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호

中 민족문제 화약고, 티베트 사태의 진실

“一國兩制 자치권 달라” vs “주권이 인권보다 우선”

  • 이희옥 성균관대 교수·중국정치 leeok@skku.edu

    입력2008-05-07 20:2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중국에는 55개 소수민족이 모여 산다. 각기 다른 풍습, 언어, 종교를 가졌지만 중국의 유연한 정책으로 건국 이후 이들 대부분이 중화권에 편입됐다. 그러나 일부 소수민족은 중국의 동화정책에 맞서 수십년간 투쟁을 벌여왔다. 최근 국제적 이슈로 떠오른 티베트 사태는 이런 묵은 갈등이 폭발한 것. 올림픽을 통해 국제사회에 우뚝 서고자 한 중국의 꿈은 티베트 복병을 만나 제동이 걸렸다. 일단 현재 상황은 베이징 올림픽을 적절히 활용한 티베트가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는 이 사태가 중국의 미래를 뒤흔들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中 민족문제 화약고, 티베트 사태의 진실
    중국을 소개하는 말에 ‘인구가 많고 땅은 크고 물산이 풍부하다(人口衆多 地大物博)’는 표현이 있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한족(漢族)이 많다는 의미인 데 비해 땅이 넓고 물산이 풍부하다는 것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 방대함을 뜻한다. 13억 인구 중 92%를 차지하는 한족은 연해와 중원에 모여 살지만, 55개의 소수민족은 중국 총면적의 64.3%에 달하는 국경과 사막과 초원지대에 흩어져 산다.

    그러나 소수민족은 수차례 중국 통일의 주역이었고, 그 과정에서 오늘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형성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최근세사로 거슬러 올라가면 1911년 신해혁명 이후의 민국시대(1911~1949)에는 아예 한족, 만주족, 몽골족, 회족, 장족이라는 ‘5족공화(五族共和)’ 슬로건을 걸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한 이후인 1953년에 등록된 민족 명칭은 수백개에 달했고 윈난(雲南)지역에만 206개의 민족이 있었다.

    따라서 건국 이후 국가의 정체성을 통일하기 위한 가장 시급한 임무는 민족의 평등과 단결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의 종류와 명칭을 식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 작업은 한족인지 아닌지를 식별한 뒤 소수민족 내부에서 다시 식별하는 두 단계를 거쳤다. 관련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현지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사람들이 일정한 역사와 그 발전단계에서 형성한 공동의 언어, 공동의 지역, 공동의 경제생활과 공동의 문화라는 특징이 나타나는 공동의 심리적 소양을 지닌 공동체’를 민족으로 정의했다.

    이 과정을 거쳐 소수민족은 종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이라는 근대국가와 중국공민의 범주에 들어가게 됐다. 종족적 식별을 통해 중국민족주의를 강조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 대신 중국은 소수민족과 한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중화민족’을 사용했고, 대외적으로는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이른바 국가주의(statism) 양상이 나타났다.

    ‘민족구역자치제도’



    중국이 비교적 유연한 민족정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현실적으로 한족이 압도적인 주류사회를 형성하고 있어 구소련에 비해 강압적인 정책에 대한 유혹이 적었기 때문이다. 청나라를 지배했던 만주족을 비롯한 많은 소수민족이 이미 한족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고, 중국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는 규모가 작고 고립된 서남지역 일부 소수민족은 무형문화재 수준으로 전락했다. 인구가 200만에 달하는 조선족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옌볜(延邊) 조선족 자치구의 공동화 현상이나 조선족 3세대의 정체성 위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중국의 동화정책에 맞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힘겨운 싸움을 벌인 일부 소수민족의 경우다. 중국 정부엔 이런 곳이 ‘민감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국경을 접한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베트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내몽골과 만주지역은 이미 독자적 공동체가 약화되어 한족이 지배하게 됐다. 이렇게 보면 한족과 종교적, 종족적 정체성에서 뚜렷하게 구별되는 신장-위구르 지역과 티베트 지역이 가장 ‘민감한’ 곳으로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오랜 고립의 역사를 가졌고 문화·언어·종교적 차이가 크며 자주 독립을 요구해온 ‘세계의 지붕’ 티베트에서 마침내 불이 붙은 것이다.

