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에서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김판수사장의 인생 유전

“빨갱이 됐냐” 묻던 이청준과는 결별, “넌 괜찮은 인간” 하던 염무웅과는 오랜 친분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입력2008-01-08 18: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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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년, 엘리트 코스를 밟은 청년이 영화인의 꿈을 안고 영국으로 떠난다. 사색과 문학을 즐기던 청년은 타국에서 사회의식에 눈 뜬다. 깨달음의 희열이 두려움을 눌렀다. 젊은 날의 호기심과 고민은 훗날 그를 남산 고문실로 몰아넣었다. ‘유럽 간첩단 사건’의 피의자 김판수씨는 40년 전 그 일에 대해 “감옥에서 얻은 것도 많다.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부끄럽지도 않다”고 담담히 말한다.
    너의 작은형에게도 강조한 바지만 중요한 건 지식이나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라기보다는 ‘사람의 사람다움’ ‘인간성의 바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리를 옳게 분별하고 그 옳은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는 일, 세상을 얕보지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용기를 가지고 즐겁게 살아가는 일이 우리들의 삶을 평범한 가운데 영웅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세계를, 그리고 모든 사물을 자기 나름으로 관찰하고 판단할 수 있기 전에 너무 종교에 매달리고 의존해서 보다 큰 자기발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시켜버려서는 안 된다. 자기완성을 향한 도정인 우리들의 삶이 너의 말처럼 반드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어떤 고정되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불변의 도식으로서의 길이나 방법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어떤 상황 하에서 보다 효과적인 태도라고 믿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가끔 빼먹어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그것이 너의 성장 발전을 위한 동력의 전부가 아니라 다양한 인간의 한 국면을 이해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나의 우려는 노파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아직도 미숙하고 불완전하고 약점투성이인 것을 전제하고 우리들 서로의 성장 발전을 위해 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관계는 서로간의 깊은 사랑과 이해의 바탕 위에서 세워질 수 있을 테니 어떤 문제라도 공통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로의 잘잘못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충고도 거기서부터 나올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무언가 너를 도와줄 수 있다면 그건 오직 평범함, 불완전함, 연약함 속에서 살아온 내 삶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일 뿐이다. 행여라도 너는 나를 지나친 기대라든가 너무 이상적인 인간상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지 말기 바란다. 자기보다 월등하게 훌륭한 인간이란 존경심보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이나 불필요한 격의를 만들 우려가 더 크기 때문이다.

    (살아가다 보면)우리들에게 반드시 찬란한 빛만 주어지는 게 아니고 어둡고 험난하고 때로 견디기 힘든 고통도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야겠지. 우리들 모두가 네가 지금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 저항 열등감 외로움 등을 통해서 성장했다는 걸 기억해주길 바란다. 너의 주위에는 너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수 있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우리 모두가 고귀하고 강한 사랑의 힘으로 묶여 있다는 걸 잊지 말길.


    옥중에서 동생에게 쓴 편지다. 깨알같이 빼곡하게 박힌 글씨. 침착하고 고요한 어투, 성찰적이면서 열정에 찬 생각,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주인공 신영복 선생과 흡사한 분위기의 또 다른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읽는다. 편지를 쓴 사람은 신영복 선생과 동시대에 비슷한 죄목으로 같은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김판수(金判洙·65) 선생이다.



    덴마크의 영화 청년

    편지는 1970~73년에 걸쳐 씌어졌고 남동생과 여동생, 부모님을 향한 확고하고도 애틋한 사랑과 염려를 담고 있다. 수소문해서 그를 만났지만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웃기만 했다. 출소 후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고 지난해 광주 문화방송에서 ‘1969년 국회 간첩단 사건’이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밖으로 알려지게 된 것일 뿐이라고 민망해했다.

    ‘간첩.’ 한때 우리에게 본능적 공포를 안겨주던 이름! 인사동 골목 안 밥집에서 만난 그 옛 간첩(?)은 맑고 내성적인 눈빛으로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을지 말지를 망설였다.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를 자꾸만 되물었다.

    우리 현대사는 이력이 복잡한 개인들을 만들어냈다. 언뜻 볼 때 그건 불운이겠지만 한 인간의 정신 영역을 확장하고 자유의 소중함을 확인하고 역사에 깊이와 무게를 부여하는 순기능도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무조건 덮고 넘어가기보다 되짚어 음미해보는 것만으로 꽤나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라고 나는 그를 설득했다.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에서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김판수사장의 인생 유전
    강물을 거스르듯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차근차근 짚어볼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후반, 즉 1967년 6월, 이른바 동백림 사건이란 것이 터졌다. 네이버 백과사전은 동백림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이 사건은 관련자 임석진(당시 34세, 철학박사)이 귀국하여 자수함으로써 밝혀졌다.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북한은 1957년부터 비교적 통행이 자유로운 동베를린에 거점을 두고, 대남공작 경험자인 박일영을 동독대사에 임명했다. 또한 조선노동당 연락부 대(對)유럽 공작 총책인 이원찬을 상주시키고 막대한 공작금을 동원해 서독을 비롯한 서유럽에 재학 중인 유학생 및 각계 각층의 장기체류자들에게 공작을 시작했다.

