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입력2008-01-07 15:5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1780년 8월15일부터 20일까지 일기는 ‘열하일기’ 전집 중 아직도 중반이지만, 일기만 놓고 따지면 종장(終章)에 접어들었다. 레이스로 치면 반환점에 선 셈이다. 반환점인 8월15일 이후의 일기를, 연암은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이라고 했다. 연경(지금의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보고 겪은 일을 기록한 것이다.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쌍탑산 주변 지도.

    연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연암은 속이 있는 대로 뒤틀렸다. 물론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고, 연행을 시작하면서 못마땅했던 점들이 쌓인 결과다. 당초 청나라 고종 황제의 칠십 축수(祝壽)를 위해 길을 나서긴 했으나, 어느 날 어느 곳으로 오라는 것인지가 불분명했다. 산전수전 다 겪고 북경에 도착하기까지 축수 지점을 몰랐다.

    북경에서 닷새째 되던 날, 갑자기 열하로 오라는 황제의 지시를 받고 곧장 밤낮 가리지 않은 채 ‘나는 말을 믿고 말은 제 발을 믿고 발은 땅을 믿으며’ 열하로 향했다. 그리고 열하에 도착한 지 엿새 만인 8월14일 어스름 저녁, 또 한 번 북경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오고 가는 것이 조선 사절 마음대로가 아닌, 청나라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리는 판인데 조선 사절과 예부 사이에 오가는 ‘상주(上奏·임금에게 말씀을 아뢰던 일)’와 ‘칙유(勅諭·임금의 말씀)’에 터무니없는 ‘잠개(潛改)’, 그러니까 몰래 개필하는 짓이 자행되고 있음에 연암의 분노가 폭발했다. 3000리를 발섭(跋涉)했다가 겨우 엿새 만에 되돌아가는 것만으로 분통이 터지는데 하물며 예부와 역관의 농간이라니!

    그래서 8월15일자 일기는 조선 사신이 예부에 항의하는 정문(呈文)에 대한 잠개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일기 전후로 보아 우리 사절의 상주에 모호한 부분이 있었던 것도 같으나 북경으로 귀환하라는 결정은 전적으로 예부의 단독 결정이거나 잠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절은 강경하게 항의했지만 서로 책임을 전가하고 도리어 예부와 각을 세우는 결과만 초래했다. 따질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곤경을 연암은 따로 ‘행재잡록(行在雜錄)’에 털어놓았다.

    오랑캐 본성은 골짜기 같아

    ‘행재잡록’은 황제가 여행 중인 곳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기록한 글이다. 8월4일부터 14일까지 청나라 예부와 조선사절 사이에 올리고 내린 주유(奏諭) 외에, 연암이 나라를 걱정하고 겨레를 걱정한 나머지 허심탄회하게 피력한 국가관이 있다. 주유 내용에는 예부가 역관(譯館)의 대사를 통해 조선 사절로 하여금 열하로 오게 하라는 분부를 비롯해 경축 사절의 규모를 알리는 유시, 그리고 8월9일까지는 꼭 도착하라는 칙유가 포함돼 있다. 또한 황제가 조선 사절을 2품, 3품의 반열에 세웠으니 거기에 감사하는 주문을 올리고 차스룬부(札什倫布)를 찾아 반첸을 배알하고, 조선의 국왕은 조공을 하되 번잡한 허례허식은 그만두라는 내용의 칙유가 있었다.



    그뿐 아니다. 읽어 내려가는 필자의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다. 청나라 황제는 조선 사절의 일거일동을 시시콜콜하게 지시했다. 오늘날 국제간의 외교 관례나 의전 절차가 복잡다단하다지만 이렇게 일방적일 수 없다는 생각에 분이 치밀었다.

    연암은 진보적인 현실 절충론자였다. 그는 여기서 18세기 당시 조선인이 겪은 고뇌를 대변했다. 그때 청나라가 들어선지 140년이 지났건만 성리학파들의 존명(尊明)·호청(胡淸)론이 기승을 부릴 때였다. 그럼에도 청황의 초청으로 만수절에 열하까지 간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이다. 그래서 연암은 ‘행재잡록’ 첫머리를 이렇게 열었다.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쌍탑산 꼭대기에 수직 바위 두 개가 우뚝 솟아 있다.

    ‘嗚呼! 皇明, 吾上國也.…何爲上國, 曰中華也. 吾先王列朝 之所受命也.’

