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늦깎이 화가로 ‘인생 2막’ 연 명사들

“몰입과 성취의 쾌감… 그림은 행복한 마약입니다”

  • 박은경 자유기고가 siren52@hanmail.net

    입력2008-02-11 17: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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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이 좋아도 미술을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혹은 “환쟁이 되면 굶어죽는다”는 부모의 반대로 화가의 꿈 여럿이 꺾여나갔다. 그러나 타고난 열정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선에서 은퇴한 뒤 늦깎이 화가의 꿈에 도전한 이들이 있다. 거저도 아니고 대충도 아니다. 혹독한 수련을 거쳐 ‘진짜 화가’가 된 명사들의, 1막보다 행복한 인생 2막.
    늦깎이 화가로 ‘인생 2막’ 연 명사들
    70세를 맞은 필립 나이트 나이키 회장의 늦깎이 대학생활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지난 3년간 모교인 스탠퍼드대에서 청강생으로 소설 창작을 공부해온 그의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고 한다. 나이트 회장과 동갑인 영국 출신의 명배우 앤서니 홉킨스는 최근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곡을 들고 세계 투어 콘서트에 나설 계획을 발표했다. 피아니스트가 꿈이었던 그는 “연기 이외의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 몰두하고 싶다”고 했다. 수십년을 기업경영과 배우의 삶에 매진해온 두 사람이 고령에도 산고(産苦)에 비유되는 예술 창작에 뛰어든 것은 못다 이룬 꿈과 새로운 도전을 향한 열정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뒤늦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이 국내에도 적지 않다. 은퇴 후 대학에 편입해 회화를 전공한 이서형 전 금호건설 사장,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명예교수로 재직 중인 강현두 교수, 기자 출신의 김종식 전 경향닷컴 사장, 은행감독원 부원장보를 역임한 편원득 전 금융결제원 감사 등이 그들. 또한 명사미술회 회장으로 매년 회원 전시회를 주관하는 강석진 전 GE코리아 사장(현 CEO컨설팅그룹 회장), 한국능률협회 신영철 회장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여러 차례 전시회와 개인전을 열고‘화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라는 것.

    1950~6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은 일찌감치 화가의 미래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 시절 대한민국 부모 대부분은 자식이 화가가 되는 것에 반대했다. “평생 밥 빌어먹을 짓”이라는 게 이유였다. 고교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하며 미술선생에게 칭찬을 받곤 했다는 편원득 전 감사는 “만약 그때 나 같은 아버지를 만났다면 틀림없이 미대에 진학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미대생 된 전직 CEO

    환갑을 앞두고 용인대 미대 3학년에 편입해 2008년 봄 대학원을 졸업하는 이서형(李瑞炯·64) 전 사장은 서울대 건축학과를 나왔다. 대기업 건설사 CEO 자리까지 올랐던 그가 인생에서 가장 알차고 보람 있는 시기로 꼽는 것은 대학에서 미술공부에 몰두하던 지난 4년이다. 그는 “초등학교 때 성적이 꼴찌에서 1, 2등을 다퉜지만 그림에는 소질이 있었다. 아버지도 잘 그린다며 칭찬하셨다. 그런데 여덟 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틀림없이 그 길로 매진했을 것”이라고 했다. 꿈이 꺾인 뒤 일반 대학을 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죽어라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서형 전 사장은 최근 금호아트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열며 화가로 데뷔했다. 넘쳐나는 손님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전시회 오프닝 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게 된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은 “이 사장이 미술공부 하러 대학 간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나이의 열정이 부러웠는데 정말 이 사장다운 발상”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박 회장은 “과 수석 하고 장학금도 받았다는데, 이 사장 같은 사람에게까지 장학금을 주면 용인대 재정이 상당히 악화될 것 같다. 오히려 돈을 받아야지. 다음 학기엔 장학금 주는 것 다시 생각해보라”고 해 폭소를 자아냈다.

    이론부터 체계적으로 배워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이 전 사장은 40년간의 사회생활을 뒤로하고 은둔하다시피 대학 캠퍼스로 돌아갔지만 첫 학기 6개월은 순조롭지 못했다. 학교 분위기나 학생들이 과거 대학시절과 많이 달랐고, 대기업 CEO에서 학생으로 갑작스레 바뀐 처지에 적응하는 데 진통을 겪은 것. 그는 학생 본분에 충실하려 노력했다. 기사 딸린 차 대신 손수 운전을 했고, 교내식당에서 학생들과 어울려 1600원짜리 식사를 했다.

    늦깎이 화가로 ‘인생 2막’ 연 명사들

    이서형 전 금호건설 사장은 은퇴후 미대에서 공부한 4년을 인생에서 가장 알찬 시기로 꼽는다.

