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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교수의 新열하일기 마지막회

천재 연암, 홀로 맹렬히 달렸노라 사랑했노라

  • 허세욱 전 고려대 교수·중문학

천재 연암, 홀로 맹렬히 달렸노라 사랑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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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연암, 홀로 맹렬히 달렸노라 사랑했노라
열하의 태학에서 만난 지 겨우 엿새밖에 안 됐는데도 열렬히 담소했던 중국 친구들과 헤어질 때 울고불고 재회를 약속하리만큼 우정이 깊었다. 그런가 하면 북경으로 돌아가는 도중, 왕족과 기병 수백명이 토끼 한 마리를 쫓기 위해 뽀얀 먼지를 일으키는 장면, 더구나 사흘 동안 사냥 끝에 겨우 독수리 한 마리를 잡고 환호하는 것을 보곤 비인도성을 꼬집기도 했다.

‘열하일기’에는 비록 육친의 정이 보이지 않지만 연암의 둘째아들 박종채(朴宗采)의 ‘과정록((過庭錄·번역서 제목 ‘나의 아버지 박지원’)’에는 핍진한 기록이 많다. 호호탕탕하고 종횡무진한 문학세계와는 달리 연암은 효제충신(孝悌忠信), 곧 유가의 사덕(四德)에 돈독한 꼬장배기 선비였다. 특히 친정(親情)이 두둑했다.

연암은 그가 가장 애중했던 처남 이재성(李在誠)의 집에 갔을 때, 처남이 그 어린 자식과 겸상한 것을 보곤 “군자는 손자를 안아주지만 자식은 안아주지 않는 법”이라고 호통칠 만큼 유가의 계율에 고집불통이었지만 부모형제에겐 끔찍했다. 아버지가 위중하자 중지를 베어 그 선혈을 약에 타서 시탕하거나 아버지의 변을 맛본 일, 그리고 먼저 간 형과 형수의 초상을 극진하게 치러준 일들이 그렇다.

그의 사랑은 집안의 노복들은 물론 가축에게도 절절했다. 노복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노복에게 곤장을 치되 행벌한 뒤 노복을 주물러 멍을 풀어준 일이나, 안의 (安義) 현감을 그만둘 때 자신이 짓던 농토를 노복에게 증여한 것 등이 그렇다. 오죽해야 연암의 어떤 청지기는 연암이 죽은 이튿날 따라 죽기까지 했으랴!

그는 개를 기르지 않았다. 기르면 잡아먹지 아니할 수 없어서였다. 어느 날 애마가 죽자 연암은 죽은 말을 묻어주라 지시했고, 하인들이 말고기를 먹자 그 뼈라도 묻어주라고 유시하기도 했다.



시대를 앞선 자유주의자

그러나 무엇보다 연암의 인간적인 품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교우의 폭이다. 신분제도가 엄연한 조선조임에도 그는 서얼 출신을 마다하지 않았고 손아래 문사들과도 흉금을 털어놓았다.

연암의 고독한 성격과 따뜻한 인품은 ‘열하일기’에 그대로 전승되었다. 바로 본말(本末), 혹은 전후관계로 보였다.

필자는 ‘열하일기’를 통틀어 가장 강렬한 주제를 두 가지로 보았다. 하나는 탈명분(脫名分)·탈성리(脫性理)·탈북벌(脫北伐)·탈고문(脫古文)·탈조선(脫朝鮮)·탈빈곤(脫貧困)·탈봉건(脫封建)·탈과거(脫科擧) 등 정치·사상·문학·제도 등 제반에 걸친 자유의 추구요, 다른 하나는 압록강을 건너서 처음으로 만나기 시작한 벽돌 굽기, 우물 파기, 도르래 달기, 멜대 쓰기, 구들 놓기, 굴뚝 세우기, 말치기, 말 몰기, 새끼치기, 도로 내기, 장성 쌓기 등의 구체적인 이용후생의 잘살기, 그 염원이었다. 마침내 고독의 정서는 자유의 추구로, 인간애는 풍요의 추구로 각각 발전했다.

그중에도 자유의 추구는 매우 다원적이었다. 우선 젊어서의 우울증은 연암으로 하여금 조선 남북의 산수 유람을 하게 했다. 말하자면 탈출과 해방, 곧 자유로 심화를 치료한 셈이다. 그러한 일탈의 욕구를 마침내 그의 삼종형 박명원이 충족시킨 것이다. 탈출의 기쁨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당시 조선은 명(明)나라의 망령에 짓눌려 있었다. 사색당쟁이 그치지 않은데다 주자의 성리학은 정책 이상의 그것이었다. 명나라를 섬겨서 존왕양이(尊王攘夷)론이 판을 치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겠노라는 북벌론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청나라의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우고 그 아들이 청나라를 건국한 지 150년이 지났다. 그뿐이랴! 강희라는 실세의 황제가 문치의 깃발을 들고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데, 이때 다행히 연암과 뜻이 맞아 북학의 기치를 들었던 연암 집단이 연행의 횟수를 올리던 판이었다. 말하자면 가위에 눌리다가 꿈을 깬 것이다.

연암은 3700리 그 행장부터 자유로웠다. 붓 2자루에 먹 하나, 공책 4권에 이정표 하나가 전부였다. 반년의 연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봇짐에는 기껏 중국 선비들과 필담하던 쪽지만 늘었을 뿐, 그 창망한 세월이 자유였다. 그래선지 노상에서 만난 중국 여인들의 전족을 차마 볼 수 없노라 혹평하면서 그 속박을 매도했다. 열하에서 중국 벼슬아치와 좌담할 때는 중국에서 아직도 뿌리 뽑지 못한 ‘지복(指腹)’의 혼사, 곧 ‘절음(節淫)’이라는 비인도성·부자유성을 통박하기도 했다. 지복지혼이란 반명 있는 집안끼리 뱃속에 든 아이들을 약혼시키고 약혼한 뒤 사내아이에게 불행이 있을 때 색시 순장을 강행하는 습속을 말하는데 이를 절음이라 했다. 곧 남의 집 총각 주검을 좇아 바람을 피웠다는 독설이다.

정조로부터 ‘문체를 바로잡아라’라는 경고를 받았던 소위 ‘문체반정’ 또한 실상 연암의 문체 자유화를 방증한다. 연암은 정조나 당시 성리학파가 교과서로 믿고 있는 한(漢)대의 문체와 당(唐)대의 시율만을 법도로 여기지 않고 패사(稗史)·소품은 물론 우언이나 우스갯소리 심지어 중국의 구어(口語)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수용하는 자유 문체, 자유 구성을 구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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