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호

‘묻지마 분권’에 국가경쟁력 흔들, 강박적 균등주의로 제로섬 자초

노무현 2003-2008, 빛과 그림자 - 지방

  • 유재원 한양대 교수·행정학 jwyoo@hanyang.ac.kr

    입력2008-02-14 10: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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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화점식 지방정책 7개 분야 83개
    • 지방교부세 비율 15% → 19.25%
    • 지방정부 도덕적 해이 심각
    • ‘국세:지방세=8:2’ 줄곧 유지
    • ‘윈-윈’ 대신 ‘제로-섬’ 전략 선택
    • 균형개발에서 경쟁력 강화로 전환한 외국과 엇박자
    ‘묻지마 분권’에 국가경쟁력 흔들, 강박적 균등주의로 제로섬 자초

    ‘행복도시’는 노무현 정부의 핵심적인 지방정책사업이다. 2006년 1월 열린 ‘행복도시’ 건설청 개청 기념식.

    노무현 정부가 추구한 지방정책은 참으로 다양하고 방대하다. 지방자치, 지방분권, 균형발전, 지방행정개혁 등 여러 주제를 담고 있다.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자’는 공격적인 자세로 지방정책의 로드맵을 구성한 듯하다. 학계에서 논의돼온 주요 개혁안들을 망라해 정책대안으로 추구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다.

    노무현 정부의 지방정책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국가균형발전위원회, 행정자치부 등의 다양한 정부기구를 통해 입안되고 추진됐다. 그중 하나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작성한 지방분권 로드맵에 제시된 정책과제만 해도 중앙-지방정부 간 권한 재분배, 재정분권 추진, 지방정부 자치역량 강화, 지방의정 활성화 및 선거제도 개선, 지방정부의 책임성 강화, 시민사회 활성화, 협력적 정부 간 관계정립 등 7개 분야에 걸쳐 83개에 달한다.

    이 방대한 지방정책을 모두 평가하는 것은 독자의 관심과 지면 제약을 고려할 때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여러 정책을 관통하는 공통분모를 찾아내 이를 살펴보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부 지방정책의 성격과 특성을 두 가지로 규정한다. 분권지상주의와 균등주의가 그것이다.

    분권형 선진국가 추구

    노무현 정부는 분권에 엄청난 애착을 갖고 출범했다. ‘분권형 선진국가’를 정부의 미래상으로 내걸 정도로 이에 집착했다. 분권을 선진국가의 필수요건으로 간주했기에 지방분권을 자연스럽게 국가 재구조화(state restructuring) 전략으로 자리매김할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다.



    분권형 정부에 대한 애착을 문제 삼을 수는 없다. 분권은 시대적 대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추구할 미래의 지방자치 모델을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은 채 분권에만 집착했다는 점이다.

    분권의 형태는 다양하며, 분권의 이상형에는 여러 형태가 있다. 영국식 지방분권은 미국식 지방분권과 지향하는 이념 목표 가치 등이 다르며, 유럽식 분권과도 다르다. 노 정부는 분권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로드맵에 담기에 앞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 분권 모델을 설정했어야 했다. 추구할 분권 모델이 무엇이냐에 따라 분권의 구체적 전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특별한 분권 모델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분권을 추구하면 유형과 방식에 상관없이 다 좋다는 식의 ‘묻지마 분권’ 혹은 분권지상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지방자치의 형태는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되지만, 자본주의가 수행하는 주요 기능을 중심으로 분류하는 방식이 자주 사용된다. 어느 자본주의 사회이든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소비와 생산이다. 소비가 사회복지 기능을 의미한다면 생산은 경제성장 기능을 의미한다. 지방자치를 국가와 지방정부 간의 노동분업 체제로 볼 때, 자본주의의 필수요소인 소비기능과 생산기능을 국가와 지방정부에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가 국가통치의 중요한 과제가 된다.

    명확지 않은 분권 모델

    ‘묻지마 분권’에 국가경쟁력 흔들, 강박적 균등주의로 제로섬 자초

    노무현 정부의 지방정책 기조는 가난한 지자체 밀어주기였다. 낙후도에 따른 차별지원 방안을 모색한 공청회(2007년 9월).

