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브람스 음악 들으며 예가체프 원두 볶아 ‘감동의 선물질’

  • 김갑수 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입력2008-09-02 18: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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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라이홀’의 주인장에겐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 가지가 있다. 오디오, 음반, 커피. 요즘 그는 음반을 수북이 쌓아놓고 차례로 틀어대며 커피콩을 고른다. ‘핸드픽’ 무아지경에 빠져 내일 우리나라에 다시 IMF가 찾아와도 자기는 오늘 한줌의 콩을 고르겠단다.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며 정성스레 만든 원두커피를, 삶의 환희를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의식이 있고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 무의식 속에는 우리의 열등한 자아가 숨어 있다. 그것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타자에게 투사한다. 분노, 질시, 원한, 공포, 회한…. 마음속에 담겨 있는 온갖 어두운 충동은 바로 무의식 속의 그림자가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분석심리학의 노대가(老大家) 이부영 교수와 한 시간 대담을 하는 동안 뇌리에 남은 그의 말들이다. 구스타프 융이 말한 마음속의 그림자. 의식의 골짜기 아래 저 깊은 심연 속에 숨어 있는 열등한 자아가 그림자라는 것이다. 혹시 실체와 그림자가 뒤바뀐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까. 그런 처소는 없을까.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고통. 그림자가 안겨주는 마음의 고통. 고통의 이유와 레퍼토리는 세월 따라 나이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건만 단 하나 변함이 없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열등한 자아로 한세상 살아가게 만들어진 종자의 태생적 불우. 거리의 행인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다짜고짜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삶이, 존재가, 영혼이 그리고 이 세상이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소비에트연방, 중화인민공화국, 동구권 국가들이 생겨나기 전에 사회주의적 이상을 품었던 사람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켜 이성의 원칙이 통제하는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면 수천년 이어져온 인류의 고통이 해소될 것으로 믿었을 테니까. 호메이니가 건설하고 탈레반이 이룩한 신정(神政)국가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아니, 프란시스 베이컨 식의 유토피아, 그러니까 기술과학 문명이 최고조에 달하면 진정한 복락세상이 찾아온다는 그 예언의 땅이 바로 지금 미국에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영토들은 너무 짜릿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상사회의 구성원들은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끝끝내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적 단세포성 표준인간형을 견딜 수 없어 했고, 탈레반 신정사회의 난폭한 도덕주의에 아프간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젊은 청춘을 버려야 했다. 미국이라는 풍요 속으로 망명했던 솔제니친은 절망의 아메리카를 기록해야만 했고.

    ‘걱정의 마술램프’



    지하 작업실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어젯밤은 너무 길었다. 계속 이어지는 밤의 시간이건만 지상에서는 지금을 아침이라고 부른다. 밤에 생겨나는 증세에 걸맞은 병명이 마침 떠오른다.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줄라이홀의 그윽한 향을 만들어내는 커피 로스터.

    램프 증후군; 그것은 ‘걱정의 마술램프’. 근심 걱정이라는 거인을 스스로 불러놓고 명령한다. ‘자 나를 불행의 세계로 인도해다오’ ‘지금 고통을 이리로 데려오렴.’ 걱정이라는 환영을 붙들고 그저 처분만 기다리며 괴로워하는 현상.

    고통을 말할 때 흔히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발굴되고 창조된다. 그러나 문제는 고통의 뿌리다. 모든 나무뿌리는 지표면을 향해 가능한 한 넓게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각 지류마다 헤아릴 수 없는 잔털이 나 있다. 그것으로 생명의 원천을 빨아들인다. 고통은 삶의 전방위를 향해 뻗어 있고 닿는 곳마다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인다. 미세한 잔털들이 무엇을 빨아들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빨아들인 모든 것을 괴로움의 성분으로 분해하니까. 내 고통의 뿌리가 가닿는 곳은 어디일까.

    나의 음악실 ‘줄라이홀’이 늘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찾아온다. 원고를 청탁하러 오기도 하고 방송관련 회의가 벌어지기도 하며 그냥 덧없이 들르는 심심파적도 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말한다.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중요함과 사소함 사이를 넘나들며 말이 말을 낳는다. 낄낄거리고 후후거리고 두런두런한다. 아, 때로는 소스라치듯이 벌떡 일어나 외치고 싶다.