    이들 관련자들은 서신·문화·주민의 남북교류와 미군철수, 연립정부 수립, 평화통일이 불가능할 때의 무력남침 등에 대비한 간첩교육을 받았다. 그중 11명은 평양에 다녀온 후 해외유학생·광부·간호사 등의 명단을 입수하여 평화통일방안을 선전하고, 국내 민족주의 연구회와의 연계 및 각계 요인들에 대한 포섭, 선거에서의 혁신인사 지지 등의 지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1967년 12월3일 선거공판에서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반공법·형법(간첩죄)·외국환관리법 등을 적용하여 조영수· 정규명에게 사형, 정하룡· 강빈구·윤이상·이응로에게 무기징역 등 피고인 34명이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상주 장학관을 급파하여 유학생 및 해외 인사들의 반정부 활동을 감시했다.

    그러나 공소장의 내용과는 달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건 당사자들은 관련자들을 처음 만났으며, 평양을 방문한 적도 없고, 북한으로부터 간첩활동을 하라는 지령도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난 2006년 1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을 ‘1967년 6·8 부정 총선 규탄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베를린을 뜻하는 한자어 ‘동백림(東柏林)’은 동백꽃 혹은 동백숲쯤으로 연상돼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이들은 어이없게도 빨간 동백꽃을 문신한 여간첩이나 동백숲 속에서의 혈투 같은 것을 떠올리곤 했다. 내게도 오랫동안 ‘동백림’은 공포를 연상케 하는 단어였다. 심지어 동백숲이 우거진 해남 백련사에 갔을 때도 전말도 모르는 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떠올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동백림 사건은 독일 정부가 외교 채널을 통해 한국 정부에 공식 항의를 하고 유럽 문화계가 윤이상, 이응로를 위한 구명운동을 벌이고 하는 바람에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2, 3년 실형을 산 이후 다 풀려나왔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조차 3년 남짓 옥살이 후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그 무렵 유학생 김판수는 덴마크에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45km 떨어진 작은 도시, 셰익스피어 ‘햄릿’의 배경이 된 엘시노어(햄릿은 영국이 아닌 덴마크 왕자다)에서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에 다니는 학생이었다.

    “말하자면 국제학교 같은 곳이었어요. 학생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와 국제 관계와 역사와 문화를 공부했지요. 당시 내가 관심 있었던 것은 음…문학이 아니라 영화였어요.”

    박노수 교수를 만나다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에서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김판수사장의 인생 유전

    케임브리지 대학 교정에서(1966년). 가운데가 박노수 교수 부부이고 오른쪽에 김판수가, 왼쪽에 김신근이 서 있다. 뒤쪽에 선 사람이 임민식. 사진 속의 박 교수 부인은 박 교수가 사형된 후 아이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캐나다로 이민을 떠났다.

    그는 촉망받는 인문학도였다. 당시 광주지역 수재들의 정규 코스는 광주서중→광주일고→서울대였고, 김판수 또한 당연히 이 코스를 밟아갔다. 서울대 영문과 3학년을 마칠 즈음 인생을 전환할 기회가 왔다.

    “중고교 동창인 임민식이란 친구의 외숙부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로 있었어요. 도쿄대를 나오고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에서 국제법 강의를 맡고 있는데, 광주서중-광주일고-서울대 후배들을 위해 영국 유학길을 열어주고 싶다는 거였어요. 그때야 외국서 공부할 수 있다면 최고죠 뭐.”

    행운을 놓칠 수 없었다. 집안이 가난한 건 아니었지만 장학금을 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중고에 대학까지 동창인 김신근이란 친구에게도 함께 유학 갈 것을 권유했다. 셋은 꿈을 안고 영국으로 날아갔다. 일정상 출발은 따로 했다.

    “도중에 일본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내가 묵은 옆집에 조총련 관련자가 산다고 했어요. 그때 조총련이라는 말만 듣고도 머리칼이 쭈뼛했던 기억이 나요. 북한 정권과 민중을 구별할 줄도 몰랐어요.”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상태에서 출발한 유학길이었다. 민족의식 같은 것도 생기기 이전이었다. 그가 공부하고 싶은 것은 영화였다. 소설을 탐독하고 사물을 깊이 궁구하는 사색적인 기질의 그에겐 내심 미래 사회엔 소설보다 영상이 문화를 선도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

    1966년 봄, 영국에 도착했고 케임브리지에서 박노수 교수를 만났다. 박 교수는 빼어난 수재였고 멋쟁이였다. 젊고(당시 30대 중반이었다) 지적이고 다정하고 편안했다. 그가 방을 얻어줘 김신근과 함께 하숙을 했다.

