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안정은 곧 권태, ‘바람’에 나부껴 U턴 할 곳을 놓치면?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01-08 20: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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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무런 고비 없이 아름답게만 사랑하는 이야기는, 적어도 영화에선 평범하다 못해 지루하다. 남녀 주인공, 혹은 그 가족관계가 벽에 걸린 그림처럼 완벽해 보일수록 관객은 곧 허리케인급 시련이 그들에게 닥칠 것임을 짐작하게 마련이다. 믿었던 배우자의 외도에서부터 계층이나 국적, 인종이 다른 이성 간의 사랑, 그리고 어이없게 적(敵)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일까지. 2005년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 3관왕을 차지한 젊은 영화평론가 강유정씨가 영화 속 아슬아슬한 사랑 이야기를 연재한다.
    안정은 곧 권태, ‘바람’에 나부껴 U턴 할 곳을  놓치면?

    영화 ‘밀애’ ‘화양연화’ ‘언페이스풀’(왼쪽부터)

    언젠가 폴 뉴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집에 최고급 스테이크가 있는데 밖에 나가서 영양가도, 맛도 없는 정크 푸드를 먹을 필요가 있나요.” 이 말은 평생 애처가로 소문 난 폴 뉴먼이 ‘당신은 외도의 유혹을 느껴본 적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대답이다. 먹을 것에 비유했다는 점에서 그 대답을 높이 살 수는 없지만, 당대 최고의 ‘섹시 가이’이던 폴 뉴먼이 아내에 대한 충성심을 표현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대개 결혼을 한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 중 많은 이가 ‘바람’이라고 하는 외도의 유혹을 겪어보았다고 고백한다. 때로 누군가는 “외도를 했노라” 말하기도 한다. 결혼은 인생에서 중대한 일 중 하나다. 결혼의 긴장이 배우자의 죽음 다음 순위에 있다는 것도 결혼의 속성 중 일부를 짐작케 한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 성(性)과 성장배경이 다른 한 사람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연애는 기록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결혼에는 문서 기록과 더불어 법적 책임이 따른다. 가족의 일원이 됨으로써 원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새로운 의무조항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일탈 욕망을 부추기는 금기

    금지가 열정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은 제도가 허용하지 않는 금지된 사랑에 빠진다. 이는 비단 신화의 문제만이 아니라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토마스 하디의 소설 ‘쥬드’에서처럼 근친끼리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이미 결혼한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랑을 경험하기도 한다. ‘데미지’는 며느리를 사랑하게 된 시아버지를 그려내고, ‘페드르’는 의붓어머니를 사랑한 아들의 이야기다. 이른바 ‘패륜’을 그리고 있다.

    ‘패륜’이란 무엇인가. 제도를 역습하고 윤리를 전복하는 행위들, 우리의 일상과 질서를 불편하게 만드는 감정들, 그런 것들이 바로 패륜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영화에서만큼은 ‘패륜’을 허용하는 것일까. 아니 왜 언어로 말할 수 없는 금지된 욕망들을 영화를 통해 재현하고 체험하는 것일까. 과연 금지란 무엇이며, 사랑은 또 무엇일까.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제도로부터 일탈하고픈 사람들의 욕망이 용해된 전복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정념을 막을 수는 없다. 머리는 그 정념을 금지해야 한다고 명령하지만, 영혼 속 어딘가에 있는 열정은 그 명령을 거부하기 일쑤다. 정념과 도덕이 함께 간다면 다행이지만, 또 정념과 제도가 함께 머무른다면 축복이겠지만 세상엔 예외가 너무도 많다. 질서를 넘어서는 사랑, 어쩌면 그것은 금지된 것이기에 더 강렬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안정은 곧 권태, ‘바람’에 나부껴 U턴 할 곳을  놓치면?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듯 연기하는 차우와 리첸(‘화양연화’).

