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9월호

새터민 교육의 빛과 그림자

사기 피해는 남한 사회 신고식? 자본주의 실용경제 교육 절대 부족

  • 김은지 신동아 인턴기자(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4학년) smileeunji@gmail.com

    입력2008-09-03 18:2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1새터민 홍은희(가명)씨는 남한에 입국하기 전, 몇 해 동안 중국에서 지냈다. 남한에 들어온 뒤로는 중국으로 자주 국제전화를 걸었다. 비싼 국제전화 요금에 고민이 많던 홍씨는 시내요금으로 국제전화를 쓸 수 있는 휴대전화가 있다는 주변 사람의 말에 전화기를 구입했다. 휴대전화 가격이 130만원이나 했지만 자주 이용하면 손해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한 달 뒤 청구된 요금은 무려 80만원. 홍씨는 뒤늦게 사기당했음을 깨닫고 휴대전화를 판 사람에게 해지를 요구했다. 그러나 오히려 요금을 빨리 내라는 독촉만 받았다. 심지어 요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차압하겠다는 협박까지 당했다.

    #22007년 6월 하나원 교육을 막 수료한 새터민 김철수(가명)씨는 정착금을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을 찾았다. 북한은 개인을 상대로 예금업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남측의 은행 시스템이 낯설었다. 그는 하나원 시절부터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이영희(가명)씨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이씨의 소개로 만난 금융 투자자는 ‘원금 500만원을 내면 월 12% 이자로 다달이 60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씨는 그 말을 믿고 투자를 결심했다. 한 달 뒤 김씨의 통장에 60만원이 입금됐다. 그러나 3개월째부터 이자가 들어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전화를 했다. 없는 번호라는 자동응답 소리가 나왔다. 찾아간 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렇게 김씨는 투자금 500만원을 떼였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장준오 박사와 청주대 사회학과 이정환 교수가 2007년에 낸 ‘북한 이탈주민의 범죄피해 실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새터민 4명에 1명 꼴로 ‘사기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21.5%)고 답했다. 남한 사람의 사기 피해율이 0.5%인 것에 비하면 40배 이상 높은 수치다. 이 때문에 새터민 사이에선 “사기는 남한 사회 신고식”이란 말이 돌 정도라고 한다.

    새터민 4명에 1명은 사기 피해자

    사기를 당한 새터민은 대부분 자본주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아 피해를 본 경우다. 이들의 부족한 경제지식을 악용해 접근하는 남측 사람도 있고, 먼저 남한에 정착해 살면서 사기를 당했던 새터민이 훗날 다른 새터민을 속이는 사례도 있다. 금액은 몇십만원대부터 천만원대까지 천차만별이다.



    “우리가 듣기에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인데도, 남한 자본주의 경제에 익숙하지 않고 또 수입도 적다 보니 그런 말에 솔깃하는 새터민이 많아요.”

    새터민 정착 지원 활동을 하는 NGO ‘새롭고 하나된 조국을 위하여(이하 새조위)’의 신미녀 부회장의 말이다.

    그나마 중국에서 몇 년씩 살다가 남한에 온 경우는 비교적 쉽게 남한 사회에 적응한다고 한다. 중국 사회에서 돈이 돌아가는 원리를 어느 정도 익힌 덕분이다. 그러나 최근엔 탈북한 지 한 달도 안 돼 곧바로 남한으로 오는 사례가 많아져 남한사회 적응기간이 길어지고, 시행착오도 더 많이 겪는다고 한다. 세대별로도 적응 속도에 차이가 크다.

    “북한은 공동생산 공동분배로 유지되는 체제입니다. 북한에서 미국 경제를 기본으로 한 자본주의 경제는 실패했다고 배웠어요. 그러다 보니 처음 남한에 왔을 때 당황했죠. 모든 게 개인 위주로 돌아가는 게 너무 낯설었고요. 그래도 나이가 적을수록 이곳 생활에 빨리 적응하는 편입니다.”

