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최요삼 사망 계기로 본 한국 프로복싱 현주소

“파이트머니 1라운드 10만원꼴, 세계 챔프도 생계 때문에 타이틀 반납”

  • 고승철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cheer@donga.com

    입력2008-02-12 14: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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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프로복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최근 경기 후유증으로 사망한 최요삼 선수 사건은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선수들은 ‘껌값’도 안 되는 대전료를 받고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다. ‘국민 영웅’ 홍수환도, ‘공포의 레프트훅’ 조민도 한숨만 내쉰다. 청년 시절 대원, 동아 등 유수의 체육관에서 복싱을 수련한 고승철 전문기자가 안타까운 심정으로 한국 프로복싱의 현실을 취재했다.
    최요삼 사망 계기로 본 한국 프로복싱 현주소
    철권 사나이들이 울먹였다. 망자(亡者)와 이별하는 슬픔에, 쇠락한 한국 프로복싱에 대한 단장(斷腸)의 아픔에….

    1월5일 오전 6시 어슴새벽 서울 풍납동 현대아산병원. 왕년의 철권들이 ‘투혼의 챔피언’ 최요삼과 이승에서 작별하는 영결식장에 모였다. 최요삼은 지난해 12월25일 열린 세계복싱기구(WBO) 인터컨티넨털 플라이급 타이틀 방어전에서 받은 타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장기를 기증해 환자 6명의 생명을 구하는 데도 챔피언 역할을 했다.

    ‘4전5기 신화’의 주인공인 홍수환 한국권투인협회 회장이 추도사를 낭독하기 위해 마이크 앞에 섰다. 현역 시절에 호리호리한 몸매에 반항아 기질을 보였던 그도 세월이 흐르자 머리칼에 허옇게 서리가 앉은 점잖은 장년 신사로 변모했다.

    “최요삼 챔피언이 신인왕을 받던 때, 당신의 그 상냥하고 당당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납니다. 외딴곳에서 사랑하는 이와 조용히 살고 싶다는 당신의 소박한 꿈을 일기장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참으로 죄스럽고 서글플 따름입니다. 부디 저 세상에 가서는 그 꿈을 이루소서. 당신은 진정한 챔피언입니다.”

    홍 회장의 목소리가 식장 안에 울려 퍼지자 한 시대를 풍미한 전(前) 챔프들이 눈시울을 붉힌다. 장정구, 유명우, 변정일, 지인진…. 최요삼을 가르쳤던 조민 숭민체육관장도 고개를 숙인다. 고인을 친오빠처럼 따랐던 세계복싱협회(WBA) 현역 여자 세계 챔피언 김주희가 추모시를 낭독하며 통곡한다.



    “오빠, 제가 지금 보이시죠? 가슴으로 느끼고 계시죠?”

    사각의 링에서는 냉혹할 만큼 강인했던 사나이들도 애절한 추모시를 듣고는 몸이 무너지면서 어깨를 들썩인다.

    “뭐니뭐니 해도 복싱이 최고여”

    고인을 친동생처럼 아꼈던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는 고개를 숙인 채 눈가의 물기를 손수건으로 훔친다. 그는 최요삼 가족에게 건넨 부의금 봉투에 애절한 심정으로 글을 썼다.

    ‘삼아! 고작 형이 해줄 수 있는 건 저승 갈 때 노잣돈과 마음밖에 없구나. 차마 형은 네가 불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은 보기 싫다. 내 동생이 이렇게 가는 건 정말 싫다. 뭐가 그리 급해서 먼저 가는지…. 형이 너한테 해줄 게 너무도 많은데…. 삼아! 다음 세상에서는 고통 없는 삶을 살아라. 동생아 사랑한다.’

    최요삼 사망 계기로 본 한국 프로복싱 현주소

    홍수환

    권투인들은 최요삼이 쓰러진 뒤 순천향병원을 거쳐 현대아산병원에 입원한 사이 2주일간 여기서 머물다시피 했다. 이들은 챔피언에 대한 응급처치가 늦어져 숨졌다고 주장하며 한국권투위원회(KBC)에 건강보호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다.