    “왜 사람들은 친해져야만 하는가!”

    내게도 일생의 친구들이 있다. 두 명의 친구는 암으로 일찍 떠났고 나머지 나까지 여덟 명의 고교 문예반 동기들과 일생의 경조사를 함께해간다. 돌이켜 보니 열여섯 살 적부터 시작된 삼십몇 년의 인연이다. 지나간 내 누추한 행적들 가운데 녀석들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자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한 나는 도저히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사귀었던, 기억 속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여인들도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상 차마 그 이름들을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들을 한날한시에 전부 다 모아놓고 공공칠빵 놀이 같은 것을 해봤으면 좋겠다. 자리 배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난 시기 순으로 할까 아니면 중요도 순으로 서열을 매겨야 하나. 어쨌든 그녀들을 다시 만난다면 심각한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옷도 벗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공공칠빵!

    ‘김갑수와 아름다운 사람들’

    그러나 지나간 여인들은 절대로 뒤돌아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실제로 약혼식까지 올렸던 지난날의 그녀에게 전화를 했던 비밀이 있다. 무어라 쩔쩔매며 더듬거리는 내 말허리를 자르며 대학교수인 그녀는 내뱉었다. “에구구, 우리 애아빠가 밖에서 저러고 다니면 어쩌누.” 지나간 여인에게 죽어도 다시 연락할 수 없게 된 참담한 기억이다. 에라이, 공공칠빵!

    믿기 어렵겠지만 내 개인 팬클럽도 있다. 마흔 명 남짓한 카페 식구들. 대다수가 여인인데 언제나 무상의 배려와 옹호를 해주는 사람들이다. 일생 가장 기이하게 여겨지는 관계가 바로 이 ‘김갑수와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모임이다. 일 년에 두어 차례 줄라이홀에서 오프모임을 한다. 그 자리는 놀랍게도 요리경연대회가 된다. 각자 음식들을 준비해 오는데 눈이 휘둥그레지는 산해진미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국도 끓일 줄 모르는 아내를 모시고 있다. 이럴 때 쓰는 사자성어가 ‘아이러니’였던가.

    어쨌거나 다들 친하거나 한때 친했던 사람들이다. 친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서로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상히 알고 지내는 일이 사실은 괴로움이다. 친분은 괴로움의 확장이다. 어떠한 친분으로도 괴로움의 질량을 감쇄시킬 수가 없으며 생겨나느니 뮌히하우젠(M·#50914;chhausen) 신드롬 같은 것이다. 관계의 친밀성이 바로 이 증상을 유발하기 쉽다.

    뮌히하우젠 신드롬; 남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로 아프다고 하거나, 지인이나 자녀나 애완동물에게 해로운 약물을 복용시키거나 폭행을 구사해 남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하는, 마침내 자기도 스스로 지어낸 이야기에 도취해버리는 증후군.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줄라이홀 주인장은 요즘 사람 사이의 진정한 관계가 무엇인지 고민 중이다.

    정말 딱한 것은 그닥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친분이다. 같이 일을 하는 사이도, 지인의 지인으로 소개받은 사이도, 막연한 인연으로 자리를 함께한 사이도 순식간에 정겨워지고 살가워지는 일이 흔하다. 까놓고 까놓아야 하는 관습이다. 말짱 가면무도회. 그럼에도 연출된 친분은 예절이자 올바른 인성으로 통용된다. 그런 점에서 세상에서 가장 우울해 보이는 종족이 정치인들이다. 그들은 처음 본 사람과도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악수를 한다. 선거 때 악수를 거듭하다 손이 부르튼 여성정치가의 하소연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다. 맙소사! 그 정도라면 그녀의 인생이 부르튼 것이다. 가짜 인사로 부르튼 인생, 참 가긍하여라.

    친하다는 것은 자기 확장 의지를 뜻한다. 그러나 가망 없는 시도가 아닐까. 타인에게서 나의 일부를 발견하고자 하는 행위는 횡포다. 순수의 이름으로 사람과 사람이 적나라하게 닿는 일은 일종의 작은 폭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간혐오, 관계혐오, 대인기피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규정하자면 타인 의존을 통한 자기방기가 끔찍하다는 말이다. 뚝 떨어진 작업실에서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면서 전화를 기다리는 나. 그러다 누군가 찾아오면 그 불편함과 구속감을 참아내지 못하는 나. 사람이란 내 고통의 뿌리가 닿아 있는 영원한 소재다. 당신은 안 그런가?

