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선수 마음 훔친 심리전의 화신… 교주의 ‘강철 축구’는 계속된다

  • 김화성 동아일보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입력2008-07-31 19: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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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수 마음 훔친 심리전의 화신… 교주의 ‘강철 축구’는 계속된다
    도대체 히딩크는 어떤 사람인가. 축구도사인가 아니면 마법사인가. 그는 가는 곳마다 펑! 펑! 꽃을 잘도 피운다. 손만 대면 시든 꽃조차 언제 그랬냐는 듯, 눈부시게 화사해진다. 정말 신통방통하다. 어떤 사람은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눈물나는 노력을 쏟아 붓는다. 소쩍새가 피나게 울고, 무서리가 내리는 숱한 밤을 보낸다. 하지만 히딩크는 ‘어퍼컷 세리머니’ 몇 번이면 끝난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강으로 올려놓은 거야 그럴 수 있다 치자. 사실 축구팬들은 네덜란드가 월드컵에서 우승했다고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누가 감독을 하더라도 언제나 우승할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2 한일월드컵 한국의 4강 등극은 다르다. 한국은 이전까지 본선에서 단 한 번도 1승을 올리지 못했다. 5회 진출에 14전4무10패. 그런 팀을 하루아침에 세계 4강에 올려놓았다. 그뿐인가. 2006 독일월드컵에선 호주를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더니, “어~어~” 하는 사이에 호주축구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16강까지 끌고 갔다. 더구나 당시 히딩크는 네덜란드 프로팀 PSV에인트호벤 감독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2005년 7월부터 1년 동안 유럽과 호주를 분주히 오가며 두 팀을 지도했다. 보통 감독이라면 한 팀 지도하기도 힘들 텐데, 그는 “뭐 대수냐”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감독이라는 자리를 맘껏 즐겼다. 도대체 히딩크는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축구 변방 호주를 강팀으로 만들었을까?

    러시아라고 크게 다를 게 없다. 히딩크는 독일월드컵이 끝나자 이번엔 유럽축구의 변방 러시아를 맡았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아무리 히딩크라지만…”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예상은 또 빗나갔다. 그는 보란 듯이 유로 2008 예선에서 축구 종가 잉글랜드를 따돌리고 러시아를 본선 무대에 올려놓았다. 본선에서 지난 대회 우승팀 그리스, ‘바이킹 군단’ 스웨덴을 연파하더니 8강에서는 자신의 조국 ‘오렌지 군단’ 네덜란드마저 3-1로 꺾어버렸다.

    선수 마음 훔친 심리전의 화신… 교주의 ‘강철 축구’는 계속된다
    정말 감독 하나 바뀌었다고 축구팀 전체가 이렇게 180도 확 바뀔 수 있을까? 히딩크가 손만 대면 어떻게 하나같이 ‘마법의 팀’으로 변신할까? 축구팀에서 감독이 차지하는 비중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보통 축구에서 한 팀의 에너지는 다음과 같은 공식으로 표시된다. ‘T(팀 에너지)=11×χ(감독 역량) +α(팬, 언론, 축구협회 지원…)’. 즉 선수 11명 개개인의 힘은 감독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1보다 더 커져 20도 될 수 있고, 그 보다 작은 5도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엔 팬이나 언론 등의 지원도 힘이 된다. 하지만 결국 감독의 역량이 결정적 변수다.

    감독은 수준이 낮은 팀일수록 그 비중이 높아진다. 한국이나 호주 러시아 같은 축구 변방국가일수록 감독의 비중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브라질 스페인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포르투갈 잉글랜드 같은 축구 선진국은 상대적으로 감독의 비중이 낮아진다. 선수들의 기술이 이미 세계적 수준에 이른데다 개성까지 강하기 때문이다. 선수마다 자신만의 독특한 축구철학이 있고, 그만큼 감독의 말이 잘 먹히지 않는다. 한국이나 러시아 선수들이 히딩크의 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것과 좋은 비교가 된다.

    감독은 단기전이나 빅게임일수록 그 비중이 높아진다. 축구에서 FA컵 결승전이나 정규시리즈 우승을 다투는 빅게임일수록 감독의 역량이 승부를 좌우한다. 그래서 축구 명장은 올림픽이나 월드컵축구 본선 같은 큰 무대에서 나온다. 물론 정규리그 같은 장기시리즈 우승을 밥 먹듯이 하는 명장도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그렇다.