    (어허! 명나라는 우리 윗나라다. 왜 윗나라인가? 중국이었다. 우리 선왕과 역대 조정이 승인을 받은 나라다.)

    그런 다음 연암은 400년 동안 천자로 받든 형제 관계를 회고했다. 그중에서도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은혜를 기렸다. 그리고 지금의 청나라 현실과 그들이 베푼 특혜를 나열했다. 청나라는 조선에 조공을 줄여주고 대신의 반열에 세우는 등 특전을 베풀지만 정작 조선은 그것을 은혜나 영광으로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직 오랑캐의 회유로 생각했다. 그건 우리가 청나라를 끝내 중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청 또한 조선을 이웃으로 보지 않았다. 여기서 연암은 청나라 야성을 간파했다.

    ‘噫! 戎狄之性如溪壑不可厭也.’

    (슬프다! 오랑캐의 본성은 골짜기와 같아서 만족하지 못한다.)

    결국 걱정거리임을 밝히면서 상주와 칙유를 모으는 잡록의 머리말로 삼았다. 아무쪼록 이 글이 ‘천하의 걱정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걱정을 뒤로하는(先天下之憂而憂) 선비’에게 거울이 되길 넌지시 바랐다.

    이 글의 말미에선 조청(朝淸) 외교의 미래를 위한, 단호하면서도 아픈 지적을 해뒀다. 그동안 조-청 두 나라 사절의 진퇴에 관한 모든 업무를 예부가 관장했고, 그 성사 여부는 역관의 통역에 달려 있었다. 조선의 사절은 140여 년 동안 3000리 어간(於間)을 오가면서도 청을 오랑캐로 매도할 뿐 지방 관소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혀 없으면서 모든 것을 역관에 의존했다. 이에 연암은 ‘역관의 농간이 늘고 사절은 역관의 입만 바라볼 뿐’이라며, 마침내 ‘사신 된 자로서 반드시 한번 연구할 문제(爲使者不可以不講)’라고 고언했다. 지금 들어도 뜨끔하다. 외교사절이 통역을 지팡이 삼은 벙어리마냥 여러 나라를 누비는 일은 요새도 가끔 들리는 이야기다.

    북순의 어도, 목란위장 길목

    8월15일, 마침내 귀환 길에 올랐다. 미련 때문에 터덕거리다가 열하를 나설 때는 이미 한낮이었다. 연암은 인연에 관한 불가의 고사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상하삼숙(桑下三宿), 뽕나무 아래서 사흘을 잔 것도 큰 인연이랬는데 하물며 공자를 기리는 태학관에서 엿새를 묵었음에랴!’ 더구나 연암이 흠모했던 신라의 최치원이나 고려의 이제현조차 얼씬할 수 없었던 새북지방이니 말이다. 연암은 연신 ‘세상사 알 수 없노라(人生世間無定期)’고 탄식했다.

    연암의 귀로는 갈 때와 좀 달랐다. 갈 때는 고북구(古北口)에서 삼간방(三間房), 삼도랑(三道梁)을 지나 합라하(哈河)와 난하를 건너 쌍탑산(雙塔山) 아래로 열하에 입성했다. 지금의 국도 101번을 대체로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귀로는 열하에서 서쪽으로 광인점(廣仁店), 삼분구(三盆口)를 거쳐 역시 쌍탑산을 지나고 다시 난하를 건너 하둔(河屯), 왕가영(王家營), 황포령(黃鋪嶺), 마권자(馬圈子)를 거쳐 고북구로 들어선다.

    약간 서쪽으로 들어갔다가 남쪽으로 선회하는 궁벽 지대였다. 그 길은 강희가 강희 16년(1677)에 제1차 북순(北巡)을 시작해서 가경(嘉慶) 25년(1820)까지 근 150년 동안 어도(御道)를 구축하고 거기에 더덩실 행궁을 지었는가 하면, 강희 20년(1681)에 내몽골 이손하(伊遜河) 및 난하 상류지역 1만5000㎢에 650여㎞ 둘레의 황가 사냥터 목란위장(木蘭圍場)을 건설, 가경 25년까지 105차례 황가 사냥-목란추선(木蘭秋?)을 벌이던 곳이다. 그러니까 북순의 어도요, 목란위장으로 올라가는 길목이었다.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환연도중록’은 ‘열하일기’의 중반쯤에 해당한다.

