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원로 외교관 최운상의 1954년 ‘제네바 한반도 통일회의’ 회고

6·25 참전국 모두 모여 만든 ‘유일한 국제공인 통일원칙’

  • 최운상 순천향대 교수, 전 駐인도대사

    입력2008-02-12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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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의 휴전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되는 지금, 큰 시사점을 던지는 반세기 전의 국제회의로 시선을 돌려보고자 한다.1954년 4월부터 6월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한반도 통일회의’가 그것이다. 유엔의 주최로 6·25전쟁에 참전한 모든 교전국이 참석한 이 국제회의에서는 한반도 통일과 그 절차에 관해 여러 가지 원칙을 논의했다. 당시 외무부 정무국 제1과장(외교정책 및 법무)으로 이 회의에 깊이 관여한 최운상 전 대사가 그 구체적인 회의내용을 최초로 공개하는 글을 보내왔다. 남북 의회의 구성 비율이나 외국군 철수 문제 등 한반도 통일을 둘러싼 각 쟁점을 놓고 냉전의 양대 진영이 국제무대에서 펼친 치열한 외교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원로 외교관 최운상의 1954년 ‘제네바 한반도 통일회의’ 회고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 유럽본부(위)와 1954년 한반도 통일회의 당시 광경.

    1953년 7월27일 서명된 휴전협정 4조 60항은 협정 체결 후 3개월 안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고위급 관계국 정치회의를 개최할 것을 쌍방 정부에 건의했다. 그 직후인 1953년 8월28일 제7차 유엔총회는 결의 711호를 통해 휴전협정을 인준하고 협정 4조60항이 건의한 대로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정치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환영한다고 선언했다.

    여기서 특기할 것은 제네바 정치회의에 참가한 미국 등의 유엔 참전국들은 과거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이뤄진 모든 유엔 결의, 예컨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 원칙 등이 유효하며, 제네바 정치회의의 어떠한 결정도 다른 유엔 결의를 위배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다는 사실이다.

    정치회의 개최와 관련해 제일 먼저 겪은 진통은 소련의 참가자격이었다. 공산측은 중립국 자격을 주장했지만, 유엔군측은 정치회의는 ‘참전국 쌍방’의 대표 간 회의이므로 중립국 자격은 있을 수 없다고 응수했다. 소련은 법적으로는 교전국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 중 공산 측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공급한 바 있고 심지어 공군 전투기까지 파견한 실질적인 교전국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유엔군 측이 소련을 ‘특별초청’하는 형식으로 해결했다.

    결국 정치회의는 1954년 2월18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미·영·프·소 4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 1954년 4월26일 열기로 결정됐다. 그 후 스위스 정부가 제네바에서의 회의 개최와 대표단 신변보호를 보장했고, 유엔은 제네바 소재 유엔 유럽본부를 회의장소로 제공하기로 했다.

    제네바 회의 개최 수일 전, 주한 미대사관 존 칼혼 1등서기관으로부터 회의 진행방식에 관한 한국 측의 주장을 타진하는 문의가 있었다. 회의에는 원칙적으로 대좌형식(cross-table)과 원탁식(round-table)이 있다. 이 가운데 한국이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를 물어온 것이다. 외무부는 즉시 장관실에서 차관, 국장, 담당과장인 필자가 모여 논의를 벌인 끝에 대좌형식을 택하겠다고 통고했다. 원탁식 회의는 논쟁이 돌아가며 한없이 계속될 우려가 있지만 대좌식 회의는 가부간 결정이 쉬울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한국 측 뜻과는 상관없이 회의는 결국 원탁식으로 진행된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핀잔

    유엔군 측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모든 참전국이 회의에 참석했다. 대한민국 대표단은 수석대표에 변영태 외무부 장관, 대표에 양유찬 주미대사, 임병직 주유엔 대표부대사 및 홍진기 법무차관으로 구성됐고, 북한 측은 수석대표에 친(親)소련파 남일 외상, 대표에 월북파인 백남운 교육상, 기석복 외무부상 및 장춘산 외무부상이 임명됐다. 기타국 수석대표로는 당대 국제정치를 주름잡는 초거물급 인사가 다수 등장했다. 미국은 존 덜레스 국무장관, 영국은 앤서니 이든 경, 프랑스는 조르주 비도 외무상, 소련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외무상, 중국은 저우언라이 외상이 수석대표를 맡았다. 회의 첫날, 공동의장으로 영국의 이든 외무상과 태국의 프린스 완 외무상,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상이 선출되어 순번제로 사회를 보기로 합의했다.