    정규리그에선 아무리 약한 팀이라도 보통 10번 경기하면 3번은 이긴다. 거꾸로 아무리 막강한 팀이라도 10번에 3번은 진다. ‘최고승률 7할에, 최저승률 3할’이 정규리그의 법칙이다. 팀 스포츠에서 장기시리즈는 감독 역량보다는 팀 전력이 좌우한다. 전력이 풍부해야 7할 승리를 이룰 수 있다. 아무리 뛰어난 감독이라도 전력이 약하면 10번에 3번 정도는 어떻게 이길 수 있겠지만, 시리즈 우승은 불가능하다.

    승리에 배고픈 교주이자 선생님

    그러나 단기전이나 빅게임은 다르다. 감독의 역량이 절대적이다. 2002 한일월드컵에서 히딩크 감독은 한국대표팀 전력의 99%를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선수 11명의 힘을 묶어 그 총합이 11보다 더 큰 15~20을 만들어냈다. 선수들이 각각의 능력을 150~200% 발휘하도록 만들었다. 히딩크가 질 수 있는 게임을 무승부로 만들고, 비길 수 있는 게임을 이기도록 만들었다는 얘기다.

    히딩크는 그것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었을까? 호주 축구대표팀 주장 마크 비두카(33)는 말한다.

    “히딩크 감독은 내가 그동안 겪어본 감독 가운데 최고였다. 감독은 선수 관리와 전술 등 두 가지 측면에서 축구팀을 이끄는데 히딩크는 전술은 물론 특히 선수 관리 측면에서 독보적이다. 난 히딩크 외엔 모든 선수가 팀을 위해 목숨을 버릴 정도로 충성하도록 만드는 감독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다. 나도 히딩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목숨을 바칠 수 있다.”

    히딩크는 선수들의 마음을 낚는 데 천재다. 그는 호주대표팀 선수들의 마음을 간단하게 훔쳤다. 그리고 모래알 같았던 천둥벌거숭이들을 하나로 묶어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뤄냈다. 그는 2002년 한국에서도 그랬고, 2008년 러시아에서도 그랬다. 그 타는 목마름으로 뜨거웠던 2002년 여름, 한국 선수들은 히딩크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할 정도로 그를 따랐다. 그는 ‘교주’였고 선수들은 ‘신도’였다. 그는 인기 있는 선생님이었고, 선수들은 그를 열렬히 따르는 학생들이었다.

    안드레이 아르샤빈(27·제니트)은 러시아의 박지성이라 할 수 있다. 그 역시 히딩크의 열렬한 신도임을 자처한다.

    “네덜란드인 감독 1명이 11명의 재능 있는 네덜란드 선수를 물리쳤다. 2년 전 히딩크 감독이 처음 왔을 때 많은 사람이 그를 질투했다. ‘너무 많은 돈을 받을뿐더러, 너무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다. 그는 우리를 믿어줬고, 그의 믿음 덕분에 우리는 좀 더 잘할 수 있게 됐다. 사실 난 유로 2008 본선에서 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퇴장을 당해 본선 2게임을 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본선무대까지 데려와준 히딩크 감독에게 진실로 감사한다. 나는 세계 최고의 감독과 함께해서 행복하다. 그의 팀 일원으로서 진정으로 즐겁다. 히딩크 감독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줬고 우리를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더 잘 뛸 수 있는 이유다.”

    고도의 심리전

    그렇다. 히딩크는 사람의 마음을 한눈에 꿰뚫어본다. 척 보면 그가 뭘 생각하는지 다 읽는다. 그리고 단숨에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아버린다. 결코 뜸을 들이지 않는다. 때로는 화려한 언어와 유머로, 때로는 따뜻한 스킨십이나 짓궂은 장난으로 상대의 마음을 사르르 녹게 한다. 선수들은 기꺼이 그의 포로가 된다. 즐겁게 신도가 되길 자청한다. 히딩크는 심리전의 도사다.

    히딩크는 2002 월드컵 당시 설기현에게 매일 경기에 앞서 ‘나는 잘생겼다. 나는 최고선수다’라고 거울을 보며 3번씩 외치게 했다. 또 한편으로는 코치진에게 ‘이천수가 만약 골을 넣더라도 일부러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렸다. 소심한 설기현과 자신감이 철철 넘치는 이천수의 심리를 손금 보듯 보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차두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2년 월드컵 때, 꿈에 그리던 16강 진출을 해내고 우리는 완전히 들떠 있었다. 막내이던 나랑 이천수는 물론이고 형들도 16강전 스코어 맞히기를 하면서 맘껏 떠들고 웃으면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히딩크 감독이 조용히 옆방으로 불렀다. 모두 밥숟가락을 놓고 쏴! 하는 분위기로 일어났다. 히딩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너희들한테 좀 풀어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러지 마라.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화를 낸 것도, 질책을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마 이때 히딩크가 화를 냈다면 분위기가 가라앉았을 게 분명하다. 감독의 질책 아닌 질책을 들은 우리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고, 이탈리아를 꺾고 8강으로 고(GO!) 했다.”