    1952년 이후 중국은 소수민족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는 ‘국가의 통일적 지도하에 소수민족이 스스로 주인이 되고 해당 민족 내부의 지방업무를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자치지역의 자치기관은 동급 국가기관의 책무를 제외하고는 광범한 자치권을 갖는 것으로 규정한다. 가령 티베트 자치구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자치구 수준(즉 省급 업무)을 제외한 광범한 자치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자치권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민족은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자치기구를 구성한다 ▲별도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 ▲자치권을 행사할 경우 해당지역 민족의 특징과 풍습과 습관을 충분히 고려한다 ▲자치기관은 민족의 특징을 고려해 조례와 법률, 규정을 제정한다 ▲자치기구가 자치구의 재정권을 행사할 때에는 동급의 정부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다.

    中 민족문제 화약고, 티베트 사태의 진실

    티베트인들이 중국 쓰촨성 아바에서 시위 도중 피살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고 있다. 이날 최소 8명이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져 티베트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현재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는 곳으로는 내몽골, 신장-위구르, 티베트, 광시 좡족, 닝샤 회족 자치구 등 5개의 성급 자치구가 있고, 그 아래에 조선족 자치주를 비롯한 30여 개의 자치주, 1300여 개의 민족향(鄕)이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제도화하기까지는 많은 변화를 거쳐야 했다. 중국 공산당 창당 초기 소수민족 정책은 민족연방자치제도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1922년 제2차 전당대회에서 채택된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이 혁명의 주도권을 장악하던 시기인 1935~1936년 무렵까지는 대체적으로 소수민족의 분리, 연방의 권리를 줄곧 인정해왔다.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은 관용에서 중국화로 변화했다.

    4인방이 주도한 ‘지방민족주의 청산’

    건국 초기 중국은 민족의 독립은 허용하지 않고 민족자치만을 허용했으며, 대체적으로 ‘하나의 중국(One China, 只有一個中國)’이라는 통일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은 주로 타이완 정책을 염두에 둔 것이었지만, 분열의 요소가 있는 소수민족 전체에 대한 지침이 됐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민족정책은 통일전선의 지도 아래 소수민족의 정치 엘리트를 해당 자치지역의 지도자로 영입하고, 소수민족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관용적인 정책을 대체로 유지했다.

    중국 정부의 민족정책에 변화가 생긴 계기는 1959년 티베트 사태였다. 특히 1966년 이후 문화대혁명 기간에는 민족 문제를 계급 문제로 접근해 해결하고자 했다. 이 시기에는 소수민족 사회의 계급지배를 온존하게 하는 봉건제도와의 투쟁이라는 맥락에서 민족 문제를 풀고자 했다. 4인방이 중심이 된 ‘지방민족주의 청산’을 통해 소수민족에 대한 대숙청을 시도한 배경도 그러했다. 이러한 강압적 민족정책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변화가 나타났다. 1982년 제정된 헌법에서 ‘민족평등’과 ‘민족단결’을 명시적으로 강조했고 이는 민족자치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됐다.

    티베트 정책도 이러한 소수민족 정책의 맥락에서 전개됐다. 1951년 중국은 티베트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군사적, 외교적 권리를 확보하는 대신 티베트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는 정치적 절충의 산물이었다. 당시 중국의 강경세력은 완전한 흡수통일을 주장했고, 티베트에서도 강경독립파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건국 이후 국내 안정에 주력한 마오쩌둥 정부는 일단 주권을 확보한 상태에서 티베트에 대한 사회주의 교육과 티베트의 지주-소작관계를 축으로 하는 봉건문화 타파 선전전을 지속하면서 티베트 공동체의 응집력을 약화시키는 다양한 정책수단을 동원했다.

    다시 말해 마오쩌뚱 시기는 민족동화정책보다는 종교의 자율성을 부정한 상태에서 계급정책을 추진했다. 실제로 티베트의 농노들에게 토지를 불하하자 이들은 지주가 누리던 특권과 지주에 대한 복종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한족 홍위병과 함께 티베트의 불교사원과 불상을 파괴하는 주체세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승려들에게 파계를 강요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감금하거나 죽이는 문화적 학살을 자행했다.

