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사랑과 욕망, 그 모호한 경계의 줄타기… 승리를 자신하지 말라!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02-11 18: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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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좋아한 여자인데, 막상 내게 호감을 보이니까 감정이 식더라’ ‘매일 전화 올 땐 귀찮았는데 갑자기 연락이 끊기니까 자꾸 생각나는 거 있지’ ‘그 남자 위험한데, 그래서 더 끌려’…. 한번쯤 경험했거나 들어봤음직한 얘기다.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기까지 수없이 밀고 당기기를 한다. 그러다 잘되면 같은 곳을 향하게 되지만, 더 많은 경우 등을 돌리고 제 갈 길을 간다. 그래서 사랑을 일종의 게임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때때로 그 게임이 위험천만할 수 있다.
    사랑과 욕망, 그 모호한 경계의 줄타기… 승리를 자신하지 말라!
    때론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랑의 감정들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 말이다. 남성 강박증 사례 중 유명한 것인데, 어떤 남자가 데이트 약속을 한다. 여자는 그가 간절히 데이트하기 원하던 상대다. 그런데 여자를 초대한 이 남자, 여자가 잠자리에 응하려는 순간 전화를 한 통 받는다. 전화는 남자가 만나고 있는 다른 여자로부터 온 것이다. 데이트에 응했던 여자는 화를 내며 돌아간다.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겠다면서. 남자는 그 순간부터 떠난 여자를 그리워하고 그 문제의 전화를 저주한다.

    여기에 어떤 이상 감정이 있다는 것일까. 문제는, 다른 여자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실은 남자가 미리 준비해둔 상황이라는 데 있다. 정리하면 이렇다. 남자는 너무도 기다려온 그 여자를 얻을 수 있는 순간 다른 여자의 전화를 예약해뒀다. 간절히 원한 바로 그 여자와의 사랑이 이뤄지려는 때 스스로 이 모든 행복을 망치는 남자의 행위, 당신은 이해가 가는가.

    흥미롭게도 대부분의 남자는 이 행위에 대해 조금은 이해한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정말 오랜 기간 따라다닌 여자였는데, 애정에 호응하는 순간 감정이 식더라’ 하는 고백과 유사하다. 욕망의 신비는 그것을 채우고자 하는 집착이 아니라 그것을 채우지 않은 채 두고 싶어하는 아이러니에 있다. 너무나 갖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갖고 싶지 않은 것이 바로 욕망인 셈이다.

    그래서 이 욕망의 아이러니를 잘 다루는 사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애의 고수’가 된다.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단속하고 감정의 누수를 조절하는 사람. 그들은 곧 주고 싶지만 모든 것을 주는 순간 끝나고 마는 사랑의 게임을 아는 사람이다. 사랑의 고수는 단속하고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안달 나게 하는 그녀



    그런 점에서, 루이스 부늬엘 감독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은 어떻게 해야 평생 한 남자를 자신을 향한 욕망의 노예로 만들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중년 사업가 마티유는 7년 전 아내와 사별했다. 그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와는 절대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런 그의 눈에 하녀 콘치타가 들어온다.

    그는 콘치타를 보자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콘치타에게 반해버린 마티유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의 아파트를 드나들며 돈으로 환심을 사려 한다. 마티유는 자신이 가진 ‘돈’으로 콘치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어린 처녀이기에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이 둘 간의 게임을 장악하고 있는 건 마티유가 아니라 콘치타임을 확인하게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편지 한 통을 두고 사라진 데서도 알 수 있다. 남자가 콘치타를 정복할 수 있으리라 자신만만해하던 순간 여자는 사라진다.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인가.

    5개월 후 마티유는 콘치타와 재회하고, 결코 그녀를 놓치지 않으리라 매달린다. 둘은 동거를 시작하는데, 문제는 콘치타가 무시무시한 코르셋을 착용한 채 잠자리에 든다는 것이다. 콘치타는 말한다. 내 모든 것을 가진다면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고, 난 우리 사랑을 지속하고 싶다고. 마티유가 울고 불며 사정해도 콘치타는 계속 거부한다.