    북경으로부터 목란에 이르는 주요 북순 어도로 다섯 길이 있었는데, 그중 세번째 코스가 대체로 연암의 북경 귀로와 겹친다. 북쪽 목란위장에서 이손하를 따라 당삼영(唐三營), 장삼영(張三營), 난기영(蘭旗營) 등을 남하하다가 열하의 서쪽 외곽인 삼분구, 객라화둔(喀喇和屯·지금의 난하진)을 지나 왕가영(王家營·지금의 王營子)에서 다시 삼도량을 경유해 고북구에 이르는 길이다.

    고대 중국에서 정치는 부국강병의 개념이었다. 또한 강병은 변방의 안정과 군비 강화를 뜻했다. 그래서 황가의 사냥은 단순한 오락이나 건강 단련이 아니라 군사 훈련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장(圍場)은 단순한 사냥터가 아니라 국가의 연병장이었다. 여기서 북순과 추선은 오늘날의 민정 시찰, 변강 탐색, 군사 훈련 등의 의의를 아우른다.

    더구나 청은 말 타고 활쏘기를 바탕으로 삼는 소수민족 만주족이 세운 정권이다. 바로 ‘이궁시정천하(以弓矢定天下)’, 곧 활과 화살로 천하를 평정한 집단이다. 그럼에도 중국 강남에선 반란이 오래 끌었고, 삼번의 난(三藩之難)이 평정되기 전 몽골의 각 부(部)에선 소란이 꼬리를 물었다. 거기다 제정 러시아가 남침을 노리며 발톱을 사납게 뻗치고 있었다.

    ‘석호천(射虎川) 호신창기(虎神槍記)’

    물론 중국은 전통적으로 황가의 위장을 세우고 행위(行圍)를 정례화했다. 벌써 은(殷)대에 담장을 치고 들짐승을 기르던 유(·#54333;)가 있었고, 한(漢)대에는 그에 상당한 상림(上林)을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청나라가 매년 가을 20일에 걸쳐 목란 행위를 한 것은 전통의 예제 외에 몽골과 제정 러시아에 대처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 때문이었다.

    거기다 강희·건륭 황제의 신기에 가까운 궁기(弓技)와 추선의 규모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연암이 기록했듯 강희는 등극한 지 20년 만에 오대산(五臺山)에 갔을 때, 숲 속에 출몰한 호랑이 한 마리를 화살 하나로 명중시켰다. 그 지점을 호랑이를 쏜 시내, 곧 석호천(射虎川)이라 명하고, 호랑이 가죽은 대문수원에 보관했다고 한다. 화살 30개를 뽑아 토끼 스물아홉 마리를 잡았다니 틀림없는 신궁이다. ‘강희융장도(康熙戎裝圖)’가 그것을 말해준다.

    강희는 1719년 8월, 추선을 마치고 열하로 돌아온 뒤 어전 시위들에게 자신의 수렵 전과를 알렸다. 어려서 활을 잡아 한 평생 잡은 짐승이 범 135, 곰 20, 표범 25, 이리 96, 멧돼지 132마리, 그리고 유인해 잡은 사슴이 수백 마리라 했다.

    옹정은 재위 13년간, 골육상잔으로 북순과 추선의 여유가 없었지만 건륭은 강희를 닮았다. 건륭은 그의 조부 강희로부터 물려받은 화승총으로 40여 년 불질해서 역시 신궁의 신화를 남겼다. 건륭17년(1752), 위장에 있는 악동도천구(岳東圖泉溝)에서 호랑이를 잡고 거기다 비석을 세우고 ‘호신창기(虎神槍記)’라는 비문을 남겨 강희의 석호천을 재연했다. 그도 마찬가지로 일생의 수렵, 그 수확을 발표한 바 있는데, 호랑이 53, 곰 8, 표범 3마리 등을 기록했다.

    두 황제는 목란(지금의 하북성 위장현(圍場懸))에다 역대 황제 위장을 건설하고 매년 수만명의 시위군을 동원해 미증유의 사냥을 벌임으로써 청나라 황실의 절정기를 누렸다. 추선 때마다 황자와 황손, 왕공과 대신의 창백한 얼굴이 총동원됐다. 고북구에서 목란까지 그 넓은 새외(塞外) 지역이 임전 태세로 바뀌었다니 오늘날의 ‘을지훈련’을 방불케 했던 모양이다.

