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올바른 결정’의 압박…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가?’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8-02-04 17: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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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바른 결정’의 압박…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가?’

    판단과 결정의 어려움을 이야기한 책들

    요즘 대학병원 흉부외과를 무대로 한 의학 드라마 ‘뉴하트’에 빠져 있다.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은 의사가 환자의 병명을 알아내고 치료 방법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환자가 피를 뿜어내고 숨이 꼴깍 넘어가는 급박한 상황에서 의사는 어떻게 판단하고 치료에 들어가는가. 이와 반대로 뻔히 아는 병인데도 손을 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얼마 전에는 수술을 한다 해도 가망이 거의 없는 심장종양 환자를 놓고 병원장과 흉부외과 교수(최강국)가 대립각을 세웠다.

    병원장 : 사망이 100% 확실한데 무슨 방법을 찾습니까.

    최강국 :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방법은 찾아봐야죠.

    병원장 : 최 교수님도 방어율을 신경 쓰셔야죠. 직구만 잘 던진다고 잘하는 투수입니까. 포볼로 타자를 거를 줄도 알고, 병살타도 유도해낼 줄 알아야죠. …여기 모든 의사분들께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결과가 뻔히 예측되는 수술은 병원 차원에서 불허합니다.

    드라마에서 최 교수는 자신의 뜻대로 수술을 강행해 환자의 생명을 구한다. 환자의 생명을 구한 최 교수는 선이고 병원의 명성을 먼저 생각하는 병원장은 악으로 묘사된다. 정말 그럴까. 이 대목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성공보다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은 수술을 강행한 최 교수의 행동이 과연 정의롭기만 한 것일까. 수술 대신 환자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더 올바른 선택 아닐까.



    며칠 전 강 얼음이 깨지면서 아이들이 빠지자 구하러 뛰어든 어머니까지 4명이 익사한 사고가 있었다.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지는 사고가 났을 때 구조하겠다고 물속에 뛰어들면 함께 죽는다는 건 상식이다. 빠진 사람은 침착하게 비교적 얼음이 단단한 쪽을 찾아 천천히 엎드려서 빠져나와야 하고, 구조하는 사람은 로프 등을 사용해 끌어내야 한다. 그러나 눈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데 “잠깐 기다려, 로프 빌려 가지고 올게” 하며 등을 보일 부모가 있을까. 이 순간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다. 그래서 차가운 얼음물 속으로 뛰어들어 함께 죽는다.

    모호해지는 옳고 그름의 기준

    언제부턴가 어떤 행동이나 결과를 놓고 쉽게 잘잘못을 가리기가 힘들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선택과 판단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걸까. 그 두려움에 제목을 붙이면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달리 말하면 자신감 상실이다. 패기만만하던 젊은 시절에는 소신대로 판단하고 단호하게 결정할 수 있었다. 옳고 그름을 두부 자르듯 명확히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월은 그런 자신감을 앗아간다. 옳고 그름의 기준 자체가 모호해지고, 과연 그 시절 그 판단이 옳았는지 반추하면서 결정을 망설이게 된다.

    번역가 이종인의 산문집 ‘지하철 헌화가’(즐거운상상, 2008)에는 ‘좋아하다가 싫어진 소설’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대학 시절 서머싯 몸의 소설에 심취한 저자가, 졸업 후 직장(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 다니면서 단편전집을 두 번째 완독하고, 중년이 되어 세 번째로 다시 읽게 됐을 때 작품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짐을 경험하고 쓴 글이다. 이종인은 글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문학 작품을 되풀이하여 읽다 보면 얼마든지 생각이 바뀌게 된다. 사람이나 인생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생애의 단계에 따라 변화하는 것처럼. 이렇게 볼 때 어떤 작품을 평가하려면 적어도 세 번은 읽은 다음에-그것도 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서-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한 권의 책도 이러한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또 인생에 있어서랴.”

    세월의 힘이 아니더라도, 조직 내에서의 위치가 종종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두려움에 빠뜨린다. 경영컨설턴트 패트릭 M 렌시오니가 쓴 ‘CEO가 빠지기 쉬운 5가지 유혹’(위즈덤하우스, 2007) 중에 세 번째가 ‘확신이 설 때까지 결정을 미루고 싶은 유혹’이다. 렌시오니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많은 CEO, 특히 아주 분석적인 CEO들은 자신이 내린 결정이 항상 옳다고 확신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정보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빈틈없고 확실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경영자들은 결정을 자꾸 미루다가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정해주지 못하게 된다.”