    편입과 일체화 위한 과도정책

    덩샤오핑(鄧小平) 시대에는 경제발전이 긴급한 과제였기에 대내외적 정치안정이 시급했다. 1981년 ‘역사결의’를 통해 마오쩌둥이 추진한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비판하는 것을 신호로 민족 문제를 계급투쟁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정책을 버리고 티베트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후야오방(胡耀邦)이 티베트 지도자들과 약속한 이른바 6개항에도 잘 나타난다.

    ▲티베트는 자주권을 지니고 티베트 간부들은 자기 민족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 ▲티베트의 농민과 목축민에게 면세를 실시한다 ▲이데올로기적 경제정책을 현실에 부합하는 실질적 경제정책으로 변경한다 ▲티베트에 대한 중앙의 재정지원을 대폭 증가한다 ▲티베트 문화의 지위를 강화한다 ▲한족 간부는 티베트 간부에게 지위를 양보한다

    이 조항은 기존의 티베트 기득세력이 티베트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줬다. 그러나 중국은 자치를 허용하는 동시에 티베트를 흡수하려는 정책도 끊임없이 추진했다. 1986년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소는 서남지역의 역사연구라는 명목으로 ‘서남공정’을 벌여 티베트가 원래부터 중국 영토라는 주장을 폈고, 티베트로 이주하는 한족에게 주택, 일자리, 대출 등의 특혜를 제공하면서 안정적인 생활공간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2006년 베이징-티베트 철도개통을 통해 티베트로 하여금 중국을 향해 개방하게 하고 한족문화를 티베트로 자연스럽게 삼투시키는 정책을 구사해왔다.

    특히 철도개통을 통한 티베트의 한족화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식됐다. 실제로 2001년 우루무치와 카슈카르를 잇는 1500km의 남(南)신장 철도를 개설하면서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상업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중심지 상권은 대개 이주해온 한족들이 장악했다. 그 결과 한때 6000여 개에 달하던 불교사원은 현재 한 자리수로 줄었고 승려도 60여만 명에서 4만여 명으로 감소했다.

    이에 티베트인들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이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지하고,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관련이 깊은 토지와 삼림의 수용이라는, 경제적 이해가 걸린 문제에서도 강력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의 이런 민족정책은 티베트의 기층 대중으로 하여금 공산당에 등을 돌리게 했다. 승려를 비롯한 티베트의 기득권층도 중국 당국의 지원이 실현되지 않자 적대적 태도를 갖게 됐다. 결국 중국 공산당은 기득권층과 기층 모두의 지지기반을 잃게 된 것이다.

    요컨대 중국의 민족구역자치정책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동화정책은 기본적으로 한족의 소수민족으로부터의 분리불가, 소수민족의 한족으로부터의 분리불가, 소수민족 상호간의 분리불가라는 원칙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다원성과 공존의 정치라기보다는 편입과 일체화를 위한 과도적 장치라고 볼 수 있다.

    경제·문화 발전 지체

    중국의 민족 문제는 독특한 역사와 사회조건을 반영하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국가민족주의’ 또는 ‘국가민족문제’가 아니라 ‘민족 간의 불평등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즉 형식적으로는 평등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제와 문화 발전이 매우 지체된 불평등한 구조가 일관되게 형성되고 있는 것. 이 문제는 몇 가지 차원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 민족언어의 사용과 자치권이 제한돼 있다. 소수민족 출신이 중앙과 지방권력의 중심부에 진입하는 것은 구색을 맞추기 위한 정치적 배려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둘째, 개혁개방 이후 동부 연안지역에 자본과 정책이 집중됐다. 소수민족이 집중 거주하는 지역에도 자원개발을 위한 투자가 진행됐으나, 그 이익을 지방에 환수시키지 않고 중앙과 한족들이 부당하게 독점하는 구조가 오랫동안 유지됐다.

    셋째, 문화교육적 측면에서 소수민족 지역엔 진학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문맹 또는 반문맹 비율이 높고 언어와 문자의 제약으로 인해 민족교육이 쇠퇴했다.