    “아들뻘 되는 교수에게 꼬박꼬박 ‘님’자를 붙이자 말을 편하게 하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만함이 없어야 제대로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수십년 사회생활을 한 어른이 학생들 앞에서 허튼짓을 하면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매사에 조심스러웠죠.”

    과 학생들이 어울려 1박2일 일정으로 다녀오는 스케치 여행도 딱 한 번 참가했다. 함께 술 마시고 뒤풀이를 하면서 젊은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 “마음으로는 또 가고 싶은데, 노는 재주도 별로 없고 노래 한 가락도 잘 못하는 데다 나 때문에 학생들이 불편해져서 분위기 깰까봐” 더는 합류하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에서 보낸 4년은 모방과 아류를 허용하지 않는 예술세계에서 자신만의 미술철학과 독특한 주제를 찾기 위한 노력의 시간이었다. 그 결과 이 전 사장은 평생 추구할 화제(畵題)를 발견했다.

    “정중동(靜中動)과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의 바탕인 기(氣)를 화두로 삼아 그림에 담고 싶어요. 정은 음이요 동은 양인데 기는 음에서 양으로, 양에서 음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가장 활성화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예를 들면 기업에서 적자는 음이고 흑자는 양이죠.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서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러시아 출신 프랑스 화가 칸딘스키(1866~1944)의 저서 ‘점·선·면’에 담긴 철학과 접목시켜 동양적이고 전통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표현을 담아 세계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끔 그리는 것이 그의 목표다. 첫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 ‘사계(四季)’와 ‘정중동’ 연작은 이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살풀이춤 등 민속춤 공연장을 찾아다니고, 동양철학 대가로부터 읽어야 할 책을 추천받고, 기를 온몸으로 느껴보기 위해 단전호흡을 배운 것은 자신만의 미술철학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는 새해 초 미국에 건너가 세계의 화가들이 함께 어울려 작업하는 입주 작가 스튜디오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몇 달간 머물 예정이다. 해외 전시회 스케줄도 조만간 확정될 예정이다.

    이 전 사장이 대학편입을 준비할 때 부인은 “환갑 노인네가 무슨 대학이냐, 문화센터에 가서 취미로나 할 일이지…”라며 핀잔을 줬다. 하지만 이 전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정식으로 배워 제대로 하지 않으면 종이와 물감 낭비일 뿐이라는 것. 그의 목소리엔 힘이 넘쳤다.

    “두 번째 전시회를 지켜봐주세요. 똑같은 그림은 그리지 않겠습니다. 틀림없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거예요. 남들이 좋아하는 그림보다 좋은 그림, 명작을 그리기 위해 남은 삶 동안 부단히 노력할 겁니다.”

    “4B 연필이 뭡니까?”

    2007년 8월 ‘지구촌 풍경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개인전을 연 강현두(康賢斗·71)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언론학 석·박사 과정을 마친 뒤 KBS PD를 거쳐 40년째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그림을 시작한 뒤 7년여 동안 여러 차례 단체전에 출품하고 개인전도 열었다. 그 결실은 지난해 대한민국 수채화대전 입선, 세계평화미술대전 특선, 목우회 공모 미술대전 입선 등의 상복(賞福)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개인전을 열기 전까지 강 교수는 가족과 가까운 지인 외에는 아무에게도 그림 그리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성과를 낸 뒤 공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4년에 연 첫 전시회는 ‘신고식’인 셈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그림 얘기보다는 서로 안부를 묻는 데 정신이 팔려 신고식은 ‘만남의 장’이 되고 말았다.

    늦깎이 화가로 ‘인생 2막’ 연 명사들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는 퇴임 후 그림을 그리면서 작가와 관객 처지에서 소통하는‘페인트저널리즘’을 연구하게 됐다.

    강 교수가 그림을 시작한 것은 서울대 정년퇴임을 2년 앞뒀을 때. ‘그동안 하고 싶었던 일, 지금부터 할 수 있는 일, 새롭게 해볼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학자답게 구체적이고 합리적으로 따지던 그는 남은 20, 30년의 삶은 새로운 무언가에 도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결론지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그림이었다. 어릴 적부터 관심이 많은 분야이기도 했지만, 예술 장르 가운데 특별한 테크닉을 상대적으로 덜 요구하는 듯했고, 언제까지든 손으로 할 수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 근처에 있는 예술의전당 미술아카데미를 찾아가 기초반에 등록했죠. 선 긋는 것부터 시작해 몇 개월간 스케치를 하니까 채색을 좀 하고 싶더군요. 그래서 다음 단계로 수채화반을 선택했는데, 조금씩 묘미를 느끼면서 근 4년간 아카데미를 다녔습니다.”