    원로 외교관 최운상의 1954년 ‘제네바 한반도 통일회의’ 회고

    유엔은 그간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많은 결의를 해왔다. 1971년에 열린 유엔총회에서 야코프 말리크 의장(왼쪽)이 한반도 문제의 집표 상황판을 쳐다보고 있다.

    회의에 대비해 서울 외무부에서는 조정환 차관, 최문경 정무국장, 최운상 정무국 제1과장으로 구성된 대책반이 구성됐다. 제네바에 간 한국 대표단은 매일 일반 상용전보로 회의결과를 외무부에 보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내용은 약간의 암호를 포함해 대체로 한글 발음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었다. 당시 외무부는 부산피난에서 환도한 직후여서 전용통신망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서울 시내도 허허벌판이었다.

    전문의 해독은 최문경 국장과 필자가 담당했고 이를 영문으로 타자하는 것은 필자의 책임이었다. 조정환 차관은 그 결과를 가지고 매일 경무대에 올라갔다. 경무대에서는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가끔 “아니, 보고서가 이것뿐인가” 하고 핀잔을 줘 우리가 조 차관을 위로하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1954년 4월26일 첫 번째 전체회의의 사회를 본 프린스 완 의장은 제네바 평화회의의 목적을 아래와 같이 천명했다.

    “본 회의의 임무는 이 회의를 결정한 베를린 4개국 외무상 회의의 규정대로 평화적 방법에 의해 통일된 독립 한국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국제적 긴장을 완화하고 아시아 다른 지역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통일 14원칙’

    회의에 참석한 유엔 참전국 16개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에 관해 공통된 입장을 갖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공동으로 대처해온 경험과 6·25전쟁에서 같이 싸운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1947년 이래 유엔이 거듭 확인한 결정과 동일했다. 즉 ▲통일 정부는 진정한 자유 총선거에 의해 수립돼야 한다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인정해야 한다는 두 가지 원칙이었다.

    1954년 4월27일 기조연설에서 변영태 장관은 “대한민국은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에 따를 것”임을 분명히 했다. 이 총회 결의는 통일된 정부 수립을 위해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 실시를 포함해 ‘헌법 제정의 권능이 있는 모든 조치(all constituent acts)’를 취할 것을 규정한 바 있다. 이어 변 장관은 “남한에서는 이미 유엔이 만족한 총선거가 실시됐으므로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는 북한에서만 실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불법적이며 침략적인 성격을 감안하면 남북한을 동격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1954년 4월28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실현 가능한 절차가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 속에 이미 마련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 유엔 결의에 따라 설립된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the 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은 즉시 활동을 재개해야 하며, 유엔이 위협받지 않고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중국군은 북한에서 철군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1950년 10월7일 유엔총회 결의는 한반도 통일의 기본원칙을 천명한 것뿐 아니라 또 다른 각도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유엔군이 북한에 진주해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고 한반도를 통일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사실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그해 9월18일 수도 서울을 수복했지만, 이후 38선을 넘어 북한 인민군을 추격하는 데에는 별도의 법적 근거가 필요했다.

    이와 관련해서 이때의 유엔총회가 한반도 문제에 관한 과거 결의의 주요 목적은 “통일되고 독립한 민주주의 정부를 한반도에 수립하는 것”이라고 천명하고, 10월7일 결의 1(a)항을 통해 “유엔군은 한반도 전체의 안정을 확립하는 데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바로 이 조항이 당시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한반도 통일을 시도한 법적 근거였다.