    선수 마음 훔친 심리전의 화신… 교주의 ‘강철 축구’는 계속된다

    2002년 한일월드컵 차두리와 함께(좌) 2008유로에서 네덜란드를 이긴 후.(중간) 2002월드컵 박지성과 함께.(우)

    한 선수만 박살내면…

    히딩크는 시범케이스 만드는 데 명수다. 표적은 어김없이 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타선수나 최고참 선수다. 그는 우선 팀을 맡으면, 그런 선수들을 한순간에 ‘바지저고리’로 만들어버린다. 심하다 할 정도로 무장해제시켜버린다. 거의 짓밟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에서도 미디어가 만든 스타들의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가장 싫어한다. 한마디로 하늘에 어찌 2개의 태양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직 팀에는 감독의 권위만 인정되어야 하며 그래야 팀이 잘 굴러갈 수 있다는 논리다.

    히딩크는 러시아에 가서도 어김없이 시범케이스를 찾아내 박살냈다. 세르게이 이그나세비치(39, 186cm 82kg)가 바로 그다. 이그나세비치는 러시아의 중앙수비수로 2002년 한국팀의 홍명보 역할을 하는 핵심 중 핵심이다. 그는 수비뿐만 아니라 강력한 중장거리 슛으로 상대 수비진을 흔든다. 상대 패스를 가로채면 한방의 역습 ‘킬 패스’로 공격의 시발점 역할을 한다. 그뿐인가. 그는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까지 수행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2007년 8월 대표소집 당시 지각을 했다는 이유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천하의 이그나세비치가 귀가조치를 당하는 것을 본 다른 선수들은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 후 재발탁된 이그나세비치는 히딩크의 완전한 포로가 되어 있었다.

    히딩크가 네덜란드 에인트호벤 감독 시절 브라질 스타 호마리우(42)는 훈련시간에 늘 정시가 돼야 나타났다. 다른 선수들은 보통 10분 전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오로지 호마리우만이 딱 정시에 맞춰 당연하다는 듯이 나타났다. 호마리우는 영악스럽게 히딩크의 시계에 자신의 시계를 초침까지 정확하게 맞춰놓은 것이다. 호마리우가 누구인가. 1988 서울올림픽에서 브라질대표로 득점왕(7골)을 차지하며 ‘샛별’로 떠오르고 있었다. 히딩크가 브라질까지 날아가 그를 모셔왔을 정도였으니 그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만했다.

    어느 날 오전 10시에 예정된 팀 미팅 시간에 히딩크는 일부러 자신의 시곗바늘을 1분 앞당겨놓았다. 당연히 호마리우는 팀 미팅에 1분 늦게 됐다. 그때 히딩크는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며 “호마리우, 자넨 미팅에 참가할 필요 없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호마리우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벌금 500달러에, 다음 경기는 벤치에 앉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히딩크는 그 후로도 사흘 동안 말도 걸지 않았다. 덩달아 다른 선수들까지 긴장감에 휩사였다.

    안정환과 히딩크

    히딩크의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그가 노린 것은 바로 팀의 긴장이었다. 사흘 후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와의 유럽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있었던 것이다. 히딩크는 챔피언스리그 경기 직전 팀 미팅에서 갑자기 호마리우를 띄우기 시작했다. 전술도 그를 중심으로 짰다. 에인트호벤은 초반에 한 골을 내줬지만 호마리우가 펄펄 날기 시작하더니 15분 동안에 3골을 넣어버렸다. 3-1 승리. 경기 후 히딩크는 그의 시계를 가리키며 호마리우에게 어깨를 으쓱했다. 호마리우는 환하게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2001년 히딩크가 한국에 부임했을 때 안정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대표팀 소집훈련 땐 커다란 외제 고급차를 몰고 나타났고, 소녀 팬들은 그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헤어스타일도 패션모델 뺨칠 만큼 멋졌다. 그는 누가 봐도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축구스타였다. 히딩크가 이걸 모를 리 없었다. 히딩크는 갑자기 그를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해버렸다. 팬은 물론 축구관계자나 언론에선 왜 그를 뺐느냐며 들끓었다. 하지만 히딩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선수는 모른다는 듯 무시해버렸다. 아예 한 술 더 떠 “그는 이탈리아 페루자팀에서 벤치 멤버에 불과하다. 그는 대단한 선수가 아니다”라고 소금까지 뿌렸다.

