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 김석철 명지대 교수·건축학 archiban@kornet.net

    입력2008-01-08 13: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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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축은 한 국가의, 도시의, 사람들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21세기 세계 흐름의 중심에는 중국이 있다. 세계의 흐름을 알려면 중국을 봐야 하고, 중국을 알려면 중국의 도시와 건축을 이해해야 한다. 수천년 동안 원중국과 대중국의 역사를 겹겹이 입은 중국 건축이 최근 수입 건축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김석철 명지대 건축대학장은 “자기 문명의 위대한 진화만이 중국 건축의 희망”이라고 말한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30년 전만 해도 유럽과 미국을 아는 것이 세계를 아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중국을 알아야 세계를 제대로 아는 세상이 됐다.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책을 읽거나 연구하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도시와 건축을 체험하는 것도 유용하다. 유럽 건축을 통해 유럽 문명을, 미국 건축을 통해 미국 문명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문명이 이룩한 도시와 건축을 살펴봄으로써 문명에 대한 직접 접근이 가능한 것이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기번은 25년 동안 로마를 공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로로마노에 가서 느꼈다고 했다. 도시와 건축의 현장은 나라와 민족의 상형문자라 할 만큼 중요하다. 중국에 대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도 좋겠지만 중국의 도시를 방문하면 더 쉽고 정확하게 중국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은 단순한 하나의 국가가 아니다. 유럽 전체보다 크고 다양하고 역사가 깊은 중국은 하나의 국가라기보다 하나의 세계로 보아야 한다. 13억 인구의 중국대륙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보다 다섯 배나 크고, 세계 문명을 주도하는 유럽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문명국가다.

    중국이라는 대국가를 크게 두 개의 중국으로 구분해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한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이다. 중국은 인류문명의 발상지인 황하의 고대 문명을 바탕으로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돼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이어온, 중국 고대 문명이 지배해온 영역을 말한다. 춘추전국을 통일한 진나라,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받아들인 한나라, 삼국시대와 5호10국의 내란을 거쳐 당나라 때 세계국가가 된 중국이 바로 중국의 원형이다.

    또 하나의 중국은 외민족인 만리장성 바깥 나라들이 중국을 점령·통치한 중국으로, 몽골의 원나라와 만주족의 청나라가 원중국의 영토를 2배 가까이 넓힌 대중국이다. 신장, 티베트, 만주, 몽골 등 만리장성 바깥 나라들을 포함해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루고 있는 나라가 현재의 대중국이다.



    만리장성 바깥의 민족이 중국을 점령했을 때 밀려난 중국 사람들이 바로 화교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해외로 빠져나간 중국 사람들이 지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의 경제를 독점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화교들은 소수민족이지만 동남아의 중국인들은 그 나라의 지배세력이 됐다. 대중국은 중국을 지배하던 세력이 확장한 영토와 중국인이 바깥으로 나가 차지한 동남아시아를 포함한다. 중국 건축을 알려면 원중국과 대중국의 건축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중국 건축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중국 문명이 유럽 문명과는 다른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유럽 문명은 그리스·로마 문명이 중세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개혁하고 기독교 문명의 세계화를 이루고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거쳐 오늘의 현대 문명으로 진화했다. 이와 달리 중국은 2500년대에 걸쳐 완성된 고대 중국의 문명이 거의 그대로 근대까지 유지됐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이화원의 전경.