    사랑과 욕망, 그 모호한 경계의 줄타기… 승리를 자신하지 말라!

    사랑이 아닌 욕망의 게임에서 결국 모두 패자가 되고 마는 영화 ‘스캔들’의 한 장면.

    결국 콘치타는 마티유의 재산과 정력을 모두 앗아간다. 마티유는 여자가 돈을 벌기 위해 옷을 벗는다고 하자 자신의 재산을 내주고, 다른 남자와 섹스를 나누는 여자에게 화를 내면서도 그녀를 떠나지 못한다. 여자는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나체로 춤을 추면서 돈을 벌지만 여전히 마티유에게만큼은 수상한 처녀성을 지킨다.

    영화는 마티유가 “이젠 콘치타를 떠나겠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다시 콘치타를 향해 간다. 아직 그녀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가 섹스를 허락하지 않는 한 이 기묘한 게임은 지속될 것이다.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권태’는 이 욕망의 게임을 우스꽝스러운 희극으로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욕망의 게임이 ‘욕망의 모호한 대상’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그녀는 원하면 다 준다. 시도 때도 없이 준다. 아무리 모욕을 해도 준다. 가라고 하면 간다.

    다 주면서도 주지 않는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그녀는 모든 남자에게 준다. 모든 남자에게 몸은 허락하지만 어떤 남자에게도 귀속되지 않는다. 그러면 창녀가 아닌가. 도리도리. 창녀는 돈으로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그녀를 움직일 수 없다. 그녀를 움직이려 할수록 그녀 앞에 있는 자신만 엉뚱한 곳에 가 있다. 그녀는 돈을 받지 않는다. 심지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유산을 다 준다고 해도 거절한다. 결혼 따위는 생각도 없다. 과연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그녀는 ‘여자’라고 통칭되는 사람들이 원하는 보편적인 것들을 거부한다. 도대체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는 마치 살아 있는 물음표처럼 난해하다.

    ‘권태’에는 욕망을 정신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는, 손가락 크기만한 성기에 휘둘리는 인간은 정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열등한 존재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런데 세련된 철학으로 무장한 이 남자 앞에 열일곱 살 소녀가 등장한다. 가슴과 엉덩이만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소녀는 그렇게 예쁘거나 섹시하지 않다. 그녀는 백치 같은 눈빛과 색정적인 가슴을 소유하고 있다. 보티첼리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 퉁퉁한 몸매의 소녀에게 신기한 게 있다면 노(老)화가의 연인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노화가는 소녀와 정사(情事)를 나누다 죽었다.

    궁금증에 시달리던 남자는 이 소녀 세실리아에게 데이트를 신청한다. 소녀는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한다. 남자는 매주 월요일 1시에 자신의 아파트로 찾아오라고 요구한다. 세실리아는 그렇게 매주 월요일 1시에 마르땅을 찾아온다.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소녀는 옷을 벗고 침대에 뛰어든다. 그녀는 전희도 필요 없다는 듯이 마르땅의 품에 파고들어 열심히 섹스를 나눈다.

    마르땅은 자신의 말에 인형처럼 움직이는 세실리아를 보며 권태를 느낀다. 바보 같은 세실리아에게 권태를 느낀 마르땅은 여자에게 수치심을 주고자 한다. 남자는 옷을 벗고 침대에 뛰어드는 그녀에게 커튼을 치라고 명령하고 커튼을 치고 되돌아온 그녀에게 또다시 전화기를 내려놓으라고 시킨다. 전화기를 내려놓자 이번에는 문을 닫고 오라고 한다.

    만일 당신이라면, 섹스를 위해 상대 앞에서 옷 벗은 당신이라면 이런 명령들 앞에서 어떤 행동을 취할까. 세실리아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한다. 이런 세실리아가 마르땅에게는 너무 의아하다. 그녀는 상처조차 받지 않는다. 욕하고 비난하고 수치스러운 말들을 퍼부어도 별 반응이 없다.