    금지된 사랑의 목록 중 가장 보편적 이야기 형태가 바로 혼외정사, 우리가 흔히 불륜, 외도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흥미롭게도 영화사(史)에 각인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영화들 중 몇몇 작품 역시 혼외정사를 다뤘다. 이를테면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나 루이 말 감독의 ‘데미지’,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언페이스풀’이 그렇다. 금지는 욕망을 그리고 욕망은 비밀을 만들어낸다. 역설적이게도 비밀이 없는 삶은 가난하고 쓸쓸하다. 비밀의 참혹한 고통을 그린 작품, ‘화양연화’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나는 왕가위의 ‘화양연화’(2000)를 2000년 10월 절친한 대학동기 세 명과 함께 보았다. 사당동에 있는 한 극장, 표를 끊고 들어가 아무데나 앉아도 되는 그런 극장에서였다. 당시 이미 멀티플렉스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촌스럽고 썰렁한 극장이었다. 1994년 혼자 들른 춘천의 육림극장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비밀의 고통

    그때 우린, 공유할 수 없는 각자의 일들로 꽤 지쳐 있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공교롭게도 모두 ‘이별’에 맞서 있었다. 한 친구는 애인을 군대에 보냈고, 또 다른 친구는 애인을 다른 여자에게 뺏겼고, 나머지 한 친구는 자존심 때문에 애인을 버렸다. 남자 문제로 잘 울고 힘들어하던 친구였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양연화’는 아내나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안 그 배우자들이 만나 급기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화양연화’의 전체를 감싸는 정조는 헤어질 수밖에 없는 시한부 연인들의 강렬한 타나토스(Thanatos)적 파토스(Pathos)다. 어차피 헤어질 것을 알기에, 헤어짐을 일종의 운명으로 여기는 그들이기에 둘은 서로 감정을 아끼고 단속한다. 열정과 비밀이 뜨거운 상처가 될까 마음을 여미고 또 여민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는 단 한 번도 섹스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마 섹스를 나눴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옆집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먼 길이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마다 오히려 국수를 사러 나간다. 단지 몇 걸음을 디뎌 옆집 문을 두드리면 되지만 여자는 부러 우회한다. 자신들의 가슴을 산산이 부서뜨려 놓았던 그 감정들에 스스로 포획됐음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자 역시 여자에게 기우는 마음을 부정한다. 푸른 담배 연기와 함께 그는 자신의 감정이 휘발되기를 기원한다.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이것은 연기에 불과해요” 하며 서로에게 주문을 건다. 문제는 주문이 강렬하고 금지가 엄격할수록 서로를 향한 욕망은 배가한다는 데 있다. 여자는 답답한 옷과 화장 속에 자신을 가두고 지루한 연기가 계속되기를 바란다. 연기가 끝나는 순간 그들의 만남도 끝난다는 것을 알기에 연기 속에 감춘 정념을 발효한다.

    인화된 사랑, 불륜의 증거물

    이별 영화인 탓도 컸지만 왕가위가 선택한 현악기 연주와 장만위·량차웨이의 절제된 연기 덕분에 우리는 각기 다른 장면에서,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한 세 번째쯤으로 눈물을 쏟았던가. 순서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한 건 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었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심상치 않다. 둘은 이미 연기할 수 있는 범주 이상으로 서로를 원하고 있다. 서로의 몸을 만지고 싶고 함께 잠들고 싶고 함께하지 않은 시간의 여백이 궁금해진다. 이제 그들은 서로의 빈 틈에 끼어든 사람들, 그러니까 각자의 배우자들을 불편하게 여긴다. 이제 도저히 얼굴을 맞대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는 좁은 골목에 갇혔음을 느낀다. 여자가 말한다.

    “우리 언젠가 헤어져야 하잖아요. 헤어지는 연습 해봐요.”

    안정은 곧 권태, ‘바람’에 나부껴 U턴 할 곳을  놓치면?

    정숙한 아내였던 코니는 폴을 만나 잊었던 욕망에 위태로운 불을 붙인다(‘언페이스풀’).

