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韓·日·佛 원자력 삼국지

한국, 3세대 원자로 개발로 원자력 르네상스 연다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8-01-09 09: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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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로 도약 기회 잡은 프랑스
    • 체르노빌 원전 사고 계기로 비약한 한국 원자력
    • 5억달러 주고 원천기술 산 프랑스, 그러나 한국은…
    • 웨스팅하우스 매입으로 천하통일 꿈꾸는 일본 도시바
    • 컴버스천 기술로 완성한 한국의 OPR·APR 원자로
    • 佛 드골-퐁피두 vs 韓 박정희-전두환 원전 정책
    • 세계 최대 원전시장은 경수로…일본은 비등수로에 강하다
    • 신고리 3·4호기 심층 취배수의 비밀
    韓·日·佛 원자력 삼국지

    2007년 11월 울산에서는 한국형 3세대 원전인 APR-1400으로 건설되는 신고리 3·4호기 기공식이 있었다. 원 안은 한수원의 김종신 사장.

    2007년 11월28일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서 신고리 원전 3·4호기 기공식이 있었다. 이로써 한국은 3세대 경수로 건설에 도전한 두 번째 나라가 되었다. 한국이 개발한 3세대 경수로의 이름은 APR-1400이다. 이런 성과는 한국이 원전 건설에서 세계 최첨단을 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보다 한발 앞서 3세대 경수로 건설에 도전한 나라는 프랑스다. 프랑스가 개발한 3세대 경수로는 EPR-1600. 프랑스는 이 경수로를 2005년 8월 핀란드의 올킬루오토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올킬루오토(Olkiluoto)’와 ‘로비이사(Loviisa)’에 2기씩 모두 4기의 원전을 운영하고 있는데, 다섯 번째인 올킬루오토 3호기를 짓기로 하면서 그 기종으로 프랑스 아레바(AREVA) 사가 개발한 EPR-1600을 선택했다.

    그러나 올킬루오토 3호기 공사는 지연되고 있다. 2007년 중 아레바 사와 핀란드 당국은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올킬루오토 원전 3호기는 2년 정도 늦어진 2012년 초 완공될 것 같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한국이 APR-1400 공사를 시작한 때로부터 일주일여가 지난 2007년 12월3일 프랑스 아레바 사는 자국의 플라망빌 3호기를 EPR-1600으로 짓는 공사에 들어갔다.

    아레바 사는 핀란드와 프랑스에 각 한 기씩 짓고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신고리 지역에 두 기를 동시에 건설한다. 한국은 신고리 3호기를 2013년 9월, 4호기를 2014년 9월에 준공한다. 핀란드의 올킬루오토 원전 3호기는 2012년 초, 프랑스의 플라망빌 3호기는 2013년 중에 준공될 전망이다.

    프랑스가 개발한 3세대 경수로는 한국 것보다 용량은 크나 kW당 건설비용은 더 비싸다. 올킬루오토 3호기와 플라망빌 3호기의 용량은 160만kW이나 한국의 신고리 3·4호기는 140만kW이다. 아레바측은 올킬루오토 3호기와 플라망빌 3호기의 건설비용을 각 30억유로, 한국은 신고리 3·4호기의 전체 건설비용을 5조7330억원으로 발표했다. kW당 건설비를 따지면 EPR-1600은 259만원(1875유로)이고, 한국의 APR-1400은 그보다 50만원 정도 싼 205만원이다.



    프랑스와 한국에 이어 3세대 경수로 개발을 완료하고 건설을 기다리는 나라가 일본과 미국이다. 일본의 미쓰비시(三菱) 사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지원을 받아 170만kW급인 ‘APWR 플러스(+)’를 개발했고,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사는 100만kW급인 AP-1000 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미쓰비시와 웨스팅하우스는 자국 사정 때문에 아직 착공 시기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3세대 원전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전성을 강화한 것이다. 가장 큰 원전 사고는 ‘노심(爐心)’이라고 하는 원자로가 과열돼 녹아내리는 것이다. 3세대 원전은 2세대 원전보다 노심 용융 확률이 100분의 1 정도 낮다. 설계수명도 2세대 원전이 보통 40년이나 3세대는 60년으로 연장됐다. 발전용량은 2세대 원전은 100만kW가 최대이나 3세대는 100만kW가 넘는다. 2세대 원전은 진도 6.4의 지진까지 견디게 설계됐으나 3세대는 7.3의 강진에도 끄떡없다.

    미국이 뒤처진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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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성이 획기적으로 강화된 한국형 3세대 원자로 APR-1400 2기가 건설되는 신고리 원전 3·4호기 그래픽.

    자타가 인정하는 원자력 분야의 세계 1위는 미국이다. 미국은 러시아나 영국 프랑스 중국이 따라갈 수 없는 최첨단 핵무기를 개발해 보유하고 있다. 또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03기의 원자로를 가동하는 원자력 발전 1위국이다(한국은 20기로 세계 6위, 프랑스는 59기로 2위, 일본은 54기로 3위다). 이러한 미국이 최첨단 경수로 개발에서 프랑스와 한국에 뒤처진 이유는 무엇일까.