    대학원에 다니는 새터민 주영호(가명·35)씨는 “40~50대에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북한에서 형성된 관념이 뿌리깊다. 이런 사람들에게 무작정 빨리 변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했다. 중국에서 6년을 보낸 후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지 4년째인 한성주(가명·29)씨는 “적응이라기보다는 익숙해진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 같다”면서 “한국 사람도 처음 미국에 가면 혼란을 겪듯이 북에서 온 사람도 비슷하다. 스스로 체득해가고 익숙해지는 건데 자꾸 주변에서 빨리 적응하라고 압박을 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했다.

    통일부 통계에 따르면 2008년 5월 기준으로 남한 사회에 정착한 새터민은 1만3700여 명. 갈수록 새터민은 늘지만, 그들에 대한 지원과 교육은 제자리걸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새터민을 위한 경제교육이 절실하지만 아직 제반 여건이 미비한 형편이다.

    새터민 정착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기관인 하나원에서는 총수업 120시간 중 경제교육에 6시간을 배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올해부터는 수강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경제원론적인 수업보다는 실무적인 내용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보이스 피싱(전화사기)과 같은 신종 사기방지 수업이 그런 예다. 이밖에 소수 시민단체와 교회를 중심으로 몇 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지만 이마저 경제교육이 중심인 경우는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일회성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려대 북한학과 박현선 교수는 “앞으로 국내에 정착하는 새터민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체계적인 교육과 지원이 없다면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수강생 절대 부족

    새터민 교육의 빛과 그림자

    경기 안성에 있는 탈북자 지원시설 하나원 전경.

    현재 서너 개 단체가 새터민을 대상으로 경제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NGO 새조위는 얼마 전 새터민 노인을 위한 ‘자본주의 경제 배우기’와 전체 새터민을 대상으로 한 ‘합리적 소비생활’이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열었다. 성신여대에서는 ‘성신자유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시민단체 굿피플도 ‘자유시민학교’를 열고 있다. 이들은 특정 시민단체나 종교와 관련돼 있다. 성신여대 프로그램의 강사는 안병직 뉴라이트재단 이사장,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등 뉴라이트 계열이 많다. 자유시민학교를 주관하는 NGO 굿피플은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후원한다.

    성신자유프로그램은 지금까지 3기 수료생을 냈다. 10차례 걸친 강의에서 경제관련 수업은 3개. 1기 수료생인 한 학생은 “수업이 원론적인 내용이라 좀 아쉬웠다. 좀 더 생활에 밀착한 경제 이야기를 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평했다. 1기 보조교사로 참가했던 대학생 임유선(23·성신여대)씨는 “관심 있어 오는 분들이라 대부분 강의를 진지하게 듣는다”라고 했다.

    자유시민대학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6년간 약 31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현재 교육 중인 8기에는 60명이 참가하고 있다. 취업교육, 새터민 출신 창업자 강의 등 실질적인 경제교육이 커리큘럼에 포함돼 있다.

    윤국 간사는 “취업반, 창업반으로 나눠 8개월 교육 후 사회 진출을 돕는 것이 목표”라고 소개했다. 자유시민대학은 모든 수강생에게 장학금 명목으로 매월 25만원을 준다. 윤 간사는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이들을 마냥 붙잡고 수업만 할 수 없기 때문에 마련한 제도”라고 덧붙였다. 우수 학생에게는 창업 지원금도 제공한다.

    이밖에도 새터민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프로그램이 몇 개 더 있지만, 대부분 일회성에 그치고 있다. 교육 대상인 새터민을 모으기가 쉽지 않은 탓도 있다.

    새터민 교육의 빛과 그림자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정착 지원 프로그램이 대부분 일회성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해 부산 해운대경찰서가 개최한 새터민을 위한 추석절 위로행사.