    선수 출신 권투인들은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한국권투인협회를 결성하고 홍수환씨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때 최고의 인기를 누린 프로복싱이 이렇게 쇠락한 데 대해 개탄했다.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 프로복싱을 중흥시키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어떤 조문객은 소주를 마셔 불콰해진 얼굴로 “요즘 K1이니 프라이드니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복싱이 최고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자는 문상(問喪)을 갔다가 심야시간을 이용해서 권투인들을 만나 한국 프로복싱의 어제, 오늘, 내일에 대해 들었다. 기자는 청년 시절에 대원체육관, 동아체육관 등 명문 복싱체육관에서 복싱을 수련한 적이 있어 인터뷰 때 이들과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국민 영웅’ 홍수환의 회한

    조문객 가운데 홍수환(58) 한국권투인협회 회장은 단연 돋보였다. 여러 조문객이 그를 깍듯이 대했다. 그는 동심원의 중심에 선 듯했다. 하기야 전성기인 1970년대에 ‘국민 영웅’이었으니….

    그는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WBA 밴텀급 세계 타이틀전에서 챔피언 아놀드 테일러를 누르고 왕좌에 앉았다. 이듬해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알폰소 사모라에게 4회 KO패하며 타이틀을 뺏겨 “한물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1977년 11월26일 파나마에서 열린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에서 그는 ‘신화’를 창조한다.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헥토르 카라스키야는 11전 전적을 모두 KO승으로 장식한 돌주먹답게 2회전에 홍수환을 난타, 4번이나 다운시켰다. 패색이 짙은 홍수환이 전세를 역전시키리라고는 누구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그는 3회 들어 카라스키야의 턱에 카운터 펀치를 적중시켰고 휘청거리는 상대방에게 속사포 펀치를 퍼부어 통쾌한 역전 KO승을 거두었다.

    1998년 프로골퍼 박세리가 LPGA 경기에서 연못 옆에 떨어진 공을 치기 위해 양말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며 환상적인 샷을 날린 순간과 홍수환의 그 KO승은 한국 스포츠 역사상 쌍벽을 이루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아닐까.

    신수가 훤해 보이는 그와 병원 로비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앞을 지나가는 복싱계 후배들이 그에게 끊임없이 인사를 했다. 그는 여전히 카리스마와 열정을 지닌 듯하다. 눈매에도 힘이 실려 있다.

    ▼ 장례 준비하느라 힘들었겠습니다.

    “우리 권투인들이 기꺼이 감수해야지요. 최요삼 선수의 희생으로 권투인들이 단결하는 계기가 됐어요.”

    ▼ 복싱이 외견상으로는 위험하지만 실제로는 승마, 카레이싱, 행글라이딩 등 다른 스포츠보다 덜 위험하다는 통계를 봤는데요. 경험상 어떻습니까.

    “단련된 선수끼리 경기를 벌이면 별로 위험하지 않아요. 응급 상황이 생기면 신속히 대처하면 됩니다. 펀치를 맞고 다운되면 잠시 정신을 잃을 뿐이지 대부분의 경우 큰 지장은 없어요. 물론 평소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이 불의의 주먹을 맞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지요.”

    “복싱은 위험한 운동 아니다”

    최요삼 사망 계기로 본 한국 프로복싱 현주소

    변정일

    영국 복싱계에서 주치의로 활동한 애드리언 화이트슨은 “응급체계가 워낙 발전했기에 복싱은 이제 그다지 위험한 운동이 아니다”면서 “만약 복싱 경기를 금지한다면 음지에서 경기가 열려 복서들이 더 위험해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복싱은 주먹으로 때리는 격투기이니만큼 탁구, 배드민턴 등 상대방과 몸을 부딪치지 않는 종목보다는 위험한 편이다.

    ▼ 최요삼 선수의 경우엔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했다데요.

    “맞습니다. 그날 쓰러진 시각이 오후 3시2분인데 순천향병원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40분이었어요. 무려 40분 가까이 방치된 겁니다. 앰뷸런스 앞에 다른 차가 주차해 있어 빨리 가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다른 긴급 대책을 동원했어야죠. 대회를 진행한 KBC가 너무 안이했어요.”

    ▼ 프로복서 치료를 위한 건강보험기금이 거의 바닥났다면서요.

    “개탄할 일입니다. 선수들이 파이트머니에서 1%씩 떼서 적립한 돈인데 그게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행방을 꼭 찾아야 해요. 관리 책임을 맡은 KBC는 문책을 면할 수 없어요. 선수들의 건강이 위험하면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복싱 시키겠어요? 지금 복싱을 하는 젊은이들도 부모에게서 복싱 그만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겁니다.”

    ▼ 현역 시절에 기금을 많이 내셨겠군요.