    원자력은 정치 입김이 세게 작용하는 분야다. 핵무기는 국가 안보와 직결되기에 정부 의지가 있으면 추진될 수 있지만, 원자력 발전은 내치(內治)의 대상이라 국민의 선택에 따라 요동친다. 일반인에게 핵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두려움에서 가공할 ‘국민 저항’이 만들어진다. 이 저항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세계 원자력 기술 순위가 바뀐다.

    프랑스와 한국 일본이 3세대 경수로 개발 경쟁에서 미국을 앞서게 된 원인은 간단하다. 핵무기 개발에 있어 세계 1위인 미국은 내치인 원자력발전에서는 국민 저항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국가 덩치가 워낙 큰 탓에 미국은 원자력발전소 수에서 세계 1위이지만, 원자력발전 기술 분야에서는 4위권으로 밀려났다.

    프랑스와 한국 일본이 미국을 추월하게 된 것은 ‘헛똑똑이’ 토끼와 미련하지만 한 방향으로 꾸준히 걸어간 ‘거북’의 시합을 연상시킨다. 프랑스와 한국 일본은 모두 미국에서 배워 ‘근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미국을 앞질렀다. 반면 원천기술 보유국인 미국은 ‘너무 오래’ 낮잠을 자다 그만 세 나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상업 발전을 하는 원자로에는 크게 경수로와 비등수로, 중수로 세 종류가 있는데, 세계 시장에서 비중이 가장 큰 것은 경수로다. 2005년 말 현재 가동 중인 세계 원자로는 439기인데, 이 중 경수로가 절반이 넘는 60.6%인 266기이고, 비등수로는 21.2%인 93기, 중수로는 9.3%인 41기다. 또 2005년 말 기준으로 계획 중인 원전은 39기인데 이 중 79.5%인 31기가 경수로이니, 경수로는 세계를 제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등수로는 영국과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그러나 영국이 개발한 비등수로는 경쟁력이 약해 사라져 현재 남아 있는 비등수로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사가 개발한 것뿐이다. 비등수로는 경수로에 비해 방사성 물질이 외부로 나가기 쉬운 구조로 설계됐다. 따라서 경수로보다 먼저 개발됐지만 세계 1위를 경수로에 내주었다.

    [표1] 한국형 2세대 원자로와 3세대 원자로 비교
    2세대 3세대
    원자로 PR-1000 APR-1400
    용량 100만kW 140만kW
    설계수명 40년 60년
    내진(耐震) 기준치 진도 6.4 진도 7.3
    노심(爐心) 용융 확률연간 10만분의

    1회
    연간 1000만분의

    1회


    중수로는 캐나다 원자력공사(AECL)가 개발했다. 중수로는 경수로만큼 안전하지만 사용후핵연료로 ‘핵무기를 만들기 쉽다’는 정치적인 약점이 있다. 원자로에서 타고 나온 핵연료를 재처리해 얻은 플루토늄을 이용하는 것이다. 중수로는 경수로에 비해 사용후핵연료를 빼돌리기가 쉽다.

    경수로와 비등수로는 1년여 만에 한 번씩 핵연료를 교체한다. 이때 상당히 많은 양을 교체하는데, 이때가 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사찰관을 보내, 원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 유출 여부를 면밀히 감시한다. 핵연료 교체가 끝나면 사찰관을 철수시키고 건드리면 금방 파손되는 봉인(封印)을 단 감시카메라를 원자로 입구에 설치해 24시간 무인 감시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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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노벨상 수상자인 콘라트 로렌츠는 조국인 오스트리아를 無원전 국가로 만든 ‘원조 반핵 운동가’다.

    비등수로와 경수로가 ‘오랜만에 왕창’ 식으로 핵연료를 교체한다면, 중수로는 ‘매일 조금씩 교체’한다. 중수로에서는 매일 한두 개의 사용후핵연료가 나온다. 따라서 못된 마음을 먹은 정부라면 모사품을 만들어놓았다가, 중수로에서 나오는 진짜 사용후핵연료와 슬쩍 바꿔치기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모은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하면 원폭을 제조할 만한 양의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국제원자력기구는 중수로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살펴본다. 한국의 4대 원자력단지 가운데 하나인 월성원전본부에 있는 4기는 전부 중수로다. 경수로가 있는 나머지 3대 본부에는 핵연료를 교체할 때만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관이 날아오나, 이곳은 24시간 사찰관이 상주한다. 국제원자력기구는 사찰관이 그 나라 당국에 매수되지 않도록 2중 감시도 하고 있다.

    이렇게 ‘감시 품’이 많이 들기에 국제원자력기구는 중수로라면 질색을 한다. 중수로를 건설하겠다는 나라가 있으면 “왜 하필이면 중수로냐?”고 시비를 걸어 무산시키는 것이다. 중수로는 경수로에 비해 경제성이 떨어진다는 약점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중수로 시장도 확대되지 못했다.

    TMI 사고로 문 닫은 밥콕 앤드 윌콕스 사

    경수로는 이에 견주어 안전한데다 오해를 받을 소지가 적어 급속히 시장이 확대됐다. 경수로는 미국과 러시아(구소련)에서 각각 개발되었다. 미국에서는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밥콕 앤드 윌콕스’ 3개사가 개발했고 러시아에서는 ASE사가 개발했다. ASE사가 개발한 경수로는 VVER인데, 러시아는 주로 자국과 구 공산권 국가들에 이 경수로를 지었다.