    8월16일과 17일, 연암이 북경으로 돌아가는 노상에서 목격한 황족의 행차와 행위의 장면들로 미루어 볼 때 마침 목란추선이 있었던 것이다. 연암이 왕가영에서 점심을 먹고 황포령을 지날 무렵, 금 안장에 푸른 깃을 꽂고 홍보석을 단 모자를 눌러쓴 스무 살쯤의 귀공자가 바람처럼 지나가는데 30여 명의 기병이 그 뒤를 구름처럼 따랐다. 행인은 비켜서라는 벽제(?除)도 없이 말발굽 소리만 우렁찬 훤칠한 귀족 기마대를 만난 것이다. 다름 아닌 건륭의 조카 예왕(豫王)의 행차였다. 그 뒤로는 태평차와 가마, 수레가 따랐다. 그 가마에는 낙수(洛水)에 놀란 기러기처럼 예쁜 궁녀 셋이 재잘거리고 있었다.

    대장부 사냥질에 잔꾀라니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쌍탑산경구(景區) 내 고산평호(高山平湖).

    이튿날, 삼간방에서 예왕과 황손들의 사냥을 정통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이것 또한 단순한 스냅사진 한 장면이 아니었다. 필자에겐 세 가지 장면이 두드러지게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열한 살 난 황손이 한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전력투구할 때 기사 100여 명의 엄호를 받으면서 쫓고 쫓기는 일대 파노라마요, 다른 하나는 사냥 전용으로 기른 매의 이상(異常)적인 형상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흘 동안 사냥해서 겨우 메추라기 한 마리 잡을 정도의 수렵 흉년이다.

    매의 이상 형상이란 이런 것이다. 매의 발힘과 눈의 광채를 보호하기 위해 대가리를 검정 가죽으로 씌워 눈을 가림으로써 눈의 정기를 외곬으로 키웠다. 중국에서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가마우지라는 물새의 물갈퀴에 길을 들임과 비슷했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만주 사람들은 큼직한 덩치와 달리 사냥에 잔꾀를 부렸다. 사냥을 따르는 사내들의 팔뚝에 매를 얹어 기회를 노리고, 풍렵(豊獵)을 누리겠다고 매의 눈을 가려 마음대로 보지 못하게 한 것을 생각하며 슬며시 부아가 치민다. 그들 황가의 수렵장을 ‘목란’이라 부르는 것에도 실망스러운 음모가 깃들어 있다. ‘목란’은 ‘초록(哨鹿)’을 가리킨다. 초록은 백로가 지난 뒤 사슴이 짝을 찾을 때 그 사슴의 소리를 흉내 내어 수컷을 유인하는 피리다. 대장부가 사냥질하면서 사랑의 덫으로 짐승을 꾀고, 온 산천이 시끌벅적했던 관민 합동작전의 소득이 고작 메추라기 한 마리라니 황가의 추선치고는 형편 없는 흉작이었다.

    연암은 한편 중국의 무금무수(無禽無獸)한 환경을 탄식했다. 요동 땅에 들어 열하를 내왕하기까지 하늘에는 새가 없었고 땅에는 짐승이 보이지 않았다. 그 시절 조선은 가는 곳마다 갈가마귀 떼가 하늘을 까맣게 덮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 땅을 일으킨 만주족의 버릇이 수렵이니 제 버릇 버리지 못하고 또 어느 땅에다 사냥터를 일구려고 나서지 않겠나, 그게 걱정이었다.

    북경으로 돌아가는 도중의 또 다른 관심거리는 청석령에서 본 치도(馳道)와 고북구의 장성이다. 청석령의 치도는 황제의 동릉(東陵)행차를 앞두고 보수 중인데 치도 너비 20자에 좌우 협로 너비가 10자, 돌메로 고르고 흙손으로 발라서 베를 펼쳐놓은 듯 평평한 데다 먹줄에 맞춘 듯 규격이 맞았다. 연암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周道如砥(큰 길이 숫돌 같아라)’란 말을 빌려 찬미했다.

    치도는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육국을 통일한 이듬해부터 함양(咸陽)을 원점으로 아홉 개의 노선이 전국에 파급된 황제 전용도로를 가리킨다. 50보 너비에 30자마다 가로수를 심고, 길가에 담을 치도록 했으니 얼마나 화려하고, 한편으로 얼마나 많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으랴! 청나라, 특히 강희 때 4통8달 최성의 치도망을 기록했다.

