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이타적 인간의 출현

인간의 착한 본능 설명하는 이론들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장 khmzip@donga.com

    입력2008-08-31 0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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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타적 인간의 출현

    ‘이타적 인간의 출현’ : 최정규 지음, 뿌리와이파리, 344쪽, 1만2800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는 제목에 배트맨이 들어가지 않은 최초의 배트맨 시리즈라고 한다. 이 최신판 배트맨 영화에는 악(惡)이야말로 인간 본성임을 입증하며 즐거워하는 살인마 조커가 등장해 고담 시민들을 체스 말처럼 갖고 놀며 배트맨을 괴롭힌다. 조커는 고담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이 탄 배와 죄수들을 호송하는 배에 각각 서로의 배를 폭파시킬 수 있는 기폭장치를 넣어두고 자정까지 상대방의 배를 먼저 폭파시키는 쪽을 살려주겠다고 협박한다.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정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이런 상황을 경제학에선 ‘죄수의 딜레마’라고 한다. 두 명의 용의자가 체포돼 각각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있다. 만약 두 사람이 모두 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하면 이들은 기소되어 5년형이 선고될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끝까지 범죄 사실을 부인하면 경찰은 두 사람을 이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할 수 없다. 이들이 이전에 저지른 사소한 범죄 사실을 들춰내 기소한다 해도 형량은 1년에 불과하다. 만약 한 사람이 자백을 하고 다른 사람은 끝까지 범죄 사실을 부인하면, 자백한 사람은 풀려나고 부인한 사람은 범죄 사실을 기초로 5년형에 위증혐의까지 덧씌워 2년형이 추가 될수 있다. 이 경우 두 용의자는 어떻게 행동할까?

    이때 용의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가장 유리할지 생각해보자. 두 사람이 일제히 혐의사실을 부인하고 1년 정도 형을 받는 것이 가장 유리한 선택이지만 문제는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혐의 사실을 부인했는데 상대가 자백하면 나는 위증죄까지 포함해 7년형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상대방이 부인할 거라는 예측 아래 자백하는 것이 내게 유리하다. 결국 이런 계산을 한 두 용의자가 모두 자백하고 똑같이 5년형을 받는다. 이처럼 실제로 가장 유리한 선택(양쪽 모두 부인)을 두고도 양쪽 모두 자백해 형을 사는 최악의 선택(‘내시의 균형’이라고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죄수의 딜레마’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고담 시민들을 대상으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벌인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죄수들이 탄 배에서 기폭장치를 든 간수는 어쩔 줄 몰라 한다. 이때 험상궂은 표정의 한 죄수가 다가오더니 “그동안 당신이 용기가 없어서 못한 일을 내가 대신 하겠다”며 기폭장치를 집어 든다. 작동 버튼을 누른다고 생각한 순간 그는 장치를 물속으로 던져버린다. 이제 이 배의 탑승자들은 다른 배를 먼저 폭파하고 살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 시각 일반 시민들이 탄 배에서는 “저쪽 배에 탄 사람들은 범죄자들”이라며 “당연히 우리가 먼저 버튼을 눌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웅성거림 속에 한 남자가 앞장서지만 그도 결국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어느덧 시곗바늘은 자정을 넘기고 양쪽 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악당 조커의 예측은 빗나간 것이다. 왜 그렇게 됐을까.



    ‘죄수의 딜레마’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쓴 경북대 경제학과 최정규 교수는, 경제이론에서 ‘죄수의 딜레마’로 표현되는 상황에 처하면 항상 상대방을 배신하는 게 맞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흰개미들이 보금자리를 노리는 적들을 막기 위해 자신의 창자를 파열시켜 끈끈한 내용물을 뿌리거나, 박쥐들이 사냥에 실패한 동료에게 자신이 섭취한 피를 토해 먹이는 것처럼, 인간도 일상적으로 이타적이고 협조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고, 길거리에서 헌혈을 하며, 익명으로 엄청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고, 남보다 일찍 출근해 사무실 정리를 도맡아 하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행동의 원인을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것이 ‘혈연선택이론’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헌신적인 이유를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려는 ‘이기적인 유전자’의 선택 결과로 보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다음에 등장하는 것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for-tat)’로 설명되는 ‘반복-호혜성’ 가설이다. 이 가설은 게임이 일회성이 아니고 경기자들은 게임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호혜성에 기초한 이 전략은 무임승차를 했다가 다음에 닥칠 보복이 두려워서 협조하는 것이므로 이타적인 행위는 아니며 조건부 협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가설로도 인간의 이타적 행위를 모두 설명하지는 못한다. 뭔가 2% 부족하다.