    “북쪽을 찬양한다거나 그런 얘기는 전혀 없었어요. 다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것이 미국식 자본주의여서는 곤란하다.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서 있는 한 국제관계 속에서 통일은 이루기가 요원하다’ 같은 원론적인 얘기만 했어요. 서울서도 얼마든지 하던 얘기들이었어요. 우리가 6·3세대라 친구들 중엔 1964년, 1965년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하다 옥에 갇힌 이도 여럿 있었거든요. 나도 단식도 몇 번 해보고 경찰서에 잡혀가보기도 했지만 체질상 정치 문제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저 혼자 틀어박혀 소설이나 읽었지 바깥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거든요.”

    케임브리지에서 어학 코스 1년을 마치고 덴마크로 갔다. 박노수 교수가 그렇게 권했다.

    “거절할 처지는 아니었어요. 학비와 체제비를 박 교수가 대주고 있었으니까….”

    핀란드 여학생과의 첫사랑

    동백림 사건이 터진 것은 덴마크로 온지 반년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맑고 밝은 초여름, 그는 그 무렵 한 여학생과 애뜻한 정을 나누는 중이었다. 핀란드에서 온, 첼로를 안고 있는 소녀. 눈이 지중해 바다처럼 신비하게 파란 여학생이었다.

    “그 학교엔 남학생은 40명쯤밖에 안 되고 여학생이 80명쯤 됐어요. 그러니 남학생들이 인기가 있었지요. 내가 평소에는 소심하고 내성적인데 그 핀란드 여학생에게만은 적극적이었어요. 같은 클래스의 독일 남학생이 그 아이와 친했는데도 아랑곳없이 말을 붙이고 그랬다니깐요.”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에서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김판수사장의 인생 유전

    덴마크 인터내셔널 피플스칼리지에서 동급생들과(1967년). 맨오른쪽이 김판수이고 가운데가 임민식, 왼쪽이 김신근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김판수 선생은 어제 일인 듯 뺨을 붉힌다. 이국에서 싹튼 첫사랑이었다.

    “핀란드에서 왔으니 그녀는 영어를 잘 못해요. 내가 영어를 가르쳐줬는데 막상 이야기를 해보니 핀란드의 삶도 우리와 비슷한 게 많았어요. 먹을 게 없어 감자만 먹고 살았던 얘기, 겨울밤이 스무 시간씩 이어지는 얘기들이 다 친근했죠. 그녀와 페리 보트를 타고 딱 한 번 스웨덴으로 놀러 간 적도 있어요.”

    “스웨덴이 멀지 않아요?”

    “바로 강 건너였어요.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죠.”

    그 여학생 이야기가 나오자 인터뷰도 점점 흥미가 진진해졌다.

    그날 학교에 갔더니 학생들이 무리지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뭔가 하고 들여다봤다. 바로 동백림 사건이었다.

    “한국 정부가 유럽 유학생을 체포해갔다는 소식이었어요. ‘르몽드’는 그 사건을 신문 한 면 전체에다 깔 만큼 크게 보도했죠. 밥 먹다가 불려나간 유학생의 행방이 묘연하고 다리미질하다 전기 코드를 꽂아두고 나간 유학생의 아내도 소식이 끊겼다고 전하면서 한국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를 맹렬히 비난했더군요.”

    신문을 넘겨다본 김판수 학생의 가슴이 크게, 덜컥, 내려앉았다. 남의 일이 아니었다. 동베를린! 그도 아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본 적이 있었다. 박노수 교수가 영국에서 덴마크로 가는 길에 동베를린에 한번 들러보지, 라고 말했었다. 거기서 일주일 정도 머물렀더랬다.

    “호기심이었나요?”

    “호기심? 그것도 없진 않았지요.”

    “그새 사회주의자가 되신 건가요?”

    “사회주의자? 주의자까지는 아니라도 생각이 바뀌긴 했지요.”

    “박노수 교수에게 세뇌를 당하셨나요?”

    “그런 얘기를 직접 나누진 않았지만 의식화랄까, 그런 과정을 거치긴 했겠지요.”

    “위험하다는 걸 모르셨나요?”

    “알았지만 그보다…진실을 알고 싶었지요.”

    “무섭지 않았나요?”

    “무섭기도 하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게 아닌가 싶은 위기감도 들었죠. 그러나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구나 싶은 희열이 있었어요. 나중 것이 아마 더 컸을 겁니다.”