    하지만 히딩크는 암암리에 안정환의 매니저에게 ‘그는 여전히 선발될 여지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안정환 본인에게도 ‘열심히 하면 언제든 환영받을 것’이라며 분발을 촉구했다. 히딩크는 안정환이 월드컵에 꼭 출전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울러 ‘난 당연히 선발될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도 꿰뚫고 있었다.

    “난 안정환에게 그가 없어도 얼마든지 한국대표팀이 잘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호마리우나 안정환은 여러모로 비슷하다. 건드리면 반응한다. 난 그런 선수들을 좋아한다. 축구경기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승부가 갈린다. 그때 결정적 역할을 해주는 선수가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에드가 다비즈(35)는 ‘핏대’다. 성격이 성난 들소 같다. 체구는 작지만(170cm 68kg) 그보다 머리 하나쯤 더 있는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1999년 녹내장 수술로 플라스틱 고글을 쓰고 뛰는 유일한 네덜란드 선수이기도 하다.

    “난 다루기 힘든 선수가 좋다”

    1996년 그는 히딩크가 이끄는 네덜란드 대표팀의 미드필더였다. 하지만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욕을 퍼부어가며 히딩크를 맹비난했다. 히딩크는 즉각 그를 대표팀에서 빼버렸다. 그리고 그 후 다비즈에게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언론에서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어도 철저히 무시하는 반응을 보였다.

    선수 마음 훔친 심리전의 화신… 교주의 ‘강철 축구’는 계속된다

    2008유로 경기가 끝난 후 히딩크는 러시아 국민으로부터 폭발적 환대를 받았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 다가오자 다비즈가 주변 사람들에게 ‘대표팀에 복귀하고 싶다’고 슬슬 흘리기 시작했다. 사실 히딩크는 그가 필요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즉시 그가 있는 밀라노(AC밀란)로 날아갔다. 히딩크는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을 팀에 복귀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다비즈는 “난 반드시 선발로 뛰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조건을 제시한 것이다. 히딩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축구는 팀 경기인데 그 어느 선수든 특권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비즈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히딩크와 다비즈의 첫 번째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점점 프랑스월드컵이 턱밑까지 다가오자 다비즈가 또 신호를 보냈다. 이번엔 그가 암스테르담으로 날아왔다. 그만큼 몸이 달았다는 표시였다. 히딩크는 다비즈에게 팀 규율 12개항을 제시했다. 다비즈는 곧바로 그 조건에 동의했다. 다비즈는 대표팀에 복귀했지만 한동안 벤치에 앉아있어야 했다. 히딩크는 그의 태도를 지켜보며 출전 시기를 가늠하고 있었다. 다비즈는 묵묵히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결국 다비즈는 유고슬라비아와 맞붙은 16강전 1-1 상황에서 결승골을 넣었다. 골 세리머니를 하던 다비즈는 벤치로 달려와 히딩크와 얼싸안았다. “난 다비즈 같은 다루기 힘든 선수를 좋아한다. 네덜란드 선수들은 세계에서 가장 다루기 힘들다. 이제 갓 열일곱 풋내기들도 게임에서 제외되면 ‘왜 자신이 뛸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한다. 난 그런 배짱 있는 태도가 좋다.”

    홍명보를 뺀 사연

    천하의 홍명보(39)도 히딩크 감독 밑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히딩크는 2001년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 한국축구의 리더 격인 홍명보를 ‘몸이 안돼 있다’라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빼버렸다. 한마디로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를 제외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명보가 빠지자, 한국대표팀은 분위기가 살아났다. ‘젊은 피’들이 펄펄 날기 시작한 것이다. 송종국이 그 대표적인 예다. 당시 송종국은 이름 없는 후보 선수에 불과했다. 만약 홍명보가 있었다면 그는 영원히 벤치에 앉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송종국은 홍명보가 없는 사이 홍명보를 능가할 정도로 커버렸다. 이천수 최태욱도 마찬가지였다. 몇 달 동안에 팀의 수준이 부쩍 향상된 것이다.

    당시 아프신 고트비 비디오 분석관은 “2001년 한국이 홍콩 칼스버그컵에 출전할 당시와 1년이 지난 요즘 경기비디오를 분석해보면 전술이나 선수 운영 면에서 한국팀이 전혀 다른 팀이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김남일 박지성 등 미드필더들은 세계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밀리지 않는다. 히딩크 감독이 경기를 지배한다고 했는데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한국 축구팬들은 대표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 같다. 한국팀은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다. 이것은 경기와 선수들의 플레이를 분석하는 입장에서 하는 얘기다”라고 말했다.