    “제가 1974년 WBA 밴텀급 챔피언이 됐을 때 박정희 대통령께서 축하금 200만원을 주셨어요. 저는 그 돈 절반을 뚝 잘라 건강보험기금으로 냈습니다. 당시 100만원이면 집 한 채 값이었어요. 이번 같은 위급한 때 쓰라고 모은 돈인데…. 그야말로 피땀으로 얼룩진 돈 아닙니까.”

    그는 의분(義憤)을 느끼는 듯 오른손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쳤다. 목소리 옥타브는 자연히 높아졌다. 그에게 휴대전화가 자주 걸려와 말이 끊어지기 일쑤였다.

    ▼ 한국에서 프로복싱 열기가 식었습니다.

    “여러 요인이 있습니다. 권투인들이 뭉치지 못하기에 그렇기도 하고…. 복싱 중흥을 위해 최요삼 선수가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하늘나라로 간 게 아니겠어요? 시청률이 낮다고 TV가 중계를 외면하다 보니 악순환이 계속되고….”

    ▼ 요즘 주로 뭘 하십니까.

    “기업체에서 자기계발 관련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합니다. 제 나름대로 강연 뼈대를 잡았는데 반응이 좋아 다행입니다. 복싱이 건강을 위한 생활 스포츠로서 자리 잡도록 보급하기도 합니다. 에어로빅과 결합해 복서로빅(boxerobics)이라고 하지요. 늘 바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 복싱 중흥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실 겁니까.

    “우선 권투인들이 뭉쳐 건강보험기금을 잘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응급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도록 시스템을 만들겠습니다.”

    1970년대 최고 인기 스포츠

    최요삼 사망 계기로 본 한국 프로복싱 현주소

    지인진

    한국의 프로복싱은 한때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세계 타이틀 경기가 열릴 때면 거의 전 국민이 TV 중계방송을 보느라 거리가 한산했다. 역경을 딛고 챔피언 벨트를 딴 선수의 인생 역정이 일간지 사회면에 큼직하게 보도됐다.

    1978년 10월에 창간된 스포츠 주간지 ‘스포츠 동아’의 표지 인물을 살펴보자. 창간호 표지에는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는 김성준이 실렸다. ‘권투 특강’이라는 연재 기사도 시작됐다. 가수 패티 김 인터뷰의 큰 제목은 ‘패티 김은 알리를 좋아한다’였다.

    그해 12월말까지 ‘스포츠 동아’ 표지 인물은 ▲타이틀 획득한 김성준(2호) ▲레슬링 선수 양정모(3호) ▲축구선수 차범근(4호) ▲프로복서 정순현(5호) ▲프로복서 김광민(6호) ▲알리, 이노키(7호) ▲억울하게 판정패한 정순현(8호) ▲차범근(9호) ▲프로복서 주호(10호) ▲아시안게임 선수단(11호) ▲프로복싱 최우수 신인왕 양일(11호) ▲아시안게임(13호) 등이다.

    13개 호 가운데 무려 8개 호가 표지인물로 프로복서를 내세웠다. 그만큼 프로복싱은 최고의 인기 종목이었다. 그 황금기를 앞서 이끌던 인물 가운데 조민(63) 숭민체육관 관장이 있다.

    열광적인 복싱 팬이라면 조 관장의 청년 시절을 기억하리라. 조 관장은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중량급인 웰터급 선수로 활약했다. 동양챔피언을 지내며 동양권에서는 무적을 자랑했다. 깔끔한 테크닉에 ‘공포의 레프트 훅’을 날려 국내외 선수들을 줄줄이 캔버스에 때려눕혔다.

    그는 1974년 숭민체육관을 설립해 후진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후덕한 인품으로 제자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최요삼, 김봉준, 백종권 등 세계 챔피언을 키웠다. 최요삼의 선친과는 동갑이어서 최요삼은 조 관장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 최요삼 선수의 당일 컨디션은 어땠습니까.

    “좋았지요. 충분히 준비한 덕분에 몸이 가벼웠습니다.”

    조 관장의 말을 바로 옆에서 듣던 어느 문상객이 “요삼이 컨디션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형(조 관장)이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라고 따지듯이 말했다. 조 관장 맞은편에 앉은 이동포(42) 숭민체육관 사범이 “오래 함께 운동을 한 제가 보기로도 컨디션이 좋았다”라면서 조 관장을 거들었다.

    ‘공포의 레프트훅’

    ▼ 훈련은 어떻게 했습니까.