    작업실에 손님이 아닌 고정인사가 출현했다. 성별은 여자다. 애인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만 파출부 아줌마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내 고통의 레퍼토리 가운데 참말 대책 없는 종목이 청소 문제다. 혼자 살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 일주일만 방안을 내버려두면 실내는 곧장 열대우림 지역의 밀림처럼 된다. 잠에서 깨어날 때 나자빠진 의자들, 널브러진 휴지통, 엎어진 책다발 따위에 둘러싸여 있으면 정말 자살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오래전 광화문 독신자 아파트 시절의 기억이다. 시인 하재봉이 밤 12시 넘어 찾아왔는데 웬 바이올린 케이스를 손에 든 청순가련형 미모의 소녀와 함께였다. 하재봉 선수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통성명도 하기 전 소파에 앉는 바이올린에게 다짜고짜 내가 했던 첫마디가 이랬다.

    시인과 바이올린 소녀

    “얼마만큼 슬프세요?”

    “아하하하학!”

    아하하하학은 웃음소리가 아니다. 바이올린은 내 말에 곧장 맞받아 아하하하학 하며 대뜸 터지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이올린의 활시위가 조금 느슨해진 듯했다. 우리는 다정하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였는지 내용은 한마디도 생각나지 않는다. 스웨덴 왕실의 스캔들쯤이 아니었을까. 늑대보호운동에 대해서였던가. 다만 나란히 옆으로 앉아 적이 다정하고 촉촉한 분위기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그런데 갑자기 저 한쪽 끝에서 우지끈 뚝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하재봉!

    시인은 판꽂이를 발로 차고 옷걸이를 무너뜨리고 신라호텔 로비에서 훔쳐온 무거운 무쇠 재떨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비로소 정신이 돌아왔다.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바이올린은 그러니까 시인의 동행이었다. 손님은 쳐다보지도 않고 함께 온 소녀를 상대로 얼마나 슬프냐는 둥, 아하하학 슬프다는 둥, 콩팔이새삼육으로 주거니 받거니 했으니 아, 나는 정말 정신 나간, 싸가지 없는 놈이다. 생각할수록 얻어맞아 싼 일인데 착하디착한 하재봉 선수는 죄 없는 가재도구만 두들겼다. 그에게 더 심한 행동을 했던 것 같다. 얼굴을 들이대며 “때려줘 때려줘!” 했던 것이다. 맹세컨대 약을 올리려는 것이 아니다. 맞고 싶었던 것 같다. 손님은 휑하니 나가버렸고 바이올린은 물끄러미 서 있었다. 나는 담뱃재로 질펀한 벽 쪽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잠을 청해버렸다. 어느 결엔가 바이올린도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때문에 떠올린 기억이다. 태어나서 그렇게 죽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다. 엎어지고 자빠진 잔해들 속에서 부옇게 눈을 뜨는데 정말 죽고 싶더라고. 그러니까 혼자 사는 공간에서는 죽도록 열심히 청소를 해놓아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 물론 남의 여자 친구에게 슬픔을 토해내지도 말 것.

    중년의 파출부 아줌마는 도통 나이가 짐작되지 않는 유형이다. 두리두리한 큰 몸집에 하염없이 편한 인상. 그녀는 나를 향해 경상도 억양으로 ‘선생님’이라고 호칭한다. 바깥세상에서 흔히 듣는 호칭이 ‘사장님’ 혹은 ‘아저씨’ 아니던가. 한때는 꼬박꼬박 “저 사장 아닌데요” 하고 항변도 해봤지만 나이 든 남자에게 무조건 사장님, 하는 조선식 화법에 적응하기로 한 터였다. 그런데 장중한 분위기의 아줌마는 귀엽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선생님’ 한다. 세련된 호칭 때문에라도 언젠가는 옷 한 벌이라도 사주려고 맘먹었다.