    미국의 밥콕 앤드 윌콕스 사는 해외 수출을 해보지도 못하고 망했다. 1979년 3월28일 펜실베이니아 주 스리마일 섬(Three Miles Island: 약칭 TMI) 원전 2호기에서 일어난 원자로 용융(鎔融) 사고 때문이었다.

    원자로에서 자동차의 브레이크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감속재와 냉각수인데, 이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급격히 온도가 올라가 핵연료를 담고 있는 원자로가 녹아내린다. 밥콕 앤드 윌콕스 사가 건설한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가 바로 이 사고를 일으켰다.

    그로 인해 이 회사는 단 한 건의 원전 공사도 수주하지 못했으며 이 회사가 개발한 경수로 설계기술은 그 어떤 나라와 기업도 사가려고 하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용융 사고로 카터 행정부는 “미국은 새로운 원전을 짓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가동 중인 원전은 계속 가동하고, 건설중인 원전은 건설을 완료해 가동에 들어가지만, 계획만 있는 원전부터는 건설을 중지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결정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더 이상 일감을 찾지 못하게 된 미국 원자력 회사들은 해외 진출을 모색하는데, 이것이 미국이 개발한 원자력 기술이 세계로 전파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원전은 워낙 덩치가 커 상당한 경제력을 갖춘 나라만 지을 수 있다. 미국을 제외하면 서유럽과 일본, 한국 정도가 지을 수 있는데,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사고로 서유럽 원전시장도 얼어붙었다.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사고가 나기 전 서유럽에서는 반(反)원전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 본부가 있는 오스트리아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단 한 기의 원자력발전소도 운용하지 않게 되었다. 원자력발전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나라가 무(無)원전 국가가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70년대 오스트리아는 최초 원전인 츠벤덴도르프 원전 공사에 들어갔다. 그러자 197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한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1901~1989)가 “원전 건설에 반대한다”며 대대적인 선동을 했다. 콘라트 로렌츠는 토론회에도 나가고 NGO를 동원해 시위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反)원전 운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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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기의 원전이 건설된 울진원자력 본부. 맨 왼쪽에 있는 1·2호기가 프랑스의 프라마톰이 지은 것이고 나머지 4기는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기술로 만든 한국형 원자로 KSNP다. 돔 형의 원전 격납용기는 미사일과 추락하는 전투기도 튕겨낼 수 있다.

    존경을 받는 그가 헌신적으로 반원전 운동을 벌이자 많은 국민이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였다. 1978년 오스트리아는 츠벤덴도르프 원전 준공을 눈앞에 두었다. 그런데 절대 다수의 국민이 원전을 반대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원전의 가동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에 이른다.

    국민투표 결과 절대 다수의 국민이 원전 운영을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츠벤덴도르프 원전에 대해 “가동도 해보지 않고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콘라트 로렌츠는 “츠벤덴도르프 원전은 가장 값비싼 고철이 되었다”라며 기염을 토했다.

    이로부터 1년 후 미국의 스리마일섬 원전 2호기에서 용융 사고가 일어났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스리마일섬 원전 2호기 사고에서는 단 한 명의 희생자, 단 한 명의 부상자, 단 한 명의 피폭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스리마일섬 원전 2호기 주변의 방사선량도 위험수치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았다. 사고는 났지만 원전 밖으로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원자로가 녹아내렸다는 것에만 주목해 원전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인식했다. 스리마일섬 원전 2호기 사고가 알려지자 오스트리아 국민은 콘라트 로렌츠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고 한다.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사고를 전후한 시점에 오스트리아와 미국이 원전 건설 중단 결정을 내리자 서유럽 국가의 원전 건설 의지가 위축됐다.

    이러한 가운데 ‘마이 웨이’를 구가한 유일한 서유럽 국가가 프랑스다. 드골에서 퐁피두 대통령으로 이어진 프랑스 정부는 국격(國格)을 높이는 차원에서 원전 건설에 매진했다. 경수로를 개발한 미국의 3대 업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웨스팅하우스였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발생 7년 전인 1972년 프랑스 정부는 자국 원전 회사인 프라마톰으로 하여금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도입해 원전을 짓도록 했다.

    이때 프랑스는 아주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웨스팅하우스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10년간 내리 한 기종만 건설해 기술 자립을 이룩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약속에 따라 피센아임(Fessenheim) 1호를 시작으로 프라마톰은 똑같은 원전을 6기 지었다. 반복만큼 확실하게 기술을 습득하는 방법은 없다.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전부 배웠다고 자신한 프랑스는 욕심을 냈다.

    원천기술 사용권 구입한 프랑스

    웨스팅하우스는 프랑스 내에서만 원전을 짓는다는 조건으로 프라마톰에 기술을 이전했다. 프랑스는 원전을 수출할 생각으로 이 단서를 없애기로 하고 1981년 웨스팅하우스와 협상에 들어갔다.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사고 2년 후였으므로 세계 최대의 경수로 제작업체인 웨스팅하우스도 일감 부족으로 고민할 때였다.

    웨스팅하우스는 안일한 판단을 했다. ‘세계적으로 원전시장이 얼어붙어 우리도 고민인데, 너희가 어떻게 세계시장에 진출하겠느냐’며 프랑스에 원천기술 사용권을 판매한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받는 ‘알 돈’에 끌렸다. 1982년 양사는 원천기술 사용권 양도 계약에 서명했다. 양사는 원천기술 사용권 이전 대가를 공개하지 않았으나 “5억달러”라는 것이 정설이다.

