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3월호

9년 불임 이겨낸 전문직 남성의 감동 수기

“개 아범이 되고 싶진 않았다, 그러나 아내의 눈물은 원치 않았다”

  • 일러스트·박진영

    입력2008-03-07 18: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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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신들의 삶을 즐기고자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가 늘고 있다. 그러나 간절히 원하지만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고통을 겪는 부부도 많다. 약을 먹어도, 전문 시술을 받아도, 기도를 해도 성과 없이 시간만 흐른다. 조급한 마음에 부부관계까지 위태위태하기 십상.
    • 결혼 9년 만에 여성 불임을 아내와 함께 극복해낸 한 남성이 이런 부부들을 위해펜을 들었다. 그는 “불임은 감기나 맹장염처럼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해서 당장 낫는 병이 아니다. 아이 없이 살 수 있다는 남편과 시부모의 자신감, 인간애가 가장 강력한 약이다”라고 조언한다.
    9년 불임 이겨낸 전문직 남성의 감동 수기
    내나이 서른 하고도 여덟. 동갑내기 아내는 요즘 이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2005년 가을에 태어난 딸이 더 넓은 집에서 뛰놀게 하자며 지난해 여름부터 이사 타령을 하더니 결국 까다로운 조건에 맞는 전셋집을 찾아냈다. 다음달이면 떠난다고 생각하니 지난 8년간 이 집에서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친다. 4년 남짓한 남의집살이를 끝내고 2000년 12월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우리 부부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다. 좋은 일이 많았다. 그 가운데 으뜸은 결혼 9년 만에 딸을 얻은 것이다.

    우리 부부는 회사와 친지들 사이에 이름난 불임부부였다. 1996년 가을에 결혼해 2005년 가을 세상에 나온 딸과 대면했으니 딱 9년 만이다. 9년 만에 첫 아이를 가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 영화나 소설 속 이야기처럼 하룻밤 불장난에 아빠 되고 엄마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많은 이는 이 글에서 내가 어떤 사연을 소개할지 짐작하리라 생각된다. 결혼하는 것과 아이를 낳는 것은 전혀 다른 과업이라는 사실을 많은 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불임이 자랑은 아니다. 그리고 9년 만에 아이를 낳은 부부도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글을 쓰기로 작정했는가. 최근 ‘신동아’의 한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 잠재의식 속에 간직해온 일종의 사명감이 뚜껑을 열고 나왔다. 아버지가 되겠다며 갖은 고생을 한 지난 9년 동안, 나는 많은 불임부부의 고달프고 애달픈 삶의 스토리를 목도했다. 불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을 목격했다. 불임의 책임자라는 누명을 쓴 아내에게 남편과 우리 사회가 어떤 구조적 형벌을 가하는지 체험했다. 나는 이와 다르게 불임 문제를 풀어가겠다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실천했다. 그래서 아빠가 되면 그 깨달음과 교훈을 세상에 알려주고 싶었다. 아빠가 된 기쁨 속에 3년이 흘렀다. 이제는 말해야 할 때가 왔다.

    한 가련한 불임 여성을 엄마로 만들기 위해, 그래서 귀한 생명을 세상에 모시기 위해 남편과 시부모, 그리고 남편의 직장 동료와 친구들은 과연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과학기술 만능주의에 편승해 불임이라는 세기말적 현상을 이용, 명예와 돈을 얻는 언필칭 전문가들이 반성할 점은 없는지…. 내가 이 글을 통해 지적하고 싶은 것들이다.

    나는 전문직 종사자다. 처음에 나는 얼굴을 드러내고 실명으로 글을 쓸 작정이었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회사 상사도 “널리 희망을 주는 글이니 마음껏 쓰라”고 격려했고 아내도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문득, 이야기의 주인공인 딸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딸은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공론화하는 문제에 동의할 핵심 이해관계자다. 그러나 이제 네 살인 그 아이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나는 아이가 성인이 돼 동의할 때까지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고 싶다. 비록 익명 뒤에 숨게 됐지만 다음의 사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사실이다.



