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남성지 ‘GQ’ 편집장 이충걸

쇼퍼홀릭 여기자,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남자에게 물었다. “왜 사죠?”

  • 김민경 주간동아 편집위원 holden@donga.com

    입력2008-09-03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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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젊은 남성들이 즐겨 읽는 잡지 ‘GQ코리아’의 이충걸 편집장은 ‘신동아’의 통상적인 인터뷰 대상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겐 얘깃거리가 많다. 패션, 트렌드, 라이프스타일, 문화 등등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지면에 반영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40대 중반의 한국 남성으로서 자신이 ‘불굴의 쇼핑애호가이자 물욕의 화신’임을 당당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최근 쇼핑을 소재로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란 책을 낸 그를 자타공인의 ‘쇼퍼홀릭’ 여기자가 인터뷰했다. ‘개성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두 사람이 나누는 ‘비일상적인’ 대화에서 신동아 독자는 무엇을 느낄까?‘편집자’
    남성지 ‘GQ’ 편집장 이충걸

    사진제공 GQ코리아

    3년전 여름, 싱가포르. 항상 에어컨 소음이 깔려 있는 호텔 객실은 누구라도 쓸쓸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낯선 전화 벨소리에 잠이 깨 수화기를 들자 이름을 확인하는 한국 남성의 목소리가 1200W 조명처럼 비몽사몽간의 의식을 깨웠다. 그의 목소리는 진지하고 은밀했으니, 어떤 기대를 가졌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나, 지금 배달된 신문에서 무척 중요한 정보를 봤어. 오늘부터 음, 어제 본 쇼핑몰에서 세일이 시작된다는 거야. 하지만 모든 브랜드는 아니라서 신문을 오려놨어. 몇 시까지 나올 수 있지?”

    으하하. 이 남자, 쇼핑중독자로군. 그렇지 않다면 아침 7시에 함께 출장 온 다른 회사 여기자 방으로 전화할 수는 없었을 거야. 공범자의 심경으로 나는 단숨에 그가 좋아졌다. 낯선 도시 싱가포르에서 3박4일 동안 나의 쇼핑메이트였던 그는 ‘GQ코리아’의 이충걸 편집장이다.

    남성을 계몽하는 ‘불굴의 쇼핑애호가이자 물욕의 화신’

    GQ는 보그와 뉴요커, 배니티페어 같은 잡지를 내는 미국 미디어그룹 콘데나스트가 발행하는 ‘남성 라이프스타일’ 잡지다. 미국에서 1957년에 창간돼 현재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14개 국가에서 발행된다. GQ코리아는 한국에서 ‘남자가 무슨 패션지?’라고 말하던 2001년에 창간됐다. 참고로, GQ코리아의 독자는 물론 열에 아홉이 남성인데, 그들은 잡지에 이런 독자편지를 보내온다.



    “여직원들이 입을 모아 저를 칭송하더군요. 공무원 생활하면서 이런 옷차림 보기 쉽지 않다고 말이에요. 고리타분한 아저씨 같다는 선입관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이 거듭나는 그날까지 GQ가 계몽해주세요.”(김○표)

    “그녀의 선물은 디올 가방으로 정했다. 그리고 나를 위해 GQ에서 로로피아나의 캐시미어 니트가 나온 페이지를 살며시 접어 그녀에게 주리라.”(장○영)

    남성지 ‘GQ’ 편집장 이충걸
    현재 GQ코리아는 여성과 남성을 합친 라이선스 매거진의 판매 순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인터뷰 않기로 유명한 배용준 장동건 원빈 같은 배우들도 GQ엔 얼굴을 내민다. GQ를 구독하는 남자들이 남달라 보이는 건, 과연 이충걸 편집장의 설명처럼 ‘개명한 스타일의 남자 잡지’로 자리를 잡아서인 듯도 하다.

    GQ코리아는 이충걸이라는 사람의 인격이기도 하다. 초대 편집장이 그로 결정되자 (관련 업계에선) GQ가 파격과 날카로움, 부드러움과 위트로 다른 잡지를 앞서가리라고 예상한 이가 많았다.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공부한 그는 실험적인 문화매거진 ‘페이퍼’를 거쳐 ‘보그’의 피처 에디터(취재 기자)로서 다소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읽고 나면 분명 고진감래의 즐거움이 있는 글쓰기로 고정 팬을 확보한 스타였다.

