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이혼조정의 달인’ 손왕석 가정법원 판사가 들려주는 이혼풍속도

“잡은 패가 (배우자) ‘꽝’이라도 판 깨면 손해입니다”

  • 이은영 신동아 객원기자 donga4587@hanmail.net

    입력2008-09-03 14: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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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34만5600쌍 결혼, 12만4600쌍 이혼
    • 황혼이혼은 대체로 재산분할이 목적
    • 남성들, 이혼엔 동의하면서도 재산분할엔 반대
    • 100장짜리 소장 제출하며 폭로전 펴는 사람들
    • 1940년대를 사는 50대 남편, 2000년대를 사는 50대 아내
    •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 높고 잘사는 남자들이 휘두르는 폭력
    • 이혼소장에 특별한 사유 없으면 성적 갈등
    • ‘기러기 아빠’ ‘독수리 아빠’ ‘펭귄 아빠’ 이혼 늘어
    ‘이혼조정의 달인’  손왕석 가정법원 판사가 들려주는  이혼풍속도
    6월 중순 오석준 대법원 공보판사는 기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 분쟁을 조정을 통해 합의로 이끌어내는 일을 하는 판사 한 분을 취재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오 판사는 “형사사건에서 고소인과 피고인이 합의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뭔지 아느냐”면서 “백년해로(百年偕老)를 맹세한 부부가 헤어질 때 여러 조건에 합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34만5600쌍이 결혼했고 12만4600쌍이 이혼했어요. 그중 외국인 여성과 결혼했던 노총각이 3만8000여 명이에요. 이혼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집 일이 될 수 있고 내 형제의 일이 될 수 있는 거죠. 한 집 건너 한 집이 이혼으로 고아가 생긴다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겠습니까.”

    오 판사로부터 소개받은 판사는 서울가정법원에서 이혼조정 업무를 맡고 있는 손왕석(孫旺錫·52) 부장판사. KBS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두 명의 조정위원과 함께 부부의 주장을 귀담아 듣고선 “4주 후에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탤런트 신구씨를 연상하면 된다. 손 부장판사는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한 당사자들을 재판 전에 소환해 분쟁을 해결하도록 유도한다. 한 달 평균 150쌍을 만난다고 한다.

    공증비 누가 내느냐로 다퉈

    6월30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가정법원 2층 민원실에 도착했다. 마침 이혼하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이는 부부가 로비에서 큰소리로 다투고 있었다. 공증에 드는 돈을 서로 내지 않으려는 다툼이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한평생 같이 살자던 부부가 ‘양육비와 자녀 면접교섭권을 적은 각서를 공증하자’고 합의하고는 정작 2만~3만원의 공증비를 누가 내느냐는 문제로 다투다니…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돈보다는 감정의 분쟁이리라. 이혼은 정말 전쟁보다 더한 전쟁일까.



    서울가정법원 건물은 깨끗하고 산뜻했다. 일반 법원과 달리 판사실에 이르는 길이 개방되어 있었다. 10평(33m2) 남짓한 손 판사의 방에는 공기정화용 식물과 나무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서초동 법원 판사실 중에서 최고의 청정공간으로 꼽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이혼하려는 부부들에게) 판사를 만나는 단 몇 시간만이라도 머리를 식혀주고 싶어 나무를 많이 갖다놓았다”면서 “가정법원에 와서 인생을 새롭게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판사생활이 내게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어요. 형사재판을 할 때는 사악한 기운에 휘둘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사악함을 응징하고 억울함을 풀어주면서 적절한 형량을 정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이에 비해 민사재판은 형사재판보다 무게는 덜했지만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민사재판은) 법리와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법리를 따져 결론을 내리는 일종의 수학문제입니다. 형사재판에서는 답을 푸는 학생(판사)에 따라 결론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민사재판에서는 열 사람이 풀어도 답이 같아야 합니다. 전 가정법원이 좋아요. 짐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아요. 짐을 짊어지고 가는 게 아니라 부둥켜안거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느낌입니다.”

    손 판사는 누구에게도 호인으로 비칠 인상이었다. 훤칠한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그는 맑으면서도 깊고 굵으면서도 선명한 음성을 지녔다.

    ▼ (가정법원이) 새 건물이라서 깨끗하고 좋아요.

    “이 건물, 새로 지어서 환경이 좋긴 한데 가정법원으로는 별로예요. 본래 가정법원으로 지은 게 아니었어요. (가정법원은) 일반 법원청사와 분리해 지을 필요가 있어요. 법원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나게 지어야 합니다. 편안한 쉼터로 지어야 하는 거죠. (가정법원은) 고민을 해소하고 토로하는 자리가 되어야 해요. 가령 이혼하려는 부부가 들어오다가 잠깐 앉아 ‘이혼을 꼭 해야 하나’ 하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벤치도 있어야 한다는 거죠. 정부에 요구하면 잠꼬대한다고 그러겠지만요. (가정법원에는) 부모 따라온 어린아이가 많아요. 그런데 법원이 차량으로 혼잡한 도로변에 붙어 있어 매우 위험해요.”