    “최 선수는 복싱에 입문한 지 17년이나 됐습니다. 한결같이 성실하게 연습했지요. 이번 대회를 앞두곤 유독 자기가 한국 복싱을 살리겠다고 강조하더군요. 스타가 없으니 한국 복싱이 침체됐다면서….”

    ▼ 침체 원인이 뭐라고 봅니까.

    “1982년 프로야구가 생기면서 프로복싱이 큰 타격을 당했습니다. 프로농구와 프로씨름 붐도 복싱에 악영향을 끼쳤고…. 프로복싱 TV 시청률이 떨어지면서 마침내 방송사에서 프로복싱 중계를 외면했습니다. 중계료에 크게 의존하는 프로복싱은 흥행에서 성공하기 어려워 점차 영세해졌지요. 국민이 먹고살 만하니까 블루칼라 스포츠인 복싱보다 화이트칼라 운동인 야구를 더 좋아하게 됐고….”

    ▼ 복싱계 내부에는 책임이 없습니까.

    “저희도 책임이 있지요. 한 예를 들자면 자기 선수를 키운답시고 약한 상대를 고르다 보니 진정한 강자가 생기기 어렵지요. 그러니 스타가 나타나지 않고, 스타 없는 경기는 인기를 잃지요.”

    ▼ 숭민체육관은 역사가 30여 년이 된 전통 있는 곳인데 프로선수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10여 명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말이 프로이지 생계유지가 되지 않으니 운동에 전념할 수 없어요. 진짜 프로라고 하기 곤란할 정도지요. 체육관을 개관할 때만 해도 복싱의 인기가 대단해서 수련생들이 몰려들었지요. 당시엔 장발이 유행이었잖아요. 하루는 머리를 치렁치렁 기른 청년이 권투를 배우겠다면서 찾아왔는데 스포츠 머리로 깎지 않으면 안 받아준다고 하자 이튿날 깔끔하게 이발을 하고 나타나더군요.”

    ▼ 조 관장은 현역 시절 웰터급 동양챔피언을 지냈고 파워 넘치는 복싱으로 골수 팬을 많이 확보했었죠.

    “그땐 신이 나서 정말 열심히 연습했지요. 아침에 운동할 때 레프트훅만 1000번 정도 연습했어요. 레프트 한 방이 제대로 상대방 턱에 걸리면 여지없이 쓰러지더라고…. 장충체육관에서 동양타이틀전 3개를 하루에 치른 대회가 있었는데 관중이 만원이었고 열기가 대단했지요. 저는 부산에서 자주 시합을 했는데 요즘도 부산에 가면 저를 알아보는 팬이 더러 있답니다.”

    ▼ 과거 선수들과 요즘 선수들의 기량을 비교한다면.

    “과거엔 천재적인 복서가 많았어요. 서강일, 강부영, 이원석, 김현…. 모두 테크닉이 대단했죠. 요즘에는 아무래도 선수층이 얇으니까 기량이 떨어지지요.”

    조 관장은 기자에게 보여줄 게 있다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굵직한 손가락으로 자판을 이리저리 눌러 작은 화면에 사진이 뜨자 몇 장을 보여준다. 전성기 모습이다. 1945년생이니 환갑이 넘은 나이인데 화려한 현역 시절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에 금세 생기가 돈다.

    ‘다이어트 복싱’으로 연명

    젊은 권투인들의 회한도 깊다. 세계복싱평의회(WBC) 밴텀급 챔피언을 지낸 변정일(40) BJI 체육관장. 현역 시절 그는 왼손잡이로서 출중한 테크닉을 보였다. 은퇴 이후엔 복싱체육관을 세우고 프로모터로 활동하는 등 사업가로서도 성공한 인물로 꼽힌다.

    변 관장은 특히 복싱을 다이어트 운동으로 활용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해 선풍을 일으켰다. 케이블TV에서 복싱 해설자로도 활동한다. 동국대를 졸업하고 동국대 대학원에서도 공부한 인텔리다. 현역 시절의 호리호리한 밴텀급 몸매는 사라졌고 여느 중년 남자처럼 몸피가 두툼해졌다.

    ▼ 최요삼 선수와는 어떤 관계였습니까.

    “제가 복싱 프로모션 사업을 하면서 최 선수 시합을 자주 개최했습니다. 아주 성실한 선수였지요.”

    ▼ 변 관장은 다이어트 복싱을 보급해 이목을 끌었는데 지금 체육관 수련생은 몇 명입니까.