    크게 세 가지 방식이 고려될 수 있다. 첫째 중앙이 소비기능을 주로 담당하고 생산기능은 지방이 담당하는 체제다. 미국이 이러한 체제의 전형이다. 둘째 중앙이 생산기능을, 지방은 소비기능을 주로 담당하는 체제다. 대처 총리 이전의 영국이 이러한 체제의 전형에 해당한다. 셋째 중앙과 지방 간 소비와 생산기능이 명확하게 분화돼 있지 않고 소비 혹은 생산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체제다. 예컨대 6:4 혹은 4:6과 같이 엇비슷한 비율로 중앙과 지방이 소비와 생산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체제다. 일본이 이에 해당한다.

    각각의 체제는 나름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으며, 정치경제적 특성이 각기 다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를 포함해 역대 어느 정부도 이 중 어떤 모델을 지방분권의 이상형으로 추구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한 적이 없다. 지방분권을 추진하는 데에만 급급했을 뿐 미래 지방자치의 좌표를 찍는 데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분권의 세부 구성요소에는 자치입법권, 자치행정권, 자치조직권, 자치재정권이 있다.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분권형 정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가졌다면 각 유형의 분권을 어느 정도, 어떤 방식으로 자치단체에 부여할지에 대해 고민했어야 했다. 예컨대 국세를 지방세로 이전하는 방식과 지방교부세를 확대하는 방식은 지방재정을 확충하는 효과 면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지방에 미치는 정치경제적 효과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에 따라 미래 지방정부의 정책성향이나 정치형태가 변한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분권형 정부에 대한 명백하고 구체적인 비전이 없었기에 분권의 유형, 정도 및 방식에 따른 정치경제적 효과를 계산하지 않았다. 단지 ‘the more, the better’라는 분권지상주의 신념에 입각해 분권의 유형이나 방식에 상관없이 더 많은 권한을 자치단체에 부여하는 방향으로 지방분권 로드맵을 작성했다. 그 결과 지방세 및 지방교부세 확대가 지방에 미치는 정치경제적 효과에 있어서 명백히 상반되는 대안들임에도 지방재정을 확충하는 효과에서는 같다는 이유로 지방분권 로드맵에 동등한 비중으로 포함시켰다.

    지난해 11월 국정브리핑에서 인용된 청와대 정부혁신비서관의 발언은 분권지상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참여정부는 적극적 재정분권을 통해 지방이 사용하는 재정을 지속적으로 확충해왔다. 자치단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지방교부세율을 획기적으로 인상하고, 국가균형발전 특별회계 신설, 지방세 과표 현실화 등 다각적인 지방재원 확충노력을 추진해왔다 … 이러한 노력으로 현재 우리나라의 지방세 비중은 20.5%로 OECD 평균 22%와 비슷하나, 지방의 사용가능 재원 비중 60%는 OECD 평균 42%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재정분권 확대를 위해 노력해온 노 정부를 자찬하고 있다. 여기서도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분권의 미래상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재정분권 확대를 위해 어떤 방식을 사용했느냐는 따지지 않는다. 모로 가도 (재정)분권만 성취하면 된다는 식이다.

    물론 분권지상주의가 노무현 정부만의 오류는 아니다. 분권지상주의는 1980년대 지방자치가 부활하면서 생겨난 유물이다. 분권지상주의는 중앙집권주의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다. 개발독재 시기를 거치면서 대두된 권력남용, 인권탄압, 부패, 정경유착과 같은 사회적 폐해가 중앙집권적인 정치 시스템에서 자행됐기 때문에 지방자치 도입이 논의되기 시작한 1980년대에는 ‘중앙집권=비민주주의’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중앙집권이 비민주주의와 동일시되는 분위기에선 반대로 지방자치 및 지방분권이 민주주의와 동일시됐다.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 강해질수록 더 지방분권을 희구하게 됐고, 결국 분권만능주의를 낳은 것이다.

    지방이 稅收 57.5% 사용

    ‘묻지마 분권’에 국가경쟁력 흔들, 강박적 균등주의로 제로섬 자초

    2006년 10월 열린 수도권 과밀반대 시민대회.

