 욕망을 통해 삶을 그려냈다. 그런데 순간순간이 바늘을 삼키듯 아프다.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처럼 시작한 영화는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조금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안은 관객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흥미로운 것은 왕차즈가 이로부터 선물 받은 6캐럿 다이아몬드를 보고 그를 놓아준다는 사실이다. 그녀를 움직인 것은 6캐럿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 자체다. 그것은 그녀가 평생 처음 받아본 ‘선물’이었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받았다는 것 자체에 황망해한다. 그녀는 선물을 받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연기하는 막부인이 아닌 진짜 왕차즈이기를 원한다.

    그녀의 인생은 그녀를 부르는 세 번의 호출로 인해 달라진다. 그녀가 쓸쓸히 봉쇄된 도로에 갇혀 ‘왕차즈’라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친구들을 떠올리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무대 위에 선 그녀가 무대 밖에서 부르는 그들의 음성에 고개를 돌리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안타까운 인생의 호출처럼 느껴진다. 누구든 자신을 부르는 그 목소리에 뒤돌아보는 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왕차즈의 것처럼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말이다.

    영화 ‘색(色),계(戒)’를 읽다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 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한국종합예술대 강사


    영화 ‘색, 계’의 후반부, 적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봉쇄된 도로에 갇힌 왕차즈의 모습이 쓸쓸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격렬하게 지나간 몸의 흔적 위에 이제 시간은 상실감만을 전달한다. 몸의 언어는 기록될 수 없기에 더욱 순간적이며 한편 허무하다. ‘색, 계’는 이렇듯 색의 허무함조차 감각적인 사유로 전달한다.

    결국 인생은 마지막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는 자의 편이다. 영화는 욕망의 언어에 귀 기울여 연기에 실패한 왕차즈를 따라간다. 역사는 경계하는 자들의 기록이지만 예술은 그렇게 스러져간 불운한 배우들로 인해 지속된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쓰다듬는 이의 손길이 애틋한 까닭은 그들의 열정이 그토록 우습게 끝났기 때문이다. 전 생애를 건 연극의 끝에는 죽음의 필연성이라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게 바로 ‘색, 계’의 잔혹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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