    불임클리닉을 찾다

    9년 불임 이겨낸 전문직 남성의 감동 수기

    최근 불임클리닉을 찾는 부부가 늘고 있지만 필자는 “불임은 다른 질병처럼 치료로 당장 낫는 병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교 2학년 때 동아리에서였다. 언뜻 남자처럼 언행이 당당한 그녀에게서 여성스러움을 느낀 것은 4학년이 되면서였다. 이후 둘은 수줍지만 격렬한 사랑을 했다. 그 과정에 아내가 1년에 두세 번 생리를 하는 중증 생리불순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랑에 푹 빠진 내게는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5년의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할 때 나는 집사람이 생리불순임을 부모님께 말씀드릴 기회를 갖지 못했다. 결혼해서 부부관계를 가지면 증상이 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결혼 후 한동안 우리는 맞벌이를 했다. 남보다 바쁘게 뛰어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직종에 종사하는 나는 신혼 초 한동안 자정 이후까지 야근을 하거나 직업상 만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만취해 귀가하기 일쑤였다. 아내도 나름대로 회사 일에 바빠 평일에는 부부관계를 제대로 할 경황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남다른 노력은 했다. 둘은 휴일 전날에는 되도록 약속을 잡지 않고 퇴근하자마자 귀가했다. 그러고는 자동차 트렁크에 텐트를 싣고 무작정 서울 근교의 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텐트를 치고 하루를 자고 아침에 일어나 등산을 하며 몸과 마음의 생기를 되찾은 뒤 집에 돌아와 관계를 했다. 결혼 후에도 집사람의 생리불순은 계속됐지만 그러다 보면 아이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생각 같지 않았다. 결혼한 지 2년이 흐르면서 모두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내가 흔들렸다. 나이가 서른을 넘어서자 불안한 기색이 더욱 짙어졌다. 생리불순이 계속되자 ‘어쩌다 되겠지!’ 하는 마음은 ‘이러다 안 되면?’으로 바뀌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위 아래로 누이를 두고 있다. 어머니는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공부시켜 좋은 직장에 취직시켰다는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 아들을 결혼시켰으니 이제 손자손녀 볼 일만 남은 터였다. 마지막 생의 과업인 득손, 그게 안 되자 어머니의 한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더불어 장인 장모의 주름살도 늘어갔다. 장모는 슬하에 딸만 셋을 뒀다. 아내는 둘째딸이다. 다행히 첫째딸인 처형이 건강한 아들과 딸을 낳았지만 둘째딸의 불임은 사돈과 사위에 대한 미안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 부부는 결혼 2년 만에 A불임클리닉을 찾았다. 병원에 들어설 때 복도를 가득 메운 비슷한 처지의 신랑 신부들과 맞닥뜨리자 불임의 실태를 실감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설 속 해리 포터의 주인공인 마법사들이 현실 세계에서 벽 하나를 넘어 순식간에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불임클리닉 밖의 세상과 불임클리닉 안의 세상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음란 비디오방?

    그날 나는 난생 처음으로 불임 치료를 위한 정액채취를 했다. 이 글을 보는 남성 여러분은 이곳에 들어가본 경험이 있는가? 없다면, 남자라면 누구나 대학시절 한번쯤 가보았을 음란 비디오방을 생각하면 된다. 2, 3평 남짓한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퀴퀴한 정액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간호사에게서 채취용 시험관을 받아들고 그곳에 들어가서 손을 깨끗하게 씻은 뒤 뒤로 젖힐 수 있는 의자에 앉는다. 리모컨으로 비디오를 켜면 서양에서 공식적으로 수입된 의료용 음란 비디오가 상영된다. 적당히 흥분되면 수음을 통해 사정을 한다. 정액을 받아 간호사에게 건네는 것으로 작업이 끝난다.

