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 이지훈 동아일보 오피니언팀 차장 jhlee@donga.com

    입력2008-09-02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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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느 날 ‘론리 플래닛’을 던져버렸다. 물론 쓰레기통이 아닌 배낭 속에. 그 책의 내용을 확인하러 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든 순간이었다. 성당과 박물관, 해변, 공연장, 식당 등 관광명소를 찾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더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외롭지만 자유롭고, 자유롭지만 외롭다. 확실한 것은 동반자가 있을 때보다 현지인과 접촉할 기회가 많다는 사실이다. 뜨리니닷에서 시작한 여행 후반의 행로는 산따끌라라, 바라데로, 아바나, 비냘레스다.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광활한 뜨리니닷 안꼰 해변의 풍광에 한껏 들뜬 정신을 수습하고 시내로 돌아와 센뜨로(마을) 밖 간이 페소식당을 다시 찾았다. 오전에 구아바 주스를 공짜로 마신 그 집이다. 나는 공짜 주스 대신 점심을 그곳에서 먹겠노라고 약속한 바 있었다.

    “올라(Hola)! 정말 점심 먹으러 왔네.”

    식당 주인이자 요리사인 이스팔도와 끌라라가 살갑게 맞이한다. 식탁도 의자도 없는 식당. 바에 음식을 올려놓고 서서 먹는다. 이스팔도가 가게 문 밖에서 손님을 기다릴 때 앉는 의자를 권한다. 접시에 밥과 삶은 콩, 고기 한 조각, 얇게 썬 토마토와 상추가 담겨 있다. 맛있게 먹어치우자 로사의 얼굴이 활짝 펴진다.

    뜨리니닷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꾸바의 주요 관광 명소다. 그 중심부인 마요르 광장 옆 노천극장 ‘까사 델 라 무시까(Casa de la Musica)’에선 매일 밤 10시에 공연이 시작된다. 내 옆에 거리를 두고 혼자 앉아 있던 아라베이즈(30)와 인사를 했다. 그녀의 고향은 시에고 데 아빌라. 볼일이 있어 며칠 전부터 이곳의 내국인용 민박에 머물고 있다. 낮에 길에서 봤다며 반가워한다. 내일 안꼰 해변에 같이 가기로 했다.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아바나 광장의 춤추는 여인.

    안꼰 해변의 꾸바 여자



    이튿날 오전 이발소를 찾았다. 꾸바의 영화를 보면 이발소 풍경이 자주 나오는데 실제 어떤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대와 달리 그곳의 이발사는 퉁명스럽기 그지없다.

    “이발료는 5cuc요.”

    “왜 그리 비싸지오?”

    “여긴 정부에서 정식으로 허가를 받은 이발소니까.”

    “그럼, 당신 머리처럼 깎아줘요.”

    오전 11시, 아라베이즈를 만나러 공원에 갔다. 그녀는 약속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어머니와 통화하느라 늦었다는데 사과는 없다. 11시10분에 셔틀버스는 이미 떠났기에 맞은편 호텔에서 택시를 불러 탔다. 에어컨이 고장 난 현대자동차의 엘란트라.

    “자연적인 게 좋아.”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그녀가 차창을 내리며 싱끗 웃는다.

    동양인이 아름다운 꾸바 여자와 같이 해변에 들어서니 금방 눈에 띄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수군대는 기척. 돈 많은 동양남자가 꾸바나를 돈으로 산 걸로 보는 걸까.

    “경찰들도 외국인과 꾸바 여자가 같이 있는 걸 싫어해.”

    그녀 역시 그런 시선들이 불편한 모양이다.

    그녀에게 mp3로 한국노래를 들려줬다.

    “한국 노래 어떠니.”

    “아주 슬퍼(muy triste).”

    “춤출 줄 알아?”

    “물론. 난 꾸바나야.”

    홀로 술에 취해 노래 부르다

    아무것도 안 해도 지루하지 않다. 카리브 해의 미풍과 햇빛만으로 충분하다. 아니 차고 넘친다. 게다가 꾸바 친구까지 옆에 있지 않은가.

    “앞으로 무얼 하고 싶니, 무엇이 되고 싶어? 넌 아직 젊잖아.”

    “음. 리, 너는?”