    기초반 첫날 수업에 들어가자 20, 30대 여성 20여 명이 앉아 있었다. 남자 회원은 강 교수 한 사람뿐이었고, 학생들은 나이 지긋한 그를 강사로 착각했다. 멋쩍고 난감해서 “나 대신 젊은 남자가 청일점 회원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회원 평균연령을 올려놓아 미안하다”는 말로 넘겼다. 그 후 나이 어린 회원들과 어울리는 건 별로 문제 되지 않았지만 미술 실기에 문외한인 그를 어렵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

    “미술사를 포함한 이론이야 그동안 박물관과 미술관을 드나들며 보고 들은 풍월이 있어 웬만큼 알았죠. 하지만 실기에 필요한 재료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도화지, 크레파스, 파스텔뿐이었어요. 어느 날 선생이 4B 연필을 준비해 오라는데 그게 뭔지도 몰랐죠. 어떻게 생긴 거냐고 물어볼 수도 없어 발음만 열심히 외워 문방구엘 갔습니다. 연필 종류 중에 4B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지금도 미술계에서 흔히 쓰는 용어 중에 모르는 게 적지 않아요. 죽고 사는 문제는 아니니까 눈치로 맥락을 대충 꿰어맞추는 식이죠.”

    “안 보이던 게 보인다”

    그림에 깊이 빠져들수록 강 교수의 고민은 커져간다. 그림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고 그에 따라 필요한 표현수단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동안 눈만 높아지고 능력은 이를 따라주지 못해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는 것. 세계 각국의 풍경을 캔버스에 옮긴 두 번째 개인전 ‘지구촌 풍경 기행’도 고민 끝에 나온 것이다.

    “공부 삼아 인사동 화랑에 자주 가는데, 훌륭한 사람들의 개인전을 보니 평범한 그림으로는 눈길을 끌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국내 화가 중에 풍경화를 그리는 사람은 많지만 외국 풍경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어요. 외국 풍경을 모티브로 삼으면 일단 특색 있고 남들과 비교가 안 되니까 괜찮을 듯했죠. ‘지구촌 시대’에도 잘 부합한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강 교수는 언론학계에 몸담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림을 또 다른 저널리즘에 비춘 ‘페인트저널리즘’을 연구하는 중이다. 또 전시회를 통해 작가와 관객 처지에서 사람들과 소통하는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고 거기서 얻는 성취감이 크다.

    “좀더 일찍 그림을 했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일정한 매뉴얼이 있는 학문과 달리 그림은 매뉴얼이 없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죠. 이게 매력인데, 오랫동안 학문을 하면서 몸에 밴 룰을 깨기가 쉽지 않아요. 틀을 완전히 깨뜨렸을 때 진정한 창작자이자 예술가가 될 것 같네요.”

    미술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지금까지 수채화반 강사에게 개인 레슨을 받고 있는 강 교수는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든다고 했다.

    “‘월사금’도 내야 하고 물감이나 붓 하나만 해도 값이 엄청 비싸요. 아무것도 모르고 저지른 게 오히려 다행이었죠. 요즘 술 덜 마시고 골프 덜 치면서 죄다 그림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 그가 그림을 그리면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가자, 인사동으로!

    늦깎이 화가로 ‘인생 2막’ 연 명사들

    김종식 전 경향닷컴 사장은 “미술하는 사람의 순박함이 좋아 지인들과는 멀어지고 이들과 주로 어울린다”고 말한다.

    중학교 시절 미술반에서 활동하며 그림에 재주가 남달랐던 김종식(金種湜·63) 전 경향닷컴 사장은 서울대 사회학과에 진학하면서 그림과 멀어졌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미처 펼치지 못한 그림에 대한 미련이 늘 자리 잡고 있었다.

    다시 붓을 손에 쥔 건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폐합으로 강제 해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서였다. 먹고살 길을 찾아 고민하다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고 시간 여유가 생기자 문화센터 미술반에 등록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복직이 되면서 어렵게 시작한 그림을 다시 접어야 했다. 치열하게 동분서주하는 기자의 일상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의차 들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운명처럼 그림과 조우했다.

    “1층 서울갤러리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무슨 전시회냐고 물었죠. 사생동호회 회원들 단체전이라고 하기에 회원가입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일요일마다 회원들끼리 야외 스케치를 가는데, 인사동에서 버스가 출발하니 그냥 나오면 된다고 해요. 별 생각 없이 주소를 남겼는데 덜컥 회원으로 가입됐어요.”

