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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 속 위기의 사랑’ 3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결국 몸은 마음이기에…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수치스럽지만 사랑스러운 몸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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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서 내가 가장 에로틱하게 느낀 장면은 이것이다. 소녀의 기숙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자(양가휘)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는다. 남자는 1㎝ 정도씩 손가락을 움직여 마침내 소녀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워 넣는다.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차 안의 공기는 1도씩 달아오르는 듯하다. 검지와 검지를 마주 잡을 때 숨결이 빨라지고 중지와 중지를 엮었을 때 뜨거운 숨이 토해져 나온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창밖을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감각은 온통 손가락에 집중돼 있다. 그들의 정염은 손가락을 매개로 증폭되어간다. 옷 하나 벗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깊숙한 곳까지 탐하고 있음을 교감한다. 두 사람은 서로를 원하고 있다, 라는 감정 자체로 차 안을 뜨겁게 달군다. 그들이 마주 잡은 손은 그 어떤 남녀의 얽힘보다 강렬한 열망으로 충만해 있다. 이 사소한 움직임은 영화 ‘연인’이 지닌 품격 있는 에로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1㎝씩 다가가는 손가락

남자와 소녀의 마주 잡은 손에는 간단히 발화하고 소진되는 욕망이 아닌, 쉽게 폭발할 수 없는 감정의 잉여물이 남아 있다. 섹스가 욕망의 발산이라면 그들의 행위는 체온을 통해 욕망을 가열하는 애태움으로 긴장되어 있다. 두 사람이 온몸을 드러내고 섹스를 하는 장면들이 오히려 노골적인 야유로 받아들여진 이유도 여기서 비롯됐을 터다.

그들은 자신을 충만하게 한 에로스를 섹스라는 행위로 탕진하고자 한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서로에게 원하는 것은 그저 몸과 돈뿐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소녀는 남자를 모욕하고, 남자는 소녀를 훼손한다. 그들은 그들이 나누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의 슬픔은 이 무지 때문에 깊어진다. 소녀는 냄새 나는 중국인 부호에게 자신이 유린당했다고 여기고 매몰차게 그를 떠난다. 프랑스로 떠나는 그녀를 남자는 멀리서 바라본다. 카메라는 고급 승용차 안에 모습을 감춘 남자를 원거리에서 비춘다. 남자는 울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카메라의 시선은 멀리서 그들의 에로스가 시작됐던 차를 묵묵히 바라볼 뿐이다. 관객도 모르지만 소녀도 마찬가지다. 소녀는 그가 타고 있을 것이 분명한 자동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어설펐던 젊음의 한때, 가난한 소녀의 수치스러운 반항과 결별하듯 자동차의 잔영을 지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프랑스로 돌아가던 배 안에서 소녀는 드뷔시의 ‘달빛’ 연주를 듣게 된다. 그리고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 소녀는 그때서야 깨닫는다. 정염이고 욕심이고 호기심이자 욕망이라고 생각하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사랑이었음을. 그 사람과의 섹스를 혐오하는 만큼 그 사람의 몸을 사랑했음을. 소녀는 그때서야 그 모든 것이 사랑임을 깨닫고 흐느껴 운다.

사랑은 그렇게 욕망보다 늦게 온다. 뜨거운 감정의 부유물이 가라앉고 나서야 사랑은 말갛게 떠오른다. 조용하면서도 격정적인 드뷔시의 선율은 그녀의 울음과 함께 감정의 진폭을 넓힌다. 욕망보다 늦게 도착한 사랑은 곧잘 후회와 겹쳐지곤 한다. ‘연인’은 그래서 사랑에 관한 아프고도 성숙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위험하고 지독한 도발의 끝 ‘나인 하프 위크’

남자는 여자가 생애 경험하지 못한 일탈을 선물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말하고, 남장(男裝)을 하라고 요구한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섹스를 하자고 유혹하며 자신을 생각하며 마스터베이션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게다가 남자는 부유하고 섹시하다. 부드럽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게 남자는 요구한다. 남자는 여자가 한번쯤 저질러보고 싶었던 나쁜 짓의 목록을 전부 외우고 있었다는 듯 나타나 여자를 자극한다. ‘나인 하프 위크’의 미키 루크가 바로 그 남자다.

‘나인 하프 위크’에 등장하는 남자는 모든 여자가 꿈꾸는 나쁜 남자다. 나쁜 남자는 일상적이지도 평범하지도 않다. 그는 밥 먹고 자고 일어나 일하고 다시 잠드는 일상적 삶의 궤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문제는 이 남자에게는 일상적인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여자에게 남자는 짜릿한 일탈이지만 한편으로는 일상의 박탈이기도 하다. 너무도 강렬한 매혹이지만 결국 떠날 수밖에 없는 남자. ‘나인 하프 위크’가 가르쳐준 욕망은 그렇게 끝난다.

‘나인 하프 위크’는 미키 루크와 킴 베이싱어라는 1980년대의 대표적 섹스 심벌을 탄생시킨 작품이다. 여러 광고에 패러디되고 막 성에 눈뜨기 시작할 무렵 판타지의 근원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냉장고 앞에서 연인의 눈을 가리고 음식을 먹여준다거나 연인 앞에서 둘만의 스트립쇼를 연출하는 것, ‘나인 하프 위크’는 연인들이 둘만이 가지고 싶은 섹시한 비밀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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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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