    꾸바 여자도 이렇다. 곤란한 질문을 받은 여자는 대개 같은 질문으로 답한다. 카리브 해에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목만 내놓고 두 팔을 벌린 채 수평선을 향해 오줌어뢰를 쏘았다.

    “사람들이 없다면 발가벗고 수영을 할 텐데.”

    “하하, 물고기가 거길 떼어 먹을 텐데?”

    “무슨 색을 좋아하니.”

    “분홍.” 그녀가 엉덩이 쪽 팬티를 보여준다.

    “…….”

    “선블록 크림 발라줄까?”

    “고맙지.”

    그녀가 내 왼팔과 가슴, 오른팔에 차례로 크림을 발라준다. 난 이제 영락없는 동양인 졸부로 보일 거다.

    “이번엔 네 차례.”

    “난 됐어.”

    그녀는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이 굴다가도 금세 새침해진다. 밤엔 ‘까사 델 라 뜨로바’에 가고 싶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숙소에 돌아가 쉬고 싶어 했다. 그녀를 바래다주는데 골목 어귀에서 헤어지자고 한다. 단정한 사람이다.

    아침 먹기 전 민박주인 라울이 부른다. 불길하다. 역삼각형 얼굴에 깡마른 체구, 갈라진 목소리,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눈.

    “어젯밤 11시에 해변에 같이 갔던 네 친구가 왔어. 그녀의 어머니가 까마구에이에 입원해서 갑자기 밤차로 떠나게 됐다며….”

    그 시간에 난 불을 끈 채 모기와 싸우며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쩝.

    “좀 깨우지 그랬어.”

    “불이 꺼져 있어 자는 줄 알았지.”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산따끌라라에서 만난 한국인 현정.

    아침을 먹고 ‘쎄로 델 라 비히아’에 올랐다. 해발 180m의 그리 높지 않은 산꼭대기에 TV, 라디오 중계소가 있다. 그곳을 지키는 사람은 한쪽 다리가 불편한 중년남자 까를로스. “올라!” 그가 철망 문을 열고 나와 인사를 한다. 정문 옆 쪽문을 열어주며 전망 좋은 창고 지붕 위로 안내했다. 뜨리니닷에서 출발한 산맥이 산따끌라라 쪽으로 아스라이 굽이쳐간다. 체 게바라는 이 산맥을 타고 넘어가 1958년 12월 산따끌라라 전투에서 바띠스타 정부군의 열차와 중무장한 부대를 공격해 대승을 거둔다. 멀리 사탕수수밭을 가로질러 관광 열차가 검은 연기를 뿜으며 노예 감시탑 쪽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한국을 거쳐 꾸바에 온 독일인 관광객이 줬어. 꾸바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지?”

    ‘체’의 도시 산따끌라라

    그가 지갑에서 한국지폐 1000원짜리를 꺼내 보인다.

    “거의 1cuc이지.”

    “아, 큰돈이구나.”

    “하루 몇 시간 일하지?”

    “20시간 근무하고 집에서 4시간 쉬는데, 지나는 차를 잡아 출퇴근을 해.”

    “외롭고 힘들겠네.”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

    숙소에 돌아와 남은 아바나 클럽(꾸바에서 생산하는 럼주) 반 병을 콜라와 섞어 ‘꾸바 리브레’를 만들어 마시고, 주인집에 숙박비 계산을 해줬다. 화가 지망생 아들 빅뚜에게는 미술연필 한 다스를 선물했다. 밤 11시쯤 ‘까사 델 라 무시까’에 갔다. 뜨리니닷의 마지막 밤. 새벽 1시에 숙소로 돌아와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다 잠이 들었다.

    숙취로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또 짐을 꾸려야 한다. 시장에서 장사꾼 넬레이를 만났다. 오늘만큼은 물건 사란 말을 안 한다. 뺨을 대고 작별 인사를 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국말로 인사를 해보라고 한다.

    “안녕하세요” 했더니 모두들 웃으며 어설프게 따라 한다.

    “언제 다시 꾸바에 오지?”

    “글쎄. 잘 하면 3,4년 후?”

    “무척 긴 시간이네.”

    이스팔도의 식당에 갔다. 정오 조금 넘은 시간이라 손님이 북적인다. 점심을 시켜 먹으며 그들이 일하는 모습과 손님들을 유심히 지켜봤다. 값싸고 허름한 페소식당이지만 음식 맛은 고급식당 못지않다.

