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호

‘중국의 양심’ 쑨원광 교수의 자기비판

“정보왜곡·편향교육이 빚은 신민족주의, 중국은 절대로 세계를 이끌 수 없다”

  • 쑨원광 중국 산둥대 퇴직교수·물리학 / ‘번역·은송희’

    입력2008-06-11 16: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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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화 봉송을 방해한다며 중국인 유학생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한국인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프랑스계 할인점 까르푸가 티베트 망명정부를 지원한다고 알려지자 조직적으로 불매운동을 벌였다. 반중(反中) 의견을 보인 미국 유학생과 가족의 신원을 인터넷에 공개해 사회적으로 매장했다. 티베트 독립과 베이징올림픽을 둘러싸고 표출되는 중국의 과격한 민족주의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자성(自省)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중국의 양심’으로 알려진 쑨원광(孫文廣) 산둥대 교수가 하종대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을 통해 ‘중국의 신민족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중국의 양심’ 쑨원광 교수의 자기비판
    최근 두 달 동안 중국의 신민족주의는 국내외에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이가 티베트 사태와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 등의 문제들이 중국의 민족주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글에서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일련의 중요한 문제들과 관련해 민족주의가 어떻게 발현됐으며, 그 역사적 근원과 형성 원인은 무엇인지에 대해 분석하고자 한다.

    티베트 문제는 지난 3월10일부터 나흘간 각 지역에서 티베트 승려들이 종교·신앙의 자유와 지방자치를 요구하며 벌인 평화적 가두시위로 시작됐다. 중국 당국은 이들의 합법적인 권리 요구를 묵살한 채 많은 승려를 체포하고, 나머지 승려들은 사원에 감금한 뒤 식수와 전기, 음식물 공급을 차단했다. 이에 대다수 티베트인이 불만을 터뜨리며 촉발된 것이다.

    3월14일 라싸(拉薩)에서 수만명의 티베트인이 승려들을 감금하고 체포한 것에 항의하는 거리 시위를 벌였고, 일부 티베트인들은 폭행·방화·기물훼손 등의 과격한 행동을 보였다. 그 후 해외 언론들은 ‘군인과 경찰들이 발포해 티베트인들을 죽이고 있다’며 사망자가 수십 또는 수백명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했다. 장갑차가 라싸 중심지역을 향해 출동하는 사진도 함께 공개했다. 이와 관련, 나는 해외 언론매체를 통해 항의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부활한 ‘文革 대자보’

    중국 당국은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3월14일의 폭력시위 장면 등을 연이어 보도했다. 티베트인과 승려들에게는 ‘티베트 독립을 조장하는 무리’라는 죄명을 씌웠다. 그러나 그 시위가 있기 전 중국 당국이 티베트인들의 평화적 시위를 엄격하게 단속하고 티베트인들을 사살한 일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언론 보도를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티베트에 있던 모든 외신 기자를 쫓아냈다. 사건의 진상을 숨기려는 의도였다.



    중국의 언론매체들은 중국 당국의 티베트 시위 진압에 대한 서방의 비판에 대해 일관되게 ‘중국에 반대하고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민족·애국주의 정서를 이용해 대중의 반(反)서구 감정을 선동한 것이다.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대다수 중국인이 인터넷을 통해 ‘반중국 세력’을 비난했다. 이때 베이징올림픽 성화가 세계 각국에서 봉송되기 시작했고, 일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중국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했다.

    이에 중국 정부는 일부 국가에서 대사관과 영사관을 통해 현지 중국인들과 유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폭력행위가 발생하자 여러 나라에서 항의가 빗발쳤다. 중국 내의 일부 사람들은 이에 더욱 분노했다.

