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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

  •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haclass@hanmail.net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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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불평등?

러스킨이 이 책에서 시종일관 관철하려는 것은 일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다. 이 책의 제목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는 신약성경의 천국을 비유하는 설명에서 따온 것으로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인력시장에서 일거리를 구하다가 가장 마지막에 포도밭에 일하러 온 일꾼에게도 다른 일꾼과 같은 품삯을 지급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경제 질서라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온 사람’도 동등하게 대우받는 ‘조화로운 불평등’의 사회가 훨씬 더 큰 사회적 부를 생산하게 된다는 것이 러스킨의 주장이다.

“빈자는 부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주지되고 공언되어왔지만, 동시에 부자 역시 빈자의 재산을 침해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도 주지되고 공언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것이나 “북쪽이라는 말이 반드시 남쪽이라는 반대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부유’라는 말도 반드시 그 반대말인 ‘빈곤’을 연상시키는 상대어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 역시 ‘인간적인 얼굴을 한 경제학’의 한 단면이다.

자신의 그러한 생각이 극단적인 평등주의라는 비난에 대해서 러스킨은 “대령도 병졸과 같은 봉급을 받아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일을 적게 하는 사람과 같은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을 고용하여 부리는 이상 일이 서툴러도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적은 보수를 주면 안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라고 반박한다.



“경제학에 널리 퍼져 있는 오류의 대부분은 이런 불평등이 필연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경솔하고도 불합리한 억측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러스킨이 150년 전에 한 주장이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있는 현재 우리 사회의 현실에 놀랍도록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감탄스럽다.

따지고 보면, 힘 있고 돈 많은 사람들을 편드는 지식인들의 주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도 “도구에는 말하는 도구와 말 못하는 도구가 있다. 노예는 말하는 도구이다. 따라서 병든 노예를 버리는 것은 고장 난 호미를 버리는 것과 같다”는 철학자들의 명쾌한 삼단논법이 귀족들로 하여금 병든 노예를 유황광산 밖에 내다버리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노예도 같은 인간이다”라는 주장을 편 철학자들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하지만 결국 노예제도는 철폐될 수밖에 없었으니 인류 사회의 변화를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얼굴을 한 주장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러스킨의 말을 감히 흉내 내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경제학’이 타당한 것은 ‘정직’이 언제나 옳은 덕목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호혜적 노사관계

19세기 후반 영국 사회에서 러스킨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영혼을 가진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노동당 국회의원들은 그들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거의 모든 의원이 ‘러스킨의 책’이라고 답했다. 변호사로 일하던 마하트마 간디는 열차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오래전, 백남준의 작품 ‘첼로’가 실제로 한구석에 전시돼 있는 여의도의 찻집 ‘첼로’를 찾은 사람들은 주인의 높은 안목 덕분에 르 코르뷔지에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물질주의 속에서 익사하는 시대”라고 참혹하게 표현한 르 코르뷔지에 역시 “우리의 어린 시절은 러스킨에 의해 훈육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더욱이 필자에게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도주의적 경향의 예술평론에 일가를 이룬 러스킨이 노동교육을 통해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경제적 구조와 그 운용의 병폐에 통감하기 시작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동자들에게 리카도의 글을 읽어주다가 한 여성 노동자가 그에게 질문을 던지는 장면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필자는 27년쯤 전의 필자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인간이 자신의 최대 유익을 위해서만 행동한다면, 기업은 노동자에게 최소한의 임금을 주고 최대한 노동을 시키려고 할 것이고, 노동자는 최소한의 노동만 제공하면서 최대한 임금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업이 노동자에게 높은 임금을 보장하고, 노동자는 더 많이 노력해 답하는 선물교환(Gift Exchange) 방식, 곧 ‘인간의 얼굴을 한’ 호혜적 노사관계가 모두에게 유익하다는 현대 경영학의 귀중한 깨달음 역시 그 뿌리를 러스킨에서 찾을 수 있다.

신동아 200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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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인천대 강사 haclas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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