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파수견을 애완견 만들려다 악수(惡手) 거듭

노무현 2003-2008, 빛과 그림자 - 언론

  • 한균태 경희대 교수·언론학 hahnkt@khu.ac.kr

    입력2008-02-14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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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무현 정부의 지난 5년간 언론정책은 ‘정부에 비판적인 특정 신문들을 겨냥한 편향 일변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노 정권이 추진한 이른바 ‘언론개혁’이라는 언론정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조목조목 짚어봤다.
    파수견을 애완견 만들려다 악수(惡手) 거듭

    정부의 기자실 폐쇄 등에 항의하는 대한언론인회 회원들.

    취임 초기부터 말 많던 노무현 정부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 대통령의 거침없는 언행으로 5년 내내 사회 곳곳에서 파열음이 그치지 않았다.

    언론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쇳소리’는 더 시끄러웠다. 이 때문에 국력낭비도 심했다. 이른바 ‘언론개혁’을 독선적으로 밀어붙인 탓이다. 게다가 ‘오보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언론과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했고,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하는 것도 모자라 민·형사 소송도 제기했다.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언론의 자유와 독립 보장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개혁’이라 보기도 어렵다. 또한 우호적 언론은 개혁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이중성도 드러냈다.

    낡은 권위주의 언론관

    다른 건 제쳐놓고 정책의 정당성, 즉 효과나 효율성 측면에서 봐도 실속이 없었다. 그래서 거의 모든 언론정책은 실패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새 정부에서 전면 재검토가 확실시되는 신문법과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이다. 이 모두 노무현 대통령이 정권 초기에 언론정책의 기조로 밝힌 취재환경 개선이나 언론대응 시스템 마련의 일환으로 강력히 추진된 것이다.

    우리는 언론을 중요한 사상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기구이자 도구로 인식한다. 또한 권력의 매개체(agent of power)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일정부분 맞는 말이다. 이 때문에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언론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거나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이 진보진영으로선 건국 이래 처음으로 권력을 쟁취한 김대중 정부와 그 뒤를 이은 노무현 정부가 집권 초부터 언론개혁을 시도한 것은 이해될 만하다. 새로운 진보적 정치환경에 기성 언론을 길들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껏 ‘언론권력’의 오·남용도 없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우선적 개혁 대상으로 여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론이 ‘제4부(府)’로서 헌법적 특권을 보장받는 이유를 조금만 파악했더라면 언론개혁을 그렇듯 무리하게 추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꿔 말해서 민주정부라면 언론을 굴복시키려는 갖가지 유혹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했음에도 지난 5년 동안의 현실은 역주행 그 자체였다.

    노 정권은 언론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비판적 언론의 목소리를 낮추기 위한 정책에 집착했다. 그 내용이나 추진방식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웠다. 집착이 도를 넘다보니 언론탄압의 성격까지 드러냈다. 이는 노 대통령의 잘못된 언론철학이나 상황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심하게 말하면 언론을 단지 주인을 즐겁게 해주는 애완견(lap dog)으로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한마디로 낡은 권위주의 언론관(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든 개혁이 그렇듯, 언론개혁도 그 자체가 진정성을 갖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일 경우 또 다른 병폐나 파행을 초래할 뿐이다. 그랬기에 사회적 공감을 얻기보다는 저항과 반발이 심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결과는 있었다. ‘아군 대 적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기초한 심각한 갈등구조가 확실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언론의 관계는 심각한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언론의 태생적 성격