    그 후 1년 넘게 동호회에서 매달 야외 스케치 일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왔지만 회사 일이 바빠 신경을 쓰지 않다가 신문사를 그만둔 어느 날, 오래전 사용하던 화구를 챙겨들고 무작정 인사동으로 나가 동호회 버스에 합류했다. 그림이 손에 익지 않은 탓에 첫 야외 스케치는 회원들 어깨너머로 구경을 하며 분위기를 살피는 것으로 끝났다.

    “인사동으로 돌아온 뒤 원로화가 안영목 선생, 정의부 회장과 함께 뒤풀이를 하게 됐는데, 대포를 마시면서 잘 지도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미술 하는 사람들은 순박하기 짝이 없어요. 다른 분야엔 여시(여우) 같은 사람이 많은데 그림 그리는 사람들 세계는 순박함의 극치였죠. 그림을 그리면서 옛날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지고 이들과 더 친근한 사이가 됐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하면서 김 전 사장은 유화를 택했다. 너나없이 가난한 중학 시절엔 형편이 안 돼 유화를 못했는데, 그때 유화를 못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했다. 몇십년 만에 화방에 들러 유화물감과 붓 등 그림 도구를 사면서 소풍 가는 아이처럼 들뜬 그는 유화물감 사용법을 몰라 그저 눈동냥 귀동냥으로 익혔다.

    ‘숨은 그림 찾기’

    요즘 김 전 사장은 광나루사생회 몇몇 회원과 종종 야외 스케치를 떠난다. 홀로 가는 건 왠지 처량한 느낌이 들어 이렇게 어울려 간다. 지방으로 야외 스케치를 나가면 그림 그리는 즐거움말고도 도시와는 다른 방식과 개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가끔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을 만나면 다른 건 미처 신경 쓰지 못할 때가 있는데, 시골에서 만난 한 노인은 사유지에 주인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들어왔다고 역정을 냈다. 김포평야에서는 “아저씨 화가예요? 그림 그려서 팔 거예요? 얼마짜리예요?”라며 질문을 퍼붓던 열 살 남짓의 맹랑한 여자아이를 만나기도 했다.

    최근에 연 두 번째 개인전의 제목은 ‘숨은 그림 찾기’였다.

    “대자연 속엔 무수한 선과 면, 무늬와 도형이 숨어 있습니다. 좋은 그림 소재들이 사방에 꼭꼭 숨어 화가가 찾아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림은 손이 아니라 눈으로 그리는 것이죠. ‘숨은 그림 찾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늦깎이 화가로 ‘인생 2막’ 연 명사들

    편원득 전 금융결제원 감사는 일요일마다 교외 스케치를 나간다.

    그는 “전시회를 하면 작품 제작 외에도 준비과정에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아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지만, 철저하게 스스로를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했다. 수십점의 그림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전시회에선 작품의 허점이 한눈에 들어올 때가 많다.

    “어느 시점에서 붓을 멈춰야 할지 적절한 포인트를 찾는 것이 중요한데 그게 어렵습니다. ‘오버터치’ 하거나 반대로 손이 한 번만 덜 가도 좋은 작품이 안 나와요. 어느 그림이 모자라고 넘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사람이죠. 내 그림을 사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신부 화장하고 조명 받는 곳에서 좋다고 산 걸 집에 들고 가서 보면 속았다 싶을 거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현대미술전, 한국·체코 현대미술작가교류전 등을 통해 해외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는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야외에 나가 맑은 공기 쐬고 좋은 경치 찾아 즐기는 소풍’이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자신의 그림이 쉽게 읽히고 이해되기를 바란다. 앞으로는 한 가지 주제를 잡고 그 방향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 새로운 성취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가 봐도 ‘김종식 그림’임을 알 수 있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갖는 것이 꿈이다.

    캔버스와의 교감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꿈과 기대가 꺾이는 좌절을 경험한다. 편원득(片元得·68) 전 금융결제원 감사는 평생을 금융맨으로 살면서 두 번의 좌절을 경험했다. 그때마다 그를 분노와 좌절의 늪에서 구해준 것이 그림이었다. 그림에 몰입하는 순간 캔버스와 작가 사이의 교감만 남고 모든 세상이 정지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40여 년 동안 그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미대 진학의 꿈이 좌절되면서 서울대 경제학과로 진로를 바꾸었지만 틈날 때마다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다.