    인터넷에서는 프랑스의 대형 유통체인점인 까르푸의 최대 주주가 티베트 독립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이후 허베이(河北), 칭다오(靑島), 시안(西安) 등 대도시에서는 까르푸 불매 운동과 프랑스 제품을 구입하지 말자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와 같은 민족주의 열풍은 표면적으로는 정부가 조직한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발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당국이 통제하는 언론매체가 만든 여론은 이런 행위들을 부채질하고 선동해 사태가 빠른 속도로 악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민족주의 색채를 띤 여론은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발표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당국에 의해 사장되기 일쑤였고, 중국 당국을 비판하는 세계 여론들은 ‘반중국 세력’으로 매도됐다. 중국 내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인신공격을 당했다. 나 역시 (해외의 언론매체에) 발표한 많은 글이 중국에 알려진다면 분명 공격을 받을 것이다. ‘매국노’나 ‘배신자’라는 욕을 듣게 될 것이며 가족들도 인터넷 테러를 당하게 될 것이다. 요즘 인터넷에 오르는 문장들은 문화대혁명 때의 대자보와 비슷하다.

    당국 반대하면 ‘매국노’ ‘배신자’

    ‘중국의 양심’ 쑨원광 교수의 자기비판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바링허우(八零後)’들은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을 바라며 이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공격적으로 대항하는 특징을 보인다.

    베이징올림픽 및 올림픽 성화 봉송과 관련해서는 서로 다른 몇 가지 의견이 있다. 그중 하나는 당국과 일부 ‘펀칭(憤靑·분노한 청년, 1980년대 이후 출생한 ‘바링허우(八零後)’세대)’들의 관점이다. 이들은 베이징올림픽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올림픽이 되기를 바라며, 중국이 종합순위 1위를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림픽 금메달을 통해 중국과 중국 정부의 영광을 드높이고 싶어한다. 그들의 눈에는 베이징올림픽을 저지하거나 올림픽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은 대역죄다. 그게 중국인이라면 매국노이자 배신자이며 해외의 언론매체라면 반중국 세력인 것이다.

    반면 해외에서는 베이징올림픽을 보이콧하려는 분위기가 생겨났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중국은 전세계에서 자유가 없는 국가, 인터넷 통제가 엄격한 국가, 언론의 자유가 없으며 신문기자들이 가장 많이 체포되는 국가인 것으로 나타났다. 티베트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일부 국가에서는 개최장소를 바꿔서 올림픽을 열자고 주장했고, 일부 국가의 정부 관계자들은 올림픽 개막식 불참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중국 내에서도 일부 지식인들은 베이징올림픽 개최에 대해 그다지 열성적이지 않다. 이들은 일찍이 중국 당국이 올림픽 개최에 앞서 인권상황을 개선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 정치범과 종교·신앙사범 석방, 해외에서 유랑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귀국 허용, 정치적 이유로 입국이 불허된 인사들의 블랙리스트 삭제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일부에서는 올림픽 개최 전에 파룬궁에 대한 탄압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올림픽을 보이콧하자는 해외 분위기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일부 지식인들은, 베이징올림픽은 중국 공산당이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개최하는 행사이므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거 동유럽과 북한 등이 공산당 통치 아래 획득한 많은 금메달은 공산당 정권의 영광을 위해서 민중의 피와 땀으로 맞바꾼 대가라는 것이다. 동유럽 국가 다수가 공산당 정권이 붕괴된 후엔 올림픽에서 획득하는 금메달 수가 줄어들었지만 국민들은 민주와 자유를 얻었고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올림픽 성화의 해외 봉송 과정에서 미국 유학생인 왕첸위안(王千源)이나 홍콩 대학생인 천차오원(陳巧文)처럼 중국 정부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한 중국인들은 반대자들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감수해야 했다. 왕첸위안의 부모가 살고 있는 칭다오 집에는 적지 않은 사람이 몰려가 소동을 피우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왕첸위안의 모교인 칭다오 제2중학교는 그녀의 학적을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의 배후에는 모두 편협한 민족주의가 반영돼 있다.

