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8월호

러시아, “한국에 적개심 생겼다” 외교문서 통해 격분 표출

신동아 4월호 ‘검찰·국정원의 러 외교관 표적 수사’ 보도 후

  • 허만섭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mshue@donga.com

    입력2008-08-04 18: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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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한국에 적개심  생겼다”  외교문서  통해  격분 표출
    ‘신동아’ 2008년 4월호는 “검찰·국정원의 ‘러 외교관 표적수사’가 우주인 고산 퇴출 불렀다”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보도를 통해 검찰·국정원이 주한 러시아대사관 참사관과 러시아 대학총장에 대해 스파이 활동, 금품 수수, 학위 범죄 알선 등의 비리 혐의를 두고 내사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법원에 제출된 수사기록에 따르면 검찰은 참사관과 대학총장을 끼워 넣은 범죄조직도까지 작성했다. 이후 러시아 정부는 한국 외교통상부에 보낸 문서에서 “적개심, 암운, 당혹감…” 등의 표현으로 분노를 표출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의 수사에 대해 부실 수사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무리한 수사로 한·러 외교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비슷한 시기, 러시아 정부는 우주인 고산 퇴출, 한국인 3명 추방에 이어 한국 외교관 4명을 추방했다. ‘신동아’ 4월호 보도로 밝혀진 사실의 요지를 먼저 살펴보자.

    “주재국 범죄에 가담한 자임”

    “검찰은 2006년 3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극동국립예술아카데미 자슬라브스키 총장과 공모하여 국내 대학교수와 음대 졸업생 120여 명에게 25억원을 받고 가짜 석·박사 학위를 발급한 혐의(업무방해, 위계에 의한 공무집행방해, 고등교육법 위반)로 도모(여·53)씨를 구속하고 자슬라브스키 총장을 지명 수배했다. 또한 도씨를 통해 가짜 학위를 받은 21명을 불구속 또는 약식 기소했다. 검찰은 국가정보원의 내사를 바탕으로 한 이 사건 수사기록에서 주한 러시아대사관의 미나예프 당시 참사관에 대해 이 사건의 공범으로서 스파이 활동, 금품 수수, 비자 알선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러시아, “한국에 적개심  생겼다”  외교문서  통해  격분 표출

    검찰수사보고서

    그러나 러시아 검찰은 ‘극동국립예술아카데미가 한국 피의자들에게 수여한 학위는 러시아 관련법을 준수한 정상적인 학위이며 대학총장은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수사 결과를 서울중앙지법에 통보했다. 관련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미나예프 참사관에 대한 혐의는 근거가 없다. 미나예프 참사관은 자신이 검찰의 내사를 받고 있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한국을 떠나기 전 지인을 만나 ‘누명을 쓰게 되어 마음이 무겁다. 한국이 러시아 외교관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며 눈시울을 붉혔다. 검찰은 1심에서 패소했다.”

    러시아 정부를 가장 자극한 것은 ‘신동아’에 보도된 검찰의 사건체계도와 내사 기록이었다. 검찰은 사건체계도(사진)에서 범죄 혐의자 그룹에 미나예프 참사관과 자슬라브스키 총장을 포함시켰다. 또한 검찰은 미나예프 참사관 부분을 별도로 정리한 ‘대상자별 혐의내용 수사보고서’(사진)에서 다음과 같이 적시했다.

    러시아, “한국에 적개심  생겼다”  외교문서  통해  격분 표출

    미나예프 러시아 참사관과 자슬라브스키 러시아 국립대 총장을 가짜학위 유통 혐의자들의 범죄 조직도에 포함시킨 검찰의 ‘사건 체계도’.

    “미나예프 참사관은 활발한 대한(對韓) 정보활동을 자행 중인 자로…도OO으로부터 석·박사 학위 매매알선 사업과 신속한 비자발급을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양주와 액수 미상의 금품을 수수한 후 이를 응낙하고…재차 도OO을 접촉, 러 대학 학위매매 사업 관련 지원약속에 대한 대가로 오찬과 양주 등 선물을 제공받은 혐의가 있는 등 내국인과 연계해 주재국 범죄행위에 가담, 비엔나 협약을 위반한 혐의가 있는 자임.”

