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혁명 전야에 타오르는 도발적 섹스, 그리고 금기에 대한 욕망

  • 강유정 영화평론가 noxkang@hanmail.net

    입력2008-06-10 10: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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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이라는 핏빛 기억에 남겨진 일탈의 증거들. 혁명은 청춘이고 모반이고 성적 욕망의 폭발이다. 섹스 혹은 사랑에 대한 열정은 곧 혁명에 대한 열정이다. 변화에 대한 강렬한 욕망, 그것이 곧 사랑이고 혁명이다. 혁명이란, 결국 사랑이다.
    … 혁명과 사랑, 혹은 관능 …

    혁명 전야에  타오르는 도발적 섹스, 그리고 금기에 대한 욕망

    ‘몽상가들’

    때로, 어떤 영화는 머리가 아닌 심장에 먼저 들어와 박힌다. 그래서 생각이나 관념이 바뀌는 게 아니라 영혼이 살짝 어디론가 이동해버린다. 심장이 들은 언어이기에 이유를 설명하자면, 힘들다. 그래서 그 이유들은 길어진다. 세상 어떤 언어도 심장과 영혼을 움직인 감동을 표현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게다가 불충분하다. 마치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는 듯 완전한 이성의 알리바이로 그런 작품들은 오롯이 존재한다.

    혁명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사건이 일어난 후 그것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기술하려 한다. 그리고 그 사건이 역사적으로 분기점을 이룰 때, 우리는 그 사건을 가리켜 ‘혁명’ 혹은 ‘사태’라고 이름 붙인다. 프랑스의 68혁명, 일본의 전공투, 그리고 1980년대 대한민국의 대학가, 그리고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이 사건들의 공통점이라면 실패한 혁명이자 미완의 혁명이라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은 이 변혁의 과정을 뜨거운 욕망의 시선과 곧잘 병치했다. 섹스를 통한 세기말적 자기 소멸을 그려낸 무라카미 류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공투 세대의 상실감을 반영했다고 평가되곤 한다.

    그런데 왜일까. 실패한 혁명, 혹은 미완의 사태들은 왜 관능의 언어와 함께 환기되곤 하는 것일까. 미칠 듯이 거리로 달려 나갔던 청춘의 에너지가 최초의 성적 경험에 대한 무한한 일탈과 경도로 표현되곤 한다. 혁명이라는 핏빛 기억에 남겨진 이 일탈의 증거들. 한편 혁명은 젊은이의 열정과 치기, 무모한 투신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20대를 관통했던가.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들, 이를테면 법과 질서라고 불리는 완강한 것들에 대한 불만을 무엇으로 토로했던가. 돌이켜 보면 그 토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둔중한 웅얼거림과 닮지 않았던가. 그 뜨거운 열망은 사랑하는 남자 혹은 여자에 대한 열정과 어떤 차이가 있었나. 밤을 하얗게 새울지언정 잊을 수 없는 그 이름들, 자유 그리고 너. 혁명은 청춘과 너무도 닮아 있고 그 열정은 또 모반을 꿈꾸는 젊은 성적 욕망과 유사하다. 여기 놓인 두 작품은 다시 한 번 섹스와 혁명을 생각게 한다. 사랑에 대한 그 열정과 혁명에 대한 열망을 나란히 두고 바라본 작품, ‘몽상가들’과 ‘여름궁전’이다.



    유모의 빈 젖을 빠는 황제

    ‘몽상가들’을 연출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는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감독이다. 대중적으로는 ‘마지막 황제’로 알려졌지만 실상 영화계에서 그의 이름이 각인된 것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통해서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말론 블랜도의 강인한 연기와 이해하기 힘든 변태적 섹스로 환기되곤 한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 황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를 초등학교 6학년 때, 아카데미상을 여러 개 수상한 훌륭한 작품이라는 말에 보러 갔는데, 꽤 야한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니,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의 다른 어떤 내용보다 독특한 성적 비유가 내 머릿속에 남아버렸다.