    전국투자자교육협의회는 2008년 5월 새터민을 위한 경제 강의를 개최했다. 금융 소외자에게 제대로 된 금융교육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서울 공릉 종합사회복지관과 협력해 20명 정도에게 두 차례 교육했는데, 현재는 중단된 상태다. 협의회 교육팀 유병석 과장은 “수업을 더 늘리고 싶어도 오려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경영교육전문기업 휴넷은 통일부 후원을 받아 2006년 ‘북한이탈주민 MBA베이직’ 과정을 운영했다. 2기까지 운영하고 지금은 중단한 상태다. 1기 교육에 참석한 30명의 학생 가운데 10명이 수료했고, 대학생만 대상으로 한 2기 과정에는 지원자가 5명에 불과했다. 휴넷 담당자는 “당분간 새터민 대상 수업은 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2005년에는 도이치방크와 사회연대은행이‘탈북자 지원사업에 관한 협약’을 맺은 바 있다. 도이치방크가 새터민 정착지원을 위해 5만유로를 사회연대은행에 기탁하기로 한 것. 당시 도이치방크는 심사에 합격한 새터민에게 2000만원의 창업지원금과 컨설팅을 해주기로 했다.

    “돈이 바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초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사회연대은행 홍보팀의 허미영씨는 “창업지원을 해줄 새터민을 찾지 못했다. 지원보다 교육이 먼저라는 내부 결론에 따라 지원 방향을 바꿨다”고 했다. 2006년 새터민 지원 사업을 하고 있는 NGO 굿피플에 새터민 학교 수업 지원으로 4300만원을 기탁했다. 그나마도 1회에 그쳤다.

    “돈이 바쁘다(급하다). 북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도 보내야 하고, 중국에 남아 있는 아들에게도 보내야 하니까. 브로커에게 갚아야 할 돈도 있다.”

    연세대 새터민 돕기 동아리 사이프(SIFE)

    연세대 동아리 사이프(SIFE)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새터민을 돕기 위해 조직된 모임이다. 회원은 2005년부터 새터민을 대상으로 시장경제 적응교육을 해왔다.

    현재 12명이 매주 금요일 서울 양천구에 있는 한빛종합사회복지관에서 성인 새터민을 대상으로 수업하고 있다. 경제원론에서 인터넷 쇼핑, 펀드 투자까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수업 커리큘럼은 탈북한 지 10년이 넘는 새터민의 조언을 받아 구성한다.

    수강생은 대부분 남한 사회에 갓 정착한 사람들. 2006년부터 교사로 활동해온 조일란(22)씨는 “30~40대가 많지만 가족 전체가 와서 수업을 듣는 경우도 있다”라고 했다. 한 번 강의 때마다 16명가량이 수업을 받으러 온단다.

    나름대로 성과도 크다. 시장경제에 관한 질문지 정답률이 수업 시작 전에 비해 끝날 때에는 두 배가 넘는다고 한다. 이영준(24)씨는 “한 40대 아저씨가 ‘금융사기 당할 뻔한 걸 선생님 덕분에 피해갈 수 있었다’라고 말했을 때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모임은 지난 4년간의 노하우를 담아 휴대전화 사용 매뉴얼을 책자로 만들기도 했다. 새터민 대부분이 남한에 정착하자마자 휴대전화를 갖지만, 사용법을 제대로 몰라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모임이 만든 책자는 현재 하나원 교재로도 사용되고 있다.


    취재 중 만난 한 새터민의 하소연이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교육을 받고 있을 시간에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고 한다.

    새조위 부회장 신미녀씨는 “아직은 새터민은 교육하려면 모셔 와야 할 분이다. 생활전선에서 바쁘게 뛰고 있는 새터민을 교육 명목으로 붙들기가 힘들다. 취업 교육이야 더러 받으러 오시지만, 경제교육 필요성은 못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재정문제도 있다. 한번 교육을 하기 위해선 장소를 빌리고 강사를 섭외하는 데 최소 100만원이 든다. 단기적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는 새터민 경제교육 사업을 후원하는 곳을 찾기 힘든 실정이다.

    이화여대 북한학과 최대석 교수는 “새터민 사업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다. 무엇보다 신뢰가 기반이 되어야 지속될 수 있다”며 “곧바로 교육 효과가 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사업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