    1년 전, 다시 만난 그가 “나, 쇼핑에 대해 책을 낼 거야” 라고 했을 때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신동아에 ‘쇼퍼홀릭’이라는 쇼핑 칼럼을 쓰는 나는, 언젠가부터 문학과 지성의 뮤즈가 된 백화점과 청담동을 소재로 날마다 패션 에디터들과 학자들(인류학에서 경제학, 심리학 등)이 쇼핑에 대한 글을 쏟아내는 걸 보면서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들은 진정한 쇼퍼홀릭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대한민국에 쇼퍼홀릭이 일만여덟 명이 있다한들 그중 몇 명이 ‘내가 바로 쇼퍼홀릭이오’ 하고 커밍아웃하는 글을 쓰겠는가. 쇼핑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우울증 환자로 단정하고 프로작을 처방하거나 ‘된장녀’라며 돌을 던지는 사회에서 말이다. 즉, ‘미처 탐구되지 않았던 쇼핑에 대한 뜻밖의 기록을 쓸 수 있는 진지한 쇼퍼홀릭’이라는 매우 희귀한 존재가 바로 나라는 ‘쓸데없는’ 자만심 같은 게 있었다. 그러다 ‘불굴의 쇼핑애호가이자 물욕의 화신’이자 남성인 이충걸 편집장을 만난 것이다.

    그는 함께 쇼핑을 하면서 장소팔 고춘자 만담을 나눌 수 있는, 내가 만난 최초의 남성이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시계와 선풍기, 쌩하고 지나간 람보르기니 같은 것들을 동시에 포착하여 색과 디자인과 브랜드의 역사, 그것에 얽힌 에피소드를 재구성하고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일이 가능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진.

    나는 이것이 트렌드이고, 말하자면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소비가 한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인 일상이고, 생의 유일한 사건이자 노동이고, 쾌락이라는 것.

    ‘갖고 싶은 게 너무 많은 인생을 위하여’

    이충걸 편집장의 책이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란 이름으로 나왔다는 소식에, 나는 곧바로 알라딘에서 그 책을 쇼핑했다. 부제가 ‘미처 탐구되지 않았던 쇼핑에 대한 뜻밖의 기록’이다. 이런, 별걸 다 알고 있네, 이 남자는.

    결국,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처 탐구되지 않았던 쇼핑의 어떤 면들을 그가 제대로 탐험했다는 것을. 그에게 ‘책이 참 하드코어하다’는 짤막한 평과 함께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니 이 인터뷰에는 많은 부러움과 약간의 시비가 섞여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 출간을 축하한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당신의 첫 반응은 ‘신동아와 내가 어울릴까?’라는 것이었다. 신동아도 GQ처럼 많은 대한민국 남성이 본다.

    “모든 것에는 적재적소가 있다. 이것이 적소일까 생각했다. 내가 아는 신동아는 정치적 영향력이 큰 잡지다. 그런 잡지를 읽는 사람이 볼 때에는 자본주의의 첨병이며 매판자본의 하수인 중 한 명이 쓴 책이 도덕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외피로만 볼 때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 ‘이별이 쇼핑에 미치는 두 가지 영향’ ‘사치의 이중성’ 같은 목차 제목들은 확실히 신동아 기사 제목들과는 차이가 있다.

    “소비사회에서 왜 사람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져도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거다. 책의 주제는 마지막 장 ‘무엇을 위한 죄의식인가’에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차에 있는 재미있는 말들을 보고 인터뷰를 하자고 한다. 내가 5년 동안 쓴 책을 5분도 읽지 않은 방송진행자들이 ‘이제 뭐, 남자들도 쇼핑 많이 하죠’ 이딴 얘기를 한다. ‘내 아인 특별해요’라는 용서할 수 없는 분유 광고처럼, 내 책만 특별하다는 건 아니지만.”

    ▼ 나도 쇼핑의 이면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책을 보고 좀 놀랐다.

    “그렇다면 미안한데. 요즘 작가 되기 얼마나 쉬운가. 그런데 쉽게 쓰고 쉽게 만든 책은 아니다.”

    ▼ 이 책이 잘 팔린다면, 나도 희망을 가져보겠다.