    ‘부청멸양(扶淸滅洋)’ 전통

    중국의 민족주의는 역사적인 전통을 갖고 있다. 청(淸) 말엽 의화단은 ‘부청멸양(扶淸滅洋·청을 살리고 서양을 배격한다)’을 주장하며 외세를 배격하면서 교회당을 불태우고 전봇대를 도끼로 베어버리는 것도 모자라 심지어 서양인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과거의 교과서에서는 그런 의화단을 사회 진보를 이끈 농민운동으로 칭송했다. 항일전쟁 중의 민족주의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긍정적인 의미를 띤 데 비해 항일전쟁이 끝난 후의 민족주의는 주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전부 외세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6·25전쟁 때 중국 당국은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도와 나라를 지키자’라는 구호를 내세워 대중운동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미국은 중국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적국이라고 선전하며 미국이 한국을 지지해서 북한을 침략했다고 말했다. 그때도 중국의 언론매체들은 중국 공산당의 엄격한 통제와 관리 속에 있었고 대중은 외국의 언론을 접할 길이 없었다. 해외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도 금지돼 있었다. 이를 어기고 해외 방송을 청취하는 사람은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때 형성된 사고의 영향과 그 뒤에 이어진 교육으로 중국인들은 미국을 멸시하고 적대시하게 됐다. 이런 생각은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6·25전쟁 발발의 진상에 대해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옛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많은 중국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민주 선진국들에 대해 아직도 적대 감정을 갖고 있다.

    1979년 중국은 베트남을 침공해 전쟁을 일으켰다. 중국 정부는 베트남 군대가 중국 영토에서 소란을 피운다는 여론을 조성한 뒤 민족주의 정서를 이용해 베트남을 침략, 약 10만명에 이르는 사상자와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야기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진지하게 분석해보면 중국은 캄보디아의 좌익 무장단체 크메르루주와 그 통치자인 폴 포트를 지지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폴 포트는 중국 공산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1975년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뒤 중국의 무산계급 독재를 모방한 암흑정치를 실시했다. 4년 동안 무려 200만명의 목숨을 빼앗는 대학살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참사는 어떤 면에서는 독일 나치즘의 잔혹성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중국의 양심’ 쑨원광 교수의 자기비판

    티베트 사태는 티베트 승려들의 평화적 가두시위를 중국이 강압적으로 저지하면서 촉발됐다. 중국 언론은 티베트 승려들의 조작된 폭력 장면을 의도적으로 반복 방영했다.

    베트남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크메르루주에 전면전을 선포하고 전쟁을 일으켜 1979년 초 캄보디아의 수도인 프놈펜을 함락시켰다. 폴 포트는 서부 밀림으로 도망쳤고 베트남의 출병으로 캄보디아의 대부분 지역이 해방됐다. 이는 중국 정부를 분노케 하기에 충분했다. 폴 포트가 이끈 정권은 중국의 지지와 지도 아래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중국을 모델로 해서 세워진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소련 사회주의 정권의 지원을 받는 베트남이 이런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79년 10여 만의 병력을 집결시켜 베트남을 침공, 본때를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지만 이런 침략전쟁이 중국 인민들에게 어떻게 인정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실상을 왜곡, 베트남이 중국을 침략했기 때문에 중국은 어쩔 수 없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위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국민을 속이고 민족주의를 선동해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 전쟁으로 중국 정부는 인민들에게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을 안기고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는 아직까지 이 전쟁의 정확한 실상과 내용이 실려 있지 않다.

    ‘나토가 중국을 깔본다’

    1999년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군의 유고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피격으로 3명이 사망하자 ‘나토가 중국을 무시하고 깔본다’는 여론이 형성돼 민족주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중국 정부가 조성한 이 여론으로 주중 미국대사관과 각 지역의 미국영사관을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은 “실수로 인한 오폭”이라고 밝혔지만 중국은 미국이 고의로 중국대사관을 폭격했다고 여겼다. 도대체 이 사건의 진상은 뭘까. 중국 당국이 정보를 막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미국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중국 정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중국 내 일부 지식인들은 중국 당국이 거짓으로 국민을 기만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정책결정 과정은 투명하지도 않고 여론의 감독을 받지도 않으며 법적인 제재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6·25전쟁과 베트남 침략 등 중요한 사건에서 국민들을 속인 과거 전력도 있다. 중국 공산당은 엄청난 전쟁을 일으키고도 수십년 동안 진실을 감추고 역사에 대해 책임질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중국대사관 폭격으로 3명이 사망한 사건을 조작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만큼 손쉬운 일 아닐까.