    넷째, 민족관계적 측면에서 소수민족의 풍습과 습관에 대해 이해와 존중보다는 이를 이단시하는 풍조가 남아 있다. 또 소수민족의 종교활동에 간섭하는 한편 소수민족의 교리를 폄하하는 문예물들이 유통되면서 소수민족의 반감을 사고 있다.

    다섯째, 민족독립의 문제다. 지식인과 청년을 중심으로 소수민족의 분리주의와 민족주의 의식이 고양되고 있음에도 중국 당정이 이에 엄격하게 대처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티베트 문제는 이러한 중국의 보편적 민족 문제와 사회경제적 조건과 종교적 특징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독특한 사안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불교도에게 영적인 지도자다. 현재 달라이 라마 14세인 텐진 가초는 600만 신도에게는 인생의 등불이다. 그는 두 살 때 13대 달라이 라마 사후에 환생자를 찾아나선 티베트 불교 수색대에 발견돼 환생자로 인정받았다. 1959년 티베트 사태 때 인도로 망명해 지금까지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다.

    달라이 라마는 관세음보살의 대를 이어 환생한 살아 있는 부처다. 흔히 티베트 불교를 라마 불교라고 하는 것도 ‘라마는 곧 환생한 부처’임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는 라마 없이는 성립할 수 없으며, 그래서 종교계의 맹주일 뿐 아니라 세속에서도 티베트인을 통제하는 법왕(法王)인 달라이 라마를 탄생시킨 것이다. 티베트는 이 같은 체계를 갖춘 법왕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투쟁의 뿌리가 깊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 수 없는 현실적 딜레마를 안고 있다.

    티베트 사회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노동활동에 종사하지 않는 승려의 비중이 매우 높은 데다 이들은 결혼생활도 하지 않기 때문에 티베트 주민들의 노동부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 정부의 이주정책이 지속되는 한 안정적인 티베트 공동체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西氣東輸’

    2006년 말 현재 티베트의 총인구는 267만6000명인데 이 중 티베트족은 254만9000여 명으로 95%, 한족은 10만5000여 명으로 4%를 차지한다. 특히 티베트 자치구 수도 라싸의 경우 한족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면서 잡거(雜居)가 상당히 진척된 상태다. 다시 말해 약 4%의 한족이 전체 상권을 장악하고 있으며, 새롭게 형성된 기관이나 기업에 파견된 간부와 기술자, 군인들이 이 지역의 실질적인 식민정책 ‘대리인’으로서 상류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2006년 베이징-티베트 철도 개통으로 한족의 이주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또한 티베트 갈등에는 중국이 21세기 제국의 비전을 그려가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인 에너지를 이 지역에서 확보하려는 원려(遠慮)가 숨어 있다. 중국은 서부대개발을 추진하면서 서쪽의 에너지를 동쪽 연해지역으로 수송하는 이른바 ‘서기동수(西氣東輸)’ 정책을 시행한 바 있다. 티베트 지역엔 우라늄, 석탄, 금강석, 크롬 등 70여 종의 광물자원이 매장돼 있다. 또 전체 수자원의 30%(2억kw)가 이 지역에 편재돼 있고, 삼림자원의 규모는 전국 5위다. 이러한 경제적 이해와 고원지대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무기배치와 개발에 이상적인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받는다. 중국 정부가 티베트의 자치권 확대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배경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처럼 티베트 문제는 중국 민족 문제의 특징을 전형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1959년 시위나 1989년 시위가 비폭력 정치운동인 반면, 이번 시위는 이러한 중국 정부의 티베트 문화 말살정책, 종교적 탄압, 한족 이주정책을 통한 종교세속화, 2등 국민화에 대한 불만과 이에 대한 근본적 해법을 둘러싼 티베트 내부의 권력투쟁이 복잡하게 얽혀 폭력적 양상으로 전개됐다. 더욱이 중국 정부와 더불어 티베트의 한족 주민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그 원인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우선 티베트 임시정부 내부에서 노선투쟁이 등장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89년 유혈사태 때도 달라이 라마는 무장투쟁에 반대했고, 이번 사태에 대해서도 자신이 배후가 아니라며 공개조사를 제의하기도 했다. 베이징올림픽과 티베트 시위는 별건이라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망명정부의 속셈

    그러나 망명정부의 청년세력을 중심으로 한 강경세력들은 이러한 온건한 투쟁방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중국 정부는 이번 사태의 폭력성을 강조하면서 배후에 달라이 라마가 있다고 주장했다. 즉 달라이 라마를 폭력행위의 배후로 몰아 그의 운신을 제약하는 이중 전술로 티베트 사회의 내부균열을 활용하려 했다.