    예컨대 이런 장면들. 푸이 황제가 첫날밤 초례를 치르는데 황후, 조안 챈이라는 배우가 황제의 이마와 얼굴에 수많은 입술 자국을 남긴다. 야릇했다. 또 이런 장면도 있었다. 제법 청년티가 나는 황제가 유모의 풍만한 젖가슴에 매달려 빈 젖을 빤다. 이상했다. 그리고 이런 장면도 있었다. 자신에게 무심한 황제에게 지친 황후가 눈물을 흘리는데, 궁녀인지 후궁인지가 그녀의 발가락을 빨아준다. 위험했다. 이상하고도 기묘했지만 기묘한 만큼 슬픈 장면들이었다. 나이가 들어, 이해력이 생긴 이후 다시 돌이키니, 이 장면들은 노쇠한 나머지 퇴폐로 추락한 중국의 황실을 비유한 것이었다. 넓디넓은 자금성의 유일한 남자였던 푸이, 그의 고독. 그리고 누구와도 소통할 길 없이 거대한 궁 안에 갇힌 왕족들의 퇴폐는 수천년의 역사가 몰락한 순간의 고독이자 영원한 것은 없다는 허무의 상징이었다.

    혁명 전야에  타오르는 도발적 섹스, 그리고 금기에 대한 욕망

    ‘몽상가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자 빼어난 시인이었다. 아버지가 정치를 했다면 베르톨루치는 영화를 통해 혁명과 젊음, 좌절된 혁명의 상처를 그려왔다. 그런 맥락에서 2003년 베르톨루치 감독이 오랜만에 발표한 영화 ‘몽상가들’은 혁명에 대한 거장다운 해석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범하게도 베르톨루치 감독은 혁명을 섹스를 향한 치기 어린 호기심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영화는 1968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8년은 유럽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1968년 5월과 6월 사이 파리는 물론 베를린, 로마, 프라하, 런던에서 대대적인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이는 미국, 뉴델리, 자카르타, 도쿄, 부에노스아이레스로까지 퍼져나갔다. 수만명의 젊은이가 호치민, 마오쩌둥의 사진을 들고, 체 게바라를 호명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68혁명이라 한다. 베르톨루치가 카메라에 담은 시절은 자유에 대한 신념과 열정이 최고조에 이른 때다. 그들은 “금지를 금지하라”고 외치며 그 금지에 대한 거부감은 온갖 금기시된 것에 대한 저항과 거부로 이어진다.

    쌍둥이 여동생 앞에서 자위행위

    쌍둥이 남매 이자벨과 테오는 영화광이다. 그들은 매일 시네마테크에 가서 다른 대학생들과 어울려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영화에 빠져든다. 그들 사이에 미국인 유학생 매튜가 들어온다. 쌍둥이 남매와 매튜는 영화와 문화적 기호들을 통해 친구가 되고 동지가 된다. 그들은 “탄원서가 곧 시이고, 시가 곧 탄원서”라고 말한다. 이 새로운 광경에 매튜는 매혹되고 만다.

    무엇보다 매력적인 것은 모든 사회적 금기를 넘어서는 이자벨과 테오의 성적 방종이다. 그들은 남매이지만 발가벗은 채 함께 잠들고 심지어 이자벨 앞에서 테오는 자위행위를 하기도 한다. 매튜, 테오, 이자벨, 세 사람은 영화의 한 장면을 재현한 후 제목을 맞히는 게임을 하며 성적 판타지와 문화에 대한 갈증을 채워나간다.

