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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脫)신화, 탈(脫)정치화로 본 이응로와 윤이상

“ 常春의 정열과 모험정신 가득했던 장인(匠人)의 삶”

  •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동아일보 객원 대기자 chchoe@hanmail.net

탈(脫)신화, 탈(脫)정치화로 본 이응로와 윤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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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요, 저 서울에서 선생님의 도독전(渡獨展)도 구경한 걸요.”

1958년쯤으로 기억된다. 당시 주한서독공사관의 헤르츠 공사는 미술애호가로 소문나 있었다. 그 헤르츠 박사의 주선으로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초청 개인전을 하기 위해 이 화백이 출국하기 전 서울 미도파백화점 5층 화랑에선 ‘고암 도독 기념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이 전시회는 우리들 일부 젊은이에겐 두 가지 화제를 뿌리고 있어 인기였다. 첫째는 ‘동양화의 경계를 벗어난 동양화’란 점에서. 둘째는 쩨쩨하게 그림을 팔진 않겠다는 ‘작품 비매(非賣)전시회’란 점에서였다.

그처럼 한국에선 유명 인사인 고암도 고국을 떠난 뒤 유럽에서는 무명 인사로서 외로운 세월을 살아야 했다. 1958년 독일에서 약속된 전시회가 모두 끝난 뒤 고암은 모처럼 유럽에 어렵게 건너왔으니 그래도 귀국 전에 ‘미술의 서울’ 파리만은 들러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파리를 찾아온 고암은 수많은 화랑에 들러 세계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고 또한 수많은 화상에게 자기 작품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건 헛수고였다. 그러다 한 화상이 고암의 작품을 보고 “당신은 유럽에서 성공할 사람이오”라고 말해주더라는 것이다.



간판쟁이

고암은 그 한마디에 주박(呪縛)된 듯 귀국을 포기하고 그냥 무작정 파리에 주저앉아버렸다. 아무런 호구지책도 없이, 아무 기댈 사람이라곤 없이. 언제가 될지 아무도 모르는 ‘유럽에서 성공할’ 날만을 기대하며.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는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무시당하는 무명화가의 세월이 있었다. 따라서 그 무렵엔 그의 이름을 알아주는 누구를 만나도 반갑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암은 행선지를 포기하고 금방 나와 말벗이 되었다.

“그럼 고향은 어디지?”

“전주예요.”

“아, 그려, 나도 전주에서 산 일이 있어 전주를 잘 알지. 댁은?”

“풍남동이에요.”

그리고 두어 마디 주고받자 이번에는 고암이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알지, 알지, 내가 자네 집에도 가끔 들렀어. 자네 집 사랑채에서 한묵회(翰墨會)가 열릴 때 나는 아직 한참 젊은 나이였지만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가끔 불러주셨지.”

“전주에서 뭘 하셨는데요?”

“돈 벌었지. 일제시대에 전북 도립극장의 영화 간판 그렸어.”

이것은 놀라운 소식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한국 화단의 중진이 젊은 시절에 내 고향에서 영화관의 광고간판을 그린 ‘페인트장이’였다니.

“암, 내 20대엔 뼁끼쟁이(페인트장이)를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서른이 넘어 비로소 일본에 가서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 桂月) 선생을 사사(師事)했어.”

탈(脫)신화, 탈(脫)정치화로 본 이응로와 윤이상

말년의 이응로 화백.

고암이 이처럼 솔직하고 당당하게 스스로 밝힌 (영화관 간판을 그린) 페인트장이의 전력은, 내 생각엔 고암의 그 후의 인생과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본질적인 형성요인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지금껏 그를 다룬 모든 평전이나 전기에는 이 사실이 언급된 일 없이 무시되고 있다.

20세 전후해서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에게서 동양화를 배운 고암은 30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혼고(本鄕) 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 기법을 배웠다. 그런데 그에 앞서 이미 20대의 거의 전 기간에 수묵화 붓만이 아니라 페인트 붓을 들고 간판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전력은 장차 이응로의 미술이 동서양화의 경계를 크로스오버하며 모든 미술기법과 수단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기초체험이 되지 않았나 나는 생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간판쟁이’로서 지방 영화관에서 수년 동안 일했다는 고암의 전력은 직인(職人·아티잔) 과정을 거치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예인(藝人·아티스트)인 척 허세를 부리는 (유럽은 그만두고 중국, 일본의 화단에 견줘도 기초가 부실한 채 지나치게 설익은 예인들이 판을 치는) 한국 미술계의 현실을 볼 때도 그 사실을 무시하거나 숨길 일이 아니라 오히려 크게 밝혀서 널리 알려야 할 고암의 전기 데이터라 나는 믿고 있다.

고향 집 사랑방의 ‘한묵회’ 얘기와 고향 영화관의 간판쟁이 얘기는 고암과 나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초면의 두 사람인데도 금방 친숙한 사이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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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동아일보 객원 대기자 chcho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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