    영화 ‘권태’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둘의 관계가 역전되는 대목이다. 상처를 주고 싶어 안달이 난 마르땅은 그녀에게 헤어지자고 말하리라 다짐한다. 그런데 그날 세실리아가 약속을 어긴다. 헤어지기로 마음먹은 마르땅은 막상 세실리아가 나타나지 않자 종일 전화기 앞에 붙어서 전전긍긍한다. 그리고 마침내 세실리아가 나타나자 마르땅은 오히려 화를 내며 다그친다. 그때 세실리아는 이제 정해진 시간에 올 수 없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한다. 갑자기 상황은 역전된다. 그녀가 상처받을 것을 대비해 준비한 선물은 그녀를 붙잡기 위한 뇌물로 바뀐다. 상처는 고스란히 마르땅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누군가는 이런 세실리아를 보며 ‘호수 같은 여자’라고 표현했다. 나만 비추는 줄 알았더니 들여다보는 모든 사람의 얼굴을 비추는 여자, 들여다봐도 나밖에 안 보이는 여자라는 의미로 말이다. 세실리아는 원할 때마다 가질 수 있는 여자지만 결코 그만의 것이 될 수 없는 여자다. 남자는 이 기묘한 사랑의 게임 앞에서 점점 미쳐가고 바보가 되어간다. 세실리아에게는 마음도, 욕망도, 그리고 그 회로도 없기 때문이다.

    꼭꼭 감춰둔 파렴치한 욕망

    사랑과 욕망, 그 모호한 경계의 줄타기… 승리를 자신하지 말라!

    계산적인 남녀의 연애를 사실적으로 그린 영화 ‘오! 수정’.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사랑을 언어게임이라고 했다. 게임과 가장 먼 것 같지만 실상 사랑만큼 잔혹한 게임이 없다. 인상적인 스틸컷으로 주목받은 영화 ‘싱글즈’의 카피에도 이런 점이 반영됐다. ‘사랑은 게임, 시작하긴 쉽고, 끝내기는 어렵다(Love is game, easy to start, hard to finish)’라는 문구 말이다. 하지만 이는 사랑의 한 속성일 뿐 게임이 사랑을 완성하지는 못한다. 사랑이 게임이지만 게임이 사랑일 수 없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재용 감독의 2003년작 ‘스캔들: 남녀상열지사’는 그런 점에서 게임과도 같은 사랑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은 게임처럼 시작하지만 게임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깊고 원대한 세계라는 속성 말이다.

    ‘스캔들’이라는 제목 곁에 ‘남녀상열지사’라는 부제를 달아 한국적 상황을 설정한 이 작품은 실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네트 베닝·콜린 퍼스가 주연을 맡은 밀러스 포먼 감독의 ‘발몽’, 사라 미셀 겔러·라이언 필립·리즈 위더스푼이 주연을 맡아 틴에이저 무비로 재탄생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존 말코비치·클렌 클로즈 주연,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위험한 관계’가 모두 같은 원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들 모두 쇼데를로 라 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1782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프랑스 혁명 전의 문란하고 퇴폐적인 상류사회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정략결혼 후 위선적 냉혈 인간이 되어 사랑을 게임처럼 즐기는 후작부인과 그의 부추김으로 인형처럼 여자들 사이를 부유하는 호색한 자작 발몽은 당대 사회의 이중적 잣대를 비판하고 있다.

    파락호 조원과 조씨 부인의 추문으로 각색된 ‘스캔들’은 우선 고색창연한 전통의상으로 시선을 압도한다. 정구호의 디자인으로 재탄생한 한복은 겹겹이 덧댄 20폭 치마로 파렴치한 욕망을 꼭꼭 숨겨둔 조선시대의 한복판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숨통이 조일 만큼 갑갑한 의상이 숨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추잡한 성적 욕망이다.