    ▼ 우리나라 이혼율이 OECD 국가 중 3위라는데, 손 판사께서는 이혼율이 최고조에 달한 지난 5년간 이혼재판을 전담했다면서요?

    황혼이혼과 ‘대리전쟁’

    “이혼율이 최근 3년간 주춤한 상태예요. 2004년 15만건으로 천장을 때렸다가 최근엔 다소 주는 추세입니다. 혼인신고율이 낮아져 이혼율이 떨어졌다는 분석도 있어요. 정상적으로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미루는 부부도 있고, 형편상 혼인신고를 못 하는 경우도 있겠지요.”

    통계에 따르면 최근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부부’가 늘고 있다. 한국결혼문화연구소가 지난해 신혼부부 64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바로는 결혼식을 하고 3개월이 지나도록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부부가 36.4%나 됐다. 또한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지난해 전국 20세 이상 성인 7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실혼에 관한 의식 및 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 이상이 ‘결혼식을 하고도 일정기간 내에 동거를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사실혼 부부 중에는 주민등록이 말소된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혼조정의 달인’  손왕석 가정법원 판사가 들려주는  이혼풍속도

    서울 서초동에 있는 서울가정법원.

    ▼ 황혼이혼을 하는 부부가 매년 증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많아요. 황혼이혼은 60대 이상의 나이에 이혼하는 것을 말합니다. 원고가 여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은 인생을 더는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더라고요.”

    ▼ 단순히 그런 이유로 황혼에 이혼을 한단 말입니까.

    “실제로는 재산분쟁이 많습니다. 이혼을 하면서 재산을 분할할 수 있거든요. 빚을 제외하고 대충 반씩 나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살고 있는 집도 반으로 나누게 됩니다. 65세 넘은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고 싶은데 재산이 모두 아내 명의로 되어 있다고 칩시다. 아내가 돈을 안 내놓을 경우 정당하게 재산을 가지려면 이혼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여성도 마찬가지고요. 평생 전업주부로만 살았더라도 가사와 출산, 육아를 책임진 점을 인정해 법원이 재산을 반으로 나누라고 판결합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질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해주니 황혼의 나이에 이혼을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대리전쟁’인 경우도 있어요. 아들이 어머니를 이혼시키는 거죠. 사업을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돈을 안 줄 경우 어머니에게 ‘아버지로부터 재산의 절반을 정당하게 받을 수 있다’고 이혼을 부추기는 겁니다. 어머니는 다른 이유를 내세워 이혼을 요구하죠. 관건은 돈인 것 같아요. 남성들은 돈 때문에 웬만해선 이혼하려고 하지 않아요. ‘이혼은 할 수 있는데 재산은 안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웃음)”

    지난해 서울가정법원이 처리한 이혼사건을 종합하면 이혼부부는 서울에서만 2만4615건으로 2006년에 비해 1.1% 증가했다. 이들 중 재산의 50% 이상을 받은 이혼여성 비율이 54%에 달했다.

    이는 법원이 여성의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을 남성의 경제활동과 비슷한 수준으로 인정한 결과다. 혼인기간으로 구분하면 1년에서 5년 미만의 여성이 평균 53.1%의 재산을 받았고 6~10년 여성이 46.7%, 16~20년 여성이 51.6%를 기록했다. 이혼하는 부인 2명 중 1명이 남편과 동일하거나 더 많은 재산을 분할받은 셈이다. 남편이 부인에게 주는 위자료는 평균 2635만원으로 조사됐다. 반대로 이혼의 책임이 부인에게 있는 경우 남편에게 주는 위자료는 평균 2227만원이었으며 자녀 양육비는 평균 연령 12세를 기준으로 월 평균 47만원이었다.

    위자료 상한액은 5000만원

    ▼ 아내의 부정행위가 이혼사유일경우 남편이 재산 분할에 합의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펄펄 뛰죠. 쫓아내도 시원찮을 판국에 재산의 반을 줘야 하니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판사에게 항의하는 남성도 많아요. 맨몸으로 내쫓아야 한다는 거죠. 그렇지만 파탄의 책임이 있는 쪽도 재산의 절반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재산분할은 잘잘못과 관계가 없어요. 아내가 바람을 피웠어도 재산의 절반을 여성에게 주는 이유는 그간 가정을 관리하면서 임신하고 출산하고 자녀를 양육한 것으로 재산형성에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부정을 하게 된 경위를 살펴봐요. 아내의 부정행위가 발생하기까지 남편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했는지. 남편이 아내 외도의 원인이었다면 아내에게 재산도 나눠주고 위자료도 줘야 해요.”

    ▼ 전문직종에 종사하거나 기업 수준의 사업을 일군 남편이 아내에게 이혼청구소송을 당해 재산의 절반을 줘야 한다면 억울할 법도 한데요.