    1980년대 초 원전을 계속 건설한 나라는 프랑스와 한국,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의 원전 회사들은 프랑스의 프라마톰 사처럼 미국 기술을 들여와 원전을 짓고 있었으므로, 프라마톰 사는 일본 시장을 넘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국은 기술력이 달려 외국 업체에 의존했다. 프라마톰은 첫 번째 해외 진출 대상으로 한국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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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심 40m 해저에 건설되는 신고리 3·4호기 심층 취·배수터널. 직경이 5m가 넘어 트럭이 다닐 수 있다.

    당시 한국은 고리 1호기를 가동하고 있었고, 중수로인 월성 1호기와 경수로인 고리 2·3·4호기와 영광 1·2호기는 건설중이었다. 무려 6기의 원전을 동시에 짓고 있는데도 한국은 울진 1·2호기를 새로 발주했다. 프라마톰은 이러한 한국을 첫 번째 해외 진출 대상국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선생’인 웨스팅하우스를 극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중수로인 월성 1호기를 제외한 6기의 한국 원전을 모두 공급한 무서운 상대였다. 프라마톰은 출혈을 감수하기로 했다. 웨스팅하우스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것인데, 한국은 놓치지 않고 이를 받아먹었다. 옛 친구인 웨스팅하우스를 버리고 프라마톰을 새로운 짝으로 간택한 것이다(1982년).

    프라마톰과 만나면서 한국은 프랑스처럼 같은 원자로를 연속으로 건설해 기술 자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이어 한국에 ‘양날의 검’같은 기회가 날아들었다. 사실 이것은 기회가 아닌 위기로 등장했다. 위기(危機)는 위험인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체르노빌 사고 덕본 한국

    1986년 4월26일 구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전 4호기에서 원자로가 과열돼 녹아내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1979년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와 똑같은 사고였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는 기기 오작동이 원인이었으나 체르노빌 사고는 인재(人災)였다. 체르노빌 원전 종사자들이 안전시설 가동을 중지하고 간단한 실험을 하다가 부주의해 원자로가 녹아내린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은, 지금은 보기 힘든 흑연감속로 형태의 경수로로 RBMK로 불렸다. 원자로에서 핵반응 속도를 늦추는 브레이크 구실을 하는 것이 감속재인데, RBMK 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한다. 그런데 흑연은 불에 잘 타는 성질이 있어 원자로가 과열되면 브레이크(감속재인 흑연)가 타버릴 수 있다. 흑연 감속재 때문에 체르노빌 4호기는 곧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러나 구소련은 사고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스리마일 섬 원전 2호기 사고 때 미국은 원전 인근의 방사능 수치를 조사해 안전하다고 발표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임산부와 어린이를 다른 곳으로 소개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자 소개 대상이 아닌 주민들이 동요했다. 그 결과 10만에 달하는 지역 주민이 차를 몰고 다른 지역으로 탈출하는 ‘엑소더스’가 연출됐다. 이 엑소더스는 ‘원전 사고는 저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는 인식과 반원전 운동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방사능을 측정하는 서유럽 연구소들이 대기 중의 방사능 농도가 평소보다 높아진 것에 주목해 추적함으로써 밝혀졌다(그러나 서유럽에서 검출된 방사능은 평소보다 높은 수치였지, 위험치를 넘어선 것은 아니었다). 서유럽 연구기관과 정보기관의 추적으로 밝혀진 사실은 끔찍했다.

    체르노빌 사고에 대해서는 수천명이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으나, 이 사고로 인해 사망한 사람은 2005년 현재 59명이 정확하다. 59명 가운데 31명은 소방관과 체르노빌 원전 종사자들이다. 이들은 불을 끄려고 출동했다가 사고나 피폭 등으로 현장에서 사망했다. 그리고 28명이 높은 방사선을 맞아 오랫동안 후유증을 앓다가 사망했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 때는 방사선이 원전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데 왜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서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일까. 그 이유는 강화콘크리트로 만든 0.6~1.2m 두께의 격납용기 유무(有無)에서 찾아야 한다. 원자로에 들어가는 핵물질은 보통 4중 방호벽으로 둘러싸이는데, 자본주의 국가는 원자로 외부에 또 하나의 방화벽인 강화 콘크리트로 된 격납용기를 짓는다.

    그러나 체르노빌 사고가 날 때까지 공산주의 국가에선 격납용기를 만들지 않았다. 격납용기를 사족(蛇足)으로 보고, 원자로 외부에 일반 공장에서 볼 수 있는 약한 재질로 만든 얇은 두께의 건물을 지어놓았을 뿐이었다. 이러한 건물은 녹아내린 원자로가 내뿜은 열기를 견디지 못한다. 이 건물이 무너지자 원자로 안에 있던 방사성 물질이 대기 중으로 흩어졌고, 그로 인해 불을 끄려고 출동한 사람들이 고선량의 방사선에 피폭돼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스리마일 섬 원전은 강력한 격납용기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녹아내린 원자로에서 나온 방사성 물질이 전부 그 안에 갇혔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를 막아낸 격납용기는 한국 원전에서 보듯이 철모처럼 둥글다. 철모가 총알을 튕겨내듯 격납용기도 전투기나 미사일이 비스듬히 떨어지면 튕겨내고 자신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에 기술 주고 무너진 컴버스천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격납용기를 가진 자본주의 원전의 안전성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인데, 사람들은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에만 주목해 모든 원전을 위험한 것으로 여겼다. 이러한 시각을 세운 대표적인 국가가 스웨덴과 이탈리아였다.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나자 두 나라에서는 강력한 반원전 운동이 일어났다. 두 나라 국민은 오스트리아처럼 원전 건설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라고 요구했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당연히 “짓지 말자”가 절대다수였다. 원전 건설 중단을 선언한 나라가 4개국으로 늘어나자, 여타 나라들도 국민 저항을 의식해 덩달아 원전 건설을 포기했다. 세계적으로 원전 건설 시장이 ‘꽁꽁’ 얼어붙은 것이다.

