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슬로베니아 피란

아드리아에 온몸을 맡기다

  • 사진/글·최상운(여행작가) goodluckchoi@naver.com

    입력2008-08-30 23:5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슬로베니아 피란

    전형적인 휴양지 피란에서는 길거리에서도 수영복 차림의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탈리아 북쪽의 국경도시 트리에스테를 떠나 슬로베니아로 가는 버스 안에서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차는 지중해 속의 작은 바다 아드리아해를 따라 내려가고 있다. 아드리아의 바다는 깊이 때문인지 조금 검푸르게 보인다.

    슬로베니아 피란

    바닷가 방파제 앞 카페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수다 속에 사라진 국경

    차 안에는 여행객보다 슬로베니아 할머니가 더 많다. 이들은 하나같이 바구니며 보자기를 들고 있다. 무슨 용도인지 궁금했는데 나중에 이들이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에 내릴 때 정류장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을 보고서야 알게 됐다. 이들은 국경 넘어 이탈리아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국경선이 이렇게 물렁해도 되는 건가. EU에 속한 나라들끼리 국경을 개방한 것은 많이 봐왔지만 할머니들이 장을 보러 국경을 넘나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국경에 대한 경직된 생각을 가진 나 같은 이방인에게 이런 광경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하다. 슬로베니아 할머니들의 수다 속에 이탈리아-슬로베니아의 국경은 통쾌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슬로베니아 피란

    방파제에서 아이들이 다이빙과 수영을 즐기고 있다.

    창밖으로 슬로베니아의 풍경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여행을 떠나오기 전 막연히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전원 풍경과 집들에서 유럽의 여느 선진국 못지않은 부유함과 여유가 묻어난다. 옛 유고연방을 구성했던 나라들 중 가장 잘사는 나라였다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온다. 나중에 이 나라의 국민소득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의 짧은 지식이나 선입관이 실제와는 얼마나 다른지, 여행은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남프랑스 느낌의 피란항

    남쪽으로 더 내려가 목적지인 피란(Piran)이 가까워지니 아드리아의 해변 휴양지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휴양지의 분위기 또한 고급스럽다. 불과 10여 년 전에 유고 내전이 있었지만 슬로베니아는 겨우 10여 일의 짧은 전쟁을 치르고 독립을 했다.

    슬로베니아 피란

    피란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타르티니의 동상이 있는 중앙광장.



    나중에 발칸반도 국가 중 최초로 EU에 가입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일원이 됐다. 그러니 슬로베니아에서 살벌한 유고 내전의 기억을 끌어낸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다. 하기야 이제는 예전 부족 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벌어지던 아프리카에서도 사파리용 지프가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세상이다. 여행은 이제 산업이 됐고, 최소한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편하고 안전하게 활보할 수 있다. 가끔 그 테두리를 벗어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신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슬로베니아 피란

    1 피란 항구의 풍경은 언뜻 남프랑스의 어느 작은 항구를 떠올리게 한다. 2 큰 바위를 쌓아놓은 방파제에서 일광욕을 하는 사람들과 해변 풍경. 3 아드리아 해의 석양을 마주 보며 낚시를 하는 사람들과 바다로 나가는 모터보트.

    피란에 도착하니 멀리 항구가 보인다. 오래된 건물과 요트가 어울려 흡사 남프랑스의 어느 작은 항구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든다. 짙푸른 구름이 내려앉은 피란항은 높게 솟은 베네치안 고딕 양식의 탑, 붉은 지붕의 집들과 어울려 멋진 그림이 된다. 항구를 따라 위쪽으로 걸어가보니 해변을 따라 긴 방파제가 나오는데, 마치 다이빙대처럼 바다를 향해 길게 돌출된 부분이 줄지어 있다.

    거기서 아이들이 방파제에 설치된 손잡이를 잡고 바다에 들어가거나 다이빙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해수욕을 꼭 모래사장이 있는 바다에서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굳이 모래찜질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렇게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해수욕을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사는 환경이 다르면 놀이의 모습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마음조차 갖지 못한다면 생각의 폭이 얼마나 좁아질까.

    슬로베니아 피란

    해수욕을 즐기고 난 아이들이 방파제 앞 레스토랑에서 카드게임을 하고 있다.(좌) 바다가 가까운 집에서는 밖에 의자를 내어놓고 선탠을 하는 광경도 보인다.(우)

    유쾌한 타르티니 광장

    방파제에 길게 간이침대를 펴놓고 누워 일광욕을 하거나 해변의 바위에 등을 기대고 쉬는 사람 등 각자의 방식대로 맘껏 바다와 태양을 즐기고 있다.

    해변을 떠나 피란 중심부에 있는 항구에 오니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린다. 바로 등대 근처에서 나는 소리인데,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서넛이 작은 모터보트를 방파제에 묶어놓고 빠른 댄스곡을 따라 부르는 중이다. 약간 웃기는 건 그 노래의 후렴이다. 계속 “삼! 삼! 삼!”이라고 외치는 게 재미있어서 다가가서 말을 걸어보았다. 그리고 ‘삼’은 한국어로는 숫자인 ‘3’이나 산삼, 인삼, 홍삼을 말하는데 혹시 너희들 지금 해삼이라도 발견했느냐고 물어보니 재미있다면서 크게 웃는다.

    등대가 있는 방파제에 앉아 석양을 천천히 감상한 후에 마을의 중앙에 있는 타르티니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 고장 출신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자인 주세페 타르티니의 동상이 있는 광장에는 레스토랑과 카페가 여럿 있다. 적당한 가격에 안락한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점점 어두워지는 광장을 내다보니 멋진 할아버지 한 분이 보인다. 헬멧 사이로 흰 수염이 덥수룩한 분이 완벽한 인라인 스케이트 복장에 반짝이는 야광 액세서리까지 갖추고 놀라운 스케이트 솜씨를 보여준다. 혹시 전직 피겨 스케이트 선수가 아닐까 궁금할 정도다. 할아버지의 묘기에 아이들이 요란하게 환호를 보내면 더 고난도의 연기를 뽐낸다. 어린아이 같은 할아버지와 묘기에 아낌없이 갈채를 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쾌해 보이고 여유가 느껴진다. 이제 기다리던 식사가 나왔다. 당신에게 보내는 피란에서의 편지도 여기서 끝마치려 한다. 슬로베니아의 상큼한 백포도주 한 잔을 당신에게 보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