    “그렇겠지요. 아내의 가사노동과 가정관리로 수십억, 수백억의 재산이 축적되었다고 볼 수는 없겠죠. 법원은 이런 경우 남편의 능력이 재산 축적에 크게 기여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직업이 의사라고 칩시다. 전문적인 의술과 기업가적 창조력으로 병원을 크게 일구어 수십억원대 재산을 축적했다면 아내에게 절반을 주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하지만 젊어서부터 아내의 뒷바라지 덕분에 의사면허를 획득한 후 잘나가는 의사로 성장했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재산의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액을 아내에게 분할해야죠. 재산분할 비율은 정해진 게 없습니다. ‘재산을 모으는 데 얼마나 기여했느냐’에 따라 액수가 달라집니다.”

    ▼ 재산분할과 위자료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요.

    “재산분할은 이혼할 때 부부가 재산을 나눠가지는 것입니다. 반면 위자료는 불법행위로 빚어진 정신적 손해에 대한 배상입니다. 상한액이 5000만원이고요. 남편과 아내 모두 받을 수 있는데, 위자료를 받으려면 혼인을 파탄에 이르게 한 책임이 분명히 상대방에게 있어야 합니다. (위자료) 액수가 적으니 증액하자는 의견도 많아요. 협의이혼의 경우 몇억원에 합의할 수도 있지만 재판이혼에선 그런 금액을 받을 수 없어요.”

    시시콜콜한 치부 들추기

    ▼ 남성의 경우 재산분할에 위자료까지 주고 게다가 매월 양육비까지 줘야 한다면 자칫 치명타를 입겠어요.

    “(우리나라 이혼법은) 그래도 미국보다는 후해요. 미국은 이혼한 아내에게 부양비까지 줘야 합니다. 이혼해서 남이 된 전처인데도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미국 남성들이 왜 ‘이혼하면 쪽박 찬다’고 하겠어요? 얼마 전 독일 법관을 만났는데 고민의 내용이 우리나라와 다르더라고요. 우리는 이혼 당사자 중 어느 쪽에 파탄의 책임이 있는지, 누가 잘못을 했는지 결정하는 게 골치 아픈데, 미국이나 유럽에선 전처 생활비와 아이 양육비를 결정하는 데 판사의 에너지가 다 소비된다는 겁니다.”

    최근 몇 년간 서점가에는 이혼하는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는 이혼지침서가 즐비했다. ‘내일 죽더라도 오늘 이혼하고 싶다’ ‘이혼의 조건’ ‘우리 방금 이혼했어요’ ‘여자들 이혼, 멋지고 당당하게’ ‘이혼 잘하는 법’ 등 50여 권의 이혼전문 서적 중에는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100위권 안에 진입한 책도 적지 않았다.

    그만큼 이혼이 흔하고 쉬워진 것일까? 이혼전문 변호사들은 이혼을 두고 ‘생사를 건 결투’라고 표현한다. 이혼재판 현장에 가 보면 전쟁터보다 더 실감나고 잔인하다는 것이다.

    가정법원 판사들은 이혼재판에서 벌어지는 부부 간 언쟁은 드라마와는 달리 차분하고 냉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실화소설’이라는 것이다. 파탄의 책임이 누구한테 있는지를 밝히기 위해 배우자의 시시콜콜한 치부를 들춰내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혼을 해야 하는 이유와 배우자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100장 분량의 소장을 제출하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러면 이를 읽은 배우자는 보복하는 심정으로 120장을 써서 반박한다는 것이다.

    손 판사는 “한국의 이혼재판은 혼인관계 파탄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따지는 유책주의이기에 치열한 전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말도 마세요. (100쪽 중) 30쪽을 넘겼는데도 아직 결혼한 얘기가 안 나와요. 혼수문제부터 시작해 시시콜콜한 얘기를 다 적는 겁니다. 누구든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기술하기란 불가능해요. 대부분 자신의 시각에 맞춘 아전인수 격 글이죠. 사실무근한 얘기도 결합되어 있을 수 있고요. 서로 상대방이 쓴 내용을 읽어보게 되는데, 객관적 사실이 거의 없고 허무맹랑한 얘기만 적혀 있다면 화가 치밀어 오를 것 아닙니까. 그대로 맞대응하는 거죠. 나중엔 진실이 사라져요. 진실보다는 공격에 치중하죠. 비난의 수준이 치졸해지고 추악한 폭로전이 됩니다. 예를 들어 의처증을 설명한다고 칩시다. 얼마나 심한 의처증인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해요. 집에 들어오면 아내의 옷을 다 벗기고 냄새를 맡는다든지… 듣기 거북할 정도입니다.”

    ▼ 미국인들의 이혼은 신사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이는데요.

    “(미국의 이혼재판은) 파탄주의라 그렇습니다. 추악하게 배우자를 비난할 필요가 없어요. 이혼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사랑이 식은 부부의 현재가 중요한 거죠. 별거로 사실상 혼인관계가 깨졌고 애정이 식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혼이 가능합니다. 누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혼한다는 개념이 없는 거죠. 이혼한 부부가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죠.”