    이른바 ‘묻지마 분권’을 추구한 결과 참여정부에서는 모든 유형의 분권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지방분권특별법과 기능이양일괄법 제정을 통해 권한 및 기능 이양을 획기적으로 촉진시키기 위한 제도적 물꼬를 텄으며, 총액인건비제를 도입해 자치조직권과 자치인사권을 획기적으로 강화했다. 비록 그 효력이 제주도에 국한하지만 제주특별자치도법안의 통과와 자치경찰제의 시행을 통해 중앙의 권한과 기능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할 수 있는 시금석을 마련했다. 특히 분권의 핵심영역으로 규정되는 재정분야의 분권이 두드러졌는데, 노무현 정부 들어 지방교부세와 같이 지방으로 이전되는 재원을 늘린 결과 조세수입 중 지방이 실질적으로 사용하는 비중이 2002년 48.5%에서 2007년 57.5%로 크게 늘었다.

    혹자는 정부혁신분권위원회가 지방분권의 미래상으로 주민과 함께하는 정부, 지속적인 자기개혁이 가능한 정부, 지방의 창의성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 자율과 책임 그리고 공동체 정신을 바탕으로 한 사회 등의 요소를 제시한 것을 지적하며, 이것이 노무현 정부가 추구하는 지방분권의 이상적 모델이 아니고 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데 위원회가 제시한 이러한 속성들은 정치적 지방자치를 실시한 나라라면 어느 국가라도 달성할 수 있는 지방자치의 보편적 가치에 불과하다. 특정 형태의 지방자치 모델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강박적 균등주의

    노무현 정부를 사로잡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균등주의다. 균등주의는 균형주의, 평등주의, 형평주의 등의 용어로 치환해도 무방하다. 균등은 기회의 균등, 접근의 균등, 지급한 만큼 받는 시장균등, 결과의 균등 등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데, 노 정부가 지향하는 균등주의는 결과적 균등에 가깝다. 노 정부를 흔히 좌파정부라고 하는데, 좌파적 정책성향은 지방정책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노무현 정부의 좌파적 성향을 확연히 보여주는 것은 행정수도 이전 정책과 뒤이어 시도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이다. 행정수도의 이전안(案)이 거센 사회적 반대에 부딪히고 위헌판결로 좌초되자 노무현 정부는 이전할 행정수도의 규모를 줄인 행정중심복합도시라는 변형을 통해 결국 행정수도 기능의 일부를 충청권으로 이전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행정복합도시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충청권 이외 지방 도시들이 볼멘소리를 하자 수도권에 소재한 170여 개 공공기관을 전국적으로 분산 배치하는 조치와 지방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민간기업자본의 지방투자를 촉진시키는 조치를 ‘혁신도시법’ ‘기업도시법’의 이름으로 내놓았다. 혁신도시, 기업도시,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은 접근방식이 각기 다르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모두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에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격차를 줄이는 데 있었다. 다시 말해 수도권에 집중돼온 경제적 부와 자원을 분산시켜 전국이 골고루 잘살게 하겠다는 취지로 추진됐다.

    수도권과 지방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윈-윈 전략으로 이러한 공간정책을 추진했다면 균등지상주의나 평균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는 윈-윈 전략 대신 제로섬 전략을 선택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공간정책에 깔린 기본 가정은 수도권의 성장을 억제하지 않는 한 지방은 발전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명백한 제로섬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은 ‘선 지방발전, 후 수도권 규제완화’ 전략으로 나타났으며,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한 결과 수도권 규제를 풀어 이천공장 증설을 허용해달라는 하이닉스반도체의 요청이 정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지자체, 가난해야 세금 더 받는다?

    ‘묻지마 분권’에 국가경쟁력 흔들, 강박적 균등주의로 제로섬 자초

    2004년 12월 정부혁신 지방분권위원회 사무실에 걸린 지방분권 로드맵 추진상황 게시판.

    균등주의에 대한 열정은 지방재정 분야에서도 드러난다. 우선 지방교부세를 대폭 확대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내국세 대비 지방교부세 비율이 15%에서 19.25%로 수직상승했다. 지방교부세는 자치단체가 공공 서비스에 소요되는 재원을 지방세와 세외수입 등 자체 재원을 통해 스스로 조달하지 못할 경우 그 부족분을 중앙정부가 메워주는 제도다. 통상 가난한 자치단체는 재정 부족액이 많아 재정부족액이 적게 발생하는 잘사는 자치단체보다 지방교부세를 더 많이 받는다.