    신중함과 노회함의 차이

    사람과 인생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은 현명한 신중함이다. 그러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결정을 마냥 미루거나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잘못된 결정을 그대로 밀고나가는 것은 교활한 노회함이다. 말이 쉽지 현실에서 신중함과 노회함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다시 의사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의사들의 세계가 흥미로운 것은 그들의 선택과 판단의 대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판단의 오류로 자존심이 상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죽는다. 그런데 선택과 판단을 위해 주어지는 시간이 단 몇 초에 불과할 때도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스트레스 상황에서 의사들은 어떻게 의사결정을 할까. 하버드 의대 교수인 제롬 그루프먼이 쓴 ‘닥터스 씽킹’(원제: How Doctors Think, 해냄, 2007)은 의사들의 오진을 막고, 진짜 병명을 발견해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게 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 책이다.

    우선 저자는 인턴 시절 자신이 맞닥뜨린 최악의 경험을 고백한다.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입원한 66세의 흑인 남성 고혈압 환자 모건씨. 병실을 돌며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고 마지막으로 모건씨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려는 찰라, 모건씨가 가슴을 격렬하게 헐떡이며 필사적으로 숨을 들이킨다. 그때 저자의 머릿속은 백지상태였다. 환자의 저런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응급처치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심장 전문의가 그 모습을 보고 달려와 ‘대동맥판막 파열’ 진단을 내리고 재빨리 기도삽입을 한 덕분에 위기를 넘긴 환자는 이후 인공판막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의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증세를 보고 유효한 진단에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20~30분이라면, 노련한 임상의들은 대략 20초 안에 환자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아낸다. 의사와 경제학자가 다른 점은 임상의는 ‘행위와 사고의 동시 진행’을 요구받는다는 점이다. 경제학자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모으고 그 데이터를 꼼꼼히 분석하며, 그러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 끝난 뒤에야 결론을 이끌어내고 제안을 한다면, 임상의는 그럴 시간이 없다. 환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진단을 염두에 둬야 한다. 이럴 때 의사들이 사용하는 판단의 도구가 ‘휴리스틱(heuristic)’이다.

    휴리스틱은 문제를 해결하거나 불확실한 사항에 대해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지만 명확한 실마리가 없을 경우에 사용하는 편의적, 발견적인 방법이다. 간단히 우리말로 옮기면 쉬운 방법, 간편법, 발견법, 어림셈, 지름길 등이다. 휴리스틱스에 대비되는 것이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은 일정한 순서대로 풀어나가면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이 알고리즘의 좋은 예다(‘행동경제학’ 지형, 2007).

    실패를 각오한 결정

    의사들이 응급상황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휴리스틱’이라는 지름길을 이용한다면, 일상적 진단과 치료에는 ‘알고리즘’을 이용한다. 이를 근거중심 의학(evidence-based medicine)이라고도 한다. 그루프먼은 요즘처럼 근거중심 의학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오로지 숫자에만 매달려 소극적으로 치료법을 결정하는 위험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알고리즘에만 매달리면 선례가 전혀 없거나 거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앞서 저자가 경험한 것처럼 ‘생각의 마비’가 오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닥터스 씽킹’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의 판단, 즉 생각의 오류를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집중한다. 해답은 더 많은 데이터와 정밀한 분석이 아니라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뭔가?’라는 내면을 향한 질문에 있다. 그루프먼은 많은 의사가 치료가 매우 어려운 환자를 만났을 때 “정말 악증이야(It´s bad disease)”라는 주문을 외운다고 말한다. 드라마 ‘뉴하트’에서 살아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환자의 수술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는 병원장이 바로 이런 주문을 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루프먼은 이 주문이 실패의 두려움, 명의로 꼽히는 의사들조차 떨쳐내지 못하는 두려움에 대한 일종의 완충장치라고 했다.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데 자존심을 거는 일은 건강하고 유익한 일이지만, 자존심이 그 목적보다 우위에 서는 순간, 위험이 자리 잡게 된다.

    “전 환자분들에게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립니다. 그 말은 실패를 각오하겠다는 얘기이기도 하지요.”

    그루프먼이 만난 메모리얼 병원의 스티븐 니머 박사가 한 말이다. 그러나 실패를 각오한 결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는 최강국 교수처럼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방법은 찾아봐야죠”라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 대신 사람들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선을 긋거나, ‘확신이 설 때까지 결정을 미루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나이를 먹을수록 개인의 욕망을 넘어선 판단을 내리기가 얼마나 힘든지 깨닫게 된다. 그래서 자꾸 겸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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