    홍명보가 없는 동안 한국팀은 눈부시게 발전했다. 홍명보는 다시 히딩크의 부름을 받았지만, 정작 이젠 자신이 한결 높아진 팀 수준에 맞춰야 하는 입장이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꿰뚫고 있었던 히딩크는 역시 능수능란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홍명보도 그저 팀원의 일부일 뿐이다. 그도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경쟁해야 하며 잘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때론 “홍명보가 후배들과 선의의 경쟁을 통해 주전을 꿰차겠다고 말한 것을 알고 있다. 이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부상을 딛고 빠르게 정상 컨디션을 되찾은 데 이어 강한 정신력까지 보이고 있어 흐뭇하다”라며 어르기도 했다. 그러면서 홍명보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주장 완장을 김태영에게 줘버렸다. 홍명보는 말한다.

    스타선수를 휘어잡다

    “히딩크는 축구에 대해 정말 많이 알고 있다. 특히 선수들의 마음을 움직여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을 통해 선수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알고 있다. 보통 지도자들이 선수 잠재력과 투지를 끌어올리기 위해 윽박지르는 방법을 많이 쓰는데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동기부여를 하고 감독과 선수가 목표를 공유하게끔 만든다. 2002년 폴란드전을 하루 앞두고 히딩크는 선수를 하나씩 불러 ‘너는 세계 최상팀 선수들의 체력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으니 충분히 해낼 수 있다’며 등을 두드려줬다. 그로 인해 선수들은 그날 편안하게 잠잘 수 있었다. 그 정도로 경험과 지식이 많은 감독은 흔치 않다. 그의 최고 장점은 ‘전술과 조직력’이며 상대에 따라 맞춤형 선수를 발굴 육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히딩크는 모래알 선수들을 하나로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그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아무나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이다. 그는 우선 그 팀에서 가장 잘하는 선수를 적당한 명분을 붙여 잠시 뺀다. 그가 있는 한 다른 선수들은 그 스타선수에게 모든 것을 쉽게 양보해버리기 때문이다. 나머지 선수들은 자신들이 몇 번에 걸친 패스로 골을 넣는 것보다, 그 스타선수가 단번에 골을 넣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감독이 아무리 훈련할 때 팀플레이를 가르쳐봤자 막상 게임에 들어가면 선수들은 그 스타선수 한 명에게 의존하는 플레이를 펼친다. 그때까지 배운 것들을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결국 다른 선수들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기까지, 잠시 그 스타선수를 팀에서 제외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 스타선수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팀은 새로운 팀으로 바뀌어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이젠 그 스타선수가 새 팀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개인기술이 팀 기술로 한 차원 높아지는 것이다. 결국 뛰어난 선수가 팀을 떠나면 그 팀은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정상으로 되돌아온다. 나아가 그 팀은 처음보다 한 계단 더 높은 수준의 팀이 된다. 히딩크는 단언한다.

    “감독은 아무리 뛰어난 선수라도 그를 휘어잡을 수 있어야 한다. 어렵더라도 꼭 그렇게 해야 한다. 스타선수들은 팀에서 영향력이 강하다. 그 힘을 조종할 수 있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 감독이 그를 제어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면 팀이 정말 곤란해진다. ‘수동적 저항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감독은 선수들에게 동기유발을 할 수 없게 되고, 팀은 분열된다. 선수들의 의욕이 사라져버리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조직의 성공 여부는 리더와 구성원의 마음이 하나가 되느냐 아니면 따로 노느냐에 달려 있다. 그것은 가치와 목표의 공유에서 나온다. 리더가 구성원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기 위해선 우선 뜻이 맞아야 한다. 2002년 한국축구 대표팀의 목표는 ‘자나깨나 월드컵 16강’이었다. 선수 자신들도 그랬고 국민도 그랬다. 히딩크는 오자마자 “내가 한국축구의 해답은 아니지만 16강이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라며 선수들의 가슴에 슬슬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히딩크의 실패

    히딩크는 “팀의 목표는 선수단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 그들 앞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설명하고 완벽한 공감을 이뤄내야 한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목표를 제시하고 선수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알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목표, 즉 비전이 제시되면 그 다음에는 팀 빌딩(Team building)을 해야 한다. 팀 빌딩을 잘하면 그 리더는 50% 이상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히딩크의 팀 빌딩 방식은 뭘까?