    “한 달 안 돼 초판이 매진됐다. 이 책은 문명사회에서 만나는 소비패턴을 다 포괄한다. 책의 질, 사색, 분석, 관점과 논리에는 자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좋아할진 몰랐다. 출판사를 3년 기다리게 했는데 좀 덜 미안하게 됐다. 그때도 분량은 돼 있었다. 그러나 하루를 보태면, 알다시피, 소비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발명, 주저와 확신, 그런 포만한 감정이 하나씩 늘어나는 거다. 어느 단계에선 줄이는 일을 해야 했다.”

    “기사의 품질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남성지 ‘GQ’ 편집장 이충걸

    사진제공 GQ코리아

    ▼ GQ코리아의 편집장으로서 당신을 소개해달라.

    “회사에선 라이선스 잡지로 GQ를 들여올 때 남성지니까 편집장은 남자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거다. 한국의 웬만한 남자 에디터들을 다 살펴본 거 같다. 그러다 회사에서 길러 분양하자,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래서 ‘보그’에서 제일 잘생긴 내게 제안했을 거고.”

    ▼ 그래도 편집장은 얼굴만 갖고 되는 게 아니니까, 걱정 좀 했을 것 같은데?

    “회사에선 내 사고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불안이 있었을 거다. 편집장이 되면 하나만 잘해선 안 되니까. 편집장에게 요구되는 인격적인 면과 기술은 거의 무한하더라. 사진과 기사를 변별하기 위한 명료한 기준과 마감을 독려하는 한니발 의식, 예산을 범위 안에서 쓰는 경리사원 정신, 분쟁 난 스태프들을 조정하는 책사 역할, 널브러진 사람들을 태반주사 같은 한 방으로 고무할 수 있는 치어리더도 돼야 한다.”

    ▼ GQ코리아가 그쪽 업계에선 꽤 성공을 거두고 있던데.

    “나도 잘 몰랐는데, 의외로 내게 지도자 기질이 있더라. 그래서 헤매지 않고 책을 론칭했고, 국내외에서 두루 칭찬을 들었다. 제일 많이 칭찬받은 건 기사였다. 난 기사의 품질에 병적으로 집착한다. 글과 문장은 모든 것의 요체인데, 글을 못 쓰는 기자들이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요즘은 비주얼이 예쁘고, 비싼 광고 넣고, 전체적으로 있어 보이면 잡지로 인정받는 거 같다.”

    ▼ 요즘 잡지에서 활자 크기를 줄이는 유행이 독자가 그림만 보고 글은 읽지 않게 하려는 의도라는 말도 있다.

    “나도 GQ 만들면서 그런 이유로 열 번 정도 글자 크기를 작게 했다.”

    ▼ 정말?

    “목불인견인데, 안 실을 수는 없는 기사가 있다. 글씨를 최대한 작게 하고, 디자인도 숟가락이 잘 안 들어가게, 읽을 마음 안 생기게 했다. 부끄러워서 독자들이 읽는 게 싫었다.”

    -라이선스 잡지들이 서양 옷을 소개하고, 서양 브랜드들이 나오니까 영어 단어를 발음 나는 대로 쓰는 영어이두가 대세가 돼버렸다. GQ는 그 예외 중 하나다.

    “GQ는 한국말의 기준을 세우고 사장된 한국말을 채집하는 노력을 많이 한다. 애트모스피어가 너무 스트레인지하지, 크리에이티브하고 모던한 라이프를 힙하고 핫하고 쉭하게 즐겨보라고 말하는 에디터들이 영어 잘하는 것 맞나? GQ의 노력은, 아이러니일 수 있겠지만, 난 늘 강조한다.”

    ‘자존심이 마케팅이다’

    ▼ 얼마 전 GQ의 한 기자를 만났는데, 결코 남성 패션지라고 하지 않더라.

    “GQ를 보면 알겠지만 패셔너블한 라이프스타일 잡지라고 해야 옳다. 촌스럽게도 GQ 편집장은 패셔너블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세대고, 잡지는 사회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구식이다. 기사를 보면 치장은 했지만 아웃사이더적이고 반골적이다.”

    ▼ 나도 GQ 정기 독자인데, 기사가 결코 쉽지 않다. 한국 소설의 문제점을 분석한 기사는 문예지같고, 영화 기사는 영화 전문지 같다. 대중음악 기사가 다루는 가수들 중에는 내가 모르는 언더그라운드가 자주 등장한다. 이런 잡지가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 놀랍다.