    묵은 때까지 치우는 파출부 아줌마

    그 프로페셔널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을 훨씬 열심히 공들여 청소한다는 것. 실내의 때깔이 달라지는 비법이 그거였다. 나도 비교적 치우며 사는 편이건만 처음 몇 차례 아줌마가 치워내는 숨은 먼지들에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고맙고 능력 있는 아줌마가 다녀가는 한나절이 새로운 두통거리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책을 읽을 수도, 음악을 들을 수도, 하다못해 연기를 피우며 커피를 볶을 수도 없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어야 한다. 밖에 나가자니 갈 곳이 없고 안에 있자니 아무런 일도 할 수가 없다. 이게 바로 사르트르가 규명한 타자의 신체가 주는 위협일 것이다. 나로서 온전하다가 아줌마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모든 행동이 의식되기 시작한다. 피차 불편을 끼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건만 그렇다고 해소될 수 있는 불편이 아니다. 유일한 방법은 그저 견디는 일뿐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타인과 함께 일을 하고 모임을 이루고 가족을 구성하는 것일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타인과 섞이는 그 순간에 온전한 자아는 증발된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나로서 충만한 상태라면 단 한 사람의 타자도 수용할 수가 없다. 자아 또는 자의식의 증발, 그것은 고통일까 즐거운 휴식일까.

    쓸쓸한 날엔 벌판으로 나가자. 아주 쓸쓸한 날엔 벌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나가자, 라고 조동진은 노래했다. 줄라이홀 위치가 마포다. 옛날이었다면 쓸쓸한 산책에 나설 벌판도 강변도 곁에 있었을 것이다. 멀찍이 밤섬이 시야에 들어오는 거리니까.

    고독한 커피

    그러나 지금 쓸쓸한 날엔, 아니 쓸쓸하지 않은 날에도 나는 원두를 볶는다. 고독한 커피이자 휴머니즘을 실천하는 커피콩을 볶는다. 사람들에게 원두커피 선물을 시작한 것이다. 애초의 동기는 그렇게 감동적인 게 아니었다. 요즘 커피쟁이 사이에서 화제를 모으는 ‘제네카페’라는 로스터를 새로 구입한 탓에 그렇게 됐다.

    이전에 주로 사용하던 스위스마르의 ‘알펜로스터’는 사용자가 당최 할 일이 없다. 드럼에 그린빈을 넣고 시간만 설정해두면 만사 끝이다. 네덜란드에서 구입한 그 기계를 5년 이상 사용했다. 일본에서 구입해 온 직화식(가스불에 직접 굽는 방식) 로스터도 한동안 병행해 사용했다. 빈스서울의 사장이 몸소 왕림해 강습도 여러 차례 해줬지만 번번이 태워먹기 일쑤였다. 잘 구워져도 전기식보다 맛이 나아지지 않았다.

    또 하나, 이맥스의 열풍식 로스터도 사용했다. 성능은 괜찮은 편인데 물건으로서의 충족감이 빈약했다. 원가절감에 몸부림친 전형적인 국산의 거친 만듦새. 그래도 이것들을 번갈아가며 저렴한 커피 생활을 즐겨왔다. 생두가 볶아져 원두커피가 되면 당장 값이 열 배로 뛰니까. 날마다 커피를 즐긴다면 어째서 직접 로스팅을 안 하는지 모르겠다. 그 비싼 원두 값이 부담스럽지도 않은가.

    어느 날 명지대 유영구 이사장의 식사초대 자리에 끼게 됐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주인공 이태원이 우측에, 맞은편에 재담가 김정운 교수가 자리한 유쾌한 좌석이었다. 유 이사장도 나 비슷한 증세가 있는 듯했다. 흥이 난 그가 장충동 자신의 스튜디오로 일행을 곧장 몰고 간 것이다. 세상에나. 커피를 좋아해서 각양각색의 머그잔 600개를 수집해놓았고 오디오를 좋아해서 2A3 진공관 앰프와 영국의 고풍 KLH 스피커가 바닥에 깔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물론 상류사회 인사가 마련한 스튜디오 설비와 줄라이홀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래도 오디오와 커피 취향이라는 공통항이 있다.