    그러던 중 게임에 이긴 테오는 매튜와 이자벨이 섹스를 나눠야 한다고 명령한다. 매튜는 당연히 이자벨과 테오가 근친상간을 한, 그러니까 섹스를 나눈 사이였다고 믿고 별 망설임 없이 명령을 이행한다. 하지만 이자벨은 처녀였고, 그들의 관계에 대한 매튜의 호기심은 이자벨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이자벨과 테오의 행동들, 그러니까 근친상간, 관음증, 자살 충동과 같은 금기시된 성적 코드들을 서슴없이 제시한다. ‘몽상가들’이 2005년 한국에서 개봉됐을 때, 남성과 여성의 성기가 모자이크 처리 없이 상영되어 논란과 놀라움을 불러온 바 있다. 그들의 노출된 성기, 그리고 금기를 위반하는 도발적 섹스는 곧 감독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끊임없이 섹스와 혁명의 이미지를 병렬한다. 그리고 사실상 혁명을 이끄는 힘은 사회가 금기시한 그 모든 성적 욕망의 발현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이를 증명하듯 새로운 문화와 성적 일탈에 빠져들던 그들은 68혁명 당시 시위대에 참여하고, 그들이 참여하는 순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서로의 몸을 탐닉하던 열망이 고스란히 혁명의 힘에 전이된 것이다. 마치 혁명을 위해 장전됐던 탄환처럼 그들의 에너지는 68혁명으로 폭발한다.

    이쯤 되면 왜 영화의 제목이 ‘몽상가들’인지 짐작할 만하다. 사실상 역사에 매듭을 지어준 혁명적 사건들은 햄릿형 인간들의 사려 깊은 반성의 결과가 아닌 막연히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몽상가들의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은 치기 어리고 한쪽 방향으로만 나아가고 목적이 없는 것이기에 더욱 순수하고 강렬하다.

    노(老)감독은 혁명이란 계산 없는 돌진이며 투신이라는 사실을 이 세 젊은이를 통해 보여준다. 스무 살 남짓의 젊은 몸이기에 성기가 노출된 장면도 아름답고 가슴 뛴다. 그렇기에 맨몸으로 뒹굴어도 부끄러움이나 모멸감이 일지 않는다. 그들은 젊기에 아름답고 그 젊음이 잉태한 혁명의 에너지는 순전히 ‘다른 삶’을 원하는 것이기에 빛난다.

    순결한 몽상가들의 혁명과 꿈은 미숙했기에 열정적이고 아름답다. 그곳에는 인류의 오래된 도덕으로 가늠할 수 없는 변혁을 위한 열정이 놓여 있다. 68세대 당사자이기도 한 베르톨루치 감독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 당시를 회고한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마음껏 영화에 미치고 문화에 매료되고 정치와 철학이 모두 변화에 대한 열망으로 수렴되던 시절, 청춘은 곧 혁명이니 말이다.

    … 몸에 남은 낙인, 섹스 그리고 혁명 …

    혁명 전야에  타오르는 도발적 섹스, 그리고 금기에 대한 욕망

    ‘여름궁전’

    2006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흥미로운 중국 영화 한 편이 상영됐다. 영화는 1980년대 말, 베이징대학의 학생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1980년대 말과 베이징이라, 천안문 사태가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영화, 좀 수상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수재가 모인 베이징대, 1980년대의 그곳은 갑작스럽게 밀어닥친 자유의 열기에 신열을 앓듯 온통 들떠 있다. 남학생들은 도둑고양이처럼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 애인과 섹스를 나누고 여학생들은 몰래 자위행위를 전도한다. 이상하고도 수상한 풍경, 영화 ‘여름궁전’이 그렇다.

    로우 예 감독의 ‘여름궁전’은 영화 외적인 사건으로 유명세를 탔다. 반갑지는 않지만 요지는 이렇다. 천안문 사태를 다뤘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성적 방종과 천안문을 병렬했다. 발칙한 이 은유법에 화가 난 중국은 상영 불가조치를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로우 예 감독은 더는 중국 내에서 촬영을 할 수 없다.

    영화는 베이징대학 입학허가서로부터 시작된다. 이 입학허가서는 마치 낯설고 두려운 미래로부터의 호출처럼 그녀를 다른 삶에 초대한다. 한국어를 쓰는, 두만강 국경지대에 사는 유홍의 세계는 촌스러운 남자친구로 상징된다. 이 장면도 사뭇 놀라운데, 유홍은 베이징대 입학허가서를 받자마자 마치 구질구질한 고향과 결별하듯 자신의 처녀성을 폐기처분한다. 폐기처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게 함부로 그것을 버린다.