    “그건 잡지의 자존심이다. 내가 광고주라면 자존의 욕구가 강하고, 자기만의 광채를 절대 잃지 않으며, 메시지 하나는 기필코 전하고야 마는 잡지에 광고를 싣겠다. 요즘 연예인의 권세가 방송국도 들었다 놨다 한다. 그래서 매니저들이 ‘우리 애가 화보 찍고 싶어 해요’ 하면 잡지가 무조건 고마워하는 줄 안다. 얼마 전 모 엔터테이너가 화보 촬영을 하면 그 옷을 주냐고 묻기에 ‘넌 거지냐?’고 했다. 또 그전에 모 여배우가 그리스로 보내주면 인터뷰를 하겠다기에 ‘그렇게 외국 가고 싶으면 모 여행사 괌·사이판 3박4일 34만9000원짜리 여행권을 내 돈으로 끊어주겠다’고 했다. 기자가 앵벌이가 되어 이 브랜드, 저 브랜드에서 돈을 모아 연예인은 퍼스트클래스에 태워 보내고, 기자가 수발들다 오면 찬양시밖에 더 쓰겠나. 그건 싫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GQ라면 믿겠다’는 ‘마케터블’한 소리를 듣는다. 난 회사에 자존심이 마케팅이라고 주장한다.”

    ▼ 패션업계 파티나 행사장에 자주 초대를 받지 않나. GQ 편집장이라면 매일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은성한(화려한) 파티에 참석할 것 같다.

    “내가 광장시장에서 깍둑썰기한 소 생간을 장에 찍어 먹는 걸 보고 싶은가. 사실 파티란 GQ의 목차를 구체화한 유쾌한 잔치다. 그러니 현대의 편집장답게, 젠틀하고 양식적으로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도 중요한 자질이다. 하지만 난 파티나 행사장에 가면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죽을 것 같다. 행사장 가면 난 양부모 오기를 기다리는 고아처럼 기둥 뒤에 숨어 있다.”

    ▼ 당신의 글이 주는 느낌과 아주 다르다.

    “글이 적조리하고 복조리(한마디로 매우 럭셔리)해서?”

    ▼ 좀 그렇다. 럭셔리한 브랜드, 명품이 많이 등장하니까.

    “향수를 싫어해도 뿌린 곳에 있다 보면 입은 옷의 올과 올 사이에선 냄새가 난다. 그래서 내 글이 럭셔리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나는 나만의 관찰과 관점으로 민첩하게 보려고 한다.”

    남자가 알아야 할 ‘감각의 경계’

    저녁 무렵, 연세대 동문 쪽 김옥길기념관에서 시작한 인터뷰는 커피숍 영업이 끝난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우리를 기다려준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의 폴크스바겐 골프가 서 있다.

    1990년대 후반 그를 처음 직접 만난 날, 그가 목적지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제안을 했더랬다. 메르세데스나 포르셰의 쭉 뻗은 보디를 그리던 나는 1992년식 빨간색 프라이드 앞으로 인도됐다. 헤드램프가 부서져 앞으로 쏟아지려는 걸 노란색 테이프로 감고, 안테나는 심하게 휘어져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 이 기계가 이렇게 앞으로 가죠”라며 붕붕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모습은 더 기이해 보였다.

    그가 4년이나 탔다는 그 차는 어느 날 그가 냉각수 통에 엔진오일을 붓는 바람에 영원히 멎었다. 그는 그 다음 2000년형 올드 로버 미니를 탔다고 한다. 그가 작은 차만 타는 이유가 그의 책 ‘작은 차로는 멀리 떠날 수 없네’라는 이야기에 들어 있다.

    ▼ GQ 7월호에 나온 거 보고 바로 산 신상(신상품) MP3다. 오늘 인터뷰하면서 처음 녹음 기능을 써 본다. 안 좋으면 GQ에 항의할 거다. 어떤 사람들이 GQ 독자인지 궁금하다.

    “군인들이 내무반에서 많이 본다.”

    ▼ 뜻밖이네.

    “부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돌려 읽으면서 그들은 잠재된, 돈이 들어가는 욕구를 펼쳐 보일 날을 기대할 거다. 이런 책을 보면 감식안의 관점에서 진짜 스타일을 가진 남자로 양육될 거다.”