    원로 외교관 최운상의 1954년 ‘제네바 한반도 통일회의’ 회고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측 대표가 휴전협정에 조인하고 있다.

    총선거를 북한에서만 실시하자는 한국측 안에 공산 측은 즉시 반대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에 이어 발언한 저우언라이 중국 외무상은 총선거는 “외세의 간섭 없이”, “어느 테러집단의 압력도 없이” 전 한반도에서 실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유일 정당한 해결책을 (테러 집단인) 이승만 정권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다음날 호주의 리처드 케세이 외무상은 “북한에서만 총선거를 개최해야 한다는 제안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지만, 한반도 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에 도움이 된다면 대한민국 정부가 전 한반도에서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에 동의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뉴질랜드의 클리프턴 외무상 등 몇몇 나라 대표들도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우방국 대표들의 견해를 접한 변영태 장관은 5월22일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증진시키기 위해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포함한 ‘한국 통일 14원칙’을 제안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통일되고 독립된 민주주의 한국을 수립하기 위해 이전의 모든 유엔 결의에 의거해 유엔 감시하에 자유총선거를 실시한다.

    2. 자유총선거는 그동안 실시가 불가능했던 북한에서 실시될 것이며, 남한에서는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거해 실시된다.

    3. 총선거는 이 제안이 채택된 후 6개월 이내에 실시된다.

    4. 총선거 준비와 진행, 이후에 관련 있는 모든 유엔 인원은 선거운동을 감시하고 전 선거구역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구성하기 위해 시행 시책 및 언론 등의 완전한 자유를 향유한다. 지방 당국자들은 그들에게 가능한 모든 협조를 해야 한다.

    5. 총선거 준비와 진행, 이후에 입후보자와 그들의 선거운동원 및 가족들은 이동, 언론, 연설 등 민주주의 국가에서 인정되고 보호받는 모든 인권의 완전한 자유를 향유한다.

    6. 총선거는 비밀투표와 보편적인 성인 참정권에 근거해 실시된다.

    7. 전(全) 한반도 국회에서의 대표권은 한반도 전체인구에 비례해야 한다.

    8. 선거구에서의 정확한 인구비례 대표제를 할당하기 위해 유엔 감시하에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9. 전 한반도 국회는 총선거 후 서울에서 소집된다.

    10. 특히 아래의 문제들은 전 한반도 국회가 결정한다.

    가. 통일된 한반도의 대통령을 새로 선출할지 여부

    나. 현존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여부

    다. 군대의 해체 여부

    11. 전 한반도 국회가 개정하지 않는 한 현행 대한민국 헌법은 유효하다.

    12. 중국군은 총선거 실시 1개월 전까지 철군을 완료해야 한다.

    13. 유엔군의 철군은 총선거 실시 이전에 개시할 수 있으나, 통일된 정부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고 또한 그 사실을 유엔이 확인할 때까지는 철군을 완료해서는 안 된다.

    14. 유엔은 통일되고 독립한 민주주의 한반도의 영토보전과 독립을 보장한다.

    이러한 원칙 중 대다수는 지금도 유효한 통일정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현재까지 국제사회와 유엔이 공인한 한반도 통일원칙은 이것이 유일하다. 이 원칙은 국제법의 일부인 민족자결 원칙에 근거하며 유엔총회가 1970년 10월24일 창설기념일에 만장일치로 채택한 ‘유엔 헌장에 의거한 국가간의 우호관계와 협력에 관한 국제법 원칙에 관한 선언’과도 일치한다.