    유홍이 도착한 베이징대학은 새로움에 대한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베이징은 그의 고백처럼 환각에 가까운 도취상태에 빠져 있다. 학생들은 지독하게 줄담배를 피우고 자유연애에 들뜬 젊은 연인들은 아무 곳에서나 섹스를 한다. 섹스는 자유의 상징처럼 학생들 사이에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저우웨이라는 남자가 다가온다. 문제는 그가 아무것에도 거칠 것도 주저할 것도 없는 남자라는 사실, 그는 ‘내추럴 본’ 자유인이라 뼛속까지 구속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1989년 천안문 사태에 이르기까지 1년 여의 시간은 저우웨이에 대한 유홍의 정념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투신하듯 저우웨이에게 몰입한다. 유홍은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자포자기의 고통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이 고통의 정점에 천안문 사태가 발발한다.

    열정의 뒤끝에 찾아오는 환멸

    뻔하디뻔한 대학가 러브스토리 같지만 실상 저우웨이는 당시 베이징대생들을 들뜨게 했던 ‘자유’라는 개념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유홍이 냉정하고 세련된 저우웨이에게 매혹됐듯이 당시 베이징대생들도 서방국가의 자유라는 개념에 넋이 나간 것이다. 로우 예의 도발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천안문 사태로 압축되는 자유에 대한 열광을 매력적 바람둥이에게 빠진 촌스러운 시골 출신 여성의 성적 개안에 비유하는 것 말이다. 로우 예 감독은 이러한 비유법을 서슴지 않는다.

    로우 예 감독이 그려낸 천안문 사태는 2002년 월드컵 때 광화문으로 몰려든 한국 젊은이들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응집된 에너지가 얇은 표피를 뚫고 폭발하듯 천안문 사태는 새로움에 대한 갈망의 폭발로 설명된다. 로우 예는 이 역사적 사태에 대해 인과성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이런 사태는 미친 듯이 섹스에 빠진 젊은이들에게서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이미 베이징 도처에 그러한 에너지가 있었다고 말이다.

    이런 점은 집회를 마치고 되돌아오는 리티(유홍의 친구), 저우웨이, 유홍의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노래를 부르며 어깨를 겯고 오던 세 사람은 집단과의 거리가 조금씩 멀어지자 어색해진다. 부르던 노래를 멈추고, 어깨를 풀고 결국 따로 떨어진 섬처럼 그렇게 그들은 되돌아온다. 얼싸안고 노래를 부르던, 하나라고 믿던 그들은 급격한 고독감에 내던져진다. 결국 혁명이, 그리고 집회가 그들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근원적 고독감을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듯 말이다. 마치 다가올 미래를 예견하듯 그들은 따로 떨어져 돌아온다. 함께 갔던 그들이 혼자가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이 혁명의 시작, 그러니까 절정의 상태에서 영화를 끝냈다면 로우 예 감독은 혁명이 남긴 쓸쓸한 상흔을 관찰한다. 오르가슴처럼 몰아쳤던 혁명의 밤을 보낸 후 돌아온 이 세 인물은 서로 다시 볼 수 없는 사이로 멀어진다. 천안문 사태로 학교가 폐쇄되자 유홍은 고향으로, 저우웨이와 리티는 베를린으로 유학을 간다. 베를린에 간 리티는 저우웨이에게 묻는다. “그 해 여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라고.