    “제대 후 한국은행에 복직했는데 서울이 아닌 전주지점으로 발령이 났어요. 미혼으로 객지에 살면서 일요일마다 가족이 있는 서울을 오르내리기 힘들었죠. 그때 전주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7시간이 걸렸는데 하루에 왕복하기는 무리였거든요. 그래서 일요일이면 혼자 교외로 나가 스케치 하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때 내 또래 젊은 친구들의 주류 문화는 술 마시고 당구 치는 것이었지만, 원래 잡기를 잘 못하니까 그 시간을 그림에 썼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요일에 늦잠을 자본 적이 없어요.”

    1965년 서울 본점으로 돌아온 뒤 한국일요화가회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에 빠져들었다. 수채화에서 유화로 방향을 튼 것도 이때. 독학으로 익힌 그림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원로화가이자 모임 멤버였던 이마동 선생에게 “그림이 뜻대로 안 된다”며 고민을 털어놓자 선생이 유화를 권했다.

    “변변한 국산 미술 재료가 별로 없던 때였죠. 일본에서 수입하는 홀벤 유화 물감을 사 쓰려면, 돈이 취미활동이 아니라 거의 투자 수준으로 엄청나게 들어요. 홀벤은 종로에 있던 서울화방에 가야 살 수 있었는데 그나마 1년에 두세 번만 들여왔기 때문에 물감이 떨어지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죠.”

    일요화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아마추어 미술동호회이자 당시엔 가장 큰 단체였다. 그는 그곳에서 총무를 맡기도 했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야외 스케치 때 회원들 끼니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그 무렵만 해도 시골엔 음식점이 없었어요. 무작정 농가를 찾아가 밥 좀 해달라고 하면 ‘반찬도 없고 그릇도 없다’며 거절당하기 일쑤였죠. 한꺼번에 20~30명분을 감당해야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식사 문제를 해결하고 나야 비로소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서 늘 다른 회원들보다 늦게 붓을 잡았죠. 그때 빠른 터치로 힘차게 스케치하는 습관을 들인 것이 나중에 그림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뒤에 그는 그림 동료 셋과 분당에 공동 작업실을 내고 그림에 열중했다. 하지만 딱딱한 느낌을 주는 그림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 고민 중이다. 편 전 감사에 따르면 화가든 배우든 풍부한 감성에 지배받을 때 좋은 작품과 연기를 빚어낼 수 있다.

    “평생 은행원으로 보수적인 틀에 갇혀 지내선지 감성의 심도와 볼륨을 키우기가 어려웠어요. 그 결과가 그림에서 드러나는 듯합니다. 의식적으로 변화를 시도하지만 잘 안 돼요. 어느 순간 벽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아 손을 놓기도 어렵고요.”

    2000년 첫 번째 개인전 때 맛본 성취감은 그림에 대한 매력과 부담감을 함께 부풀려놓았다. 출품작 30여 점 중 대여섯 점이나 팔릴까 하는 생각에 별 기대를 갖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대부분의 그림이 주인을 찾아갔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소나무 작품을 구입해간 의사다.

    “부부가 대전에서 전시회를 보러 왔는데, 소나무 그림 옆에 빨간딱지가 붙어 있는 걸 보더니 웨이팅리스트에 올려달라고 했습니다. 구입 의사를 표시한 사람 중에 간혹 그림을 안 가져가는 경우가 있다는 걸 알고 한 말이었는데 그땐 무슨 말인지 내가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이미 주인이 있다고 했더니 똑같은 그림을 그려달라며 명함을 주고 갔죠. 나중에 확인전화까지 걸어와 할 수 없이 그려줬습니다.”

    편 전 이사는 다음 전시회를 수년째 미루고 있다. 벽을 깨고 새롭게 변화한 모습을 담은 작품을 선보이고 싶지만 마음처럼 그림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선과 점 하나하나 작가의 의지가 아닌 것이 없다. 쌓을 때와 허물 때, 채울 때와 비울 때를 정확히 알아야 하지만 마치 늪에 빠진 듯 헤매고 있다는 것. 왜 이걸 뛰어넘지 못하나 하는 오기도 생기고 벽을 넘었을 때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가 크기 때문에 더욱 그림에 빠져든다는 얘기다.

    무작정 그림이 좋아 수십년째 매달려온 그는 이미 데뷔전을 치렀지만 끝까지 아마추어로 남기를 고집했다. 프로는 남과 달라야 하고, 예술행위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을 창조하는 일인데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그 이유다.

    “예술에선 극히 소수만이 프로가 될 수 있어요. 남보다 특출하고 싶은 그런 욕구를 가지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됩니다. 강박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그림에 몰입한다는 것 자체가 좋아요. 그림이 뜻대로 안 되면 답답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손을 뗄 수 없는 건 몰입과 성취가 주는 쾌감 때문입니다.”

    그림이 그에게 ‘아편’ 같은 존재가 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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