    9년 불임 이겨낸 전문직 남성의 감동 수기

    난자 채취는 전신마취가 필요한, ‘수술’에 가까운 작업이다.

    사실 불임의 원인이 아내에게 있는 경우, 남편이 불임 시술에 기여하는 부분은 정액채취뿐이다. 그러나 점잖은 한국 남자들이 이 분위기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우선 간호사 얼굴을 보기가 민망하다. 뒤에 다른 아빠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을 때도 있다. 이런저런 민망함에 첫 채취는 작업 시작 10초 만에 끝이 났다. 이것저것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심인성 조루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몹시 불쾌한 경험이었다.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정액이 든 시험관을 건네자 간호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받아들고는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30분쯤 뒤 만난 여 의사는 “결혼 2년 동안 아이가 없는 것은 다반사”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아내는 아내대로 어떤 경험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만 할 뿐이다. 병원을 나오는 길에 아내에게 “이거 계속 해야 하냐?”라고 하자 “나는 좋아서 하는 줄 아냐?”는 까칠한 답이 돌아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건 갈등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후 아내는 본격적으로 불임 시술에 매달렸다. 아내가 배란을 일정하게 하는 처치를 받은 뒤 배란기가 되면 부부관계를 하는 초기적인 방법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성과가 없자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아내에게 같은 처치를 한 뒤 내 정액을 받아 배란기에 맞춰 인공적으로 난자 주변에 주입하는 시술을 받은 것이다. 그래도 성과는 없었다. 다음에는 아내에게서 채취한 어린 난자 세포를 육성해 내게서 채취한 정액과 섞어 수정한 뒤 아내의 몸속에 이식하는 고도의 시험관 시술로 이어졌다. 아내가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은 단계가 높아질수록 심해졌다.

    특히 난자를 채취할 때마다 아내는 위험한 전신마취를 해야 했다. 전신마취를 하고 나온 뒤 “마취약이 몸을 돌며 의식을 잃을 때마다 ‘아, 내가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수정란을 이식한 뒤에는 보름 이상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서 보내야 했다. 하루는 아내가 출근하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여보, 나 이러고 침대 위에 있으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를 포함해 직접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여성에게 불임 시술은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몸에 약물을 다량으로 주입해야 하고 때로는 전신마취를 한다. 한 번 전신마취를 하면 뇌세포가 상당수 죽는다고 한다. 난자를 채취하는 작업은 제 발로 기어 나오는 정자 채취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수술에 가깝다. 수정란을 넣고 착상을 기다리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라고 한다. 수정란을 삽입하고 매일 근육주사를 맞아야 한다. 보름씩 침대 생활을 하다 보면 근육이 늘어지고 체력이 저하되면서 심리상태도 처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아내는 한 번 시술 후 몇 개월은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언제 결과가 나올지 모른다는 절망감은 아내를 점점 나약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결혼 5년차를 넘어섰다.

    “아이를 왜 못 낳아?”

    이 과정에 나도 아내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다. 초기 단계의 시술을 할 즈음에 나는 회사에서 가장 바쁜 부서 소속으로 그중에서도 막내였다. 위로 나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선배 5, 6명이 층층이 버티고 있어 개인적인 시간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병원에서 집사람에게 잡아준 날은 왜 하필이면 가장 중요한 비즈니스 약속이 있거나 일이 많아 야근이 불가피한 날인지…. 나는 초기에 불임 시술에 대한 얘기를 선배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이를 갖기 위해 먼저 집에 가는 것은 직장에서 성공하는 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해 당시 나는 아내와 아이보다 직장이 더 중요했다.

