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호

BBK 태풍의 눈, 김경준·이보라 가족사

“자식 성공 위한 집념과 희생, 청빈한 공직생활 … 내 자식이 왜?”

  • 구미화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hkoo@donga.com

    입력2008-01-09 1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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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릴 적 미국으로 건너가 명문대를 졸업하고 변호사와 펀드매니저가 된 성공한 이민 1.5세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한 에리카 김·김경준 남매는 어쩌다 지금의 악몽 같은 소용돌이에 휩쓸렸을까. 쉬 잦아들 것 같지 않은 이 소용돌이에 발을 담근 또 한 사람, 이보라씨는 어떤 인물인가. 끝 모를 BBK 파도에 휩쓸려 허우적대는 세 사람과 이들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가족의 사연을 취재했다.
    BBK 태풍의 눈, 김경준·이보라 가족사
    1995년 발간된 에리카 김 자서전 ‘나는 언제나 한국인’은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국회도서관에서 이 책을 대출받아 읽는 동안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에리카 김(한국명 김미혜·44)이 갓 서른을 넘긴 나이에 펴낸 자서전은 10여 년 뒤 닥칠 시련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다. 스물여섯 살에 ‘코넬대· UCLA 출신 미국 변호사’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거머쥔 에리카 김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결과적으로 ‘일찍 터뜨린 샴페인’이 돼버린 자서전은, 공교롭게도 30년 넘게 한국에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간 한 이민자의 ‘산산조각 난 아메리칸 드림’으로 시작된다. 친딸을 성폭행하고 학대한 혐의로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은 전직 목사의 이야기다. 에리카 김이 항소를 진행했으나 결국 84년형을 언도받자 남자는 성탄절 새벽에 자살하고 만다. 영어도 못하고 툭하면 가게 일을 시켜대고 점심 값 몇 달러에도 인색한 수전노 아버지와, 영어가 완벽한 자녀 사이에 깊게 파인 골이 끔찍한 파국을 초래한 것.

    에리카 김은 “한가족 안에서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문화가 끊임없이 충돌하며 빚어낸 극단적인 삶의 모습.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현재 이곳에서 살고 있는 모든 한국인이 끌어안아야 할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했다.

    ‘창백하고 과로에 지친 얼굴’

    2007년 겨울을 뜨겁게 달군 ‘BBK 사건’의 당사자 에리카 김과 김경준 남매 가족은 어땠을까. 알려진 대로 김씨 남매는 1970년대 초, 에리카 김이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두 사람 밑으로 막내동생 경모씨가 있었으나 1999년 병으로 세상을 떴다. 에리카 김은 자서전에서 “1970년대 초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젊은 사람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무작정 짐을 꾸리는 것이 한동안 열병처럼 번지던 시기였다”며 “우리 부모님도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런 이유에서 이민을 결정했던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에리카 김의 외삼촌, 이모 등 외가 식구들이 먼저 미국으로 건너간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에리카 김의 자서전에 따르면 아버지 김세영씨와 어머니 한영애씨는 각기 연세대와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김경준씨의 장인 이두호씨는 “사돈이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고, 사부인은 경기여고-이화여대로 이어지는 당대 최고의 명문 코스를 밟은 청주 한씨”라고 기자에게 설명했다. 이민 가기 전까지 “정원 가득 나무들이 있고, 동생들과 술래잡기를 할 때 곧잘 숨었던 장독대가 있던 효창동” 집에 살았으며, 아버지 김씨는 한국에서 육체노동을 해본 적 없고, 어머니 한씨는 식모를 쓰는 전업주부였다. 하지만 미국 정착 초기 김씨는 주유소에서, 한씨는 공장에서 일했다. 김씨 가족이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건 주류판매점(Liquer shop)을 운영하면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에리카 김이 인용한 막내 경모씨의 글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 새로운 땅은 내 부모님의 가치를 모두 발가벗겨버렸습니다. 두 분의 한국 명문대 졸업장은 이 나라에서는 별반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가끔 소리를 죽여 우셨고 아버지는 미소를 잃으셨습니다. 청결하고도 단아했던 어머니의 모습은 빛이 바래고 푸석푸석해졌습니다. 그 옛날의 아름답고 포근한 얼굴은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단지 창백하고 과로에 지친 얼굴만이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로 수척해지고 연로해지십니다. 그분의 얼굴은 이제 한국에서의 영민함을 잃으셨습니다.”

    BBK 태풍의 눈, 김경준·이보라 가족사

    김경준씨 어머니 한영애씨.