    유난히 눈에 띄는 물건이 로스터와 그라인더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이로스터’라는 이름의 그 기계는 해외에서 대단한 사랑을 받는 화제의 물건이었다. 국산인데 다들 미국산으로 안다고 했다. 일본 칼리타사에서 제작한 그라인더는 정말 아름답게 생겼다. 앙증맞게 작고 귀여운 외모는 섹시해 보이기까지 했다. 다만 이름이 어처구니없게 촌스러웠다. 그 잘생긴 그라인더에다 ‘나이스컷밀’이라는 막무가내 이름을 붙여놓았다.

    힘들고 힘든 로스팅의 세계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커피도 음악의 세계처럼 무궁무진하다.

    하이소사이어티 쪽은 애당초 인연이 없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내 결사의 세 분야 오디오, 음반, 커피만은 끝장까지 가야 한다. 확실히 감칠맛이 두드러진 유 이사장의 커피 맛을 따라잡기 위해 그의 기계를 죄다 구입하고자 했다. 자료를 뒤지다 보니 그의 ‘아이로스터’보다 세 배 가까이나 비싼 ‘제네카페’ 로스터를 알게 됐다. 여러모로 강력하고 운용의 묘를 발휘할 여지가 많은 기계였다.

    일단 생두(그린빈)부터 사정없이 사들였다. 북아프리카산(産)으로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모카 하라 G-5, 케냐 AA, 모카 시다모 등이다. 남미산으로는 과테말라, 콜롬비아 수프리모, 코스타리카 따라쥬 두타, 브라질 옐로 버본 등. 그리고 동남아산으로 특별히 애호하는 수마트라 만델링과 인디아 몬순드 말라바 AA, 토라자 칼로시를 듬뿍 구입했고 내친김에 가격이 두 배 이상이라 망설여지는 쿠바 TL도 소량 주문했다. 뭐 외래어 이름들이 난삽해 보이지만 가령 물김치 백김치 나박김치 오이소박이 식으로 이해하면 된다.

    생두를 쌓아놓고 새 로스터에 볶고 볶고 또 볶는다. 어떤 자는 아예 뽕을 빼려는지 4일간 잠을 안 자고 계속 볶았다는 체험담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연일 계속 볶아대기는 했다. 대체 넘쳐나는 원두들을 어이하랴. 감동의 선물질은 그래서 시작된 것이다.

    어떤 분야에 진입하면 이유를 모르고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로스팅에도 그런 일이 있다. 가령 생두 말리기 단계. 로스터 회사에서는 전혀 필요 없는 일이라고 말리지만 커피쟁이들은 부득불 생두 말리기를 해야 한다고 우긴다. 160도 설과 200도 설로 양분되는데, 어쨌든 콩이 익지는 않을 정도의 약불로 대략 11~12분을 먼저 가열한다. 콩의 수분을 날리는 것이다. 노릇노릇하고 구수한 냄새가 풍겨난다. 그 다음 250도의 최대 화력으로 마음껏 돌린다. 대략 5~7분. 푸르던 생두가 노란빛을 거쳐 옅은 갈색을 통과해 마침내 짙은 갈색에 이른다. ‘따닥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1차 팝핑이 일어난다. 팝핑 소리가 잦아들 무렵 온도를 240도 내외로 낮춘다.

    실력은 이 순간에 발휘되어야 한다. 국제 표준으로 8단계의 로스팅 등급이 있는데 어느 등급에 도달시킬지 판단을 내릴 시점이다. 볶아진 커피를 빠른 속도로 식히는 쿨링 단계에서도 계속 콩이 익어가기 때문에 적절한 시점을 앞질러 판단해서 기계를 멈추어야 한다. 시티 또는 풀시티가 가장 애호되는 등급인데 풀시티로 짙게 볶겠다고 콩에서 오일이 나오도록 돌리다가 쿨링을 시작하면 최종적인 결과물은 그보다 훨씬 강배전이 돼버리기 일쑤다. 적절한 정지 시점 선택의 노하우를 터득하느라 때론 설익고 때론 타버린 원두를 무수히 배출해야 했다.

    어쨌든 선물할 수 있는 원두는 쌓여갔지만 애석한 일이다. 선물할 대상이 생각보다 별로 없었다. 커피믹스 이상의 커피를 즐기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설사 원두커피를 좋아한다고 해도 몇천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드리퍼조차 집에 갖추어 놓은 사람이 주변에 거의 없었다. 내 주변인들이 이상한 건가, 나 혼자 별쭝난 것일까. 암만해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이 땅에 살아 있는 군사문화 가운데 인스턴트커피는 좀 희한한 경우다. 미국 군대가 남겨놓은 유산이니 말이다.