    바라지고 아기똥한 행태

    이 보수 현장을 지나면서 연암은, 조선 사절 일행의 바라지고 아기똥한 범칙 사례를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저들은 흙을 메고 물을 뿌리면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금줄을 쳐놓고 행인의 치도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조선 사절이 고집스레 새끼줄 밑으로 엎드리거나 아예 금줄을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연암은 마부에게 치도 밑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변명했다. ‘감히 그럴 수 없어서, 또한 차마 그럴 수 없어서(不敢耶, 亦所不忍也)’라고. 여기서 또 한 번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겨레 버릇과 마음가짐을 확인하게 된다.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쌍탑산 자락에 있는 삼선관(三仙觀).

    그동안 여러 번 장성을 먼발치에서 보긴 했으나 한낮에 가까이서 보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장성은 산세를 따라 높고 낮은 참치(參差)와 굽이굽이 곡절(曲折)을 보였는데, 그 성벽이 부딪는 곳에 망루가 있었다. 대체로 40~50보 간격을 두고 60~70자 높이에 140~150자 넓이 규모의 망루가 있었다. 아무리 멀어도 200보 간격 안에 망루가 있었다. 망루마다 백총(百總)이, 망루 열 군데마다 천총(千總)이 경비를 섰다. 백총이나 천총 모두 지금의 위관급 하급 장교를 일컫는다. 망루 외에 봉수대도 있었는데, 1리 또는 2리마다 방울을 달아 경보를 하고, 더 먼 거리는 봉수대의 봉화에 따랐다. 이것들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의 병제라 했다.

    연암은 장성의 역사와 공법을 대강 훑어보았다. 장성의 역사를 육국시대로 거슬러서 조(趙), 진(秦), 연(燕)이 요새를 구축, 흉노와 동호(東胡)의 남침을 막은 것을 장성의 효시로 삼았다. 그 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몽염(蒙)을 시켜 임조(臨?)에서 요동까지 1만리에 걸치는 장성을 쌓았는데 아마도 연·조의 옛 성터를 보수 또는 신축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연암이 관찰했던 것은 한 틀에서 찍어낸 벽돌이다. 성의 주추는 돌을 깎아 쌓았는데 땅속에 다섯 겹, 땅 위에 세 겹(入地五帶, 出地三帶)이었다. 무너진 성을 통해 성의 너비가 50자쯤 보였고 흙을 섞지 않고 다만 나무에다 아교풀을 바르듯 얇게 회를 발라두었다. 그 벽돌들은 먹줄을 친 듯 깎아질렀는데 밑은 넓어서 튼튼하게 앉았고 위는 날카로웠다.

    이 대목에서도 연암은 일화를 남겨놓았다. 앞서 치도 보수 공사를 위해 쳐놓은 금줄을 끊어버리고 출입 통제 구역을 활보한 조선 말꾼의 되바라진 행위를 숨기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 시절, 조선엔 담을 없애는 단방문으로 천년 묵은 석회를 초에 버무려 붙이곤 했다. 그러나 천년 묵은 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다. 누가 알았는지 중국 만리장성 벽돌 틈에 붙은 석회가 제격이라고 했는데, 어디 무너진 성첩에서 주먹만한 횟덩이 줍기가 그리 쉬운가. 연암은 차라리 조선 길가의 무너진 성터에서 찾아볼 일이라고 스스로 답을 얻었다.

    지금 만리장성 연구는 여러 갈래로 심화 발전했다. 전국 때 진·조·연의 장성 시축설로부터 진나라 몽염의 보수 증축설, 흙 돌 벽돌 등의 혼축(混築)설 등 전통적인 시각을 연암도 모두 간파했다. 그중에서도 성의 주춧돌을 안으로 다섯 겹 밖으로 세 겹, 거기다 아래는 넓게 위로는 차차 뾰족해지는 벽돌 쌓기 등은 자못 전문적인 관찰이었다.