    동베를린의 북한 외교관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에서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김판수사장의 인생 유전

    대전교도소에서 1970년 무렵.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판수에게 일본어와 중국어를 가르쳐준 남파 간첩출신 고대유, 맨 오른쪽이 김판수, 맨 왼쪽은 통혁당 사건 무기수였던 서울대 철학과의 오병철.

    그의 어조에는 격앙도 울분도 없었다. 심상하고 평화롭고 시종 수줍다고 해도 좋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과장하지도 왜곡하지도 않고 당시 자신의 심정과 상황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전달하려 애썼다.

    1960년대 독일은 동·서독간 대학생 교류가 비교적 활발했다. 학교 안에 ‘모스크바 2주 여행, 파격적인 가격!’ 운운하는, 크렘린 궁을 배경으로 찍은 여행광고가 심심찮게 나붙었다. 그걸 처음 봤을 때 반사적으로 가슴이 섬뜩했을 만큼 그는 반공교육에 단련된 사람이었다.

    “냉전시대라 했지만 유럽에서 공산국가 왕래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자연히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북한 인쇄물을 접할 기회도 많았죠. 여기서 듣던 것과 달리 신의주 거리의 깨끗한 아파트 사진 같은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몰라요. 호기심에 북한에서 나온 책들을 읽었어요. 비날론을 발명한 이승기 박사, 경락의 존재를 증명한 김봉한 박사의 전기를 읽으며 이전의 막연한 생각과 달리 북한이 과학자를 우대하는 사회라는 것도 알게 되고…그러면서 호감을 느꼈어요.

    또 박 교수의 권유로 여러 책을 읽게 됐어요. 고리키의 ‘어머니’,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같은 책을요. 사회주의 10월 혁명과 국내전, 레닌의 사망, 스탈린의 권력 장악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이르는 혼돈과 투쟁, 성취와 실패, 환희와 좌절의 기록을 읽으면서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가 더 인간을 사랑하는 제도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충격이었어요. 혁명이란 것이 인간에 대한 절실한 사랑에서 출발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어요….”

    과연 의식화였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유럽 대학생들 사이에선 극히 자연스러운 사고였을 뿐이다. 박노수 교수가 동베를린 여행을 권했을 때 ‘진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젊은이다운 탐구심이기도 했고 ‘의식의 전복’에서 온 배반감일 수도 있었다. 물론 마음은 복잡하고 착잡했다.

    “어디서 묵었나요? 어떻게 갔나요? 무슨 얘길 들었나요?”

    그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가서 한 주일 동안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어요.”

    그가 방문한 곳은 평양에서 동베를린에 파견 나온 40대 외교관의 집이었다. 동베를린 어느 전철역에 가서 내렸더니 그쪽에서 지도원이란 사람 둘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동·서독은 국경에서 간단하게 여권을 확인하는 수속을 거치면 왕래가 가능했다.

    외교관 부부와는 인사만 하고 별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대신 지도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돌봐줬다. “집 떠나 낯선 곳에서 공부하자니 얼마나 힘이 드느냐, 내 집처럼 푹 쉬어라.” 깨끗한 수건과 이부자리를 마련해주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차려줬다. 그들은 품위 있는 공작원이었다. 무엇보다 역사와 문화에 이해가 깊은 지식인이었다. 거부감은커녕 인간적인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기네를 알고 싶어 찾아간 사람이니 고마웠겠지요. 대접을 어찌나 극진하게 해주는지 그것만으로도 감격할 지경이었어요. 거기 가면 정해진 프로그램이 있어요. 독립운동 하던 시절부터 해방과 전쟁, 이후 북한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을 담은 영상물을 보여줘요.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엉엉 울었어요. 사람이라면 그걸 보고 울지 않을 수가 없을 그런 내용이었죠. 미국의 탐욕과 파괴, 우리나라에 대한 야만적 침략상을 생생한 화면으로 봤어요. 제국주의는 적응하거나 타협하는 대상이 아니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됐어요. 통일을 막아서 이익을 얻는 세력이 누구인지도 알게 됐고….”

    그렇지만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는 동의할 수도 없고 희극적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걸 인정했다.

    “‘물론 다 옳진 않을 거다. 민중의 열광은 역사적 맥락을 읽으면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분단이 고착화되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한다. 남쪽에 군사독재 정권이 물러가고 민주화가 이뤄져야 통일이 앞당겨진다’…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동백림 삭풍

    1967년의 일이다. 그날로부터 만 40년이 지났다. 대통령이 두 번이나 평양을 방문했으니 상황이야 물론 달라졌다. 그러나 남한 사회 내부에서 저런 담론은 여태도 금기다. 통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명제에도 합의하진 못한 것 같다.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비난하는 이가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결곡하고 섬세한 눈빛과 언어를 가진 김판수 선생이 그간 얼마나 마음을 다치며 살았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1967년 겨울 동베를린에 한 주일 묵었고 몇 달 뒤 봄에 한 번 더 거기에서 머물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무슨 약속이 있었던 것도, 구체적인 간첩행위를 요구받은 것도 아니었다. 노동당 입당이니 평양 방문 같은 얘기는 듣지도 못했다. 남쪽에 지식인 친북인사를 만들겠다는 뜻이지, 구체적 행위를 요구할 의도는 없어보였다.