    아내는 일주일 동안 주사를 맞고 날을 받아 남편을 기다렸지만, 나는 종종 술에 만취해 집에 들어왔다. 집에 빨리 들어오기를 채근하는 전화에 나는 “그럼, 나 직장 그만둘까?”라며 역정을 냈다. 아내는 그 때마다 “나 아이 못 낳아, 당신이 이러면 안 낳아”라며 울부짖곤 했다. 아내는 화가 많이 날 때면 종종 이혼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다행히 내 어머니는 며느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며느리를 동정한,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인자한 시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한 번도 며느리를 책망하지 않았다. 다만 같은 여자로서 동정과 격려의 말을 전했을 뿐이다. 그러나 어머니도 ‘며느리가 인내심을 갖고 계속 불임시술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되겠지? 그래서 빨리 끝내는 게 며느리에게도 좋다’는 막연한 기대감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은 주변인들의 반응이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했고 아이를 낳는 문제도 기본적으로 부부의 문제다. 그런데 그리 가깝지 않은 친척과 주변의 아는 사람들은 왜 그리 우리 부부의 아이 문제에 관심이 많은지…. 많은 이가 결혼을 하고도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인 듯 말할 때, 나는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동물로서의 인간을 실감했다. 개별적인 인간인 양 살아가지만, 태어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죽는 동물적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이가 “이렇게 하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며 조언하듯 방법을 일렀지만, 9년 동안 문제아 취급을 당하는 괴로움이 무겁게 다가왔다. 여기서 하나의 제안. 요즘은 상대방의 나이는 물론 결혼을 했는지, 어디 사는지를 묻는 것은 에티켓이 아니다. 여기 하나 더 붙여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는 이제 묻지 말자.

    ‘그날’을 위한 ‘올인’

    2000년 12월, 아내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면서 결혼 전부터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아이 갖기에 ‘올인’ 하기 위해서였다. 나 역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빠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동적으로 아내의 말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마음까지 다잡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가지게 됐다.

    이즈음 나와 동종업계에서 일하는 한 친구가 “집에 강아지를 키우면 제수씨가 덜 외롭고 심리적으로 안정이 돼 아이 갖기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내가 강아지 키우기를 제안했고 다음해 봄 아내는 수의사인 지금의 제부와 함께 성남 시장에서 생후 한 달도 안 된 흰색 말티즈 한 마리를 사 왔다. 우리는 그에게 ‘초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내가 결혼하기 전 처가에서 키우던 개 이름이었다. 초롱이는 변을 가리기 시작한 뒤에는 밤마다 부부의 침대에서 잠을 잤다. 하루는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새벽에 목이 말라 깼다. 초롱이가 부부 사이에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순간 울컥 했다. ‘나도 이 자리까지 오려고 열심히 착하게 살았다. 나도 아빠가 되고 싶다. 그런데 이게 뭔가. 이러다 개 아빠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초롱이가 미웠다.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녘에 간신히 잠을 이루면서 내심 이렇게 다짐했다. ‘아내는 나보다 더 엄마가 되고 싶겠지. 개 아빠로 늙어도 좋다. 아이가 없다고 아내를 섭섭하게 하지 말자. 어차피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결혼한 것 아닌가.’

    그 뒤부터 나는 아이가 없어도 된다는 내 생각을 합리화할 이론을 만들어내 유포하고 다녔다. 이른바 ‘원숭이론’이다. 인간은 원숭이를 그냥 집단적인 종(種)으로서의 원숭이라고 보지, 이 원숭이는 어떤 원숭이의 아들이고 저 원숭이는 어떤 원숭이의 딸이라고 하지 않는다. 인간은 그저 어떤 종이 갑자기 수가 줄거나 사라질 때에만 관심을 가진다. 인간도 동물이고 따지고 보면 원숭이처럼 하나의 종인 유적 존재다. 굳이 내 아이가 없어도 개똥이의 아들과 소똥이의 딸들이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유지한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실제로 나는 한 번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아내를 구박한 적이 없다. 그 덕에 지금까지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출근한다.

    2001년 봄,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3년 동안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아이를 갖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변의 조언도 한몫을 했다. 이즈음부터 나는 아내가 불임이며, 불임시술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장 선후배들과 주변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액채취 등이 예정된 날 이전 1, 2주일 동안은 업무상 술자리에 참석은 하되 사정을 설명하고 술을 적게 마시거나 마시지 않았다. ‘그날’은 집에 일찍 들어갔다. 대신 더 열심히 일했다.