    나토군의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이 발생한 당시 중국 공산당은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쳐 미국과 영국을 나쁘게 묘사했다. 이 사건을 통해 민중의 민족주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대중의 항의시위를 독려해 국제무대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중국인들이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을 증오하게 된 또 하나의 사례다.

    나토군의 중국대사관 폭격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당시 유고에선 공산당 당수를 역임한 바 있는 밀로셰비치가 대통령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자였다. 집권 기간 외세배척 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모두 네 차례의 전쟁을 일으켜 남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30만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250만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밀로셰비치는 중국 공산당과 비슷한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그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했다. 그러던 차에 일어난 중국대사관 피폭사건은 중국 공산당이 민중의 항의시위를 지지하는 빌미가 됐다. 이와 같은 행위는 중국 공산당의 오랜 친구인 밀로셰비치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민족주의를 유지하고 선동하는 일거양득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이야 어찌됐든 간에 중국은 나토 등 선진국들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목적을 이뤘다. 2005년 일본이 유엔 상임이사국 자격을 얻으려 했을 때에도 중국에서는 대규모 반일시위와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일어났는데, 이것 역시 민족주의로 인해 야기된 것이었다.

    첨단 통신 등에 업은 新민족주의

    요즘 중국의 민족주의는 ‘신민족주의’라고도 일컫는데, 신민족주의는 과거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과거의 민족주의는 주로 당국에 의해 계획과 정책이 결정되고 수직적으로 조직됐다. 1950년 북한과 함께 6·25전쟁을 일으킨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요즘의 민족주의적 활동들은 민중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것이지 당국이 나서서 이끈 것이 아니다. 당국의 책임은 진상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외국의 비판적인 여론들에 대해서 부적절하게 대응한 부분이다.

    신민족주의도 이전의 민족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중은 정부가 만든 편파적인 보도를 접하며 잘못된 정보와 현상을 만들어낸다. 감정적으로 자극을 받은 뒤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등을 통해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리고 시위, 집회 등이 열리게 되는데, 이런 활동들은 처음 조직한 사람이나 우두머리를 색출하기가 매우 어렵다.

    둘째, 과거 중국 공산당이 이용한 민족주의는 대부분 공격형이었다. 예컨대 1950년 한반도에 군대를 보낸 것과 1979년 베트남을 공격한 것 등의 민족주의는 모두 ‘미제국주의’와 ‘소련사회주의’ 노선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1999년 나토의 중국대사관 오폭 사건에 대한 항의는 나토와 미국, 영국에 대한 반발이었으며, 유고의 공산당 지도자를 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최근 중국이 티베트 문제와 베이징올림픽 성화 봉송을 둘러싸고 일으킨 민족주의는 일종의 방어형 민족주의다. 중국 내 인권 침해와 관련한 외국의 비난에 직면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국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민족·애국주의를 이용해 민주와 자유라는 세계적 조류에 대항하고 있다. 일당독재의 생사가 달려 있는 문제이기에 투쟁은 매우 격렬하다.

    셋째, 과거의 민족주의 전달 방식은 신문, 잡지, 전단과 같은 평면적인 매체를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신민족주의는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등 최첨단 통신수단을 이용해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정보 전달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국면의 진행 속도와 흐름이 매우 빨라서 당국이 미처 손쓸 수조차 없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티베트인으로 변장한 공안

    근 60년 동안 중국의 민족주의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시시각각 기승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중국은 일당독재의 공산주의를 실행하는 국가다. 갈수록 많은 지식인이 자유, 민주, 인권과 같은 전세계 보편적 가치관들을 받아들여 중국의 인권침해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민족주의를 이용해 민주와 자유라는 세계적인 조류에 대항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민족주의는 ‘양날의 칼’과 같아서 서방세계를 해칠 뿐만 아니라 부메랑이 되어 중국 공산당을 해치는 무기가 될 것이다.