    성적 욕망은 애초부터 불온한 것은 아니지만 그 욕망이 정치적 계산이나 타자를 향한 파괴적 본능과 접속할 때 불온하고 위험한 무엇으로 전도된다. 조씨 부인의 욕망 역시 그렇다. 그녀는 사촌지간인 조원에게 사랑을 품고 있다 여기지만 그를 차지하고 싶은 소유욕과 다를 바 없다. 자신에게 마음 한편이 와 있다는 사실을 이용해 조씨 부인은 위험천만한 내기를 제안한다. 바로 그 고을에서 정숙하기로 소문난 숙부인을 유혹해 철저히 유린하기다.

    수많은 전략을 세웠다 허물고

    조씨 부인이 내세운 내기 조건은 실상 자신이 갖지 못한 정절과 명예를 지닌 한 여자를 파괴하고픈 욕망에 불과하다. 사냥의 대상으로 삼은 숙부인이나 사냥을 위해 나선 조원이나 모두 조씨 부인의 계략 아래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비단 욕망에 휘둘리는 자가 조씨 부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수많은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고 포획물을 얻듯 즐기기만 하던 조원에게도 사랑은 욕망의 결과이며 게임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점점 숙부인에게 기울자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그것이 사랑의 본성이자 깊은 속내임에도 불구하고 진짜 사랑을 만나자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조씨 부인이나 조원이 보여주는 사랑의 게임은 기괴해 보인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기괴함은 연애를 한다면 누구나 한 번 쯤 겪게 되는 심리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연애가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상대를 만나기만 해도 들뜨던 가슴이 식어버린다. 자신이 주는 정열 이상으로 되돌려 받기를 원하고 자신이 애타하는 이상으로 상대가 나에게 종속되기를 바란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계산과 전략이 세워지고 허물어진다. 비단 호색한이나 바람둥이가 아니라 해도 마찬가지다. 소문난 호색한임에도 그와 사랑에 빠지는 순진한 숙부인의 심리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의 한 대목이다. 소문은 사랑을 멈추라고 재촉하지만 그 소문이 오히려 조원에 대한 궁금증을 배가시킨다. 위험한 남자라서 조심해야 하지만 나쁜 남자이기에 더 끌리는 것이다.

    사랑과 연애의 복잡 미묘한 모순은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확신하는 순간 목숨을 잃게 되는 결말에서 절정을 이룬다. 조원은 드디어 진정한 사랑을 만났다고 확신한다. 사랑을 게임처럼 즐기던 그는 이제 진짜 사랑을 하겠노라고 숙부인을 찾아간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조원은 죽음을 맞고 사랑은 추문으로 강등되고 만다. 사랑의 게임을 끝내려고 마음먹는 순간 욕망의 흔적들이 그들을 삼키고 만다. 욕망은 게임이지만 사랑은 게임이 아니기에, 게임에 너무 많은 것을 내준 자들은 결국 모두 패자가 된다.

    ‘둘만 잘되면 만사형통’

    사랑과 욕망, 그 모호한 경계의 줄타기… 승리를 자신하지 말라!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한국종합예술대 강사


    홍상수 감독의 작품 ‘오! 수정’은 ‘둘만 잘되면 만사형통’이라는 부제가 달린 에피소드로 막을 내린다. ‘오! 수정’은 어떤 점에서는 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한 남자의 드라마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시각에서는 부유한 ‘왕자님’을 차지하려는, 가난한 여자의 고군분투 내숭 연출기라고도 볼 수 있다. 두 사람은 각각 서로에 대해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기억들로 편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연애라는 게 워낙 사적인 일이다보니 ‘역사’로 공증하기는 어렵다. 둘의 연애이지만 둘이 기억하는 사소한 부분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정을 처녀라고 여긴 남자가 그녀를 공략해가는 과정도, 남자의 부에 무임승차하기 위해 결혼과 처녀성을 교환하려는 수정도 모두 이 남루한 연애 게임에 나선 선수들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정답이 아닐까. 둘만 잘되면 만사형통! 둘만의 연애, 둘만의 역사, 결국 잘되면 만사형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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