    로우 예 감독이 본 열정의 뒤끝은 환멸과 가까워 보인다. 리티는 자살하고 유홍은 학교를 그만둔 채 지방의 하급직을 전전하며 저우웨이는 더욱 차가운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그들은 이제 더는 자유와 미래를 믿지 않는다. 한편 저우웨이에게 미치도록 빠져들었던 유홍은 다른 남자들을 만나며 베이징을 잊어간다. 한 시기를 잊는 것, 실패한 혁명을 다음 세대의 몫으로 넘기는 것이 첫사랑을 잊는 과정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영혼의 지침을 돌린 단 한 번의 키스처럼 저우웨이는 그렇게 유홍의 삶을 바꿔놓는다. 대학을 자퇴하고 지방 도시를 전전하는 그녀의 생은 숨가쁘게 변화하는 중국의 현재와 함께 무참히 흘러간다. 젊음도, 혁명도 그렇다. 날카로운 키스처럼 혁명, 열정, 젊음은 순식간에 다가와 의미를 띠기 전에 상처를 남기고 사라진다. 뜨거운 화인(火印)이 된 과거는 미래를 저당잡는다. 그렇게 뜨거웠던 젊음은 현재의 상흔이 되어 지속된다.

    ‘여름궁전’은 ‘몽상가들’의 테오와 이자벨, 그리고 매튜가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을 아프게 되새김질하고 있는 듯하다. ‘몽상가들’이 스틸 컷처럼 정지된 화면으로 끝남으로써 혁명을 역사에 기록하려 한다면 ‘여름궁전’은 실패한 혁명의 잔재를 현재 진행형으로 보고 있으니 말이다.

    … 추억이 된 혁명의 남루함 …

    ‘여름궁전’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인지 쓸쓸하고 외롭다. 저우웨이를 잊기 위해 아무나와 결혼한 유홍은 영화의 마지막 즈음에 중국으로 돌아온 저우웨이와 재회한다.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던 당시의 그 뜨거웠던 감정의 대상을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남아 있는 현재는 없다. 공유할 것이 과거밖에 없을 때, 추억만 있는 연인은 화석에 지나지 않는다. 화석은 열정을 불러올 수는 없다. 그것은 더는 수정될 수 없기에 언제나 과거형이다. 그렇게, 그들은 과거 속의 연인으로 침잠한다. 젊은 시절 만난 혁명은 젊었기에 아름다운 탕진과 일탈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너무 이른 시기에 만난 매혹일 수도 있다. 열정을 탕진하는 법밖에 몰랐던 그들, 어쩌면 역사는 젊음이 뿌린 피를 대가로 조금씩 진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환멸로 가득 차 있다지만 ‘여름궁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감정은 아름다웠던 과거에 대한 향수다. 보트 위의 순간들, 첫 섹스의 추억, 숨죽이며 서로의 몸을 더듬던 불안감들, 결국 그것은 그리움의 대상이다. 어두컴컴한 기숙사 낡은 침대 위의 섹스, 유홍의 눈빛에 주목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서로 껴안고 흥분해 마지않던 천안문 사태 전야. 여름궁전 호수 위에 띄워 놓은 보트에서 석양을 받으며 서로의 체온에 기대던 연인들. 영화와 시를 읽으며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변화를 예측하던 철부지들.

    혁명 전야에  타오르는 도발적 섹스, 그리고 금기에 대한 욕망
    강유정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국문학)

    고려대·극동대 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입선(영화평론),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문학평론)

    現 고려대·한국종합예술대 강사


    정치적 맥락으로서의 독법도 물론 가능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 ‘여름궁전’은 사랑 영화다. ‘여름궁전’은 사랑, 게다가 젊은 시절의 열정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사랑은 혁명과 닮아 있다. 철모르던 시절 겪었던 혁명도 그랬다. 변화에 대한 열렬한 갈망, 그것이 곧 혁명이며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이는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조국을 너무나 사랑하고 이 삶을 지독히 원하기에 목숨을 걸고 바꾸고자 한다. 그게 곧 사랑이고 혁명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의 추억이 고통스러운 환각과 자멸감을 안겨주듯 그렇게 혁명에 대한 열정은 역사와 맞부딪쳐 상처를 준다. 혁명이란, 결국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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