    부모님을 위해서도 지혜를 발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머니는 누구보다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마지막에는 약한 신경쇠약 증세도 보였다. 답답한 마음을 며느리에게 토로할 수 없음을 아는 나는 1년에 한두 번씩 친가에 혼자 찾아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머니를 극진하게 위로했다. 그리고 잘될 것이라고, 그래도 안 되면 입양이라도 하겠다고 설득했다. 불임 아내를 둔 남편들에게 제안한다. 때때로 아내 몰래 아들이 부모님의 스트레스를 풀어드려라. 그래야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나니!

    이때부터는 불임클리닉에서 하는 정액채취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닌, 즐겁게 해야 할 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아빠가 짜증스럽고 급하게 배설하는 정액에서 좋은 아이의 씨가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오래 비디오를 보고 정말 흥분했다고 생각될 때까지 참았다가 사정을 했다. 가능하면 정액의 양이 많도록, 즐거운 정자들이 나올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하루는 1시간 동안 ‘작품’을 감상하다가 줄을 서서 기다리던 바쁜 아빠의 노크 소리를 듣기도 했다.

    또한 어렵게 아이를 가진 주변인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했다. 그 결과 불임이 감기나 맹장수술처럼 약을 먹고 물리적 시술을 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대략 결혼한 10쌍 가운데 4쌍이 직접 임신이 어렵고 이중 2쌍은 불임시술로 쉽게 아이를 갖는 반면 나머지 2쌍은 불임시술도 잘 안 먹히는 난치성 불임이라는 나름의 분석을 했고, 내 아내는 마지막 20%에 속한다는 결론도 내렸다. 그럼 어떻게 할까. 나는 난치성 불임의 경우 현대 의학, 특히 양약으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생각을 점점 굳히게 됐다. 한 회사 동기가 “약으로 엄마의 몸을 보하고 운동을 통해 기력을 회복해 엄마가 되기 위한 기본을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한의사 아버님의 말씀을 내게 전해주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그 생각이 분명해졌다.

    매형의 공작과 가족회의

    나는 아내에게 한약 먹을 것을 권했다. 아내는 한의와 양의를 결합한다는 B불임클리닉에도 다녔다. 본래 장이 약해 한약을 싫어했던 아내는 한약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1년 동안의 한약 처방은 무위로 돌아갔다. 나는 아내에게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라고 권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한가로이 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감기약을 먹으면 감기가 떨어지는 것처럼, 로또를 샀다가 우연히 당첨되는 것처럼 그녀는 단 한 방에 지긋지긋한 불임이라는 죄악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내는 다시 양약 시술을 하는 C불임클리닉과 D불임클리닉을 전전했다. 내가 보기에 아내는 갈수록 인내심을 잃었다. 아내는 “이제 내 증상을 또 다른 의사에게 설명하는 것이 치가 떨린다”고 했다.

    2004년 봄 무렵, 불임클리닉에 다닌 지 7년이 되면서 아이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참아낸 우리 가족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랐다. 시험관 시술만 7, 8번, 전전한 병원은 4곳. 그리고 여기 들어간 치료비만 수천만원에 가까웠다. 아내는 더 이상 시술을 받을 정신적, 육체적 힘이 없다고 했다. 가끔 아주 편안하게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각자의 행복을 찾기 위해 차라리 이혼해달라”고 했다. 어머니의 인내심도 점차 만수위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위기를 느꼈다. 그런데 위기를 느낀 다른 남자가 있었다. 바로 매형이었다.

    신중한 성격인 매형은 그동안 이 문제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험관 시술이 아니라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7년 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면서 그는 마침내 이 문제에 개입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나 몰래 자신의 장인, 장모를 설득했다.