    또 하나는 티베트 문제가 올림픽을 앞두고 국제적 이슈로 부각됐다는 점이다. 실제로 티베트 망명정부는 2008년 8월 열리는 베이징올림픽을 절호의 기회이자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로 봤다. 달라이 라마도 2007년 미국을 방문하면서 “2008년은 관건의 해가 될 것이다. 올림픽도 아마 티베트인에게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바 있다. 티베트 문제와 올림픽 연계를 시사한 발언이다. 인도 망명정부가 소재한 다람살라에서 걸어서 티베트까지 가겠다는 ‘대장정시위’(挺進西藏運動)-결국 이것이 이번 사태의 직접적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다-가 이미 정치적 목적을 띤 것이었다. 인접한 신장-위구르도 자주 분리독립 움직임을 보여왔으나 국제사회의 폭넓은 공감대를 얻지 못한 반면 티베트 문제만은 비상한 국제적 관심을 받았다.

    여기에 서방세계의 ‘중국 때리기’나 인권, 민주화, 타이완 정책, 종교자유 문제 등을 통해 사회주의 중국에 개입하려는 이른바 평화적 전복정책(peaceful evolution)이 복잡하게 결합된 것도 한 원인이다. 이런 상황은 국제사회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달라이 라마의 외교활동에 기인한 바 크다. 하지만 중국의 부상을 두려워하거나 국제규범을 통해 중국을 규율하고자 하는 의도도 깔려 있다.

    요컨대 이번 티베트 사태엔 올림픽을 맞아 티베트 문제를 국제화하면서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조건에서 중국 분열의 징후가 포착되지 않는 한 티베트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망명정부 관계자들은 너무나 잘 안다. 시위가 발생할 때마다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양태를 반복하는 것도 비폭력투쟁을 주장하는 달라이 라마에게는 큰 부담이다.

    따라서 올림픽이라는 이벤트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자치권 확대를 위한 고도의 협상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중국이 티베트 소요사태를 ‘인민전쟁’을 통해 해결하겠다는 것도 망명정부의 이러한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여론의 흐름을 파악하고 인민대중이 사실과 진상을 조속히 이해하도록 철과 같이 단단한 사실로 반격하자”는 선전전으로 맞선 것이다.

    ‘주권이 인권에 우선’

    정치와 스포츠 사이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허물고 있는 것을 보면 티베트의 처지에선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일부 국가들이 항의의 표시로 올림픽 개막식 참석을 거부하는 ‘올림픽 미니 보이콧’이 힘을 얻고 있고, 성화 봉송로를 따라 티베트 자유를 향한 동조시위를 유도하면서 티베트 문제를 알렸다. 이에 중국 당정도 국제사회 여론에 떠밀려 대화의 문호는 열어놓는 정치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티베트인의 희생이 너무 크고, 현실적인 손실도 크다는 점이다. 국제사회는 “티베트의 자치권 보장이 순리”라며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영토와 주권 문제에 관한 한 양보의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화가 티베트에 유리하게 전개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중국 당정은 국경 문제를 둘러싼 오랜 갈등을 사회주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해왔다. 따라서 중국의 모든 외교정책의 핵심은 주권과 영토의 안정화였다. 1989년 시위진압을 진두지휘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의 경험도 이것과 연결돼 있다.

    이것은 티베트 문제가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타이완 문제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임을 의미한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자들은 타이완 독립 문제와 관련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타이완 문제는 실효적으로 타이완 정부가 장악하고 있으며, 미국의 정치·군사적 후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베트 문제의 경우 이미 분리독립은 어려워졌다. 그렇기에 ‘주권이 인권에 우선한다’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의지 안에서 작동할 수밖에 없다. 티베트 사회가 갈수록 정체성의 위기를 심각하게 겪으리라는 점도 운신의 폭을 제약하는 요인이다.