    “한국에 암운 감돌게 했다”

    검찰과 국정원이 러시아 외교관과 대학총장을 범죄자 취급하며 은밀히 내사해온 점이 ‘신동아’ 보도를 통해 이처럼 구체적으로 알려지자 러시아 정부는 격분했다. 검찰이 외교적으로 민감한 내사 기록을 법원에 제출한 것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도 나왔다. 미나예프 참사관은 정작 검찰 기소 대상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의 혐의 기록은 재판과는 무관한 사안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검찰-국정원의 러시아 외교관 내사 문제와 관련해 지난 4월15일 외교통상부에 영문(英文)으로 된 항의 공한(No. 82)을 보냈다. ‘신동아’는 주한 러시아대사관 명의로 된 이 공한을 전문 번역가에게 의뢰해 번역했다.

    공한은 “‘신동아’ 기사에서 밝힌 대한민국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내사 내용에 따르면 2002년부터 2006년 사이 미나예프 참사관이 대한(對韓) 기밀정보를 모았으며 러시아 음악대학의 허위 학위를 발급했다는 범죄그룹에 참여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허위 사실이 미나예프 참사관에게 윤리적인 일격과 비방을 가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더욱이 한국 국민들이 주한 러시아대사관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게 합니다. 또한 이런 허위 사실은 러시아 정부의 한국에 대한 정책에 암운(shadow)을 감돌게 했습니다. 이런 악의적 발표로 인해 러시아와 한국 관계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는 이면에 적개심(resentment)과 당혹감(bewilderment)을 키우게 했습니다”라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는 이 공한에서 검찰과 국정원의 미나예프 참사관 내사 내용이 허위라고 규정했으며 ‘일격’ ‘비방’ ‘악의’ 등의 표현을 통해 극도의 반감을 나타냈다. 러시아 정부는 “한국에 대한 정책에 암운을 감돌게 했다”는 위협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한·러 관계를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는 이면에 적개심과 당혹감을 키우게 했다”는 대목은 러시아 정부가 이 사건과 관련해 한국 측에 대해 느낀 감정을 여과 없이 직설적으로 표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 공한은 “대한민국 기관으로 하여금 사실의 모든 정황을 명백하게 하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이 문제에 관련해 한국 측의 행동과 조사 결과에 대해 차후 확실한 정보를 제공받기를 기대합니다”라고 했다. 검찰 수사가 잘못됐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라는 의미다.

    늘 켜져 있는 적신호

    러시아 정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이와 관련해 “최근 러시아 주재 한국 외교관들이 불명확한 이유로 추방되는 등 러시아와 관련된 한국의 국익이 손상받고 있다. 요즘엔 늘 적신호가 켜져 있는 모양새다. 러시아 외교관에 대한 무리한 수사로 인해 촉발된 한·러 관계 내면의 불필요한 마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했다. 검찰 수사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당사자인 미나예프 참사관은 현재 러시아 외교부에서 한국 정책의 실무를 총괄하는 한국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정보수집 활동을 해온 한국 정보요원(외교관 신분) 4명이 지난 6월 말까지 특별한 사유가 알려지지 않은 채 러시아 정부에 의해 강제 출국됐다. 이외에도 최근 들어 한·러 관계가 삐걱거리는 조짐은 한둘이 아니다.

    1월 20~25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특사로 러시아를 방문한 이재오 한나라당 의원은 미국, 중국, 일본 등 다른 주요 3개국으로 간 당선자 특사와는 달리 유일하게 국가수반(푸틴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3월7일엔 러시아에 체류 중이던 한국인 3명이 뚜렷한 잘못이 없음에도 강제출국됐다. 3월10일 한국 최초 우주인으로 선발돼 러시아에서 교육받던 고산씨가 러시아 연방우주청에 의해 이소연씨로 전격 교체되는 일이 발생했다. 이와 관련, 고산씨는 이소연씨로 교체되는 과정에 러시아 정보 당국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5월19일 한 인터뷰에서 “러시아 연방 보안국이 문제를 삼자 가가린센터 측이 갑작스럽게 강경한 태도로 교체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미국, 일본, 중국과 차례로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주변 4개국 중 유일하게 러시아와는 정상회담 일정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정면으로 러시아 요구 묵살”