    “아버님, 어머님. 이제 마지막 방법이 남았습니다. 처남댁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시면 혹시 자연스럽게 아이가 들어설 지도 모릅니다. 빨리 가족회의를 열어서 손자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하세요. 그리고 병원에 다니지 말라고 하세요. 그리고 운동하고 명상하면서 마음부터 다스리라고 하세요. 어차피 틀린 일인 것 같은데 그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아버지는 사위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해 5월 매형의 주선으로 가족회의가 열렸다.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보니, 며느리가 아이를 갖기 힘든 것 같다. 그동안 수고했다. 이제 됐다. 더 이상 억지로 아이 가지려고 노력하지 마라. 며느리가 아이를 영영 갖지 못해도 나와 아내는 며느리를 탓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일이 과거에도 있었다. 과거 집안 어른들이 후사를 보지 못해 집안끼리 양자를 보내는 일이 많았다. 이제 짐을 훌훌 벗어라. 대신 마음을 편하게 먹고 운동도 하고 보약도 좀 챙겨 먹으면서 즐겁고 건강하게 살아라. 그러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겠니.”

    그날처럼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임신 5주?!

    그날 아내는 눈물을 흘렸다. 기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동안의 고생이 한스러웠을 것이다.

    이후 우리 부부는 전혀 다르게 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불임클리닉에 다시는 가지 않기로 했다. 아내와 나는 그동안 할 수 없었던,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해 7월부터 우리 부부는 신혼 초에 그랬듯이 주말이면 서울 근교의 자연휴양림을 찾아 떠났다. 역시 아이가 없는 대학교 동아리 친구 부부와 함께 전국의 산을 찾아다니며 올랐다. 서울의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 청계산 등을 비롯해 근교의 소요산, 축령-서리산, 삼악산 등을 올랐다. 늘 침대에 누워 울상을 짓던 아내가 산 정상에서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행복했다. 우리와 친구 부부 넷은 그렇게 산을 오르고 내려와서는 막걸리와 맥주를 마시고 옛이야기를 하면서 삶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내는 주중에도 수영을 다니고 반신욕을 하고 어떨 때에는 가까운 산에 홀로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등산을 다시 시작했을 때 조금만 걸어도 숨을 헐떡이던 아내가 2004년 12월에는 우이동 도선사 앞에서 백운대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너끈히 오를 정도로 체력을 회복했다. 덩달아 내 건강도 좋아졌다. 토요일이면 산에 오를 생각에 주중의 업무에도 효율이 올랐다. 등산을 위해 주중에는 과음을 삼갔다. 어떤 때에는 상사들이 술을 먹자고 유혹하면 “오늘은 아이 갖는 날”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집에 일찍 오기도 했다. 아버지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내의 손을 잡고 유명하다는 지방의 한 한약방에 가서 함께 한약을 지어 왔다. 그냥 보약이라고 생각하니 아내도 잘 소화해냈다.

    그러다 해가 바뀐 2005년 1월8일 토요일. 나는 다니던 대학원 은사님 및 문하생들과 함께 청계산에 올랐다. 즐거운 산행에 이어 막걸리로 점심을 함께 한 뒤 집에 온 나는 한 시간 동안 꿀맛 같은 낮잠을 자고 깼다. 갑자기 아내가 예뻐 보였다. 그날 우리 부부는 아주 만족스러운 부부관계를 가졌다. 불임클리닉 의사가 날을 정해준 것도 아니고, 아내의 생리불순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했다.

    9년 동안 갖은 방법을 다 써도 주지 않던 귀한 딸을 그날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 주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5주가 지나서였다. 나흘간의 겨울 휴가를 받아 우리는 동해안과 눈이 쌓여 하얀 태백산을 보고 돌아왔다. 여행 중 부부관계를 한 차례 시도했지만 아내는 왠지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순간 이상한 직감이 왔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임신 진단 시약을 아내에게 사주고 출근했다. 오전에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내가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 나 임신이라고 나왔어. 이럴 리가 없는데…, 흑흑, 나 정말 임신했나봐. 흑흑, 나 지금 산부인과 가고 있어….”