    ▼ 다른 남성지엔 남자가 여자에게 잘 보이는 법, 여자 유혹하는 기술, 뭐 그런 게 꼭 있는데 GQ엔 그 자리에 인스턴트 음식을 웰빙하게 조리하는 법, 그런 기사가 있다.

    “아, 남자가 여자 꼬시고 그러는 거? 난 남자들이 세속적인 성공이나 여자 때문에 GQ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난 사람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일상 중에 있는 가치들을 새로 인식하길 바란다.”

    ▼ 여자들은 스타일리스트처럼 완벽한 차림의 남자에게 거부감이 있다. 자기 옷 쇼핑에 몰두하는 것도 싫다. 여자의 옷이나 가방을 늘 알아보는 것도 부담스럽다.

    “GQ 독자라면 여자와 함께 쇼핑할 때 상대의 옷차림을 사려 깊게 살펴보고 적절한 코멘트를 할 거다. 그러곤 무료주차 시간 안에 남성복 매장에서, GQ 보고 전에 가본 곳이기 때문에, 자신의 옷을 빨리 골라낼 거다. 이건 배려의 문제다.”

    ▼ ‘구찌’ 같은 슈트를 입고 길에서 토하는 모델이 등장하는 화보를 보면, GQ 독자들이 정말로 그럴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내가 패션 팀에 요구하는 건 논리다. 지금 말한 화보는 12월호였을 거다. 연말에 술자리는 엄청 많고, 이튿날 속이 부대껴 길에 토하기도 할 거다. 그게 현실이다. 남자 모델에게 짙은 메이크업을 하게 하고 푸른 형광등 아래서 촬영하는 건 하지 않는다.”

    ▼ GQ엔 패셔너블한 남자들을 비판하는 기사도 많이 나온다.

    “요즘 벼린 감각을 가진 남자가 많다. 그 감각엔 경계가 있는 거다. 너무 갖춰 입어서 스타일리스트처럼 보이는 것과 스타일을 아는 남자의 위트 있는 옷차림은 굉장히 다르다. 그런 기사는 지나친 것에 대한 야유다.”

    ▼ 그 경계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전혀 어렵지 않다. 어떤 남자가 있다. 그는 깨끗하게 씻는다. 한쪽에 작은 링 귀고리를 한다. 이건 괜찮다. 그런데 양쪽에 하거나 큐빅이 박힌 걸 했다면? 매니큐어를 칠한 남자들도 있다. 그건 좀 낯설다. 금반지 하나는 할 수 있지만 다른 손에 옥가락지가 있다면? 단정함에 대한 경계는 모두 갖고 있을 거다.”

    “‘대부분’ ‘남들은’이라는 말은 나와 무관”

    남성지 ‘GQ’ 편집장 이충걸

    이충걸 편집장이 좋아하는 ‘GQ코리아’ 표지와 화보.톱스타 조지 클루니 인터뷰 기사가 실린‘GQ코리아’. 서울의 오래된 아파트, 올림픽 선수촌 풍경 화보는 GQ코리아다운 기획이다.

    ▼ 쇼핑 얘기를 해보자. 2년 전 독일 뮌헨에 함께 출장 갔을 때 알루미늄으로 된 선풍기를 하나씩 샀던 걸 기억하는가. 짐이 커서 창피했고 고생도 많이 했다.

    “난 선풍기를 좋아한다. 이탈리아에서도 하나 샀다.”

    ▼ 당신은 책에서 ‘의식적으로 불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쇼핑중독’이라고 정의했다. 독일까지 가서 선풍기를 산 거 보면 심각한 쇼핑중독이 아닐까. 싸고 가벼운 플라스틱 선풍기도 잘 돌아가는데 말이다.

    “싸고 품질 좋은 게 다가 아니다. 그 선풍기는 잘한 소비의 목록에 찬란하게 등재돼 있다.”

    ▼ 당신이 점찍어둔 선풍기 가게를 찾는 데 한 시간, 선풍기를 살까말까 망설이는 데 30분, 선풍기 옆에 있는 병따개와 발걸레와 가방을 보는 데 40분이 걸렸다. 그전에 당신이 어머니께 선물하려고 산 가방을 잃어버려 한바탕 소동도 일어났다. 여자가 그랬다면 대부분의 한국 남자는 화를 냈을 거다.