    이렇듯 지방교부세는 가난한 자치단체의 재정부족액을 보전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이면 어느 지역에 거주하든 유사한 수준의 공공서비스를 향유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생겼다. 그래서 자치단체 간의 재정격차를 줄이고 재정력을 균등화하는 효과가 탁월해 일명 재정균등화교부금(fiscal equalization grant)이라고 불린다. 지방교부세가 크게 확대된 것은 노무현 정부가 자치단체와 지역 균등화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균등주의 구현을 향한 노무현 정부의 노력은 재정보전금 제도 개정과 2008년 시행을 앞둔 서울시 공동재산세 제도에서도 엿보인다. 재정보전금은 광역자치단체가 도세(道稅)인 등록세와 취득세 일부를 도내 기초자치단체에 나눠주는 것으로 2007년 1월부터 재정자립도가 낮은 시·군에 최고 60억원까지 더 주는 것으로 바뀌었다. 서울시 공동재산세 제도는 구세(區稅)이던 종전의 재산세를 특별시분 재산세와 구분 재산세로 분할해 특별시분 재산세는 서울시가 징수한 후 관할 구에 재분배하게 한 것이다.

    지방교부세, 재정교부금, 공동재산세는 이처럼 시행주체, 시행대상, 세원에서 성격을 달리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지방재정 조정제도 성격을 띠며 지향하는 목표가 동일하다. 즉 상위정부가 가진 자원의 분배를 통해 자치단체 간의 세원 불균형과 이로 인한 재정력 격차를 줄이는 데 있다. 이러한 노력이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중앙정부, 도, 서울시 등 수준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는 사실은 참여정부가 자치단체를 균등화, 평등화하는 데 열정적으로 올인했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지방정책에 관한 한 노무현 정부의 이념성향은 분배, 균등, 형평을 중요시하는 좌파 지향이었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분권과 균형의 양립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노무현 정부가 양립하기 어려운 분권과 균형발전을 동시에 추구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분권의 핵심적인 영역인 재정분야에서는 그렇다. 분권과 균형발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며 갈등적이다. 중앙집권이 동질성(homogeneity)과 획일성(uniformity)을 의미한다면, 분권은 차이(heterogeneity)와 다양성(diversity)을 의미한다. 따라서 분권을 강화할수록 지방정부 간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양자를 성공적으로 양립시킬 수 있었다. 그 배경은 지방재정 확충 수단으로 지방세 확대 대신 지방교부세 확대를 선택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만약 지방세 확대를 선택했다면 지방세 세원의 지역 간 편재로 인해 자치단체 간의 재정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에는 지방소비세, 지방소득세 신설 등을 통한 지방세 확충을 지방재정 확대의 주요 수단으로 심각하게 고려했으나 지방 간 재정격차를 심화시킨다는 판단에 따라 이런 접근을 포기했다(그 결과 국세:지방세의 8:2 비율이 재임 기간 중 줄곧 유지됐다).

    대신 지방교부세 확대를 통해 지방재정 확충을 꾀했다.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지방교부세는 자치단체 간 재정격차를 줄이는 동시에 지방재정권 확대에도 기여한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자치단체의 재정균등화와 재정분권의 확대라는 두 가치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지방교부세라는 묘수를 통해 양립하기 어려운 균형발전과 분권을 조화시키려 했다. 역대 어느 정부보다 강력한 균등주의에 입각한 지방정책을 전개한 것이다.

    주목할 것은 강력한 균형발전 정책으로 정평이 나 있는 영국, 프랑스, 일본이 우리와는 반대로 이를 완화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는 점이다. 이들 국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도권 집중과 불균형개발 문제로 골머리를 앓아왔다. 그 처방 또한 우리와 유사했다. 입지 규제나 과세 정책(과밀부담금제 등)을 통해 수도권 인구 및 산업 집중을 억제하면서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일본은 수도 기능 이전까지 포함)을 통해 수도권의 과밀을 해소하려 했다.

    세계적 추세와 엇박자

    그런데 1980년대(일본은 2000년대)에 들면서 이들 국가에선 수도권 규제와 과세 정책을 폐지 혹은 완화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일본의 경우 수도 기능 이전 계획 백지화 포함) 오랫동안 유지해온 균형발전 정책을 전면 수정하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인식의 대전환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이 균형개발 정책을 추구할 때만 해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도권의 성장을 억제하면 지방경제가 살아나고, 이로 인해 지역격차가 줄어들 것’이라는 제로섬 시각이 작용했다.