    “350여 명 됩니다. 아마 국내 최대 규모일 겁니다. 아쉬운 것은 프로선수가 하나도 없다는 점입니다. 프로복싱 환경이 워낙 열악하다 보니 선수 지망생이 없어요.”

    ▼ 요즘 4라운드 프로선수 파이트머니는 얼마나 됩니까.

    “어휴, 말도 마세요. 40만원밖에 안 됩니다. 1라운드에 10만원꼴이지요. 거기에서 매니저 몫으로 30% 떼고 나면 몇 푼 남지 않습니다. 매 맞고 받는 돈치고는 너무 적지요. 그러니 누가 프로선수 생활을 하려 하겠습니까. 선수들이 복싱을 해야 할 당위성을 못 느껴요.”

    ▼ 프로 선수층이 그렇게 얇으면 한국 랭킹 10위를 채우기도 힘들겠군요.

    “랭킹 10위는 고사하고 어떤 체급엔 챔피언도 없어요. 대체로 랭킹 5위까지만 있다고 보면 됩니다.”

    ▼ 시합이 자주 열리지 않아 골수 팬들은 무척 아쉬워합니다.

    “지방 중소 도시에서 지자체 홍보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는 경우가 많아요. 지자체로부터 작은 금액이나마 지원 받아서…. 제대로 된 스폰서를 구하기가 어려워요.”

    ▼ 해마다 12월이면 신인왕전이 열리지 않습니까. 신인 등용문으로 의미 있고 관중도 많았는데요.

    “그 대회도 빛을 잃어가고 있어요. 이번 겨울엔 아직 확실한 일정조차 잡히지 않았답니다.”

    ▼ 프로복싱을 중흥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많이 도입해야지요. 거시적인 안목으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제도적인 보완장치도 마련해야 합니다.”

    ▼ 여자 프로복싱은 어떻습니까.

    “첫 여성 세계 챔피언인 이인영 선수를 제가 발굴해 키웠습니다. 여자 프로복싱은 이목을 끌기는 하지만 흥행 규모가 크지는 않습니다. 역시 남자 복싱이 주도해야지요.”

    ▼ 이인영 선수의 세계 타이틀전을 관람하러 갔더니 링사이드 입장료가 1만원밖에 하지 않더군요. 그런데도 관중석은 썰렁하고…. 그때 최요삼 선수도 머리카락에 노란 물을 들이고 출전했더군요.

    “입장료를 안 받아도 관중이 꽉 차지 않아요.”

    K1 진출 위해 챔프 반납

    지인진(35) 전 WBC 페더급 세계 챔피언은 2007년 8월 세계 타이틀을 자진 반납했다. 생활고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란한 테크닉과 지칠 줄 모르는 스태미너를 가진 정상급 복서다. 그런데도 대전료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 지경이다. 그만큼 프로복싱이 열악한 상황에 빠졌다.

    그는 서울 봉천동에 있는 대원체육관에서 김진길 관장에게서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복싱을 배웠다. 당곡중학교 1학년 때부터 복싱을 시작했으니 20년이 넘었다.

    ▼ K1(이종격투기)에 진출하기 위해 타이틀을 반납했다면서요.

    “지난 여름이었어요. K1에서 뛰기로 계약했습니다.”

    ▼ 아쉽지 않나요.

    “당연히 아쉽지요. 가슴이 아픕니다. 하지만 명색이 세계 챔피언이라면서 생계유지가 안 되니 붙들고 있을 수 없잖아요. 처자식 딸린 가장인데…. 2002년에 결혼해서 1남 1녀가 있습니다. 지금도 복싱인이라는 자부심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복싱계가 되살아난다면 복귀할 용의가 있습니다. K1은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 K1 데뷔전은 언제 치릅니까.

    “2월24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립니다. 전 세계 챔피언 최용수 선배님도 그날 K1 경기를 치릅니다. 최용수 선배님과 요즘 양평동에 있는 21세기체육관에서 함께 수련합니다.”

    ▼ 킥 위주로 연습합니까.

    “아직 킥이 익숙하지 않아요. 데뷔전에서는 일단 복싱 위주로 풀어나가려고요.”

    ▼ 상대는 정해졌나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 두렵지 않은가요.

    “복싱의 명예를 걸고 싸우겠습니다.”

    지인진은 가까이서 보니 맑은 눈망울을 가졌다. 심성이 무척 고운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여린 사람이 링 위에서 투혼을 불사르는 용사로 변모하는 게 신기할 정도다. 기자는 그의 K1 데뷔전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응원하러 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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