    “뜨리니닷에서의 마지막 식사네요.”

    “고마워, 리.”

    이스팔도가 나를 아들처럼 안아준다. 끌라라도 키스해달라며 뺨을 내민다.

    “친구, 잘 가요.”

    곁에서 지켜보던 손님들도 인사를 한다. 콧등이 왜 따갑지.

    3시쯤 터미널에 가보니 벌써 차가 도착해 짐을 싣고 있다. 중국인 일행 3명과 다른 동양 여자 1명이 탄다. 터미널 예매장부에서 봤던 한국인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시엔푸에고스(Cienfuegos)를 거쳐 산따끌라라까지 거의 세 시간은 걸린 것 같다.

    괴테를 읽는 혁명가

    “현정!”

    차에서 내리며 한국인인 듯한 처자의 이름을 불러봤다. 어떻게 알았느냐며 깜짝 놀란다. 그도 뜨리니닷에서 나흘 밤을 묵었다고 한다. 지난해 말 한국을 떠나 캐나다와 미국을 거쳐 꾸바에 왔다. 6월 초순경 귀국할 예정. 숙소를 안 정했다고 해서 마중 나온 민박집 주인 마리아와 함께 갔다. 그녀가 친구 집을 현정에게 소개해준다. 짐 정리를 하고 현정과 같이 비달공원(Parque Vidal)에 갔다. 이곳은 다른 도시와 달리 바람도 제법 불고 시원하다.

    민박집 주인 마리아는 스무 살짜리 아들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여자다. 아이는 체육학교 학생으로 인라인 스케이팅 선수. 15년간 살던 남편과 이혼하고 민박을 치며 생활하고 있다. 집안 어른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하나뿐인 남동생마저 포르투갈로 이민을 갔다. 그녀의 넋두리를 듣다보니 현정과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졌다.

    멀리 우뚝 선 체 게바라 동상이 보인다. 체 게바라 기념관(Monumento a Ernesto Che Guevara)은 성역이돼 있다. 경비원이 동상 주변에 배치돼 있고, 게바라의 유해 안치소에는 항상 가스불이 타오른다.

    “우리는 체와 같은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Queremos que sean como el Che!).”

    광장에 들어서면 이런 글귀가 쓰여 있는 입간판이 먼저 눈에 띈다. 기념관 내부에선 촬영금지. 게바라의 성장과정, 게릴라 활동 시절, 혁명 성공 후의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 시에라 마에스뜨라 게릴라 시절 막사에 누워 책을 읽는 사진이 눈에 띈다. 책 표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괴테(Goethe)’. 생사를 다투는 게릴라가 짬을 내서 읽은 책이 괴테라니. 소름이 돋는다. 소년 같이 선하고 여린 눈매로 전쟁터에서 괴테를 읽는 모습이라니.

    리얼리스트가 되자고 외친 이상주의자.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편에 선 부르주아. 막강 미국의 비호를 받던 산따끌라라 바띠스따 정권에 최초의 타격을 가한 변방 아르헨티나 출신 의사. 만성 천식환자였던 럭비선수. 꾸바혁명의 성공에 안주하지 않고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또 다른 혁명의 깃발을 꽂으려던 노마드. 지략가이자 쇼맨십의 천재. 강한 듯 여리고, 쾌활한 듯 고독한 사람. 모성애를 불러일으키는 섹스 심벌. 20세기 마지막 로맨티스트이자 현실주의자. 이타주의자이자 지독한 이기주의자. 괴테를 읽는 게릴라 사령관. 그는 마흔도 채 되지 않아 볼리비아에서 사로잡혀 이튿날 미국 CIA 고문관이 보는 앞에서 총살됐고, 영원한 전설이 됐다. 1997년에야 그의 유해는 이곳에 송환돼 묻혔다.

    대서양에 발을 담그다

    오후에 현정이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그는 내일 아침 비냘레스로 떠나고 난 바라데로로 간다. 잠시였지만 씩씩한 한국 여성을 만나 유쾌했다. 건강하게 좋은 여행하기를.

    꼴론과 까르데나스를 거쳐 4시간을 달려 휴양도시 바라데로에 도착했다. 바라데로 반도는 북동 방향으로 뻗어 있다. 반도 끝으로 갈수록 호텔과 리조트의 급수가 올라간다. 꾸바에 와서 처음으로 호텔에 짐을 풀었다. ‘마르 델 수르(Mar del Sur·남쪽 바다).’