    5공화국 말기인 1987년 한국은 6월 민주항쟁으로 전국이 최루탄 연기에 뒤덮여 있었다. 민주화 요구 시위는 여차하면 반핵 시위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전두환 정부는 과감히 영광 원전 3·4호기의 국제 입찰을 실시했다. 세계 원자력 업체로서는 ‘10년 대한(大旱)에 단비’를 만난 것이다. 모두 이 단비를 마시고 싶어 했다. 한국은 “우리는 똑같은 원전을 지어 기술 자립을 이루고자 한다. 따라서 원전 기술을 제공하는 업체에 사업권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웨스팅하우스와 프라마톰 그리고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 벌이는 경쟁은 치열했다. 3개 업체 가운데 3국 진출 경험이 없는 것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이었다. ‘배가 고팠던’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기술을 제공하겠다는 조건을 던졌다.

    ‘공’은 한국에 넘어왔다. 사실 프라마톰과 웨스팅하우스는 한 뿌리에서 나온 기술을 갖고 있는데, 한국은 두 회사의 원전을 갖고 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원전은 운영해본 경험이 전무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의 능력을 믿어도 될 것인가?’ 한국은 믿기로 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을 파트너로 택했다.

    이후 한국은 영광 3·4호기를 시작으로 울진 3·4·5·6호기와 영광 5·6호기, 그리고 신고리 1·2호기와 신월성 1·2호기 등 12기를 똑같은 것으로 지었다. 6기만 복제해도 가능한 것을 무려 12기나 지었으니 당연히 기술 자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사가 제공한 원자로의 이름은 ‘시스템 80’이었다. 한국은 이 원자로를 토대로 개발한 원자로를 ‘한국 표준형 원자로’라는 뜻을 가진 KSNP(Korea Standard Nuclear Power plant)로 명명했다.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한국에서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원전 기술을 제공했다. 제3국에 수출하려면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 것이다. 한창 KSNP를 짓던 시절 한국은 이 원자로를 들고 한 차례 국외 진출을 경험했다.

    신포 경수로 공사는 한국 원전의 첫 수출

    1980년대 후반부터 북한이 일으킨 1차 북핵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1994년 10월 미국이 북한과 제네바합의를 맺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제네바합의에 따라 미국은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를 만들어 북한 신포에 2기의 원자로를 지어주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은 ‘체르노빌 망령’이 횡행하던 시절이라 세계적으로 신규 원전 발주가 드물었다. 이러한 때 미국이 주도하는 KEDO가 신포 원전 2기를 발주한다고 하자 미국 업체들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이들의 환호는 한국의 도전으로 찬물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신포 원전 발주가 임박하자 한국은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한다’고 돼 있는 헌법 조항을 내밀며, “북한은 한국의 일부이기에 미국의 허가를 받지 않아도 KSNP를 북한에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컴버스천 엔지니어링과 웨스팅하우스는 “남북한은 별도로 유엔에 가입한 독립국가이므로 미국의 승인이 없으면 한국은 북한에 원전을 지을 수 없다”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말싸움은 상당기간 계속됐는데 최종 승자는 한국이었다.

    한국은 KSNP 건설을 조건으로 원전 건설 자금의 70%를 부담하겠다고 제의해 미국 업체를 밀어냈다. 그리하여 신포에 KSNP를 짓게 됐는데 2002년 10월, 34.5%의 공정을 보인 상태에서 제네바합의가 깨짐으로써 이 공사는 중단되었다. 2007년 10월4일 남북한은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 후 남북은 신포 경수로 공사를 재개하기 위한 물밑 협상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국이 KSNP를 짓는 사이 원천기술 보유사인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100만kW인 ‘시스템 80’을 토대로 140만kW인 ‘시스템 80 플러스(+)’를 개발했다. 이 원자로를 사줄 나라도 한국뿐이었으므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시스템 80 플러스’의 설계와 제작 기술도 한국에 제공했다. 그리고 얼마 후 자금난을 버티지 못하고 웨스팅하우스에 팔렸다. 이로써 한국은 원천기술 보유국은 아니지만 ‘시스템 80’과 ‘시스템 80 플러스’ 기술을 모두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대가 시작되자 세계 원자력건설 시장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변화는 미국과 서유럽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먼저 미국의 사정부터 살펴보자. 원전은 화전(火電)이나 수전(水電)보다 발전 용량이 크다. 스리마일 섬 원전 사고를 계기로 원전을 짓지 않은 미국은 해가 거듭될수록 전력 사정에 강퍅해져 캐나다에서 전기를 수입하게 되었다.