    민족주의도 표출돼야 하지만 민주세력도 민의(民意)를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의 교과서에서는 외세를 배척하는 폭력적인 노래들을 역사를 진보시키는 농민운동의 일환으로 칭송했으며, 열강 세력의 침략을 확대 해석하고 선진국들의 지원이나 선진 문물의 전파 등은 감추거나 과소평가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민족주의가 나타난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자산계급은 착취계급이다. 오늘날의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은 모두 자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며 이 계급이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교육도 한 원인이다. 중국의 교육체계는 민족주의의 형성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국의 교과서에는 계급 간 투쟁과 관련된 내용들이 풍부하게 실렸으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소련 일본 등을 일찍부터 제국주의 국가로 언급해왔다. 또 정부와 집권당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언론도 중요한 원인이다.

    민족주의자들은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중국인 중에는 자신이 민족주의자라는 걸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앞서 말한 ‘펀칭(憤靑)’ 또는 ‘라오펀칭(老憤靑)’들이다. 이들은 종종 어떤 사건 하나를 꼬투리로 크게 들고 일어나지만, 정작 그들은 당국에 의해 조작된 것이나 단편적인 사실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티베트 사건에서 당국은 일부 티베트인이 폭력을 휘두르고 부수고 방화하는 장면을 반복적으로 방송했다. 그렇지만 티베트인들이 어째서 이와 같은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들이 백주에 사력을 다해 부수고 방화하는 장면은 오랫동안 한 장소에서 계속 촬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카메라 각도조차 바뀌지 않은 채 말이다. 촬영기자는 현장을 촬영하면서 왜 공안을 불러 그들의 폭력행위를 막으려고 하지 않았을까.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떠오를 것이다. 중국 공안은 그렇게 많은 ‘폭도’를 체포했으면서 왜 카메라에 찍힌 폭도들은 잡아 가두지 않는 것일까. 너그럽게 그들을 용서해준 걸까, 아니면 정상적인 평화적 시위가 폭력시위로 변할 때까지 기다린 걸까.

    현장에서 카메라에 찍힌 ‘폭도’(티베트인 옷을 입고 칼을 든)는 그 후 해외 언론 보도를 통해 현지 파출소의 경찰이 변장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들통 났다. 이를 보도한 해외 언론매체가 거짓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중국 당국이 사건을 조작한 것일까. 사진을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면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자세히 조사해보지도 않고 ‘진상’을 발표한 걸까. 더욱 의심스러운 점은 티베트 사건이 발생한 후 외신기자들을 모두 티베트에서 쫓아냈다는 점이다. 두 달 가까이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막고 있는 것은 속임수가 들통 날까봐 두려워서는 아닐까.

    선진국 정치인들은 눈이 멀었다?

    현재 미국 의회와 독일 총리 및 의회, 그리고 프랑스 정계 인사 등 대다수 선진 민주 국가는 중국의 티베트 탄압을 비판하고 있다. 중국은 달라이 라마가 나라를 팔아먹고 있으며 폭동을 책동했다고 말하지만, 선진국의 정계 인사들은 달라이 라마를 만나고 싶어한다. 프랑스 파리 시정부는 달라이 라마에게 명예시민칭호를 부여했으며 달라이 라마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중국 당국과 국내 여론은 모두 달라이 라마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외국 정계 인사들이 눈이 먼 걸까, 아니면 중국 정부가 그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걸까. 이제 어느쪽이 옳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비록 미국 영국 등의 국가들도 잘못과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들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다. 자유로운 언론매체를 갖고 있으며 독립적인 사법기구와 야당의 견제를 통해 균형을 도모한다. 과거 우리는 미국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틀렸다. 과거 우리는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에 파병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했지만, 지금은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려 독재자를 축출하고 초보적인 민주주의 국가가 들어서게 했음을 알게 됐다.

    이와 비교해볼 때, 중국 공산당은 집권 후 6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을까. 1957년 55만명의 우파세력을 몰아내 22년 동안이나 사회 밑바닥에서 숨죽이고 살게 만들었으며, 10년간의 문화대혁명과 1958년 인민공사의 ‘대약진운동’ 등으로 수많은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지 않았는가.

    티베트 문제에서 중국 당국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티베트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존중하지 않은 점이다. 티베트 불교는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집권 이후 종교를 ‘정신적인 아편’으로 여기고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다. 지난 50년 동안 티베트의 승려와 사찰 수는 90%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또한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인들이 마음속 깊이 존경하는 인물로, 그들에게는 살아 있는 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다. 그렇지만 중국 공산당은 달라이 라마를 우습게 여기고 추하게 묘사하며, 심지어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의 사진을 모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고 있다. 또 티베트 지역에선 오늘날까지 직접적이고 독립적이며 공정한 선거가 실시된 적이 없으며, 권력기구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상명하달식 구조다.