    연암은 5000년 중국의 상징인 만리장성을 만지면서 고언(苦言)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고북구 관문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지난번 깊은 밤 기우는 달빛 아래 열하로 달려갔다. 그러나 북경으로 돌아가는 지금은 한낮, 관문 밖 앙칼진 산악과 바위들 사이로 한때 산더미처럼 쌓였을 백골들을 연상하면서 이곳이 다름 아닌 ‘호랑이 아가리(虎北口)’임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100여 년의 태평세월이 흘렀다. 창칼은 멈추고 상마(桑麻)는 우거진 채 멀리 계견(鷄犬) 소리 들린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했다. ‘전쟁이 끊긴 지 오래면 토붕와해(土崩瓦解)의 전란이 가깝고, 너무 높으면 무너지는 것(崇極前?)이 물리인 것이다’라면서. 잠복 중인 전쟁의 위기를 예견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잘라 말했다. ‘중원에는 두 가지 환란이 있다. 하나는 강물이요, 다른 하나는 오랑캐다(中原大患二, 卽河也胡也).’ 하나는 황하의 범람이요, 다른 하나는 북방의 호족들이라는 얘기다.

    ‘오미자 사건’

    연암은 목란추선, 치도, 장성 이야기를 막 접을 무렵, 고북구 석벽 사이로 들어앉은 절간에서 오미자를 말리고 있던 스님과 그걸 훔쳐 먹던 조선 사절 일행 사이에 벌어진 일대 설전(舌戰), 하마터면 육박전으로 비화할 뻔했던 일화를 소개한다.

    이 사건은 어처구니없게도 연암에게서 발단되었다. 사절 일행이 어느 절에 당도했을 때 마침 스님 둘이 난간 밑에서 오미자 두어 섬을 말리고 있었다. 갈증이 났던 연암은 침을 돋우려 몇 알 집어먹었다. 그러자 한 스님이 눈알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이쪽에서도 노발대발했다. 까까중이 높낮이도 모르고 거품을 문 채 달려들자 마두가 뺨을 한 대 갈기더니 주먹으로 때려눕히고 말았다. 마두는 만세야(萬歲爺)께 알리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쌍탑산 입구.

    청나라 만세야의 세도를 믿고 으스대는 조선 마두라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마두는 그래도 성이 안 풀렸는지 “까짓 겨자씨만한 오미자 한 알 가지고 남의 대감을 모욕하다니!” 하며 벽돌을 던지며 위협하자 사태는 금세 화해 국면을 맞았다. 중이 산사 두 낱을 들고 나와 웃으며 청심환을 달라고 했다. 청심환 한 알 뽑아내려는 수작치고 너무 시끌했다. 연암이 요동반도를 지날 때, 신민둔 어느 참외밭에서 주인 늙은이가 앞서 가는 사절단 일행에게 참외를 서리 맞았다며 그 보상으로 청심환 한 알을 내놓으라고 거짓말했던 촌극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조선 사람이 오가던 국도 연변에선 두 나라 백성 사이에 속고 속이는 수작이 빈번했다.

    이른바 ‘오미자 사건’은 조선인의 기질과 중국 스님의 실리주의를 엿보게 하며, 또한 연암은 이 사건이 하마터면 두 나라간 전쟁을 촉발할 수도 있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러고는 통절하게 반성했다. 오미자 한 알은 비록 천하의 지미지경(至微至輕)한 겨자씨일지라도 그것을 주고받는 데는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한다는 견결한 자세를 보였다. 곧 유물의 존재를 인정할지언정 그 운용은 의리가 따라야 한다는 물심병중론이 요체다. 비록 소심증이나 결벽증으로 보일지언정 그게 아니면 세상이 흐려지거나 자칫 싸움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암은 끝내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쓴 잘못, 즉 허락 없이 오미자를 집어먹은 수치를 아프게 뉘우쳤다. 연암은 독선의 외곬이 아니며 슬며시 성리학의 신조인 ‘예·의·염·치’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승덕 부학과 태학관

    연암의 물심병중적 실용론은 8월7일자 일기 말미에도 보인다. 연도에서 물건을 운반하는 1100마리 낙타 떼와 맞닥뜨리자, 연암은 조선인에게 생소한 낙타를 생동하게 묘사했다. 학 같은 걸음에 거위 같은 소리, 말 같은 머리에 양 같은 눈이라고. 고려 태조 때 거란이 낙타 40마리를 보내온 적이 있다. 태조는 거란이 무도한 나라라며 본체만체 낙타를 어느 다리 밑에 매어두었다가 모두 굶어죽게 하고 말았다. 낙타가 무슨 죄랴만, 연암은 그 짐승이 먹성은 좋은데 둔하고 느린데다 좁은 길에선 거느릴 수 없다며 무용론을 펼쳤다.