    석 달 만에 불태워진 아방궁

    아편전쟁 때 서구 열강이 중국을 침략해서 개방을 강제했다. 강제 개방된 상하이, 톈진, 홍콩, 샤먼, 마카오 다섯 항구에서 중국의 근대화가 시작됐다. 아편전쟁 이전까지 중국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춘추전국시대의 문명이 그대로 반복돼왔고, 건축과 도시는 하·은·주의 고대 왕국과 춘추전국시대의 것들이 그대로 한나라, 당나라로 이어졌으며, 몽골과 청나라가 지배한 500년 동안에도 원형이 유지됐다. 결국 중국 건축을 안다는 것은 중국의 고대 건축을 아는 것이며 현대 중국 건축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 도시와 건축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나 그리스 신전이 현재까지 남아 있고, 페르폴리스 궁전, 크레타섬의 유적, 로마의 포로로마노는 원형을 추측할 수 있을 만큼의 잔해가 있다. 독일의 쾰른 대성당은 600년 동안 지어졌지만 진시황이 지은 세계 최대의 궁전인 아방궁은 2년 만에 완성한 것을 항우가 석 달 동안 불태워 없앴다.

    서양의 건축은 위로 쌓는 조적조의 집이다. 하나하나 쌓아 올리기 때문에 집 위에 집을 덧지을 수 있다. 런던의 세인트폴 사원은 옛 사원 위에 덧지은 건축이고, 베드로 성당 아래에도 옛 사원이 남아 있다. 유럽에서는 이미 세워진 집 위에 집을 덧짓고 집의 용도를 바꿔 1000년 동안 다시 사용한다. 건물의 외피인 피라미드나 판테온의 대리석 등은 뜯어서 다시 사용했지만, 원래의 건축물을 파괴한 뒤 새로 짓지는 않았다. 유럽 사람들은 인간이 사는 도시가 영원하기를 바란다. 옛 건축과 현대 도시의 공존은 그들에게 큰 자랑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건축 가운데는 온전히 남은 것이 거의 없다. 중국에서 도시와 건축은 영원의 대상이 아니다. 아방궁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다. 중국은 새로운 도시를 지을 때 이전 도시의 건축들을 뜯어간다. 중국 건축은 목재조립식이기 때문에 옛집을 분해해서 그 부재로 새집을 지을 수 있다. 당나라가 장안성을 지을 때도 수나라 장흥성의 건축물을 해체해 옮겨갔다. 중국은 목재를, 유럽은 석재를 건축의 주재료로 하는 것은 삶에 대한 중국인과 유럽인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상의 자연보다 하늘의 자연

    유라시아 대륙을 대표하는 3개의 도시는 유럽 문명의 콘스탄티노플과 중동 문명의 바그다드, 그리고 중국 문명의 장안성이다. 콘스탄티노플은 바다의 흐름과 토지의 형상을 이용해 자연과 어우러지는 데 주안점을 두고, 바그다드는 주변 자연보다는 해와 달과 하늘과 연관된, 방위 이외에는 지상의 어떤 요소도 고려하지 않은 사막 한가운데에 선 원형도시다. 사각의 장안성 역시 바그다드와 같다. 다른 것이 있다면 물의 흐름을 도시 건설에 부분적으로 반영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동양 건축은 자연과 융화하고 서양 건축은 자연을 거스른다고 특징짓는다. 그러나 정작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들은 자연 지세를 최대한 이용한 데 반해 중동이나 아시아 문명, 특히 중국 문명의 도시는 지상의 자연보다 하늘의 자연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즉 바람과 물의 흐름보다 방위와 하늘을 더 중요하게 고려했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위)과 객가족의 전통 주택 토루(아래).

    대표적 중국 건축물인 자금성에는 하늘만 있다. 물론 유럽에도 기하학적 질서를 우선 고려해 건설된 도시가 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작은 소왕국들의 집합체인 데 비해 중앙집권국가이던 프랑스 파리에는 루브르 궁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한 단일 축상의 건축군이 얽혀 있다. 루브르 궁에서 콩코드 광장, 개선문, 샤를드골 거리를 지나 라데팡스까지 강력한 축이 이어진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파리는 루브르 궁을 중심으로 거대한 축을 형성해 베르사유에 또 하나의 이궁(離宮)을 지었지만 프랑스의 궁은 도시와 뒤엉켜 하나가 됐다.