    이혼은 협의이혼과 재판이혼으로 나뉜다. 협의이혼은 말 그대로 부부 쌍방의 합의로 이혼을 결정하는 것이고, 재판이혼은 조정과 재판으로 혼인이 해소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재판이혼은 쌍방의 합의 없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혼조정신청을 하거나 조정신청 없이 바로 이혼소송을 제기한 경우로 조정전치주의에 따라 법원의 직권으로 조정절차에 회부된다.

    “이혼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정이 성립되지 않으면 결국 재판을 받아 이혼해야 한다. 이혼청구소송을 낸 부부들은 재판보다는 조정절차를 통해 이혼을 한다. 판사가 지휘하는 조정절차에서 이혼 여부를 비롯해 양육권, 재산분할, 위자료 등 이혼 조건을 둘러싼 분쟁이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내린 결론도 확정판결과 같은 효력이 있다.

    “이혼법정은 민사법정과 비슷합니다. 이혼 당사자들을 합의시키는 일은 참 힘들어요. 협의이혼을 하려는 부부들 중에는 ‘욱’ 하는 마음에 조급하게 이혼을 결심한 경우가 있겠지만, 재판이혼을 신청한 부부들은 대체로 장기간에 걸쳐 고통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합의를 끌어내려면 어느 한쪽을 양보시켜야 해요. 그런데 요즘 세상에 누가 양보하려고 하겠어요. (판사가) 양보할 수밖에 없는 까닭과 상황을 잘 설명해 납득시키면 겨우 성사되는 거죠. 조정절차라는 게 바로 그런 일입니다.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를 떠올리면 됩니다. 신구(판사 역) 외에 조정위원 두 분이 나오잖아요. (서울가정법원에는) 현재 조정위원으로 102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직 교사, 상담가, 작가, 전직 공무원들인데, 40대부터 70대까지 연령대가 다양해요.”

    ‘이혼조정의 달인’  손왕석 가정법원 판사가 들려주는  이혼풍속도

    이혼 문제를 다루는 KBS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손 판사는 “한국 여성의 상당수는 부부로 20년 이상을 살았어도 남편 명의로 된 집만 재산인 줄 알고 남편이 얼마의 부를 축적했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 조정이 잘돼 분쟁을 해결하면 보람을 느끼시겠어요?

    “너무너무 고마워합니다. 나가면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기도 해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쌍방이 고마워하니 보람 있는 일이죠.”

    ▼ 재결합하는 경우도 있다면서요?

    “간혹 있어요. 소장을 읽어보면 ‘이 사람들은 다시 한번 노력할 필요가 있겠다’는 느낌이 와요. (이럴 경우엔) 재결합시키는 쪽으로 노력합니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사연이나 연애편지를 가지고 오라고 해서 추억을 상기시키기도 해요. 살면서 꼭 나쁠 때만 있었겠습니까. 좋을 때도 있었겠지요.”

    전국에서 서울 지역의 이혼율이 가장 높다. 한해 평균 2만여 쌍이 이혼을 신청한다. 이혼 사유로는 성격 차이가 47.2%로 가장 많고, 경제 문제 13.9%, 가족 간 불화 7.6%, 배우자의 부정 7.2% 순이다. 이혼 종류로는 협의이혼이 전체의 86.9%로 재판이혼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 이혼사유로 성격 차이가 많은데, 진짜 문제가 뭡니까.

    “(부부 간에) 소통이 안 돼요. 서로 통해야 진심을 주고받을 수 있는데 꽉 막혀 있어요. 또 하나는 남성들의 의식이 시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겁니다. 60대 이상 세대는 남녀가 같은 생각과 가치관으로 살았어요. 남성이 가부장적으로 횡포를 부려도 여성이 가부장제도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이혼율이 높진 않아요. 문제는 40대 중반에서 50대입니다. 윗세대(60대 이후)와 아랫세대(40대 미만) 사이에 ‘낀 세대’라고 하죠. 이 세대의 남성은 윗세대와 정서가 동일합니다. 지적으로 양성평등이 옳은 이념이라고 믿지 않아요. 반면 여성은 40세 이전 세대와 정서가 거의 같습니다. 여성은 양성평등이 옳다고 생각해요. 남녀 간 어긋남이 굉장히 클 수밖에 없어요. 한마디로 남편은 1930~ 40년대, 아내는 2000년의 사고방식이죠. 이혼소송이 시작되면 열이면 열, 남성이 깨질 수밖에 없어요. 반면 40대 이하 남성은 정서적으로는 몰라도 지적으로는 양성평등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숨은 이혼사유 1위는 폭력

    ▼ 비슷한 세대의 남성으로서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듯싶은데요.