    민족애와 호기심과 호감에서(그 호감은 아마도 남쪽의 군사독재체제가 행한 인권유린과 억압, 부정부패에 대한 반발에서 생겨났을 것이다) 유학생들은 동베를린으로 갔다. 작곡가 윤이상이나 이응로 화백도 똑같은 경우였다. 조국의 분단현실을 안타까워하고 더 나은 조국의 미래를 열어보려 애쓴 노력의 일환일 뿐이었다는 것을 이제 정부의 과거사위가 밝혀냈고 그들을 사면했다. 그러나 끝내 순수한 의도를 밝혀내지 못하고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도 많다.

    그날 덴마크 인터내셔널 칼리지에서 신문을 들여다보던 김판수, 그는 정보부 사람들이 자신을 잡으러 오지 않는 것이 되레 이상했고 불편했다. 그러나 박노수, 김신근, 임민식, 김판수는 당시 정보부의 레이더에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동백림 사건은 그들을 비켜갔다. 잡히지 않았지만 불안은 더 가중됐다. 박노수 교수가 그들 셋에게 지원했던 돈이 북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끼리도 동베를린에 다녀왔다거나 그 돈이 어디서 온 거라는 얘기를 나눈 적은 없어요. 김신근은 원래부터 반정부적 성향이 있는 친구였죠. 나보다 두 달 먼저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는 내가 사회주의 체제를 잘 받아들이지 못할까봐 걱정했다고 하더군요.”

    더 이상 유럽에 머물 수 없었다. 국내에서 동백림 사건은 그럭저럭 마무리되는 듯했다. 잡혀갔던 이들도 거의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박노수 교수도 ‘이 사건은 이걸로 종결됐으니 걱정 말고 귀국하라’고 하더군요.”

    그해 겨울 그는 귀국했다. 김포공항에서 기관원에게 잡힐지도 모른다 싶었다. 그러나 아무도 잡으러 나온 사람은 없었다.

    “주변에선 미국으로 가버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어요. 그러나 그러기 싫었어요. 고초를 겪더라도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싶었지요.”

    ‘남산의 공식’

    처음 외삼촌 박노수 교수를 소개했던 친구 임민식과 둘이서 서울로 돌아왔다.(임민식은 그 후 여자친구의 청으로 곧 덴마크로 다시 나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남민전의 홍세화 선생이나 송두율 교수와 비슷한 경우가 된 것이다.)

    복학하는 대신 취직을 했다. 학교에 돌아가는 건 이미 관심 밖이었다. 어찌됐건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됐다. 무역이 막 시작되던 즈음이라 영어 구사에 자유로운 그가 할 일은 꽤 많았다. 1960년대 말 영어에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영진약품에 취직했다. 그가 맡은 일은 영국의 제약회사에 주문 편지를 쓰는 일이었다.

    “영어를 유창하게는 못하고 끙끙대면서 에세이를 겨우 완성하는 수준이었는데 ‘비즈니스 영어엔 최고’라는 말을 들은 건…순전히 그 핀란드 여학생 때문이었어요. 편지를 주고받느라 작문 연습을 많이 했거든요. 책을 좋아해 어휘력이 늘었고 문법에 맞는 고품격 영어를 쓸 수 있었죠.”

    영어에 능통했으니 능률이 배로 올랐고 회사로부터 최고 대우를 받았다. 일이 끝나면 염무웅, 김지하 같은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다. 괴롭고 또 즐거웠다.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정치 민주화가 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은 유럽 시절과 똑같았다. 옥중 편지에서 말했듯 그는 사리를 옳게 분별하고 그 옳은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머리 허연 사람들이 젊은 사장 앞에 비굴하게 저자세를 취하는 사회구조가 힘겹고 거북했다. 사람에게 숨은 추악한 이면들을 견디기 어려웠다. 사장이 몇 번이나 사람을 보냈지만 끝내 회사를 그만뒀다. 친구와 함께 자그만 오퍼상을 차렸다. 자신과 세상을 속이지 않고 남을 존중하면서 양심을 다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뭔가에 관심이 갔다.

    “그 무렵 새마을운동을 시작해서 슬레이트 지붕의 수요가 엄청났어요. 캐나다에 편지를 써서 슬레이트 만드는 재료를 수입하는 데 성공했어요. 당시 돈으로 커미션만 1600만원 정도를 받기로 약속돼 있었는데….”