    “외국인이 맞을 짓을 했겠지”

    중국인들은 60여 년 동안 줄곧 공산당의 교육을 받아왔다. 이 때문에 머릿속에는 늘 ‘집권당과 국가가 위대하고 영예로우며 옳다’는 생각과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다. 21세기는 장차 중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는 말을 믿으며, 중국은 영토가 넓고 자원이 풍부하고 5000년의 유구한 역사와 13억 인구를 갖고 있다는 점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하는 등 많은 중국인이 자신이 최고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

    누군가가 중국을 비판하거나 중국인이 모욕을 당하기라도 하면 사건의 진상과 이유는 묻지도 않은 채 펄쩍 뛰며 화부터 낸다. 중국 시위자들이 외국인들을 폭행했다는 보도에 대해서는 “외국인들이 맞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나 만약 중국인이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면 결사항전도 불사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도 일종의 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대만 작가 보양(柏陽)을 기념하는 글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과 인품이 본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양은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여기는 중국인의 태도는 결코 좋게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중국인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존중이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인품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나와 다른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다면 또 다른 고상한 품격, 즉 관용을 가져야 한다. 진심으로 존중하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라고 했다.

    중국인은 어째서 21세기가 중국의 세기가 돼야 한다고 여기는 걸까. 이는 중국 문화의 허황된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21세기, 아니 22세기가 되어도 중국은 세계를 이끄는 나라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중국의 영향력이 그만큼 크지 않고 자연과학의 기술도 세계를 선도할 만큼 앞서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수준과 문화적 역량도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사람이 보양의 ‘추악한 중국인’이라는 명저를 읽어보기 바란다.

    ‘펀칭’이 잘한 한 가지

    ‘펀칭’들이 잘한 점이 단 한 가지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인터넷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까르푸 앞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이와 같은 항의 집회는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갔으며, 일부 시위는 중국 공안의 허가를 받지도 않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당국의 정책 방향과 일치하기 때문에 당국이 불법 시위도 눈감아준 것이다. 시위자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불법 시위자들을 체포하지도 않았다.

    孫文廣

    1934년 출생

    산둥(山東)대 물리학과 졸업

    산둥대 물리학과·관리과학과 교수

    1964년 사회주의교육운동 중 비판받음, 1974년 반혁명 죄목으로 7년간 수감, 2007년 11월 지난(濟南)시 리청(歷城)구 인민대표대회 대표 선거에 출마했으나 학교와 당국의 방해로 당선되지 못함

    現 산둥대 퇴직교수, 저술 활동

    저서 : ‘옥중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에 보낸 편지’‘백년간 나라의 재앙’‘자유를 외치다’ 등


    그러나 막판에는 사태가 더 악화해 국가 이미지가 실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까르푸의 주주는 티베트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엄숙하게 “애국하는 가장 좋은 길은 자신의 맡은 바 본업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시위 참가자들이 체면을 지킬 수 있도록 봐준 것이다.

    펀칭들의 시위는 해외의 반중국 세력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당국에 의해 체면을 지키는 선에서 끝냄으로써 군중의 적극성도 보호했으니 당국으로서는 이보다 더 이상적인 마무리가 없을 것이다. 펀칭들의 시위는 그들이 가진 신성한 권리인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는 일반 민중이 시위 행위를 통해 민의를 표현하고자 하는데, 정부와 반대되는 의견들을 표현하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와 같은 시위 행위들은 정부에 의해 불법 집회로 간주되고, 때로는 구속되고 체포되어 불법 집회에 대한 책임을 추궁 당하기도 한다. 정부와 다른 정치적인 견해를 표현하기 위해서 중국의 지식인들은 각종 어려움에 맞서야 했다. 지난 10여 년간의 이런 노력으로 일부 지식인들은 해외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정치적인 견해를 밝힐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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