    “제가 쉰이 넘어서 그런지 대부분 제 또래이거나 아래더라고요. 남자에게 ‘당신처럼 생각하면 이 시대의 완전한 낙오자가 된다’고 말해줘요. 아무리 설명해도 자신이 왜 아내와 자식들로부터 배척을 당하는지 몰라요. ‘가족을 위해 등골 빠지게 헌신했다’고 생각하는데, 아내는 그렇지 않거든요. (남편이) 독선적이고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고통을 납득하지 못해요. 기습을 당한 것 같다고 해요. ‘도대체 왜 그만한 일로 이혼하자고 하느냐’고 어처구니없어 합니다. 제 또래 남자들에게 ‘당신과 같은 사고방식은 이 시대에 통용되지 않는다’고 일러주는데, 쉽지 않아요.”

    ▼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혼사유 중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폭력이 가장 많습니다. 원고가 여성인 경우 10명 중 8~9명이 남편의 폭력 때문에 이혼을 하겠다고 해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폭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거예요. 공부를 많이 했든 안 했든, 사회적 지위가 높든 보잘것없든, 재산이 많든 적든 폭력을 행사하는 건 같아요. 석사, 박사,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 이런 부류의 남성이라면 공부할 만큼 했고 합리적 사고로 훈련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니었어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데 정말 놀랐어요.”

    ▼ 태생적 한계이거나 환경 탓인가요?

    ‘이혼조정의 달인’  손왕석 가정법원 판사가 들려주는  이혼풍속도
    “남성은 말로 하는 훈련이 부족한 편이에요. 오로지 북 날리지(Book Knowledge)로만 지식이 채워져 있어요. 토론식, 대화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말에 강하겠지요. 말에 힘을 잃었을 때 주먹이 올라가는 겁니다. 여성처럼 조리 있게 말하거나 논리적으로 전달하는 게 잘 안 되니까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아요. 최근 들어선 여성도 폭력을 쓰는 경우가 더러 있더라고요. 남편이 아내가 할퀸 자국이 보이는 사진을 제출하기도 합니다. 여성의 폭력은 남성처럼 일상적이라기보다는 방어용 폭력인 경우가 많아요.

    폭력 다음으로는 배우자의 부정행위가 꼽혀요. 남성의 부정행위에는 역사와 전통이 있어요. 요즘은 여성의 부정행위 발생 빈도가 높아졌어요. 때로는 원고인 여성도 알고 봤더니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도 같은 짓을 하면서 이혼청구소송을 낸 겁니다.

    또 배우자의 폭언 때문에 못살겠다는 경우도 많습니다. 욕설도 폭언에 들어갑니다. 아내에 대한 거침없는 욕설로 이혼소송을 당한 대학교수도 있어요. 이런 경우는 남녀의 문화적인 차이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남자들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상투적 표현이 여성들한테는 견딜 수 없는 거죠. 그밖에 시댁과의 갈등도 단골 사유입니다. 배우자의 가출이 문제가 된 경우도 많고요. 남편의 폭력이 가출의 주된 원인입니다.”

    ▼ 경제적인 이유로 이혼하는 부부가 많을 줄 알았는데 뜻밖이네요.

    “중요한 건 이혼사유가 남편의 폭력이든 배우자의 부정이든 노예생활이든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대체적으로 봉합해 살아가더라는 거죠. 그런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싸움이 시작됩니다. 경제력이 뒷받침되면 폭력을 감수하면서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는 게 현실입니다. 남편이 부정을 해도 경제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힘 빠지면 돌아오겠지’ 하고 내버려 두는 거죠.”

    양육비에 인색한 아버지들

    ▼ 이혼하려는 부부 중에는 연애결혼과 중매결혼 중 어느 쪽이 많습니까.

    “연애결혼이 더 많아요. 사랑은 유효기간이 몇 년 안 된다는 거 아닙니까. 연애할 때 그럴듯하게 포장하고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혼인한 것이 문제죠. (결혼 후)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버리는 거죠. 때로 의견이 충돌하더라도 연애할 때의 감정을 되새겨보면 상대를 관용할 수 있을 텐데 그걸 못 하는 겁니다. 어린 나이에 경솔하게 결혼한 커플일수록 이혼하러 많이 와요. 신혼여행 가서 하룻밤도 안 자고 이혼을 청구한 사례도 있어요. 겨우 몇 달 살고 심지어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도 이혼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협의이혼 절차도 까다로워졌다. 이혼숙려기간제도와 상담권고제도가 그것. 대법원은 지난 6월22일부터 이혼숙려기간제도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개정민법에 따라 협의이혼을 하려는 사람은 가정법원이 제공하는 이혼에 관한 안내를 받은 후 1개월 또는 3개월간 숙려해야 한다. 양육해야 할 아이(태아 포함)가 있는 경우는 3개월, 없는 경우는 1개월의 숙려기간을 갖는다. 하지만 배우자의 폭력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는 등 급박한 사정이 인정되면 그 기간을 단축하거나 면제받을 수 있다.

    협의이혼인 경우 종래에는 친권자를 누구로 할지만 결정되면 양육에 관한 사항을 특별히 정하지 않아도 이혼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이혼하려는 부부가 양육과 친권자 결정을 위한 합의서를 제출하거나 합의가 안 될 경우 가정법원의 조정절차를 거쳐 확정된 심판본을 제출해야 한다. 또한 필요할 경우 법원은 전문상담위원을 위촉해 당사자들에게 상담을 권고한다.