    잊히지도 않는 1969년 5월1일, 새벽 5시에 누가 그를 불러냈다. 덴마크에서 돌아온 지 1년 반이 지난 시점.

    “외할머니와 동생 둘과 갈현동에 살고 있을 때였죠. 친구가 ‘판수야’ 불러서 나갔는데 그 친구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어요. 뒤에서 어떤 사람 둘이 나오더니 ‘잠깐 갑시다!’ 하며 옆에 서는 거죠 뭐.”

    그날 남산이란 데를 처음 가봤다. 매질부터 시작됐다. 아무 설명도 없었다. 박노수 교수가 이미 붙잡혀 와 다 털어놓았다고 했다.

    “남산에 가면 공식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입을 안 열고, 고문하고, 끝까지 버티고…나로서는 달리 할 말도 없었어요. 동베를린에 두 번 갔다는 것 외엔 없었거든요. 따로 간첩활동을 한 것도 아니고…자꾸 물증을 내놓으라고 하는데 물증이랄 게 뭐 있나요. 여권이 있었는데 그것만은 왠지 감췄어요. 별것도 아닌데 내놓고 싶지가 않더라고요.”

    “물고문, 전기고문…그런 것도 받으셨나요?”

    그는 웃으며 대답을 비켜버린다

    “가지가지 맛이야 봤지요. 심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다른 이야기 끝에 슬쩍 덧붙였다.

    “고춧가루를 타서 들이부어도 말하기 싫은 건 말하기가 싫데요. 날더러 겉보기엔 약해 보이는데 의외로 악질이라고 하더라고요, 하하….”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김판수 선생은 이상할 정도로 맑게 웃었다.

    회합죄, 금품수수죄, 찬양고무죄

    “고문과 폭행은 괜찮은데 정신적인 공포감을 견디기가 어려웠어요. 별의별 협박을 다 하거든요. ‘우린 법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만 보호한다. 고문하다 죽으면 휴전선 철책 안에 던져놓으면 그만이다. 북으로 탈출하다 총살당했다면 만사 끝이다’는 식으로 얘기하지요.”

    2주 후 서대문구치소로 넘겨졌다. 구치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 끼쳐오던 똥 구린내를 지금도 기억한다. 견딜 수 없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밥알 하나 입에 댈 수 없었다. 정신없는 한 주일이 지나자 이번엔 견딜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슬프도록 배가 고팠다.

    “0.75평(2.48m2)의 독방에 갇혀 완전히 본능만 남은 동물이 되는 거예요. 밥알 하나하나가 그렇게 달 수가 없었어요. 그 허기에 매달려 살았죠.”

    1심에서 7년을 언도받았다. 항소했다. 변호는 한승헌 변호사가 맡아줬다. 고등법원에서는 2년을 감형받아 5년이었다.

    “박노수 교수는 사형, 김신근은 7년형을 받았어요.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인데 반공법 중에서도 회합죄, 금품수수죄, 찬양고무죄 같은 것이었죠.”

    1년 몇 개월이 지나자 조금 살 만해졌다. 집에서 영치금도 넣어주고 입을 것도 부쳐왔다. 어머니, 면회창구에 찾아오신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 어떤 고문보다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9남매의 장남, 온 동네가 부러워하던 수재였던 큰아들, 영국 케임브리지에 유학해 금의환향할 날만 기다리던 그 큰아들이 간첩죄로 덜컥 감옥에 갇혔으니!

    “집안에 사연이 좀 있어요. 집이 전남 장성 비아였는데 조부가 일찍 돌아가시고 소년과부가 되신 조모가 아버지를 데리고 나주 부근 부잣집에 재가를 해 가셨대요. 아버지가 한이 많으실 수밖에요. 이를 악물고 어린 나이에 독립을 해 재산을 일구셨나 봐요. 그러다 보니 울화가 많았어요. 그 울화를 아버지는 주로 어머니께 폭발했죠. 어려서 그게 그렇게 견딜 수 없었어요.”

    고대유, 오병철, 김지하….

    인간이 인간을 짓누르는 것에 유달리 예민했다. 폭력과 폭압에 대한 증오, 인권유린에 대한 저항이 진작부터 마음속에 싹트고 있었다.

    “한승헌 변호사가 지난 40년간 자신이 변호했던 시국사건의 수사·재판문서를 집대성한 실록을 펴냈어요. 우리 사건도 거기 나오죠. 서문에 ‘분단과 독재의 칼바람 속에서 권력의 핍박을 받고 감방에 갇히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의 고난을 역사에 입력해두려 했다’고 썼더군요. ‘지난 시대의 아픔과 권력의 무도함, 그런 불행으로부터 주권과 민주주의를 지켜주었어야 할 사법부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점검해보는 임상보고서다’라고도 하고….”