    파수견을 애완견 만들려다 악수(惡手) 거듭

    2005년 정부의 신문법, 언론중재법 개정을 통한 언론탄압에 대응하려는 각계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반면에 정말로 개혁이 필요한 방송에 대해선 유난히 관대했다. 방송은 ‘개혁 무풍지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KBS 이사선임 권한을 가졌고 방송정책을 주도하는 방송위원회는 ‘코드 인사’가 더 심해졌다. 이 때문에 정파적 색채가 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지상파 방송사들은 정부와의 우호적 관계에 힘입어 유례없는 혜택을 받았다. 2005년에 종일방송이 허용됐다. 정권 말기인 2007년 하반기엔 20년 동안 동결됐던 수신료 인상을 비롯해 광고총량제와 중간광고제 등 이윤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안들이 방송위원회의 허락을 얻어냈다. 국회 통과 혹은 시행령 개정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개혁 중증(重症)에 시달리고 있는 신문과는 대조적이다. 이처럼 언론정책은 신문에 국한된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특정 신문들을 겨냥한 편향적인 것이었다. 매체 간 조화와 균형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주목됐던 개혁정책 중 하나가 언론 부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언론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있다. 즉, 방송·통신의 융합, 뉴미디어의 계속적인 출현, 미디어시장의 글로벌화와 외국 거대 미디어 자본의 침투, 한미FTA 타결 등 예전에 예상할 수 없었던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공정경쟁의 보장을 통한 매체 간 균형발전과 산업경쟁력 제고, 그리고 매체산업의 육성 등 중요한 정책적 과제가 시급히 추진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많은 ‘개혁적’ 언론정책이 이러한 기대와는 크게 어긋났다. 방송을 포함해 언론 전반에 걸친 장기 비전이나 기획에 바탕을 둔 전향적(proactive) 조치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주요 보수신문들을 억누르기 위한 대책성(reactive) 성격만이 강했다. 신문고시, 신문법 개정, 공동배달제, 취재지원 시스템 선진화 방안 등 대부분의 조치가 그렇다.

    이런 조치들은 언론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언론정책을 수립하는 데 있어 잊지 말아야 할 전제가 언론의 태생적 성격이다. 본래 언론은 정치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파수견(watch dog)으로서의 감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발전한 국가들에서 언론은 투쟁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특히 지난 18세기 이래 서구사회에서 산업화와 민주화가 급속히 발전하는 데 언론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언론은 어떠한 권력기관으로부터도 통제될 수 없는 독립된 기구로 존재해야 할 확고한 당위성과 명분이 구축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정치민주주의 이론가들은 민주주의가 발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유식한 시민(informed citizen)’을 만드는 언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시민에게 정확하고 좋은 정보를 알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언론이 자유로워야 하며 어떠한 통제도 받아서는 안 된다. 민주정부라면 역사적으로 인식된 진리이기도 한 이 명제를 거듭 명심할 필요가 있다.

    피해의식과 강박증

    그런데 명색이 민주적 참여정부라는 노무현 정부 들어 언론자유가 뒷걸음쳤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실상 취임 전부터 노 정권의 언론정책이 편협하고 왜곡될 것이라는 기류는 감지됐다. 노 대통령이 당선된 후 2003년 2월22일 첫 인터뷰를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와 했다는 것 자체가 언론정책의 방향을 알리는 강한 메시지였다.

    이 인터뷰에서 노 당선자는 보수언론에 대해 갖고 있는 적대적 감정과 피해의식처럼 남아 있는 강박증을 여지없이 표출했다. 후보 시절이나 취임 이래 노 대통령이 사용한 대표적 용어를 보면 언론에 대한 뒤틀린 인식을 금방 알 수 있다. 이 중 하나가 ‘조폭 언론과의 전쟁론’이다.

    파수견을 애완견 만들려다 악수(惡手) 거듭

    정부의 기자실 폐쇄에 맞서 촛불을 켜고 기사를 송고하는 기자들.

    알다시피 조폭 언론이라 지칭한 신문은 정부 정책에 가장 비판적이던 이른바 동아·조선·중앙일보다. 그래서 갖가지 제도적, 법률적, 행정적 시도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지배적 시장 지형을 억지로 바꾸거나 목소리를 억누르는 데 역점을 뒀다. 그러다 보니 거의 모든 언론정책이 기본 상식과 이성으로는 수긍하기가 힘들었다.

    우선 취임 3개월째에 단행된 신문고시 개정을 보자. 원래 신문고시는 1999년 규제개혁 방침에 따라 폐지됐다가 2001년 7월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면서 부활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만 하더라도 신문업계의 자율규제를 전제로 했다. 그러나 노 정권 들어서 공정거래위원회가 직접 규제할 수 있도록 개정됐다.

    즉, 공정위가 상습적으로 신문고시를 위반하는 신문사와 지국에 대해 연간 매출액의 2%에 달하는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심지어 위반혐의를 신고한 사람에게는 신고포상금을 지급하도록 했다. 이처럼 부당 내부거래에서 나아가 신문지국과 독자로까지 규제 범위를 넓힘으로써 메이저 신문들을 더욱 압박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법집행의 형평성과 자의적 판단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았다.