    에리카 김은 자서전에서 한국말에 대한 아버지의 집착과 자식의 성공에 대한 어머니의 강한 집념을 드러낸 바 있다.

    “미혜야, 큰소리로 또박또박 대답해봐라. 너 정말 어느 나라 사람이냐?”

    “대한민국 사람이요!”

    “그래, 행여 꿈속에서라도 네가 대한민국 사람이란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알겠니? 그리고 앞으로 집에서는 절대로 영어를 쓰지 마라. 동생들도 네가 가르쳐서 한국말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80쪽)

    에리카 김은 “지나칠 만큼 우리말을 고집하는 아버지를 그 당시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우리 교포들이 모국어를 잊지 않는 한,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꿋꿋한 모국의 뿌리를 지니고 생활할 수 있다고 확실하게 믿고 있다”고 했다.

    딸에 대한 어머니의 집념

    에리카 김이 UCLA 법대에 다니던 시절, 변호사 시험을 준비하는 데 회의를 느끼고 풀이 죽어 다닌 적이 있다. 그때 어머니 한씨가 이렇게 말했다.

    “미혜야, 변호사 되는 게 네 꿈이었잖니. 그리고 그 공부가 쉽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엄마는 네가 방황하는 게 믿을 수 없구나.”

    “엄마, 그동안 내가 너무 막연하게 생각해온 것 같아요. 구체적으로 법대 공부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어쩌면 환상을 좇아왔는지도 모르겠어요.”

    “정말 그럴까?”

    “변호사가 적성에 안 맞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요즘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봐요. 왜 전에는 한 번도 다른 직업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미혜야, 네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럴 거야. 만약 변호사가 아니라면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니? 어디 한번 잘 생각해보렴.”(50쪽)

    에리카 김은 “딸에 대한 어머니의 집념이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고 털어놓았다.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에리카 김이 법대를 휴학하고 LA검찰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다. 검찰청 근처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겠다는 딸과, 두 시간 거리의 집에서 출퇴근하라는 아버지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세상 눈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기나 하니? 학교도 가지 않는데 여자 혼자 아파트에 사는 걸 좋게 볼 사람 없다.”

    “아빠, 아무도 저한테 신경 쓰지 않아요. 다른 애들도 다 그렇게 살아요. 그리고 남들 눈이 뭐 그리 중요해요? 내가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집이 멀어서 그런 건데.”

    “다른 사람들은 신경을 안 써도 나는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다른 애들 다 그러고 살아도 내 딸만은 안 돼. 한국에선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넌 한국 여자야. 한국 여자면 한국 여자처럼 살아야지. 미국 애들처럼 살 생각은 말아라. 안 좋은 소문이 나면 시집도 못 간다.”

    BBK 태풍의 눈, 김경준·이보라 가족사

    노태우 정부 때 보사부 차관을 지낸 이두호씨가 김경준씨의 장인이다.

    부녀의 대결은 결국 어머니 한씨가 딸의 아파트에 있는 짐을 정리해 집으로 옮겨감으로써 아버지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에리카 김은 “아버지의 생각이 너무 고루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고 했다.

    “한국도 분명히 달라지고 있을 텐데, 딸에 대한 아버지의 생각은 그곳을 떠나오던 1970년대 사고방식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내 또래의 딸을 둔 한국의 아버지들보다도 훨씬 보수적일지 모른다.”

    에리카 김은 변호사가 된 뒤, 지인의 소개로 만난 한 살 연상의 신경내과 의사와 1년여 연애 끝에 결혼했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에리카 김은 자서전에서 “결혼 하고 나서 훨씬 더 안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문제나 고민거리를 진지하게 의논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 것도 행복이다”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얼마 전 이혼한 것으로 전해졌다.

    “외무고시 봤으면 했는데…”

    아들이 한국으로 송환되자 서둘러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어머니 한씨는 현재 자신의 외숙모와 함께 서울에서 지내고 있다. 한씨의 아버지와 형제를 비롯한 친정식구 대부분이 미국으로 이민한 터라 서울에 남아 있는 친척이 거의 없다. 한국에 온 뒤로 거의 매일 아들을 면회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을 찾은 어머니 한씨는 기자와 만나 “내 아들이 절대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간곡하게 말했다. 한씨는 격앙된 목소리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배신감과 검찰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알려진 대로 김경준씨는 에리카 김과 같은 차터오크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마찬가지로 코넬대에 진학해 경제학을 전공했다. 에리카 김 자서전에 따르면 김경준씨는 총학교회장(교수와 이사진까지 포함된 단체)에 선출돼 코넬대 총장과 함께 학교 홍보를 하러 다니기도 했다. 이후 시카고대 석사과정에 이어 펜실베이니아 경영대학원(와튼스쿨) MBA 과정을 마쳤다. 그 후 모건스탠리 등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다.