    히딩크는 우선 잘나가는 팀을 맡지 않는다. 최고의 팀을 맡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 가능성을 보고, 도전할 만한 팀인지 아닌지를 따진다. 물론 히딩크도 네덜란드 대표팀이나 ‘지구방위대’로 불리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같은 팀을 맡은 적이 있다. 성적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일 때는 승부차기에 울었다. 유로 96 때는 프랑스와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4-5로 무너졌다. 98 프랑스월드컵 때는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1-1로 비긴 뒤, 역시 승부차기에서 2-4로 졌다.

    프랑스월드컵 직후 히딩크는 98~99시즌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했다. 마침 레알 마드리드엔 98 프랑스월드컵에서 6골로 득점왕을 차지한 크로아티아의 다보르 수케르(40)와 유고대표팀 출신의 미야토비치(39, 현 레알 마드리드 단장) 그리고 스페인 토종인 라울(31), 모리엔테스(32) 등이 있었다.

    히딩크는 당시 20대 초반인 라울과 모리엔티스를 중용했다. 그리고 그 뒤를 노련한 미야토비치로 하여금 받치게 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서른의 노쇠한 수케르는 거의 벤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히딩크는 젊은 선수들을 키워 팀을 장기적으로 튼튼한 팀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적이 문제였다. 라이벌 바르셀로나는 1위를 질주하고 있는데, 레알 마드리드는 2위 유지도 아슬아슬했다.

    언론에선 거액 연봉자이며 월드컵 득점왕 출신인 수케르를 벤치에 앉혀놓는다고 연일 비난을 퍼부어댔다. 결국 데포르티보와의 시즌 전반기 마지막 19라운드 경기에서 0-4로 대망신을 당했다. 그때부터 경질설이 나돌았다. 그리고 후반기 1999년 1월 바르셀로나와의 숙명의 일전에서 0-3으로 처참하게 무너졌다.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다. 6개월 단명감독(11승4무9패). 히딩크로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쓰라린 경험이었다. 그러나 히딩크가 뿌린 씨는 레알 마드리드의 기둥으로 자랐다. 라울과 모리엔테스, 카시야스(27)가 바로 그들이다. 히딩크는 레알 바티스 등 다른 스페인 프로팀에서 감독생활을 했지만 성적은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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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유로 스페인전에서 1:3으로 진 후 비를 맞으며 그라운드를 걷고 있는 히딩크.

    기술보단 헌신성, 에너지, 집념

    히딩크는 스페인 생활 이후 크게 달라졌다. 이후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우선 팀을 맡을 때 최고의 팀보다는 가능성 있는 ‘될성부른 팀’을 골랐다. 프리미어리그 명문 첼시나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 물망에 수없이 올랐지만 결코 마음을 주지 않았다. 대신 한국 호주 러시아 같은 축구 변방 팀을 택했다. 히딩크는 말한다.

    “내가 일부러 그런 팀들만 고른 게 아니다. 그들이 나를 고른 것이다. 나도 강력한 우승후보 팀을 맡고 싶다. 하지만 한국 호주 러시아가 그런 정도의 성적을 냈다는 것은 우승 못지않게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선택은 다른 사람 아닌 히딩크 자신이 한 것이다. 히딩크는 요즘 사석에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북한 팀을 한번 맡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러시아 대표팀 계약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까지다. 어쩌면 남아공월드컵이 끝난 후 히딩크가 북한 감독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히딩크는 네덜란드 대표팀 이후 승부차기에서도 지지 않았다. 그 비결은 상대 주전 골키퍼의 습성까지 파악하는 철저한 준비에 있었다. 2002 월드컵 한국-스페인 8강전 승부차기에서 5-3 승리. 2005년 4월 에인트호벤-리옹의 챔피언스리그 8강전 승부차기 4-2 승리. 2005년 11월 호주-우루과이 독일월드컵 플레이오프 2차전 승부차기 4-2 승리.

    히딩크는 어떤 선수를 좋아할까? 역시 젊고 가능성 있는 선수다.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자.

    “여기 2명의 선수가 있다. 한 명은 기술이 뛰어나고, 한명은 기술은 좀 모자라지만 헌신적이다. 난 단연코 헌신적인 선수를 뽑을 것이다. 나의 선발 기준은 ‘사력을 다해서 뛰는 헌신성’이다. 내가 진정 선수들에게 원하는 것은 넘치는 에너지와 집념이다. 한국과 러시아에서 대표팀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선수는 절대 뽑은 적이 없었다. 러시아도 처음에는 FIFA(국제축구연맹) 랭킹 30~34위에 불과했지만, 내가 책임감을 강조했고 이에 선수들이 잘 반응한 덕분에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국선수들은 팀을 위한 희생정신이 투철하다. 러시아에서도 대표선수들을 선발할 때 이러한 부분을 우선적으로 고려해 팀을 꾸렸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는 고종수와 이동국을 버렸다. 두 선수는 한국의 최고 테크니션이었는데도 그의 선택은 냉정했다. 그는 말했다.