    2000년과 함께 열린 원전 르네상스

    캘리포니아 주는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가장 경제력이 큰데, 2000년 전기 부족으로 제한송전 사태에 직면했다. 전기 부족 현상이 가시화된 것이다.

    한국은 단일 전기회사(한전)에 의해 전기망을 구성한 나라다. 그래서 생산한 전기가 전부 소비되는 상태에 도달하면, 한국의 전체 전기가 일시에 나가버린다. 대한민국 전체가 암흑을 맞는 것인데, 이를 전문 용어로 ‘블랙아웃’이라고 한다. 블랙아웃은 컴퓨터 망의 단절, 통신망의 스톱 등 상상할 수 없는 피해를 일으키므로 첨단 문화를 누리는 현대 국가는 반드시 피해가야 한다.

    [표2] 경수로와 비등수로로 나눠 본 세계 3세대 원자로 일람
    경수로 비등수로
    국가(회사) 한국

    (한수원)
    프랑스

    (아레바)
    일본

    (미쓰비시)
    러시아(ASE) 미국(웨스팅하우스) 일본

    (도시바)
    미국

    (GE)
    원자로 APR-1400 EPR-1600 APW

    R플러스
    VVER-1000 AP-1000 ABWR ESBWR
    용량 140만kW 160만kW 170만kW 미확인 100만kW 135만kW 160만kW
    건설 중

    원전
    신고리

    3·4호기
    핀란드 올킬루오토 3호기, 프랑스 플라망빌

    3호기
    - - - 대만 룽먼(龍門)

    1·2호기
    -
    가동 중

    원전
    - - - - - 일본 가시와자키 가리아 6·7호기,

    하마호카 5호기 시가 2호기
    -
    비고 미국 컴버스천 엔지니어링 지원으로 개발독자 개발 미국 웨스팅하우스 지원으로 개발독자 개발 독자 개발. 그러나 2007년 웨스팅하우스의 경영권은 일본 도시바로

    넘어감
    미국 GE의 도움으로 개발 독자 개발


    미국에는 여러 개의 전기회사가 있다. 그런데 미국의 심장부이자 세계의 중심인 동부지역에서 2003년 8월 일시에 전기가 나가는 블랙아웃 현상이 일어났다. 3년의 시차를 두고 서부와 동부에서 일어난 전기 부족 사건을 계기로 미국 사회에서는 원전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때 1960년대에 건설한 미국 원전들이 속속 40년으로 한정된 인허가 만료기한을 맞았다.

    발전 용량이 큰 원전이 인허가 기간 만료를 이유로 가동 정지에 들어가면, 미국의 전력난은 더욱 심각해진다.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원전에 대해서는 정밀한 안전 검사를 해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20년을 추가 운전하도록 해주었다. 원전 건설을 중단한다는 결정은 쉽게 뒤집을 수 없어 40년으로 한정한 인허가 기간을 60년으로 연장하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2007년말 현재 미국은 안전성에 문제가 없는 원전 48기에 대해서는 20년을 더 연장해주는 ‘계속운전’ 조치를 취함으로써 전력 부족 사태를 간신히 피해나가고 있다.

    미국이 전력 부족으로 ‘버벅’거리는 사이 프랑스는 국내 소비 전력의 80% 정도를 원전으로 생산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원전은 다른 발전소에 비해 발전단가가 매우 저렴하다. 덕분에 프랑스는 원전 건설 중단을 선언한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스페인 독일 등에 전기를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시류를 타지 않는 마이웨이로 성공한 프랑스를 본 서유럽 국가에서도 서서히 “원전 건설을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KSNP의 새 이름 ‘OPR-1000’

    전기는 경제 발전을 유도하는 제1의 사회간접자본이다. 따라서 경제성장을 국가 목표로 삼은 중국과 동남아에서도 원전 건설에 관심을 기울였다. 새로운 밀레니엄 도래와 함께 도처에서 원자력 르네상스가 열릴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이 시기 한국전력에서 독립한 한수원도 원전 수출을 모색했다. 원천기술 보유자가 아닌 한수원이 원전 수출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엔 나름의 근거가 있다.

    웨스팅하우스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20년 가까이 원전을 짓지 못해 숙련된 기술자들을 전부 잃어버렸다. 따라서 공사를 따내더라도 설계와 제작 등의 실무는 경험이 많은 한국과 프랑스 업체에 맡겨야 할 처지였다. 한국은 컴버스천 엔지니어링뿐만 아니라 웨스팅하우스 형 경수로도 짓고 운영한 경험이 있어 이 회사들을 파트너로 삼아 해외로 진출할 수 있다.

    이 시기 프라마톰은 핵연료를 제조하는 프랑스의 코제마, 독일의 원전 건설사인 지멘스 등과 합병해 아레바로 재탄생했다. 아레바는 새로 개발한 160만kW급 3세대 원전을 전유럽에 깔겠다며 European Pressurized Water Reactor, 줄여서 EPR-1600으로 명명했다. 여기서 1600은 1600MW(메가와트)를 의미한다. 1MW는 1000kW이니, 1600MW는 160만kW가 된다.