    ‘모두를 건져낼 순 없다’

    하지만 이후 많은 변화로 인해 이러한 시각을 유지할 수 없게 됐다. 수도권의 성장억제가 지방경제를 살리고 낙후지역을 발전시키는 데 예상한 것만큼의 도움을 주지 못하며, 오히려 수도권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 끝에 국가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또한 수도권 입지에 실패한 기업이 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현상도 관찰됐다. 나아가 세계화의 진행으로 시장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더 이상 자국 내 도시 간 경쟁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경쟁의 차원이 옮겨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런 사정 때문에 수도권의 성장을 억제하지 않으면 지방의 발전은 요원하다는, 다시 말해 수도권과 지방을 대립의 각도에서 본 과거의 제로섬 논리는 유지될 수 없었다. 대신 수도권과 지방의 동시발전이 가능하며 그렇게 하는 것이 세계화 시대에 국가번영을 도모하는 길이라는 ‘포지티브섬(Positive-sum)’ 시각으로 전환됐다. 물론 수도권 억제 정책을 포기했다고 해서 이들 국가가 지방개발 정책마저 포기한 것은 아니다. 지방 개발정책은 여전히 중요한 국가 정책으로 남아 있다. 지방 개발정책과 수도권 개발정책을 더 이상 상극의 대립으로 보지 않게 됐다는 의미다.

    노무현 정부의 지방교부세 확대 조치 또한 선진국의 흐름과는 엇박자를 냈다. 선진국의 경우 우리의 지방교부세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재정균등화교부금이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영국은 균등화교부금인 세입지원교부금(RSG·Revenue Support Grant)이 지방세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대처 정부 이후 지속적으로 줄고 있다. 프랑스도 지방세입에서 지방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늘어나는 데 반해 다양한 형태의 균등화교부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다. 일본 또한 지방교부세를 줄이는 동시에 국세의 지방이양을 서두르는 삼위일체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균형개발 정책을 완화하고 균등화교부금을 축소하게 된 원인은 재정위기와 세계화의 압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국가는 높은 경제성장 덕분에 사회문제 해결에 필요한 세수를 쉽게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정부가 나서면 불가능이 없으며 어떤 정책이든 성공할 수 있다는 정부불패(不敗)의 믿음이 강하게 작용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정부는 사회적 반대를 무마해 균형개발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일 수 있었고, 늘어나는 세수는 균형개발정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해줄 균등화교부금의 확대를 가능케 했다.

    그러나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경제 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는 급기야 정부의 재정위기로 이어졌다. 또한 일련의 실패 사례가 발생하면서 정부불패의 신화도 깨졌다. 나아가 경제적 세계화와 함께 경쟁의 범위가 확대되면서 도시 간의 국제적 경쟁이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다. 이처럼 변화하는 환경 앞에서 모두가 다 잘살아보자는 종래의 균형개발전략은 ‘침몰하는 수많은 보트를 동시에 건져내려는 것’과 같은 무모한 전략으로 이해됐다. 대신 이들 국가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제한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으로 선회했고, 균형개발 정책과 균등화교부금의 기능 축소는 이런 상황에서 배태됐다.

    새 세원(稅源) 만드는 데 무관심

    우리와는 달리 서구 선진국에서는 1980년대 이후 국가 재구조화를 통해 달성하려는 지방정부의 확고한 미래상이 있었다. 지방정부를 ‘정부 주도의 소비 시스템’에서 ‘민간 주도의 성장 시스템’으로 변모시키려는 것이 국가 재구조화 전략의 최종 목표였다. 즉, 주어진 예산을 소비하는 데에만 익숙한 지방정부를 지방경제를 활성화하고 지방재정을 확대하는 데 매진하는 생산적 지방정부로 탈바꿈시키는 데 국가 재구조화 전략의 핵심목표를 뒀다.

    하지만 우리의 지방개혁은 지방정부의 소비지향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지방정책은 세계적 추세와 분명히 다른 궤적을 그렸으며, 한국 지방정부 시스템의 최대 병폐인 도덕적 해이는 더욱 심화됐다. 우리 지방정부의 도덕적 해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데, 무엇보다 주어진 예산을 쓰는 데만 익숙하지 새로운 세원을 창출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지방정부의 이러한 도덕적 해이는 지방재정의 대부분을 지방교부세로 조달하는 현실에서 연유한다.