    이번에는 ‘최후통첩 게임’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실험을 해보자. 방 안에 세 사람이 있다. 한 명이 탁자 위에 1만원짜리 한 장을 올려놓고 내게 말한다. “이 돈을 당신께 드리니 이 돈의 일부를 앞에 있는 분과 나누십시오. 1원도 좋고 100원도 좋고, 1만원을 다 주어도 좋은데, 만약 앞의 분이 그 금액을 흔쾌히 받아들이면 당신이 제안하신 대로 금액을 서로 나눠가질 수 있고, 앞의 분이 거절하시면 제가 그 돈을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독재자·최후통첩 게임

    경제학 교과서의 개념대로 사람이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경제주체라면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이다. 금액이 1원이든 1000원이든 앞의 사람은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 안 받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무조건 최소한의 액수를 제안하라. 하지만 1982년 독일 쾰른 대학에서 실시한 실험에서 제안자들은 평균 37%에 해당하는 몫을 응답자에게 건네주었고, 절반을 떼어주겠다고 제안한 사람이 가장 많았다.

    독재자 게임이라는 것도 있다. 기본적인 상황은 최후통첩 게임과 같지만 응답자에겐 거절할 권리가 없다. 제안자가 주는 대로 받아야 한다. 만약 최후통첩 게임에서 거절당할까봐 두려워서 제안자가 액수를 높여 말했다면, 독재자 게임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독재자 게임에서도 대부분의 제안자는 총 몫의 25% 정도를 상대방에게 건네주었다. 물론 최후통첩 게임에 비해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몫이 줄어든 것을 보면 상당수 사람이 응답자의 거절이 두려워 액수를 높여 부르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거절의 위험이 없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상당한 몫을 나누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1986년 카너먼 등이 행한 실험에서 20달러를 주고 18달러와 2달러로 나누는 첫 번째 안과 10달러씩 똑같이 나누는 두 번째 안을 제안했을 때, 참가자의 76%가 두 번째 안을 선택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극도로 불평등한 분배보다 평등하고 공정한 분배방식을 선호하며, 일부가 합리성과 이기심이라는 전통적인 경제이론에 따라 행동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공정함 또는 정의의 기준에 따라 행동함을 알 수 있다.

    경제이론과 맞지 않는 이타적 행동

    호의에는 호의로 답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뢰 게임’도 있다. 제안자 A가 응답자 B에게 일정 액수를 건네면 바로 3배가 된다. 즉 A가 1만원 가운데 5000원을 B에게 주면 B의 수중에는 1만5000원이 생긴다, 그리고 B는 여기서 일정 액수를 다시 A에게 주어야 한다. A는 얼마를 주고, B는 또 얼마를 돌려줄 것인지가 ‘신뢰 게임’의 포인트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 1만원을 다 줘서 3만원으로 불린 다음 절반씩 나눠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나눠준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면 A와 B 모두 최초의 금액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하고 한 푼도 주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 A는 상당한 액수를 B에게 건네고 B 역시 상당한 액수를 돌려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자들은 경제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이타적 또는 협조적 행위를 설명해줄 몇 가지 대안이론을 제시했다.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끼리 만나는 ‘유유상종’ 가설(거래를 할 때 이타적인 사람은 이기적인 사람을 피하고 이타적인 사람을 찾아서 하므로 협조가 잘 이루어질 수 있다), ‘값비싼 신호 보내기’ 가설(선행 자체가 잘났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의사소통’ 가설(충분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면 협조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집단선택’ 가설(이타적 행위가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더라도 다른 구성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행위이므로 집단 안에서 권장된다) 등이다.

    이러한 대안이론들은 집단 내에서 이타적 행위가 어떻게 유지되고 진화할 수 있는지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인류는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행위적 특성을 발전시켜왔으며, 사회규범으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에게는 징계나 보복을 가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연락이 완전히 두절된 두 배에 타고 있던 고담 시 사람들은 양쪽 모두 기폭장치를 작동하지 않음으로써 ‘죄수의 딜레마’에서 빠져나와 ‘신뢰 게임’을 벌인 것이다. 감독은 왜 영화 속에 이 장면을 삽입했을까? 범죄와 온갖 부정행위로 물든 고담 시지만 결정적인 순간 시민들은 이타적 행동을 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이 악이 아니라 선임을 보여주었다. 슈퍼 히어로는 배트맨이 아니라 고담 시민들이었던 것이다. 영화 덕분에 ‘이타적 인간의 출현’을 다시 펼쳐들었다. 이 책은 왜 조커가 실패하고 배트맨이 이길 수밖에 없는지를 멋지게 설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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