    “꼬레아와 하뽕(일본) 야구팀이 아시아 대표로 베이징올림픽 본선에 진출했어.”

    호텔 경비원이 알려줬다.

    대서양 구경을 나갔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해변에 수영금지를 알리는 빨간 깃발이 꽂혀 있다. 약 200km 북쪽이 미국 플로리다 키 웨스트. 붉은 글씨로 ‘라이라이(來來)’라고 쓰인 중국집 옥호를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갑던지. 벽에 붙은 메뉴판을 군침을 삼키며 들여다봤다. 아로스 프리또와 스파게티를 시켰더니, 볶음밥과 자장면 비슷한 게 나왔다. 풀풀 날리는 밥과 빵만 먹다가 ‘두 녀석’을 만나니 살 것 같다.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휴양도시 바라데로. 바람이 심하다.

    또다시 도진 허리 병

    이튿날 모터사이클을 빌리러 갔다.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한다. 2시간에 12cuc. 연료값 2cuc은 별도. 2시간이면 바라데로 반도를 구석구석 한 바퀴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모터사이클은 차와 확연히 다르다. 운전자가 기계의 부품이 아니라, 기계를 지배한다는 느낌. 모터사이클은 기계라기보다는 ‘쇠로 만든 말’ 같은 생명체다. ‘그’와 일심동체가 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온몸을 때리는 바람,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와 허옇게 뒤집히는 파도에 번쩍이는 햇빛. 도로에 민첩하게 반응하며 요동치는 ‘그’가 굉음을 쏟아낸다. 이곳은 또 다른 천국이다. 한국에 돌아갈 날이 일주일 남짓 남았다. 떠나올 때와 뭐가 달라졌는가. 돌아가면 어떻게 살 것인가. 바람이 거칠게 창을 흔든다.

    호텔 체크아웃을 한 후 묵직한 배낭을 들고 버스터미널까지 약 1km를 땡볕 속에 걸었다. 마딴사스를 거쳐 3시간도 안 걸려 아바나 베다도에 도착. 일단 센뜨로 아바나에 숙소를 정하고 틈을 내 비냘레스에 다녀오기로 했다. 호텔 두빌(Hotel Douville) 건너편 미리 약속해둔 민박집 주인 호르헤의 아파트 앞. 아파트 1층 출입문이 잠겨 있어 난감해 하는데 흑인 아가씨가 다가온다.

    “내게 전화카드가 있어요. 전화해줄게요. 대신 1cuc 줄래요?”

    전화 부스로 함께 갔다. 그녀가 동전이나 카드 없이 무료로 비상전화를 건다.

    “호르헤가 지금 내려온대요.”

    그녀는 1cuc를 챙겨 유유히 사라진다.

    “리, 나와 생년이 같네.”

    호르헤가 내 여권을 보며 숙박계를 적다가 반가워한다.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아바나 까떼드랄 광장의 소녀 이사벨라. 만 15세 성년식을 맞아 드레스를 입었다.

    “하루 숙박료 25cuc에 아침 3cuc.”

    “오래(일주일) 머물 거니까 아침 포함해서 25cuc로 하자. 비냘레스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방값은 치를게.”

    “그럼, 26cuc. 오케이?”

    “오케이.”

    잠시 산책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못 보던 남자가 저녁을 먹고 있다. “호르헤는 잠시 나갔다”며 자신은 호르헤의 친구란다. 이 자들이 혹시 게이 커플? 호르헤가 쓰는 방에 더블침대가 있던데. 나중에 호르헤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그는 민박집 일을 맡아 하는 요리사 라이문도. 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 시골에 아내와 딸이 있는데 주중엔 여기에서 일하고 주말엔 시골집에 다녀온다는 것. 화장실을 함께 쓰는 게 영 불편하다. 호르헤의 방과 내 방 사이에 화장실이 있는데, 화장실을 사용하는 쪽에서 다른 쪽 출입문을 잠그는 시스템이다.

    ‘인간동물원’ 담배 공장

    역시 아침에 무거운 배낭을 들고 터미널까지 걸었던 게 화근이 된 것 같다. 잠시 침대에 누웠는데 못 일어나겠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여기서 허리 병이 도지면 한국에 돌아가도 면목이 없다. 한 달간 잘 놀고 온 사람이 허리 아프다고 하면 어떻게들 생각할까.