    한 러시아 소식통은 “러시아 외교관이라도 실제로 범죄에 연루됐다면 주권국으로서 그에게 응분의 처분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미나예프 참사관 건의 경우 검찰 수사 전체가 불신받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검찰은 국정원 조사를 근거로 미나예프 참사관을 범죄조직도에 포함시키고 수사 보고서에 그의 혐의사실을 열거했으나 실제 기소 과정에선 이를 입증하지 못했다. “무슨 목적에서인지는 모르나 표적 내사를 했거나 내사 내용이 사실과 다른 엉터리였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피고인 도모씨는 “검찰은 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꼭 미나예프를 잡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나예프 참사관에겐 1만5000원짜리 보드카 한 병 준 게 전부다. 그는 학위 수여 문제에 전혀 관여한 바 없다”고 말했다. 한 피고인 측 인사는 “국정원 측에 미나예프 참사관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도 지금은 검찰과 국정원이 벌인 미나예프 수사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검찰이 지명수배한 자슬라브스키 총장 등 이 사건의 모든 피고인은 1심, 2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외교적 후폭풍 위험이 큰 사안임에도 검찰이 무리하게 수사한 결과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러시아 검찰이 “극동국립예술아카데미가 한국 피의자들에게 내준 학위는 러시아 국내법으로 합법”이라는 결론을 통보했고, 법원도 러시아 정부 측의 이 같은 의견을 존중해 무죄 판결을 내렸음에도 검찰은 “러시아 정부도 믿을 수 없다”면서 이 사건을 2심 법원에까지 끌고 갔다가 다시 패소했다. 1심 판결 직후 러시아 정부가 한국 검찰의 수사 내용을 격렬하게 성토하는 항의 공문까지 보낸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정부 차원의 통합적 국정 운영의 묘가 아쉽다는 지적도 있다.

    한 러시아 소식통은 “에너지, 식량,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선 러시아와의 협력이 긴요하다. 그런데 객관적 근거도 없이 외교관을 섣불리 건드린 형사사건 하나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고 있다. ‘실용 외교’라는 게 국익을 최우선시하는 것 아닌가. 정부가 ‘실용 외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검찰은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러시아 외교관과 대학총장을 범죄(혐의)자로 규정하고 러시아 대학을 학위장사나 하는 불법기관으로 보았으며, 러시아 검찰도 불신한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이 계속 진행되는 한 러시아 정부가 한국 정부에 대한 앙금을 씻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일부 러시아 전문가의 견해다.

    러시아, “한국에 적개심  생겼다”  외교문서  통해  격분 표출

    주한 러시아 대사관이 외교통상부에 보낸 공한(왼쪽). 신동아 4월호 표지(맨 오른쪽)

    특히 검찰의 대법원 항고에 대해 외교가 일각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자국 외교관의 누명을 풀어달라는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한국 정부가 정면으로 묵살하는 모양새다. 미나예프 참사관의 혐의에 대한 진상조사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에 대해서 검찰은 묵묵부답”이라는 것이다.

    검찰의 ‘자동 항고’ 관행

    피고인 측 정강준 변호사는 검찰의 ‘자동 항고’ 관행을 꼬집었다. 다음은 정 변호사의 말이다.

    “검찰은 2심에서 패소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동적으로 대법원에 항고하는 경향이 있다. 인사 문제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피고인이 무죄로 확정 판결을 받으면 사건을 맡았던 검사는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는데 무죄를 받은 피고인의 수가 많을수록 불이익도 커지는 것으로 안다. 이 사건의 경우 20여 명의 피고인이 1, 2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검사는 독립된 기관이어서 위에서 특별한 지시가 내려오지 않는 한 자신의 판단대로 결정한다. 이 재판의 경우 담당 검사는 여전히 유죄라고 믿고 있는 것 같더라. 국익을 생각한다면 이 재판은 즉시 중단돼야 한다. 이 사건을 끌고 갈 동력은 사실상 상실됐다. 해당국인 러시아 정부가 가짜 학위가 아니라고 하는데 한국 검찰이 가짜 학위라며 왈가왈부하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

    러시아, “한국에 적개심  생겼다”  외교문서  통해  격분 표출

    2006년 당시 검찰의 러시아 가짜 학위 사건 수사발표를 대서 특필한 언론보도.

    한편 러시아대사관이 보낸 공한은 “‘신동아’ 기사의 발표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책임을 추궁해달라”고 외교통상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사실 여부를 떠나 검찰이 자국 외교관의 비리 혐의를 내사한 사실이 실명으로 보도된 것에 대한 불쾌함으로 보인다. 외교통상부 측은 “러시아 측에 ‘한국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며 정부는 언론 보도에 관여할 수 없다’는 뜻을 구두로 전했다”고 ‘신동아’에 밝혀왔다.

    ‘신동아’는 독자가 한·러 외교의 막후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하기 위해선 피(被) 내사 외교관의 직위를 공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으며, 러시아 측 인사의 인권 보호에 노력했다. 실제로 4월호에서 검찰과 국정원의 수사 내용을 먼저 소개한 뒤 이어 상당수의 사건 관계자 증언 및 사건 자료를 제시하면서 수사 내용과는 달리 해당 참사관은 무고하며 대학총장도 러시아 당국의 수사와 한국 법원 판결을 통해 무죄로 결론나고 있다는 점을 6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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