    사실 중앙 일간지의 매출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그럼에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이유는 분명하다. 신문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동아·조선·중앙이 여론에 미치는 이념적 혹은 사상적 영향력 때문이다. 당시 신문보도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2003년 8월 국정토론회에서 ‘대(對)언론정책’과 관련해 “법집행을 한 뒤 공정한 경쟁이 되면 시민들이 언론을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고 했다.

    ‘사상의 시장’

    과연 대통령의 말대로 법집행을 통해 ‘불공정’ 시장구조가 개선됐는가. 이번 대선 결과에서도 드러났듯이 소비자인 국민은 현명하다. 무가지나 경품 등에 잠깐은 현혹될 수 있을지언정 오래가지 않는다. 정보의 품질이 나쁘거나 내용이 수준이하면 바로 다른 신문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이게 바로 유료 정보시장(information market)의 논리다. 이러한 시장논리를 무시한 신문고시는 시대에 뒤떨어진 비민주적이고 반시장적 규제조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04년 대통령 탄핵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개정이 추진된 신문법(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은 가장 문제가 됐다. 위헌적 소지뿐 아니라 국가의 감시 및 통제 기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조항들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제정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국회에서 절대 다수의 의석에 힘입어 통과는 됐지만, 2006년 헌법재판소에서 일부 조항이 위헌 결정을 받았다.

    헌재 전원재판부는 ‘제17조 시장지배적 사업자 추정조항과 제34조 신문발전기금 지원의 제한에 대한 조항’에 대해서 위헌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제14조 제3항인 신문겸영 금지 조항에 대해서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헌재의 결정은 신문법이 과다한 규제조항으로 언론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또한 정부와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의도했던 동아·조선·중앙의 ‘여론 독과점구조 타파’라는 목적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물론 이들 일부 유력 언론의 소유구조나 기업운영 형태, 그리고 판매행위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 또한 군부독재정권 이래 권언(權言)유착으로 상당한 특혜와 이익을 누려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서 신문 상품의 또 다른 유형의 시장인 사상의 시장(intellectual market)마저 정권의 입맛에 맞게 바꾸겠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 국가통제주의와 다를 바 없다. 자연발생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움직이는 사상의 시장을 물리적 힘으로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문이라는 상품 특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일반 소비재와 달리 신문은 정치적 혹은 이념적 성향이 포장된 정보 상품이다. 특히 신문은 사설이나 칼럼을 통해 자신의 색깔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이 색깔의 적합성 여부는 돈이 지급되는 정보시장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정보시장에서 독자(소비자)의 보수성향이 우세하면 보수적 색채를 띤 신문들의 점유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을 고려치 않고 30%를 기준으로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선정한다는 규정은 그야말로 정보 상품의 자본주의 시장 메커니즘과 일반 국민의 소비주권을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단 위헌 결정을 받은 규제조항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문 진흥의 한 방편으로 설립된 신문유통원의 공동배달제(이하 공배제)나 신문발전위원회를 통한 지원이 바로 그것이다. 2년여가 흐른 지금 효과성에서도 상당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공배제의 경우 실효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지역신문에 대한 지원도 선정 대상과 관련해 국민세금의 낭비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일단 메이저 신문이 지배하는 시장질서를 재편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될 것이라는 의혹은 접어둔다 해도 정부의 지원(육성)은 규제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에 독약이 될 수 있다. 특히 혜택의 주 대상인 군소신문들의 경우 거의 모두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면 권력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언론의 독립성이 문제가 된다. 1991년의 빈트후크 선언에서도 파악할 수 있듯 언론자유만큼이나 언론독립도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을 위해서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막가파식 강행

    노 정권 언론정책의 대미를 장식한 ‘취재 시스템 선진화 방안’ 역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김영삼 정부 시절에 경제개발협력기구인 OECD에 가입한 만큼 취재 시스템도 글로벌 기준으로 개선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다. 오랜 관행이었던 출입기자제와 간사제의 폐해가 꽤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 때문에 선진화 방안의 긍정적 측면에 대해 동의하는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선진화란 무엇인가. 기본 상식에 입각한다면, 국민이 알고 싶어하는 정보를 정확하게 보도할 수 있도록 취재기회를 확대하고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을 보장하는 취재환경의 조성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막가파식 강행과 함께 실제 정책은 이러한 상식적 의미와는 전혀 동떨어졌다.