    커피콩 골라내기, 무아지경

    아침을 지나 점심나절로 흘러가는 시각이다. 여름 한철을 콩 고르기로 보냈다. 몇 달에 걸쳐 엄청난 양의 생두를 사들였고 그 첫 단계로 핸드픽이라고 부르는 일을 해야 한다. 혹시 직접 로스팅해서 파는 커피집에서 그런 광경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로스팅집 주인은 하루 종일 쭈그려 앉아 무얼 골라내는 일을 한다. 생두의 불량품을 골라내는 일이 바로 핸드픽이다. 잔돌 같은 불순물은 물론이지만 깨어진 콩, 벌레가 파먹은 콩, 누렇거나 검게 변색된 콩, 크기가 유난히 작은 콩, 모양이 일그러진 콩을 하나하나 손으로 골라내야 한다. 예민한 사람은 벌레 먹은 커피콩 하나만 들어가도 잡맛으로 커피맛 버린다고 주장한다.

    작업실 한가운데 넓은 평상을 펴놓고 흰색 전지를 깐다. 그 위에 생두를 좌르르 쌓아놓고 한옆에는 오늘의 음반을 한 무더기 놓고 일에 들어간다. 늘 느끼지만 나는 머리 쓸 필요 없는 단순노동에 어울리게 태어난 사람인 것 같다.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이 아주 조금씩 생두 더미를 밀쳐내며 못난이 콩을 골라낸다. 인도네시아산 만델링같이 생산지에서부터 험하게 관리되어 오는 콩은 그야말로 버릴 것과 건지는 것이 반반인 정도다.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줄라이홀 삼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LP판들.

    무아지경. 핸드픽 무아지경도 경지라면 경지다. 틀어놓은 LP에서 무슨 음악이 들리는지 느껴지지 않는다. 휴대전화가 울려도 스팸으로 간주하고 받지 않는다. 식사는 쉽사리 건너뛰어버린다. 골라야 할 분량이 점점 줄어들어 마무리로 치달아갈 때의 성취감이라니! 원래 등이 조금 굽은 편인데 장시간 쪼그리고 앉아 일을 하다 보면 내 몸이 마치 쥐며느리처럼 동그랗게 말리는 걸 느낀다. 쥐며느리거나 바퀴벌레거나 혹은 빠삐용인들 어쩌겠는가.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전쟁을 벌여도 나는 모른다. 내일 우리나라에 IMF가 찾아와도 나는 오늘 한줌의 콩을 고르겠다, 라고 말하자니 우, 가슴팍을 뻐근하게 후려치는 양심이….

    공지영이 그렇게 썼다. 슬퍼하는 것도 즐거워하는 것도 죄스러워지는 젊은 날을 보냈다고. 저물녘 강변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도 마음의 짐으로 느껴지는 청춘기를 보냈다고. 나도 그랬다. 친구들이 하나하나 감옥을 찾아들어가는 시기에 절간을 찾아들어가 한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비겁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감옥이 장성의 백양사 암자였다. 언제나 정면으로부터 빗겨 지나가는 생애.

    콩을 고르거나 원두를 볶거나 드리핑해 내리거나,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金鉀洙

    1959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어국문과 졸업

    시인 및 음악칼럼니스트

    저서 : ‘나의 레종데트르’ ‘나는 왜 나여야만 할까?’, 시집 ‘세월의 거지’ 등
    LP를 닦거나 말리거나 라벨링을 하거나 직접 틀거나 모든 것이 혼자서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다. 정신의 허기로 하루하루가 고달팠던 이십대 시절 백양사 청류암의 상좌승 청호가 도량 뒤켠 하지감자밭의 김을 매면서 내게 가르쳐줬던 비의다. 혼자서 하염없이 시간을 소비하는 일. 사람 없이,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서 사람처럼 사는 일.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며 정성스레 만들어놓은 원두를 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어 한다. 좀 웃기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웃기지 않다.

    지금 줄라이홀은 혼자를 견디는 작업을 하는 작업실이다. 아, 마누라와 아들이 있는 집에 들른 지 너무 오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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