    그러나 자금성은 1000년 동안 장벽을 쌓고 바깥과 왕래하지 않았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 하여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로 다닌다. 루브르 궁은 끊임없이 영속하는 도시와 함께하는 공간인 데 반해 자금성은 배타적이고 단절된 금단의 도시다.

    서양에선 철학과 문명이 달라지면 건축도 달라졌다. 다신교의 그리스 건축은 로마 건축으로 발전했고, 로마가 유일신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로마 건축은 로마네스크라는 독특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교황과 교회가 중심이 된 중세에는 고딕이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다 사람들이 인간 중심의 고대 세계를 되찾으면서 르네상스 양식이 생겨났고, 산업혁명과 민주혁명 이후에는 각각의 시대와 문명에 맞는 건축과 도시를 만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제자백가의 춘추전국시대, 법가가 통일한 진나라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삼은 한나라, 불교가 국가종교가 된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건축양식이 모두 같다. 문명의 진화와 상관없이 건축양식의 영속성이 이뤄져온 것이다. 이런 특성은 우리가 중국 건축을 이해하기 어려운 요인이자 이해하기 쉬운 요인이기도 하다. 바로 그것이 중국 건축의 원 모습이다.

    중국 건축의 원류는 춘추전국시대에 완성된 중국 문명의 삶을 담은 공간형식이다. 당시의 그림과 무덤 속 부장품, 기록을 토대로 춘추전국시대의 중국 건축을 살피면 이후 2000년 동안 중국에서 형성된 건축형식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건축에서 2000년 동안 새로운 것은 없었다.

    원중국 건축과 위·촉·오

    중국 건축은 지은 집을 부수고 다시 짓거나 부재를 갈아 끼면서 100년, 1000년을 지속해온 것이기 때문에 춘추전국시대의 노나라 수도인 취푸(曲阜)에서 당시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중국 건축의 원류를 알자면 취푸의 건축과 도시를 아는 일이 중요하다.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큰 흐름은 유가와 도가와 법가다. 노나라 취푸는 춘추전국시대 유가의 건축이 집중적으로 보존돼 온 곳이다. 노자, 장자의 철학과 사상체계인 도교의 건축은 충칭(重慶)과 쓰촨(四川)성에 남아 있고, 진나라의 국가이념이 된 법가와 유가 건축의 원리는 시안(西安), 베이징 등의 역사도시에서 이어져왔다.

    거의 사라진 중국 건축의 원류를 찾으려면 춘추전국시대의 사상을 공간형식으로 만든 미술과 조각 등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현재 원중국의 원형이 유지된 건축물은 당나라, 명나라, 송나라로 이어진 것들인데, 중국 건축이 시대에 따라서 양식을 발전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따라서 원중국 건축의 흐름을 알기 위해서는 시대적 구분보다 지역적 구분을 우선하는 것이 빠른 길이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대표적 ‘대중국’ 영토인 네이멍구(內蒙古) 자치구에 있는 칭기즈칸 능.

    유럽 건축의 경우 유럽 대륙에서 떨어진 영국에서조차 고딕 건물은 같은 건축양식을 공유하고 있으며, 르네상스나 바로크 건축양식 역시 비슷하다. 로마네스크의 경우는 프랑스 남부에서 성행했으나 유럽 중부지방까지 같은 시대 양식이 반복됐고, 고딕 역시 전 유럽이 같은 영향 아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특정 사상과 정치이념이 전역을 지배했다기보다 중국을 크게 동과 서, 남과 북으로 나눈 지역적 분계가 건축의 범주를 구분지었다. 서양 건축사에서는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근대 등의 시대가 중요한 흐름인 데 비해 중국에서는 근대화 이전까지는 역사적 구분보다 지역적 구분이 더 완고하고 뚜렷하게 나타난다.