    해 뜨기 전, 말레꼰으로 산책을 나갔다. 새벽녘인데도 곳곳에 경찰들이 순찰 중이다. 덩치 큰 꾸바인이 두 손을 경찰차 지붕에 올리고 다리를 벌린 채 몸수색을 당하는데도 전혀 저항하는 기색이 없다. 그만큼 꾸바 경찰은 권위가 있다. 꾸바의 주요 수입원인 외국인 관광객이 안심하고 여행할 수 있을 정도로 치안이 철저하다.

    의사당(Capitolio Nacional) 옆 아바나 담배공장(Real Fabrica de Tabacos Partagas)에 갔다. 1층 라운지에는 가격대별로 시가와 용품들이 진열돼 있고, 소파가 있는 VIP룸에서는 시가를 피워볼 수 있다. 여기서만 촬영이 허용된다. 서양인 관광객 커플 6명과 공장 구경. 층별로 담뱃잎을 펴서 크기별로 분류하는 곳, 시가를 말아 압축하는 곳, 품질검사소, 포장하는 곳이 있다. 작업대 사이의 간격은 콩나물 교실의 책상 간격보다 조금 넓은 정도.

    갈색 피부의 소녀와 뻔뻔한 ‘삐끼’

    어느 층에서나 소음같이 커다란 음악이 울렸지만, 남녀 직공들은 몸을 흔들거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겁게 일을 한다. 그들의 낙천성이 하루 12시간의 중노동을 견디게 하는 것일까. 안내원 이스라엘은 격일로 품질검사와 가이드 일을 한다. 초심자를 위한 9개월 과정의 시가학교도 있다. 1848년에 세워진 이 건물의 나무계단은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고 움푹 팼다. 품질검사실. 전날 만 시가를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는 나무 자 안으로 통과시켜 크기별로 검사한다. 계기판으로 시가의 밀도를 측정하기도 한다. 시가공장은 ‘인간 동물원’이라고 야유받기도 하지만, 이곳 역시 꾸바인의 낙천성, 여유를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말레꼰에서는 연인들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꾸바에서의 마지막 토요일. 부까네로(꾸바산 독한 맥주)를 들고 빈방으로 돌아왔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올드 아바나 탐방에 나섰다. 까떼드랄 광장(Plaza de la Catedral)에서 출발. 단체 관광객들과 섞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흘러갔다. 산 쁘란시스꼬 광장(Plaza de San Francisco de Asis)에서 흰 드레스를 입은 소녀 이사벨라가 가족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만 15세 소녀의 성년식. 법적으로는 만 18세가 성인이지만 여자의 경우 15세가 되면 예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연다.

    그녀의 남동생 두 명도 드레스 셔츠와 조끼를 갖춰 입었다. 늘씬한 몸매에 갈색 피부, 다정하고 깊은 눈. 그 아이는 수줍어하면서도 나를 위해 포즈를 취해준다. 그녀가 어머니와 작은 교회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황금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다. 그녀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그녀와 기념촬영을 한 후 성년식 선물로 약간의 돈을 줬다. 볼이 발개지며 희미하게 웃는다.

    따베르나 까페(Cafe Taberna)에 왔을 때, 젊은 ‘삐끼’가 말을 걸어왔다.

    “좋은 레스또랑을 소개해줄게.”

    “됐다. 아침 먹은 지 얼마 안 된다.”

    “치까(아가씨) 필요 없나.”

    “필요 없다.”

    “그럼 치꼬(남자)는?”

    “…….”

    내일은 비냘레스 가는 날. 이젠 이 여행이 익숙해져 차츰 한국생각이 덜 난다. 생각하면 보고 싶고, 보고 싶으면 견디기 힘들다.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비냘레스의 담배농가.

    시가마을과 죽음의 행군

    비냘레스 시내 입구에서 내려 민박집을 찾아갔다. 버스가 예정보다 훨씬 늦게 도착했다. 민박집 주인이 이미 다른 손님을 받아 빈방이 없다. 모터사이클 뒤에 타고 서너 블록 떨어진 다른 집으로 갔다. 비냘레스 워킹투어에 나섰다. 60대 네덜란드 부부, 가이드와 나.

