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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던지지 않은 도시락 폭탄을 돌려달라”

  • 정현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doppelg@donga.com

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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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윤봉길 상하이 의거의 재구성

윤 의사가 의거 당시 소지했던 ‘도시락 폭탄’.

‘4월27일(시간 미상)에 전기한 조선인 집에서 윤봉길은 양복 차림의 독사진 한 장, 가슴에 선서문을 붙이고 왼손에 폭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를 배후로 한 사진 한 장, 또 김구가 뒤에 서 있는 사진 한 장을 각각 촬영했다. 그때 김구가 이 폭탄은 이봉창이 소지하고 간 것과 동일하다는 말을 했다. 그 후 김구는 윤봉길을 무궤도 전차가 있는 곳까지 배웅했으나 폭탄의 구입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윤봉길은 즉시 공동조계인 오송로(吳淞路)의 일본인 상점에 가서 보자기 한 장을 구입하고 숙소로 돌아왔다가 동방공우로 옮겼다. 오후 7시 반경 김구가 내방하여 시라카와 대장 및 우에다 중장을 어제 제시한 폭탄으로 살해할 것, 투척할 때 끈을 잡아당기면 소리가 난 후 4초 안에 폭발한다는 것, 사용할 폭탄은 29일 아침에 직접 건네줄 뜻을 전하고 다음날인 28일에 중국 YMCA 청년회관에서 재회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신문, 잡지 보며 치욕 깨닫고…’

윤 의사는 27일 오후 1시께 훙커우공원 열병식장을 사전 답사하고 숙소인 동방공우 여관으로 돌아왔다. 이때 김구 선생이 찾아와 “최후를 앞두고 경력과 감상 등을 써달라”고 하자 평소 갖고 다니던 중국제 소형 수첩에다 ‘이력’과 유촉시(遺囑詩) 4편을 써서 김구 선생에게 건넸다. 하나같이 가슴을 아릿하게 할 만큼 진정성이 담긴 글들인데, 특히 ‘훙커우 공원을 답청하며’라는 ‘거사가(擧事歌)’는 윤 의사의 민족애가 절절하게 느껴진다.

‘처처(??)한 방초(芳草)여 / 명년에 춘색(春色)이 이르거든 /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 청청(靑靑)한 방초여 /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高麗) 강산에도 다녀가오 / 다정한 방초여 / 금년 4월29일에 / 放砲一聲으로 명세하세’

여기서 ‘4월29일에 / 放砲一聲으로’ 구절은 이날 폭탄을 투척하겠노라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에는 윤 의사가 상하이에 건너간 동기를 담은 대목도 나온다. 윤 의사의 직접적 망명 동기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범인의 자백에 의하면 고향에서 동포가 일본인에게 박해받는 데 분개하여 해외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사상을 품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17, 18세경부터 신문, 잡지를 읽기 시작하여 조선은 그 고유의 문화를 가지고 자기 힘으로 훌륭히 통치해 나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일본에 복종하여 그 통치를 받아야 하는가, 세계문명이 진보하고 있는 오늘날 타국에 합병되어 있는 것은 치욕이라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러, 신문지상을 통해 상하이에 독립운동의 기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가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활동하기 위해 건너갔다고 한다.’

이 대목은 윤 의사가 상하이로 간 동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만, 사실 윤 의사는 이 시기에 참으로 많은 일을 벌였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했던 윤 의사는 16세 때부터 혼자 일본어를 익히고 부지런히 신학문을 접했으며, 19세 되던 해 야학당을 개설하고 ‘각곡독서회’를 조직해 문맹퇴치와 농민계몽운동을 펴나갔다. 20세 되던 1927년엔 야학교재인 ‘농민독본’을 지어 야학 교재로 사용했고, 농촌부흥·협동조합 운동 모임인 ‘목계후생회’를 조직해 구매조합과 증산운동, 영농기술 개발 및 보급, 양돈 양잠 등 부업 장려, 생활환경 개선 등을 위해 힘썼다.

‘토끼와 여우’ 공연으로 日警 감시

목계후생회 회관인 부흥원(復興院·흔히 부흥원이 단체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님)을 건립해 매년 1회 학예회를 열기도 했다. 부흥원에서 학예회를 열고 촌극 ‘토끼와 여우’를 공연했는데, 문화활동이 흔치 않던 당시 농촌에서 관객이 많이 모여들자 윤 의사는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28년 3월엔 농촌 청년들의 협동심을 기르고 정정당당한 경쟁심과 패기를 북돋우기 위해 ‘수암체육회’도 만들었으며, 집앞에 있는 수암산 기슭 냇가 3300㎡(1000여 평)를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일궜다. 효문화운동을 위해 ‘위친계’도 조직했고, 농촌 부흥과 구국독립운동을 위한 월진회(月進會)도 만들었다. 이처럼 많은 일을 이끌다가 1930년 3월6일 상하이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27일 자신의 신상에 관한 기록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 직접 쓴 유서인 ‘이력’에 보면 망명길에 오르던 때의 각오가 언급돼 있다.

‘23세, 날이 가고 해가 갈수록 우리의 압박과 고통은 증가할 따름이다. 나는 한 가지 각오가 있었다. 뻣뻣이 말라가는 삼천리 강산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수화(水火)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대로 태연히 앉아 볼 수는 없었다. 각오는 별것이 아니다. 나의 철권(鐵拳)으로 적(敵)을 즉각으로 부수려 한 것이다. 이 철권은 널(棺) 속에 들어가면 무소용이다. 늙어지면 무용이다. 내 귀에 쟁쟁한 것은 상해가정부(上海假政府·상하이 임시정부)였다. 다언불요(多言不要·말이 필요 없음), 이 각오로 상하이를 목적하고 사랑스러운 부모 형제와 애처애자와 따뜻한 고향 산천을 버리고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압록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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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상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doppel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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