    아내는 산부인과에서 임신 5주 진단을 받았다. 나는 그날 앙증맞은 신생아용 옷과 양말, 그리고 축하 케이크와 샴페인을 사들고 집에 들어갔다.

    아내는 임신 초기 다소 유산기가 있어 긴장했지만 이내 정상을 되찾았다. 임신 후 3개월쯤 지나 나는 태몽을 꿨다. 영화 ‘해리 포터’에 나오는 ‘퀴디치’ 경기에서 연상된 것 같은데, 꿈에서 총천연색의 건장하고 예쁜 앵무새가 내 주위를 돌며 약을 올렸다. 세 번째로 나에게 접근하는 놈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놈의 버둥거림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도대체 어떤 아이일까. 2005년 가을 대면한 딸은 꿈에서 본 대로 4.8kg의 건장한 체구였다.

    이렇게 나는 아빠가 됐다. 아내도 부모님도 장인 장모님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후배가 득녀 소식을 회사 전자 게시판에 올리자 50여 개의 축하 댓글이 달렸다. 회사 역사상 최다 댓글이었다. 그해 12월30일 백일잔치를 대신해 친가와 처가의 모든 직계가족을 초대했다. 9년 전 결혼식 이후 양가의 직계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아이 못 낳는 딸을 둔 죄로 장인과 장모는 그동안 사돈과 마주 볼 자리를 갖지 못했다. 두 사돈은 손녀의 출산으로 비로소 행복한 만남의 시간을 보냈다.

    눈물의 돌잔치

    이듬해 돌잔치에는 이들을 포함해 가장 친한 친구들과 친척들을 초대했다. 그간의 소식을 영상편지로 담아 알리고,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던 아내와 어머니, 장모님에게 한 말씀 할 기회를 드렸다. 세 여자는 기쁘다는 말을 하고선 울음을 참지 못했다. 직접 사회를 본 나는 눈물의 돌잔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빠가 되고 한없이 기뻤지만 한동안 지나간 세월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우선 자책감이 밀려왔다. 불임은 감기처럼, 맹장염처럼 약을 먹고 수술을 받는다고 금방 해결되는 문제가 아닌 것을 왜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집착하면 멀어지고 포기하면 이뤄진다는 진리를 왜 일찍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솔직해지면 직장과 가정생활의 조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일찍 인정하지 못했을까.

    솔직히 불임클리닉 의사들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무엇보다 부모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하니 불임 시술에만 올인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좋은 것 먹고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습관부터 기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더라면 지난 시간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아내가 다니던 병원 한 곳은 2005년 황우석 파동에도 연루됐다. 냉동고에 보관돼 있던 나와 아내의 수정란이 황 박사 팀의 칼장난에 희생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만일 그랬다면 이 자리를 빌려 내 아이나 다름없는 그 영혼들의 명복을 빈다.

    하지만 처음부터 누구를 탓하기 위해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지 않았다. 나는 하늘이 내 딸을 주신 것으로 모든 것을 잊었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다만 지금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난치성 불임 부부들이 나의 사례에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다시 강조하고 싶다. 불임을 극복하는 것은 여성만의 책임이 아니다. 남편도, 시부모도 진정 자손을 보고 싶다면 역설적으로 자손을 보겠다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낫다. 그리고 진정 아내와 며느리를 사랑하고 측은하게 여길 때, 진정 한 여자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할 때 하늘이 그대들에게 행복을 줄지 모른다.

    아내와 나는 딸을 기르는 일에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선현들이 가르친 정도에서 벗어나지 말자고 다짐했다. 새로 들어갈 집은 서울의 큰 산 바로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아이가 자연을 벗 삼아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도심 생활의 편리함을 기꺼이 포기하기로 했다. 불임 9년을 극복하면서 나도 많은 공부와 마음의 수양을 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어렵게 얻은 내 딸을 소중하게 기르며 내가 깨달은 지혜를 가르쳐 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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