    ‘한국 통일 14원칙’에 대해 5월28일과 6월5일 두 차례 전체회의에서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네덜란드, 필리핀, 터키, 태국, 뉴질랜드, 미국 대표가 전폭적인 지지를 표했다. 그들은 한결같이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는 이론상 북한에서만 실시돼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동시 총선거를 흔쾌히 승낙한 것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유엔을 인정할 것인가

    제네바 회의 기간에 유엔 참전국 측은 한반도 선거의 효율적 감시가 매우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콜롬비아의 에두아르도 앙겔 주미대사는 유엔이 감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필수조건이며 다름 아닌 유권자의 독립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다”라고 역설했다. 6월5일 미국대표인 베델 스미스 국무차관은 “선거 감시는 이미 한국에 가 있는 UNCURK가 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또 한 가지 쟁점은 외국군대의 철수 문제였다. 4월27일 변 장관은 한국에 있는 유엔군을 공산침략군과 동일시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철수를 주장하는 것은 마치 강도가 경찰더러 그쪽이 무장해제하면 나도 무기를 던지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비유였다. 변 장관의 이 표현은 회의 기간 중 유명한 발언이 되기도 했다. 변 장관의 고전적인 영어와 유머감각은 이전부터 정평이 나 있었다.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에 대해 유엔측 참전국 대표들은 중국군은 선거 전에 철수해야 하며 유엔군 일부는 통일될 때까지 한반도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4월28일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선거 전에 모든 외국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것은 불공평한 주장이다. 유엔군은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지만 중공군은 불과 몇 마일만 가면 되고, 또 빨리 되돌아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유엔 측 참전국 대표들은 유엔이 한반도 문제를 다룰 수 있는 권위(authority)가 있음을 누차 강조하면서, 국제기구가 한반도 문제 해결에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공산 측 주장을 반박했다. 회의에서 소련이 중국, 북한과 더불어 유엔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믿을 수 없는 교전단체’라고 호칭하자 5월28일 미국 스미스 국무차관은 다음과 같이 반격했다.

    “미국은 유엔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공산측은 그동안 침략에 대한 집단 방위체제라는 유엔의 고귀한 도덕적 원칙을 악의적으로 파괴하려고 노력해왔다. 미국은 조건 없이 유엔의 도덕적 역량을 지지한다.”

    6월5일 에티오피아, 필리핀, 네덜란드는 먼저 한국 정부의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유엔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필리핀 수석대표인 카를로스 가르시아 부통령은 “만일 한반도 문제해결 방안 중 대한민국에 가해진 침략을 진압하고 격퇴한 유엔의 권위를 부정하거나 포기하는 안이 들어 있다면, 필리핀 정부는 결코 그러한 제안을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회의 마지막날인 6월15일, 16개 참전국은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공동으로 유엔의 권위를 적극 방어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첫째, 우리는 유엔의 권위를 수락하고 강조한다. 공산당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유엔의 권위와 권능을 부정하며 거절했다. 또 유엔을 침략의 도구라고 불러왔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공산 측 주장을 수용한다면 그것은 집단방위 원칙과 유엔 자체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진정한 자유선거를 희망한다. 공산 측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불가능하게 하는 절차를 고수했다. 공산 측이 자유로운 선거의 공정하고 효율적인 감시를 수락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다. 그들은 북한에 대한 공산주의 지배를 유지하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표시했다. 그들은 똑같은 자세를 오늘날까지 고수해왔고, 그러한 태도에는 1947년 이래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유엔의 노력을 무력하게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

    인구비례 vs 남북 동수

    그러나 공산 측의 입장은 완강했다.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상, 중국의 저우언라이 외무상과 북한의 남일 외무상의 입장은 유엔이 감시하는 진정한 자유선거를 통해 한반도를 통일하는 어떠한 제안도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통일과정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뿐이었다.

    북한 측도 ‘자유선거’ ‘비례대표제’ ‘선거의 공정한 감시’ 같은 용어를 사용하긴 했지만, 자유선거 실시를 막을 수 있는 절차를 한사코 고수했다. 특히 선거를 준비하는 전(全)조선위원회의 설립을 제안하면서 공산 측은 ‘북한과 남한이 동수의 대표를 선출하여 모든 결정은 상호 합의(mutual agreement)에 따라 한다’고 했다. 이는 당시 한반도 전체 인구의 3분의 1도 안 되는 지역을 지배하는 비민주주의 정권이, 민주주의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 과반수 이상 인구의 결정을 부결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러한 공산 측의 견해는 4월27일 개최된 제2차 전체회의에서 제안된 바 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남북 국회에서 동수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되는 전조선위원회를 설립한다. 이 위원회는 남북의 민주주의 사회단체 대표를 포함한다.