    “고종수는 기술은 타고났다. 하지만 현대축구에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히딩크는 러시아팀을 맡자마자 노장 선수들을 대거 퇴출시켰다. 그리고 파블류첸코(27), 아르샤빈(27) 같은 중견 선수들과 비스트로프(24), 빌랴레트디노프(23), 아킨페에프(22) 등 젊은 피를 대거 수혈했다. 평균 나이 26.16세. 유로2008 참가 16개 팀 중 가장 젊은 팀이었다. 2002 월드컵 당시 노장이었던 황선홍(41)은 회고한다.

    “그 때 난 처음으로 주전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나라고 히딩크가 선발을 보장해줄 리 없었다. 히딩크는 선수단을 자유자재로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는 정말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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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SV에인트호벤 주장 선수 시절의 히딩크.

    똥볼을 차도 자신 있게

    젊음의 특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번 상승세를 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겁 없이 돌진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세상에 무서울 게 무언가? 하지만 새파랗게 젊다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자신감이 철철 넘쳐야 한다. 주눅 들면 한순간에 풍선 바람 빠지듯 피그르 사그라진다.

    히딩크는 바람 넣는 데 천재다. 히딩크는 한국 선수들에게 “똥볼을 차도 좋으니 제발 소심하게 슈팅을 자꾸 미루지 말라”고 했다. 겁내지 말고 너희들 생각나는 대로 마음껏 한번 해보라고 자꾸 불을 땠다. 히딩크는 말한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팀의 실수는 100% 상대의 골로 연결되는 반면, 한국팀은 왜 상대의 실수를 골로 연결시키지 못하는가? 한국선수들은 기술적으로 유럽선수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창조적이지 못하다. 특히 젊은 선수들은 선배들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란다. 스스로 상상력을 맘껏 발휘해 플레이를 해나가야 할 나이에, 위를 바라보고 있다니 안될 말이다.”

    “한국선수들은 기술이 좋다. 하나같이 양발을 자유자재로 쓴다. 유럽선수들 중에서 양발을 한국선수처럼 자유자재로 쓰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한국선수들은 약하다고들 하는데 난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문제일 뿐이다.”

    “유럽선수들은 실력이 뛰어나 자기 포지션에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생각과 맞지 않을 때는 강하게 불만을 표시한다. 개성이 너무 강해 도리어 팀워크를 다지는 데 해가 될 수 있다. 한국선수들은 수동적이긴 하지만, 그 뜨거운 열정과 성실성은 세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공격해야 이긴다

    히딩크는 절대 남 앞에서 선수를 비난하지 않는다.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치는 것은 팀 안에서만 한다. 그것이 감독과 선수의 신의라고 생각한다. 언론의 인터뷰에서도 결코 특정선수를 톡 꼬집어 칭찬하거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는 늘 팀 전체로만 이야기한다. 가령 골을 먹었을 땐 ‘최전방 공격수부터 수비가 안 됐고, 이로 인해 미드필드에서 밸런스가 깨졌다. 결국 수비진이 막아봤지만 어쩔 수 없이 골을 먹었다’는 식이다. 반대로 골을 넣었을 때는 ‘수비진에서의 첫 번째 패스가 잘됐고, 이에 상대가 당황했다. 마침 미드필더들이 공간을 확보해줬고, 이에 공격진이 쉽게 골을 넣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개인에 대한 칭찬이나 꾸지람은 없다. 러시아대표팀 훈련과정은 모든 게 한국팀을 맡았을 때와 똑같았다. “(러시아 대표팀을 유로 2008 4강에 올린 것은) 6년 전 한국을 맡았을 때와 비슷하다. 젊고 새로운 선수들을 데리고 시작했다. 한국을 이끌 때처럼 열심히 뛰었고 선수들을 믿었다. 우선 젊은 선수들이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해야 한다. 선수들이 실수를 했을 때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러시아는 한국과 닮은꼴인 벌떼 축구다. 강한 체력으로 끊임없이 압박한다. 볼을 빼앗겼을 땐 최전방 공격수부터 수비하고, 볼을 소유했을 땐 전원이 유기적으로 공격했다. 체력 강화프로그램도 같다. ‘체력은 곧 실력’이라며 끊임없이 선수들을 다그쳤다. 개인별 체력강화 프로그램에 따라 ‘강철 인간’을 만들었다. 결국 히딩크의 전략은 그대로 적중했다. 유로 2008 러시아-네덜란드 8강 연장전에서 체력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밑바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히딩크는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도 결코 수비를 강화하지 않는다. 스코어를 지키려고 공격수를 빼고 수비수를 투입한다는 것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건 마치 상대팀에게 ‘나를 공격해주십사’하고 간청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왜 좋은 전술을 바꿔 죽을 꾀를 내는가? 우리 공격수가 빠지면 상대는 수비 걱정을 하지 않고 마음놓고 공격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상대로부터 공격받고 싶지 않으면 그만큼 더 공격을 해야 한다는 논리다.