    손 판사는 “이혼하려는 부모의 권리도 중요하지만 이혼으로 상처 입을 아이들의 행복추구권도 그 못지않게 소중하다”며 이혼숙려제와 상담권고제도의 의미를 강조했다.

    ▼ 양육비를 주기로 합의하고는 지키지 않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심지어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아버지도 많습니다. 양육비를 일절 받지 않는다면 아이를 넘겨줄 수 있다는 아버지도 있어요. 그런 경우에는 판사인 제가 설득을 하거나 준엄하게 야단을 치기도 합니다.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태도죠. 제가 우울해질 정도입니다. 아이를 무슨 무기나 물건처럼 흥정대상으로 삼는 아버지도 많습디다. (법원에서) 양육비 액수를 정하면서 이대로 안 보내면 유치장에 구금될 수 있다’고 압력을 넣을 정도라면 이해가 되십니까.”

    그는 “앞으로 이혼율이 더 낮아지진 않을 것”이라면서 “이혼을 하더라도 충격과 피해를 최소화하자는 것이 가정법원의 취지”라고 강조했다.

    성적 갈등도 주요 원인

    “그간 가사재판은 민·형사재판에 비해 덜 중요한 것으로 인식됐어요. 하지만 이젠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재판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인륜지대사라고 하지 않습니까. 가정법원은 복지후견적인 법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혼하려는 부부나 비행 청소년에게 ‘이혼해라’라든지 ‘징역에 처한다’라고 판결하면 곤란하죠. 국가는 가정법원을 복지후견적인 법원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한 예로 법원에 100억원의 예산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어떤 재판에 투입하면 피부에 와 닿는 성과를 내겠습니까. 가사재판부입니다. 가정법원에는 전문조사관이 있는데, 그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전국에 전문조사관이라고 해봐야 몇십명인데, 앞으로 몇백명으로 늘려야 합니다. 전문조사관이 부부를 상담하고 심층 심리분석을 하고 출장을 나가 실태조사를 하면, 이혼할 때 하더라도 만족한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손 판사는 “결혼은 결코 득(得) 보기 위해 하는 게 아니다”라면서 “소득과 이득을 따져 한 결혼은 결말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결혼할 때 ‘배우자 덕 좀 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는 처가 덕 좀 보려 하고, 여자는 ‘결혼 잘했다’는 소릴 듣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막상 결혼해보면 생각한 것과 다를 수 있거든요. 그러면 갈등이 시작되는 겁니다.”

    ▼ 현대인의 정신연령이 점점 낮아진다는 견해도 있던데요.

    “맞아요. 결혼적령기인 20대 후반이면 책임을 알 나이잖아요. 나이 먹고 직업이 있어도 부모 옆에서 뱅뱅 돌려고 하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혼인을 해도 독자적으로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교육을 많이 받고 전문직에 종사하고 사회적으로 괜찮은 집안의 자제일수록 정신연령이 낮더라고요. 30대 중반의 전문직 종사자인데 얘기해보면 정신연령이 10대인 겁니다. 우리나라도 혼인에 필요한 교육을 해야 합니다. 북 날리지가 아니라 대화방식으로 혼인에 대한 책임을 일깨우고 가정살림에 대한 지혜를 알려주고 육아에 대한 기본상식도 가르쳐야 합니다. 예컨대 예비부부학교에서 강의를 20시간 이수해야 결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겁니다. 실제로 이런 혼인교육제도를 시행하는 나라도 있어요.”

    ▼ 가장 기억에 남는 이혼 사례는?

    “상당히 충격적인 사건이었어요. 한 여성이 혼인, 출산 경력과 학력, 직업까지 속이고 나이 어린 남자와 결혼을 했어요. 이름까지 언니 이름으로 바꿨더라고요. 합의부 사건이었어요. 이 여성은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남자를 속인 겁니다.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그 남자와 결혼할 수 없을 것 같아 아예 미국으로 이민 간 언니로 행세한 거죠. 회사 생활도 언니 이름으로 했고 같은 회사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결국 남편이 이혼청구소송을 했고 이혼 판결이 났어요.”

    이혼할 때 박수 치는 미군 병사 부부들

    손 판사는 “최근 성적 트러블로 아내가 이혼을 청구하는 경우가 늘었다”라면서 “(소장에) 대수롭지 않은 사유가 적혀 있으면 성적인 불만이라고 보면 된다”라고 했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예의염치(禮儀廉恥)가 뒷전으로 밀린 시대가 된 것 같아 씁쓸해요. 최근 한 연예인 부부가 이혼재판을 하면서 ‘10년에 몇 번밖에 부부관계를 못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은 거리에서 필부필부(匹夫匹婦)가 입씨름으로 하는 얘기지, 언론에 공개적으로 떠들 얘기가 아니잖아요. 진위를 떠나 예의염치를 망각한 행동이 아닌가 싶어요. 법정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는 부부가 있어요. 그 사건에 영향을 받아 더 그래요. 주장서면에 ‘지난 몇 년간 부부관계 거의 안 했다’ ‘1년에 고작 몇 번 했다’고 적는 여자가 심심찮게 있어요. 우리 사회에서 본데가 자꾸 없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 종교인의 이혼율은 낮은 편인가요?