    2.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국회를 구성한다. 그 구성에 필요한 전조선 선거를 실시하며 그 실시에 필요한 선거법을 전조선위원회가 기초한다.

    3. 위원회는 남북의 경제적, 사회적 교류를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

    4. 모든 외국군은 6개월 내에 한반도로부터 철수한다.

    5. 극동의 평화유지에 관심 있는 나라들은 한반도의 평화적 발전을 보장한다.

    5월3일 남일 외무상은 “전조선위원회의 결정은 쌍방의 상호 합의에 의한다”고 재차 설명했다. 이 절차에 대해 스미스 미 국무차관은 ‘고유의 거부권(built-in veto)’이라고 평했다. 남일 외상이 내건 조건은 제네바 회의 기간 내내 공산 측이 주장한 것이었으며, 별다른 변동이 없었다. 그의 제안 중에는 유엔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고 한반도 문제 해결에 관한 유엔의 역할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의 제안에 대해 영국의 이든 외상은 5월13일 전체회의에서 아래와 같이 논평했다.

    “독일에 관한 소련의 제안과 같이 한반도 문제에 관한 북한의 입장에서도 선거의 실시는 첫 번째 조치가 아니었다. 단지 문서에서 첫 번째로 기술했을 뿐이다. 이들 제안은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선거를 치를 수 있도록 사전조건을 부여하고 있다. 이 제안에는 국제적 감시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진정하게 선출된 국회 대신 자파(自派) 지지자로 꽉 채워진 위원회를 앞세운다. 환언하면 문서상으로는 선거가 맨 처음 표기되지만 실제로는 가장 마지막 조치인 것이다. 그것은 명목상으로는 자유지만 실은 사전에 자파 지지자들을 끌어들여 완전히 조작한 속임수다.”

    사실상의 거부권

    5월22일 남 외무상은 “전조선위원회에는 남북의 민주적 사회단체가 광범위하게 참여해야 한다”고 다시 부연했다. 여기서 민주적 사회단체는 친공(親共)단체를 지칭했다. 실제로 모스크바 4상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과 47년 한반도 내에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된 바 있는데, 당시 소련 측은 “민주적 사회단체는 친공단체를 의미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이와 같은 남 외무상의 제안에 대해 변 장관은 “50대 50 기준으로 구성되는 전조선위원회는 병립기구에 불과하며 대한민국의 입법과 행정기관을 대체하려는 의도가 있다. 또한 공산 측 대변인은 한반도에서의 외국군 철수시한은 정했으나 전 한반도 총선거 일시는 일부러 정하지 않고 있다”고 논평했다.

    6월5일 중국의 저우언라이 외무상은 유엔에 의한 총선거 감시안(案)을 거부하면서 대신 중립국 감시단을 구성해 전 한반도 총선거를 감시케 하자고 재차 제안했다. 이는 원래 5월22일 처음 제안되어 남일 외무상도 지지했던 안이다. 즉 공산국가와 비공산 국가가 동수로 구성하는 위원단을 만장일치의 원칙에 따라 운영한다는 것이다. 만장일치 원칙이란 사실상 공산국가들에 의한 거부권을 의미했다.

    이와 같이 공산 측이 총선거에 대한 유엔의 역할을 배제한 데 대해 미국 측 대표단은 “이미 휴전체제 안에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있으며 이 위원회의 활동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두 공산국가 대표들의 거부권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즉시 반박했다.