    “‘대부분’이라는 말은 ‘나랑은 상관없다’는 뜻이다. 딴 사람들은 안 그래, 그딴 얘긴 하지 말아야 한다. 엄마가 반찬에 깨를 뿌렸는데 난 깨가 싫다. 양념은 재료의 맛을 격려해야 하는데, 깨는 맛을 훼손한다. 엄마가 ‘다들 깨가 고소하다는데 넌 왜 안 먹니’라고 하시기에, ‘다들 고소해서 먹으면 내 배가 아니라 자기네 배가 부른 거’라고 대답한다. 난 고유한 개인이며 각자다. 나는 줄무늬를 좋아하고 청바지도 좋아한다. 다른 사람들이 가당키나 하냐고, 나이가 몇이냐고 한다. 하지만 아르마니는 노인이 되어도 청바지 입는다. ‘대부분’ ‘남들은’이라는 말은 근거 없고 이유가 모호하거나 자기들도 남에게 강요당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의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야 한다.”

    ▼ 당신이 아주 극단적으로 다른 면들을 갖고 있다는 걸 아는가? ‘마치 오래된 과거의 남자 같기도 하고, 아주 먼 미래에서 온 존재 같다’거나 ‘쾌활한 보헤미안 기질과 사립학교 고등학생 같은 절제를 지녔다’고 책날개에 표현된 말이 아주 적절해 보이는데.

    “난 철이 없다. 그러나 경우는 아주 밝다. 내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자주.”

    쇼핑과 연애의 비슷한 점

    ▼ 당신 책에 ‘쇼핑중독자들의 비밀’이 나온다. 쇼핑중독자들은 ‘자신을 개선하고 사회 경제가 굴러가게 만드는 사람들이고, 쇼핑만이 시든 욕망에 다시 불을 댕길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순수한 사람들’이라는 대목이다. 쇼퍼홀릭으로서 위로가 됐다.

    “누구도 무관하진 않은 얘기일 거다. 완벽한 소비란 있을 수 없고, 쇼핑할 땐 가슴을 에이는 후회와 저미는 듯한 좌절들이 망또처럼 우릴 덮지 않는가.”

    ▼ 책 읽다 눈에 띄는 게 있었다. 해외에서 카드 긋고 국내에 들어와 할부로 바꿀 수 있는데 그걸 몰랐나?

    “그 방법, 디자이너 정구호가 가르쳐줬다. 구호랑 오랜 친구다. 뉴욕 소호의 어느 매장에 갔는데, 공업용 천처럼 딱딱하고 야성적인 소재로 된 코트가 걸려 있었다. 내 몸집이 좀 소공자 같은데, 그걸 입으니 내 몸이 꼭 펜슬 같았다. 그것만 있으면 시베리아 혹한도 두려울 거 같지 않았다. 그런데 가격이 300만원이었다.”

    ▼ 펜슬처럼 보이는 옷은 흔하지 않다.

    “굉장히 곤란한 금액이다. 그런데 구호가 ‘GQ 편집장이 그것도 못 사냐’고 자꾸 놀렸다. 그러니 ‘그동안 사고도 많이 쳤는데 이 정도 못할까’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결국 옷을 들고 계산대로 가는 내 모습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 같았다. 계산대 직원에게 카드를 내민 후에도 뺏기지 않으려 꼭 쥐고 있었다. 여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빼앗아 갔는데, 카드 한도가 넘었다고 하더라. 결국 못샀다.”

    ▼ 당신은 ‘사치가 낭비나 호사와는 다르며, 인생을 생존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본성의 발로이고, 진짜 사치는 내밀하고 확고한 열광처럼 휴머니즘의 마지막 빛’이라고 썼다. 사치가 지금은 하나의 스타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물론이다. 김수현의 ‘상처’를 보면 ‘내 인생의 사치는 비누’라는 말이 나온다. 사치의 근원은 돈이 아니다. 빗방울도 나의 사치가 될 수 있다.”

    ▼ 결국 남이 하면 쇼핑중독이고, 내가 하면 취향의 발현인 거다. 그런 점에서 쇼핑과 연애가 비슷한 거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 ‘쇼핑중독자들의 비밀’ 중 ‘남자 쇼핑중독자들은 정말로 괜찮은 운동화를 봤다면 손에 넣기 전에 매장을 떠나는 일이 없다, 그리고 그날 밤 그 운동화랑 자고 싶어진다’라고 썼다. 남자도 그런 줄 몰랐다.