    필자는 벌써 세 번째 열하에 당도했다. 한번은 2004년 12월 대한에 꽁꽁 얼어붙은 열하를 나흘이나 쏘다녔다. 구둣발로 피서산장 도처 호수를 깔깔대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2007년 5월, 역시 산장과 외팔문을 두루 다녔지만 연암이 엿새 동안 머물렀던 태학관을 찾지 못해 골탕을 먹었다. 귀국해 다시 승덕시문물국(承德市文物局) 연구원과 연락을 주고받은 끝에 승덕의 부학(府學) 자리가 옛 태학관이 아니겠나 심증이 갔다. ‘열하일기’의 ‘태학유관록’과 ‘공묘참배기(謁聖退述)’ 등을 대조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2007년 8월, 그것을 확인차 다시 열하로 향했다.

    지금의 부학이 연암이 말하는 태학임을 확인한 뒤 필자는 자못 성취감에 휩싸여 ‘열하일기’ ‘환연도중록’에 나온 대로 북경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쌍탑산이 있는 쌍탑산진으로 가기 위해 열하의 패루 밑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위장(圍場)행’ 버스가 지나갔다. 반가웠다. 비록 시간이 넉넉지 않은 데다 연암의 발자국이 미치지 않은 곳이지만,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황가의 사냥터가 있던 곳이니 말이다. 그 시절엔 이름이 ‘목란위장’이었지만, 지금은 ‘목란’을 잘라버리고 ‘위장’을 지명으로 삼았다. 버스로 2시간이면 간다기에 가보고도 싶었지만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되살아났다. 300년 전 푸른 산과 맑은 물, 사슴이 뛰고 범이 울부짖던 금원(禁苑)이, 건륭이 가고 가경(嘉慶·1796~1820)이 시큰둥한 뒤 산림은 벌채되고 간척이 늘어 해마다 척박해지고, 강물도 말라 비틀어졌다던.

    버스를 타고 서쪽으로 10여 분 가자, ‘삼분’이란 팻말이 보였는데, 상가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다시 10분쯤 더 가니 왼쪽으로 낮은 동산에 돌하르방 같은 수직 바위 두 개가 산꼭대기에 돌출해 있었다. ‘저게 쌍탑산이로군.’ 연암은 절경이라 했다. 황해도 동선굴의 사인암(舍人岩)이나 금강산의 증명탑(證明塔)과 방불한다고 했다.

    쌍탑산 꼭대기 요탑

    겨자씨 하나 주고받아도 필시 정당한 까닭이 있어야…
    허세욱

    1934년 전북 임실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대만 사범대 대학원 석·박사(중국문학)

    1961년 중국시단 데뷔

    한국외대 중어과 교수, 고려대 중어 중문학과 교수로 정년

    現 한국외대 대학원 초빙교수


    쌍탑산진에서 내려 쌍탑으로 곧장 올랐다. 산만 보면 메뚜기처럼 신이 났다. 겨우 1위안(약 130원)을 내고 공원에 들어갔다. 뙤약볕에 반시간쯤 걸어 올랐다. 큰 녀석은 35m, 작은 녀석은 30m. 큰 녀석을 한 바퀴 도는 데 100보쯤, 작은 녀석은 60보쯤, 필자는 세 번을 돌았다. 그 꼭대기에는 1300년 전쯤 세웠다는 요탑(瞭塔)이 있었다. 저곳에 어찌 사람이 올랐을까 싶다. 얼마나 진경인지 청나라 소설가 기윤(紀·#54457;)의 ‘열미초당필기’에도 이곳을 찬미한 대목이 있다.

    다시 서쪽으로 10분쯤 걸어가니 이손하와 난하의 두물머리 남쪽에 하둔이 있었다. 그때는 객라화둔으로 불렸던 곳, 열하 밖에 가장 큰 행궁이 있었단다. 여기서 곧장 북으로 가면 목란위장으로 가는 길이다. 지금은 난하진(鎭)으로 이름도 바꾸고, 행궁은커녕 신흥 공업도시로 변모했다. 여기서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 20~30분 가면, 역시 행궁이 있었던 왕가영이다. 연암이 여기서 예왕의 행차와 황손들의 사냥을 보았다. 지금은 왕영자(王營子)로 이름을 바꿔달았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