    중국의 대표적인 지역적 구분은 삼국시대의 위·촉·오 세 지역을 기반으로 한다. 중국 사람들이 아직도 ‘삼국지’에 열광하는 이유 또한 그 때문인지 모른다. 삼국지에 나타난 지역들이 중국을 대표하는 문명의 형상언어와 공간형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안·베이징에서 보는 건축군과 항저우(杭州)·쑤저우(蘇州)에서 보는 건축군, 그리고 쓰촨·충칭에서 보는 건축군이 시대를 초월해서 확연하게 다른 것은 위·촉·오 세 나라의 역사적, 지리적 유전인자에 근거한 까닭이다. 각각 지역의 역사와 지리와 인문이 중국 건축을 보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워낙 광대한 데다, 대부분이 한족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다른 문명적 DNA를 가졌기에 베이징·산둥성 일대의 북부, 항저우·쑤저우 일대의 남부, 그리고 충칭·쓰촨성 일대의 서부 3곳을 따로 떼놓고 봐야 한다.

    원중국의 건축이란 통일된 중국 건축을 뜻한다. 그러므로 세 지역의 건축형식이 각기 다르다고 하더라도 세 지역에 자리 잡은 공공건축이나 종교건축과 같은 공통의 이념을 공유하는 경우에는 크게 다르지 않다. 미학적으로는 건축양식상의 미묘한 차이를 보이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건축문법을 사용한다. 이렇듯 공공건축과 종교건축의 건축 원리는 중국 전체가 같은 틀 안에서 표현의 지역적 차이가 있을 뿐이지만, 민중건축은 다르다. 일반인의 삶을 담는 그릇인 민중건축에서는 세 지역이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중국을 유럽보다 큰 단위로 인식했기에 지역마다 고유한 공간형식을 가졌다고 봐야 한다. 경복궁은 자금성의 아류라고 할 수 있지만 한옥은 어떤 중국 건축과도 다른 것처럼, 원중국 안에서 공공건축, 이념건축의 큰 흐름은 같았으나 민중건축의 작은 흐름들은 각 지역의 독립적 요소가 두드러진 것이다.

    피서산장, 포탈라 궁, 칭기즈칸 능묘

    대중국의 건축에는 원중국의 건축에서는 볼 수 없는 형상이 보이기도 하나 대체로 원나라와 청나라 건축을 원중국 건축이 흡수·통합했다. 이민족이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던 500년 동안에도 원중국의 건축은 큰 변화를 겪지 않았다. 대중국 건축은 당시 확장된 영토의 건축을 뜻하나, 몽골과 만주 등 본래 지역의 건축이 원중국의 건축에 영향을 받아서 중국화한 것은 참으로 기이하고 보기 드문 예다. 마치 게르만이 로마를 침략하고 나서 오히려 로마의 영향을 받았던 것과 같은 현상이 대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청나라의 피서산장,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 칭기즈칸의 능 등이다.

    대중국이라고 말하는 영역은 원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원중국을 침략한 사람들이 살던 땅, 즉 침략당한 자들이 더 얻은 땅인 몽골, 만주, 티베트, 신장을 가리킨다. 대중국 건축은 원중국 바깥의 건축형식인 몽골의 건축군, 신장의 석굴, 티베트 고원의 사원, 만주지방의 유목도시와 건축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건축이다.

    프랑스나 독일은 로마의 침략을 받았지만 다시 로마를 침공해 점령했고, 게르만 황제가 동로마 지역을 지배했지만 결국 로마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이처럼 원중국의 문명이 워낙 뿌리 깊고 광범한 영향력을 가졌기에 대중국은 오히려 원중국이 확대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중국 외부세력이 중국을 침략해서 중국을 확대한 대중국이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이 다시 지배계층이 된 뒤 대중국을 아우른 것이다. 원중국 건축과 대중국 건축을 함께 알면 중국 문명과 중국 문명을 확대한 외부세력이 중국을 지배한 과정 등이 녹아든 중화인민공화국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고층 건물이 빼곡한 상하이 푸둥지구. 중국 현대건축은 외래 건축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다.