    그래서 둘은 연습한다. 그러다 여자가 울기 시작한다. 여자의 울음은 오열로 뒤바뀌어 온몸을 들썩인다. 남자는 여자를 가만히 끌어안는다. 여자는 남자의 어깨에 기대어 주체할 수 없이 흐느끼는데, 남자는, 차우는 그녀 리첸의 어깨를 감쌀 뿐이다. 카메라는 그녀의 어깨를 부서져라 그러쥐는 남자의 손을 지긋이 바라본다. 악력에 비례해서 슬픔이 전해진다.

    그 간절함에 나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터뜨린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난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사랑 때문에 오열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내 어깨를 저토록 절실히 쥐어준 적 없으며, 단 한 번도 감정을 누설해본 적이 없기에 리첸처럼 마구 흐느껴 울었다.

    결국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돌담에 남자는 사랑의 비밀을 묻고 돌아선다. 남자의 고백은 길게 계속된다. 앙코르와트 사원에 묻은 비밀은 결국 제도를 넘지 못한다. 여자와 남자는 정념을 포기하고 제도 속 자신으로 돌아간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이 펼치던 연기의 짝패일지도 모른다.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은 듯 연기했듯 리첸과 차우는 사랑하지 않지만 사랑이 남은 듯 살아간다.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을 저릿하게 만드는 까닭은 그 사랑이 인화되지 않은 채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인화된 사랑은 불륜의 표지가 되어 증거물로 강등된다. 인화된 사진 속의 연인은 불륜을 저지른 범죄자에 불과하다. 앙코르와트의 벽 속에 감금됨으로써 그들의 불륜은 신적인 무엇으로 격상한다. 고결한 비밀 속에서 정념은 지속된다. 사랑이란, 아픈 상처이자 울먹한 통증임을 알려주는 영화 ‘화양연화’는 이별에 관한 한 가장 아름다운 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차우와 리첸이 정념의 마지막 지점에서 유턴해 온 자들이라면, 그렇다면 말이다. 만약 정념을 지속해 방향을 전환하지 않고 끝까지 그것을 밀어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남편의 눈을 속이고, 아내의 눈을 감추며 그 비밀이 일상을 침식하도록 둘 수는 없을까. 애드리언 라인 감독의 ‘언페이스풀’은 유턴 지점을 놓친 불륜의 사랑이 어디에 종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숙한 아내’와 ‘여자’ 사이

    10년차 부부인 애드워드(리처드 기어)와 코니(다이언 레인), 그들의 삶에는 그 어떤 균열의 흔적도 없어 보인다. 탄탄한 중산층 가정의 재력과 귀여운 아이, 이 사랑스러운 풍경화를 완성해주는 강아지로 이뤄진 가족. 영화는 이 평범하고 안정적인 집 바깥에서 불어온 때 아닌 광풍으로부터 시작된다. 유난히 바람이 많던 날, 코니는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를 학교에 보낸다. 교외에 사는 코니, 그녀는 뉴욕 시내로 나가 아이의 생일 파티를 준비하는데, 몰아친 바람 때문에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만남으로 인해 코니의 안정적 삶은 예상치 못한 국면에 접어든다.

    영화 초반의 정서를 관장하는 ‘광풍’ 이미지는 평이한 삶에 몰아친 욕망과 열정을 은유한다. 이 바람으로 인해 코니의 정숙한 스커트가 걷어 올려지고 남자와의 만남이 매개되기 때문이다. 안정은 권태의 다른 이름이었던가. 그날이 그날 같던 일상 속에 남자의 출현은 파문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아내, 엄마 코니의 내면에 침전돼 있던 욕망이 뿌옇게 뒤섞이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자’가 깨어난 것이다.