    1967년 동백림 사건, 1968년 통혁당 사건에 이어 1969년 박노수가 주동이 된 ‘유럽 일본을 통한 간첩단 사건’은 구속 수사를 받은 인원이 16명밖에 되지 않아 별도의 명칭을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였던 박노수와 박노수의 도쿄대 동창이자 현역 공화당 의원 김규남이 사형에 처해졌다.

    “박노수 교수의 사형은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직전 집행됐어요. 남북이 화해 무드로 가기 전에 굳이 처형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고 안타까운 일이죠.”

    감옥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여러 인간 유형을 만났다. 본격적인 독서를 했고 다방면의 공부를 했다. ‘내 인생의 한 시절을 여기서 보냈다는 것이 후회스럽지 않도록 하자, 길을 잘못 들어 신세 망쳤다는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결기가 그를 시퍼렇게 살아 있도록 만들었다.

    “시국사범이 주로 수용된 대전교도소엔 훌륭한 분이 많았어요. 통혁당 사건의 신영복 선생과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선생을 거기서 만났죠. 북에서 내려오신 고대유 선생은 강영훈 전 총리와 관동대학교 동기생인데 5개 국어를 능통하게 하셨어요. 그분에게 중국어와 일본어와 프랑스어를 배웠어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오병철에게선 서예를 배웠고…. 우리 사건은 나중의 남민전(1972), 민청학련(1974) 사건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어요. 지금도 후회하진 않아요. 거기 가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다인 줄 알았을 겁니다. 남을 짓밟고 빼앗으면서도 당연한 줄 알았을 거예요.”

    그는 1973년 말 5년의 형기를 서너 달 앞두고 가석방된다. 돌아오니 집은 엉망이 돼 있었다. 딱히 변호사비와 옥바라지와 주변의 손가락질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넉넉했던 살림은 거덜이 나 있었다. 당장 여러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율산실업이라고, 혜성같이 나타나 화제를 모은 기업이 있었다. 사장 신선호가 동생 친구였다. 거기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다. 무역업은 역시 그의 영어실력을 필요로 했다. 양심적으로 회사의 수익을 위해서만 일한 것이, 거래업체의 커미션 요구를 거절한 것이 되레 미운 털을 박히게 했다.

    도금 전문가

    “모른 척만 해주면, 뒷거래를 오케이해 주면 평생 먹고살 것을 벌게 해준다고 꼬드겨요. 그런 걸 오케이하면 평생 오점이 될 것 같았어요. 동생 친구 회사에 가서 그게 될 말이냐고요.”

    그랬더니 모함이 들어왔다. 혐의를 그에게 뒤집어씌웠다.

    “그냥 내 발로 걸어 나왔어요. 소위 처세란 것을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나와서는 다시는 그곳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어요. ‘이놈의 회사가 이래도 안 망한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망할 거다’ 했는데 몇 달 후 율산이 망하데요.”

    그러나 율산에 있을 때 덕본 게 있다. 결혼을 한 것이다. 그의 나이 서른여섯이었다.

    “내가 다른 건 안 그런데 여자 보는 눈에는 시각이 좀 까다로웠어요. 후배가 소개했는데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어요. 집안도 좋고…. 처음엔 처가에서 펄펄 뛰었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간 징역을 살고 나왔다는 신랑을 누가 좋아했겠어요. 그런데 처남이 ‘그런 게 아니다.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거다’ 하면서 처부모를 설득했나 봐요. 그러나 그것보다는 직장이 안정적이니까 허락한 거겠지요.”

    율산을 그만두고 나니 월급쟁이는 이제 도저히 못하겠다 싶었다. 1979년 3월이었다. 사서함을 하나 열어놓고 친구 사무실 한켠에 방을 얻어 오퍼상을 시작했다. 독일에서 반제품을 가져와 가공해서 납품했다. 세계 최고의 도금 약품회사 슐레터의 한국대리점 일을 맡게 된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반도체 가격이 올라가니 이익이 점점 타이트해졌어요. 제품을 자체 개발할 필요가 생겼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가서 학회지나 관련 자료를 가져와 번역했어요. 약품을 어떻게 구성하는지가 자료에 다 나와 있어서 시약을 사와서 따라 해봤어요.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도금 기술을 개발했다. 새로운 시약을 만들었다. 현장기술을 익히고 자체 공장을 세우고 산하에 연구소도 설립했다. 그렇게 세운 회사가 지금 반월공단 15블록에 있는 호진 플라텍이다. 도금의 ‘plating’과 기술의 ‘technology’를 합해 만든 이름 호진 플라텍. 그는 지금 업계에서 알아주는, 국내 최고의 도금 전문가다. 도금 관련 학회지 논문만 연간 수십편을 번역하고 새로운 정보를 탐색하고 신기술을 배워 직원들을 교육한다.