    아레바의 선택을 본 한수원은 너무나 한국적인 KSNP를 보편적인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는 판단을 했다. 이름을 정하기 위한 사내 공모를 한 것인데 여기서 뽑힌 것이 문진영(현 신월성건설소 기계부장)씨가 내놓은 OPR-1000이다. OPR은 ‘최적 경수로’란 뜻을 가진 영문 Optimized Power Reactor의 머리글자를 딴 것. OPR-1000은 100만kW인 KSNP의 새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시스템 80 플러스’를 토대로 개발한 140만kW급 3세대 원자로에는 Optimized 대신 Advanced를 붙여 APR-1400으로 명명했다. 한수원은 신고리 3·4호기에 이어 신월성 3·4호기를 APR-1400으로 짓기로 결정했다.

    한국은 프랑스가 걸은 것과 매우 유사한 길을 걸어 기술 자립을 이룩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원천기술 사용권을 살 수 있었으나 한국은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 있는 것이 일본이다.

    2005년 말 기준으로 1기 이상의 상업용 원전을 가동하고 있는 나라는 31개국이다. 그 가운데 경수로보다 비등수로가 많은 나라는 일본, 스웨덴, 대만, 멕시코뿐이다. 일본은 54기 원전 가운데 57%인 31기가 비등수로다. 일본은 미국(34기) 다음으로 비등수로가 많은 나라인데, 미국 GE의 기술을 받아 도시바(東芝)가 비등수로를 제작해왔다.

    그리고 미국 GE는 ESBWR, 일본의 도시바는 GE와 공동으로 ABWR이라는 3세대 비등수로를 각각 개발했다. 3세대 원전은 경수로가 아니라 비등수로에서 먼저 제품이 나왔다. 도시바는 1996년 가시와자키 가리와(柏崎刈羽) 원전 6·7호기 등 4기의 ABWR(135만kW)을 준공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3세대 원전을 완공한 회사로 이름을 올렸다. 현재 도시바는 2009년과 2010년 완공을 목표로 대만 룽먼(龍門)원전 1·2호기를 ABWR로 짓고 있다.

    그러나 세계 원전시장에서 비등수로의 비율이 21.2%로 낮다는 것이 도시바의 고민이었다. 이 때문에 도시바는 2007년 10월 자금난에 처한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로써 도시바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게 되었다.

    첫 번째 토끼는 미국 진출 기회를 잡은 것이다. 미국은 자국이 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는 원자로에 대해서만 건설을 허용할 전망이다. 한국과 프랑스가 개발한 원자로가 아무리 좋고 안전해도 미국이 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지 못하면 미국 시장에 진출할 수 없다.

    또 미국은 미국 업체와 합작한 회사에 대해서만 미국 시장 진출을 허용하고 있다. 도시바는 GE와 함께 ABWR을 개발한 경험이 있는데, 웨스팅하우스까지 인수했으니 미국 시장에 진출할 가장 좋은 위치를 차지한 셈이다.

    두 번째 토끼는 강력한 라이벌로 부상한 한국을 견제할 수 있는 고삐를 잡았다는 점이다. 웨스팅하우스는 고리 1·2·3·4호기와 영광 1·2호기를 지었고, 웨스팅하우스에 합병된 컴버스천 엔지니어링은 KSNP나 OPR-1000으로 불리는 영광 3·4호기 등 12기와 한국의 야심작 APR-1400에 기술을 제공했다. 이러한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했으니 도시바는 해외시장에서 한국과 경쟁할 경우 한국을 적절히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토끼는 세계 최대의 원자력 업체로 발전할 기회를 잡았다는 점이다. 웨스팅하우스의 인수로 도시바는 절대적으로 취약한 경수로 분야 진출을 모색할 수 있게 되었다. 미쓰비시가 독점해온 일본 내 경수로 제작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미쓰비시도 웨스팅하우스로부터 원천기술을 제공받은 기업이니 도시바는 미쓰비시도 제어할 기회까지 잡게 되었다.

    4세대 원전 개발하는 웨스팅하우스

    도시바에 경영권을 넘기긴 했지만 웨스팅하우스는 여전히 미국 원자력 산업계의 자존심이다. 이러한 웨스팅하우스는 AP-1000이라는 3세대 경수로를 개발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 공동으로 IRIS (International Reactor Innovative and Secure)라고 이름 지은 4세대 원전 개발을 주도해왔다.

    IRIS의 용량은 33만5000kW에 불과하지만, 이 원자로는 3세대 원전보다 안전성이 탁월하고 사용후핵연료의 유용 여부를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또 전력 생산에 한정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 사용될 수 있다는 특징도 있다.

    4세대 원전 개발을 주도하는 웨스팅하우스가 미국 기업이냐 일본 기업이냐는 앞으로 논란이 될 것이다. 일부 불분명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10여 년 후 4세대 원전시장이 열리면 웨스팅하우스를 앞세운 도시바는 세계 최대의 원자력 업체로 등극할 수 있다.

    일본에서 경수로를 전문적으로 제작해온 기업은 미쓰비시다. 미쓰비시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을 받아 경수로를 제작해 왔는데, 미쓰비시는 최근 웨스팅하우스와 함께 170만kW급인 3세대 경수로 ‘APWR 플러스’를 개발했다. 그러나 웨스팅하우스의 경영권이 도시바로 넘어갔기에 미쓰비시는 한국수력원자력처럼 도시바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다.