    한편 김씨의 부인 이보라씨는 현재 미국에 머물고 있지만 실은 서울 토박이다. 노태우 정부 때 보건사회부 차관을 지낸 이두호씨의 2남3녀 중 셋째로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이 전 차관은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소박한 단독주택에 40년 가까이 살고 있다. 번지수만 대면 동네 사람들이 단번에 ‘이두호씨 집’이라고 말할 정도. 2007년 4월 당뇨 합병증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 거의 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이씨는 딸과 사위가 외국계 투자회사에서 만나 결혼했다고 말했다.

    “이 집을 지어서 37년을 살았으니, 우리 애들 5남매가 모두 이 근방의 학교를 다녔어요. 내가 공직에 있어 사립학교는커녕 학원 보낼 여유도 없었지만, 보라가 공부를 잘해서 휘경여고 졸업할 때 전교 3등인가 했어요. 내가 서울대 정치학과 나와서 행정고시를 봤기 때문에 보라는 외무고시를 준비했으면 했는데, 애가 머리는 좋은데 끈기가 좀 부족해요. 우리 막내(현직 판사)는 책상에 앉으면 진득하게 공부하는데, 보라는 그러질 못했어요. 결국 내가 시킨 대로 안 하고 그냥 졸업해서는 신라호텔에 들어갔지요. 거기 있다가 스미스바니인가 하는 투자회사로 옮겨서 경준이를 만난 거예요. 경준이는 미국 명문 코넬대를 나와 모건스탠리 한국지사에서 근무한 엘리트예요.”

    김경준씨는 외환위기 직후 국내에 들어와 모건스탠리 서울지점과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 서울지점에서 펀드매니저로 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씨와 이보라씨는 환은살로먼스미스바니 증권사에서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에서 결혼한 김경준·이보라 부부 사이엔 현재 일곱 살 된 딸이 있다.

    “이명박, 집으로 경준 아버지 초대”

    BBK 태풍의 눈, 김경준·이보라 가족사
    이 전 차관은 김씨의 “듬직하고 착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껏 사위를 만나본 게 한 손으로 꼽을 정도다.

    “결혼해서 한남동 외인주택에 살 때 딱 한 번 가봤어요. 그리고 혜진이라고, 외손녀 낳았을 때 가보고. 그 뒤로는 애들이 미국 가는 바람에….”

    대선 정국의 최대 이슈였으며 아직까지 진실이 무엇인지 확실치 않은 BBK 사건의 쟁점은 김경준·이보라 두 사람의 결혼과 도미(渡美) 사이에 벌어진 일에 집중돼 있다.

    김씨는 1999년 4월에 투자자문회사 BBK를 설립하고, 2000년 2월에 이명박 당선자가 만든 LKe뱅크에 공동대표로 참여한다. BBK는 2000년 중·후반부터 조세회피 지역인 버진아일랜드에 MAF 펀드를 만들어 투자를 유치한 뒤 복잡한 자금거래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 당선자의 큰형 이상은씨와 처남 김재정씨가 대주주인 (주)다스도 190억원을 투자했다(2000년 3~12월).

    그러나 2001년 3월 BBK에 대한 금융감독원 조사에서 펀드운용보고서 위조와 투자운용 전문 인력 허위보고 등의 혐의가 드러나, 4월 대표이사 해임 및 폐쇄통보가 내려졌다. 폐쇄통보가 내려지기 하루 전 김씨는 BBK를 통해 인수한 옵셔널벤처스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BBK가 폐쇄조치된 후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한 코스닥업체 심텍이 11월에 이 당선자와 김씨를 사기죄로 고소함에 따라 김씨가 긴급 체포되고, 법원은 이 당선자의 재산을 가압류했다. 이 당선자가 심텍에 돈을 물어줌으로써 심텍이 고소를 취하하고, 김씨도 석방된다. 김씨는 며칠 뒤 12월에 미국으로 떠났는데 이때 회사공금 380여억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02년 3월 옵셔널벤처스 소액투자자들의 고소로 김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고, 2003년 1월엔 (주)다스도 김씨를 사기 및 횡령 혐의로 고발했다.