    중국 문명의 특이함은 문명의 발상지이면서 외부의 영향을 끊임없이 수용하며 5000년 동안 자기 문명의 뿌리를 이어온 데 있다. 유럽 문명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해 그리스에서 꽃을 피우고 로마를 거쳐 지중해 일대로 확대됐다. 그것이 다시 게르만에 의해 유럽 전역으로 번지고 영국 대륙으로 확대되고 세계로 번져 나가는 끊임없는 확대와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중국 문명은 대륙 내부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문명의 강한 영속성은 있었으나 개화나 문명의 진화는 없었다.

    서양과 동양, 특히 유럽과 중국 문명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그리고 민주혁명을 계기로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무력과 종교를 바탕으로 민중을 다스려온 중세까지는 중국과 유럽이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르네상스를 계기로 민중의 깨달음, 민중과 지배계층 간의 갈등구조를 거치며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이 일어난 데 비해 중국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 기간에 세계 최강의 이민족으로부터 지배받으며 역사 발전의 기회를 잃었다.

    외세에 의한 현대건축

    유럽에서는 르네상스를 통해서 왕권이 더 강화됐고, 동시에 그 왕권에 대항하는 민권이 싹텄다. 민권이 싹틈으로써 민중과 지배계층이 형성돼 두 계층이 갈등을 겪으며 농경사회가 산업사회로 이동하는 변화를 맞았다. 이에 비해 중국은 창조적 소수와 민중의 자각이 부재한 가운데 부패무능한 권력집단의 통치체제가 지속됐다. 중세 이후 중국은 인구 정체와 농경체제가 지속된 반면 유럽은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통해 큰 변혁을 이뤄 두 지역의 간극이 커진 것이다.

    중국은 외세에 의해 근대화를 이뤘기에 프랑스혁명, 영국의 개혁, 독일의 민족통합 같은 민중의 깨달음에 의한 정치 변화가 없었던 것도 문제였다. 프랑스대혁명 못지않은 태평천국의 난이 있었으나 외세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돼 중국의 현대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결국 청 왕조가 아편전쟁으로 강제 개항을 맞을 때까지 춘추전국시대가 근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중국에서 현대건축이란 아편전쟁 이전엔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편전쟁 이후 다섯 항구가 개항하면서 홍콩, 상하이, 톈진(天津)과 다롄(大連) 등에 서양의 근대건축이 유입된 것이 중국 현대건축의 시작이다. 중국의 현대건축은 유럽처럼 역사의 흐름에 의해 역사건축이 현대건축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흐름에 의해 강제된 외래 건축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현대건축의 태동은 중국공산당이 중국 전역을 장악한 이후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전 중국을 통합하는 과정이 바로 원중국과 대중국이 하나가 되는 과정이며, 역사상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을 동시에 이룬 대변혁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유럽이 200~300년에 걸쳐 이룬 것을 공산화로 단번에 이뤘기 때문에 엄청난 실패가 따랐다. 그 실패의 대표적인 것이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다. 대약진운동은 전 중국 인구를 산업 전사화해서 일거에 근대화를 일으켜보자는 운동이었고, 문화혁명은 정신의 자각에 의한 철학운동으로 산업화의 물결을 일으키고자 한 운동이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마오쩌둥은 한족이 중심이 되어 대중국을 재통합하는 대통일을 이뤘지만 중국 근대화의 요체인 산업혁명과 민주혁명은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현대건축을 낳은 계기가 됐고, 마오쩌둥의 뒤를 이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중국 현대건축은 본격적인 걸음을 떼었다. 유럽보다 80년이나 늦은 시기다.