    “아무래도 낮아요. 목사나 종교인이 소송 당사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어요. ‘신앙 때문에 이혼을 못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종교가 인내를 가르치고 감정을 억제시키지 않나 싶어요. 반면 종교에 지나치게 빠져 헌금을 분별없이 많이 낸다든지 집을 뛰쳐나가 종단에 들어가버렸다는 이유로 배우자가 이혼을 신청하는 경우도 있어요. 주로 여성이 종교에 미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남편 모르게 집을 처분해 종단에 들어가버린 경우도 있어요.”

    ▼ 최근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들의 이혼율이 높아진다면서요?

    “제가 외국인 부부의 이혼 문제를 자주 다룹니다. 둘 다 외국인이거나 한쪽이 외국인인 부부가 제 방에서 조정절차를 밟는 거죠. 주한미군 병사 부부가 이혼할 때도 반드시 제 방을 거쳐야 합니다. 협의이혼을 하더라도 제 방에 와서 이혼할 의사가 합치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본국 서류에 이혼으로 기재되도록 합의서를 영어로 번역해 미 영사관에 내야 합니다. 젊은 미군병사의 이혼율이 높아요. 미국은 군인끼리 결혼하면 급여의 몇 배나 되는 수당을 주나 봐요. 돈 때문에 20대 초반인데 결혼한 경우지요. 미군 병사 부부들은 이혼이 결정된 후 제 방에서 나가면서 자기네끼리 손뼉 치고 축하하는 분위기입니다. 이혼 문화가 한국과 정말 다르구나 싶더라고요.”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이혼 중 7.1%가 외국인과의 이혼이었다. 외국 여성과의 이혼은 5794건으로 전년보다 44.5% 증가했는데, 국적별로는 중국, 베트남 순이다. 20세 미만 미성년 자녀가 없는 경우가 98%이고, 부부의 평균 동거기간은 3.3년이다.

    지금까지 수천쌍의 이혼커플을 만나본 손 판사는 “한국 여성이 미국 여성에 비해 한(恨)이 많고 과거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자녀에 대한 눈높이 낮춰라”

    ‘이혼조정의 달인’  손왕석 가정법원 판사가 들려주는  이혼풍속도

    이혼 조정을 하며 큰 보람을 느낀다는 손왕석 부장판사.

    “미국 여성은 맺힌 한이 없어요. 그때그때 푸니까 그런가 봐요. 반면 우리나라 여성은 10년 전 얘기를 냉장고 속에서 뭘 꺼내듯이 하나둘씩 기억해내거든요. 돌이켜 보면 어이없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도 많아요. 한국 여성들은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놓고 해소를 못한 채 사는 것 같아요. 압력밥솥을 생각해보세요. 압력이 세질 때마다 김을 푹푹 빼내야 하잖아요. 김을 못 빼내면 결국 터지는 원리와 같습니다. (한국 여성들) 꾹꾹 눌러 참으면서 40~50년 지내는 건 위험한 일입니다.”

    자녀의 외국유학에 따른 이혼도 급증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영어공부를 위해 아빠와 이별하는 한국 아이들(For English Studies, Koreans Say Goodbye to Dad)’이란 제목의 기사처럼 조기유학 열풍이 중산층으로 확대되면서 이른바 ‘기러기 아빠’가 늘고 있는 것이다.

    이 분야에도 신조어가 늘고 있다. 1년에 한두 번 자녀를 보기 위해 외국에 나가면 ‘기러기 아빠’, 경제적 여유가 많아 수시로 외국에 나가면 ‘독수리 아빠’, 아예 외국방문을 포기하면 ‘펭귄 아빠’로 불린다. 문제는 ‘펭귄 아빠’가 이산가족이 되어 혼자 외롭게 생활하는 현실을 견디다 못해 이혼을 결심한다는 것이다.

    “엄격하게 따지면 부부는 동거를 해야 합니다. 동거를 못하는 사유가 있으면 법원이 어디에서 살지 정할 수 있어요. 어느 쪽 주장이 합리적인지 들어본 다음 법원이 동거할 장소를 정하는 거죠. 한국에서 사는 게 맞는지 미국에서 사는 게 맞는지 따져보고 결정합니다. 하지만 자녀 유학을 이유로 동거 장소를 정해달라고 청구한 사례는 아직 없어요. 자녀 교육을 위해 남자가 희생을 감수하는 거죠. 자녀의 해외유학 때문에 아내와 헤어져 살다가 다른 계기로 이혼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아요.”