    물론 중국 정부로부터 분리주의자(splittist)로 낙인찍힌 달라이 라마 14세를 비롯한 티베트 망명지도부는 분리와 독립을 포기하는 대신 현실적으로 고도의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제로 쓰촨(四川), 칭하이(靑海), 간쑤(甘肅) 등지로 분할된 옛 티베트 지역 전체를 대티베트구(大藏區)로 재구성해 티베트에 대한 행정관리와 중국군 철군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비(非)티베트인들을 티베트 지역 밖으로 이주시키고 연방민주자치공화국을 수립하겠다는 것을 망명정부 헌장에 명시했다. 이것은 사실상 홍콩과 마카오에 적용하는 ‘한 나라 두 제도(一國兩制)’ 정책을 티베트에도 적용하라는 요구다.

    중국은 티베트의 이러한 요구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고 본다. 이미 다른 행정구역에 편입된 옛 티베트 지역을 다시 재구성할 리도 만무하거니와, 티베트에만 고도의 자치권을 제공할 경우 티베트 세력의 비대화는 물론 다른 소수민족에 미칠 파급력이 너무 크다. 게다가 신정(神政)일치를 추구하는 티베트 사회를 사회주의 사회와 근본적으로 융합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남아 있다. 최근 중국의 관영매체들이 새삼 “봉건적 귀족과 라마승이 착취하는 농노제를 근절시켰다”는 마오쩌둥 시기의 티베트 해방논리를 불러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하고 차가운 중국’

    물론 중국이 축제 속에서 치르고자 하는 올림픽을 앞두고 협상과 타협의 여지는 남아 있다. 우선 달라이 라마 측이 일관되게 독립보다는 자치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 티베트인들이 올림픽과 티베트 문제를 연계하지 않아야 한다고 보는 점, 폭력을 수반한 시위의 배후에 자신이 없다는 점이 티베트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중국 정부도 국내 여론을 고려해 비타협적 자세를 취하는 한편 국제사회의 압력을 의식하고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 전파를 통제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대상이다. 티베트 사태 자체를 보도하지 않던 과거와는 달리 신속하게 이에 대응하고, 중국 주재 외교관들에게 티베트 시위현장을 개방하고, 막대한 비용을 들여 티베트 불교유적 정비를 약속하는 등의 당근정책도 추진하고 있다.

    中 민족문제 화약고, 티베트 사태의 진실
    이희옥

    1960년 서울 출생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정치학)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선임연구원, 중국 지린성 객좌교수, 한신대 중국지역학과 교수

    現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저서 : ‘중국의 새로운 사회주의 탐색’ ‘중국의 국가대전략연구’ ‘중국 평화부상의 새로운 길’ 등


    이렇게 보면 숨고르기를 통해 ‘이럭저럭 버티려는(muddling through) 전략’을 사용하려는 중국 정부와 내친김에 자치권 확대를 국제여론에 호소하면서 유리한 협상고지를 장악하려는 망명정부의 줄다리기가 지루하게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일단은 자치권의 제한적 확대나 티베트 사회와 문화에 대한 공격적 재편을 유예하는 수준에서 절충점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살아 있는 부처’ 달라이 라마 14세가 타계해야 자연스럽게 근본적 출구가 나타날 것이라고 볼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1989년 1400여 명이 사망한 티베트 시위 때 티베트인들이 “우리는 달라이 라마가 통치하기를 원한다”며 흔들던 설산사자기(雪山獅子旗)는 보기 어렵게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올림픽을 통해 강대국을 향한 기반을 다지면서 ‘중국의 세기’를 열어가고자 했던 중국의 열망은 빛이 바래고 있다. 빈곤 국가들에게 기여외교를 강화하고 경제력에 걸맞은 책임대국을 추구해온 중국의 ‘매력 공세(charming offensive)’가 중국 내 소수민족에게도 적용되지 않는다면 ‘강하지만 부드러운 중국’은 ‘강하고 차가운 중국’으로 남게 될 공산이 크다. 따라서 2008년 3월 공식적으로 출범한 제2기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 체제가 줄곧 주창해온 평화로운 부상이나 사회주의 조화사회(和諧社會)가 연착륙하려면 우선 티베트 문제를 평화적이고 조화롭게 해결해야 할 것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