    “그냥 운동화를 머리맡에 두고 자고 싶다는 거다. 그게 누구는 운동화고, 누구는 자동차인 거다.”

    ▼ 당신의 경우엔 어떤 물건인가.

    “시계, 안경테, 그리고 한때 넥타이. 결정적으로 내 통장잔고를 좌지우지하는 건 시계다. 책 사는 것도 쇼핑이라면 중고서점에서의 쇼핑을 아주 좋아한다. 중고가 특별한 기분을 주는 쇼핑이 책이다.”

    ▼ 왜 시계인가.

    “굳이 설명하라면, ‘시계는 단순히 시침과 분침 두 개의 바늘이 움직여 시각을 가리키는 기계가 아니라 삶의 유한함과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사색하게 만들어주는 정신적인 산물이에요’라고 말하지만, 속마음을 들춰보면, 남자에게 자기를 위한 치장이란 측면에서 마땅한 게 시계밖에 없다.”

    ‘난 잘생긴 충걸’

    ▼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진들, 다시 공허해지지 않나(이것도 연애와 비슷한가).

    “너무 공허해지지. 그럼 또 다음 시계로 나아갈 거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이유다. 우린 지금 중세의 왕보다 더 호사를 누리고 있다. 빌 게이츠가 가진 것에 비해도 하나하나의 가격이 다를 뿐 가질 건 다 가졌다. ‘대머리 여가수’라는 연극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만사 절제를 지키고 알맞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해’(그는 연극배우 박정자의 완벽한 성대모사가다). 하지만 그럴 순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우리를 사이렌처럼 끌어당기는 숱한 오브제와 명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쇼핑을 보는 시각은 어떤 면에서 프로이트적인 것 같다. 한 개인이나 한 세대의 심리적 욕망, 변덕, 열정, 결핍 때문에 쇼핑의 취향이 생긴다고 설명하니까.

    “쇼핑은 조금 특별한 우리의 일상이다. 그 일상은 소소한 세부들로 촘촘하게 짜여 있는데, 제대로 들추어 까발려진 적이 없다. 하루하루 펼쳐지는 개인의 쇼핑의 역사를 보면, 개인적 내력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나뿐 아니라 모두를 포괄하는 주제다.”

    ▼ 쇼핑 리스트에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의식과 무의식이 반영돼 있고, 경제적 문화적인 맥락이 무엇을 살지 결정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누구도 쇼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다. 숙명처럼.

    “그렇다. 그러나 유혹 앞에서 우리는 꿋꿋해질 수 있다. 세월 덕분에 조금씩 사물의 무상함을 깨닫고, 정리된 눈으로 바라볼 순 있을 거다. 전엔 뭘 살까를 생각하면 이거저거 바로 쇼핑리스트를 만들 수 있었는데, 요즘은 내가 뭘 갖고 싶은지 모르겠다.”

    ▼ 10년 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때도 아마 잡지를 내고 있을 거다. 주기적으로 책도 낼 거다. 난 종이와 연필과 함께 살아가는 내 삶이 참 다행스럽다. 그러나 난 환경미화원이 되어도 누구보다 낙엽을 잘 쓸 거다.”

    ▼ 모든 것이 참 명확해 보인다.

    “그렇지 않으면 어떡할 건가? 나의 부족함과 아둔함에 대해 평생 나 자신에게 양해를 구하며 살까?”

    그가 만약 부자라서 300만원짜리 코트를 앞에 두고 친구의 의미와 지나온 인생을 반성할 필요가 없었다면, 한 달에 한번씩 무시무시한 카드청구서를 보며 인간 조건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이처럼 명확하진 않았을 거다. 그는 소비의 쾌락을 순간순간 삶의 가치와 저울질하는 진짜 쇼퍼홀릭이다.

    뜨겁고 습한 밤거리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새 MP3와 씨름하는 동안 그는 내가 들고 간 ‘갖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인생을 위하여’의 앞장에 서명을 했다. 그는 꼭 자신이 사라진 뒤에 열어보라고 했다. 그가 가고 난 뒤 가로등 아래서 표지를 열었다. ‘난 잘생긴 충걸’이라고 쓴 글자들이 아이처럼 수줍고 유쾌하게 달려가고 있다. 아, 다음엔 그와 무엇을 쇼핑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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