    손 판사가 일러주는 부부사랑 유지 3계명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부부싸움은 절대 이틀을 넘겨선 안 돼요. 적어도 이틀째 밤까지는 풀어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부부들, 별거기간이 3~6개월 지나 회복이 힘든 상태입니다. 둘째는 부부 사이에 공평해야 합니다. 아내가 내 어머니한테 잘하면 나도 장모에게 잘해 드려야 합니다. 내 여동생이 집에 자주 온다면 처제도 자주 올 수 있어야 하고, 아내도 친정에 자주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집안 분위기가 보수적이라서 아내를 희생시켜야 한다면 나도 처가에 희생할 각오를 해야 합니다. 셋째, 자녀에 대한 눈높이를 낮춰야 합니다. 요즘처럼 교육이 극성을 부리는 세상에선 자녀에 대한 눈높이를 낮추는 것이 부부의 행복을 보장합니다. 부모는 자식이 ‘바른 생활 젊은이’가 되길 원해요. 생각해보세요. ‘범생’이 얼마나 높은 수준입니까. 쉽지 않거든요.”

    ▼ 이혼하는 부부에게 지역색이 나타나기도 합니까.

    “그런 편이에요. 저의 조정 경험에 따르면 경상도 남자와 서울 여자의 조합은 좋지 않은 것 같아요. 경상도 여자와 전라도 남자는 괜찮아요. 경상도 남자는 웬만하면 경상도 여자를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경상도 출신입니다만, 경상도 남자가 대체로 직정적(直情的)이고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성향이 강해요.”

    그는 “이혼의 최대 피해자는 자녀”라면서 “무책임하고 철없는 부모가 자녀를 ‘아비 없는 호래자식’으로 만드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이혼하는 부부에게) 신신당부 합니다. 부부는 이별을 하더라도 자식의 가슴 속에 아버지, 어머니의 이미지가 살아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입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자녀가 느끼는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자칫하면 인생이 어긋날 수 있습니다. 최근 이혼법의 관심영역이 ‘재산 나누는 것’에서 ‘자녀가 잘 살 수 있는 쪽’으로 바뀌고 있는 이유입니다. 자녀를 정말 사랑하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내 아들의 아빠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 딸의 엄마를 사랑하는 겁니다.”

    “부부생활의 기초공사는 관용”

    손 판사와 이혼 얘기를 하다보니 정작 그의 결혼생활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손 판사는 캠퍼스 커플이던 이희경씨와 1983년 결혼해 1남2녀를 두었다.

    ▼ 부부싸움 해보셨겠지요?

    “제가 가정법원으로 옮기고 나선 거의 안 했어요. 고함도 안 지릅니다. 그것도 폭력이더라고요.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 말로 상대방을 때리는 겁니다.”

    ▼ 판사 남편과 살면 부부싸움에서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좀 그런 편이에요. 제가 논리적으로 이길 때가 많아요. 직업이 판사라는 걸 못 속이는 거죠. 이치적으로 따지면 내 말이 맞기 때문에 아내가 승복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얼마나 재미없는 남자입니까.(웃음)”

    그는 “고등학교 불어 선생이던 아내가 백수인 저를 선택한 건 용감하지 않았으면 힘든 일”이라면서 연애시절을 회고했다.

    “아내와는 캠퍼스 커플이었어요. 같이 인문대를 다녔지요. 철학과 졸업 후 한국과학기술원에서 행정직원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 다니다 좀 더 보람된 일을 하고 싶어서 퇴사해버렸어요.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고시에 떨어지면서 퇴직금까지 다 써버렸으니 앞이 캄캄했지요. 학교 선생을 하던 아내를 찾아가 ‘나를 좀 먹여 살려주라’고 했어요. 아내가 결혼을 승낙해주더군요. 지금까지 안 깨지고 살아가는 것은 집사람이 저를 관용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는 “부부생활을 유지하는 기초공사가 바로 관용”이라고 강조했다.

    “배우자는 오래 같이 살아서 형제 같고 피붙이 같아져야 해요. 측은지심이죠. 물도 맹물이 잘 먹히지 않습니까. 청량음료는 한 잔밖에 못 먹잖아요. 바람처럼 공기처럼 물처럼 배우자를 느낄 수 있어야 해요. 그러려면 부부 간에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를 해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는 겁니다. 사회생활도 마찬가지죠. 자기 입에 맞는 인간관계가 어디에 있습니까. 견디고 비비대면서 사는 게 인생이잖아요. (이혼청구소송을 한) 원고가 쓴 소장을 읽다 보면 ‘부부가 본래 그런 거야’라고 말해주고 싶을 때가 많아요. 자신이 어떤 패를 잡았는데 알고 봤더니 그 패가 ‘꽝’인 거예요. ‘꽝’이라도 참아야지요. ‘이거 꽝이다’라고 까발려서 판을 깨뜨리는 건, 원래의 실패 위에 또 하나의 실패를 얹는 결과밖에 안 됩니다.”

    ▼ 손왕석 판사는

    ●1956년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1985년 제27회 사법시험 합격

    ●대전지법, 인천지법, 서울고법 판사

    ●현재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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