    선진화 방안에서 취재 관행을 변화시키는 골자는 기자실 통폐합과 통합브리핑룸 설치, 기자실 폐쇄, 공무원 취재 제한 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 방안을 통해 기자실에 의한 담합구조의 퇴조나 군소매체의 접근권 강화 등과 같은 긍정적 변화는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론뿐 아니라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는 근원적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왜냐하면 먼저 취재원에 대한 접근이 자유로워야 궁극적으로 국민의 알권리가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을 위한 전방 초소와 같은 기자실이 폐쇄됐다. 일선 공무원에 대한 면담취재도 실무국장에게 일일이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부처 사무실 취재뿐 아니라 취재원 보호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취재 자체가 봉쇄될 수도 있다. 게다가 정보접근권을 보장하는 정보공개법이나 정보청구법도 유명무실해서 정보의 진위도 가리기가 힘든 실정이다. 결과적으로 오보(誤報)가 늘어날 가능성이 커졌다.

    노 대통령이 집권 초기부터 줄기차게 외친 것이 오보와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로 취재환경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단지 일원화한 브리핑 창구를 통해 정부에 유리한 홍보성 정보의 일방적 제공만이 가능해졌다. 이게 선진화 방안이라는 데 누가 동의하겠는가. 결국 언론의 고유 권한인 취재 대상, 내용, 시기 등을 모두 장악하겠다는 과도한 정부 통제의 욕심만 드러낸 것이다.

    21세기 들어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미디어 환경의 지형이 크게 바뀌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는 급성장 추세에 있다. 반면에 전통적인 매스미디어, 특히 신문의 입지는 날로 위축되고 있다. 한편 부처의 정책 혼선과 사업자 간 갈등으로 인해 방송과 통신의 융합은 예상보다 느리게 진척되고 있다. 부처 간의 이해관계로 관련 제도나 법규도 제대로 개혁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언론정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절실히 요구된다. 즉, 자율과 책임, 공정 경쟁과 경쟁력, 참여와 다양성이라는 개방적 인식의 틀이 필요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미디어 전체의 판이 새로운 틀 속에서 짜일 것으로 기대됐다.

    그렇지만 실제 언론정책은 언론의 정치도구화에 초점이 맞춰졌다. 바꿔 말하면 집권 말기까지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통제, 간섭, 규제 위주의 언론정책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민주사회의 보루인 언론자유와 독립의 보장과는 거꾸로 가는 정책이었다.

    5년의 소모적 논쟁

    1987년 6월 항쟁 이래 어렵게 시작된 민주화의 역사도 20년이 넘었다. 그런데 민주화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언론의 자유와 독립은 노무현 정부 시절 오히려 후퇴했다. 민주적 참여를 통한 선진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 어느 정부보다도 강력한 자세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활동을 간섭하거나 제약하는 정책을 추구한 것이다. 특히 정부에 가장 비협조적인 동아·조선·중앙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과 수단들을 동원했다. 이 때문에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누누이 말하지만 언론의 비판과 감시 기능은 민주사회의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이 훼손될 경우 통치자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 속에 부패만이 초래될 뿐이다. 따라서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은 정부의 독주를 견제하는 데 필수적이다.

    파수견을 애완견 만들려다 악수(惡手) 거듭
    한균태

    1955년 서울 출생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미국 유타주립대 석사·미국 텍사스대 박사(언론학)

    경희대 언론정보대학원 원장, 한국언론학회장

    역서 : ‘미디어경영’ ‘현대사회와 여론’ 등


    물론 집권세력의 처지에서는 언론의 비판이나 감시가 달가울 리 없을 것이다. 간혹 도가 지나쳐 남용으로 비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럴 때조차 정부는 자제와 포용으로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정부가 언론의 비판과 감시에 열린 자세로 임하다 보면 양자 간에는 좋은 신뢰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 그래야 언론과의 건전한 긴장 관계 속에서 건강한 정부가 만들어질 수 있다.

    따라서 차기 정부의 언론정책은 선진화의 기본 전제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언론활동의 보장’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언론도 자체적으로 뼈를 깎는 자성이 필요하다. 지난 5년 동안 정부와 소모적 전쟁을 치르면서 스스로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를 잘 터득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가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저널리즘의 기본정신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고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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