    이 전 차관은 “혜진 아비는 우리한테 안 알리고 그냥 (미국으로) 갔고, 나중에 보라가 갈 때는 시집이 미국에 있으니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사업을 했는지는 우리가 몰라요. 경준이 엄마 말로는 누나(에리카 김)가 책을 썼을 때 이명박씨를 만나서 동생 얘기를 했대요. 그래서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됐다나 봐요. (이명박씨가) 경준이 아버지를 자기 집에 초청해서, 반년은 한국에 살고 반년은 미국에 살라는 등 별의별 좋은 얘기를 다 했대요. 그렇게 가까워져서는,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애를 이용한 것 아닙니까.”

    2003년 (주)다스가 김경준씨를 상대로 미 LA 연방법원에 재산가압류 소송을 제기함에 따라 확인된 바에 의하면 김씨는 2001년 12월에 미국으로 건너온 뒤 벤츠 S500, 페라리 등 고급 승용차를 여러 대 구입했다. 또 미국 법원의 김씨에 대한 송환 판결문은 “김경준과 에리카 김이 미국 LA 베벌리힐스에 수백만달러짜리 고급주택 두 채를 구입하고 그들이 관리하는 스위스은행 비밀계좌로 자금을 송금했다”고 판시했다.

    “법률회사 다니며 혼자 딸 키워”

    그러나 김씨의 장인인 이 전 차관은 이런 사정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40년 넘게 앓고 있는 당뇨의 합병증으로 1995년 신장이식 수술을 받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풍까지 맞아 오른팔이 마비된 상태라 바깥활동을 안한 지 벌써 수년째. 이보라씨가 미국으로 떠난 뒤 전화통화만 했을 뿐 얼굴 한 번 못 보다가, 얼마 전 미국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했다고 한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어요. 그래도 똑 부러지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제가 ‘너는 내 딸 맞다’ 했습니다.”

    이 전 차관의 부인은 “지난 1월에 미국에 다녀왔는데, 그때 이미 사위는 감옥에 있고, 재산도 압류돼 딸 혼자서 직장에 다니며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고 말했다. 연 5만달러 정도 받으면서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는 걸로 알고 있다고.

    “이명박씨 쪽에서 ‘한 푼이라도 내 돈 안 내놓고 될 줄 아느냐’ ‘내 돈 10원 한 장 못 갖게 한다’고 했대요. 미국 민사소송에서 우리 애들이 이겼는데, 그쪽에서 항소를 해서 지금도 재산이 압류돼 있다고 해요.”

    이 전 차관은 BBK 사건이 정치적 공방을 일으키면서 한나라당이 ‘김경준 가족 사기단’으로 몰아붙이는 데 대해 “폭언이고 명예훼손”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한나라당과 언론에서 사람을 그렇게 매도할 수 없어요. 부부 사기단, 가족 사기꾼이라고 하는데 폭언이고, 명예훼손감이죠. 김경준은 한국에 친척도 없이 혼자 싸우고 있잖아요. 우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차관까지 했다지만 지금 이렇게 몸져 누워 있는데….”

    기자가 처음 이 전 차관 집을 찾은 날이 11월30일이다. 앞서 두 차례 사위를 면회한 이 전 차관의 부인은 그때 이미 검찰이 김경준씨를 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공정수사를 할지가 문제예요. 지금 검찰에서는 우리 사위한테 ‘이명박이 연루된 걸 빼라, 그러면 형량이 감소되고 부인도 무사하게 해주마’ 하고 계속 회유하고 있대요. 어제도 사부인과 면회를 다녀왔는데 그랬다고 해요. ‘이면 계약서도 네가 만들었다고 해라’ ‘2000년에 한 것도 2001년에 했다고 해라’라고 한대요. 전날 작성한 조서를 갖고 와서는 이명박 관련된 부분을 ‘너 혼자 했다고 하라’고 강요하는 거예요. 아휴.”

    “김경준 메모 공개는 패착”

    그러나 검찰이 김씨를 회유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 김씨의 자필 메모가 에리카 김을 통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이보라씨 친정과 에리카 김 사이에 ‘사인’이 잘 안 맞아 생긴 ‘실책’으로 보인다. 김씨의 메모가 주간지 ‘시사IN’을 통해 공개된 직후, 이 전 차관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11월23일에 우리 집사람이 경준이 어머니하고 면회 갔을 때 받아온 게 맞아요. 경준이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우리 집사람이 말을 잘 못 알아듣겠으니까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책상 위에서 밀고 당기면서 필담을 주고받았는데, 어디 버릴 데가 마땅치 않고 또 나한테도 보여주려고 집사람이 집으로 가져왔어요. 면회할 때 분위기가 아주 자유로웠고, 녹음이나 녹화 같은 것도 없었다고 합니다. 보라하고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런 게 있으니 보내주겠다고 팩스 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얘가 에리카 김 사무실 팩스번호를 알려준 모양이에요. 나는 사실 경준이가 지금 검찰에서 이런 처지에 있으니, 자꾸 언론을 통해 검찰과 대립하는 모양새를 취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리려고 메모를 보낸 겁니다. 그런데 그게 결국 태풍의 핵이 돼버렸어요.”