    우연히 그녀의 삶에 끼어든 남자 폴은 코니가 잊고 있던 열정과 정념을 일깨운다. 그는 계단에서 코니를 안기도 하고, 함께 목욕을 하다가 코니의 배에 그림을 그려주기도 한다. 이 모든 행위가 이미 엄마이자 아내인 코니에게서 사라진 것들, 코니는 이 금지된 행위들에 점점 깊이 빠져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서 웃다가 울기를 반복하는 코니, 정신이 반쯤 나간 그녀의 표정은 욕망과 일상의 경계에서 방황하는 자의 내면을 잘 보여준다. 너무나 뜨거웠던 연인의 육체를 떠올리며 웃던 그녀는 스스로의 웃음을 책망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하지만 그 순간 애인에 대한 갈망은 다시 차오른다.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는 그 남자를 보러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지만, 그녀는 결국 자신의 고급 SUV 승용차를 몰아 남자가 있는 도시로 향한다. 영화는 이 혼동을 매우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제시한다.

    집으로 향하던 코니가 갑작스럽게 유턴을 하면서 자동차는 차선 변경 금지용 저지대를 들이받는다.

    탁탁탁탁, 차가 저지대를 들이받는 소리는 마치 그녀의 욕망이 갈등을 거듭하는 모양을 드러내는 듯하다. 이성은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명령하지만 코니는 그 마찰음을 듣지 못했다는 듯, 금지선을 넘어 욕망의 도시로 향한다.

    영화의 결말은 어떤 점에서 너무나도 도덕적이라 의외다. 중요한 것은 이 결말이 아니라 사소한 떨림과 갈등을 잡아낸 감독의 시선이다. 결국 불륜이란 세상이 정해놓은 ‘선’을 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세상의 선택은 늘 기회비용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매력적이면서도 섬뜩한 영화 ‘언페이스풀’은 그래서 불륜에 대한 매혹적 영화다.

    유부남 혹은 유부녀의 일탈을 그린 영화들은 가족제도를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견해를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변영주 감독의 ‘밀애’가 그렇다. ‘밀애’는 전경린의 소설 ‘내 생애 하루뿐일 특별한 날’을 원작으로 삼았다. 전경린은 1990년대 한동안 ‘불륜소설’의 최고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이런 표현이 꼭 비판만은 아닌 것이, 전경린은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찾는 여성형을 ‘바람’ 혹은 ‘외도’라는 소재를 통해 잘 형상화했다. 매일매일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똑같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여자들을 가판대 위의 일간지처럼 그저 그런 이미지로 묘사한다.

    삶이란 게 원래 재미없는데…

    ‘밀애’는 나쁜 여자들이라기보다 나빠지고 싶은 여자들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교통사고처럼 남편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그 상처를 회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으로 자신을 거의 놓아버리고,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잃고 만다. 그러던 중 요양차 내려간 근교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 새로운 열정을 맞는다.

    안정은 곧 권태, ‘바람’에 나부껴 U턴 할 곳을  놓치면?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 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한국종합예술대 강사


    솔직히, 난 아직 그와 그녀의 만남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한다. 그 둘의 만남은 사랑이라기보다 씻김굿이었고 씻김굿이면서도 한편 금지된 욕망으로의 일탈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을 피운 남편의 과거는 훌륭한 알리바이가 되어 여자의 일탈에 면죄부를 준다. 그렇게 나빠지고 싶던 여자는 나빠질 기회를 만난다.

    결혼 생활을 하다 보면 안정이 지독한 권태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와의 저녁식사는 매일 비슷하고 그녀와의 잠자리 역시 회진을 돌 듯 순서가 정해져 있다. 그때 사람들은 이 지독한 일상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몸짓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세상에 권태의 때를 입지 않은 일상이 어디 있을까. 끝없이 원을 그리는 아날로그 시계처럼 그렇게 삶이라는 게 별 재미없는 건 아닐까. 재미없는 삶을 바라보며 견디는 것, 어쩌면 그것은 영원한 숙제일지도 모르겠다. 제도를 넘어서는 사람들의 위험한 열정을 바라보는 관객의 심리 역시 마찬가지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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