    제네바 회의 전 기간 중에 공산 측 대표들은 한반도 통일이라는 핵심 문제보다는 이 문제와 무관한 비생산적인 문제들, 예컨대 전쟁포로 송환 문제나 휴전협정 조항의 준수, 6·25전쟁의 기원이나 미국의 외교정책 등을 한없이 거론했다. 저우언라이 중국 외무상은 4월28일과 5월3일 두 차례에 걸쳐 “미국과 한국이 4만8000명의 포로를 그들의 의사에 반해 억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회의 마지막 날인 6월15일에도 공산 측은 종전의 주장을 반복하며 한반도 통일이라는 핵심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저우언라이 외무상은 “미국이 고의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제네바 회의의 계속과 재개를 요구하는 공식 결의안을 제출하고 표결을 요구했다.

    ‘장기 외교정책’을 위하여

    이에 대해 미국 대표 스미스 국무차관은 “이 제안은 한반도 문제 해결의 책임을, 몇 년의 세월이 걸리더라도, 이 회의에 지우려는 의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응수했다. 이날의 의장 영국의 이든 외무상은 “본 회의에는 투표 절차가 없으므로 저우 외무상의 제안은 다른 모든 제안과 같이 기록의 일부로 보존될 것”이라고 언명했다. 유엔 참전국 대표들은 폐회 직전 앞에서 설명한 16개 참전국 선언을 발표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국제사회 전체의 관심사다. 북핵 6자회담에서도 최근 한반도의 휴전상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한반도 통일 문제는 우선 6·25전쟁에 참전한 모든 교전국가의 관심사이자 나아가 국제사회인 유엔이 책임져야 한다. 유엔이 그간 이와 관련해 통과시킨 수많은 결정문은 법적으로 아직도 유효하다. 그간 이러한 결정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오직 냉전이라는 시대의 조류 때문이었다. 이제 냉전은 결말을 고했으므로,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다시 환원돼야 한다.

    현대 국제법의 권위자인 영국 케임브리지대 오펜하임 교수는 “평화협정만이 전쟁을 종료시키는 정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한 바 있다. 평화협정 체결에는 모든 교전국이 참석해야 한다. 제네바 회의는 이 원칙에 따라 진행됐다. 따라서 3개국 또는 4개국 정상의 종전 선언 등 최근 거론되는 방안들은, 설령 이루어진다 해도 전쟁을 종료시킨다는 정치적 의사표시는 되겠지만 법적인 효과는 없다. 지난 대선에서 한 후보가 자신이 당선되면 김정일 위원장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겠다고 공언한 것은 국제법을 모르는 말이다.

    현재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어떠한가. 국제정치학에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가장 힘있는 이론이 세력균형이론(balance of power theory)이다. 현실주의국제정치학의 대가인 한스 모겐소 교수는 저서를 통해 세력균형이론을 설명하며 한국을 예로 들었다. 중국, 러시아, 일본에 둘러싸이고 육지로 중국과 연결된 한반도는 2000여 년간 중국의 세력권에 있었고, 근래에는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한반도에는 미국이 등장해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는 이 세력균형의 한 축으로 미국이 필요하다. 통일 후에도 우리 혼자 힘만으로는 중국이나 러시아, 일본의 도전을 극복하기에 부족하다. 우리에게는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이라는 맹방이 국익상 필요한 것이다.

    원로 외교관 최운상의 1954년 ‘제네바 한반도 통일회의’ 회고
    최운상

    1925년 황해도 은율 출생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 외무고시 수석합격

    미국 조지타운대 석사(정치학), 하버드대 석·박사(법학)

    외무부 방교국장·정무국장, 駐인도·이집트·모로코·자메이카 대사

    現 순천향대 국제교육교류본부 교수


    외교정책에는 장기정책과 단기정책이 있는 법이다. 예컨대 영국의 장기적 외교정책은 유럽에서 어느 한 나라가 패권적 국가가 되는 것을 허용치 않으면서 동시에 미국과 영구적인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제네바 회의의엣 첫 번째로 의장을 맡은 태국의 프린스 완 외무상은 “한반도 통일은 국제적 긴장을 완화하고 아시아 기타 지역의 평화를 회복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한반도 통일에는 미국 외에도 여러 우방의 협조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6·25전쟁 당시 같이 피 흘리며 싸운 16개국이 있다. 그들과의 우호관계를 영구적으로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장기 외교정책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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