    유로2008 러시아-네덜란드 전에서도 히딩크는 마찬가지 작전을 썼다. 1-0으로 앞서다 후반 41분 동점골을 내줬지만 러시아는 교체멤버 3명을 모두 공격수로 바꿨다. 2-1로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격수를 투입했다. 그만큼 체력적으로 러시아 선수들이 강하다는 얘기다. 러시아는 스페인과의 4강전에서도 뛴 거리가 총 109.37km(스페인 106.58km)나 됐다. 평균스피드는 시속 6.58km(스페인 시속 6.50km). 그만큼 러시아선수들이 빠르게 많이 뛰었다는 얘기다. 홍명보 올림픽팀 코치는 “유로2008 러시아-네덜란드 8강전에서 러시아 선수들은 우선 체력으로 네덜란드를 압도했다. 연장전에 가면 집중력이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그런 것을 강한 체력으로 커버했다. 2002 한국팀과 너무도 흡사했다”고 분석한다.

    언어의 달인

    히딩크는 영어 스페인어 독일어 네덜란드어를 번갈아 구사하면서 인터뷰에 응한다. 각국 기자들을 다루는 데도 도가 텄다. 그는 네덜란드 벨기에 시민권에다가 한국 명예시민권을 가지고 있다. 러시아에서도 시민권을 줘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그는 세계시민이다. 이제 그는 이룰 것은 다 이룬 것으로 보인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예도 그만하면 세계 어느 누구보다 높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도 계속 도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난 아직 힘이 남아 있고, 사람들이 날 ‘고약하고 심술궂은 노인네’로만 여기지 않는다면 계속할 것이다. 난 여전히 배고프다.”

    역시 말을 잘한다. 유로2008 네덜란드와의 8강전에서 “난 조국의 반역자가 되고 싶다(I hope to be a big traitor). 체력적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한 팀을 만나게 돼, 나도 지옥만큼 두렵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면 물러설수록 두려움은 커진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공격뿐이다”라고 너스레를 떤 것도 압권이다.

    그는 결국 자신의 말대로 조국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후 ‘반역자’의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조국에선 그를 별로 반역자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열정과 끝없는 도전 정신에 토를 달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리더십 비밀은 ‘11명 선수 부분의 합보다 더 많은 힘을 이끌어내는 데’ 있다. 그의 용병술은 러시아선수들 각자의 합보다 강한 팀으로 만들어냈다.

    도대체 히딩크 마법의 비밀은 뭘까? 우리는 차두리의 말을 통해 약간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2002년 히딩크는 나를 경기장에 내보낼 때마다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viel spass’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재미있게 해봐’란 뜻의 독일어다. 경기를 재미있게 하라고? 감독의 이런 주문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귀에 와 닿는 히딩크의 입김은 나만 특별히 사랑하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그가 우리를 다스린 무기는 솔선수범 모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선수들을 언제 조이고 언제 풀어줘야 하는지를 너무나 잘 아는 ‘절묘한 감각’이었다.”

    히딩크가 하면 마법이 된다

    프로축구 성남 김학범 감독도 “히딩크의 강점은 선수들의 기량을 최고로 이끌어내는 데 있다”는 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홍명보 올림픽팀 코치도 “히딩크는 모든 것이 머릿속에 있다. 그때그때 강조하는 포인트가 다르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허정무 월드컵팀 감독도 “그는 게임을 읽는 시야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측면에서도 배울 점이 많은 감독이다. 경기장에서 선수 독려 방법, 심리 파악, 전술 대처 등도 탁월하다”고 말한다.

    누구나 히딩크 리더십의 핵심을 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능가하지 못한다. 따라 할 수는 있지만, 결코 그만큼의 효과는 내지 못한다. 보이지만 결코 보이지 않는 리더십. 똑같은 것도 히딩크가 하면 마법이 되지만, 다른 사람이 하면 그저 평범한 리더십이 돼버린다. 선수들은 다 알면서도 기꺼이 그의 포로가 된다. 도대체 그의 마법은 언제까지 효력을 발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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