    루브르의 피라미드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건축 가운데 고대 중국 건축의 흐름이 현대화한 것은 없다. 그리스·로마 건축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로 진화하면서 발전한 것과 같은 문명의 진화에 속하는 현대건축이 중국에는 없다는 뜻이다. 중국의 도시는 서양 건축의 아류인 미국과 유럽 건축의 모조품이 휩쓸고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과 상하이에도 21세기의 현대 중국 건축이 아니라 아편전쟁 때 물밀듯이 들어왔던 유럽 열강처럼 세계건축 트렌드의 무분별한 상륙만 있을 뿐이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루브르 박물관의 상징이 된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인 건축가 I. M. 페이의 작품이다.

    자금성 앞에는 중국 문명과 어떠한 문명적 고리도 없는 프랑스 샤를드골 공항을 설계한 건축가가 만든 비문화적 형상의 베이징 국립극장이 들어서 있고, 중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CCTV 건물은 유행작가의 습작처럼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도쿄는 당대 세계 최고의 건축가인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초청했다. 일본 문화에 깊이 심취한 라이트는 일본 건축에 대해 일본 건축가들보다 더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도쿄의 지진을 유일하게 견뎌낸 제국호텔을 세웠다. 반면 중국 현대 문명의 요람인 베이징과 상하이는 서양 건축가들의 감동적 개입이 아니라 ‘자국 도시에서는 시도하지 못한 건축을 시도하는 시험장’이 돼버렸다.

    도쿄올림픽 때 일본의 대표적 건축가인 단게 겐조가 건축한 도쿄 올림픽경기장은 관객의 흐름을 최고의 효율로 처리하는 동시에 일본 문명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낸 작품이었다. 이와 달리 10만 규모의 관객을 수용해야 할 베이징 올림픽메인스타디움을 유럽 건축가의 미술작품처럼 만든 것은 대문명국가의 수도에서 이뤄진 일이라 믿기 어렵다. 중국은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의 역사, 지리, 문명을 담은 건축을 세상에 선보여야 한다. 그러나 주요 건축물은 모두 유럽 건축가의 작품이며 중국적인 것은 과거에 만들어진 자금성과 천단뿐이다.

    상하이 루짜치오의 초고층 건축물들도 외국의 건축을 본뜬 중국 건축가들의 습작이 뒤엉킨 모습이다. 초고층 건축에 역사와 지리, 인문을 반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초고층 건축으로 원용할 수 있는 문화적 유산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서양에서 이미 여러 차례 실패한 건축이 중국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문제다. 특히 초고층 건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공동체의 상실이나 에너지 문제 등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없다.

    문명의 원류인 중국은 인류문명이 부딪힌 과제에 답해야 할 주역이다. 그런 중국이 아편전쟁의 상처를 잊고 미국과 유럽의 건축을 직수입하거나 모조품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보기 딱한 일이다.

    수입 건축물 등살에 몸살 앓는 ‘위·촉·오  건축 DNA’
    김석철

    1943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김석철건축연구소장, 이탈리아 베니스대 자유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現 (주)아키반 대표, 명지대 건축대학장

    저서 : ‘집념의 궤적’ ‘천년의 도시 천년의 건축’ ‘김석철의 세계건축기행’ 등


    루브르 광장 앞에 서서 루브르 궁과 자금성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베이징은 유럽 건축의 각축장이 됐다. 그런데 루브르의 피라미드를 봤을 때 ‘아 여기 중국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한 I. M. 페이가 설계한 유리 피라미드로 루브르 궁과 루브르 박물관이 살아난 것이다.

    중국은 잠시 사라졌지만 중국인은 세계 어디에나 있었다. I. M. 페이의 가족은 전형적인 중국인이다. 중국인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요, 중국인이 있는 한 대중국은 영원할 것이다. 현재 중국 현대건축계는 장사꾼들이 판치는 보잘것없는 상황이지만 잠재력 있는 중국의 건축가들이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어깨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등장하는 건축가들에게서 조금씩 희망이 보이고 있다. 아편전쟁 같은 치욕을 자초하지 않고 자기 문명의 위대한 진화를 시도할 때 중국은 다시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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