    지방교부세 제도는 경기활성화와 세원확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해 지방세를 확대한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지원을 줄이고, 주어진 예산을 비생산적으로 소비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생산적 자본의 역외탈출로 지방세 감소를 초래한 지방정부에 대해서는 지원을 늘리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생산적인 지방정부에는 벌을 주고, 소비적이고 심지어 낭비적인 지방정부에는 상을 주는 셈이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경기활성화와 세원확대에 도움을 주는 생산적 자본을 유치하기보다는 세금과 자원의 비생산적 소비를 통해 정치적 인기몰이에 나서는 것이 지방정치인에게더 나은 전략임은 말할 나위 없다.

    분권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지방정부가 지방세 세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권한을 지방세 감면을 위해 활용하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지방세 인상을 위해 활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방세 감면이라는 자원소비를 통해 정치적 인기를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을 엿보게 한다.

    지방교부세 제도는 세입활동뿐 아니라 세출활동에서도 지방정부의 도덕적 해이를 유발한다. 지방정부가 납세자 주머니에서 나온 혈세가 아니라 중앙정부로부터 ‘공돈’ 형태로 내려온 지방교부세 등으로 재원을 주로 조달하는 체제에서는 주어진 예산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는 동기를 잃게 되며, 행정과 재정의 방만한 운영이라는 지방정부의 고질병을 유발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방정부가 재원을 낭비적으로 사용해도 주민이 자치단체의 재정지출을 통제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 아니라 중앙정부에서 가져온 ‘남의 돈’을 쓰는 데 구태여 간섭할 필요가 있겠는가. 공공 서비스가 남의 돈으로 제공되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공공 서비스를 요구할 때 분별력과 신중성을 잃는다. 공공 서비스는 공짜라는 인식을 심어줘 ‘더 많이 얻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세를 부추긴다. 자신이 낸 세금으로 공공 서비스가 제공되는 체제에서는 무분별하거나 과도하게 공공 서비스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세금인상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지방정책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첫째, 구체적인 분권 프로그램을 입안하기에 앞서 우리가 지향할 분권의 미래상을 명확하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미래의 분권 모델을 설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분권을 추구하면 ‘묻지마 분권’ 혹은 ‘분권을 위한 분권’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아직 차기 정부의 공식적인 지방정책 로드맵이 나오진 않았다. 그러나 지난해 9월 지방신문협의회와 지방분권국민운동이 실시한 설문조사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진영의 답변과 대선공약집에 나타난 지방자치 관련 공약에 비춰볼 때, 차기 정부 역시 우리 사회를 이제껏 지배해온 분권지상주의와 분권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경제 살리려면 지방 개혁해야

    ‘묻지마 분권’에 국가경쟁력 흔들, 강박적 균등주의로 제로섬 자초
    유재원

    1960년 대구 출생

    고려대 행정학과 졸업, 미국 텍사스대 석사(행정학)·노스캐롤라이나대 박사(정치학)

    한국행정학회 편집이사, 세계화추진위원회 전문위원

    現 한양대 사회과학대학 행정학 전공 교수

    저서 : ‘새천년의 한국정치와 행정’ ‘한국지방민주주의의 위기’ ‘한국지방정치론:이론과 실제’ 등


    둘째, 지방정부의 미래상을 설정할 때 세계적 추세나 대세에 순응하는 것이 역행하는 것에 비해 기회주의적이라는 느낌을 주나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더 나은 전략이다.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는 것이 불가능하진 않지만 너무나 많은 힘을 요구하며, 저항에 부딪혀 오래 지속하지도 못한다. 시대정신에 부응하지 못하는 정부개혁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서구에서 지방정부를 생산지향적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을 국가 재구조화 전략 목표로 채택하기까지 국가의 재정위기와 세계화 흐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재정위기와 세계화 압력은 서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우리에게 재정위기는 먼 나라 얘기가 아니며 세계화의 압력 또한 마찬가지다.

    셋째, 그렇다면 우리도 과감하게 지방정부 시스템의 소비지향적 특성을 벗어 던지고 생산지향적인 시스템으로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방교부세에 의존하는 지방재정 시스템에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특히 차기 정부의 경제 살리기 전략이 성공을 거두려면 중앙 차원의 개혁을 넘어서 지방정부를 개혁해 생산지향적인 시스템으로 바꾸는 쪽으로 관심을 확장시켜야 한다. 지방정부가 소비의 센터로 남아 있는 이상 중앙 차원의 경제 살리기 전략은 큰 동력을 얻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지출의 약 60%를 지방정부가 담당하고 있는 것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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