    꾸바의 농촌풍경 속으로 들어가 뙤약볕에서 붉은 흙길을 걷는 맛이 나쁘지 않다. 담배농가에 들러 건조 창고에서 쉬었다. 여주인이 시가 마는 시범을 보인 후 내게 그 시가를 줬다. 청년 두 명과 노인이 있는 농가에 들어가 파인애플 대접을 받았다. 노인도 내게 시가 한 개비를 선물했다. 과일, 커피, 시가 등을 사라고 권했지만, 네덜란드 아줌마가 다부지게 거절한다. 그녀는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하는 부부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영어를 하는 가이드와 농부 중 한 명이 열심히 통역을 해주자 다른 청년과 노인은 연신 감탄하며 부러워한다. 특히 청년은 기가 팍 죽은 표정. 게다가 이 아줌마는 네덜란드의 연금제도를 자랑하며 꾸바 사정은 어떤지 묻는다. “꾸바 사람들은 평생 일해야 하며 자신들은 이웃나라조차 못 가봤는데 세계여행을 하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라고 심란해 한다.

    아쉽게도 인근에 폭포는 없었다. 대신 수령 400년의 신령스러운 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하얀 몸피에 나뭇잎 없는 가지가 무성하고 뿌리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붉은 땅을 기었다.

    광장 옆에서 밤 10시에 공연이 있다. 망설이다 10시30분에 갔다. 만석. 바 옆의 기둥에 기대섰다. 앉으면 허리가 아파서 이게 낫다. 무대 연주에 맞춰 한바탕 댄스파티가 벌어진다. 춤을 못 추는 50, 60대 서양인 아줌마들은 밴드 앞에 바짝 붙어서 막춤을 추거나 양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간간이 일행에게 어서 나오라고 손짓을 한다. 동서양의 닮은꼴이 신기하기만 하다.

    화장실 인심이 야박하다. 여행사 사무실에 가서 화장실 좀 쓰겠다고 하니, 버스에서 볼일을 보란다. 버스에 갔더니 운전사가 아직 출발 시간이 안 됐다며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여행사도 버스회사도 국영기업이니, 그들도 준공무원. ‘서비스 마인드’는 아직 없다.

    귀국 준비

    아바나 베다도 남쪽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택시운전사와 흥정이 깨졌다. 걷기로 했다. 중년부인에게 센뜨로 아바나가 어느 방향이냐고 묻자 깜짝 놀란다. 잘못 판단했다. 정상적인 몸이라면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는 길이었지만, 요통환자가 뙤약볕에 ‘오기’로 걷기엔 끔찍하게 먼 길이었다. 신음을 깨물며 시내 묘지공원과 공장지대를 거쳐 말레꼰 해변에 도착. 하지만 거긴 ‘죽음의 행군’의 출발점일 뿐. 가도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 말레꼰에서만 족히 세 시간은 걸은 것 같다. 두빌 호텔이 보이자 안심이 된다.

    “미쳤군.”

    베다도 터미널에서 걸어왔다고 하니, 호르헤가 양팔을 벌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역시 무모했다. 샤워를 겨우 마치고 침대로 기어들어가 누웠다. 델 모로 성의 예포가 쿵쿵 울린다. 보름달이 검푸른 구름 사이를 누비고, 건너편 옥상 빨랫줄에 널린 흰 침대시트들이 가끔 폭음을 내며 펄럭였다.

    내일(4월25일) 오후 1시40분 비행기. 꾸바에서의 4주가 이렇게 훌쩍 지났다. 민박집 요리사 라이문도가 새벽같이 나가 동부(오리엔떼)지방에서 나는 향기 좋은 커피 10봉지와 커피포트를 사다줬다. 그와 시내구경 겸 쇼핑을 나섰다. 라이문도 친구의 음반좌판에서 전통음악과 최신유행곡 CD를 10장씩 샀다. 약국에는 의사 한 명과 약사 세 명이 근무하고 있다. 의사가 처방전을 써주면 약사가 바로 조제해주는 시스템.

    오후에는 센뜨로 아바나 쪽으로 갔다. 오비스뽀 거리 초입의 ‘엘 플로리디따’는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술집이다. 헤밍웨이 사진과 사인으로 한쪽 벽이 ‘도배’되어 있다. 우체국 근처 파라솔 밑에서 청년 두 명이 기념 티셔츠를 팔고 있다. 티셔츠 한 장에 6cuc.