    “넌 참 괜찮은 인간이다”

    김판수 사장이 세운 회사는 여느 직장과는 다르다. 일반 기업의 목표는 이익 창출이다. 그러나 호진 플라텍의 궁극 목표는 ‘구성원들이 즐겁게 일하면서 각자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을 만드는 것이다. “치열한 경쟁시대에 회사의 발전을 추동하는 힘은 가치창조예요. 그게 기업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가 돼야죠. 물질적 풍요로움뿐 아니라 자기가 하는 일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어야 크고 작은 성취감이 생기죠. 성취감이 다시 각자의 꿈을 이뤄가는 자아실현으로 연결되고…. 내가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바라는 건 각자의 자아실현이에요.”

    그래서 회사 사훈이 두 가지다. ‘가치창조와 자아실현’! 직원들을 ‘자식같이’는 아니라도 적어도 ‘선생님이 학생들 키우듯’ 대하려 노력한다. 실제 평범하게 입사했던 신입사원을 절반 넘게 업계 최고의 도금 전문가들로 키워냈다.

    영화연출을 공부하고 싶어 케임브리지로 유학을 떠났던 인문학도가 화공약품을 만지며 30년을 보냈다. 반도체 조립과 리드 프레임, 인쇄회로기판, 커넥터 등 발음조차 생소한 전자부품 도금약품의 ‘도사’가 된 건 우리 현대사의 아이러니다. 감옥에서 배운 일본어, 그게 기술 잡지, 논문, 특허자료를 얻는 훌륭한 도구가 된 것도 씁쓸한 아이러니다.

    그가 만든 기업은 이제 직원 40명의 중견회사로 자랐다. 그는 젊어서 눈뜬 인간, 세계, 역사를 외면하지 않고 살고자 했다. 그런 눈뜸의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라도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굴곡진 삶을 살아오면서도, 세상의 편견과 맞서면서도, 그는 자신을 굳건히 지켰다.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이유로 말을 바꾸고 생각을 바꿀 때 그는 젊어 세운 원칙을 바꾸지 않았다. “자랑스러울 건 없어도 부끄럽지도 않다”라고 말하는 그의 염결성, 그 앞에서 나는 여러 번 마음이 말갛게 닦이는 생소한 감동을 경험했다.

    덴마크에서 돌아왔을 때 “그동안 빨갱이 된 거 아냐?”라고 물었던 이청준과는 저만치 멀어졌고, “이름을 날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너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는 게 더욱 귀한 거다. 넌 참 괜찮은 인간이다”고 지지했던 염무웅과는 오랜 친분을 나누고 있다.

    “무웅이의 ‘넌 참 괜찮은 인간이다’라는 지지가 평생 못된 짓 안 하면서 살 수 있는 힘을 줬어요. 부나 권력이나 명성을 따라 적당히 흘러가는 삶을 거부하게 만들었죠. 그 ‘괜찮음’을 지킨답시고 나름대로 노력한 셈이에요. 하하.”

    옛날에 같은 꿈을 꾸던 사람들, 그들이 상대를 속이고 비웃고 부정하는 ‘변질’을 곁에서 숱하게 지켜봤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너는 저들처럼 썩지 않았느냐고 되물었다. 돌이키면 쓸쓸한 세월이었다. 그 적막이 예순 넘은 김판수 선생의 눈빛을 아직 맑고 또렷하게 지켜주는 비밀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엔 그때 처형된 박노수 교수의 딸을 만났다.

    ‘유럽 간첩단 사건’ 피의자에서 국내 최고 도금 전문가로… 김판수사장의 인생 유전
    김서령

    1956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국문과 졸업

    중앙중 교사, ‘매일경제’ 신문·‘샘이깊은물’ 객원기자

    월간 ‘동서문학’ 신인상

    저서 : ‘김서령의 가’


    “1968년생이니 딱 마흔이 됐더라고요. 날 찾아와 엄청나게 울더군요. 아버지에 관련한 얘기를 듣고 싶어 했어요. 김신근은 사람들과 소식을 끊고 어느 날 캐나다로 이민을 가버렸어요. 월출산 아래 들어가서 소를 키웠는데 결국 여기에 적응할 수 없었나 봐요. 임민식은 한국에 들어오지 못한 채 덴마크 여자와 혼인해 거기 살고 있고….”

    이젠 다 잊힌 역사다. 그런 사람들이 역사 속에 사라져갔다는 것을 증언하고 싶었다. 30~40년 후엔 상식이 되어버릴 생각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 행동이 아닌 생각만으로 사람을 가두고 처형하는 건 야만이란 걸 새삼 말할 필요가 있을까. 김판수 선생을 감옥에 가둔 그의 머릿속 생각은 40년이 지난 후인 오늘도 여전하다. 즉 ‘사리를 옳게 분별하고 그 옳은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 세상을 얕보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으면서 용기를 가지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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