    러시아의 ASE사는 체르노빌 사고를 일으킨 흑연감속로인 RBMK는 도태시키고 순수 경수로인 VVER의 개량에 주력해 3세대인 VVER-1000(100만kW로 추정)을 개발했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세계 3세대 경수로는 프랑스 아레바의 EPR-1600, 한국 한수원의 APR-1400, 일본 미쓰비시의 APWR 플러스,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AP-1000, 러시아 ASE의 VVER-1000이 경쟁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이 업체들의 관심사는 곧 빗장이 풀릴 것으로 보이는 미국 시장 진출이다. 도시바가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해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자 아레바 사는 미국 규격과 형식에 맞춘 ‘US EPR’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아레바는 적극적으로 원전을 지으려고 하는 중국 진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7기의 원전을 짓겠다는 계획을 갖고 있는데 그중 하나인 광둥성의 양장(陽江)엔 3세대 원전을 유치하겠다는 입장이다. 아레바는 양장에 EPR-1600을 공급함으로써 아시아 진출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일본과 프랑스에 비해 한국의 활동은 다소 위축돼 있는 느낌이다. 한국 원전이 미국 시장에 진출하려면 미국 원자력위원회로부터 설계인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이 무려 3000만달러에 달한다. 설계인증을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인증을 받았다고 해도 바로 사업권을 따내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직접 수주가 아닌 ‘하도급’ 형태로 미국 진출을 계획한다. 일단 숙련공이 적은 웨스팅하우스 등이 미국 내 원전공사를 수주하면 그 회사로부터 원자로 제작을 수주받는 것이 일차 목표인 것이다. 대신 한수원은 인도네시아를 필두로 한 동남아 시장 진출에 전력을 기울인다.

    인도네시아 기술자를 불러들여 원전 운영기술을 전수하면서 한국형 원자로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첫째 노력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상대적으로 저가인 OPR-1000을 우선 수출하고 APR-1400 시장도 창출해본다는 계획이다.이어 루마니아 등 동유럽 시장도 두드려볼 예정이다.

    심층 취배수 시설

    한국은 원전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나라다. 원전을 잘 운영하는지 여부는 고장-정지율로 판단하는데, 한국은 이 분야에서 일본 핀란드와 더불어 세계 수위를 다투고 있다. 3세대 원자로 개발에서는 세계 3위, 원자력발전에서는 세계 6위, 원전 운영에서는 세계 1~3위를 달리는 것이 한국 원자력의 현주소다. 한국 원자로는 일본이나 프랑스 원자로보다 건설비용이 적게 들고 좋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3세대 원전인 신고리 3·4호기에는 흥미로운 시도가 접목되었다. 원전은 원자로에서 나오는 열로 물을 끓여 발생한 증기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터빈을 돌려준 증기는 식혀서 물로 되돌린 후 다시 원자로로 가열해 증기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원전에서는 증기를 물로 바꿔주는 작업이 중요한데 이를 물로 되돌린다고 하여 ‘복수(復水)’라고 한다.

    복수는 증기가 흐르는 관 주변으로 엄청나게 많은 바닷물이 흐르게 함으로써 이뤄진다. 관 주변의 바닷물은 증기를 식히는 냉각수인데 복수 임무를 마친 바닷물의 온도는 4~7℃ 올라간다. 복수 후 빠져나온 따뜻한 바닷물을 온배수(溫排水)라고 하는데 온배수는 어업과 양식에 영향을 끼친다.

    신고리 3·4호기는 온배수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심층 취·배수’ 방식을 채택했다. 지금까지의 원전은 표층수를 끌어들여 복수용 냉각수로 활용했으나 신고리 3·4호기는 수심 40m 깊이에 있는 바닷물을 끌어들여 사용하고 다시 수심 40m 속으로 배출한다. 심층 취·배수를 위해 한수원은 신고리 3·4호기 인근 바닷가에 거대한 해저터널을 뚫고 있다.

    기자는 이 해저터널 건설 공사장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에는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큰 직경 5m의 인공 동굴을 뚫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심층 취·배수를 하면 원전 주변 바닷가의 어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온배수의 심층 취배수는 신고리 3·4호기가 있는 동해보다는 양식업이 발달한 서해 영광원전에 건설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았다.

    3만 달러 시대의 견인차

    자동차산업은 숱한 인명 사고를 겪으면서 더욱 안전하고 우수한 차를 생산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고 해서 자동차산업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오스트리아와 미국 스웨덴 이탈리아는 자동차 사고에 놀라 자동차 개발을 포기한 나라이다.

    세계적으로 반원전 열풍이 몰아쳤을 때 한국은 프랑스 일본과 더불어 흔들리지 않고 친원전 노선을 유지했다. 한국은 더 나아가 방폐장 건설까지 추진했다가 호된 반발을 샀지만 결국 방폐장 공사를 시작하는 쾌거도 이루어냈다. 이러한 한국을 가장 부러워하는 나라가 대만이다. 현재 대만은 반핵 분위기 때문에 방폐장을 선정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

    프랑스처럼 원천기술 사용권을 사들이지 못했다는 답답함, 일본처럼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 회사를 사들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한국 원자력은 북한처럼 핵무기를 만든다며 허송세월하지 않았다. 이러한 한국 원자력계가 이제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해 원자로에 사용되는 핵연료를 만들 수 있도록 한미원자력협정 개정해낸다면, 원자력산업은 전자, 철강, 자동차, 조선산업과 더불어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를 여는 견인차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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