    “두 장에 10cuc. 어때?”

    그중 한 명이 신분증을 꺼내 내 얼굴에 내민다.

    “우린 불법 행상이 아니다. 국영업체 직원이다. 정가대로만 판다.”

    국영 좌판도 있었군. 흥정은 없다. 라이문도는 외동딸 제시까의 15세 성년식 때 파티를 열어주는 대신 컴퓨터를 장만해줄 생각이다. 그는 앞으로 2년간 컴퓨터 살 돈을 모을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다.

    여유와 낙천의 ‘가난한 천국’, 아디오스(Adios, 안녕) 꾸바!

    아바나 시내. 좌판이 즐비한 풍경이 한국과 닮았다.

    “피델에 이어 라울이 집권하면서 달라진 게 뭔가.”

    “음. 세 가지 자유. 첫째, 해외여행 자유화. 둘째, 호텔 출입 자유화. 셋째, 컴퓨터-휴대전화 등 정보통신 기기 구입 자유화.”

    문제는 보통시민의 경우 그럴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다는 것. 셋 다 그림의 떡이다.

    새벽에 검은 바닥이 드러난 말레꼰에 나갔다. 썰물 때였다. 파도가 밀려가며 무너진 옛 성터를 보여주고, 다시 밀려오며 방파제를 후려친다. 동반자 없이도 외롭지 않던 말레꼰. 연인들이 속삭이고 포옹하는 사랑의 방파제, 낚시꾼들의 일터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요 노인들의 사랑방. 여행자의 나침반이자 정보교환소.

    아디오스, 꾸바

    라이문도가 접시에 과일로 꾸바 풍경화를 ‘그려’ 내왔다. 구아바, 망고와 바나나로 태양과 야자수와 파도를 표현한 것.

    “예술이군.”

    “맘에 들어?”

    “응, 고마워.”

    주인 호르헤, 요리사 라이문도와 함께 아침을 먹었다. 독신인 호르헤는 전직 교사. 민박집을 운영하며 가끔 캐나다에서 오는 관광객에게 스페인어도 가르친다. 그 역시 컴퓨터도, e메일 주소도 없다. 대신 자기 누이의 e메일 주소를 적어준다.

    예약한 택시가 가까운 공항 대신 비냘레스로 장거리를 뛰겠다며 약속을 깬다. 라이문도가 내 배낭 두 개를 들고 택시를 잡아줬다.

    “리, 다시 보자고.”

    “그럴 수 있을까.”

    “그럼.”

    그가 엄지를 세웠다가 곧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택시운전사가 귀청이 먹먹할 정도로 음악볼륨을 높인다. 운전대를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고 어깨춤을 춘다. 오늘은 이런 소음조차 정답다. 자두색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아이들, 병아리 같은 코코택시, 뱀 같은 뿌리가 땅 위를 기는 꾸바나무. 이웃과 만나면 하루에 몇 번이든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반가워하며 뺨을 맞대는 행인들.

    ‘애국 아니면 죽음을!’

    붉은 페인트로 쓴 이 표어에 꾸바 젊은이들이 얼마나 공감할지 모르겠다. 꾸바는 50년 가까운 미국의 엠바고(수출입 통제) 탓에 아직도 경제난을 겪고 있고 특히 생필품 부족에 시달린다. 구소련 붕괴 이후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시설(SOC) 공사는 ‘올 스톱’ 상태. 하지만 느긋하고 낙천적인 꾸바인들은 하루하루를 즐겁게 산다. ‘조금 배고프지만 즐거운 천국.’

    드디어 공항이다. 내가 택시에서 겨우 내리는 모양을 보고, 택시운전사가 깜짝 놀라 짐을 내려준다. 청사 밖에서 담배를 피던 공항 직원도 짐수레를 밀며 달려와 배낭을 실어줬다.

    “무차스 그라시아스.”

    “데 나다(별말씀을).”

    정시에 비행기가 떴다. 서울에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돌아가야 한다. 인천공항에 어머니와 동생이 나와 있다.

    “엄마, 꾸바식 인사를 배웠어요. 가르쳐드릴까?”

    낮고 흐린 봄 하늘에 먹빛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개나리 진달래 목련은 이미 자취도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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