    12월5일 검찰이 BBK 주가조작 연루 의혹에 대해 ‘이명박 전 시장의 무혐의’를 발표하자, 이보라씨가 친정에 전화를 해서 “한글 메모가 공개되는 바람에 우리측에 유리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결과도 모두 이명박 쪽으로 틀어지고 말았다”며 울먹였다고 한다.

    이 전 차관은 “인생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데, 이런 일에 허송세월하는 게 아깝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1995년에 콩팥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는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고, 그해부터 내가 졸업한 초등학교와 중학교 1, 2, 3등(각 20만원), 고등학교 1등(30만원), 서울대 정치학과 1등(100만원), 서울대 보건대학원 1등(100만원)에게 매년 졸업식 때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지금 내 수입이 공무원 연금밖에 없지만 12년째 그렇게 해왔어요. TV에 어려운 사람이 나오면 방송국에 전화 걸어서 계좌번호를 확인해 몇 만원이라도 꼭 넣어줍니다. 큰돈은 못해도 우리 수준에 맞게 그렇게 베풀면서 살았어요. 시골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서울에 이만한 집이라도 하나 지키고, 관직에 있으면서 젊어서부터 과장님, 국장님, 실장님, 차관님 하며 남들한테 ‘님’ 소리 들으며 살았으면 됐지, 내가 더 뭘 바라겠습니까.”

    이 전 차관의 부인은 “남편이 전두환 대통령을 욕했을 만큼 곧은 성격이라 사는 건 풍족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전 차관은 실제로 전두환 대통령을 비판했다가 안기부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1983년 보건사회부 기획관리실장일 때다. 의료보험 문제로 청와대측과 의견 충돌을 빚자 불편한 심기를 기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드러냈는데, 결국 안기부에 불려갔다. 안기부는 “비리 혐의는 없으나, 대통령을 비판하고 욕한 것은 사실”이라는 요지로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렸고, 이씨는 보건사회부 산하 환경청 차장으로 인사 조치됐다. 이 일화는 ‘환경동네 이야기’(신현국 지음, 리즈앤북)란 책에도 나와 있다.

    “돈? 욕심도 낭비도 없다”

    이 전 차관은 1999년에 ‘공직자를 위한 명심보감-十大德目’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극명한 공사 구분, 투철한 호국정신, 철저한 위민봉사, 청렴한 사생활 등 공직자가 지켜야 할 10가지 덕목을 간추린 것이다. 이 차관의 이런 삶이 딸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이 전 차관의 부인 얘기다.

    “우리 애 자랑이 아니라, 보라는 어쩌다 돈이 좀 생겨도 절대 저 혼자 쓰지 않고, 꼭 먹을 것을 사다가 동생들과 나눠 먹었어요. 이대 다닐 때도, 동대문 평화시장에 가면 박스에 담아 kg 단위로 파는 옷들이 있는데, 그걸 사다가 세탁해서 입고 그랬어요. 백화점이라는 걸 몰랐으니까요. 우리는 돈에 대해서 욕심도 낭비도 없었어요.”

    이 전 차관 집 거실 텔레비전 위에 귀여운 돼지저금통 하나가 있었다. 이 전 차관은 “우리 혜진이 피기뱅크(piggy bank)”라고 했다. 몰라보게 자랐을 손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동전을 넣는다고.

    “사건이 빨리 종결돼서 우리 애들도 풀려나고, 다시 BBK를 만들든지 해서 일어서야죠. 경준이 전공이 그 분야니까요. 코넬대가 어려운 데입니다. 하버드에 댈 게 아니에요. 모건스탠리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이를 이렇게 망쳐놓을 순 없지요. 아들 같은 애를…. 내가 보기에 이 사건은 이명박이 주범(主犯)이고, 김경준은 종범(從犯)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재판에서 진실을 가려야죠. 내가 이명박씨를 나쁘게 말한 건 미안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믿는 건 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2시간여 인터뷰를 마치고, 기자는 잘 익은 사과를 한아름 받아들고 나왔다. 궁지에 몰린 자식을 보고도 어쩌지 못하는 부모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안타까운 심정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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